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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2/04 예술과 도착 (10): 계약과 법
  2. 2006/08/30 흰머리와 쾌감 (7)

고통을 쾌락으로 경험하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흔히 도착과 변태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지각이나 감각의 물질적 변이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쾌락이나 고통을 운용하는 주체의 메커니즘을 물질적 내용으로 고정시켜서 이해하게 된다. 지각과 감각의 체계에 어떠한 구체적인 내용의 심리적 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결국 도착과 변태성을 알 수 없는 신경증적 물질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파악하게 된다. 과학은 문화적 토대를 통해 발전하기도 하며 동시에 문화는 과학적 실험과 증명을 통해 자신의 근거를 구축한다. 하나의 이질적인 물질의 개입으로 부지불식간에 체계가 변형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어 도착은 이제 문화적 이질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모는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도착과 망상을 변태적 상궤이탈의 영역으로서 신비화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도착을 다루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구체적이고 확고한 내용을 띤 물질이 내면화의 형식 속에서 전이되고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내용들은 모두가 형식적 요소들을 채워 넣기 위해 필요한 제재들이다. 그래서 쾌락과 고통의 콤플렉스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경험하는 내용들을 이루고 있으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미지들은 도착의 주체들이 환상을 갖고 이상화하거나 파괴하는 내용들을 이룬다. 그러나 이것은 내용들을 채우고 담아 내는 메커니즘 즉 형식적 요소와 연결될 때만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이를 통해서만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물질은 언제나 형식에 담겨져 있으며 모양새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도착에서 쾌락과 고통의 콤플렉스나 환상의 내용들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특정한 형식을 요구한다. 콤플렉스라는 경험의 내용을 이루는 물질적 설명방식은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관계를 새도-매저키즘적 실체로 규정할 위험이 있으며, 이것은 이 둘에 대한 혼란을 초래한다. 죄의식이나 속죄라는 경험적 사실의 개념을 토대로 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정의 역시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미리 결정된 문화적 소통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 속죄나 죄의식 그리고 쾌락-고통의 연결공식은 기다림의 형식(매저키즘)이나 투사의 형식(새디즘)등과 같은 특수한 형식적 조건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매저키즘이나 새디즘이 도덕적이거나 물질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은 이 변태성을 단순히 병인학적 관점에서 혹은 질병의 실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변태성은 예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용들의 문제는 언제나 그것이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방식의 관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도착은 형식적이다: <변태성 과정의 심층을 관류하는 형식적 패턴은 허구적 예술의 형식적 요소로 드러난다. 74> 매저키즘적 고통이 쾌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물질적 내용이 엉뚱한 방식으로 경험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매저키즘적 시간 속에서 고통이 쾌락으로 경험되고 쾌락이 고통으로 경험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통이 쾌락으로 전이되고 쾌락이 고통으로 전이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에게는 <고통과 처벌 혹은 모욕이 만족을 얻기 위한 필수적 전제조건이기 71> 때문이다.

매저키스트는 시간을 기다림의 형식으로 경험한다. 기다림은 매저키즘적 시간의 본질이다. (1) 항상 늦게 오는 기다림의 대상. (2) 기다림(의 대상)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기대. 이 두 가지가 바로 매저키즘적 시간의 두 형식이다. 그러므로 또한 매저키스트의 기다림은 언제나 불안과 서스펜스를 내포하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 도래할 무엇인가에 대한 기다림. 매저키즘의 시간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궁극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기다림에서 나오는 긴장과 서스펜스인 것이다. 매저키즘적 도착에서 모욕이나 속죄, 처벌, 죄의식 등과 고통의 메커니즘 속에서 쾌락을 경험하는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경험하는 기다림의 형식을 이해해야 한다: <매저키즘은 기다림의 상태이다; 매저키스트는 기다림을 순수형식 속에서 경험한다. 71>

언제나 늦게 오게 될 기다림의 대상과 이 대상을 가속화할 어떤 것에 대한 기대라는 두 가지의 순수형식의 흐름 속에서 매저키스트는 고통과 쾌락을 결합시키고 경험한다. 순수형식으로서 기다림은 두 방향으로 흐른다. (1) 본질적으로 늦게 오는 쾌락. (2) 쾌락을 가능하게 하는 혹은 가속화할 고통. 쾌락의 기다림과 기대되는 고통. 매저키스트는 늦게 오게 될 쾌락을 기다리며, 쾌락의 조건인 고통을 기대한다. 그래서 그는 고통의 기대 속에서 쾌락을 연기하고 지연시키는 것이다: <매저키스트는 쾌락을 늦게 오는 어떤 것으로 기다린다. 그리고 고통을 조건으로서, 즉 결국에는 쾌락의 도래를 확실하게 해줄(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조건으로서 기대하고 예감한다. … 매저키스트의 불안은 따라서 쾌감의 무한한 기다림과 고통의 강렬한 기대로 나뉘어 진다. 71>

