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를 수용할 그릇의 용적 때문이든,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이유에서이든, 에너지의 증가가 특정한 한계(긴장)에 이르게 되면, 계속 증가하는 그 에너지의 처리와 소비에 관련된 두 가지 경제가 등장한다. (1) 과잉 에너지를 저장하거나 처리할 다른 신체나 장소를 물색하는 경우: 가령,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자. 알베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열정이 너무 과도하게 된다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베르테르의 처리방식은, 남아도는 에너지의 포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이를 현실도피 혹은 비겁함이라고 단정한다. 그에 따르면, 이 열정이나 에너지는 계속 축적되거나 보존되어야만 한다. 산다는 것! 생활의 지속을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쌓아 놓고 조금씩 절약하며 사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에너지를 담을 장소로서 새로운 다른 존재들이 필요해 진다. 로테, 가족, 동업자, 사업, . . . 이렇게 해서 알베르트에게 생활의 모든 측면은 소유의 문제로 귀결되며, 이것이 바로 그가 언제나 에너지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으로서, 제도의 언어, 계약의 언어, 권력의 언어를 통해 말을 하는 이유이다. (2) 과잉 에너지를 아무런 조건이나 유보 없이 낭비해 버리는 경우: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의 자살에 관한 논쟁에서, 알베르트가 자살을 비겁함이라고 간주한 것에 대해, 이 낭비의 경제방식을 설명함으로써 응수한다. 베르테르의 요체는, 신체가 노쇠하거나 더 이상 어떠한 에너지를 변형하거나 수용할 수 없을 때 파괴되거나 죽듯이, 우리의 열정이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이 열정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정신은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비겁자! 라고 비난을 하거나(알베르트가 그랬듯이), 시간이 해결해 줄거야! 라고 위로하는 일은 터무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난과 위로는,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더 이상 자신을 유지할 수 없어 죽음에 직면한 노인에게, 비겁자! 라고 말하거나 혹은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 그만 일어나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점점 팽창하는 베르테르의 열정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초과 상태에 이르러, 결국 그는 이 경제의 극단적 형태인 육체의 파열을 선택한다: 죽음! 열정을 대기중에 흩뿌린다고나 할까? 이 방식에 따른다면 자살은 가장 급진적인, 절대적 자유이다.
에너지의 처리와 소비에 관한 두 체계가 있는데, “한편에는 부르주아의 포획경제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분산적이고 낭비하고 광란하는 변태적 경제가 있다”(Roland Barthes.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lish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p.85). 또한 이 두 경제 체계는 각각 충만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상반적인 해석을 내리는데, 한쪽은 아름다움을 죽음에 관계짓고, 다른 한 쪽은 그것을 소유에 관계짓는다. 그런데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아이러닉한 결과를 낳는다: 괴테가 베르테르를 통해 주장한 자살론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행이 되어(베르테리즘), 많은 희생자들을 낳게 한 원인이라고 영국의 한 주교로부터 비난받았을 때(심지어 연미복이나 자살의 유행은 19세기의 문학비평의 판도에 영향을 미쳤다), 괴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한다: “당신들의 경제 체제는 수천 수만의 희생자들을 필요로 하는데, 베르테르와 같은 젊은이 몇 명의 죽음쯤이야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한편에는 죽음의 긍정이 있고(베르테르), 다른 한편에는 죽음의 부정이 있다(알베르트). 그런데 묘하게도 이 두 입장의 본질과 그 결과는 서로 반대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문예 노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것도 자꾸 읽다보니...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것이 재밌기도 하고...기특한것 같기도 하고...
