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죽어버린 것들을 담고 있지만, 말하자면, 더 이상 현실적 효력이 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죽음 그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그 본성상 사진은 사물의 죽음을 선언하고 거기에 애도를 표하는 묘비명과도 같다.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이 말했듯이, 사진은 우리의 공포―특히, 죽음에 대한―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 목적이라든가, 환기하는 효과를 감안해 본다면, 사진은 죽음의 예술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진의 역설이란 이러한 것이다: 사진은 무엇인가를 보존함으로써 그 죽음을 보증하는 동시에 부정한다. 현상으로서의 사진과 그것이 담고 있는 대상 자체는 확실히 구별되어야 한다. 고다르[Jean Luc Godard]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근육이나 피가 아니야! 그냥 인화용 종이에 찍힌 붉은 색 잉크일 뿐이라구!” 사진이 죽음과 함께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멈춘 시간과 관계하기 때문에, 더 정확히는 보존과 관계하기 때문이지, 그 자체 죽음이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죽음을 떠올리지만, 동시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갖는다. 사진이 표상 예술과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이 점일 것이다. 가령, 우리는 그림이나 문학작품을 하나의 과거로서 혹은 과거의 기억으로서만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작품 속에 재현된 대상을 실존적 가치들과 관계 짓기보다는 그 본질의 열림에 더 열중하게 된다. 우리는 젊은 베르테르나 유태인 블룸의 행적을 쫓으며 그들의 실존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속한 어떤 본질이 펼쳐지는 과정을 목도하는 것이다. 재현된 존재란 예고된 본질이 확인되는 형식으로 우리 앞에 주어지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소설작품이란 곧 그 자체 베르테르이며 블룸이다. 나아가 그들은 그 자체 인생이며, 우주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거기서 우리가 갖게 되는 믿음이란 하나의 비전 혹은 통찰이 될 것이다. 문학의 주변에는 언제나 죽음의 악령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바로 이 암울함 속에서 비극적이지만 의미심장한 삶에의 통찰과 태도가 준비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을 목도한 한 영혼의 자기 독백과도 같은 것이다. 가령,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주인공 정원이 사진가라는 점이다. 그 작품은 사진을 죽음과 관계 지음으로써,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으로서, 즉 기억하는 것으로서의 사진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 서는 모든 사람들은 수의(壽衣)를 맞추거나 한마디의 유언을 남기듯 특별히 마련된 한 차례의 예고된 시간을 경험한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사진관을 나오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걸어가면서, 자신만이 완성할 수 있을 어떤 서정시 한편을 읊조릴 것이다. 사진을 문학적 풍요로움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정원은 사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는 문학적 독백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은 추억으로 번진다!”(『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의 독백). 그러나 사진 자체는 이처럼 사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지 않다. 담긴 대상물조차 그 자신의 본질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펼치는 과정은 더더욱 아니다. 심지어 사진은 사물의 본질을 감추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그것은 외양이며 현상이며 따라서 실체의 사라짐이다. 문학과는 다르게 사진에 찍힌 블룸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다. 심지어 그 블룸은 사진에 찍힘으로써, 더욱 더 사진과는 무관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종종 실물과의 비교 속에서 실체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곤 한다: “이 사람 맞아?”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는 실체에 근접하고자 하는 강박이 있다. 보존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과 사진은 대단히 상반적인 입장에,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본질에 닿아있고, 다른 하나는 육체에 닿아 있다. 그래서 정원이 자신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을 때라든가, 어떤 할머니가 장례식에 쓸 사진을 가족 몰래 찍는다든가, 정원과 함께 모든 친구들이 카메라 앞에 선다든가 할 때, 그들이 남기고 싶은 것은 육체 자체이지, 인생의 최종적 본질이나 진실이나 사연이 아니다. 하지만 사진이 남기는 육체란 어떤 육체일까? 가령,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무엇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흐르는 지속의 한복판에서 출처 없이 잘라낸 단순한 어떤 구간일까?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사진이란 철학의 과학적 알리바이, 다시 말해 지식의 세계가 실재와 동일한 위상 속에서 뒤섞이게 된 것이다. 물리학적 혹은 기하학적 규준과 그 공식들이 자연의 존재를 증명하고,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시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은 영원한 실재―고전철학의 관점에서 파악된―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그러나 막연했던 믿음을, 마치 환각처럼, 감각의 규준과 그 도식들로써 증명한 셈이다. 그리하여 인상파 예술이 그랬듯이, 사진은 회화를 좌절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화로 하여금 실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그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가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진은 죽은 대상(즉 활동을 멈춘)과 관계함으로써 죽음의 영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한편으로 사진은 그 죽은 대상조차도 현실적으로 살아있었으며, 실재 한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부여함으로써 현실과 관계한다. 대상물이 어떤 것이든지 혹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정서와 효과를 발생시키든지, 일단 사진으로 포착된 존재는 그 존재가 이미 증명된 셈이다. 사진은 존재에 애도를 취하기에 앞서, 그 자체 실제적 기념비가 된다. 보도자료, 증거자료, 법정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현실적 증거들! 이들은 모두 확증성을 보증 받기 위해 가장 먼저 사진의 형식을 띠게 될 것이다. 신문에 게시된 사진을 접하는 우리는, 마치 어떤 자명한 수학적 진리에 이른 것처럼, 혹은 어떤 절대적 존재의 서명을 확인한 것처럼, 어떠한 의심도 취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 대해 이 만큼 확고한 믿음을 주는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이 과학적 망상인지, 아니면 윤리적 망상인지, 형이상학적 망상인지, . . . 어쨌든 우리는 그로 인해 현실에 절대적인 우월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영원한 가치를 투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문학이나 그림보다도 훨씬 더 종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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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8/27 사진과 믿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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