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신주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6/11/15 예술과 도착 (4): 이데아와 물신
  2. 2006/08/30 흰머리와 쾌감 (7)
  3. 2006/07/14 사랑의 윤리학 (4)

사드가 의도하는 제도화의 망상은 관점에 따라서는 저항의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외부대상에게 행하는 저항이든 혹은 자기자신에게 되돌리는 저항이든, 새디즘적 자아에게 순수한 죽음본능의 제도화는 이차적 자연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만이며 저항인 것이다. 그리고 사드의 언어에서 우리는 부정의 논증이라는 방식을 보았으며, 그 과정속에서 폭력의 가속화와 응축의 냉담성이라는 기제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제들 속에서 묘사의 반복과 단조로움이라는 미적 효과들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저키스트도 이러한 방식을 고수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과 반대적인 어떤 메커니즘을 상반된 짝으로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매저키즘에서 볼 수 있었던 변증법과 설득 그리고 신비적 상상들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저항의 메커니즘을 볼 수는 없을까? 사드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방어기제를 도출해 낼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물신숭배(fetishism)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저키즘적 자아는 새디즘의 부정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서, '거부' 혹은 '부인'이라는 매개로 저항한다. 이것은 부정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저항의 방식을 보여준다. <거부는 아마도 부정으로도 심지어는 파괴로도 구성되지 않는 새로운 운용의 출발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그것은 오히려 존재나 현존하는 것의 유효성 혹은 적합성(validity)을 급진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신념을 지연시키고 주어진 것 즉 즉자를 중화한다. 즉자적인 것을 넘고 자리 바꿈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지평을 연다. 31>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부정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컬한 면모를 띤다. 그것은 존재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며, 살아 남는 한에서만 가능한 파괴로 운용된다. 따라서 새디스틱한 자아가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상황에는 상당한 아이러니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는 거부나 부인의 메커니즘에서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거부와 부인에서는 존재의 유무 자체가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디스트는 근원적 질문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새디즘의 존재론적 파괴에는 이미 존재의 필연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존재(혹은 파괴대상)는 필연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존재란 무엇인가?)은 존재로 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반해 매저키스트의 질문 방식은 새디스트의 근원성과는 다르다. 그에게 존재는 필연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존재의 필연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존재가 왜 필연적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런 의미에서 매저키즘에서는 존재의 유효성과 적합성이 급진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부의 메커니즘에 대한 예를 프로이트가 제시한 물신숭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신(대상물 fetish)은 여성남근의 이미지 혹은 대체물로서, 그를 통해 우리는 여성이 페니스가 없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 있다. 물신숭배자가 하나의 물신(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페니스가 없다는 (현실적)사실을 알기 전, 어렸을 때 보았던 마지막 대상물에 의해 결정된다(예로, 발에서부터 위로 점점 바라볼 때 마지막 보았던 신발). 이 대상물, 즉 이 출발지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 가는 것은, 그로 하여금 아직 의심 속에 던져진(논쟁 중에 있는, 즉 있는가 없는가가 미심쩍은) 기관의 존재를 유효하게(확인) 만든다. 따라서 물신은 하나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얼어붙은, 체포된, 이차원적 이미지이며 한 장의 사진이다. 여기로 그는 반복적으로 되돌아가서 움직임의 위험한 결과(즉 현실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결과들)들을 제거하고, 탐구로부터 도출되는 해로운 발견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되돌아 간다. 물신은 여전히 신념이 가능했던 마지막 지점이다. 31>


