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타인 앞에 또는 밝은 곳에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은 자신의 위상을 제한(혹은 부정)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할 수가 있다.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자신이 자아낼 수 있을 모든 신비한 가능성의 힘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던 권력에 있어서의 “가시성(visibilité)의 역설”이다. 앙시엥 레짐(ancient regime)의 전제권력은 보여주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은 권력이다. 권력자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과장해서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우쭐해 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을 하나의 볼거리(spectacle)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호화의복, 궁중예식, 왕의거둥, 개선행렬, 공개처형 등, 재화의 엄청난 소비와 지출로 이루어지는 이 모든 비효율적 스펙터클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이로움, 존경심, 또는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권력을 정복자로서 가시화한다. 대로의 밝은 빛 속에서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거나 걸어가는 권력자는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음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권력자의 이러한 가시성이 증대할수록 피권력자들은 어둠 속에 숨을 수가 있었다. 오히려 드러난 권력의 실체를 볼 수가 있어, 스펙타클의 애초의 의도와는 반대로 권력자의 무한한 권능에 제한을 가하는 결과가 일어난다. 권력자 자신이 스스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한정된 조건에 방치됨으로써, 혹은 그 자신의 몸뚱어리가 하나의 사물로서 현시됨으로써, 무한의 절대성을 암시해야 할 권력은 오히려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힘으로 하강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잠재적 “권능(Power, Macht)”과 현실적 “물력(force, Gewalt)”의 역학관계—카네티(Elias Canetti)가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에서 구분했던—가 그렇듯이, 힘이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 되어갈수록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넓어지게 된다. 아니 범위가 넓은 힘일수록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다. 가까이에 있는 힘일수록 그 지속력은 짧다. 먼 곳에서 가능성을 암시하는 힘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성이란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 속에서 현실화된다. 뚜렷이 보이거나, 가까이에 있거나, 언제든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지시 가능하거나, 표현 가능한 것은 두려움을 갖게 하지 못한다. 단지 이미 사태의 종결이나 다름 없는 주체들의 치열한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들만이 현실을 설명해줄 뿐이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존재만이 만인을 지배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나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Comte de Sade)가 생각했던 “자연” 혹은 “신”의 모습을 닮아있다. 상상 속에서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암시로 불안은 존재를 잠식한다. 불안 그 자체가 존재인 것이다. 푸코는 현대적 규율사회의 가시성의 역전—시선 주체의 전도 혹은 가시성의 교환—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불안의 잠식에 관한 문제였다. 더 이상 만인이 권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면적 타자로서의 권력이 만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권력은 언제나 현시한다. 언제 어디서든 머릿속에 떠오르고 나타나 주시하는 절대적 존재, 바로 이 가시성의 편재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임하는 것, 다시 말해 실제가 아니라 효과로서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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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연구지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학술진흥재단(Korea Research Foundation, 이하 '학진', www.krf.or.kr/)에 등재되는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은 일종의 제도적 혹은 법적인 인가를 받게 되는 셈이다. 한국에서 학진에 등재된 학술지는 분야에 관계없이 대략 1500여개이다. 학계에서 어슬렁거려본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학진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얼마나 게재하는가에 따라, 일종의 학업 성적표와 같은 등급이 암암리에 정해진다. 학계에서 계속 어슬렁거리려면 좋든 싫든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써서 제출해야만 한다(공부하는 백수들이 놀고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도태될 뿐이다. 그 집단이 싫거나, 도태되었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저렇게 등재가 되어 어느 정도 권위가 인정된 대부분의 학술지에서는 논문 게재료를 받는다. 그러니까 일반 잡지처럼 논문을 투고하여 채택이 되면 투고자에게 원고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투고자가 논문을 실어 달라고 돈을 내야 한다. 그래야만 심사를 해주고, 게재 여부를 판단해 준다. 죽었다 깨어나도 돈 버는 일에는 소질이 없는 학삘이 백수들에겐 대단히 불합리한 일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논문 원고료를 주는 곳도 있다. 재단이 돈이 많거나, 무슨 무슨 프로젝트를 성사시켜 지원을 많이 받거나 하면, 대단한 선물을 풀어 놓듯, 학술지 게시판에는 거의 "font-size"는 30pt에, "font-weight"는 볼드(bold)에, "font-color"는 레드(red)나 크림슨(crimson)이나, 심한 경우에는 딥핑크(deeppink)의 스타일로 '원고료 지급!'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는다. 원고료 수십 만원 때문이기 보다는,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니까, 이왕이면. . .! 하는 마음으로 연구자들은 논문을 어렵게 준비한다.
얼마 전에 모 대학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서 원고료를 준다기에, 나 역시 한참을 망설이다가 투고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쓸 수는 없었고, 예전에 써 놓았던 논문 한편을 골라, 편집 규정에 맞게 수정을 하고 보충을 한 것이다. 학술지 측에서 원하는 원고 매수가 약 A4용지 20매 내외였으므로, 그에 부합하는 양의 논문을 찾아 컴퓨터 폴더 목록을 한 참을 뒤졌다(내게는 발표하지 않은 논문들이 많이 있다). 최근 들어 나는 글을 짧게 쓰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이것은 글쓰기 취향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현실적인 상황의 결과이다), 할 수 없이 오래 전에 작성했던 것을 뒤져야 했다. 다행히 적당한 분량의 논문을 찾아 검토를 해본 결과, 적당히 장 별 제목과 편집 배열을 조정하면, 그럭저럭 학술지용 논문 한편은 나올 법 했다. 그러나 학술논문 쓰기가 그렇게 쉬운가? 학술논문의 경우엔, 내용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정도이다. 문제는 바로 편집규격에 맞게 글자들을 배열해야 하는 것이다. 권위가 높은 학술지일수록 편집 규정은 엄격해 진다. 그 유명한 MLA(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http://www.mla.org/) 같은 곳에서는 편집규정을 위한 책이 발간될 뿐만 아니라, 종종 신간을 발행하여 변경사항들을 바로잡기도 한다. 논문을 쓰려면 편집에 관한 책부터 뒤져서, 한 권을 통달해야 할 정도이다(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지만). 과학 논문의 경우엔 따로 팀을 구성하여 편집본을 작성하기도 한다.
그런 문제들이야 그쪽 사정이고, . . . 어쨌든 나는 그다지 크지도 않은 대학 연구소 모집 논문을 작성하였다. 연구소 측에서 요구하는 편집 규정본은 대략 10장 정도의 분량으로 되어 있었는데, 처음부터 꼼꼼히 살펴서 나의 논문과 대조를 해가며, 거의 이 삼 일에 걸쳐 규격에 맞게 서식을 조절하였다. 그 모든 것을 전부 언급할 수는 없고, 특징적이다 싶은 것만 몇 가지 추려서 적어보겠다. 실은 그 규정본 파일을 다시 열고 싶지 않아, 기억에 의존한 목록이므로, 세세한 부분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 이야기의 요체를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글을 통해 아는 것과는 느낌이 다를테니, 시간이 있는 사람은 한글 2004나 2005 프로그램을 열고, 아래에 적힌 대로 하나씩 실행을 해보길 권한다.
논문의 맨 앞 페이지에는 국문초록을 작성해야 하고, 맨 뒤 페이지에는 영문초록(Abstract)을 작성해야 한다. 규모가 작은 논문이므로, 각각 A4 용지 1장 내외 정도면 적당하다. 국문초록의 경우, 맨 윗줄에서 두 칸(폰트크기는 구체적으로 정해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제목이 될 폰트와 같은 크기일 것이다)을 띄우고 "국문초록"이라는 제목을 쓴다. 제목은 중고딕체로 17포인트를 주고, 텍스트 배열(align)은 중간(center)으로 한다. 그리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역시, 폰트크기는 몇으로 하고 칸을 띄우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논문 작성자 이름을 쓴다. 이름은 12포인트로 하고, 서체는 신명조로 한다. 텍스트 배열은 오른쪽. 그리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 초록의 내용을 쓰되, 들여쓰기를 한 글자하고, 서체는 신명조, 크기는 10포인트로 하고, 줄 간격은 170%로 한다. 장평은 언급되지 않았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주제어를 쓴다. 주제어는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중고딕체로, 10.5포인트를 준다. 이제 페이지를 바꿔서, 두 칸을 띄우고 논문 제목을 쓴다. 폰트크기는 17포인트로 하고, 서체는 신명조로, 굵게 한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12포인트를 주어 이름을 쓰되, 배열은 오른쪽에 한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배열은 다시 왼쪽으로 와서, 목차를 쓴다. 목차는 신명조로 하되, 들여쓰기 하지 않고, 목차의 번호는 장, 절, 항, 등에 따라 I, 1, 1), . . . 순으로 한다. 목차를 다 썼으면, 다시 두 칸을 띄우고, 신명조 12포인트로, 농도(weight)는 굵게(bold) 해서, 장(Chapter) 제목을 적는다. 텍스트 배열은 가운데. 다시 한 칸 띄우고, 한 글자 들여쓰기, 신명조 10포인트, 줄 간격 170%.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에는 두 칸을 띄우고, 제목을 적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 . . 인용을 할 경우, 3줄 이상을 인용할 때에는 별도의 단락으로 처리 하되, 한 칸을 띄우고,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신명조에 크기는 9.5포인트로 하고, 단락 전체를 두 칸을 들여쓰기 한다. 따옴표는 쓰지 않는다. 다만, 본문 중에 인용을 할 때에는 따옴표를 쓴다. 각주의 처리는, 본문의 번호와 각주의 번호 모두 1), 2) 식으로 한쪽만 괄호를 하고, 각주 내용은 9.5포인트에 들여쓰기는 하지 않는다. 각주와 본문의 구분선 길이는 전체 본문 너비의 1/3로 하고, 구분 선 위 쪽은 1.8mm의 간격을, 구분 선 아래는 1.5mm의 간격, 각주 사이에는 1.5mm의 간격을 준다. 국문 서적의 경우엔 저자의 이름을 쓰고, 쉼표를 하고, 하나짜리 꺾쇠 안에 논문 제목을 쓰고, 두 개짜리 꺾쇠 안에는 책의 제목을 쓴다. 다시 쉼표, 지역 이름을 쓰고, 출판사를 쓰고, 년도를 쓰고, 페이지는 p. 12. 혹은 pp. 12-13. 식으로 쓴다. 같은 책이나 같은 논문을 바로 다음에 다시 인용할 때에는 저자이름, 쉼표, "같은 책"(혹은 같은 논문), 쉼표, 페이지를 쓰고, 전에 언급한 책이나 논문이지만, 바로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경우, 예전에는 op., cit., loc., '앞의 책', '전 게서', '상 게서' 등의 명칭을 썼지만, 지금은 저자, 쉼표, 책 제목 혹은 논문 제목, 쉼표, 쪽수만을 순서대로 쓴다. . .
