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가 의도하는 제도화의 망상은 관점에 따라서는 저항의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외부대상에게 행하는 저항이든 혹은 자기자신에게 되돌리는 저항이든, 새디즘적 자아에게 순수한 죽음본능의 제도화는 이차적 자연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만이며 저항인 것이다. 그리고 사드의 언어에서 우리는 부정의 논증이라는 방식을 보았으며, 그 과정속에서 폭력의 가속화와 응축의 냉담성이라는 기제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제들 속에서 묘사의 반복과 단조로움이라는 미적 효과들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저키스트도 이러한 방식을 고수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과 반대적인 어떤 메커니즘을 상반된 짝으로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매저키즘에서 볼 수 있었던 변증법과 설득 그리고 신비적 상상들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저항의 메커니즘을 볼 수는 없을까? 사드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방어기제를 도출해 낼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물신숭배(fetishism)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저키즘적 자아는 새디즘의 부정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서, '거부' 혹은 '부인'이라는 매개로 저항한다. 이것은 부정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저항의 방식을 보여준다. <거부는 아마도 부정으로도 심지어는 파괴로도 구성되지 않는 새로운 운용의 출발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그것은 오히려 존재나 현존하는 것의 유효성 혹은 적합성(validity)을 급진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신념을 지연시키고 주어진 것 즉 즉자를 중화한다. 즉자적인 것을 넘고 자리 바꿈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지평을 연다. 31>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부정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컬한 면모를 띤다. 그것은 존재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며, 살아 남는 한에서만 가능한 파괴로 운용된다. 따라서 새디스틱한 자아가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상황에는 상당한 아이러니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는 거부나 부인의 메커니즘에서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거부와 부인에서는 존재의 유무 자체가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디스트는 근원적 질문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새디즘의 존재론적 파괴에는 이미 존재의 필연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존재(혹은 파괴대상)는 필연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존재란 무엇인가?)은 존재로 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반해 매저키스트의 질문 방식은 새디스트의 근원성과는 다르다. 그에게 존재는 필연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존재의 필연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존재가 왜 필연적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런 의미에서 매저키즘에서는 존재의 유효성과 적합성이 급진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부의 메커니즘에 대한 예를 프로이트가 제시한 물신숭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신(대상물 fetish)은 여성남근의 이미지 혹은 대체물로서, 그를 통해 우리는 여성이 페니스가 없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 있다. 물신숭배자가 하나의 물신(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페니스가 없다는 (현실적)사실을 알기 전, 어렸을 때 보았던 마지막 대상물에 의해 결정된다(예로, 발에서부터 위로 점점 바라볼 때 마지막 보았던 신발). 이 대상물, 즉 이 출발지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 가는 것은, 그로 하여금 아직 의심 속에 던져진(논쟁 중에 있는, 즉 있는가 없는가가 미심쩍은) 기관의 존재를 유효하게(확인) 만든다. 따라서 물신은 하나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얼어붙은, 체포된, 이차원적 이미지이며 한 장의 사진이다. 여기로 그는 반복적으로 되돌아가서 움직임의 위험한 결과(즉 현실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결과들)들을 제거하고, 탐구로부터 도출되는 해로운 발견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되돌아 간다. 물신은 여전히 신념이 가능했던 마지막 지점이다. 31>
물신 숭배자가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이차적 자연의 대상을 보게 되면, 이를 폭력의 강화 혹은 응축의 냉담성으로써 파괴하고 부정하는 메카니즘으로 일차적 자연에 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관념 안에 상정된 물신 - 물론 이 물신은 유일한 어떤 것이 아니라, 대상에 각각 조응하는 이미지이며 이차원적 사진이다 - 으로 되돌아 간다. 물신은 이미 관념 안에 포착된 이미지로서, 물신 숭배자는 현실적 대상들 속에서 물신의 이미지를 유추하거나 조합한다. 따라서 현실적 대상으로부터 물신의 이미지를 획득하지 못할 때는 곧바로 이 이미지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차적 자연의 현실적 대상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거부되는 것이다. 부정의 경우처럼 순수망상의 이데아를 이차적 자연에 제도화하려는 의도는 여기서 발생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이차적 자연은 이데아에 조응하면서 끊임없이 그 적합성과 유효성이 조회되고 점검된다. 그것이 적합한지 혹은 유효 한지를 말이다. 따라서 부인과 거부의 메커니즘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나 기관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물신주의자에게 물신은 여전히 남아 있는 가능성으로서 마지막 지점일 수 있는 것이다. 물신은 실재하는 세계와 관념세계 사이에 위치한 일종의 매개인 셈이다. 물신주의자는 이 중간지점을 계기로 관념세계로 올라간다.
