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성'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7/02/04 학술논문과 변태성의 은밀한 관계
  2. 2006/08/30 흰머리와 쾌감 (7)
  3. 2006/07/14 문형(文形, Figure)에 관하여 (18)

학술 연구지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학술진흥재단(Korea Research Foundation, 이하 '학진', www.krf.or.kr/)에 등재되는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은 일종의 제도적 혹은 법적인 인가를 받게 되는 셈이다. 한국에서 학진에 등재된 학술지는 분야에 관계없이 대략 1500여개이다. 학계에서 어슬렁거려본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학진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얼마나 게재하는가에 따라, 일종의 학업 성적표와 같은 등급이 암암리에 정해진다. 학계에서 계속 어슬렁거리려면 좋든 싫든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써서 제출해야만 한다(공부하는 백수들이 놀고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도태될 뿐이다. 그 집단이 싫거나, 도태되었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저렇게 등재가 되어 어느 정도 권위가 인정된 대부분의 학술지에서는 논문 게재료를 받는다. 그러니까 일반 잡지처럼 논문을 투고하여 채택이 되면 투고자에게 원고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투고자가 논문을 실어 달라고 돈을 내야 한다. 그래야만 심사를 해주고, 게재 여부를 판단해 준다. 죽었다 깨어나도 돈 버는 일에는 소질이 없는 학삘이 백수들에겐 대단히 불합리한 일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논문 원고료를 주는 곳도 있다. 재단이 돈이 많거나, 무슨 무슨 프로젝트를 성사시켜 지원을 많이 받거나 하면, 대단한 선물을 풀어 놓듯, 학술지 게시판에는 거의 "font-size"는 30pt에, "font-weight"는 볼드(bold)에, "font-color"는 레드(red)나 크림슨(crimson)이나, 심한 경우에는 딥핑크(deeppink)의 스타일로  '원고료 지급!'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는다. 원고료 수십 만원 때문이기 보다는,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니까, 이왕이면. . .! 하는 마음으로 연구자들은 논문을 어렵게 준비한다.


얼마 전에 모 대학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서 원고료를  준다기에, 나 역시 한참을 망설이다가 투고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쓸 수는 없었고, 예전에 써 놓았던 논문 한편을 골라, 편집 규정에 맞게 수정을 하고 보충을 한 것이다. 학술지 측에서 원하는 원고 매수가 약 A4용지 20매 내외였으므로, 그에 부합하는 양의 논문을 찾아 컴퓨터 폴더 목록을 한 참을 뒤졌다(내게는 발표하지 않은 논문들이 많이 있다). 최근 들어 나는 글을 짧게 쓰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이것은 글쓰기 취향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현실적인 상황의 결과이다), 할 수 없이 오래 전에 작성했던 것을 뒤져야 했다. 다행히 적당한 분량의 논문을 찾아 검토를 해본 결과, 적당히 장 별 제목과 편집 배열을 조정하면, 그럭저럭 학술지용 논문 한편은 나올 법 했다. 그러나 학술논문 쓰기가 그렇게 쉬운가? 학술논문의 경우엔, 내용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정도이다. 문제는 바로 편집규격에 맞게 글자들을 배열해야 하는 것이다. 권위가 높은 학술지일수록 편집 규정은 엄격해 진다. 그 유명한 MLA(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http://www.mla.org/) 같은 곳에서는 편집규정을 위한 책이 발간될 뿐만 아니라, 종종 신간을 발행하여 변경사항들을 바로잡기도 한다. 논문을 쓰려면 편집에 관한 책부터 뒤져서, 한 권을 통달해야 할 정도이다(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지만). 과학 논문의 경우엔 따로 팀을 구성하여 편집본을 작성하기도 한다.


그런 문제들이야 그쪽 사정이고, . . . 어쨌든 나는 그다지 크지도 않은 대학 연구소 모집 논문을 작성하였다. 연구소 측에서 요구하는 편집 규정본은 대략 10장 정도의 분량으로 되어 있었는데, 처음부터 꼼꼼히 살펴서 나의 논문과 대조를 해가며, 거의 이 삼 일에 걸쳐 규격에 맞게 서식을 조절하였다. 그 모든 것을 전부 언급할 수는 없고, 특징적이다 싶은 것만 몇 가지 추려서 적어보겠다. 실은 그 규정본 파일을 다시 열고 싶지 않아, 기억에 의존한 목록이므로, 세세한 부분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 이야기의 요체를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글을 통해 아는 것과는 느낌이 다를테니, 시간이 있는 사람은 한글 2004나 2005 프로그램을 열고, 아래에 적힌 대로 하나씩 실행을 해보길 권한다.