우리는 아직도 본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본문은 커녕, 각주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대충이나마 이런 식으로 끝 페이지에 있는 영문초록까지 열거를 해보려고 했지만, 무의미한 것 같아, 또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관계로,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겠다. 다만, 저 위에 열거했던 규정은 전체 규격의 1/10도 안 된다는 점만 지적하면서.
안 좋은 기억이라고 말했던 이유는, 규정집을 보며 열심히 글자들을 배열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변태성욕자가 지시하는 이런 저런 명령들을 직접 몸으로 실행하는 상대여성이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이 아닐까? 포르노그라피의 기본적인 구조는 지시(명령)와 행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권력관계를 암시하는 경향이 강한 도착의 경우, 지시는 극단적인 형태의 명령이나 가학이 되기도 한다. 변태성욕자가 상대 여성에게 내리는 그 명령들은 "옷을 벗어!"라든가 "자리에 누워!"와 같은 식으로 행위 자체의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라, 행위가 암시하는 어떤 질적인 이미지들을 추구하는 식으로 내려진다. 가령, 이런 식이다: "꽃병이 있는 곳에서만 바지를 내리도록 해! 시선은 정면을 주시해서는 안 돼!"
아마도 그러한 예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사드(The Marquis de Sade) 일 것이다. 가령, 그의 작품 <쥘리에트(Juliette)>에서, 쥘리에트에게 독살되는 클레어윌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에 마치 침대에서 성교를 하듯 특이하고도 기괴한 태도들을 취한다.
"그녀가 먹는 것은 오로지 닭고기와 사냥에서 잡은 고기 뿐이다. 그 고기는 항상 뼈가 발라져서, 온갖 모양의 장식과 치장으로 뒤덮여 제공된다. 평소에 마시는 음료는 계절에 상관없이 단맛을 내어 얼린 물이다. 그리고 이 물을 담은 모든 물병마다 레몬즙 스무 방울과 오렌지 꽃 추출물 단 두 숟가락을 첨가한다."(The Marguis de Sade, Juliette, Tr. Austryn Wainhouse, New York: Grove Press, 1968. p. 295)
혹은 다른 곳에서,
"테이블 윗면은 무릎을 꿇은 노예들의 등이 되고, . . . 네가 보는 이러한 탁자, 등불, 의자들은 각각 한 무리의 소녀들을 교묘하게 배치하여 만든 것이다. . . . 열 두명의 벌거벗은 소녀들 . . . 여덟이나 열명의 처녀의 피로 만든 소시지와 두 개의 고환으로 만든 밀가루 과자 . . . 열 여덟 병의 그리스 와인 . . ."(티모 에이락시넨, 『사드의 철학과 성 윤리』, 서울: 인간사랑, 1997. pp. 252-253.)
혹은 다른 곳에서,
"우리의 결혼식 날 밤에 그는 나에게 자신의 취향에 조심하라고 했다. . . . 나는 그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 . . 나의 남편은 변덕스럽게 자기를 빨아달라고 했다. . . . 그리고는 이상한 행위를 요구했다. 내가 몸을 숙여 나의 궁둥이와 항문을 그의 얼굴 정면에 두고, 그의 불알에서부터 귀두까지 힘차게 빨아대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에 똥을 싸야 한다! 그는 그것을 먹어버린다."(The Marguis de Sade, "Philosophy in the bedroom", Three Complete Novels -- Justine, Philosophy in the Bedroom Eugenie de Franval, and Other Writings. Ed. And tr. Austryn Wainhouse and Richard Seaver, New York: Grove Press, 1965. p. 202.)
아니면, 좀 희화적으로 말해:
"팬티의 오른쪽 사타구니 부분을 왼쪽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잡고, 반대편 왼쪽방향 중앙부분으로 음모가 보이도록 약 5센티미터를 당기고, 장지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질 속에 넣고, 오른손은 왼쪽 어깨의 삼각근 부분을 살포시 감싼 채,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리고, 시선은 아래로 떨구면서, 저기에 놓여 있는 저 모피코트를 갈망하듯 주시하는 거야! 내가 들고 있는 이 채찍에 대한 공포의 눈빛으로! 물론 왼쪽 발엔 지퍼를 내린 채 가죽 부츠를 신고! . . . 신명조 10pt, 줄간격 170%, 폰트 weight는 굵게 . . .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창녀로 만들고 싶어하는 어느 마조히즘 혐오주의자 인터뷰 속기록 중에서)
이러한 각각의 개별적인 명령과 행위들은 변태성욕 주체의 과거라든가, 그가 성장하면서 보냈던 시간 전체를 환기하면서, 그가 겪었던 경험의 질적인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어떤 행위들을 반복하다 보면, 마치 죽은 물건으로부터 영혼이 빠져나가듯, 경험의 질적인 이미지들이 살아나 대기로 흩뿌려지는 경향이 있다. 거기서 환타지도 나오고, 환각도 나오고, 망상도 나오고 그러는 것이다. 그 행위들이 반복적이면 반복적일수록 강렬함은 증대한다. 사드의 작품을 보면, 난봉꾼들은 변태성의 쾌락을 맛보기 전에, 철학이나 종교에 관하여 장시간의 토론과 설교를 함으로써 예비적인 단계를 취한다. 토론, 철학적 논증, 종교적 설교는 다양한 형식적 규정본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철학과 종교와 법과 같은 것들 그 자체가 하나의 규정집이다. 그 난봉꾼들은 세 단계의 변태성의 과정, 즉 사유(논증)하고 해방(가학행위)되고 휴식(토론)을 취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의 불의라든가, 권력의 악덕에 대해 비난하고 분석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들의 감각적인 쾌락은 사색적인 요소가 없이는 강렬해지지 않으며 증대될 수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쾌락을 배가시키는 요소는 바로 명령과 행위의 반복이 나타내는 제의적인(ritual, 祭儀) 요소이다. 행위들이 제의적인 성격이 강해질수록, 그 행위가 주는 쾌락의 질적인 측면들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이 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행위를 요구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접 수행하는 쪽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영혼을 부르기 위해 향불을 피우고, 다양한 다기(茶器)나 제기(祭器)들을 배열하고, 가령 우리의 전통적 제례 의식의 절차들, 즉 강신(降神), 진찬(進饌), 초헌(初獻), . . . 합문(闔門), . . . 사신(辭神) . . . 이 모든 사소한 절차들은, 정신적인 것 즉 영혼에 속하는 것을 행위를 통해 물질적인 것으로 팽창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변태성의 주체는 눈을 감으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망상적 쾌락의 이미지들을 지루하고도 엄격한 절차들의 반복을 통해 현실적 효력을 보증 받고, 자신의 망상의 힘을 스스로 느끼며 제의적 쾌락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몇 년 전에 요란하고 시끌법석하게 관람을 했던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을 보면, 주인공이 상대여성에 의해 몽둥이로 맞으며 변태적 쾌락에 사로잡히는데, 거기서 사용된 그 몽둥이는 길이 두께 재질 등의 정확한 계산에 의해 선별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몽둥이는 환타지로 가기 위해 치밀하게 배치된 성스러운 제기(祭器)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나의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그 학술지의 규칙들이 요구하는 지시문을 따라 한 줄 한 줄씩 수행해 가는 동안, 저 명령들 속에 혹시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제사를 지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지방을 쓰고, 그 내용을 읊조리며, 술을 따르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 . . 그렇게 제의 규칙들을 수행해 가다 보면 나 자신 스스로 머리가 숙연해지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면서, 죽은 영혼과 살아있는 나 사이에 어느새 거부할 수 없는 신비한 끈 같은 것이 묶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상징적 환타지가 강림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학술논문에 요구하는 그 각각의 규정들은 혹시 어떤 환타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규정이 어떤 공통성을 줌으로써, 복잡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공통성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가급적이면 단순한 원리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가령, 모든 서체를 10으로 한다든가, 제목은 반드시 1칸을 띄어야 한다든가, . . 통일적인 형식이 되려면, 오히려 단순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학술지마다 규정들도 다르고, 통일성은 전혀 없다. 그 논문을 다른 학술지에 보내려면, 전혀 새로운 편집 규정에 따라 하나씩 다시 수정해야만 할 것이다. 각각의 행과 제목과 주석과 본문과 문헌목록 등에 대한 그 개별적인 지시의 복잡성은 오히려 모호한 것을 낳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복잡한 명령들이 지켜지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 복잡한 규칙들을 만들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제목 위는 두 칸을 띄우고, 그 아래는 한 칸을 띄운다"는 규정을 보면, 제목의 폰트가 몇 인가에 따라, 제목 위의 폰트 크기와 제목 아래의 폰트 크기는 전혀 달라진다. 그 규정이 엄격히 지켜지려면, 제목 위의 빈 칸의 폰트 크기와 제목 아래 빈 칸의 폰트 크기가 따로 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복잡성이 배가 되는 것이다.