물신 숭배자가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이차적 자연의 대상을 보게 되면, 이를 폭력의 강화 혹은 응축의 냉담성으로써 파괴하고 부정하는 메카니즘으로 일차적 자연에 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관념 안에 상정된 물신 - 물론 이 물신은 유일한 어떤 것이 아니라, 대상에 각각 조응하는 이미지이며 이차원적 사진이다 - 으로 되돌아 간다. 물신은 이미 관념 안에 포착된 이미지로서, 물신 숭배자는 현실적 대상들 속에서 물신의 이미지를 유추하거나 조합한다. 따라서 현실적 대상으로부터 물신의 이미지를 획득하지 못할 때는 곧바로 이 이미지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차적 자연의 현실적 대상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거부되는 것이다. 부정의 경우처럼 순수망상의 이데아를 이차적 자연에 제도화하려는 의도는 여기서 발생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이차적 자연은 이데아에 조응하면서 끊임없이 그 적합성과 유효성이 조회되고 점검된다. 그것이 적합한지 혹은 유효 한지를 말이다. 따라서 부인과 거부의 메커니즘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나 기관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물신주의자에게 물신은 여전히 남아 있는 가능성으로서 마지막 지점일 수 있는 것이다. 물신은 실재하는 세계와 관념세계 사이에 위치한 일종의 매개인 셈이다. 물신주의자는 이 중간지점을 계기로 관념세계로 올라간다.

물신주의는 다음의 세가지 기제로 나타난다. (1) 거부 (2) 방어적 중화 (3) 보호와 이상화의 중화. 물신주의자는 평면적이고 이차원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물신으로 반복적으로 되돌아 감으로써, 역으로, 현실적 원리들 즉 고정적이지 않은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문제들에 대해 우선 부인하고 신념을 지연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물신주의자가 되돌아가는 평면적 신념은 긴장으로만 남아있는 이미지이지만, 이를 통해 현실적 즉자들은 효력 정지되며, 그 의미가 지연되는 효과를 드러낸다. 이것은 곧 현실의 거부이며 부인이다: <아니. 여성은 페니스를 결여하고 있지 않아! 31∼32> 부정과 부인의 차이는 현실상황을 수용하는 방식과 태도에 있다. 부정은 그 주어진 현실을 파괴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나타나지만, 심층(적 의도)은 언제나 대상(현실)을 존속시키는 한에서 유지된다. 그러나 부인의 과정에서 주어진 대상은 존속되는 형태로 나타나기 보다는, 효력이 정지되고 지연되며 미 결정된 상태로 중화된다. 중화는 물신주의자로 하여금 반복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미적 전개과정이다. 다시말해 물신주의자는 이차적 자연을 중화시키면서 물신으로 되돌아 가며, 물신의 확인으로부터 다시 이차적 자연을 조회하고 검토하도록 하는 왕복운동을 낳는다. 이로써 주어진 대상은 물신과의 조응과 불일치로 인해 끊임없이 그 구성에 있어서 재 배열되는 것이다. 물신주의자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대상은 왕복운동 과정에서 차이화된 것으로 지각된다. 현실적인 대상에 대한 지식에서 오는 고통의 의미를, 이상화된 물신의 이미지를 통해 교환하고 대체하면서, 주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재조직하거나 효력을 정지시켜 버린다. 이상화된 세계로의 도약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부인은 새디스트의 부정처럼 현실의 변형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새디스트가 현실적 대상과 맺는 관계는 아이러니적이지만 - 부정은 대상의 존속을 전제하며, 따라서 새디스트는 이차적 자연과의 필연적 연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 물신주의자가 주어진 대상과 맺는 관계는 선택적이다. 그는 거부와 부인을 통해 대상을 선택하고 골라낸다. 새디스트의 저항이 모순과 투쟁이라는 특징을 띠는 반면, 물신주의자는 움추리기와 지연 혹은 중화의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그에게 현실과 대면하는 모든 순간들 속에서 긴장감이 멈추지 않는다. 이 긴장감은 이상적인 것 속에서 감돈다.

