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3/25 혼란스러운 욕망과 물질의 흉내
  2. 2009/03/21 신(新) 물질 간식을 위하여 (10)
  3. 2008/12/04 가시적인 것에의 중독 (9)

현대인이 불안해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물질적 부의 양과 행복이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족할수록 더 행복해지고, 빈곤할수록 덜 행복해 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물질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있지만, 행복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물질적 부는 그 많고 적음을 잴 수 있는 척도가 분명히 있지만, 행복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행복"이나 "더 적은 행복", 혹은 "더 큰 행복"이나 "더 작은 행복"과 같이 행복의 많고 적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실은 우스꽝스러운 용어법이다. 그것은 마치 "더 크고 많은 음악" 혹은 "더 작고 적은 멜로디"이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난센스이다.

이렇게 "더" 그리고 "덜"의 개념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습관은 우리의 삶이 물질이나 물건을 측정하거나 비교하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비교하다 보니, 그 소유자가 느끼는 행복감도 덩달아 비교가 되는 식이다. 심리적인 가치를 물질이나 물건으로 둔갑시키는 예는 아주 많이 있다. 선물의 가격에 따라 애정과 존경의 정도를 가늠한다든지, 재산의 양으로 인격을 판단한다든지, 성적표의 점수로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모두가 물질의 양적인 가치와 심리적 질적 가치를 혼동하는 데서 발생하는 윤리적 오류들이다. 에피쿠로스(Epicurus)는 이 오류를 "어리석은 판단(idle opinion)"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건에 대한 우리의 욕망도 어리석은 판단의 좋은 예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쇼핑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물건을 구매하거나 소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어 보인다. 특히 현대인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핍한 기분을 잊기 위해 쇼핑몰을 기웃거린다(이와는 반대로 기업과 상인은 사람들이 쇼핑몰을 기웃거리도록 그들이 공허해지고 울적해지고 궁핍감을 느꼈으면 하고 바란다). 아름다운 원피스 한 벌이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준다고 정말로 믿는 푼수 떼기는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한 벌 장만하고 나면 최소한 새로운 사람은 만날 것 같아 보인다. 또 근사한 벤츠가 친구들 사이에서 본질적인 위신을 세워줄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바보는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한 대 뽑아 동창회에 나가면 왠지 자신감 비슷한 것이 솟아날 것만 같다. 터프해 보이는 흰색 코란도를 타면 기어 다니는 붉은색 티코 운전자를 깔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우중충한 철티비 보다는 뽀대나는 MTB가, 한 송이 보다는 한 다발의 장미가, 모나미 보다는 몽블랑이, 인스턴트 보다는 스타벅스 원두가 더 근사해 보이고, 무엇보다도 더 크고 더 많은 행복을 기대해도 될 것만 같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저렇게 "더" 부담스러운 물건들이 많을수록, 허기와 공허의 빈 자리는 "더" 커진다.

물질이 우리의 본질적인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데도, 우리는 왜 자꾸만 물질을 더 선호하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이에 대해 귀여우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Objects mimic in a material dimension what we require in a psychological one."(Alain de Botton,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p. 65)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흉내를 낸다."

이 멋진 말이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무능력과 태만이다.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욕망하는 것들, 가령 '사랑', '우정', '행복', '자신감', '자유', . . . 이 가치들은 우리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상태이다. 이들은 획득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 불가해한 심리 때문에, 예컨대 우리가 사랑에 빠져 버렸을 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내뱉는 말은 "내 마음 나도 몰라!"이다. 뿐만 아니라 우정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가치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잠을 설친다. 이때! 우리는 이들을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좀 더 쉽게 가질 수 있고, 좀 더 분명하게 그릴 수 있고, 좀 더 단단하게 잡을 수 있는 그 무엇, 바로 물건을!

사랑을 심장(Heart, ♡)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런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그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아는 것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려오는 것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사랑=심장이라는 도식이 생긴다. 한편, 사랑 받을 때 그녀는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랑을 받을 때 혹은 오르가즘을 느낄 때, 눈 앞에서 화사한 꽃밭이 보인다. 이제 그녀는 한 다발의 꽃을 받을 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질주의 쾌감을 주는 자동차가 자유를 주고, 열 잔의 술이 우정을, 고급스러운 저택이 행복을 준다고 믿게 되었다. 물건들이 우리의 심리적 욕망을 닮아가면서 물질적으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정복하려면 참을성이 필요한 우리의 복잡한 감정과 욕망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것과 대충 닮아 보이는 물건으로 재빨리 얼버무리는 것이다(사실, 문학에서의 은유라든가, 심지어 우리의 언어 자체가 이러한 재빠른 얼버무림이다).