    논문의 맨 앞 페이지에는 국문초록을 작성해야 하고, 맨 뒤 페이지에는 영문초록(Abstract)을 작성해야 한다. 규모가 작은 논문이므로, 각각 A4 용지 1장 내외 정도면 적당하다. 국문초록의 경우, 맨 윗줄에서 두 칸(폰트크기는 구체적으로 정해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제목이 될 폰트와 같은 크기일 것이다)을 띄우고 "국문초록"이라는 제목을 쓴다. 제목은 중고딕체로 17포인트를 주고, 텍스트 배열(align)은 중간(center)으로 한다. 그리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역시, 폰트크기는 몇으로 하고 칸을 띄우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논문 작성자 이름을 쓴다. 이름은 12포인트로 하고, 서체는 신명조로 한다. 텍스트 배열은 오른쪽. 그리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 초록의 내용을 쓰되, 들여쓰기를 한 글자하고, 서체는 신명조, 크기는 10포인트로 하고, 줄 간격은 170%로 한다. 장평은 언급되지 않았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주제어를 쓴다. 주제어는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중고딕체로, 10.5포인트를 준다. 이제 페이지를 바꿔서, 두 칸을 띄우고 논문 제목을 쓴다. 폰트크기는 17포인트로 하고, 서체는 신명조로, 굵게 한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12포인트를 주어 이름을 쓰되, 배열은 오른쪽에 한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배열은 다시 왼쪽으로 와서, 목차를 쓴다. 목차는 신명조로 하되, 들여쓰기 하지 않고, 목차의 번호는 장, 절, 항, 등에 따라 I, 1, 1), . . . 순으로 한다. 목차를 다 썼으면, 다시 두 칸을 띄우고, 신명조 12포인트로, 농도(weight)는 굵게(bold) 해서, 장(Chapter) 제목을 적는다. 텍스트 배열은 가운데. 다시 한 칸 띄우고, 한 글자 들여쓰기, 신명조 10포인트, 줄 간격 170%.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에는 두 칸을 띄우고, 제목을 적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 . . 인용을 할 경우, 3줄 이상을 인용할 때에는 별도의 단락으로 처리 하되, 한 칸을 띄우고,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신명조에 크기는 9.5포인트로 하고, 단락 전체를 두 칸을 들여쓰기 한다. 따옴표는 쓰지 않는다. 다만, 본문 중에 인용을 할 때에는 따옴표를 쓴다. 각주의 처리는, 본문의 번호와 각주의 번호 모두 1), 2) 식으로 한쪽만 괄호를 하고, 각주 내용은 9.5포인트에 들여쓰기는 하지 않는다. 각주와 본문의 구분선 길이는 전체 본문 너비의 1/3로 하고, 구분 선 위 쪽은 1.8mm의 간격을, 구분 선 아래는 1.5mm의 간격, 각주 사이에는 1.5mm의 간격을 준다. 국문 서적의 경우엔 저자의 이름을 쓰고, 쉼표를 하고, 하나짜리 꺾쇠 안에 논문 제목을 쓰고, 두 개짜리 꺾쇠 안에는 책의 제목을 쓴다. 다시 쉼표, 지역 이름을 쓰고, 출판사를 쓰고, 년도를 쓰고, 페이지는 p. 12. 혹은 pp. 12-13. 식으로 쓴다. 같은 책이나 같은 논문을 바로 다음에 다시 인용할 때에는 저자이름, 쉼표, "같은 책"(혹은 같은 논문), 쉼표, 페이지를 쓰고, 전에 언급한 책이나 논문이지만, 바로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경우, 예전에는 op., cit., loc., '앞의 책', '전 게서', '상 게서' 등의 명칭을 썼지만, 지금은 저자, 쉼표, 책 제목 혹은 논문 제목, 쉼표, 쪽수만을 순서대로 쓴다. . .  