순수형식으로서 기다림의 시간을 매저키스트는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하며 어떠한 효과를 실현하는가? 라이크(Reik)는 매저키즘의 형식적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열거한다. (1) 형식으로서 환타지의 중요성. 환타지는 매저키즘적 이상화 과정의 독특한 형식이다. 그리고 환타지의 내용에는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 자체 목적을 위해 경험되는 환타지, 꿈으로 이루어지고 드라마화되고 의례화된 장면 … 은 매저키즘의 필수적 요소이다. 75> (2) 긴장의 요인. 매저키즘에서 긴장과 서스펜스는 한없는 기다림 속에서 나타난다. 지연된 쾌감에 대한 한없는 기다림은 불안의 본질로 작용한다. 쾌감의 분출과 그것의 금지의 두 항 사이에서 매저키스트가 경험하는 것은 진공의 서스펜스이다. (3) 지속적인 설득. 마조흐의 인물들은 설득과 망설임의 대화를 통해 대립적인 관계를 만들어 간다. 설득으로써 가해자 여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매저키스트는 그 자체로 굴욕과 고통을 인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속적인 설득의 과정에는 비굴함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4) 도발적 공포. 기다림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불안과 공포는 강렬한 처벌을 통해 해소된다. 매저키스트는 처벌을 적극적으로 요구함으로써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려 한다. <왜냐하면 처벌은 불안을 해소하고 그로 하여금 금지된 쾌락을 허락해 주기 때문이다. 75>

매저키즘에서 또 하나의 특징을 볼 수 있다. (5) 계약. 매저키즘에서 계약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고통과 굴욕이 한없이(죽음으로) 치닫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기능하기도 하며(법의 제한 경제적 본성), 매저키즘적 주체의 환상이 타자와의 상호 이해 속에서 인증된 것임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며(법의 설득적이고 교육적인 요소), 환상의 내용으로서 이상적 어머니에게 모든 법적 상징적 권위를 부과하는 절차로서 이해되기도 한다(사법적 요소). 계약의 기능들은 모두 마조흐의 사랑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그러나 계약의 형태들은 점점 잔혹해 지고 더욱 더 인물들로부터 행위와 권리를 박탈하는 기제들로 나타난다<277∼279참조>. <이것은 일단 정해지고 나면 둘 중 어느 하나에게는(여기서는 법의 발기자) 점점 제한적인 성향을 띠는 법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76>

계약을 사회적 형태로 확대하여 재해석함으로써 마조흐는 법적인 사유를 통해 이데아를 실현한다. 사드의 자연주의와는 반대로 마조흐는 문화주의를 표방한다. 이 문화주의 내에 예술의 관점과 법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1) 미적 측면: 예술과 서스펜스의 모델. (2) 사법적 측면: 계약과 복종의 모델 76> 마조흐에게 모든 자연적 질서와 움직임들은 하나의 장면 속으로 흡수되어야 하며 일정한 계약과 법의 형태로 구조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드에게 이러한 구조는 절대적 망상을 실현하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원초적 관능성과 영속적 움직임의 재현은 계약이나 예술의 형식으로 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약과 법은 그 당사자들에게만 적용되며, 일정한 기간과 제한적 기능을 가짐으로써만 가치가 있다. 또한 거기에는 설득과 교육이라는 구차한 절차를 통해서만 작동한다. 사드는 법의 제한적 기능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법을 초월하는 영속적인 효과와 움직임의 기제들을 원하는 것이며, 이것은 법이 아닌 제도를 통해 육화 한다고 믿는다.

사드는 제도로써 사유한다. 제도는 시간을 넘어서려는 경향을 보이며, 특정한 출발과 끝의 지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체 속에 하나의 부분을 이루면서 언제나 문화의 영역을 벗어나려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제도의 출현과 소멸은 매우 오랜 시간을 요구하며, 따라서 법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법을 무기력한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양도되기 힘든 어떤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메카니즘의 재현은 영속적으로 효력을 띠는 제도를 통해 구성된다. 자연적 질서에 매번 개입하는 법의 모델과 다르게 언제나 자연적 질서 안에 내재하는 제도의 성향을 사드는 실현의 형식적 메카니즘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권리와 의무의 체계를 행위, 권위, 권력 등과 같은 역동적 모델로 대체한다. 77> 사드가 염원하고 있는 공화국은 법으로 지배되는 세계가 아니다. 그 세계는 제도로 소유된 세계이다.