^ㅡㅡㅡㅡ^ 2006/04/02 11:40
저는 베르테르의 입장에 더 수긍합니다(완전한 지지는 아니더라도) 에너지의 효율성만을 따지면 알베르트가 영악한 거지만, 젊음에서 효율성만 따지고 있으면 그건 젊은다움 젊음이 아닐겝니다..물론 에너지가 한 쪽으로만 치우쳐서 삶의 균형을 깨버리면 '광란하는 변태적' 경제로 전락하겠지만,,
<과잉 에너지>라기보단 <편중된 에너지>가 아닐까요,,그게 그건가? ^^; 그런데, 베르테르의 열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열정>으로 한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의 열정이 받아들여졌다면, <포화>상태에 이르러 자폭하지는 않았을테니까요. 음..그렇담 받아들여진 열정은 점차로 중성자化하여, 모자라는 전자를 채우려는 래디컬한 기운이 없어져서 더 이상 <열정>이란 이름이 무색해져 버리는 지도 모르지요
마지막에 "두 입장의 <본질과 그 결과>는 서로 <반대>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를 좀 더 설명해 주시와요^^ 명확하게 뜻이 들어오질 않아서.. 2006/04/02 13:40
경제를 에너지의 베르트르적인 것과 알베르트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는 롤랑 바르트의 견해가 흥미롭군요. 아담스미스적인 수치적 경제에 대한 이해가 그 당시의 세계관에 대한 또 새로운 해석이라면, 롤랑바르트의 견해도 아담 스미스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드는군요. 경제가 되었든 물리가 되었던 본질과 결과를 이야기하는 아리스토씨의 화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 같기도 하지만, 제 생각엔 그러한 롤랑씨의 경제읽기는 현재의 심리학이 추구하는 것이 경제적인 것과 무관치 않다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 같기도 하네요. 데까르트씨 이래(?)로 지속되었던 인간의 심신2원적 구도는 심리적인 것과 현실적이거나 물리적인 것과에 대한 본질적 단절을 지속해 왔지만, 롤씨의 이러한 견해는 그러한 구분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같기도 하군요. 흔히 이야기되는 에너지 물질등가법칙의 파장인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원리적인 것에 대한 이해와.. 2006/04/02 21:02
그러한 원리로 부터 모든 것을 도출하려던 원자론자들의 전통이 위해서 말한대로 동일한 체계와 또 그에대한 상반적해석에서 생기는 모순으로 부정되는 것도 인간과 우주에 대한 2원적 구도에 대한 새로운 시발점을 주는 것일 것이구요....
언젠가 배웠던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적인 견해에 대한 종합적 해석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는 바르트르의 에너지와 경제에 대한 단편은 비록 에너지와 경제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도출할 지는 몰라도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그랬던 것처럼 획분적이고 분석적인 이해에 대한 한계를 극복할 단서를 주는 것 같기도 하네요. 2006/04/02 21:07
네. .사과님 . . 아직 젊으시군요. . 아니면, 젊고 싶으신건가?^^ . . . 괴테가 그랬답니다 . ."젊은 날의 꿈을 멸시하게 된 자! 비참하도다!" . . .
열정을 나눈다? 받아들여진다? 음 . . 글쎄요 . . 아. 그래서, 결혼들을 하면 그 열정이 중화되어, 다들 권태기 오고, 바람피고 그러나? 받아들여져서 열효율이 배가되는 경우는 없을까요?^^
마지막 문장은, 이미 괴테의 인용문이 말해주듯이,..알베르트는 자살을 부정하면서, 사실은 더 많은 죽음을 낳고(영국의 경제체제처럼) . . 베르테르는 자살을 긍정하면서, 혼자 죽어버리고.. .^^
죽음이라는게, 꼭 생명체의 목숨만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써버린다. 낭비한다. 소모한다. . . 그런 의미도 있잖아요. 알베르트에 따르면 베르테르의 자살은 에너지의 낭비이고.. 그래서 그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결혼하고, 누군가를 소유하고, 고용하고..등의 일종의 전이행위들을 하죠..그러면서, 다른 존재들을 죽음에 이르게하는 거죠.."부르주아의 포획경제"라는 말이 그 말이랍니다..소유하고, 침략하고, 영토를 늘이고, . . 하면서, 더 큰 희생을 요구하는 방식이죠..하지만 베르테르의 경우엔 낭비해버리고, 소모해버림으로써, 자신의 에너지를 우주 전체의 흐름속에 흩뿌려버리는 거예요..그러니, 처음에 의도했던 대로, 죽음과 낭비를 부정하고 긍정하는 두 방식이 결국,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셈이죠.