물론 새디즘과 물신주의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물신과 맺는 폭력의 과정에서 매저키즘과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폭력의 두 가지 다른 유형이 있으며, 물신 자체에 대한 잠재적 폭력이 있으며, 물신의 선택과 구성과 연결 되면서만 발생하는 폭력이 있다. 32> 새디즘에서 물신은 그 자체로 부정되며, 새디스트가 이차적 자연이나 현실상황과 직접 대면하는 순간 물신은 오히려 멀리 달아나 버린다. 새디즘에서 일차적 자연은 이차적 자연의 극복이며, 그로부터 얻어지는 논증적 이성의 열매이다. 따라서 새디스트는 물신 자체 보다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이차적 자연을 주로 다룬다.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물러서거나, 그것을 거부하거나, 자신의 이상 속에 숨어있으면서 긴장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새디스트에게서 물신의 의미가 이차적이며 왜곡된 방식의 의미이다: <물신주의가 새디즘에서는 이차적이고 왜곡된 의미에서만 발생한다. 그것은 거부와 지연과의 필연적 관계를 상실하며, 부정성과 부정의 완전히 다른 문맥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거기서 물신은 응축이라는 새디스트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매개가 된다. 32> 그러나 물신주의가 보여주는 거부와 지연 그리고 중화의 과정은 매저키즘과 일치한다. 매저키즘에서 이차적 자연은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 아니다. 그는 꿈 속으로 도약할 뿐이다. 물신은 이차적 도약의 매개이기 보다는 우연히 주어지는 부가물에 불과하다. 매저키즘에서 이데아는 <환타지> - 물신주의에서 선택된 물신 - 속에서 긴장된 채로 남아있다. 따라서 그는 굴욕에서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이차적인 이익을 도출할 수 있다. 마조흐의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서스펜스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완벽한 세계라는 이상화의 목적은 그 자체로 현실세계와의 관계를 상정한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 이상화된 세계는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현실세계와는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현실세계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는 새디스트처럼 <완벽한 세계>를 제도화하기 위해 부정하고 파괴하며 이상화하는 것을 회의한다. 그에게 완벽한 세계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가 오로지 집중하는 것은 <날개를 달고 꿈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이상(물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이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현실세계를 효력정지 시키고 지연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 자체로 환타지 속에서 지연되고 있는 하나의 이상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의 순수한 이상적 실재를 창조하기 위해 그가 질문하는 것은 현존하는 실재의 타당성, 적합성, 유효성이다. 매저키즘이 사법적 정신과 완벽하게 맞물리는 점이 바로 이점이다. 33>

따라서 현존하는 실재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폭력과 도착이 있다. (1) 증명하고 예증하고 논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부정. 그러나 또한 이러한 부정은 주어진 대상에 의존하거나 대상을 전제하면서 진행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2) 환타지 속에서 긴장된 채로 남아있는 이상을 상상하면서, 그에 조응하는 대상을 선택하거나 거부하고 부인하는 과정. 또한 이 과정에서 대상의 적합성과 유효성이 급진적으로 검토된다.

물신주의와 매저키즘에서 보여지는 유사한 운용법칙은 실재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다는 특징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실재를 미결정된 상태로 지연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유보와 지연의 특징은 마조흐의 예술로 하여금 긴장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산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긴장의 효과로부터 그의 예술은 신비적 관조 속에서 오히려 더욱 격렬한 외설적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마조흐 예술의 긴장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역설이다. 그의 예술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면서 보다 극도로 과장하고 있는 셈이다: <마조흐의 삶과 작품에서 중요한 물신은 모피, 신발, 채찍 … 이상한 모자들 … 다양한 위장이다.『이혼한 여자』에서 … 여러 장면은 물신주의에서 발생하는 분열을 설명해 주며 그에 상응하는 이중적 '긴장'을 설명해 준다. 한편으로 주체는 실재를 알고 있지만 이 앎을 지연한다. 다른 한쪽에서 주체는 자신의 이상에 얽매여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관찰에 대한 욕망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신비적 관조의 상태가 존재한다. 33>

