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해진 믿음이라는 공포영화의 주제는 초자연적 존재를 등장시키는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귀신과 대면하고 그를 쫓아내고자 하는 과학적 믿음과는 다른 형태의 믿음도 있다. 그것은 현실적 질서 안에서의 다른 세계와 대면하는 믿음인데, 바로 인간의 현실을 미신의 세계가 아닌 범죄의 세계로부터, 더 정확히는 부당함의 세계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법적 믿음(혹은 소유의 믿음)이다. 미국 헐리웃 영화들의 지배적인 테마인 이 믿음은, 이제는 범죄자에 의해 반격을 받아 죽어 가는 경찰관들을 설정함으로써, 그 믿음의 무력함이 점점 극단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과학적 믿음의 무력함에서 나오는 공포와는 또 다른 형태의 공포일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가 나오는 『15 minutes』에서의 충격이란, 대중매체를 통해 시민의 우상이 되었던 경찰관이 바로 시민들이 바라보는 텔레비전 속에서 범죄자에 의해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장면일 것이다. 또 게리 올드만(Gary Oldman)이 출연하는 『Romeo is Bleeding』에서 가장 불쾌하면서도 기괴했던 장면은, 범죄 집단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한 경찰관이, 몇 가지 실수로 인해 오히려 그들에 의해 처벌을 받으면서, 애원과 함께 발가락이 잘리는 장면이었다(이것은 아마도 게리 올드만 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의 연기에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를 역겨움으로 전환시키는 면모가 있다). 이 외에도 더 많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5년 전만 해도 스릴러 영화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경찰관이 등장하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문제 해결에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되거나, 심지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더 불안해지기만 한다. 법적인 믿음의 무력함과 불신만을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이나 변호사와 같은 법적 존재는 이제 공포영화에서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헐리웃 영화 제작자들이 직면한 문제가 바로 이점일 것이다. 어떤 공포를 만들어내어야 할까? 이 질문은 우리가 가장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혹은 더 나아가 우리에게 믿음이 존재하는가?
아마도 공포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종교적 믿음의 시련이 될 것이다. 특히 십자가에 매달려 처벌을 받는 신의 아들, 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성직자의 시련과 같은 주제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에 있어 현대적 공포란 그 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시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문제, 즉 현대인들이 서서히 신의 죽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느꼈을 법한 무한한 공포 혹은 불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멜 깁슨(Mel Gibson)의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2004)은, 믿음을 불가능하게 하는 외부의 적이나 시련에 맞서는 투쟁과 그 의미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믿음의 사라짐 혹은 믿음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공포, 즉 믿음 내부의 투쟁으로부터 출발한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화에는 예수가 어떻게 시련을 극복 하는가 혹은 수난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왜 그는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와 같은 신학적 질문이 불필요해 보인다. 오로지 수난 그 자체, 시련의 강도, 나아가 수난의 형상화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공포, 믿음 자체의 회의감에서 오는 공포를 전제로 한다. 마치 사라져버릴 꽃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붓을 들어 난잡에 가까울 정도로 색채를 추구 하듯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그 믿음은 이미 종교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는 더 이상 고유한 의미에서의 종교영화라고 보기 어렵지 않나 싶다. 순수한 공포영화라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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