학술논문의 경우 변태성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변태성과 성질이 유사한 상징적 환타지가 거기에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 객체인 나는 수십 만원의 화대를 위해 그 요구를 묵묵히 완수하면서, 마디 마디 몸을 더듬듯이 행위 절차들을 하나씩 수행하는 동안, 그 미로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더 거부할 수 없는 힘과 권위를 느끼며 어렴풋이 숭고체험을 한다.
처벌로써 불안과 죄의식의 해소가 가능해 진다는 설명만으로는 매저키즘이 쾌감을 도출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처벌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이 쾌감으로 연결된다는 매저키즘적 공식은 단순히 물질적 전이나 도덕적 위안이라는 미리 결정된 유추로는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매저키즘적 쾌락을 처벌이 끝난 후에 얻어지는 도덕적 위안의 소극성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매저키즘이 고통을 쾌감으로 이해하는 과정에는 그가 특별히 운용하는 정치학과 미학이 숨어있다. 그렇지 않고는 상반된 경험들이 부지불식간에 자리바꿈을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이러한 전환의 논리는 설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마조흐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계약과 법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그의 냉소와 저항에 스며든 유머러스한 웃음에는 법의 틈새를 극단적으로 벌려놓는 기술적 미학이 포함되며, 외디푸스적 관계들 속에서 구성되는 매저키즘적 특유의 환상이 포함된다. 계약과 법의 매저키즘적 이해와 운용방식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도출할 수 있으며, 폭력과 억압에 대해 어떻게 승리를 경험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또한 더 나아가 매저키즘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인간으로 부활하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마조흐가 박해자 여성들과 맺은 계약의 조항들은 점점 잔혹해지며 심지어는 죽음과 관련된 조항들까지도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277∼279 참조>. 계약 조항들의 이와 같은 추이는 절대적인 법의 형태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계약은 법을 도출해내는 속성이 있으며, 또한 법이 공포되고 난 후에는 역으로 계약의 효력들을 무효화하거나 정지시키는 특징이 있다. 한 사회의 기원이 계약에 준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법이 발생하고 난 후에 무효화되었던 계약의 요소들이 상기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법과 계약의 긴밀한 공모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효과로서 계약의 무효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에만 가능해질 것이다.
계약에 의해 발생한 법이 오히려 계약의 조건들과 효력들을 제압하고 효력정지 시킨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1) 법은 계약 당사자들뿐 아니라 제 3자에게도 적용된다는 것. 그러므로 법은 계약의 형태로 유지되지 않는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떠한 예외와 유보조항이 첨가되기 힘들다. (2) 법이 적용되는 유효기간은 미결정적이다. 따라서 계약의 당사자들은 한없는 법의 유효함을 경험하게 된다. 유효시기의 결정은 그 자체로 법적 권위를 실추시키는 유머러스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3) 법의 공포는 곧바로 계약의 당사자들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제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칙적으로 법적인 성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법은 노예상태를 만들어 낸다.
사드가 법을 신비화된 권력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계약이라는 이차적 존재들의 합의와 양도에 의해 발생하지만, 동시에 계약 당사자들의 권력을 제한하며 폭정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법이 절대적 권력을 향해 치닫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억압이라는 매개를 수반한다. 법의 기원은 미숙한(양도된) 권력으로 시작되지만, 법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절대적 권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기원이 발생적 과정 속에서 보존되기 위해서는 매개들과 단계들이 필요하다. 법은 기원과 과정의 괴리를 폭력과 억압이라는 도약을 통해 메운다. 마조흐는 법의 이러한 메카니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유머의 기술은 계약과 법의 관계 그리고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폭력의 양상을 파악하는 통찰에 기인하는 것이다. 1848년 혁명과 범 슬라브 민족운동과 관련하여, 앞으로 도래할 무시무시한 짜르(Tsarina) 통치의 불가피함에 대해 그가 보여준 유머러스한 태도는 불가항력적인 힘으로부터 어떻게 그 방향이 전환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법의 폭정은 반드시 도래할 것이며, 따라서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주체이며 누가 계약의 당사자인가. 계약은 맺어져야 한다. 그러나 계약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마조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슬라브인들이 전제정치(짜르 통치)를 없애므로써 러시아를 위해 단결할 것인가? 아니면 천재적인 짜르의 통치 아래 강력한 국가를 목적으로 할 것인가? 93>
계약에서 법으로 연결되는 폭력과 도약의 과정은 남성적이고 아폴론적 문화중심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여자와 어머니는 언제나 피해자 또는 대상으로 결정된다. 교환과 계약의 대상은 언제나 여성에게 향해졌으며, 따라서 여성은 법으로부터 두 번 주변화되었다. 법의 객체로서 그리고 계약의 대상(여성)으로서. 그러나 마조흐는 계약의 당사자를 여성으로 설정함으로써, 동일한 하나의 사태에서 두 가지 역설적 사유의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1) 매저키스트의 법에 대한 유머러스한 처리는 처벌의 주체와 대상간의 벡터를 반대로 역전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처벌의 집행을 자발적으로 결정함으로써 권력이 작용하는 힘의 방향은 오히려 처벌의 대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피해자는 처벌을 통해 쾌락을 획득하게 되며 처벌과 법적 권력은 무효화된다. 매저키즘의 예술은 힘의 관계를 무효화하면서 넌센스를 이용해 방향을 전환시킨다. 이것이 그의 설득과 계약의 넌센스가 보여주는 벡터의 전환 효과이다. 권력을 피해자가 부여하는 것만큼 유머러스한 상황이 있겠는가?: 자 이제 노예가 될 테니 내 말을 따르라구! (2) 그러나 또한 계약과 교환의 대상인 여성을 계약의 당사자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계약의 신비화로부터 나오게 되는 피해자와 박해자의 관계가 역전된다. 마조흐의 계약의 원리는 계약상에 근거한 가부장 체제의 재현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계약을 자의적으로 요구함으로써 계약의 주체는 매저키스트 자신이다. 그러나 이것이 매저키즘과 남성적 원리가 일치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계약을 통해 마조흐는 가부장 체제의 계약의 원리가 어떻게 역설적으로 탈 신비화되는지를 한편의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계약은 남성에 의해서 시작되고,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발생시킬 것이며, 계약에서 법으로 이행되는 전체과정은 절대적 권력의 신비화를 재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는 계약의 주체이며 남성인 바로 자신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매저키즘에서 계약과 법이 만들어내는 신비스러운 드라마의 역설이다. 계약의 주체가 피해자라는 사실.
하나의 사물이나 상황 속에서 역설을 사유하는 것은 그것의 본성을 여러 방향으로 가르는 노력 속에서 나타난다. 역설이 드러나거나 드러냄으로써, 심층의 본질이 표면으로 떠오르면서 최소한 두 방향의 사유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역설 속에서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관점과 본성의 난입을 목격하게 되며, 따라서 사물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피해자가 권력을 부여하고 계약의 주체가 피해자라는 역설적 관계 속에서, 계약과 법 그리고 권력과 처벌의 신비화된 역학관계가 무의미해 진다는 통찰 외에 또 어떠한 사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계약으로부터 법으로 이행되는 절대적 권력의 신비화는 마조흐의 넌센스와 드라마를 통해 역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두 차례의 탈 신비화가 이루어진다. 마조흐가 보여주고 있는 자신의 연구는 가부장적 계약과 주인-노예관계를 고착시키는 법의 심층적 베일을 벗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마조흐의 저항에는 감상적인 본성이 숨어있다. 이것이 또한 사드의 정치학과 구별되는 면모이다. 그렇다면 매저키즘적 유머가 감상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항의 소극적 이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현실적 무게로 경험되고 실제적 효력으로 지각되는 이차적 자연 안에서, 그의 수사적 저항과 환상이 유효하다고 말할 수 없는가? 또한 사드의 망상과 마조흐의 환상이 그 본성에서 다른 것이라면, 이들이 경험하고 인식하는 현실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닌가? 이들은 현실적 경험뿐 아니라 일차적 자연으로서 망상과 환상의 내용 자체도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자연이 각각 그 본성에서부터 다른 것으로 이해되고 경험된다면, 사드의 거친 저항과 마조흐의 감상적 저항이 서로 완전히 다른 자연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들은 같은 자연이 아닌 본성적으로 다른 자연 안에서 자신의 망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아이러니와 유머가 가능해지는 특수한 조건들이 이미 이들의 서로 다른 현실인식 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드와 마조흐가 서로 다른 저항의 방식을 운용한다는 것은 그들이 지각하고 경험하는 세계가 본성적으로 다른 세계임을 말해주고 있다: (1) 사드는 아이러니의 구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그가 법과 폭정에 대해 저항하는 발화방식으로서 아이러니는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의 지각구조인 셈이다. 절대적이고 순수한 그의 폭력 속에는 법의 폭정에 대한 분노가 스며들어 있다. 1789년 혁명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혁명은 법 제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영속적인 혼란의 움직임을 제도화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며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다. 93> 아이러니적인 아이러니의 구조 아래 사드의 저항은 저항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폭정에 대한 저항은 폭정의 이데아에 의존한다. 사드가 이해하는 현실은 폭력과 강요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또한 그는 폭력이 배제된 어떠한 현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법과 같은 계약과 문화의 산물이 거친 세계를 모방하는 것에 못 견뎌 한다. 사드는 소통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그에게 수치이며 소통의 일치는 바로 이차적 자연의 산물들과 그 부드러움 속으로 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논증들은 일치된 소통을 위한 노력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성이 폭력의 세계를 모사(模寫)하며 대변하고 있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2) 마조흐는 소통이 사라진 세계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드와 정 반대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거부에는 근원적인 부정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의 목적은 사라진 세계의 복원이나 이데아의 현실화에 있지 않다. 그는 소통의 부재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의 망상은 곧바로 두 번째 세계로 달려간다. 마조흐는 세계를 둘로 분열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망상을 현실 속에 투사하거나 실현하겠다는 의지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다. 매저키즘의 환상은 그 자체로 현실이다. 이것이 새디즘적 아이러니를 매저키즘적 망상 속에서는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사드는 분열된 자아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인식하며, 마조흐는 세계가 분열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이유로 마조흐에게 하나의 세계에 고착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만일 매저키즘적 유머와 예술적 수사가 소극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해이다. 마조흐는 도약과 폭력으로 지배되는 세계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부드러운 소통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소통이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거부나 저항이 아니다. 분열된 현실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면서 그의 유머와 수사적 저항은 일종의 제스쳐의 기능을 갖는다. 예술의 감상적 본질이 결코 현실적 강요와 폭력의 무게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승리는 그에게 무의미하다. 따라서 그의 나약한 수사적 저항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통 그 자체로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정 반대이다: 그는 소통이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감상적 저항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이 폭력으로 지배되고 있음을 예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패배를 자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폭력의 양상과 그 무의미함을 드러낼 수 있을까? 마조흐는 예증의 미학자이다. 이것은 분노와 항변의 정치가 적인 사드의 면모와 다른 점이다. 거친 강요와 우연적 도약으로 지배되는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대안은 예술과 문화의 소극적 본질이다. 따라서 그의 저항에는 저항의 실패라는 역설적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저항의 실패는 곧 억압의 승리를 의미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로 치닫게 하는 요소이다. 그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하나의 세계로 단번에 도약하면서, 사드가 일찍이 하지 못한 가치의 전환을 최초로 실현한다.