긴장의 상태를 지연시키는 과정에서 매저키스트는 새로운 이상화의 단계 속으로 진입한다. 그는 이차적이고 경험적인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이상화된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망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차적 자연 속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들은 <가능한 오래 연기되며 따라서 거부되고 부인된다.> 이것이 바로 외설적 자극을 경험하거나 관능적 상태를 경험하기 직전에 오히려 매저키스트가 종교적 환영에 휩싸이는 이유이다. 그는 <성없는(sexless) 새로운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 현실적 실재적 기쁨을 경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쾌감을 경험한다는 매저키즘의 역설은 설명할 길 없는 성도착의 궤변이 아니다. 도착의 의미를 신비적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것을 일종의 궤변적 일탈로 이해 해서도 안된다. 매저키스트가 쾌감을 지속적으로 지연하고,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관념에서 이데아를 가능케 하거나(물신), 이상적인 것(성없는 새로운 인간)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되돌아갈 유보조항을 상상하고 있다. 그에게 현실은 반드시 필연적일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실패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다. 새디스트가 분노와 절망으로 현실을 부정한다면(제도화의 과정), 매저키스트는 이상적 망상으로 현실을 거부한다(이상화의 과정).

두 도착에서 우리는 반복의 두 양태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강화와 응축이라는 메카니즘의 확대된 반복으로 나타나며, 다른 하나는 긴장과 관련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마조흐의 소설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화면은 정지되며, 모든 움직임들은 갑자기 <얼어붙은> 이미지로 긴장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목을 매거나, 십자가에 박히거나 교수형 당한다. 또한 고문자인 여자가 자신을 하나의 상태, 그림 혹은 사진과 동일시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얼어붙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율과 서스펜스라는 미적 효과들은 반복의 두 양태들과 관련해서 가장 격렬한 효과를 얻는다. 조심스럽게 절제되면서 점점 확대되는 폭력의 강화된 힘은 전율의 효과를 극대화하며, 움직이던 형상들과 속도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취하게 되는 얼어붙음과 정지는 숨막힐 듯한 서스펜스의 심미적 효과를 최대로 감싸 안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극단적 형태의 미적 감흥은 반복이라는 메카니즘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서스펜스의 미적 쾌감은 사실 마조흐의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효과들 중 하나이다. 그의 소설들 속에서 외설적 묘사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등한 효과들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서스펜스에는 상당한 역설이 숨어있다. 우선 묘사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효과를 낸다는 것뿐만 아니라, 긴장에는 매우 요란한 소음들이 편재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숨막히는 긴장 속에 가장 격렬한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창백한 정지화면 속에서 보다 많은 활동들이 밑바닥으로 스며들거나 비 가시적으로 꿈틀거린다. 사실 우리가 저항방식을 설명하면서 보았듯이, 물신주의나 매저키즘은 환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따라서 물신과 이상화된 인간 혹은 다른 어떤 부분대상들이 치환되고 자리 바꿈 되면서 이들의 도착이 형성된다. 이런 이유로 어떠한 대상에 대한 묘사가 정지된 후 나오게 될 연속적 화면들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급진적인 단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들은 독자들에게도 일어난다. 우리는 서스펜스의 심미성을 환유와 단절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긴장의 순간은 다른 장면으로의 치환과 급진적인 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얼어붙은 화면을 보면서 독자들은 곧바로 물신주의자 혹은 매저키스트로 변화되는 것이다. 긴장 속에는 매우 요란한 소음들이 편재한다. 따라서 마조흐가 외설적 묘사들을 중화하고 정지시키는 가운데서도 가장 커다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점잖음에 대해 이렇게 거의 공격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또 다른 예술의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분위기 소설의 대가이며 암시의 예술가이다. 34>

<죽음의 본능(the Death Instinct)>을 이해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 이미 언급했듯이 죽음의 본능은 절대로 현실세계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은 술어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드는 논증과 부정의 메카니즘을 통해 망상을 제도화하며, 이 과정 속에서 폭력의 강화와 응축이라는 구체적 기제들이 기능한다. 따라서 심미적 효과들은 외설적 묘사들을 통해 실현된다. (2) 마조흐는 변증법과 신비적 상상을 통해 이데아를 이해하고 망상하며, 현실세계와 이차적 자연은 그에 의해 거부되거나 부인된다. 현실세계는 따라서 중화되고 지연되며 얼어붙은 이미지로 정지된다. 여기서 긴장(서스펜스)의 심미적 효과들은 암시적 묘사들이 지배하면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가장 기본적인 구별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드에게서는 부정적인 것과 부정의 과정, 마조흐에게서는 거부나 부인 그리고 서스펜스의 과정. … 사드에게서는 관조적이며 분석적 방식으로 죽음의 본능을 이해하며, 마조흐는 똑같은 대상을 추구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 즉 상상 속에서 신비적으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35>