네..song 님. ."백과전서식 아방가르드"...고생 많으셨습니다..귀 담아 두겠습니다... 그런데요,..가수 조영남 아시죠? 그 사람이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앙드레 김"을 뭐라고 불렀냐하면, "앙 선생님"이라고 불렀거든요? . .웃겨 죽는줄 알았어요..대단한 유머라고 생각했죠..그런데 지금 보니 song님이 그 유머를 쓰고 계시네요? "아리스토씨", "롤랑씨", "데카르트씨', . . . 급기야는 "롤씨"!! . . . 2006/04/03 02:30
아,네.. 더 큰 희생을 부르니까 반대가 된다고요..^^
아참!! '받아들여져서' 열효율이 배가, 아니 10만 khw이상의 에너지를 내는 결합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모두 <중수소>가 되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면 되네요 ㅋㅋㅋ
그리고 yhunsong님~ 심신(영육) 이원적 구도는 데카르트시절부터가 아니라 플라톤때부터 아닙니까? 그리고 인간의 靈은 하늘의 본질(이데아/누메나)로부터
분수받은 '그림자(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소위 본질을 우위의 가치로 두는 바로 그 구도가 기독교의 근간이고요..yhunsong님의 말씀은 언제나 너무 어려워요^^ 2006/04/03 07:34
마음의 분열이 모든 에너지의 낭비를 부릅니까?
되고자 하는 나의 모든 노력은 마음의 분열를 가져 옵니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도 거절도 아닌, 선택 없는 열정만이 낭비 없는 에너지를 이해하는 것. 낭비 없는 쾌락을 창조하는 삶은 어떤 희생도 보상도 필요가 없는 것인가 봐요. 2006/04/03 12:46
그렇게 이야기 하시니 과분한 칭찬이란 생각이 드네요.
둘 다 거부하고 싶지는 않은 칭찬이지만, 분수를 아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둘다 쉬운 건 아니니 말이죠.
앙드레 씨 앙씨라고 부른 조씨에 대해서는 제가 뭐라고 할 형편이 아니지만, 사실 ~씨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정형적 규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극히 특수한 경우에 해당하고 우리민족의 오랜 역사와 통일 신라와 고려를 통해 보이는 민족의 활동 영역을 생각할 때 ~씨란 어법을 조금 더 자유스럽게 쓰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사과 꽃님,,,
물론 이원적 관점에 관해서는 배화교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동양의 음양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 데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이원적 파악과 데카르트의 이원적 파악은 조금 다른다 그러더군요. 미토스적 세계에서 로고스적 세계로 들어서면서 세계를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보는 것을 이분적 관점의 시작으로 이야기 할수 있을 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선악의 관점을 이분적으로 보는 것을 이원으로 이야기 해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무한히 능력이 많으신 분이니 결국은 기독교는 일원론이 아닐까 하는 거지요. 모든 것이 허상이고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만이 진리요 실체인 걸 생각하면, 사실은 기독교에서의 세계관은 선도 악도 모두 하나님에 의한 것이고 단지 유한한 인간이기에 고민해야할 문제가 아닐까 하네요???? 2006/04/03 19:10
yhunsong님, 로고스가 비록 그리이스에서 탄생했고 헬레니즘 시대에 스토아 학파에 의해 종교적 개념으로 변모했지만 로고스는 기독사상(신약)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요? <로고스적 세계로 들어서면서..'이분적' 관점의 시작으로..> 그리고 <기독교는 일원론이 아닐까..>라니요,
무엇이든 뚫는 창과 어떤 창도 뚫지 못하는 방패'네요..
그리고 저는 <선과 악>의 이분을 말 한게 아니라(연관성이야 있지만), 육체를 정신의 집(껍데기)로 취급하는 이분법을 말한겁니다.
신약성서에 헬레니즘의 영향이(로고스 포함) 여러군데 드러나는 건(특히 요한복음) 이미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있지 않은가요?
게다가,"그리이스어로 말하는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아람어를 쓰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깊이 예수의 의도를 이해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2006/04/03 21:53
위의 " " 인용은 다음의 책입니다. (page246,'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토를라이프 보만/허혁 옮김, 분도출판사) 아직 안보셨으면 한번,,
2006/04/03 21:56
음 . . . 근데, 분도출판사가 어디지?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네요 . . in 뉴질랜드? 2006/04/04 14:40
분도출판사는 가톨릭 서적을 주로 출판하는 수도원 출판삽니다.
분도=> 베네딕트 수도원인가??? 2006/04/04 15:06
로그인 안하고 씁니다 갈 길이 급해서리,, ㅎㅎ
아뉘,,, 책 읽는 게 직업인 분이 워째,,분도 출판사를 모른답디여????
모르고 있던 벌로,, 보만의 저 책을 꼭!!!!!!!!!!! 사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닷!
명령이냐구요? 네 명령이예요^^
두통이님^^ 아이디가 너무 웃겨요, 아니,,제 말은,, 귀엽다구요 ㅎㅎㅎ 2006/04/04 15:18
아참, 맞아요 맞아, 두통이^^님 말씀이요
분도는 베네딕트의 한국식, 아님 한자식 표기예요 2006/04/04 15:20
그 말을 듣고보니 생각이 납니다 . . 분도출판사 . .