물신주의는 다음의 세가지 기제로 나타난다. (1) 거부 (2) 방어적 중화 (3) 보호와 이상화의 중화. 물신주의자는 평면적이고 이차원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물신으로 반복적으로 되돌아 감으로써, 역으로, 현실적 원리들 즉 고정적이지 않은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문제들에 대해 우선 부인하고 신념을 지연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물신주의자가 되돌아가는 평면적 신념은 긴장으로만 남아있는 이미지이지만, 이를 통해 현실적 즉자들은 효력 정지되며, 그 의미가 지연되는 효과를 드러낸다. 이것은 곧 현실의 거부이며 부인이다: <아니. 여성은 페니스를 결여하고 있지 않아! 31∼32> 부정과 부인의 차이는 현실상황을 수용하는 방식과 태도에 있다. 부정은 그 주어진 현실을 파괴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나타나지만, 심층(적 의도)은 언제나 대상(현실)을 존속시키는 한에서 유지된다. 그러나 부인의 과정에서 주어진 대상은 존속되는 형태로 나타나기 보다는, 효력이 정지되고 지연되며 미 결정된 상태로 중화된다. 중화는 물신주의자로 하여금 반복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미적 전개과정이다. 다시말해 물신주의자는 이차적 자연을 중화시키면서 물신으로 되돌아 가며, 물신의 확인으로부터 다시 이차적 자연을 조회하고 검토하도록 하는 왕복운동을 낳는다. 이로써 주어진 대상은 물신과의 조응과 불일치로 인해 끊임없이 그 구성에 있어서 재 배열되는 것이다. 물신주의자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대상은 왕복운동 과정에서 차이화된 것으로 지각된다. 현실적인 대상에 대한 지식에서 오는 고통의 의미를, 이상화된 물신의 이미지를 통해 교환하고 대체하면서, 주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재조직하거나 효력을 정지시켜 버린다. 이상화된 세계로의 도약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부인은 새디스트의 부정처럼 현실의 변형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새디스트가 현실적 대상과 맺는 관계는 아이러니적이지만 - 부정은 대상의 존속을 전제하며, 따라서 새디스트는 이차적 자연과의 필연적 연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 물신주의자가 주어진 대상과 맺는 관계는 선택적이다. 그는 거부와 부인을 통해 대상을 선택하고 골라낸다. 새디스트의 저항이 모순과 투쟁이라는 특징을 띠는 반면, 물신주의자는 움추리기와 지연 혹은 중화의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그에게 현실과 대면하는 모든 순간들 속에서 긴장감이 멈추지 않는다. 이 긴장감은 이상적인 것 속에서 감돈다.