매저키스트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와의 계약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한 재 탄생의 희망이다. 새로운 세계는 아버지의 법이 기능할 수 없는 어머니의 왕국이며, 오히려 가부장적 법이 어머니의 지배하에 운용되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그러므로 구강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잔혹함과 냉정함은 더 이상 아버지의 처벌과 연결될 수 없는 것이다. 법이 가하는 위협(거세의 위협)이 누구로부터 발생하는가에 따라 그 효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아버지의 이미지로부터 발생하는 거세의 위협과 처벌의 고통을 연결 짓는다면 근친상간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여기서 매저키스트는 처벌 후의 도덕적 위안이라는 소극적인 쾌감만을 획득할 뿐이다. 그러나 처벌을 어머니와 그 이미지에 연결 짓는다면 근친상간의 가능성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버지로부터 발생하는 근친상간에 대한 처벌과 금지로서의 거세가, 어머니로부터는 반대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이로부터 아버지의 기능이 없이도 가능해지는 재 탄생의 기회를 확보하게 되며, 이것이 매저키스트로 하여금 자웅동체적 본성을 갖게 하는 요소인 것이다. <"중단된 사랑"이 매저키즘에서 중요한데, 그 기능을 통해 매저키스트는 근친상간과 두 번째 탄생을 성적 활동과 동일시한다. 이 과정은 거세의 위협(불안)으로부터 구제할 뿐 아니라, 실제로 거세를 근친상간의 성공을 위한 상징적 조건으로 방향 전환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94>
고전적 개념에서 볼 수 있었던 법의 아이러니와 유머는 이제 현대적 형식에 의해 법을 공격하고 전복하기 위한 기제로 변모한다. 사드와 마조흐는 저항 방식의 차이로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드는 법의 아이러니적 자기모순을 아이러니적 발화방식으로 공격한다. 순수 형식으로서 대상과 내용을 가지지 않는 법칙이 처벌과 권위를 실현하는 과정은 언제나 위반이 유지되면서 작용한다. 내용을 갖지 않는 형식은 언제나 모순적 내용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재현할 대상(상위근거로서 선)을 잃어버린 법은 제한적 존재인 이차적 자연을 재현한다. 따라서 절대적 원리가 실현되지 않음으로써만 유지되었던 법은 이제 그 대상(이차적 자연)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표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모든 형식에서 - 본성적, 도덕적, 정치적 - 법은 언제나 보존되어야 할 이차적 자연의 법칙을 표상한다. 86>
법이 규정하는 모든 대상과 그 형식들은 합리적이든 정치적이든 이차적 자연의 보존을 위해 우리가 요구하는 어떤 것들을 구현할 뿐이다. 여기서 법이 강자의 표현이라든지 혹은 약자의 연대라든지 하는 것은 부수적 문제이다. <주인과 노예, 강자와 약자 모두가 이차적 자연의 산물이다. 약자의 연대는 절대자의 출현을 선호한다. 절대자의 존재성은 그 연대에 달려있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서 법은 속임수이며 신비화이다. 86> 이차적 자연의 산물은 자신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법을 요구한다. 따라서 법은 이차적 자연의 존재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 약자들의 연대에서조차 법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존재의 보존의 문제가 달려있는 한 법은 이차적 존재들로부터 절대화되며, 따라서 또한 신비화된다. 그러나 이제 법은 이차적 자연의 표상으로만 기능한다. 즉 이차적 자연의 법칙들을 구현한다는 임무를 통해, 그것은 모든 자연을 초월하는 절대적 지배의 지위를 빼앗긴다. 법의 존재성은 이차적 자연에 의존한다. <그것은 위임된 권력이 아니라 주인과 노예의 수치스러운 공모에 의존하는 빼앗긴 권력이다. 86> 사드에게 법이 구현하는 권력의 절대성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것은 신비화되었을 뿐이다.
이차적 자연의 법칙에 의존하여 신비화된 법은 정치적 강제력과 폭정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자연을 보존해야 하는 임무는 법으로 하여금 강제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강자의 표현이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계약이든 그것은 폭정을 불러들이며, 폭정은 법의 이름으로 권위를 도출해 낸다: <폭정은 법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87> 사드가 법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것은 그것이 이차적 존재의 법칙에 의존하며 신비화되고 절대화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폭정을 불어온다는 사실이다. 사드의 아이러니는 폭정에 향해있다.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언어는 독특한 열정에 사로잡혀 폭정에 저항한다. 그러나 법을 초월하고자 하는 시도는 플라톤처럼 상위의 근거로서 선의 개념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절대적 선은 악의 이상으로 대체된다. 이것이 사드의 언어가 내포한 아이러니이다.
내용이나 대상을 갖지 않는 순수형식의 메카니즘이 띠게 되는 미결정성(不定)은 사드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선의 개념으로 법을 초월하기보다는 사악함의 원리와 <플라톤 주의의 전복의 원리>로 작용하는 악의 이상으로 나아간다. 사드에게 법과 관련된 모든 내용들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그는 형식의 유희를 통해 플라톤과 대립한다. (1) 플라톤이 선을 재현하는 이차적 존재로서 법을 이해했듯이, (2) 사드는 악을 표상하는 이차적 존재로서 법을 이해한다. (1) 플라톤에게 절대적 선이 법을 초월하는 원리이듯이, (2) 사드에게 법을 초월하는 새로운 원리는 절대적 악이다. 따라서 이것은 보잘 것 없으며 미숙한 법의 지배로부터 보다 영속적인 지배의 원리로서 악의 제도화로 치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법을 초월하는 방식의 새로움은 아이러니라는 반어(反語)의 독특함과 연결된다. 그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약자의 변호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그 보다 더 절대적인 폭력으로 약자를 비난한다. 사드의 언어를 법이 보여주는 악의 미숙함에 대한 충고이며 괴로움을 극한의 상황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진정한 악이란 바로 이런 것이야!
사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조흐 역시 형식의 유희를 통해 법에 저항한다. 그러나 형식의 유희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매저키즘의 전체과정이 법과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매저키스트는 법을 준수하는 것과 법의 주체로서 현존하는 문제가 일치하지 않음을 말하려 한다. 매저키즘은 법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법을 이용해 법에 도발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조흐의 유머는 법적 처벌의 과정이 위반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서 작용할 때, 즉 위협과 금지와 불안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할 때, 어떻게 그 안에서 저항하고 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금지된 쾌락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경우든지 처벌을 수반한다. 복종함으로써 처벌을 받거나, 법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처벌을 받거나. 마조흐에게 법은 처벌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 경우 그는 법에 강렬하게 복종함으로써 법을 경멸하거나 비판한다. 매저키즘의 저항은 사드의 경우처럼 법의 상위원리로 향하는 아이러니적 과정이 아니라, 법의 처벌의 과정으로 하향하는 유머를 통해 진행된다. 아이러니가 사물들의 표면을 심층적인 것으로 조소하거나 비판하는 기능을 띤다면, 유머의 기술은 사물의 심층을 표층으로 끌어내리는 힘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유머 안에서 존재들의 위상은 우스꽝스러워지며, 그 무게는 가벼워진다. 마조흐는 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법에 복종함으로써 넌센스를 만들어낸다.