법과 제도는 서로 상반적인 관계를 갖는데, 이로써 마조흐와 사드의 서로 다른 정치적 특성을 띤다. 법은 행위를 고정시키고 도덕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순수한 제도는 법적으로 고정된 상태이기보다는 몸에 익숙해진 어떠한 행위들이며 이것은 법보다 역사가 깊다. 생쥬(Saint-Just)는 법과 제도의 상반적 특성을 역관계로 논의한다: <(1) 법이 제도를 능가; 법이 많고 제도가 적은 경우; 독재와 전제주의. (2) 제도가 법을 능가; 법이 적고 제도가 많은 경우; 공화주의 78>. 공화주의는 제도의 최대화를 통해 가능해 지는데, 제도의 최대화란 계약이나 법에 의해 안정된 상태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설정된 불안함의 상태이다. 공화주의적 체계 속에서 절대권력이 끊임없이 추구되어야 하는 불안함의 상태는 폭력과 부도덕함의 불안함과 닮아있다. 이러한 영속적인 불안함을 위해서는 공화주의를 유지하려는 노력으로부터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고정된 공화주의를 연속적으로 전복하는 다른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 것이다.

사드가 혁명 속에서 발견한 것은 그것이 계약이나 법으로 구성된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러한 요구의 아이러니를 발견한 셈이다. 사드의 정치적 사유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 가능하다: 도데체 어떻게 법과 계약을 통해 혁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법은 신비화되어 오히려 독재와 전제주의에 악용되지 않는가? 사드는 <물신, 중상모략, 절도, 매춘, 근친상간, 소돔적 타락, 심지어 살인 79>과 같은 악의 제도화로써 법이 탄생시키는 독재와 폭정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부도덕함의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법이 추구하는 도덕적인 상태와 고정된 안정의 상태를 부정하는 과정은 악의 제도화를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드는 순수 악 그 자체를 제도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더욱 나아가 그것이 필연적으로 이상적인 제도이며, 영속적인 효력을 발휘하며, 불멸의 움직임 속에 남아있는 제도의 전형임을 입증하려 한다.

마조흐는 계약과 예술의 형식으로 자연을 이해하며, 사드는 제도의 형식으로 자연을 이해한다: <(1)계약에 흐르는 특정한 충동은 법의 창조로 가는 경향이 있다. 법이 오히려 그 계약을 초과하고 법의 권위를 계약에 부여하는 성질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2) 제도에 상응하는 충동은 모든 법을 가치저하 시키며, 그 자체로 모든 것 위에서 군림하는 절대적 권력을 구성하려 한다. 77> 마조흐에게 현실적 자연은 거부된 대상이며, 따라서 그의 문화주의 안에는 현실적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사드에게 자연은 언제나 부정과 억압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사드의 망상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존재로 남아있다. 사드의 괴로움은 여기에 기인한다.

Posted by huun

잘 알고 지내는 선배 K씨가 어느 날 내게 와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있지! 내가 변태가 되어 가나 봐." 그의 표정은 불안과 걱정으로 싸여 있는 듯했다. 그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제의 심각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 그의 기질로 볼 때 변태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느 정도는 내성적이며, 그러나 또한 어느 정도는 쾌활하다. 그에게 단점이 있다면 예민하다는 점이다. 가끔은 사람들과 다투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파괴적 본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성생활이 변태적인 것이라고 예상할 일은 아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감흥이 오지 않을 때가 있어. 예를 들어 피곤할 때라든지, 다른 어떤 걱정이 생겨 거기에 몰두할 때면, 흥분도 안 되고, 그녀가 이리저리 내 몸을 자극 해도 별 감흥이 없을 때가 있어. 그럴 때는 좀 난처하지. 그녀의 애정과 호의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 . . 그래서 난 억지로라도 여러 가지 외설적인 생각들을 떠올려서 그녀에게 반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진 않아.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내의 흰머리를 보면 흥분이 돼! 아내의 흰머리를 처음 보았을 때는 별 감흥이 나질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흰머리가 하나 둘씩 많아지고 이제는 노력해서 찾지 않아도 꽤 잘 보이니까 흥분이 되는 거야. 여자의 흰머리를 보고 성적 흥분을 느끼는 건 나밖에는 없을 거야."

