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한 일류대 학생인 S를 생각해 본다. 몇 년전에 내 수업을 들었던, 아주 똑똑한 학생이었다.
물론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똑똑한 학생들이 아주 많다. 공부로 치자면 고등학교때 나름대로 날고 기던 녀석들이니 말이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간혹 보이는 그들의 성실과 진중함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끼가 있는 학생들은 흔치가 않다. 일단 시험 점수만 좋으면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교육 환경 탓인지, 그들의 성실과 영리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길러져 있다. 그래서 시험이라든가, 성적이라든가, 취업이라든가, 영어라든가, 출세라든가 하는, 근거가 분명치 않은데도, 사람들이 확고하게 믿고 있는 가치들을 내면화하고, 쟁취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훈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빠른 두뇌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들도 그 해답을 척척 찾아 풀어낸다. 도저히 풀수 없는 문제들도, 그 나름대로 얼버무리는 법을 찾아, 위기를 모면하고, 자신을 쾌적한 상태로 몰고갈 줄을 안다. 그들의 지능, 임기응변, 직감, . . . 사는데 필요한 그러한 능력들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정도로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놀라운 두뇌는 어떤 점에서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그러한 빠른 두뇌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해가되고, 독이되는 경우가 더 많이 있는 것이다. 지능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 가령, 오만, 편견, 이기심, 냉소, . . .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단점들은 그들의 지능이 타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단점은 바로 그들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단점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개인적)능력으로 인해, 주어진 환경이 가하는 보편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바로 그 주어진 환경 속에 안주해서, 그 환경이 주는 혜택에 만족하며, 그러한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습성이다. 뛰어난 지능이 오히려 그들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회의 악습을 불변의 진리처럼 확고하게 만들고 보존하는 이들은 다름아닌 저러한 지능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 때문에 바뀌길 바라겠는가?
그들은 시험을 잘 보지만, 어째서 시험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어 성적이 뛰어나지만, 어째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왜 영어인지, 왜 미국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자신을 가꾸고, 가치를 올리는 법을 잘 알지만, 어째서 취업을 하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지, 싸워서 이겨야 하는지,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자신의 의지도 아닌 기업의 의지로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싸워서 이기는 법은 잘 알지만, 싸움을 중단할 방도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남에 살지만, 왜 강남과 강북이 있는지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진한 모습이 가시지 않은, 아직은 영글지 않은 속물이지만, 일류대학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일류대학 물을 먹은 자의 자리가 어딘지를 꿰뚫어 보며, 가슴 속에는 항상 일류 대학의 뱃지가 달려 있음을 스스로 본다. 그러나 일류대학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성적을 잘 받기 위해 선생님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터득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타협이고 대화이고 처신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 앞에 던져진 문제는 묵묵히 잘 풀지만, 자신의 문제를 만들 줄 모르며,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며, 질문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소해 있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난데없이 뚝 떨어진 천재지변인냥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그냥 적응하고 감수하며 살아간다. 한마디로 영리한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다. 영리한 노예는 다른 노예를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한다. 그리고는 교육을 통해, 최고의 협잡꾼이 되는 방법을 터득한다. 간혹 잘 영글은 협잡꾼으로 성장한 이들 중에는, 그 협잡의 미소에서 나오는 지독한 악취 때문에, 도저히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경우도 있다.
지식인의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사회의 유기적 질서를 온전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지식인이다. 이 지식인은 성실하고, 일처리가 재빠르며, 위험성이 없고, 사회와 우애가 돈독한 지식인이다. 이 지식인은 사회가 필요로하는 지식인이고,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과 기술과 능력을 온 몸에 갖추고, 다소곳이 부름을 기다리는 지식인이다. 한마디로 "괜찮은 녀석"이다. 하지만 또 다른 부류의 지식인도 있다. 그 지식인은 사사건건 사회와 불화를 맺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사회 밖에서, 사회를 향해 비판하고,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한다. 저 위의 "유기적 지식인"과 이 "비판적 지식인"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질문 내용의 차이인데, 전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면, 후자는 바로 사회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는 것이다. 이 비판적 지성이 갖추어야 할 능력은 영어실력도 아니고, 직감도 아니고, 재빠른 일처리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인문학적인 끼가 있어야 한다. "괜찮은 녀석" 혹은 "협잡꾼"이 아닌 "배신자"의 끼 말이다. 협잡꾼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배신자의 배신은 정말로 기분을 잡치고, 실망스러우며, 식욕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그 배신자는 대체로 혼자서 밥을 먹거나, 아니면 굶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런 지식인은 한국에는 별로 없다. 식사는 반드시 함께 해야하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아서인지, . . .
S 얘기를 하다가 이상한 얘기까지 나왔는데, . . .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아직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에게는 약간의 "배신자의 끼"가 보인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대부분이 군대에 갔다 오고 졸업반이 되면서 아주 늠름하고 의젓한 "괜찮은 놈"이 되어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만 말이다. . . .
녀석이 최근엔 철학에 빠져 있다고 했다. 자기에게 맞는 전공이 뭔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철학이었다고. 가슴이 뿌듯하다고, 계속 공부하겠다고, 갈길이 열린 것 같다고. 그래서 내가 약간 걱정투로 얘기해 주었다.
"신중하게 생각해라. 밥 굶을 수도 있다!"
그랬더니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그냥 굶을래요!"
나중에 든 생각인데, 녀석이 완전히 날 배신한 거다. 2년 전인가? 처음에 내가 그에게 밥을 사준 적이 있었다(탕수육과 짜장면).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밥 먹으러 가면서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녀석이 난데 없이 이렇게 말했던 것을 틀림없이 기억한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선생님한테 맞있는거 사줄거예요!"
배신자에게는 언제나 배고픔이 따르지만, 주변 사람들도 배고프게 한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알기를 바란다. 배신자의 친구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굶을 각오가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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