피학적 욕망의 실현과 표현은 그 자체로 법의 넌센스를 예증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처벌을 스스로 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법적 과정의 효과와 목적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매저키즘의 시작은 우선 욕망의 충족으로부터 처벌로 연결되는 인과관계를 단순한 시간상의 연속으로 이해하면서 작동한다. 따라서 금지하는 것을 욕망하거나 위반했을 때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명제는 이제 역으로 진행된다: 처벌 후에는 반드시 위반(금지된 쾌락)의 자격이 주어진다. 매저키스트는 법의 전체과정을 <처벌의 과정 88>으로 이해한다. 위반하면 처벌이 온다는 인과적 연쇄가 시간상의 단순한 연속으로 이해됨으로써 법의 진행은 이제 처벌에서 위반으로 역전되는 순서로 바뀐다: 처벌 후에는 반드시 쾌락이 온다. 여기에는 더 이상 대상과 내용을 가지지 않으며 그 자체 순수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현대적 개념의 법을, 무한한 공식으로 밀고 감으로써 가능해 지는 수사적 과장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은 이제 처벌의 원인이 아니라 처벌의 결과가 되어 버린다. 같은 의미로 처벌은 쾌락을 인가해주는 의례이다. 유머가 아니라면 어떻게 미리 처벌을 받고 쾌락을 허가 받는다는 넌센스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법의 순수 형식의 특성과 이에 따른 법의 고정성을 표층화하지 않고 이러한 행위는 불가능하다. 매저키스트는 과장(hyperbole)하면서 저항한다. 유머의 표층구조 안에서 처벌은 이제 더 이상 위반의 금지나 쾌락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위반과 쾌락의 조건이 되고 있다. 매저키즘적 쾌락은 처벌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진행된다. 처벌은 쾌락의 금지나 결과가 아니라 전제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매저키스트는 처벌 후에 올 쾌락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주1). 법의 형식은 매저키즘적 과정 속에서 처음에 의도하던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채워진다. 매저키스트 앞에서 법은 난감해 진다. 자발적으로 처벌을 애원함으로써 처벌의 최초의 목적은 무효화되고 우스꽝스럽게 전복되기 때문이다. 매저키즘적 유머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발 날 좀 때려 줘! … 더 세게! 더 세게!
사드와 마조흐의 수사적 반항은 순수형식으로 변화한 현대적 개념의 법 체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구체적 내용이 삭제되고 난 후, 형식은 새로운 원리와 처벌의 메커니즘으로 채워진다. 이들은 하나의 체계가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면서 어떻게 부조리함을 드러내며, 또한 거기서 어떻게 유희가 가능해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드와 마조흐는 형식의 유희를 통해 저항한다. (1) 사드는 법의 상위원리로 근거하는 선을 비워내고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악으로 그 내용을 채운다. 새디즘의 수사는 보다 높은 상위원리로 자신의 근거를 소추시키는 심층적 메카니즘을 유지하면서 그 내용의 치환을 통해 플라톤을 패러디한다. (2) 마조흐는 순수 형식으로 존재하는 법의 메카니즘을 과정과 절차들의 단순한 역전과 뒤집기를 통해 비웃고 있다. 금지된 쾌락 이후에 처벌로 이행되는 인과적 메카니즘은 처벌과 쾌락의 단순한 시간적 연속으로 간주되면서 표층적 메카니즘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쾌락의 결과로서 처벌이라는 형식은 처벌의 결과로서 쾌락이라는 형식으로 간단히 방향 전환한다. 우리는 매저키즘에서 법이 부여하는 죄의식이 어떻게 쾌락으로 전환되는지 보게 되는 것이다. 그는 결과를 통해 사유하는 결과론자이다: <매저키즘은 고통이나 처벌 속에서 쾌락을 얻지 않는다. 처벌이나 불안함으로부터는 기껏해야 예비적 쾌감을 얻을 뿐이다. 그의 진정한 쾌락은 결과적인 것으로 획득한다. 처벌에 의해 가능해질 어떤 것 속에서. … 매저키스트는 아부 속에서도 오만하며, 복종 속에서도 저항한다. 그는 유머리스트이며 결과의 논리학자이다. 이는 원리의 논리학자인 아이러닉한 새디스트와 다른 면이다. 89>
사드의 저항에는 확실히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왜냐하면 새디즘의 주체는 법과 이차적 자연을 초월하여 절대적 근거로서 동일시된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드의 언어에서 우리는 저항하고 반항하는 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마조흐의 저항은 유머러스하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진행되는 처벌의 강렬함은 그의 은밀한 망상 속에서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유머는 넌센스의 미학이다. 그의 언어에서 우리는 당혹해하는 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매저키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신은 더 이상 처벌의 주체가 아니다. 이미 논의했듯이 매저키즘의 과정은 법의 주체가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치환된 이후에 시작된다. 따라서 계약을 통해 법의 주체를 어머니에게 양도함으로써 오히려 매 맞고 추방당하는 실패한 신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이다. 외디푸스적 관계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역할들을 가지게 된다. 새디즘의 경우 아버지는 상위근거로서 법을 초월한다. 그러나 매저키즘의 경우 처벌의 주체가 어머니에게 투사됨으로써 아버지의 법(처벌)은 완전히 무의미 해진다. 실패한 아버지의 법. 실패한 법의 선언. 이것이 바로 유머러스한 마조흐의 수사적 테크닉이 겨냥하는 본질이다.
(주1) 그러나 처벌을 쾌락의 원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매저키즘은 처벌 자체를 쾌락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처벌이 가져오게 될 결과로서 쾌락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처벌을 기다리면서 쾌락을 기대하고 있다. 진정한 쾌락을 가져다 줄 예비적 쾌감으로서 처벌. 여기서 사법적 과정은 예비적 단계로 축소되면서 동시에 그 원래의 목적이 전복되는 효과가 드러난다. 매저키스트는 법적 과정을 쾌락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법은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한다. 또한 법의 권위를 인가해 주는 것은 법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법의 현존은 다른 것에 의해서만 가능해 진다. 또한 이것은 법의 본질이 재현의 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플라톤에 의해 개념화된 고전적 의미로서 법이다. 법은 보다 상위의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을 설명하거나, 처벌의 결과를 암시함으로써 준법의 타당성을 설득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법은 드러나지 않는다. 재현은 그 목적과는 완전히 반대로 사물을 은폐함으로써 가장 잘 발휘된다. 고전적 의미에서 법의 상위근거는 절대 선(善)으로 환원된다. 법은 선을 재현하는 한에서 타당하며, 선에 가장 가까워짐으로써 자신을 실현한다. 따라서 법의 본질은 재현을 통해 (상대적)최선이라는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법은 선의 표상적 대리물일뿐이다. 81>
그러나 여기에는 재현과 은폐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선을 실현할 수 있거나 선을 잘 알고 있다면 더 이상 법은 필요 없을 것이다. 재현에는 아이러니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재현은 그 대상을 통해 가치가 확인되지만, 대상의 재현이 실현되고 완결됨으로써 재현 그 자체는 더 이상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재현의 과정은 그 대상이 실현되지 않는 한에서 , 대상을 은폐하는 한에서만 유효하다. 이런 의미에서 선과 법의 재현 메카니즘은 다음과 같이 야릇하게 꼬이게 된다: 법을 통해 선은 현존하지 않아야 하며, 상위근거로서 선은 더 이상 법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표상적 재현의 야릇함(ironic)이다.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역으로 법을 준수하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 효력과 권위가 유효해 진다는 것에도 적용된다. 법은 금지하는 것에 의해 살아난다. 법은 준법의 반정립이다: <법은 자신의 운명을 유죄판결을 내린 사람의 손에 맡긴다. 81>
또한 법이 결과를 통해 준법의 타당성을 설득하는데는 상당히 유머러스한 의도가 숨어있다. 상대적인 최선을 제시하면서 법에 따를 것을 말함으로써 처벌의 결과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법의 강제력이 은폐되고 있으며, 암암리에 그 강제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는 셈이다. 법은 설득하지 않는다. 법의 설득의 기능은 강요가 내포되어 있는 한에서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은 두 가지 방식으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우리를 설득한다. (1) 보다 상위의 필연적인 원리에 의존하면서, 법의 최종적이고 궁극적 책임을 그 원리에 투사한다. 법은 선의 개념 안에서만 자신을 표현한다. 외적으로 준거하는 최상의 원리에, 존재의 근거를 투사하는 운영에는 반드시 아이러니적 특성이 내포된다. (2) 절대적 가치로 환원하는 상위의 근거로서가 아니라 반대로 최선이라는 상대적 가치로 의미를 끌어내림으로써 설득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법이 결과나 처벌의 사태를 암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선택의 한계를 부여하거나 빼앗는 효과를 보여준다. 법은 자신의 절대적 권위나 강제력의 힘을 암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대상을 압도하는 것이다. 법의 명시적 가치를 스스로 상대적으로 축소함으로써 법에 반(反)하는 사람에게 설득하고 호소하는 듯한 모습의 이면에는 유머러스한 강제력이 숨어있는 것이다.