 

그의 설명을 들으니 자신이 변태가 되어 간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얼른 보아도 흰머리와 성적 쾌감은 이해할 수 없는 연결이었다. 물신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의 과거사를 들어봐도 흰머리와 섹스가 연결될 지점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무의식의 작용일까. 아니면 그는 일종의 물신 숭배자인가. 성도착이 이렇게 뒤늦은 인생에도 찾아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솟아오른다.

 

그는 결혼한 지 12년쯤 된 중년이다. 그리고 그의 결혼생활이 사실 관능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외설적인 대화들을 즐기지만, 그들이  모두 관능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는 없다. 그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외설을 즐겼으며, 심하지 않게 섹스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외모나 성격 등 여러 부분에서 관능적인 삶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무료했던 것은 아니다. 아내의 허물을 공공연히 떠벌리지도 않았으며, 일상에서 오는 심한 권태를 느껴본 기억도 없었다. 그가 아내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이라고는, 가끔 어린아이 같다는 정도였다. 심지어는 그 어린아이 같은 면이 귀여울 때도 있다고 부연한 적이 있었다. 결혼한 지 꽤 되었으니 성생활에 권태를 느낄 법도하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 일상적이지 않은 행동이나 생각들로 침실을 채우기도 한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생각이다. 그러나 변태가 되어가고 있는 문제는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지니고 있는 미모나 육체적 미감 그리고 그녀의 애정과 호의의 안락함 등이 주는 성적 흥분보다는, 엉뚱하게도 흰머리에서 오는 쾌감을 더 원하고 있는 것이다.

 

변태에 대해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병리학적 연구들과 구체적 증상의 사례들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성도착이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까닭은, 그것이 사회적 소통관계를 부정하고 파괴한다는데 있다. 수많은 변태적 성욕과 그 행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눈살을 찌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음증이나 노출증 혹은 매저키즘이나 새디즘과 같은 성도착의 유형들은 모두가 소통관계의 파괴와 부정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들은 다수가 내면화한 사회적 질서나 표현방식을(심지어는 섹스와 관련된 것조차도) 따분하게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이해하면서, 그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자신만의 특별한 이미지를 발명해 낸다. 예술가들이 주로 이러한 행위에 몰두하는데,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은유능력(A를 B로 연결하는 능력)도 일종의 변태적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의 조건을 은유능력이라고 했는데, 그의 주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천재는 변태성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사회적 질서로부터 변태성의 주체가 일탈하는 과정은 물신주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물신 숭배자는 환상(Fantasy)이라는 허구를 내면화하면서, 현실 원칙들을 거부하거나 그 효력을 정지시켜 버린다. 다시 말해 특별한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불쾌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곧바로 그 이미지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물신주의자들의 주된 메뉴는 스타킹이나 구두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행복했던 시절의 어머니와 동일한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혹은 자신이 사랑했던 어머니로 달려가 버리는 것이다. 새디즘은 가학을 받는 자와의 소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새디스트는 피해자에게 많은 말들과 반복적 논증을 진행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흉내나 가장에 불과하다. 폭력적 지배자에게 설득이나 소통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새디스트가 매질을 하는 대상으로부터 단절하려는 것은, 그 대상이 구질구질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아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 망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람의 노예 같은 면모를 혐오하고, 매질을 통해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다. 새디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을 우리나라 어머니들로부터 볼 수 있다. 만일 아이가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들어왔을 때, 그 어머니는 아이를 위로하거나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아이를 매질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왜 맞고 다녀!?" 내가 존경하는 바따이유(G. Bataille)라는 프랑스의 이론가는, 새디즘에는 피해자의 어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저 어머니의 어조와 유사한 언어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착의 형태에 대해 소통의 파괴나 부정 혹은 단절과 위반이라는 위험한 술어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들을 신비적으로 보거나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함 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도착자들은 어떤 경우든지 다른 많은 사람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며 정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아픔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안락 속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도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은 이러한 경험과 감각들을 다른 사람들과 유사하지 않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고 체험한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고통과 쾌감의 경험들은 그 자체의 물질적 요인(즉 신경물질이나 뇌하수체와 같은)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방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매저키즘이 고통을 통해 쾌감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을 쾌감 자체로 지각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을 보통 사람들과는 상이하게 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착은 생물학이나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그것도 예술적인 정신의 문제이다. 이들이 감각적 자극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운용하거나, 더욱 풍부한 삶의 경험을 스스로 요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적 소통을 위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쾌감을 타인에게 빼앗기거나 포기해야 하는 반면에(중세인들은 이 쾌감을 신에게 돌렸기 때문에, 니체는 이를 더 질병적이라고 말했다), 변태적 주체는 자신이 개발하거나 창출하고 있는 쾌감을 철저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소통의 거부는 쾌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쾌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사회적 일탈이 되는 것은, 사회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고자 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서 삶을 운용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신체를 바라보고 다루는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흰머리와 성도착의 관계에 대해서는 섣불리 용어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문제는 흰머리와 도착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흰머리와 쾌감간의 관계에 있다. 그는 왜 흰머리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나의 소견으로는 그가 위반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위반은 피상적으로 내면화된 금기나 강요들에 대한 일탈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사회는 연령이나 계급과 같은 여타 조건들에 의해 사랑의 형태를 규제해 왔다. 그래서 이를 어기는 형태의 사랑을 보게 된다면, 심한 경우에는 범죄의 모습을 띠고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계급을 초월하는 사랑은 언제나 문학적 스캔들의 테마가 되어 왔으며, 제도를 위반하는 불륜과 같은 사랑의 형태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들로 하여금 매우 격렬한 관능성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그는 흰머리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아내를 연상(年上)으로 망상하고 있는 것이다. 흰머리라는 부분적 대상을 통해 그의 아내는 단번에 연상의 여인으로 탈바꿈한다. 보다 존경스러운 상대를 원한다든지 등과 같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심리적 상태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말 할 수 없다. 또한 그가 변태인가 아닌가를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흰머리를 보면서 위반을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아내의 신체의 부분을 이용해서 자신을 통제해 왔던 제한된 사랑의 형태에 저항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면화된 제도와 이데올로기는 파괴되고 부인된다.

