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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16 에너지의 두 체계 (27)

에너지를 수용할 그릇의 용적 때문이든,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이유에서이든, 에너지의 증가가 특정한 한계(긴장)에 이르게 되면, 계속 증가하는 그 에너지의 처리와 소비에 관련된 두 가지 경제가 등장한다. (1) 과잉 에너지를 저장하거나 처리할 다른 신체나 장소를 물색하는 경우: 가령,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자. 알베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열정이 너무 과도하게 된다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베르테르의 처리방식은, 남아도는 에너지의 포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이를 현실도피 혹은 비겁함이라고 단정한다. 그에 따르면, 이 열정이나 에너지는 계속 축적되거나 보존되어야만 한다. 산다는 것! 생활의 지속을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쌓아 놓고 조금씩 절약하며 사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에너지를 담을 장소로서 새로운 다른 존재들이 필요해 진다. 로테, 가족, 동업자, 사업, . . . 이렇게 해서 알베르트에게 생활의 모든 측면은 소유의 문제로 귀결되며, 이것이 바로 그가 언제나 에너지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으로서, 제도의 언어, 계약의 언어, 권력의 언어를 통해 말을 하는 이유이다. (2) 과잉 에너지를 아무런 조건이나 유보 없이 낭비해 버리는 경우: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의 자살에 관한 논쟁에서, 알베르트가 자살을 비겁함이라고 간주한 것에 대해, 이 낭비의 경제방식을 설명함으로써 응수한다. 베르테르의 요체는, 신체가 노쇠하거나 더 이상 어떠한 에너지를 변형하거나 수용할 수 없을 때 파괴되거나 죽듯이, 우리의 열정이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이 열정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정신은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비겁자! 라고 비난을 하거나(알베르트가 그랬듯이), 시간이 해결해 줄거야! 라고 위로하는 일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난과 위로는,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더 이상 자신을 유지할 수 없어 죽음에 직면한 노인에게, 비겁자! 라고 말하거나 혹은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그만 일어나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점점 팽창하는 베르테르의 열정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초과 상태에 이르러, 결국 그는 이 경제의 극단적 형태인 육체의 파열을 선택한다: 죽음! 열정을 대기중에 흩뿌린다고나 할까? 이 방식에 따른다면 자살은 가장 급진적인, 절대적 자유이다.


에너지의 처리와 소비에 관한 두 체계가 있는데, “한편에는 부르주아의 포획경제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분산적이고 낭비하고 광란하는 변태적 경제가 있다”(Roland Barthes.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lish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p.85). 또한 이 두 경제 체계는 각각 충만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상반적인 해석을 내리는데, 한쪽은 아름다움을 죽음에 관계짓고, 다른 한 쪽은 그것을 소유에 관계짓는다. 그런데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아이러닉한 결과를 낳는다: 괴테가 베르테르를 통해 주장한 자살론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행이 되어(베르테리즘), 많은 희생자들을 낳게 한 원인이라고 영국의 한 주교로부터 비난받았을 때(심지어 연미복이나 자살의 유행은 19세기의 문학비평의 판도에 영향을 미쳤다), 괴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한다: “당신들의 경제 체제는 수천 수만의 희생자들을 필요로 하는데, 베르테르와 같은 젊은이 몇 명의 죽음쯤이야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한편에는 죽음의 긍정이 있고(베르테르), 다른 한편에는 죽음의 부정이 있다(알베르트). 그런데 묘하게도 이 두 입장의 본질과 그 결과는 서로 반대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