또한 법의 이와 같은 유머러스한 성격은 계약적 본질을 드러낸다. 계약은 약속이나 동의 또는 합의를 통해 구성되지만, 일단 그것이 만들어지고 나면 계약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당사자들로 하여금 한없이 의존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법의 아이러니적 사유는 선이라는 상위개념에 의지하면서 강요의 본질을 감추고 있으며, 법의 유머러스한 사유는 법의 절대성을 그 결과(혹은 처벌)의 측면에 집중시킴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지 법은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다: <법의 개념은 강제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82>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개념으로서 법은 현대적 개념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법이 더 이상 선이라는 상위개념에 근거할 필요가 없다는 점. 칸트의 도덕법은 순수형식으로서 내용, 대상, 구체적 상황 등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선의 원리는 더 이상 법의 근거로서 설정되지 않으며, 법은 순수형식으로 그 자체 정립한다. <칸트에 의해 최초로 … 지식 대상은 주체의 활동 속으로 용해되었으며, 선은 법의 테두리 속으로 환원되었다. 83> 이것은 대상의 객관성이 지식 자체의 내부에 의해 구성되며, 선의 객관성 역시 법 자체의 내부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상은 이제 주체의 활동에 의해 재구성된다. 이것이 현대적 개념으로서 법의 첫 번째 혁명이다. 또한 법은 더 이상 정당함과 최상이라는 선의지의 표상으로서 최선의 개념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법은 재현의 과정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겨난다. 대상의 객관성 혹은 법의 객관성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모호한 테제로 잠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도덕법은 순수 형식으로서 내용도 대상도 없으므로 아무도 알 수 없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작용한다. … 심지어 죄와 처벌조차도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극단적으로 특수한 처벌에 의해서만 상응하는 미결정성의 상태로 법을 남겨둘 뿐이다. 이것이 카프카(F. Karfka)가 묘사한 세계이다. 칸트와 카프카. 이들은 현대적 법의 두 가지 차원이다. 84>
법이 순수 형식으로만 존재하여 내용과 객관성의 미결정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법에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해 지게 되었다. 법이 요구하는 정의와 올바름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순수 형식으로서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법에 완전히 복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네 의지의 준칙에 맞게 행위하라). 우리는 의지의 준칙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한없는 복종은 언제나 부족함을 가져오며, 따라서 준법의 본질은 죄의식으로 연결된다. 법에 복종하면 할 수록 더욱 더 부족함을 느끼는 죄의식. 법에 대한 복종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죄를 짓고 처벌을 받는 것뿐이다. 법을 위반하고 그 법이 주는 처벌에 복종하는 것: 복종은 위반에 의해서만 확인될 뿐이다. <법은 자신의 절대적 순수성을 유지하며, 우리로 하여금 죄의식을 증명한다. 84> 최고의 근거로서 선에 의존하는 법과 최선에 의해 타당성이 인가된 법의 고전적 개념은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속죄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일종의 정의이다. 그러나 또한 양심은 죄를 전제한다. 그것은 죄의식을 해소하지만 동시에 죄(의식)를 생산하는 기능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순수형식으로서 법은 복종의 강요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발견하지만, 동시에 위반의 생산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법으로의 복종은 정의감을 유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더욱 더 고결한 인간일수록, 그에게 가하는 그의 양심의 행위가 더욱더 엄격하고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84> 쾌락은 양심에 의해 중단되지 않는다. 오히려 쾌락의 포기가 양심을 이끈다. 따라서 양심의 강도는 쾌락의 포기에 비례한다. 양심과 쾌락의 관계는 야릇하게 꼬여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본능적 충동이 실패하거나 포기되었을 때 그 공격성은 초자아에 흡수되어 다시 자아를 공격한다. 양심은 억압된 욕망의 산물이지,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
법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이미 위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법은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모순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법에 있어 결정적인 내용은 명시되지 않으며, 스스로 내포하고 있는 억압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만족과 관련하여 충분히 자신을 설명하지 못한다. 접근할 수 없는 순수형식으로 존재하는 한, 따라서 법이 한없이 자신을 은폐하고 있는한, 법적 존재로 하여금 죄의식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대상의 근본적 본성이 어머니와 연관되는 반면에 욕망과 법의 본성이 아버지와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이를 통해 법에 있어 결정적인 내용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 반대로 … 그는 법의 외디푸스적 기원의 설명을 통해, 대상(어머니)과 주체(아버지) 양자를 모두 포기하면서 나오게 될 순수형식으로서 작동하기 위해, 법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자신의 내용을 은폐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85>
고통을 쾌락으로 경험하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흔히 도착과 변태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지각이나 감각의 물질적 변이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쾌락이나 고통을 운용하는 주체의 메커니즘을 물질적 내용으로 고정시켜서 이해하게 된다. 지각과 감각의 체계에 어떠한 구체적인 내용의 심리적 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결국 도착과 변태성을 알 수 없는 신경증적 물질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파악하게 된다. 과학은 문화적 토대를 통해 발전하기도 하며 동시에 문화는 과학적 실험과 증명을 통해 자신의 근거를 구축한다. 하나의 이질적인 물질의 개입으로 부지불식간에 체계가 변형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어 도착은 이제 문화적 이질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모는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도착과 망상을 변태적 상궤이탈의 영역으로서 신비화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도착을 다루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구체적이고 확고한 내용을 띤 물질이 내면화의 형식 속에서 전이되고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내용들은 모두가 형식적 요소들을 채워 넣기 위해 필요한 제재들이다. 그래서 쾌락과 고통의 콤플렉스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경험하는 내용들을 이루고 있으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미지들은 도착의 주체들이 환상을 갖고 이상화하거나 파괴하는 내용들을 이룬다. 그러나 이것은 내용들을 채우고 담아 내는 메커니즘 즉 형식적 요소와 연결될 때만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이를 통해서만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물질은 언제나 형식에 담겨져 있으며 모양새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도착에서 쾌락과 고통의 콤플렉스나 환상의 내용들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특정한 형식을 요구한다. 콤플렉스라는 경험의 내용을 이루는 물질적 설명방식은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관계를 새도-매저키즘적 실체로 규정할 위험이 있으며, 이것은 이 둘에 대한 혼란을 초래한다. 죄의식이나 속죄라는 경험적 사실의 개념을 토대로 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정의 역시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미리 결정된 문화적 소통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 속죄나 죄의식 그리고 쾌락-고통의 연결공식은 기다림의 형식(매저키즘)이나 투사의 형식(새디즘)등과 같은 특수한 형식적 조건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매저키즘이나 새디즘이 도덕적이거나 물질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은 이 변태성을 단순히 병인학적 관점에서 혹은 질병의 실체라는 관점에서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변태성은 예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용들의 문제는 언제나 그것이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방식의 관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도착은 형식적이다: <변태성 과정의 심층을 관류하는 형식적 패턴은 허구적 예술의 형식적 요소로 드러난다. 74> 매저키즘적 고통이 쾌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물질적 내용이 엉뚱한 방식으로 경험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매저키즘적 시간 속에서 고통이 쾌락으로 경험되고 쾌락이 고통으로 경험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통이 쾌락으로 전이되고 쾌락이 고통으로 전이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에게는 <고통과 처벌 혹은 모욕이 만족을 얻기 위한 필수적 전제조건이기 71> 때문이다.
매저키스트는 시간을 기다림의 형식으로 경험한다. 기다림은 매저키즘적 시간의 본질이다. (1) 항상 늦게 오는 기다림의 대상. (2) 기다림(의 대상)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기대. 이 두 가지가 바로 매저키즘적 시간의 두 형식이다. 그러므로 또한 매저키스트의 기다림은 언제나 불안과 서스펜스를 내포하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 도래할 무엇인가에 대한 기다림. 매저키즘의 시간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궁극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기다림에서 나오는 긴장과 서스펜스인 것이다. 매저키즘적 도착에서 모욕이나 속죄, 처벌, 죄의식 등과 고통의 메커니즘 속에서 쾌락을 경험하는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경험하는 기다림의 형식을 이해해야 한다: <매저키즘은 기다림의 상태이다; 매저키스트는 기다림을 순수형식 속에서 경험한다. 71>
언제나 늦게 오게 될 기다림의 대상과 이 대상을 가속화할 어떤 것에 대한 기대라는 두 가지의 순수형식의 흐름 속에서 매저키스트는 고통과 쾌락을 결합시키고 경험한다. 순수형식으로서 기다림은 두 방향으로 흐른다. (1) 본질적으로 늦게 오는 쾌락. (2) 쾌락을 가능하게 하는 혹은 가속화할 고통. 쾌락의 기다림과 기대되는 고통. 매저키스트는 늦게 오게 될 쾌락을 기다리며, 쾌락의 조건인 고통을 기대한다. 그래서 그는 고통의 기대 속에서 쾌락을 연기하고 지연시키는 것이다: <매저키스트는 쾌락을 늦게 오는 어떤 것으로 기다린다. 그리고 고통을 조건으로서, 즉 결국에는 쾌락의 도래를 확실하게 해줄(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조건으로서 기대하고 예감한다. … 매저키스트의 불안은 따라서 쾌감의 무한한 기다림과 고통의 강렬한 기대로 나뉘어 진다. 71>
순수형식으로서 기다림의 시간을 매저키스트는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하며 어떠한 효과를 실현하는가? 라이크(Reik)는 매저키즘의 형식적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열거한다. (1) 형식으로서 환타지의 중요성. 환타지는 매저키즘적 이상화 과정의 독특한 형식이다. 그리고 환타지의 내용에는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 자체 목적을 위해 경험되는 환타지, 꿈으로 이루어지고 드라마화되고 의례화된 장면 … 은 매저키즘의 필수적 요소이다. 75> (2) 긴장의 요인. 매저키즘에서 긴장과 서스펜스는 한없는 기다림 속에서 나타난다. 지연된 쾌감에 대한 한없는 기다림은 불안의 본질로 작용한다. 쾌감의 분출과 그것의 금지의 두 항 사이에서 매저키스트가 경험하는 것은 진공의 서스펜스이다. (3) 지속적인 설득. 마조흐의 인물들은 설득과 망설임의 대화를 통해 대립적인 관계를 만들어 간다. 설득으로써 가해자 여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매저키스트는 그 자체로 굴욕과 고통을 인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속적인 설득의 과정에는 비굴함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4) 도발적 공포. 기다림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불안과 공포는 강렬한 처벌을 통해 해소된다. 매저키스트는 처벌을 적극적으로 요구함으로써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려 한다. <왜냐하면 처벌은 불안을 해소하고 그로 하여금 금지된 쾌락을 허락해 주기 때문이다. 75>
매저키즘에서 또 하나의 특징을 볼 수 있다. (5) 계약. 매저키즘에서 계약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고통과 굴욕이 한없이(죽음으로) 치닫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기능하기도 하며(법의 제한 경제적 본성), 매저키즘적 주체의 환상이 타자와의 상호 이해 속에서 인증된 것임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며(법의 설득적이고 교육적인 요소), 환상의 내용으로서 이상적 어머니에게 모든 법적 상징적 권위를 부과하는 절차로서 이해되기도 한다(사법적 요소). 계약의 기능들은 모두 마조흐의 사랑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그러나 계약의 형태들은 점점 잔혹해 지고 더욱 더 인물들로부터 행위와 권리를 박탈하는 기제들로 나타난다<277∼279참조>. <이것은 일단 정해지고 나면 둘 중 어느 하나에게는(여기서는 법의 발기자) 점점 제한적인 성향을 띠는 법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76>
계약을 사회적 형태로 확대하여 재해석함으로써 마조흐는 법적인 사유를 통해 이데아를 실현한다. 사드의 자연주의와는 반대로 마조흐는 문화주의를 표방한다. 이 문화주의 내에 예술의 관점과 법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1) 미적 측면: 예술과 서스펜스의 모델. (2) 사법적 측면: 계약과 복종의 모델 76> 마조흐에게 모든 자연적 질서와 움직임들은 하나의 장면 속으로 흡수되어야 하며 일정한 계약과 법의 형태로 구조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드에게 이러한 구조는 절대적 망상을 실현하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원초적 관능성과 영속적 움직임의 재현은 계약이나 예술의 형식으로 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약과 법은 그 당사자들에게만 적용되며, 일정한 기간과 제한적 기능을 가짐으로써만 가치가 있다. 또한 거기에는 설득과 교육이라는 구차한 절차를 통해서만 작동한다. 사드는 법의 제한적 기능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법을 초월하는 영속적인 효과와 움직임의 기제들을 원하는 것이며, 이것은 법이 아닌 제도를 통해 육화 한다고 믿는다.
