'맑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7/01/16 Karl Marx & Frederick Engels의 저작 및 자료 (1)
  2. 2006/08/30 즐거운 월요일 (6)
  3. 2006/08/30 추상이란 무능력을 의미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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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sm and the Augsburg



Marx's Letters to Ruge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introduction)



On the Jewish Question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Critical Notes on the Article: "The king of Prussia and Social Reform" by a Prussian



Theses on Feuerbach


Posted by huun

다들 아는 얘기지만 한번 더 상기하는 의미에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맑스(Karl Marx)가 말했던 노동 소외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그것은 노동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즐겁게 여기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고역으로 느낀다면,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이 정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굶어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길,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 체제가 여차저차 하여 사람들로부터 모든 생산수단(토지, 기계, 건물, 원료 등)을 빼앗고,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의 구호들 속에 항상 등장하는 '빼앗긴 노동', '강요된 노동', '소외된 노동'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맑스가 쓴 <자본>(Das Kapital)이라는 책에 그 좋은 예가 하나 있다. 19세기에 한 영국 자본가가 공장을 세우기 위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이런 저런 생산수단을 싣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스완강 지역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고 나니 아무도 일하러 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그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땅을 차지해서 자신만의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장이 생산을 하려면 즉 자본주의가 가동되려면, 저 사람들로부터 땅이나 일체의 생산수단을 빼앗아, 그들이 공장에 들어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한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중세때부터 수세기에 걸쳐 토지를 합병하고, 농지를 전환하고, 사유화하는 등의 운동이 있었는데, 이를 인클로져(Enclosure movement)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쫓겨나 갈곳이 없었던 수많은 농민들이 대도시로 몰려들어 공장노동자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산업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6, 70년대의 한국도 이러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본의 품 안에서 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이미 무엇인가를 빼앗긴 결과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인가?


강요된 일은 우리의 삶을 여러가지 면에서 비참하게 만든다. 그 모든 비참함의 목록을 전부 나열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쉽게 체감하는 비참함을 단 한가지만 말한다면, 우리는 일하지 않을때 가장 행복해진다는 점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 평생 일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가장 기다려지는 토요일 오후! 지금은 좀 나아져서 금요일 오후! (엄밀히 말해 나아진 것도 아니다. 휴일을 잘 보내려면 돈이 필요하다) 점점 배가 아파오는 일요일 저녁! 월요병! 실제로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파오는 증후군이 있을 정도이다. 일 자체에서 오는 고역도 있지만, 이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쾌함도 역시 우리의 배를 아파오게 하는 요인이다. 그들은 동료이기 보다는 잠재적 적(敵)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노동과 관련하여 겪고 있는 이 모든 불쾌함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월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그 현장들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는 불쾌함의 원인이 적응을 못하는 자신의 성격탓이라거나, 사회화가 덜 된 탓이라거나, 등등의 이름모를 죄의식을 가지며, "인내가 부족해!"라고 자위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흔히 인간관계가 좋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잘 참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에서는 노동이란 낙원에서 추방당한 벌, 즉 인간 자신의 죄값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삶 자체는 노동의 과정이고, 노동이란 으례 고역이며, 참아야 할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힘든 고역을 참고 견뎌 내었다. 그런데 단 하루 좀 편하게 있어볼까 했더니, 별안간 '우리의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교회에 나가 기도를 드리란다. 인생 자체가 무슨 극기(克己) 훈련장 같다.

맑스는 인간의 본질을 노동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이며,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의미했던 노동이란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이 말했던, 또 대부분의 우리가 배워왔던 의미에서의 노동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노동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면서 삶의 충만을 경험하고, 일 그 자체가 주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지, 더 많은 임금과 더 많은 댓가를 받음으로써 얻게되는 승리감 따위로 유지되는 그런 저질적 노동이 아니었다. 노동의 의미가 다른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댓가를 바라는 일! 그리하여 지겹고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눈치보며 하는 일! 잔머리를 굴리는 일! 그 자체 경쟁이고 싸우는 일! . . . 이것이 우리를 노예 상태로 만드는 일이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속박하는 쇠사슬이다. 우리가 풀어헤치고 벗어나야 할 것은 궁핍이 아니다. 바로 쇠사슬 그 자체로서의 노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금투쟁은 근본적이지 못하다. 심지어 그것은 쇠사슬에 흉측한 흠집들만을 냄으로써, 그에 묶인 우리의 상처를 더 아프게 할 수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월급이 아니라 바로 즐거운 월요일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 아닐까? 예술가들이 밥을 굶으며 궁핍에 허덕이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맛을 본 것이다.