우리는 아직도 본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본문은 커녕, 각주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대충이나마 이런 식으로 끝 페이지에 있는 영문초록까지 열거를 해보려고 했지만, 무의미한 것 같아, 또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관계로,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겠다. 다만, 저 위에 열거했던 규정은 전체 규격의 1/10도 안 된다는 점만 지적하면서.


안 좋은 기억이라고 말했던 이유는, 규정집을 보며 열심히 글자들을 배열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변태성욕자가 지시하는  이런 저런 명령들을 직접 몸으로 실행하는 상대여성이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이 아닐까? 포르노그라피의 기본적인 구조는 지시(명령)와 행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권력관계를 암시하는 경향이 강한 도착의 경우, 지시는 극단적인 형태의 명령이나 가학이 되기도 한다. 변태성욕자가 상대 여성에게 내리는 그 명령들은  "옷을 벗어!"라든가 "자리에 누워!"와 같은 식으로 행위 자체의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라, 행위가 암시하는 어떤 질적인 이미지들을 추구하는 식으로 내려진다. 가령, 이런 식이다: "꽃병이 있는 곳에서만 바지를 내리도록 해! 시선은 정면을 주시해서는 안 돼!"


아마도 그러한 예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사드(The Marquis de Sade) 일 것이다. 가령, 그의 작품 <쥘리에트(Juliette)>에서, 쥘리에트에게 독살되는 클레어윌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에 마치 침대에서 성교를 하듯 특이하고도 기괴한 태도들을 취한다.


    "그녀가 먹는 것은 오로지 닭고기와 사냥에서 잡은 고기 뿐이다. 그 고기는 항상 뼈가 발라져서, 온갖 모양의 장식과 치장으로 뒤덮여 제공된다. 평소에 마시는 음료는 계절에 상관없이 단맛을 내어 얼린 물이다. 그리고 이 물을 담은 모든 물병마다 레몬즙 스무 방울과 오렌지 꽃 추출물 단 두 숟가락을 첨가한다."(The Marguis de Sade, Juliette, Tr. Austryn Wainhouse, New York: Grove Press, 1968. p. 295)


혹은 다른 곳에서,


    "테이블 윗면은 무릎을 꿇은 노예들의 등이 되고, . . . 네가 보는 이러한 탁자, 등불, 의자들은 각각 한 무리의 소녀들을 교묘하게 배치하여 만든 것이다. . . . 열 두명의 벌거벗은 소녀들 . . . 여덟이나 열명의 처녀의 피로 만든 소시지와 두 개의 고환으로 만든 밀가루 과자 . . . 열 여덟 병의 그리스 와인 . . ."(티모 에이락시넨, 『사드의 철학과 성 윤리』, 서울: 인간사랑, 1997. pp. 252-253.)


혹은 다른 곳에서,


    "우리의 결혼식 날 밤에 그는 나에게 자신의 취향에 조심하라고 했다. . . . 나는 그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 . . 나의 남편은 변덕스럽게 자기를 빨아달라고 했다. . . . 그리고는 이상한 행위를 요구했다. 내가 몸을 숙여 나의 궁둥이와 항문을 그의 얼굴 정면에 두고, 그의 불알에서부터 귀두까지 힘차게 빨아대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에 똥을 싸야 한다! 그는 그것을 먹어버린다."(The Marguis de Sade, "Philosophy in the bedroom", Three Complete Novels -- Justine, Philosophy in the Bedroom Eugenie de Franval, and Other Writings. Ed. And tr. Austryn Wainhouse and Richard Seaver, New York: Grove Press, 1965. p. 202.)


아니면, 좀 희화적으로 말해:


    "팬티의 오른쪽 사타구니 부분을 왼쪽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잡고, 반대편 왼쪽방향 중앙부분으로 음모가 보이도록 약 5센티미터를 당기고, 장지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질 속에 넣고, 오른손은 왼쪽 어깨의 삼각근 부분을 살포시 감싼 채,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리고, 시선은 아래로 떨구면서, 저기에 놓여 있는 저 모피코트를 갈망하듯 주시하는 거야! 내가 들고 있는 이 채찍에 대한 공포의 눈빛으로! 물론 왼쪽 발엔 지퍼를 내린 채 가죽 부츠를 신고! . . . 신명조 10pt, 줄간격 170%, 폰트 weight는 굵게 . . .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창녀로 만들고 싶어하는 어느 마조히즘 혐오주의자 인터뷰 속기록 중에서)