 

관능성은 파괴하고 거부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태어난다. 우리의 신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흐름은 어떠한 제도나 이데올로기로 봉해 버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비집고 나온다. 신체가 억제될 때 욕망은 위반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예를 들어, 꿈이나 잠꼬대나 술주정과 같이 일상적인 것도 포함하여). 이때 사랑은 괴이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소리를 내지 않으며 신체 내에 묵직하게 스며있는 욕망은, 현실 속에서 특정한 대상들과 조우하게 될 때(술이나 마약도 이에 해당된다),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와 기괴한 형태로 현실화한다. 이 괴이함이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면화된 소통을 파괴하게 될 때, 우리는 이를 행위 윤리적인 문제들과 혼동하면서, 변태라는 용어로 비하하여 부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은 대충 비슷하면 아무데나 용어를 붙여 쓰는 일들을 밥 먹듯이 한다. 그리고 이 잘못된 명명법이 일반화된 관념이 되면 곧 바로 집단이나 사회의 고압적 폭력으로 둔갑한다. 유럽과 미국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차이에 대한 무지는 언제나 차별을 낳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혼한 지 12년 아니 그 보다 더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을 욕망이, 이제 비로소 흰머리라는 숨 쉬지 않는 대상에 의해 깨어난다. 흰머리와 성적 쾌감간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능적 쾌감이란 유두와 성기와 입술과 항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각인 된 사회적 제도와 우리를 내면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부터도 출현한다.

 

 

p.s.

저항과 쾌감에 관한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러분도 그 이름을 자주 들어보았을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철학자는 매저키즘이 유머러스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 유머러스하다는 말일까? 우선,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때리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매질 자체의 의미를 무효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제발, 때려 주세요!"

"#$%^&*"

그러나 이 보다도 더 재밌는 사실이 있다. 매저키스트는 매질이라는 것을 나쁜 짓을 하고 나면 으례 따라 나오는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 . . . 그는 생각한다. 처벌을 먼저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되지 않을까? 들뢰즈는 매저키스트가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매질이 끝나면 맛보게 될 바로 그 나쁜 짓을 기다리기 때문에 쾌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매저키스트의 쾌감을 예비적 쾌감,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정의한다. 한 사악한 어린아이의 예를 통해 말해볼까? 선생님이 아이에게,

"너! 불량식품 사먹으면 때려줄거야!" 하고 경고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찾아와서 엉덩이를 까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먼저 때려주세요!"

" $%^&*()&* "

이 아이가 급진적인 이유는, 더 이상 억압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아이의 요구는 오히려 매질을 나쁜 짓과 쾌감을 허가해주는 절차로 만들고 있다. 아이는 그 억압을 완전히 거부해버리고, 자신의 쾌감으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흰머리를 보며 즐거워하는 K 선배처럼! 억압은 결코 승리할 수가 없다. 특히 즐기는 자에게는.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