이러한 얼버무림이 좀더 심해지면, 물신주의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가치들의 전도가 일어난다. 다이아몬드가 사랑의 원인이 되고, 대저택과 통장의 잔고가 행복의 출발이 되고, 자동차가 자유의 조건이 되는 식이다. 고착성 혹은 퇴행성 도착이라고 알려진 물신주의자가 스타킹을 성적 쾌감의 증표로 여기듯이, 우리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여 사회활동이나 우정을 대신해줄 것 같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우두커니 앉아있다.

Posted by huun

잔기침 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아, 가뜩이나 작은 도서관 열람실이 우울하게 침체되어 있다. 여기 저기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지겨운 사람들. 군내를 삼키는 소리. 마치 자신들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듯, 아니 그러길 바란다는 듯, 그들은 몇 시간 동안을 앉아 책과 펜을 쥐고 도를 닦으며 돌멩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도서관에는 소리 뿐만 아니라 냄새도 나지 않는다. 침묵의 공간에서 텍스트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침묵은 마치 블랙홀처럼 공간 전체의 대기를 빨아 마셔 버린다.

커피숍에서 뜨겁고 진한 원두커피 한 컵을 사 들고 열람실의 문을 연다. 발 뒤꿈치를 들고, 숨소리를 죽여, 내 자리를 찾아 조용히 착석한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고 책과 물건들을 꺼낸다. 열람실 안에서는 원칙적으로 음식물을 가져오면 안 된다. 커피는 가져올 수 있지만, 반드시 뚜껑을 닫아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저 돌덩어리들의 침묵과 잠을 방해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뚜껑에 나 있는 작은 구멍으로 커피를 홀짝거린다. 커피는 원래 뚜껑을 확 열고 마셔야 한다. 코를 가까이에 대고 뿜어 나오는 커피 향과 수증기를 함께 들이마셔야 커피의 진정한 분위기를 마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향도 맡을 수 없고, 뜨거운 입 소리를 낼 수도 없다. 이곳은 감각을 삭이는 곳이다. 감각을 깨우지 않고도 사는 법을 연습하는 곳이기도 하다. 육체-물질에 생기가 돌지 않도록,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혼란스럽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곳에 오래 다니다 보면, 정말로 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어쩐지 이들의 침묵이 짜증스럽고 화가 난다.

갑자기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홧김에 커피 뚜껑을 확 열어버리고 말았다.

야릇한 커피 향이 단숨에 방안 전체에 퍼지는 듯 하다. 사람들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에게 약을 올리듯, 나는 시치미를 떼고 살짝 소리를 내어 후루룩 거린다. 잠시 후 사람들은 뒤척이며 하나 둘 씩 일어나 가방을 뒤적인다. 지갑을 꺼내 들고는 자리를 비우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여자들이 더 심하게 동요하는 듯 하다. 뭔가가 되살아난 것이다. 잠시 후 그들도 잔을 들고 들어올 것이다. 감각! 축복인가? 저주인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천사 가브리엘이 대답해줄 수 있을까?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다 보면 온 몸이 뻐근해지고 쑤셔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혹은 앉은 채로, 몸을 비정상적인 체형으로 늘이거나 줄이면서 뻐근함의 고통을 중화시킨다. 신비주의자들의 수련에 요가의 탄생도 바로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몸은 생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활동을 억제하고 정지한 채로 오랫동안 있으면, 몸의 생기와 몸의 물질이 서로 싸움을 벌인다. 전자는 움직이고 싶어하고, 감각을 느끼고 싶어하고, 흐트러지고 싶어하고, 한 없이 떠나고 싶어한다. 반면에 후자는 아버지처럼 이러한 요동을 불허하고 고집스럽게 훼방을 놓으며 생기의 발랄함에 그늘을 드리운다.