이러한 각각의 개별적인 명령과 행위들은 변태성욕 주체의 과거라든가, 그가 성장하면서 보냈던 시간 전체를 환기하면서, 그가 겪었던 경험의 질적인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어떤 행위들을 반복하다 보면, 마치 죽은 물건으로부터 영혼이 빠져나가듯, 경험의 질적인 이미지들이 살아나 대기로 흩뿌려지는 경향이 있다. 거기서 환타지도 나오고, 환각도 나오고, 망상도 나오고 그러는 것이다. 그 행위들이 반복적이면 반복적일수록 강렬함은 증대한다. 사드의 작품을 보면, 난봉꾼들은 변태성의 쾌락을 맛보기 전에, 철학이나 종교에 관하여 장시간의 토론과 설교를 함으로써 예비적인 단계를 취한다. 토론, 철학적 논증, 종교적 설교는 다양한 형식적 규정본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철학과 종교와 법과 같은 것들 그 자체가 하나의 규정집이다. 그 난봉꾼들은 세 단계의 변태성의 과정, 즉 사유(논증)하고 해방(가학행위)되고 휴식(토론)을 취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의 불의라든가, 권력의 악덕에 대해 비난하고 분석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들의 감각적인 쾌락은 사색적인 요소가 없이는 강렬해지지 않으며 증대될 수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쾌락을 배가시키는 요소는 바로 명령과 행위의 반복이 나타내는 제의적인(ritual, 祭儀) 요소이다. 행위들이 제의적인 성격이 강해질수록, 그 행위가 주는 쾌락의 질적인 측면들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이 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행위를 요구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접 수행하는 쪽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영혼을 부르기 위해 향불을 피우고, 다양한 다기(茶器)나 제기(祭器)들을 배열하고, 가령 우리의 전통적 제례 의식의 절차들, 즉 강신(降神), 진찬(進饌), 초헌(初獻), . . . 합문(闔門), . . . 사신(辭神) . . . 이 모든 사소한 절차들은, 정신적인 것 즉 영혼에 속하는 것을 행위를 통해 물질적인 것으로 팽창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변태성의 주체는 눈을 감으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망상적 쾌락의 이미지들을 지루하고도 엄격한 절차들의 반복을 통해 현실적 효력을 보증 받고, 자신의 망상의 힘을 스스로 느끼며 제의적 쾌락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몇 년 전에 요란하고 시끌법석하게 관람을 했던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을 보면, 주인공이 상대여성에 의해 몽둥이로 맞으며 변태적 쾌락에 사로잡히는데, 거기서 사용된 그 몽둥이는 길이 두께 재질 등의 정확한 계산에 의해 선별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몽둥이는 환타지로 가기 위해 치밀하게 배치된 성스러운 제기(祭器)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나의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그 학술지의 규칙들이 요구하는 지시문을 따라 한 줄 한 줄씩 수행해 가는 동안, 저 명령들 속에 혹시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제사를 지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지방을 쓰고, 그 내용을 읊조리며, 술을 따르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 . . 그렇게 제의 규칙들을 수행해 가다 보면 나 자신 스스로 머리가 숙연해지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면서, 죽은 영혼과 살아있는 나 사이에 어느새 거부할 수 없는 신비한 끈 같은 것이 묶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상징적 환타지가 강림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학술논문에 요구하는 그 각각의 규정들은 혹시 어떤 환타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규정이 어떤 공통성을 줌으로써, 복잡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공통성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가급적이면 단순한 원리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가령, 모든 서체를 10으로 한다든가, 제목은 반드시 1칸을 띄어야 한다든가, . . 통일적인 형식이 되려면, 오히려 단순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학술지마다 규정들도 다르고, 통일성은 전혀 없다. 그 논문을 다른 학술지에 보내려면, 전혀 새로운 편집 규정에 따라 하나씩 다시 수정해야만 할 것이다. 각각의 행과 제목과 주석과 본문과 문헌목록 등에 대한 그 개별적인 지시의 복잡성은 오히려 모호한 것을 낳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복잡한 명령들이 지켜지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 복잡한 규칙들을 만들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제목 위는 두 칸을 띄우고, 그 아래는 한 칸을 띄운다"는 규정을 보면, 제목의 폰트가 몇 인가에 따라, 제목 위의 폰트 크기와 제목 아래의 폰트 크기는 전혀 달라진다.  그 규정이 엄격히 지켜지려면, 제목 위의 빈 칸의 폰트 크기와 제목 아래 빈 칸의 폰트 크기가 따로 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복잡성이 배가 되는 것이다.