사과꽃님 (전문) 직업인은 원래 바보예요...
그리고 책 읽을때 출판사명까지는 읽을 정신이 없어서. . .^^
그나저나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나요? 선보러 가세요?
두통님은 아는것도 많으시네 . . 카톨릭계에서 활동하세요?
아니면, 책 읽을때 출판사명을 꼼꼼히 읽으세요? 2006/04/04 18:29
사과꽃님 저의 다른 아이디도 알켜 드릴게요. 까꿍이. . . 뭐~ 전 이런 식으로다 아이디 만들죠.. 하나 지어드려요^^ 총총이 . . 어때요? ㅎㅎㅎ
huun님은 까탈이, 아님 꼼꼼이. . ㅋㅋ
글구 출판사명이나 사람이름 같은거 저 절대 외지않아요.
huun님이 쓰신대로 "책"에 대한 지속적 경험 덕분이지요^^
장난 입니다.. 얼마 남진 않았지만 유쾌한 하루 보내세요^^
2006/04/04 18:43
또 또 다른 아이디는 초롱이 아롱이?^^ 어째,,강아지 이름 같으네 ㅎㅎㅎㅎ 제가 총총이? 킁~ 별루 안 이쁜데여,, -.- 훈님은 까탈이 스머프,, 어울린닷!! ㅍㅍㅍㅍ
(이번엔 미운털 제대로 박히겠다^^)
훈님^^ 선 이라뇨'''''제 머리털 나고 단 한 번도!!! '선'이란 걸 본 적이 없어요^^ 그 것도 재밌는 경험일 거 같은데,,,연애만 하니라고 선 볼 틈이 ㅎㅎ
어,,, 훈님 주변에 어디,, 남아도는 아저씨 없나요? 아님 삼촌이라도?
덕분에 저도 죽기 전에 맞선 좀 함 봐봅시다 ㅋ~ 2006/04/04 18:56
허 신부님 책은 아주 옛날에 뵙긴했었는데, 지금 기억나는 거라곤 바울 서신에선가 소마의 문제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는 정도네요. 물론 탈신화화를 이야기한 불트만의 신학이 세상이 성서와 세계자신을 파악하는데 많은 변화를 주었지만, 보만의 이야긴 어찌 들으니 아람문화권에 대한 무지로도 들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니면 보만 자신의 히랍문화편중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구요.
저도 개인적으론 히랍적인 것에 대해 상당히 편호하는 편이고 또 관심도 있는 편이지만, 보만의 기독교문화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히 편향된 관점에서 이야기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네요. 과연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히랍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거죠. 이러한 보만의 입장은 중세의 교부들에 의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편향에서도 보이는 거지만, 기독교를 기독교 자체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네요. 참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바울의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만큼 히랍적 교양을 쌓은 바울의 영향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의 종주국으로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서구국가들의 기반으로서 르네상스나 이후로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근원으로서의 히랍적 전통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헬레니즘과 대별되는 히브리적 사유에 대한 이해에서 히랍사람들의 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선듯 이해가 되질 않네요... 2006/04/04 19:41
yhunsong님,,,<아람어>는 아랍어의 오타가 아니라 예수가 쓰던 아랍의 한 방언입니다. 그리고 보만의 저서는 희랍이나 히브리 어느 쪽에 치우친 면이 없이 양 쪽의 언어에 나타난 動的/靜的 특성을 각각 고찰한 것이고요.......
희랍사람들의 우위를 이야기 하다뇨???? 그건 좀 심한 오해신데요^^ 2006/04/04 20:16
그러고 보니 제가 오래전에 보만에 관하여 노트정리를 한 것이 있네요...^^ . . 언제 읽었지?! . . . 제 노트에 이렇게 적혀 있군요. . .