Posted by huun

잘 알고 지내는 선배 K씨가 어느 날 내게 와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있지! 내가 변태가 되어 가나 봐." 그의 표정은 불안과 걱정으로 싸여 있는 듯했다. 그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제의 심각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 그의 기질로 볼 때 변태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느 정도는 내성적이며, 그러나 또한 어느 정도는 쾌활하다. 그에게 단점이 있다면 예민하다는 점이다. 가끔은 사람들과 다투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파괴적 본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성생활이 변태적인 것이라고 예상할 일은 아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감흥이 오지 않을 때가 있어. 예를 들어 피곤할 때라든지, 다른 어떤 걱정이 생겨 거기에 몰두할 때면, 흥분도 안 되고, 그녀가 이리저리 내 몸을 자극 해도 별 감흥이 없을 때가 있어. 그럴 때는 좀 난처하지. 그녀의 애정과 호의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 . . 그래서 난 억지로라도 여러 가지 외설적인 생각들을 떠올려서 그녀에게 반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진 않아.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내의 흰머리를 보면 흥분이 돼! 아내의 흰머리를 처음 보았을 때는 별 감흥이 나질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흰머리가 하나 둘씩 많아지고 이제는 노력해서 찾지 않아도 꽤 잘 보이니까 흥분이 되는 거야. 여자의 흰머리를 보고 성적 흥분을 느끼는 건 나밖에는 없을 거야."

 

그의 설명을 들으니 자신이 변태가 되어 간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얼른 보아도 흰머리와 성적 쾌감은 이해할 수 없는 연결이었다. 물신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의 과거사를 들어봐도 흰머리와 섹스가 연결될 지점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무의식의 작용일까. 아니면 그는 일종의 물신 숭배자인가. 성도착이 이렇게 뒤늦은 인생에도 찾아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솟아오른다.

 

그는 결혼한 지 12년쯤 된 중년이다. 그리고 그의 결혼생활이 사실 관능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외설적인 대화들을 즐기지만, 그들이  모두 관능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는 없다. 그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외설을 즐겼으며, 심하지 않게 섹스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외모나 성격 등 여러 부분에서 관능적인 삶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무료했던 것은 아니다. 아내의 허물을 공공연히 떠벌리지도 않았으며, 일상에서 오는 심한 권태를 느껴본 기억도 없었다. 그가 아내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이라고는, 가끔 어린아이 같다는 정도였다. 심지어는 그 어린아이 같은 면이 귀여울 때도 있다고 부연한 적이 있었다. 결혼한 지 꽤 되었으니 성생활에 권태를 느낄 법도하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 일상적이지 않은 행동이나 생각들로 침실을 채우기도 한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생각이다. 그러나 변태가 되어가고 있는 문제는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지니고 있는 미모나 육체적 미감 그리고 그녀의 애정과 호의의 안락함 등이 주는 성적 흥분보다는, 엉뚱하게도 흰머리에서 오는 쾌감을 더 원하고 있는 것이다.