학술논문의 경우 변태성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변태성과 성질이 유사한 상징적 환타지가 거기에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 객체인 나는 수십 만원의 화대를 위해 그 요구를 묵묵히 완수하면서, 마디 마디 몸을 더듬듯이 행위 절차들을 하나씩 수행하는 동안, 그 미로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더 거부할 수 없는 힘과 권위를 느끼며 어렴풋이 숭고체험을 한다.

 

Posted by huun

잘 알고 지내는 선배 K씨가 어느 날 내게 와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있지! 내가 변태가 되어 가나 봐." 그의 표정은 불안과 걱정으로 싸여 있는 듯했다. 그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제의 심각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 그의 기질로 볼 때 변태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느 정도는 내성적이며, 그러나 또한 어느 정도는 쾌활하다. 그에게 단점이 있다면 예민하다는 점이다. 가끔은 사람들과 다투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파괴적 본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성생활이 변태적인 것이라고 예상할 일은 아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감흥이 오지 않을 때가 있어. 예를 들어 피곤할 때라든지, 다른 어떤 걱정이 생겨 거기에 몰두할 때면, 흥분도 안 되고, 그녀가 이리저리 내 몸을 자극 해도 별 감흥이 없을 때가 있어. 그럴 때는 좀 난처하지. 그녀의 애정과 호의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 . . 그래서 난 억지로라도 여러 가지 외설적인 생각들을 떠올려서 그녀에게 반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진 않아.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내의 흰머리를 보면 흥분이 돼! 아내의 흰머리를 처음 보았을 때는 별 감흥이 나질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흰머리가 하나 둘씩 많아지고 이제는 노력해서 찾지 않아도 꽤 잘 보이니까 흥분이 되는 거야. 여자의 흰머리를 보고 성적 흥분을 느끼는 건 나밖에는 없을 거야."

 

그의 설명을 들으니 자신이 변태가 되어 간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얼른 보아도 흰머리와 성적 쾌감은 이해할 수 없는 연결이었다. 물신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의 과거사를 들어봐도 흰머리와 섹스가 연결될 지점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무의식의 작용일까. 아니면 그는 일종의 물신 숭배자인가. 성도착이 이렇게 뒤늦은 인생에도 찾아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솟아오른다.

 

그는 결혼한 지 12년쯤 된 중년이다. 그리고 그의 결혼생활이 사실 관능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외설적인 대화들을 즐기지만, 그들이  모두 관능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는 없다. 그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외설을 즐겼으며, 심하지 않게 섹스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외모나 성격 등 여러 부분에서 관능적인 삶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무료했던 것은 아니다. 아내의 허물을 공공연히 떠벌리지도 않았으며, 일상에서 오는 심한 권태를 느껴본 기억도 없었다. 그가 아내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이라고는, 가끔 어린아이 같다는 정도였다. 심지어는 그 어린아이 같은 면이 귀여울 때도 있다고 부연한 적이 있었다. 결혼한 지 꽤 되었으니 성생활에 권태를 느낄 법도하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 일상적이지 않은 행동이나 생각들로 침실을 채우기도 한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생각이다. 그러나 변태가 되어가고 있는 문제는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지니고 있는 미모나 육체적 미감 그리고 그녀의 애정과 호의의 안락함 등이 주는 성적 흥분보다는, 엉뚱하게도 흰머리에서 오는 쾌감을 더 원하고 있는 것이다.

