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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11 권력 혹은 기다림의 정의 (6)

사람들과 얘기를 해 보면 그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어색한 단어나 말버릇 등을 발견하게 된다. 한 때, 정신 분석가들은 이러한 단어나 버릇을 가지고 그 사람의 무의식을 아우르려고 했다. 그들은 이를 징후(symptom)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말을 실수한다든가 아니면 그 자신(의식)도 모르게 비집고 솟아오르는 이미지들의 표현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언어의 표면 아래에서 실제로 그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욕구 혹은 억압을 포착할 수가 있다. 이 욕구나 억압을 잘 숨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투른 사람도 있다. 또 우리는 서투르긴 하지만 저와 같은 방식에 따라 경험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기도 한다. 그 징후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싫어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에 두려워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만드는지 엿볼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을 하나의 실체로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징후 즉 틈새가 있다. 바로 몸과 그 포즈이다. 진정한 권력이란 의식을 사로잡기 이전에 몸을 지배하는 과정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나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몸이 반응함으로써 권력에 화답한다. 권력을 이렇게 정의해보자: 두 손을 모으게 하거나, 머리를 숙이게 하거나,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곳으로 내 몸을 몰아세우는 힘.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가능케하는 힘. 내 몸을 무(無)의 상태 쪽으로 몰아가는 힘. 나아가 나의 존재를 스스로 객관화하여 반성하게 하는, 즉 정신을 불러들이는 몸의 상태 혹은 그 자세. 이쯤되면 헤겔이나 사르트르나 푸코 등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너무 복잡하게는 생각하지 말자. 정신이나 시선(視線)과 관계하는 권력에 대하여 그들의 말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권력이란 "나의 존재를 나 자신으로부터 발견할 수 없게 하는 힘" 혹은 "나의 고유한 본성이 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정의되게끔 하는 힘", 좀 지나치게 단순히 말해 "나를 종속시켜 노예로 만드는 힘"이다. 어쨌든 우리의 몸은 의식이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에도 더 빠르고 섬세하게 그 무지무지한 힘에 반응한다. 한 예로, 찰리 채플린은『위대한 독재자』라는 영화에서 몸과 권력의 관계를 의자의 높이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방문한 무솔리니의 의자를 자신의 것보다 낮게 함으로써 위계에 관한 암묵적인 동의를 강요한다. 물론 무솔리니가 뚱뚱한 몸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간파하였으므로, 히틀러의 교활한 술수는 실패하고 만다. 누구든지 자신보다 사회적으로(외면적으로) 더 큰 힘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를 상기해 보자. 내 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포즈로 있는지를 떠올려 보자. 그러면 이 말뜻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권력을 환기하는 몸의 포즈들 중 일상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가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머리를 숙이고 있다. 절망으로 무너진 사람, 궁금해서 두리번 거리는 사람, 화가 나서 눈을 부라리는 사람, . . . 이들은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는 자신과 기다림의 대상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으며, 기다리게 하는 그것에 치달을 수도 없다. 기다림이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 버린 영혼이 어디로든 갈 수 없는 상태, 말하자면 연옥의 기로에서 배회하는 부랑아의 포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기다림이 시작되면 더 이상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다릴 것인가 기다리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는 나의 몫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기다리게 하는 그의 특권이다. 묘하게도 기다림의 주체는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바로 그 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다림이란 언제든지 하나의 권력과 같은 형태로 경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인물들이 언제든지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전화를 기다리거나, 학과장이나 교수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리거나, 약속시간을 기다리거나,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거나, 동사무소에서 공무원의 대답이나 결정을 기다리거나, . . . 한이 없다. 우리는 모두가 기다리는 자이거나 기다리게 하는 자이다. 그러다가 화가나면 강원도로 춘천으로 부산으로 경주로 여행을 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가학적이 되거나, 배회하거나 배신을 한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대략 네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행하는 사람, 배회하는 사람, 가학적인 사람, 그리고 배신하는 사람이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쥔 사람이며, 기다리는 나는 그것을 욕망 하는 사람이다. 그 출처가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은 저당잡힌 욕망! 이것이 기다림의 정의이다. 우리가 기다리면서 화가 나는 이유는 그 시간이 지루하거나 아깝기 때문이 아니다. 복종해야만 한다는 사실! 이미 복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기다림 속에서 이미 하나의 위계적 질서를 수긍하도록 하는 힘이, 마치 닿고 싶지 않은 어떤 몸뚱아리가 슬며시 내 몸으로 다가오듯, 나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불쾌함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