 

변태에 대해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병리학적 연구들과 구체적 증상의 사례들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성도착이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까닭은, 그것이 사회적 소통관계를 부정하고 파괴한다는데 있다. 수많은 변태적 성욕과 그 행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눈살을 찌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음증이나 노출증 혹은 매저키즘이나 새디즘과 같은 성도착의 유형들은 모두가 소통관계의 파괴와 부정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들은 다수가 내면화한 사회적 질서나 표현방식을(심지어는 섹스와 관련된 것조차도) 따분하게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이해하면서, 그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자신만의 특별한 이미지를 발명해 낸다. 예술가들이 주로 이러한 행위에 몰두하는데,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은유능력(A를 B로 연결하는 능력)도 일종의 변태적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의 조건을 은유능력이라고 했는데, 그의 주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천재는 변태성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사회적 질서로부터 변태성의 주체가 일탈하는 과정은 물신주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물신 숭배자는 환상(Fantasy)이라는 허구를 내면화하면서, 현실 원칙들을 거부하거나 그 효력을 정지시켜 버린다. 다시 말해 특별한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불쾌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곧바로 그 이미지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물신주의자들의 주된 메뉴는 스타킹이나 구두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행복했던 시절의 어머니와 동일한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혹은 자신이 사랑했던 어머니로 달려가 버리는 것이다. 새디즘은 가학을 받는 자와의 소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새디스트는 피해자에게 많은 말들과 반복적 논증을 진행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흉내나 가장에 불과하다. 폭력적 지배자에게 설득이나 소통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새디스트가 매질을 하는 대상으로부터 단절하려는 것은, 그 대상이 구질구질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아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 망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람의 노예 같은 면모를 혐오하고, 매질을 통해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다. 새디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을 우리나라 어머니들로부터 볼 수 있다. 만일 아이가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들어왔을 때, 그 어머니는 아이를 위로하거나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아이를 매질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왜 맞고 다녀!?" 내가 존경하는 바따이유(G. Bataille)라는 프랑스의 이론가는, 새디즘에는 피해자의 어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저 어머니의 어조와 유사한 언어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착의 형태에 대해 소통의 파괴나 부정 혹은 단절과 위반이라는 위험한 술어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들을 신비적으로 보거나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함 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도착자들은 어떤 경우든지 다른 많은 사람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며 정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아픔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안락 속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도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은 이러한 경험과 감각들을 다른 사람들과 유사하지 않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고 체험한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고통과 쾌감의 경험들은 그 자체의 물질적 요인(즉 신경물질이나 뇌하수체와 같은)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방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매저키즘이 고통을 통해 쾌감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을 쾌감 자체로 지각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을 보통 사람들과는 상이하게 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착은 생물학이나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그것도 예술적인 정신의 문제이다. 이들이 감각적 자극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운용하거나, 더욱 풍부한 삶의 경험을 스스로 요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적 소통을 위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쾌감을 타인에게 빼앗기거나 포기해야 하는 반면에(중세인들은 이 쾌감을 신에게 돌렸기 때문에, 니체는 이를 더 질병적이라고 말했다), 변태적 주체는 자신이 개발하거나 창출하고 있는 쾌감을 철저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소통의 거부는 쾌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쾌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사회적 일탈이 되는 것은, 사회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고자 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서 삶을 운용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신체를 바라보고 다루는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흰머리와 성도착의 관계에 대해서는 섣불리 용어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문제는 흰머리와 도착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흰머리와 쾌감간의 관계에 있다. 그는 왜 흰머리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나의 소견으로는 그가 위반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위반은 피상적으로 내면화된 금기나 강요들에 대한 일탈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사회는 연령이나 계급과 같은 여타 조건들에 의해 사랑의 형태를 규제해 왔다. 그래서 이를 어기는 형태의 사랑을 보게 된다면, 심한 경우에는 범죄의 모습을 띠고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계급을 초월하는 사랑은 언제나 문학적 스캔들의 테마가 되어 왔으며, 제도를 위반하는 불륜과 같은 사랑의 형태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들로 하여금 매우 격렬한 관능성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그는 흰머리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아내를 연상(年上)으로 망상하고 있는 것이다. 흰머리라는 부분적 대상을 통해 그의 아내는 단번에 연상의 여인으로 탈바꿈한다. 보다 존경스러운 상대를 원한다든지 등과 같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심리적 상태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말 할 수 없다. 또한 그가 변태인가 아닌가를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흰머리를 보면서 위반을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아내의 신체의 부분을 이용해서 자신을 통제해 왔던 제한된 사랑의 형태에 저항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면화된 제도와 이데올로기는 파괴되고 부인된다.