 

변태에 대해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병리학적 연구들과 구체적 증상의 사례들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성도착이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까닭은, 그것이 사회적 소통관계를 부정하고 파괴한다는데 있다. 수많은 변태적 성욕과 그 행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눈살을 찌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음증이나 노출증 혹은 매저키즘이나 새디즘과 같은 성도착의 유형들은 모두가 소통관계의 파괴와 부정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들은 다수가 내면화한 사회적 질서나 표현방식을(심지어는 섹스와 관련된 것조차도) 따분하게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이해하면서, 그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자신만의 특별한 이미지를 발명해 낸다. 예술가들이 주로 이러한 행위에 몰두하는데,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은유능력(A를 B로 연결하는 능력)도 일종의 변태적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의 조건을 은유능력이라고 했는데, 그의 주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천재는 변태성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사회적 질서로부터 변태성의 주체가 일탈하는 과정은 물신주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물신 숭배자는 환상(Fantasy)이라는 허구를 내면화하면서, 현실 원칙들을 거부하거나 그 효력을 정지시켜 버린다. 다시 말해 특별한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불쾌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곧바로 그 이미지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물신주의자들의 주된 메뉴는 스타킹이나 구두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행복했던 시절의 어머니와 동일한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혹은 자신이 사랑했던 어머니로 달려가 버리는 것이다. 새디즘은 가학을 받는 자와의 소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새디스트는 피해자에게 많은 말들과 반복적 논증을 진행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흉내나 가장에 불과하다. 폭력적 지배자에게 설득이나 소통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새디스트가 매질을 하는 대상으로부터 단절하려는 것은, 그 대상이 구질구질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아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 망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람의 노예 같은 면모를 혐오하고, 매질을 통해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다. 새디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을 우리나라 어머니들로부터 볼 수 있다. 만일 아이가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들어왔을 때, 그 어머니는 아이를 위로하거나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아이를 매질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왜 맞고 다녀!?" 내가 존경하는 바따이유(G. Bataille)라는 프랑스의 이론가는, 새디즘에는 피해자의 어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저 어머니의 어조와 유사한 언어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착의 형태에 대해 소통의 파괴나 부정 혹은 단절과 위반이라는 위험한 술어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들을 신비적으로 보거나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함 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도착자들은 어떤 경우든지 다른 많은 사람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며 정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아픔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안락 속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도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은 이러한 경험과 감각들을 다른 사람들과 유사하지 않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고 체험한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고통과 쾌감의 경험들은 그 자체의 물질적 요인(즉 신경물질이나 뇌하수체와 같은)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방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매저키즘이 고통을 통해 쾌감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을 쾌감 자체로 지각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을 보통 사람들과는 상이하게 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착은 생물학이나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그것도 예술적인 정신의 문제이다. 이들이 감각적 자극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운용하거나, 더욱 풍부한 삶의 경험을 스스로 요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적 소통을 위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쾌감을 타인에게 빼앗기거나 포기해야 하는 반면에(중세인들은 이 쾌감을 신에게 돌렸기 때문에, 니체는 이를 더 질병적이라고 말했다), 변태적 주체는 자신이 개발하거나 창출하고 있는 쾌감을 철저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소통의 거부는 쾌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쾌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사회적 일탈이 되는 것은, 사회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고자 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서 삶을 운용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신체를 바라보고 다루는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흰머리와 성도착의 관계에 대해서는 섣불리 용어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문제는 흰머리와 도착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흰머리와 쾌감간의 관계에 있다. 그는 왜 흰머리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나의 소견으로는 그가 위반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위반은 피상적으로 내면화된 금기나 강요들에 대한 일탈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사회는 연령이나 계급과 같은 여타 조건들에 의해 사랑의 형태를 규제해 왔다. 그래서 이를 어기는 형태의 사랑을 보게 된다면, 심한 경우에는 범죄의 모습을 띠고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계급을 초월하는 사랑은 언제나 문학적 스캔들의 테마가 되어 왔으며, 제도를 위반하는 불륜과 같은 사랑의 형태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들로 하여금 매우 격렬한 관능성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그는 흰머리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아내를 연상(年上)으로 망상하고 있는 것이다. 흰머리라는 부분적 대상을 통해 그의 아내는 단번에 연상의 여인으로 탈바꿈한다. 보다 존경스러운 상대를 원한다든지 등과 같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심리적 상태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말 할 수 없다. 또한 그가 변태인가 아닌가를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흰머리를 보면서 위반을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아내의 신체의 부분을 이용해서 자신을 통제해 왔던 제한된 사랑의 형태에 저항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면화된 제도와 이데올로기는 파괴되고 부인된다.