물론 새디즘과 물신주의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물신과 맺는 폭력의 과정에서 매저키즘과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폭력의 두 가지 다른 유형이 있으며, 물신 자체에 대한 잠재적 폭력이 있으며, 물신의 선택과 구성과 연결 되면서만 발생하는 폭력이 있다. 32> 새디즘에서 물신은 그 자체로 부정되며, 새디스트가 이차적 자연이나 현실상황과 직접 대면하는 순간 물신은 오히려 멀리 달아나 버린다. 새디즘에서 일차적 자연은 이차적 자연의 극복이며, 그로부터 얻어지는 논증적 이성의 열매이다. 따라서 새디스트는 물신 자체 보다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이차적 자연을 주로 다룬다.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물러서거나, 그것을 거부하거나, 자신의 이상 속에 숨어있으면서 긴장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새디스트에게서 물신의 의미가 이차적이며 왜곡된 방식의 의미이다: <물신주의가 새디즘에서는 이차적이고 왜곡된 의미에서만 발생한다. 그것은 거부와 지연과의 필연적 관계를 상실하며, 부정성과 부정의 완전히 다른 문맥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거기서 물신은 응축이라는 새디스트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매개가 된다. 32> 그러나 물신주의가 보여주는 거부와 지연 그리고 중화의 과정은 매저키즘과 일치한다. 매저키즘에서 이차적 자연은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 아니다. 그는 꿈 속으로 도약할 뿐이다. 물신은 이차적 도약의 매개이기 보다는 우연히 주어지는 부가물에 불과하다. 매저키즘에서 이데아는 <환타지> - 물신주의에서 선택된 물신 - 속에서 긴장된 채로 남아있다. 따라서 그는 굴욕에서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이차적인 이익을 도출할 수 있다. 마조흐의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서스펜스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완벽한 세계라는 이상화의 목적은 그 자체로 현실세계와의 관계를 상정한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 이상화된 세계는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현실세계와는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현실세계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는 새디스트처럼 <완벽한 세계>를 제도화하기 위해 부정하고 파괴하며 이상화하는 것을 회의한다. 그에게 완벽한 세계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가 오로지 집중하는 것은 <날개를 달고 꿈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이상(물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이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현실세계를 효력정지 시키고 지연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 자체로 환타지 속에서 지연되고 있는 하나의 이상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의 순수한 이상적 실재를 창조하기 위해 그가 질문하는 것은 현존하는 실재의 타당성, 적합성, 유효성이다. 매저키즘이 사법적 정신과 완벽하게 맞물리는 점이 바로 이점이다. 33>
따라서 현존하는 실재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폭력과 도착이 있다. (1) 증명하고 예증하고 논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부정. 그러나 또한 이러한 부정은 주어진 대상에 의존하거나 대상을 전제하면서 진행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2) 환타지 속에서 긴장된 채로 남아있는 이상을 상상하면서, 그에 조응하는 대상을 선택하거나 거부하고 부인하는 과정. 또한 이 과정에서 대상의 적합성과 유효성이 급진적으로 검토된다.
물신주의와 매저키즘에서 보여지는 유사한 운용법칙은 실재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다는 특징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실재를 미결정된 상태로 지연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유보와 지연의 특징은 마조흐의 예술로 하여금 긴장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산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긴장의 효과로부터 그의 예술은 신비적 관조 속에서 오히려 더욱 격렬한 외설적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마조흐 예술의 긴장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역설이다. 그의 예술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면서 보다 극도로 과장하고 있는 셈이다: <마조흐의 삶과 작품에서 중요한 물신은 모피, 신발, 채찍 … 이상한 모자들 … 다양한 위장이다.『이혼한 여자』에서 … 여러 장면은 물신주의에서 발생하는 분열을 설명해 주며 그에 상응하는 이중적 '긴장'을 설명해 준다. 한편으로 주체는 실재를 알고 있지만 이 앎을 지연한다. 다른 한쪽에서 주체는 자신의 이상에 얽매여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관찰에 대한 욕망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신비적 관조의 상태가 존재한다. 33>
긴장의 상태를 지연시키는 과정에서 매저키스트는 새로운 이상화의 단계 속으로 진입한다. 그는 이차적이고 경험적인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이상화된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망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차적 자연 속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들은 <가능한 오래 연기되며 따라서 거부되고 부인된다.> 이것이 바로 외설적 자극을 경험하거나 관능적 상태를 경험하기 직전에 오히려 매저키스트가 종교적 환영에 휩싸이는 이유이다. 그는 <성없는(sexless) 새로운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 현실적 실재적 기쁨을 경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쾌감을 경험한다는 매저키즘의 역설은 설명할 길 없는 성도착의 궤변이 아니다. 도착의 의미를 신비적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것을 일종의 궤변적 일탈로 이해 해서도 안된다. 매저키스트가 쾌감을 지속적으로 지연하고,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관념에서 이데아를 가능케 하거나(물신), 이상적인 것(성없는 새로운 인간)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되돌아갈 유보조항을 상상하고 있다. 그에게 현실은 반드시 필연적일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실패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다. 새디스트가 분노와 절망으로 현실을 부정한다면(제도화의 과정), 매저키스트는 이상적 망상으로 현실을 거부한다(이상화의 과정).