사드는 제도로써 사유한다. 제도는 시간을 넘어서려는 경향을 보이며, 특정한 출발과 끝의 지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체 속에 하나의 부분을 이루면서 언제나 문화의 영역을 벗어나려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제도의 출현과 소멸은 매우 오랜 시간을 요구하며, 따라서 법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법을 무기력한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양도되기 힘든 어떤 것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메카니즘의 재현은 영속적으로 효력을 띠는 제도를 통해 구성된다. 자연적 질서에 매번 개입하는 법의 모델과 다르게 언제나 자연적 질서 안에 내재하는 제도의 성향을 사드는 실현의 형식적 메카니즘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권리와 의무의 체계를 행위, 권위, 권력 등과 같은 역동적 모델로 대체한다. 77> 사드가 염원하고 있는 공화국은 법으로 지배되는 세계가 아니다. 그 세계는 제도로 소유된 세계이다.
법과 제도는 서로 상반적인 관계를 갖는데, 이로써 마조흐와 사드의 서로 다른 정치적 특성을 띤다. 법은 행위를 고정시키고 도덕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순수한 제도는 법적으로 고정된 상태이기보다는 몸에 익숙해진 어떠한 행위들이며 이것은 법보다 역사가 깊다. 생쥬(Saint-Just)는 법과 제도의 상반적 특성을 역관계로 논의한다: <(1) 법이 제도를 능가; 법이 많고 제도가 적은 경우; 독재와 전제주의. (2) 제도가 법을 능가; 법이 적고 제도가 많은 경우; 공화주의 78>. 공화주의는 제도의 최대화를 통해 가능해 지는데, 제도의 최대화란 계약이나 법에 의해 안정된 상태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설정된 불안함의 상태이다. 공화주의적 체계 속에서 절대권력이 끊임없이 추구되어야 하는 불안함의 상태는 폭력과 부도덕함의 불안함과 닮아있다. 이러한 영속적인 불안함을 위해서는 공화주의를 유지하려는 노력으로부터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고정된 공화주의를 연속적으로 전복하는 다른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 것이다.
사드가 혁명 속에서 발견한 것은 그것이 계약이나 법으로 구성된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러한 요구의 아이러니를 발견한 셈이다. 사드의 정치적 사유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요약 가능하다: 도데체 어떻게 법과 계약을 통해 혁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법은 신비화되어 오히려 독재와 전제주의에 악용되지 않는가? 사드는 <물신, 중상모략, 절도, 매춘, 근친상간, 소돔적 타락, 심지어 살인 79>과 같은 악의 제도화로써 법이 탄생시키는 독재와 폭정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부도덕함의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법이 추구하는 도덕적인 상태와 고정된 안정의 상태를 부정하는 과정은 악의 제도화를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드는 순수 악 그 자체를 제도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더욱 나아가 그것이 필연적으로 이상적인 제도이며, 영속적인 효력을 발휘하며, 불멸의 움직임 속에 남아있는 제도의 전형임을 입증하려 한다.
마조흐는 계약과 예술의 형식으로 자연을 이해하며, 사드는 제도의 형식으로 자연을 이해한다: <(1)계약에 흐르는 특정한 충동은 법의 창조로 가는 경향이 있다. 법이 오히려 그 계약을 초과하고 법의 권위를 계약에 부여하는 성질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2) 제도에 상응하는 충동은 모든 법을 가치저하 시키며, 그 자체로 모든 것 위에서 군림하는 절대적 권력을 구성하려 한다. 77> 마조흐에게 현실적 자연은 거부된 대상이며, 따라서 그의 문화주의 안에는 현실적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사드에게 자연은 언제나 부정과 억압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사드의 망상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존재로 남아있다. 사드의 괴로움은 여기에 기인한다.
사드와 마조흐의 예술 속에서 두 가지 상이한 재현방식을 볼 수 있다. 이는 다시 망상이 운용하는 두 가지의 상이한 이상화 과정이다. 끊임없이 운동하는 세계 따라서 포착할 수 없는 순수운동의 이미지는 이 두 망상의 예술 속에서 감싸이거나 혹은 한없이 펼쳐진다. 마조흐의 경우 순수운동의 이미지는 정지된 화면 속에 긴장의 형태로 감싸이며 한없는 기다림의 불안함으로 휘감긴다. 그러나 사드의 예술은 이와 같은 긴장을 부정하며 순수운동은 그 자체로 표현되어 펼쳐져야 한다. 운동의 이데아를 이 두 예술은 두 가지 상이한 망상으로 포착하고 있다. 마조흐의 예술을 미적 조형적 긴장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사드의 예술을 양적 유물론적 팽창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조흐의 예술에서 심미적 조형적(plastic) 요소는, 감각기관들의 동물적 본성이 외부대상을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형태로 변이 시켰을 때 오는 고통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다. 그래서 마조흐는 <변형된 관능성이라는 문화적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초 감각주의'의 독트린을 주장한다. 69> 따라서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조형예술의 이미지로 나타나며 정지된 하나의 화면을 구성한다. <여인들은 대리석으로 재현되기도 하며, 달빛을 받은 차가운 동상(statue), 어둠 속의 그림 등으로 나타난다. 69> 이는 다시 냉혹함과 잔혹함 혹은 냉정함 등으로 연결되어 신비적인 분위기를 내 품게 된다. 마조흐 예술의 본질은 바로 이 정지된 요소를 토대로 하고 있다. 동상이나 그림들처럼, 작품 속의 모든 요소들과 인물들은 마치 거울에 반사되어 얼어붙은 모습처럼 효력 정지되어 강도를 전혀 가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반면에 사드의 예술은 예술적 심미성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예술의 문화적 특성은 실재하는 운동을 정지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모든 관능성과 정욕은 예술의 형식으로 감 싸여 버리거나 긴장의 형태로 정지되어서는 안 된다. 사드의 주인공들은 정욕이나 동물적 본성을 결코 정지된 어떤 것으로 남기려 하지 않으며 그 가능성마저도 부인한다: <"… 욕망은 너무나 빨리 왔다가 사라져 버리니, 예술가로 하여금 자신을 그려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70> 그에게 운동하는 활동성의 본질을 예술작품을 통해 묘사하고 정지시켜 가두어 버리는 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현실 속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조흐는 자신이 잠을 자지 않을 때에도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는 환상을 통해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드는 자신의 관능적 욕망을 꿈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투사한다. 반복의 매커니즘에서 환상은 곧바로 현실적인 것으로 치환되어 다른 인물들 혹은 외부세계에 투사된다. <그는 잠을 잘 때도 꿈꾸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72> 새디즘에서 편집증적 투사의 힘은 환상을 객관세계에 있어 근본적이고 갑작스런 변화의 도구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자신의 사악함은 끊임없이 세계에 영향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환상이 실현된다는 것은 실질적인 환상의 내용을 경험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환상의 실현은 곧바로 환상 자체가 사라지는 한에서만 가능해 진다. 환상은 끊임없이 현실세계에 투사되면서 그 자체의 순수한 형식이 사라져야 한다. 현실적인 것과 환상의 이와 같은 관계를 우리는 새디스트의 테크닉들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내부에서 나오는 환타지를 끊임없이 억제함으로써, 그것이 현실적인 강박관념으로 자리잡도록 유도한다. 내용을 적어두거나 논증적인 현실화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환타지를 강력하게 증폭시킨 후에 행동에 옮긴다. <이러한 방식으로 환타지는 최대의 공격적 힘과 체계화, 실제세계로의 개입능력을 요구하게 된다: 이상적 관념(the Idea)은 (현실세계에) 괴상한 폭력으로 투사된다. 73>
환타지를 운용하는 메커니즘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물신과 맺는 관계의 차이까지도 도출한다. (1) 새디스트는 물신과 파괴적 관계를 갖는다. 이는 그가 환타지를 억제하여 현실세계에 이상적 관념을 투사하려는 면모를 통해 알 수 있다. 새도 매저키즘적 개념에서처럼, 물신을 파괴하는 행위가 물신에 대한 믿음을 반정립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반화이다. 오히려 물신이 파괴되면서 투사가 가속화된다. 그것은 환상을 약화시키고 환상 속에서 감도는 이상적인 내용들을 실제세계에 펼쳐내기 위한 방식이다. (2) 매저키즘의 경우 물신은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중화되어 흡수되는 지점이며 그러한 방식을 구현한다. 현실은 새디즘적 부정에 의해 투사되거나 침투되는 것이 아니라 거부에 의해 물신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물신은 환타지를 구현하기 위한 대리물이며 매개이다: <물신은 환타지의 대상이며, 그 지고한 면에서 환상화된 대상이다. 72> … <물신을 구성함으로써 환타지의 내적 힘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기다리는 특성, 정지된 정적인 힘을 반영한다. 또한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함께 물신에 의해 흡수되고 합병되는 방식으로 향한다. 73> 새디즘에서 물신이 파괴적 관계를 통해 투사의 촉매로 기능한다면, 매저키즘에서 그것은 고양되는 것이다.