 

관능성은 파괴하고 거부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태어난다. 우리의 신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흐름은 어떠한 제도나 이데올로기로 봉해 버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비집고 나온다. 신체가 억제될 때 욕망은 위반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예를 들어, 꿈이나 잠꼬대나 술주정과 같이 일상적인 것도 포함하여). 이때 사랑은 괴이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소리를 내지 않으며 신체 내에 묵직하게 스며있는 욕망은, 현실 속에서 특정한 대상들과 조우하게 될 때(술이나 마약도 이에 해당된다),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와 기괴한 형태로 현실화한다. 이 괴이함이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면화된 소통을 파괴하게 될 때, 우리는 이를 행위 윤리적인 문제들과 혼동하면서, 변태라는 용어로 비하하여 부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은 대충 비슷하면 아무데나 용어를 붙여 쓰는 일들을 밥 먹듯이 한다. 그리고 이 잘못된 명명법이 일반화된 관념이 되면 곧 바로 집단이나 사회의 고압적 폭력으로 둔갑한다. 유럽과 미국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차이에 대한 무지는 언제나 차별을 낳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혼한 지 12년 아니 그 보다 더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을 욕망이, 이제 비로소 흰머리라는 숨 쉬지 않는 대상에 의해 깨어난다. 흰머리와 성적 쾌감간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능적 쾌감이란 유두와 성기와 입술과 항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각인 된 사회적 제도와 우리를 내면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부터도 출현한다.

 

 

p.s.

저항과 쾌감에 관한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러분도 그 이름을 자주 들어보았을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철학자는 매저키즘이 유머러스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 유머러스하다는 말일까? 우선,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때리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매질 자체의 의미를 무효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제발, 때려 주세요!"

"#$%^&*"

그러나 이 보다도 더 재밌는 사실이 있다. 매저키스트는 매질이라는 것을 나쁜 짓을 하고 나면 으례 따라 나오는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 . . . 그는 생각한다. 처벌을 먼저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되지 않을까? 들뢰즈는 매저키스트가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매질이 끝나면 맛보게 될 바로 그 나쁜 짓을 기다리기 때문에 쾌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매저키스트의 쾌감을 예비적 쾌감,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정의한다. 한 사악한 어린아이의 예를 통해 말해볼까? 선생님이 아이에게,

"너! 불량식품 사먹으면 때려줄거야!" 하고 경고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찾아와서 엉덩이를 까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먼저 때려주세요!"

" $%^&*()&* "

이 아이가 급진적인 이유는, 더 이상 억압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아이의 요구는 오히려 매질을 나쁜 짓과 쾌감을 허가해주는 절차로 만들고 있다. 아이는 그 억압을 완전히 거부해버리고, 자신의 쾌감으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흰머리를 보며 즐거워하는 K 선배처럼! 억압은 결코 승리할 수가 없다. 특히 즐기는 자에게는.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 글, 시, 비유, . . . 이들을 사랑에 빠진 자의 언어가 짜놓은 무늬라고 정의해보자. 그리고 그들을 통틀어서 문형(文形, figure)이라고 불러보자.


―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에는 언제나 “나”가 등장한다. "나", "내가" 화자가 됨으로써, 형태상 전면에 부각된 나! 그러나 사실상 나는 가장 깊숙이 그러나 가장 가까이 숨어버린다. 어째서 '내'가 화자가 되어야 하는가? 사랑의 이야기 속에는 왜 내가 복귀되어야 할까? 가장 구체적인 존재로서 나 만큼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모든 언어의 근본적 시점은 일인칭 화자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나는 내 앞의 모든 것들을 극화(劇化, dramatization)하기 시작한다. 또 그래야만 가장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인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와 관계하는 다른 많은 인물들,
이들(간)의 감정들, 몸짓들, . . . 아주 복잡한 실재가 가지런히 정돈되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모든 감정과 인상과 몸짓들을 표현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없이 어떻게 이 모든 이야기들을 이끌어 나갈까? 이 지루한 시간을 구원해주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 뿐. 또 이야기는 이 지루한 시간 자체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줄 것이다. 나는 맨 앞에서 말하는 화자이며 동시에 어디에서든 현존하는 주인공이다. 그런데 극화하는 화자로서, 그리고 극화된 주인공으로서 나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가장 깊숙이 숨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들이 살아 있으니, 나 역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도대체 내가 있는 곳은 정확히 어디인가? 사랑에 빠진 사람! 글을 쓰는 사람! 이들은 모두가 길을 잃은 자들이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감동하거나 좌절할 때 언어를 찾는다. 갑자기 그의 연상에 떠올려진 연인의 미소 때문에, 아니면 더 이상 몸속에서 팽창하고 있는 기운을 가눌 수가 없어서, 그래서 또한 이리저리 이 방 저 방을 배회하다가, . . . 로테를 사랑한 베르테르를 보라! 갑작스런 언어의 분출은 그를 수다쟁이로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로의 분출이라고 말해야 할까? 무엇인가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갑자기 혹은 우연히 안으로 난입해버린 것이다. 베르테르의 수많은 편지들! 문형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여기서 시작된다.