노동을 강요한 것은 삶 자체가 아니다. 여차저차 하여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체계, 쇠사슬로 발목을 묶었던 고대나, 아버지의 이름 아래 말씀의 무게로 정신을 내리 눌렀던 중세의 서구처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어떤 규칙들이 거꾸로 우리의 노동을, 나아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한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베르그송은 생명의 미시적 운동이 전체 진화과정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일 수 있는가를 한 가지 예를 통해 이론적으로 논증하였다. 물론 그는 실제의 운동이 양적으로 추상화됨으로써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아킬레스는 실제로 어떻게 거북이를 추월할 수가 있는가? 사물의 운동을 공간화해서 이해하는 수학적 방식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운동을 직선 위의 무수한 점들의 통과와 이행으로 이해한다면(우리는 실제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운동하는 사물은 직선 위의 무한수의 점들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실제적인 이동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쏜 화살은 과녁에 도달 할 수 없으며,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와는 반대가 아닌가? 우리는 실제로 과녁에 도달하는 화살을 본 바가 있으며,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완전한 이행 또한 경험한 바가 있으며, 거북을 추월하는 아킬레스를 보지 않는가? 이론과 경험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을 그리고 나아가 사유의 양(量)적인 메커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했던 질문이다. 실제의 경험에 대해 이론적 한계에 직면할 때, 필요해지는 것은 그 경험을 설명해줄 하나의 연역이다. 이 부분에서 베르그송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존재의 생성(진화)과 지속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운동에는 구별되어야 할 두 수준이 내재되어 있다. 한편에는 양적으로 분할 할 수 없는 운동 그 자체(운동성)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이 있다. 운동성이란 순수한 질 혹은 강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측정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궤적)을 운동 그 자체와 혼동한다. 여기에 바로 엘레아 학파의 오류가 있다. 그들은 운동하는 아킬레스로부터 질적 운동성을 제거하고 아킬레스와 거북이 지나간 궤적을 운동 자체와 혼동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의 서로 다른 질적 운동을 동질적인 공간에서의 동질적 운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운동 중에 있는 물체를 상상적으로 정지(imaginary stop)시켜놓고 보면, 그 물체가 지나간 공간(거리)를 운동과 동일한 외연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킬레스의 운동은 동질적인 공간 속에서 앞서가고 있는 거북의 운동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한 점과 다른 점의 거리를 균등 분할하여 측정할 수 있듯이, 운동 역시 그것이 지나간 좌표의 점들의 이행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엘레아 학파] 아킬레스 전체의 운동을 아킬레스의 운동이 아니라 거북의 운동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거북을 쫓고 있는 아킬레스가 아니라, 동일한 종류의 발걸음으로 동시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두 마리의 거북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Henri Bergson.
Time and Free Will. Eng trans by F. L. Pogson. New York, 1921. p. 113)


실제의 운동은 좌표 위에 결정되어 있는 수학적 의미의 점과는 다르다. 하나의 순간으로 즉 움직이지 않는 점으로 파악되는 운동은 우리의 지성이 재구성한 결과이지, 단숨에 일어나는 실제의 운동은 아니다. 아킬레스를 추상적 존재로 파악할 때, 즉 부동하는 점들을 소극적으로 통과하고 있는 수학적 존재로 이해할 때, 우리는 아킬레스를 거북과 동일한 방식의 걸음을 반복적으로 내딛고 있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두 마리의 거북이란 그런 의미이다. 존재들의 운동이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은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질이 된다. 그러나 실질적 존재로서의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방식의 적극적인 노력, 직선 위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노력을 취하지 않겠는가? 이 노력이란 거북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 자신만의 독자적인 발걸음으로 구성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들은 동일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수준의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 다른 운동을 취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아킬레스와 거북의 한 발 한 발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의 점들간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운동이 공간의 이동으로 환원되고 나면, 실제적인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제의 운동이란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이행과 생성일 것이다. 그것은 운동체만의 이행과 생성일 뿐만 아니라, 운동체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 전체의 이행과 생성이다. 그래서 그 한 발은 아킬레스와 거북 사이에 놓인 장(field), 즉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포함하는 그들간의 관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그 변화란 그들의 의식을 넘어서 있다. 나아가 이것은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이는 공간적 운동에만 관련되지 않는다. 유년기에서 청년기 혹은 성년기로의 성장과 같은 존재의 질적 변화에도 동일한 공식을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운동에는 운동하는 사물이 연속하여 지나온 각각의 위치 이상의 것이 있으며, 하나의 생성에는 순간 순간 통과하였던 (정태적인)형상보다 더 한 이상의 것이 있으며, 형태의 진화 또한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잇따르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 Eng trans by Arthur Mitchell (New York: Random House, 1944). p. 343.)


위의 논거를 약간 변형시켜 보면, 우리는 베르그송과 맑스의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은 우리의 무능력을 예증한다. 추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심지어는 우리 앞에 놓인 대상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우선 추상은 존재를 정지된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고립시켜 놓으면서 출발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지된 존재의 실제적인 이행과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그 존재 외부의 원인으로서의 초월적 실체를 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부정(negativity)으로 결정하는 추상은 바로 노예상태를 전제로 한다(맑스는 이를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두 원자론의 차이로 설명한 바가 있다. 참고로, 칸트나 버크(Edmund Burke) 그리고 료따르나 들뢰즈가 논의했던 숭고미와 추상충동에 대한 문제는 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존재란 바로 (실제로 운동하는 아킬레스처럼)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의해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쓰는 존재이다. 인간의 노예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이미 맑스가 역사적 수준에서 정식화했던 이 내재성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더 근본적인 수준 즉 생명의 진화의 문제로 파고들었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