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자연적인 현상과 같이 믿기 어려운 일을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려면 몇 가지 조건들이 수반된다. 예를 들어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사람들은 비상식적이거나 초경험적인 일은 가급적이면 믿으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한 삶에 동요를 일으키는 일이고, 그것을 묵인하고 받아들이려면 개인의 능력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믿음은 아주 오랫동안의 망설임 끝에 내린 최종적인 결정과도 같다. 그래서 믿음은 판단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실천의 영역에 속한다. 믿음이 쉽게 달라지지 않으며, 끈질기게 사람들의 육신을 붙들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것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려면, 이미 와버린 거리만큼 되돌아가도 괜찮을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매력이란 우선 상식의 수준에서 즉 삶에 어떤 동요를 불러오지 않고도(혹은 강요를 받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개연성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상식적이지 않은 일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상식이 습관에 대한 일종의 자기 인식이기 때문이다. 즉 상식이란 안전한 것, 위협적이지 않은 것, 그래서 편안한 것을 뜻한다. 그래서 강요된 믿음은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래가지도 못한다. 작가들의 픽션이 한낱 거짓말에 불과함에도, 사람들이 반복해서 그것을 찾고 믿는 이유는, 픽션이 바로 상식이나 습관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그다지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픽션의 즐거움이란 바로 거기에 있다.
다음으로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물론 개연성의 한 결과이긴 하지만). 어떤 종류의 현상이 객관적인 것이 되려면 두 사람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그에 관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은 심지어는 법적인 효력까지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동의라는 것은 대체로 반복적인 경험, 다르게 말해 공통의 경험 속에서 생겨난다. 객관성이란 바로 공범의식(공모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객관성과 공범의식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이라고 간주된 것을 통해 공범의식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필요에 의해 생겨난 공범의식이 객관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둘의 결합 속에서 사건에 대한 공통의 믿음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공모의식에 의해 발생하였고, 또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는 가장 강렬한 형태의 믿음은 바로 종교일 것이다.
저 두 가지 조건(개연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을 구체화하려면, 당연히 사람들로 하여금 경험적으로 목격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 경험은 보다 감각적일수록 좋다. 이야기로 전해들은 것보다는 직접 보게끔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믿고 있는 저 공모의식이 단순히 생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라는 객관화된 현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소설이나 상상보다는 영화가 더 효과적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저 조건들을 완성하고 실현시키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있다면 무엇일까? 바로 과학-테크놀러지가 아닐까? 과학-테크놀러지는 현대에 등장하여 기독교와 같은 초월적 종교를 대체한 새로운 형태의 종교(더 정확히는 성경)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상들을 감각-경험적으로 목격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현미경이나 망원경 혹은 카메라 등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 감각 내재적 종교가 재현하고 있는 내용은 더 이상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니며, 권위 있는 사람의 설교를 통해 가지게 되는 믿음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라, 말하자면 믿음을 가능케 하는 믿음, 혹은 믿음 이전에 존재하는 절대적 사실 같은 것, 즉 증명하거나 직접 보여줌으로써만 가능한 믿음이다. 그래서 그 믿음을 지속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동의나 종교적 의식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런 종류의 이차적인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신(神)보다도 더 한 존재, 오히려 신을 의심하게 하는 믿음, 바로 객관성이라는 믿음이다.
Science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개연적 픽션이 이를 가능케 했다. 그리고 교회나 성당과 같은 이데올로기 기관-장치들을 대체한 현대식 학교가, 종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류 차원의 대규모의 교육을 통해 이를 실천한다. 그것은 종교가 생각지도 못했던 객관성을 앞세워서,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알고 있었고 은밀히 신뢰해 왔던 신비적 존재(미신이나 종교적 대상들)가, 대낮의 허깨비에 불과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주었다. 비록 아직도 그 믿음을 갖는 이들이 많지만, 어쨌든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때문에 알 수 없는 어떤 신비물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아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 대상들 역시 이를 잘 알아서인지, 혹은 그 계몽의 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인지, 더 이상 대낮에 출몰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드라큐라(Dracula)가 바로 그 전선의 최후까지 살아남은 마지막 존재가 아닐까? 드라큐라의 진정한 적은 십자가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중세적 취미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뒤늦은 해석에 불과하다. 그의 진정한 적은 바로 빛! 너무나 눈이 부셔서 살짝 만의 노출이라도 모든 어둠을 태워버리는 빛! 모든 존재를 훤하게 드러나게 하여 그 객관적 실체를 믿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는 빛! 빛은 드라큐라를 물리치거나 찔러 죽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과학은 감각적이고도 물질적인 경험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으며, 나아가 우리의 삶을 둘로 분리했다. 한편에는 대낮의 객관성, 다른 한편에는 밤의 신비가 그것이다. 그리고 과학이 우리에게 최근 들어 가르쳐주었던 그 몇 안 되는 내용들은, 단 몇 세기 정도의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우리의 습관적 믿음이 되어 왔다.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 즉 과학이 포착할 수 있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믿음으로써,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대낮의 생활로부터 몰아내었다. 기독교가 금기(禁忌)라는 수단을 이용해 획득하고 싶어 했던 신의 객관성(기독교는 미신을 싫어한다)을 과학은 빛의 논리(logic)로 달성한다. 그 빛의 논리를 가장 잘 구현해주었던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기계 테크놀러지일 것이다.