(엄밀히 말해 그 고집스러움은 물질 그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물질에 투사된 관념 때문이다. 책상 앞에 몇 시간을 앉아있게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어떤 관념적 필요 때문이 아닌가? 지식에 대한 욕구라든가, 취직에 대한 공포라든가, 아니면 행복과 같은 필요 말이다. 육체는 두 파벌로 나뉜 정신적 지대들이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싸움터일 뿐이다. 그 파벌의 한 편에는 생기가, 다른 한편에는 물질 혹은 물질화된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하여튼 몸이 쑤시는 이유는 생기와 물질 양자의 긴장과 싸움 때문이다. 물질이 승리를 한다면 우리의 몸은 돌처럼 굳어져가며 팔다리와 어깨의 근육에 딱딱한 몽우리나 굳은 살이 박힌다. 물질의 승리가 더 지속될수록 몸의 생기는 점차 정체되어, 급기야는 생기의 정수랄 수 있는 정신조차 그 발랄함과 활력을 잃어버린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가끔씩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산책을 하고, 특히 간식을 먹는 것이다. 물질의 스트레스를 강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뒤척임과 간식의 양이 많아진다. 이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정체상태로 이끌 것이다.

문제는 간식이다. 산책과 운동은 많이 할 수록 좋을 수 있지만, 간식은 많이 먹을수록 우리의 생기 쪽 보다는 물질 쪽에 더 영향을 주므로, 결국 많은 간식은 물질을 강화하든가 아니면 비대하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어져 완전한 정체라고 할 수 있는 수면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간식을 먹지 않을 수는 없다! 한 잔의 진한 커피, 한 두 조각의 치즈 케이크, 기름 잔뜩 묻은 야채 튀김, 시뻘건 떡볶이, 지독한 냄새의 순대, . . . 이런 불량식품(?) 없이 인생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간식이 불량하면 불량할수록 느껴지는 감각의 맛은 더 짜릿하고 감미롭다. 돌처럼 뻣뻣해진 우리의 몸에 저토록 통쾌하게 반항하고, 반복에 지배된 지루한 일상에 저토록 쾌활하게 반란을 일으키는 물질들이 또 있을까? 그들 앞에서는 산책과 운동의 건전함이 왠지 성직자들의 미소처럼 위선으로 보일 정도이다. 저 간식들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의 탈을 쓴 생기가 아닐까? 젊은이들이 더 많이 좋아하고 더 친화력이 있어 보이는 까닭에, 아주 말이 안 되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건강 운운하는 주장은 궁색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간식 산업이 발전해야 한다. 우리 몸의 물질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신(新)물질로 이루어진 간식들이 새롭게 쏟아져 나와야 한다. 우리의 정체된 감각에 활력을 주되, 몸을 정체된 상태로 빠뜨리지 않는 그런 간식이 많아져야 한다. 아무리 먹어도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과용에도 중독이 되지 않도록. 무엇보다도 먹을수록 지겨워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생기가 고집스런 물질을 닮아가지 않도록.

Posted by huun

쉽고 편한 것을 택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습성은 사물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기가 쉬워서, 사물에 대한 해석이 단견에 머무르거나, 편협한 판단으로 자연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본질은 항상 뒤늦게 나오는 법이다. 우리가 시간을 단축시킬수록 그 본질의 지속력 역시 단축되어 꺼져버릴 소지가 크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본질은 사물의 핵심일 것이고, 핵심은 사물의 표면이 아니라 깊숙한 곳에 묻혀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려면 첫인상이나 단견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한참 동안 그 사물이 스스로 핵심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거나, 핵심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시간의 문제이고, 지속과 인내의 결과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개념에 익숙해있지 않다. 쉬운 예로, 우리는 원(圓)이나 구(球) 보다는 달 또는 쟁반이라고 말해주길 원한다. 원과 구는 감각이나 물질적으로 아직 명확히 결정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뭔가를 그려보거나 쟁반과 같은 경험적 사물로 직접 치환하는 수고를 겪어야만 한다. 추상은 뭔가를 억지로 떠올리도록 강요하여 우리를 수고스럽게 하는 그 무엇이다. 멍하니 쉬고 싶은데 자꾸만 뭔가를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추상이 우리는 싫다. 그래서 들통난 무기력과 자책감을 보상하기 위해 추상적인 모든 것을 허황된 것, 뜬 구름, 위선, . . . 과 같은 오명으로 낙인을 찍는다. 이 오명에는 우리의 좌절감과 게으름, 나아가 뻔뻔스러움 같은 것이 감추어져 있다.