< haya동사가 단순히 정적인 의미에서, 혹은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존재"의 뜻이 아니라, 그 자체 자신을 규정하는 존재로서, 실체로서, 스스로 운동하고 작용하는, 동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신을 설명하기 위한 선택일 것이다. "신의 존재"를 말할때 haya가 정적인 의미만를 취한다면, 신에 관한 모든 믿음이 철회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어쨌든, 보만은 기독교와 플라톤 전통이 유사한 사유의 틀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결국,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은, 서로 상반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안에서 복합적이고,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네요..
huun 그렇다면, 기독교는 복합체라는 말인데 . . . "기독교를 기독교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도대체 기독교 그 자체는 무엇일까요? 복합체로서의 기독교와 순수한 그 자체로서의 기독교는 서로 모순적인 말인데 말이죠?! 2006/04/05 08:44
메모를 해놓으셨다면 그 책도 가지고 계시단 말씀이겠네요^^ 방가붕가 ㅎㅎ
당연히 복합체이죠. 어디서 읽었던가,,,신약의 교리나 말씀들과 고대종교들의 유사함이 생각보다(몰랐을 때 막연히 예상한 것) 많더라구요. 홍수설화는 이미 고대종교에 그 母신화 형태가 많고, 탕자의 비유, 빛(등불)의 비유나 산상수훈의 내용도 불교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더군요. 한 예로, 마태복음에 있는 씨뿌리는 자를 비유한 가르침과 <잡아함경>에 있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
고대종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하는 건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일겁니다. 복합체가 아닌 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예수의 탄생만 해도,,천사들의 전언, 탄생을 알리는 동방의 별, 어머니의 여행 중에 태어남, 경배하러 온 왕들, 아기의 미래를 예언한 늙은 현자 등등,, 모티브들이 유사합니다 2006/04/05 10:12
참! . . 사과님 . . 남아도는 아저씨 많습니다 . . 근데, 맞선은 어디서?! . . 중간지점이라면. . 필리핀 쯤 되려나? 책도 있나?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 . 그 노트가 아주 오래된 파일에서 나와서 출처는 온데간데가 없네요...
상호 복합체라 . . . 그렇다면 종교들끼리 싸울일이 아니구만! . . 사이좋게 지내야지. . . 2006/04/05 10:29
앗 아저씨!!!!!!!!!!!!! 언능 한 두어~ 분 델고 오세여 그럼^^ 지가 버선발로 공항에 쫒아갈텨 ㅎㅎㅎㅎㅎㅎㅎ 지가 비행기 삯도 없고 수영도 못해서,,,필리핀까지도 못감니더,, 흑~ 책 찾아서 읽고 계세여 저는 후딱 일 갔다 올께 ^^ 2006/04/05 10:35
사과꽃이핀뜰 물론 <몰이꾼>은 숙식 공짜고요 흐~ 2006/04/05 10:38
아람어가 문화권을 이루기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을 것도 같네요,,,
어찌되었건 아람어를 아랍어로 오독한 건 아니니가 그리염려를 안하셔도 될 것 같고,가물가물한 보만이 이야기한 정적 동적특성에 관한 내용을 기억해 낼 길은 없지만, 히랍사람들의 우위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 그리스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깊이 이해했다고 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2006/04/05 19:26
네 yhunsong님, 그러시군요. 제가 오해를 했네요..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보만의 말에 대해선, 보만이 아무런 근거없이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한 문헌 연구를 통해서 나온 말이겠지요..
신약성서가 예수 사망 후 이백년인가 지나서(구전되다가) 그리리스어로 처음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봐도요,,, 그리고 더 이해를 했다는 말은 <우위에 있다>는 말과는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2006/04/05 20:38
저도 보만이 뭐라고 했는 지 자세히 읽어 보지 않아서 딱히 뭐라고 이야기 하길 그렇지만, 지금의 서구가 기초를 하고 있는 합리주의나 개인주의적 성격을 보아서 보만이 이야기 했을 더 이해했다는 것이 어떠한 보편적이거나 문화나 입장에 편중되지 않고 이해했다고 보기힘들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보만이 이야기했을 그리스어에 의한 그리스도에 의한 심도 있는 이해는 달리보면 아람어에 대한 무지를 이해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2006/04/07 21:07
읽어보지 않으셨으면 보만이 아람어에 대해 무지하다는 말씀을 하시면 안되지요..
책의 제목을 잊으셨나요?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보만은 히브리어와 그리이스어의 어원과 어의(語義)연구를 통해서, 두 언어의 외적인 구조 내적인 의미의 <공통/특수성>을 찾아 각각의 언어세계에 들어있는 사유의 토대를 밝혔습니다. 히브리어와 그리이스어, 두 언어의 대가라 해도 무방하지요. 그리고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동류이고요.
보만의 책을 읽지 않으시고 그렇게 추측하시는 데에 적지않이 놀랐습니다... 2006/04/08 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