 

관능성은 파괴하고 거부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태어난다. 우리의 신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흐름은 어떠한 제도나 이데올로기로 봉해 버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비집고 나온다. 신체가 억제될 때 욕망은 위반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예를 들어, 꿈이나 잠꼬대나 술주정과 같이 일상적인 것도 포함하여). 이때 사랑은 괴이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소리를 내지 않으며 신체 내에 묵직하게 스며있는 욕망은, 현실 속에서 특정한 대상들과 조우하게 될 때(술이나 마약도 이에 해당된다),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와 기괴한 형태로 현실화한다. 이 괴이함이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면화된 소통을 파괴하게 될 때, 우리는 이를 행위 윤리적인 문제들과 혼동하면서, 변태라는 용어로 비하하여 부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은 대충 비슷하면 아무데나 용어를 붙여 쓰는 일들을 밥 먹듯이 한다. 그리고 이 잘못된 명명법이 일반화된 관념이 되면 곧 바로 집단이나 사회의 고압적 폭력으로 둔갑한다. 유럽과 미국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차이에 대한 무지는 언제나 차별을 낳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혼한 지 12년 아니 그 보다 더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을 욕망이, 이제 비로소 흰머리라는 숨 쉬지 않는 대상에 의해 깨어난다. 흰머리와 성적 쾌감간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능적 쾌감이란 유두와 성기와 입술과 항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각인 된 사회적 제도와 우리를 내면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부터도 출현한다.

 

 

p.s.

저항과 쾌감에 관한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러분도 그 이름을 자주 들어보았을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철학자는 매저키즘이 유머러스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 유머러스하다는 말일까? 우선,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때리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매질 자체의 의미를 무효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제발, 때려 주세요!"

"#$%^&*"

그러나 이 보다도 더 재밌는 사실이 있다. 매저키스트는 매질이라는 것을 나쁜 짓을 하고 나면 으례 따라 나오는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 . . . 그는 생각한다. 처벌을 먼저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되지 않을까? 들뢰즈는 매저키스트가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매질이 끝나면 맛보게 될 바로 그 나쁜 짓을 기다리기 때문에 쾌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매저키스트의 쾌감을 예비적 쾌감,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정의한다. 한 사악한 어린아이의 예를 통해 말해볼까? 선생님이 아이에게,

"너! 불량식품 사먹으면 때려줄거야!" 하고 경고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찾아와서 엉덩이를 까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먼저 때려주세요!"

" $%^&*()&* "

이 아이가 급진적인 이유는, 더 이상 억압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아이의 요구는 오히려 매질을 나쁜 짓과 쾌감을 허가해주는 절차로 만들고 있다. 아이는 그 억압을 완전히 거부해버리고, 자신의 쾌감으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흰머리를 보며 즐거워하는 K 선배처럼! 억압은 결코 승리할 수가 없다. 특히 즐기는 자에게는.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횡설수설하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시를 운동경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글의 제목들을 주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단어가 변태적이라고, 혹은 문장들이 미쳤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말들을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말 그 자체일까? 문법일까? 약속? 규칙? 그렇다면 단어들의 호응하는 관계가 일탈적이고 일그러진 모든 말들은 믿겨지기 위해 우리의 경험 내부로, 마무리가 잘 된 연결 관계들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두 가지 기로에서 방황한다. 우리의 삶에서 추방되어야 할 언어가 돌연히 난입하고, 우리 자신이 이미 이 언어에 매우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에 다다르면, 우리는 미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여기에 너무나 깊이 빠져있다! 내가 미치기 시작하면 사물들은 이리저리 갈라지고 흩어지고 조각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아포리즘이 써진다.