글 보다는 그림이나 사진 혹은 동영상을 찾는 습관도 마찬가지이다. 글에는 감각적 형태가 없다. 아른하임(Rudolf Arnheim)이 어디선가 "구상시"(concrete poetry)를 논의하면서 잠깐 언급했듯이, 글은 마치 거대한 선박의 부속들이 제각각 땅바닥에 널브러져 해체되어 있는 것처럼 기호 조각들로 나열된 꾸러미이다. 우리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읽고 추상적 사유를 해서 그 부속들이 취하게 될 전체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스스로 통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글의 능동성이 주는 정서는 아이가 도표도 없이 장난감을 조립하는 노고와 기쁨 이상이 있다). 추상에는 도표도 없고 기준도 없으며 기댈 곳이 없다. 위대한 안토니오니(Michellangelo Antonioni)가 감독한 "잠재성"에 관한 영화 Blow Up에서 어느 화가는 자신이 그린 해석 불가능한 추상화 한 점을 놓고 이렇게 말한다: "기댈 곳을 찾으면 다음에는 아주 쉬워져! 여기가 다리고 여기가 몸이야!" 글과는 반대로 그림은 조각들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기 때문에(추상화 역시 색채라든가 선이라든가, 리듬의 측면에서는 역시 감각적이다), 더 쉽고 물질적이고 명확한 접근이 가능하다. 결국 추상에 대한 우리의 거부는 지도 보다는 직접 데려다 주기를, 요리법보다는 요리 자체를 대령해주기를 기대하는 우리의 다소 뻔뻔스러운 바램, 다시 말해 세계가 하나의 완성품으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기를 바라는 노예의 도덕이 많든 적든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니체가 노예를 혐오했던 것은 그 뻔뻔스러운 무기력 때문이 아니었나?).

추상적인 것, 잠재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 지각되지 않는 것을 사유할 수 없는 영혼은 먼 미래나 깊은 과거를 볼 수가 없다. 미래와 과거는 당장에 눈에 보이고 잡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비전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상태에 사로잡혀 있는 말초적 영혼은 도달하기가 어렵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1장에는 '소유로부터 벗어날 때 경험하게 되는 보편적이고도 묘한 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다(故常無慾以觀基妙, 常有慾以觀基徼). 바로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벗어나 그 "이전" 혹은 "이후"의 잠재적 세계에 도달하는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잠재적 세계는 뭔가가 불명확하고 명확히 결정이 안 된 상태, 더 정확히 말해 저 위의 화가처럼 자기 스스로가 일점(-點)을 찍거나 최초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태이므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힘들고 불안해서 우리는 단단하게 기대어 잡을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요즘의 소비사회에서는 불행하게도 그 기댈 곳이 주로 물질-상품-소유물이다. 공허를 식욕이나 쇼핑으로 채우려 하거나, 육체의 소유와 사랑을 쉽게 혼동함으로써, 충만에 도달하는 시간을 손쉽게 단축시킬 것처럼 보이는 물건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글을 쓰는 일들은 모두가 잠재적 행위들인데, 거기서 기댈 곳이 없어 답답하고 불안한 우리는 이를 견디기 어려워 자꾸만 감각적 물질과 대상 쪽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몰고 가려는 충동을 가누지 못한다. 책상에 앉았다가 곧 일어나 커피잔을 찾거나, 손에 쥔 볼펜에 눈길을 주거나, 인터넷 쇼핑몰을 뒤지거나, 담배를 물거나, . . .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더 깊은 허기와 공허와 싫증과 참담으로 끝나기가 일쑤이다.

추상적 사유에 대한 거부, 그리고 사물의 잠재적 징후로부터 발산하는 비전에 대한 무지, 다시 말해 물질적 가시성에의 중독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영혼의 표상이다. 또 단순한 인간은 자신의 편견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고 주변 사람들조차 그 단순성으로 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도 실패한 사람이 될 소지가 크다. 단순한 눈에 비친 모든 것은 진부하고 따분하고 지리멸렬해 보이기 때문에, 타자가 무가치해 보이고 경시할만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현대의 악은 도덕적 종교적 타락이 아니라 진부함, 바로 진부한 시선이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와 새커리(William MakepeaceThackeray)가 잘 지적했듯이, 진부함의 사회적 원천은 주로 저널리즘에서 출발하는데, 기자와 언론인의 도덕적 타락은 개인의 품성 문제와 경제적 문제 외에도, 그 직업 활동이 취하는 선천적 성질에 기인하는 것이다.