― 문형은 산채로 포착된, 생포된 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그 무엇으로 귀속되지도 않는다. 다만 살짝 숨어서 단 한번만 엿 볼 수 있을 뿐. 문형을 한 폭의 이미지로 말해야 한다면? 부서진 몸짓들! 숨어 엿보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가까이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부서진 채로만 보인다. 가령, 누군가 숨어서 베르테르의 좁다란 방을 엿본다고 해보자. 이리저리 방황하는 몸짓을. 혹은 그의 편지를 훔쳐본다고 해보자. 그 횡설수설하는 말들을. 꿈틀거리는 존재는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것이 이리저리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다. 그래서인가? 생명 앞에 선 지성은 한 없이 부분에만 고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을 소유한 존재는,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를 엿보는 자 역시, 밀도가 낮은 그물망처럼 아주 많은 것들을 놓쳐 버린다. 그는 오로지 몇 안 되는 잔상들만을 소유한 채, 그들 사이에 가능한 빈약한 조합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린다. 그런데도 즐거워하고 있다. 어쨌든 꿈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 문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혹은 문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 있어야 한다. 문형은 누구나 소유하거나 공유하는 담론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 빠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목적은 소통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와 소통을 한단 말인가? 특별한 섬광을 발견하거나 경험한다면, 그는 곧 바로 이 무형의 섬광에 특정한 모양새를 갖춘 육체를 부여한다. 기쁨의 강도에 따라, 그 부름에 따라 반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문형은 반복의 언어이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 세련된 문화의 주체, 즉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문형은 반복적 패턴과 지루한 코드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중세 기사 로맨스나 궁정 연애담 혹은 여인의 이야기들의 일정한 패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는 용질(溶質)이 형태를 갖추기 위해 단단해지는 주조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과잉된 촉발로부터 비롯된 감정이 형체를 갖고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언어의 허용된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형은 언제나 낡은 코드의 끝자락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 끄트머리에서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이리저리 구석들을 탐색하지만 곧 좌절하면서, 끊임없이 입에서 맴도는 같은 말들의 참담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속되는 감탄사들! 그 반복되는 역겨운 말들! 그 낭만주의! 오! 사랑! 이걸 어쩌지! 말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마치 말더듬이의 웅웅거리는 소리와 흡사하다. 마치 잠자(Gregor Samsa)나 화부의 울부짖음이나, 이름 모를 동물소리. 반복. 과잉. 말더듬. . . . 이들은 모두 문화가 우리에게 금지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지양하도록 권고하는 있는 변태성이다. 걷잡을 수 없는 이 변태성의 분출을 막기 위해 개인과 사회는 대단히 중화된 여러 가지 형태들을 고안해 낸다. 허가받은 변태성! 결혼! 잘 다듬어진 욕망! 이 변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르긴 몰라도 동일한 위험의 강도(强度)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이 없는 존재는 문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문형이란 문화적 제한구역의 경계 주위에서 배회하는 연인이 남겨놓은 자취들이다. 연인은 그 제한구역을 넘어서지 못한 채 그 너머를 바라보고 갈망한다. 그러나 한편, 이 제한된 구역의 경계 근처에 가보지 못한다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신비체험을 경험한 이방인의 헛소리일 뿐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가 버리기 십상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