두 도착에서 우리는 반복의 두 양태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강화와 응축이라는 메카니즘의 확대된 반복으로 나타나며, 다른 하나는 긴장과 관련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마조흐의 소설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화면은 정지되며, 모든 움직임들은 갑자기 <얼어붙은> 이미지로 긴장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목을 매거나, 십자가에 박히거나 교수형 당한다. 또한 고문자인 여자가 자신을 하나의 상태, 그림 혹은 사진과 동일시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얼어붙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율과 서스펜스라는 미적 효과들은 반복의 두 양태들과 관련해서 가장 격렬한 효과를 얻는다. 조심스럽게 절제되면서 점점 확대되는 폭력의 강화된 힘은 전율의 효과를 극대화하며, 움직이던 형상들과 속도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취하게 되는 얼어붙음과 정지는 숨막힐 듯한 서스펜스의 심미적 효과를 최대로 감싸 안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극단적 형태의 미적 감흥은 반복이라는 메카니즘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서스펜스의 미적 쾌감은 사실 마조흐의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효과들 중 하나이다. 그의 소설들 속에서 외설적 묘사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등한 효과들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서스펜스에는 상당한 역설이 숨어있다. 우선 묘사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효과를 낸다는 것뿐만 아니라, 긴장에는 매우 요란한 소음들이 편재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숨막히는 긴장 속에 가장 격렬한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창백한 정지화면 속에서 보다 많은 활동들이 밑바닥으로 스며들거나 비 가시적으로 꿈틀거린다. 사실 우리가 저항방식을 설명하면서 보았듯이, 물신주의나 매저키즘은 환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따라서 물신과 이상화된 인간 혹은 다른 어떤 부분대상들이 치환되고 자리 바꿈 되면서 이들의 도착이 형성된다. 이런 이유로 어떠한 대상에 대한 묘사가 정지된 후 나오게 될 연속적 화면들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급진적인 단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들은 독자들에게도 일어난다. 우리는 서스펜스의 심미성을 환유와 단절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긴장의 순간은 다른 장면으로의 치환과 급진적인 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얼어붙은 화면을 보면서 독자들은 곧바로 물신주의자 혹은 매저키스트로 변화되는 것이다. 긴장 속에는 매우 요란한 소음들이 편재한다. 따라서 마조흐가 외설적 묘사들을 중화하고 정지시키는 가운데서도 가장 커다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점잖음에 대해 이렇게 거의 공격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또 다른 예술의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분위기 소설의 대가이며 암시의 예술가이다. 34>
<죽음의 본능(the Death Instinct)>을 이해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 이미 언급했듯이 죽음의 본능은 절대로 현실세계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은 술어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드는 논증과 부정의 메카니즘을 통해 망상을 제도화하며, 이 과정 속에서 폭력의 강화와 응축이라는 구체적 기제들이 기능한다. 따라서 심미적 효과들은 외설적 묘사들을 통해 실현된다. (2) 마조흐는 변증법과 신비적 상상을 통해 이데아를 이해하고 망상하며, 현실세계와 이차적 자연은 그에 의해 거부되거나 부인된다. 현실세계는 따라서 중화되고 지연되며 얼어붙은 이미지로 정지된다. 여기서 긴장(서스펜스)의 심미적 효과들은 암시적 묘사들이 지배하면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가장 기본적인 구별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드에게서는 부정적인 것과 부정의 과정, 마조흐에게서는 거부나 부인 그리고 서스펜스의 과정. … 사드에게서는 관조적이며 분석적 방식으로 죽음의 본능을 이해하며, 마조흐는 똑같은 대상을 추구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 즉 상상 속에서 신비적으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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