물질에는 심층적인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양태가 항상 가시적이다. 행위가 가해질 때 물질은 즉각적이고도 분명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의지에 따라 만지는 대로, 물리적 질서에 따라 주무르는 대로, 그것은 어김없이 우리에게 화답을 한다. 적절히 온도만 맞는다면, 물질은 우리의 요구에 반하거나 거짓말하는 법이 없다. 인간이 물질과 싸움을 벌이거나 투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물질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순전히 우리 자신의 문제일 뿐이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행위가 얻게 될 그 결과에 있어 기만적인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물건에 대한 우리의 중독성의 근원이 있다. 행위에 대한 결과의 즉각성과 명쾌함은 우리에게 어떤 희열감을 주는데, 이 희열감 때문에 우리는 자꾸만 그것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공원에서 모형 비행기를 날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적당한 조작을 통해 조립을 해서 그것을 공중에 날리는 순간, 그들은 물질과 자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묘한 질서에의 희열을 느낀다. 또 위키(Wiki) 프로그램이나 설치형 블로그 프로그램을 자신의 서버에 설치하고 필요한 설정을 바꾼다. 서버에 설정된 파일을 올리고 다시 이를 웹브라우저로 확인한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바뀐 것을 보고는, 물질적, 현실적, 가시적 실현을 확인한다. 그 순간 자신이 신이 된 것 같은 희열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즉각적 변화로부터 오는 희열감은 창조의 기쁨이기 보다는, 어떠한 질서에 대한 확신과 그 질서로부터 배제되지 않은 자기자신,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참여의 안도감 같은 것이다. 주어진 요소들을 짜맞추고 조립하여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안도감을 느낀다. 플라톤(Platon)이 말했던 획득의 테크네(techne)가 주는 희열, 혹은 조립품이 주는 기쁨이란 이러한 것이다.

간혹 작가들조차도 이러한 희열감의 함정에 빠진다. 글쓰기의 본질인 잠재적 역량을 키우는데 힘을 쏟는 대신, 새로운 단어와 표현체를 찾고자 열망하는 것이다. 실상 잠재적 역량이 너무 얕고 짧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대신해줄 적절한 육체와 옷을 찾길 바란다. 그래서 일상적 단어나 문장으로도 충분히 표현이 가능한 경험 위에 어울리지 않는 육체와 옷을 입힌다. 그들의 언어는 너무 수사적이고 장식적이어서, 우리의 눈과 마음은 그들이 어질러 놓은 장식물들을 구별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왜소한 역량에 비해 입은 옷이 너무 커서 공허해지는 것이다.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산문은 지속력이 있어야 하므로 속이기가 쉽지 않은 반면, 시는 쉽게 현혹시키고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를 쓰기 보다는 읽을 줄 아는 것이 더 어렵고 비범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물질성의 공허함은 패션(Fashion)이 창출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패션이란 새로운 취향의 창출이 아니다. 그것은 진부함을 생산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유행이란 단순히 감상이나 유희를 넘어서 구매와 연관이 있어야만 하는데, 구매는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나 실험정신 혹은 탐구정신의 소산이기 보다는, 따분하고 공허한 심리 혹은 진부한 삶 일수록 더 강렬해지고, 또 그러한 삶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 구절의 시 보다는 신상품 원피스가 더 반갑다. 친구들 틈에서 나를 더 우쭐하게 만들어줄 것 같은 것은 바로 후자이다. 다루기도 쉽고 결과도 명확한 물질성에 비해, 비물질적인 것은 언제나 느리고 더디다. 나의 글 한편이 내 삶을 바꾸어 놓았는가? 나의 도덕과 의로움이 이 사회를 변화시켰는가? 언제쯤이나 도래할지 알 수 없는 그 심연의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우리는 계속해서 울긋불긋한 물질로, 대상으로, 쇼핑몰로, 물건들로, 상징들로 되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중에 나오기 마련인 그 무엇에 등을 돌린 우리의 삶은 공허하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