니체(F. Nietzsche)의 어수선한 아포리즘을 읽다보면, 사물과 현상들이 무수하게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은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는 대상의 갈라지는 선과 에피파니의 빛을 따라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어떠한 흠집도 내지 않기 위해, 그것의 결을 따라 매우 조심스럽게 표면을 벗겨내고 있는 것 같다.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다시 증축하기 위해서인가? 근대 수학은 아무런 흠집을 내지 않고도 존재를 고스란히 가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방법은 너무나도 거칠다. 라이프니츠나 뉴턴보다도 더 섬세한 미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니체가 시도한 작업들은 수학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생소할지도 모른다. 그의 미분은 우선적으로 표면의 결을 발견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신의 표면에 포함하고 있는 시간의 결 혹은 주름들. 그래서 잘려져 나간 것들에 익숙하지 않고,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불완전한 것들에 생경한 우리에게, 사물은 한없이 갈라지고 부서지고 파편들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이 다루는 어떠한 것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쌓아놓은 모래성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모래알을 하나 씩 하나 씩 떼어내듯, 갈라지는 선과 빛을 따라 사물의 표면들을 벗겨낸다.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잘려나간 고대 화석 앞에 선 한 고고학자의 흥분과 섬세함의 십분의 일이라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러면 더 이상 존재는 잘리기 위해 이리저리 놓이고 거칠게 다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움직여야 할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테르가 사랑한 로테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베르테르이다. 로테는 말해지지 않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리와도 같다.


나는 우선 내 앞에 마주한 대상이 포함하고 있는 무수하고도 무한한 속성들을 발견함으로써 사랑에 빠진다. 존재에의 긍정이란 한마디로 말해 무한한 속성의 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속성의 무한함은 연인에게 속한 무수한 속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우선 나의 속성을 촉발케 하는 연인의 속성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교환하거나 치환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그(녀)에게만 속하는 그 단성성(singularity)은 어떠한 단어로도 바꿀 수가 없다. 존재에 깃든 단성성이란 원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넘어서 있거나 언제나 일탈한다. 에피쿠로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클리나멘(clinamen)이라는 존재를 고안해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일반적인 의미에 불과한 하나의 단어에, 그(녀)의 충성스러운 대변인이 되어 서명이라도 하듯, 소유를 암시하는 수식어를 하나 첨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향기! 그(녀)의 순진함! . . . ”. 좀더 나아가 나의 격앙된 감정이 들킬 만큼 나의 어법이 서툴러지거나 유치해지면, 내 언어는 더 상투적이고 진부해져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따뜻한 미소! 그(녀)의 따뜻하고도 감미로운 향기! 그(녀)의 따뜻하고도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순진함! . . .”.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나면 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러 저러한 감각 이미지들을 아무 곳에나 제 멋대로 결합시키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떠한 짓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파고드는(그래서 내가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이미지는 치환이나 재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벌려놓은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표현함으로써 끝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모호한 후렴구를 내뱉으며 잠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긍정의 과정은 사랑 받는 연인의 본질의 발견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본질의 발견에서 비롯된다. 속성은 사랑의 대상에 속한 것임에도, 언제나 사랑하는 주체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반드시 능동을 포함하고 있다. 긍정은 능동을 지시하고, 능동은 긍정을 생산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윤리학이다.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그랬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해 스스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 자신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사랑의 명제이다. (무한한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수동과 능동에 의해 주파수가 맞았다. 사랑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 안에서 발산하는 능동은 스스로 형상이 되거나 스스로를 재현한다. 때로는 대상의 가치에 대해 채울 수 없는 의혹을 한껏 품다가 가냘픈 충동을 느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혹은 사라진느(Sarrasine)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상상하며 수도승의 엄격함으로 조각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베르테르는 자신의 편지를 로테에게 보낼 의도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거울단계에 머무르고 싶어 하거나 우상숭배자가 되기도 하며(사랑이 좌절되었을 때, 사라진느는 조각상을 깨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가장 소극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간혹 물신주의자가 된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가 하나의 무늬를 짜 놓고 싶어 하며,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연인으로 하여금 언제나 글을 쓰도록 하는 동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지면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가 문형 제작자이다. 또한 긍정과 능동을 운용하여 문형을 제작하는 이들은 모두가 윤리학자이다.

<문예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