빛의 구현으로서의 테크놀러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예증해주는 것이 바로 영화이다. 영화는 허구적인 내용을 다룰 때에도 이미 그 내용물의 객관성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어떤 식으로든 배우는 존재해야만 하고, 그가 활동하는 환경 역시, 만들어진 세트이건 자연물이건, 주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그래서 그래픽과 같은 특수촬영을 주로 사용하는 영화는 그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영화는 환상이기 보다는 일종의 환각에 가까운데, 감각에 호소하는 과학적 믿음이 개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는 거울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오래된 규칙은 바로 저러한 믿음에 기인한다. 가령, 계속해서 등장하는 한 여인이 귀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거울에 비추어지지 않는 그녀를 보여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 경우에 거울은 객관적 관점을 증명하는 하나의 테크놀러지이다. 물론 영화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이 언제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또 그 두 관점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대체로 객관적 대상이란 테크놀러지에 의해 반영(테크놀러지화)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 같다. 또 이것이 주관성이 객관성으로 전환되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오래 전부터 일본의 공포 영화들(최근엔 우리의 영화들까지)은 대부분이 전화라든가, 텔레비전, 통신장비, 비디오, 카메라와 같은 매체들을 등장시켜, 그를 이용해 초자연적 현상을 목격하는 것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소복을 입은 귀신이 카메라 쪽으로 기괴한 걸음으로 걸어오다가, 급기야는 텔레비전을 뚫고 기어 나오는 이미지까지 묘사한다(이 장면은 1998년에 나카타 히데오가 감독한 『The Ring』(リング)의 한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무서웠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재구성되었는데, 모두가 기술매체에 의해 두 세계가(현실적 세계와 잠재적 세계) 강제적으로 연결된다는 테마로 이루어졌다. 그와 같은 방법이 다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무섭고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두 세계가 연결되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 보다는 바로 과학-테크놀러지가 거부했던, 그래서 그 믿음에 따라 우리도 역시 인정하지 않았던 그 존재를, 이번엔 다름 아닌 그 과학-테크놀러지를 통해 우리가 직접 목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조차 하지 말 것을 독려했던 그가 오히려 그 객관적 실체를 눈앞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카메라에 찍힌 귀신! 거울 속에서 따로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존재!(이 소재는 김성호가 감독한 『거울 속으로』(2003)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니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처음엔 그냥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잠재적 존재가 과학-테크놀러지에 의해 현실적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텔레비전이 그녀를 나오게 하였다. 저 『The Ring』이라는 영화는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불안이 경악이 되는 중간 지점에 테크놀러지라는 촉매장치를 삽입함으로써,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 것, 신(神)보다도 더 믿음직했던 우리의 현대적 종교, 즉 객관적 현실에 대한 과학적 믿음이, 오히려 그 자신으로 인해 무력해지고 있음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 예이다.
최근 들어 공포영화 작가들이 기계적인 테크놀러지를 통해 초자연적 존재를 보여줌으로써, 그 존재는 우리의 오래된 믿음(과학적 믿음)에 힘입어 실존하는 것으로 둔갑하고, 나아가 이번엔 우리의 믿음 자체까지 무력하게 만드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초자연성을 부정하고 몰아내었던 주체(과학-테크놀러지)를 통해 오히려 그 존재를 목격하고 증명하게 하는 방식! 정말로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의 한 형식처럼 이루어진 것 같다. 적에게 굴복하고 심지어는 적장의 수하가 되어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도록 명령을 받은 우리의 영웅이라고나 할까?
과학-테크놀러지는 심리적 사실보다는 객관적 물질에 관계한다. 그래서 그것의 미덕은 어떠한 것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사하고, 작용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적나라함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너무 믿는 경향이 있다. 그 믿음은 전적으로 무의식에 속한다. 사진에 찍힌 피사체를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믿는다. 귀신이 카메라에 찍혀서 우리가 어떤 놀라움을 갖는 것은, 우리의 믿음 속에서 두 가지 모순되는 경향들이 서로 팽팽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믿음, 즉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학의 언어가 도리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 즉 그 존재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두 모순적 상황이 우리를 당혹감과 놀라움으로 이끌고 있다. 공포영화에는 바로 현대적 믿음의 내재적 모순(충돌)이 있다. 그리고 공포영화란 언제든지 믿음에 관한, 믿음과 그 시련에 관한, 혹은 믿음의 재확인에 관한 영화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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