정지된 이미지로서 예술과 운동하는 관능성은 불일치한다.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술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사드의 소설에서 보여지는 반복과 묘사들의 양적 팽창과 축적 그리고 다양한 주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제시되는 중층 결정적 테크닉은 이런 이유에서 나온다. 그의 언어는 운동의 증식이나 힘들의 축적과 같은 양적 메카니즘에 의존하며, 이들을 통해 진정한 운동의 이데아를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충동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조흐의 언어는 <예술의 부동성과 문화가 가지는 반영적 자질에 의존한다. 그의 예술은 조형예술의 영원성을 간직한다. … 정지된 화면 같은 장면들(매질하지 않는 채찍, 몸을 드러내지 않는 모피, 피해자에게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는 뾰족구두)은 모든 운동을 초월하여, 삶과 죽음이라는 원천으로 다가가는 심오한 기다림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70> 이와 같은 예술적 특성은 <체포된 운동 … 얼어붙은 정지상태, 사진, 그림으로 그려진 … 모습> 들을 재현하고 있으며, 이는 문화적 질서가 취하고 있는 완고함과 거울의 반사와 같은 시각적 긴장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영속적인 이데아에 대한 망상은 두 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실재하는 운동의 이미지와 외부세계를 재현하는 방식으로서 (1) 자신의 이상적 이미지 혹은 환타지 내부로 끌어들여 감싸고 포섭하는 방향. (2) 자아이상을 외부세계에 재현하고 끊임없이 펼쳐내는 방향. 전자의 경우(마조흐의 예술) 현실적인 것과 운동의 순수자질은 변형되어 하나의 그림으로 포착되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사드의 예술) 자아를 억압하고 물신과 환타지를 파괴하면서 이상적 관념을 외부세계로 투사한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매저키즘의 과정에는 일정한 도식적 추론이 작용한다. 본능들의 역할과 전이과정이 새디즘과 매저키즘이라는 서로 다른 변태성을 특징 짓지만, 이들은 모두 유사하거나 동일한 원인에서 시작한다는 추론이다. 이에 따라 어머니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이 도착의 두 과정에서 다른 방식으로 기능 함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은 동일한 곳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무관하다. 이들은 동일한 본능의 연속적 전이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매저키즘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권위를 훔치려 하는 욕망에서 시작한다(새디스트적 단계). 죄의식이 다음에 나오고, 그로부터 거세의 공포가 차지해 그로 하여금 능동적 목적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구걸하게 된다. 그러나 수동적 역할이 발생시키는 죄의식과 거세 공포의 새로운 발생을 피하기 위해, 이제는 다시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기 위한 욕망을 '매 맞고자 하는 욕망'으로 대체한다. 57∼58> 이와 같은 추론에 따르면 매저키즘의 과정은 속죄의 과정인 셈이다. 여기서 매저키스트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하여 속죄와 처벌의 과정으로 이행하는 외디푸스적 존재이다.
매저키즘에 대한 정신분석의 추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역할을 중심적인 테마로 설정한다는데 있다. 여기에는 새디즘에서 지배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여전히 매저키즘에도 접목시켜 보려는 의도가 내포된다. 새디즘이나 매저키즘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버지와는 반대로, 어머니는 부수적이거나 유사 원인으로서 아버지의 결정적 위상을 보조해 주는 요인으로 설명된다.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권위를 훔치려는 본능의 공격적 기원이 속죄의식이나 사랑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기능으로 치환됨으로써, 매저키스트가 고통을 받는 행위의 본질을 아버지와의 관계구도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매저키스트는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구걸함으로써 반항과 처벌이라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애정관계로 변치시킨다. 여기서 어머니의 역할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해 자극제 혹은 속죄의 구실로서 매듭 지어질 뿐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새디즘에서 보여지는 절대적 아버지의 권위의 실현이라는 테마는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변형된 형태로 다시 재현되고 있다.
<매저키스트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때려주기를 원한다. 속죄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리고 무슨 죄로? 그것은 소형으로 제작되어 매 맞는, 그리고 우스꽝스럽고 모욕을 받는 그의 안에 있는 정확히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닌가? 그가 보상하려는 것은 그의 아버지와의 닮음이 아닌가? 혹은 그의 안에 있는 아버지다움이 아닌가? 매저키즘의 공식은 모욕을 받는 아버지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때리는 자가 아니라 매 맞는 자이다. 세 어머니의 환타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세 개로 겹쳐진 여성의 모습으로 모든 부성적 기능이 상징적으로 전이되거나 재분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배제되고 완전히 무효화된다. 마조흐의 작품에서 이상적인 여인이 동물들을 사냥하고 그것으로부터 모피를 약탈하는 장면들은 상징적으로 해석하자면, 여성의 남성에 대한 투쟁이며, 거기서 승리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이미 매저키즘이 시작되면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곰이나 모피는 이미 배타적으로 여성적인 의미와 함께 사냥된 것이며 걸쳐진 것이다. 그 동물은 원시적인 창녀 어머니, 탄생 이전의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한다. 동물과 모피는 이미 사냥이 완결된 상태이며, 구강 어머니의 자리를 위해 희생되는 것이다. 재탄생이라는 목적을 위해, 즉 아버지가 완전히 배제된 단성생식적 재생(parthenogenetic second birth)을 위해서. 61>
매저키즘의 과정은 아버지에 대한 도전과 투쟁의 과정이 아니며 또한 속죄와 처벌의 과정도 아니다. 그러나 매저키스트의 거부에는 상당한 능동성이 숨어있다. 이미 아버지는 효력이 정지되었으며, 오히려 처벌의 대상은 승리한 어머니에 의해 매 맞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매저키즘에서 아버지는 이미 배제되었으며, 보다 정확히 말해 매저키즘의 전 과정은 이미 승리한 어머니들이 구강적(이상적) 어머니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전개과정이며 통과의례인 셈이다. 양성이 아닌 단성생식의 과정. 이것이 바로 매저키즘적 과정의 에로티즘이다.
매저키스트가 투쟁적이기 보다는 환상을 탐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내면에 설정되고 결정된 환상을 통해 제도와 아버지는 거부되고 제외된다. 아버지는 동일화의 대상도 아니며 사랑의 주체도 아니며 투쟁의 적도 아니다. 매저키즘에서 아버지는 완전히 거부되며 배제된다. 이것은 소설의 후반부에서 남자의 등장에 대해 매저키스트가 보여주는 반응들 속에서 드러난다. 마조흐 소설들의 마지막에는 남자가 재 등장하는데, 여기서 외디푸스적 여인(새디스틱한 여인)과 새디스틱한 남자의 동맹관계가 나타난다: <『젊음의 샘물』에서 엘리자베스(Elizabeth)와 이폴커(Ipolkar), 『영혼의 낚시꾼』에서 드라고미라(Dragomira)와 부그슬라브(Boguslav), 『비너스』에서 완다(Wanda)와 그리스인 등 … 그러나 … 『비너스』의 마지막에서 볼 수 있듯이, 새디즘적 남자가 승리를 거두게 되면, 모든 매저키스트적 행위는 중단된다; 플라톤에서의 형상(Froms)처럼, 매저키즘은 자신의 반대인 새디즘과 결합하거나 단결하기 보다는 스스로 후퇴하고 파멸된다. 61>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아버지-남자가 출현하는 것은 외디푸스적 어머니가 새디스틱한 인물(남자)과 동맹관계를 형성했을 때인데, 이때 새디스틱한 인물(남자, 아버지)이 승리를 거두게 되면 매저키스트는 이와 동맹관계를 맺거나 투쟁하거나 연합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즘의 과정은 곧바로 중지되어 버린다. 아버지가 매저키즘의 과정 속에 들어올 자리는 없는 것이다.
환타지의 형식 속에서 경험되는 아버지의 배제와 기능의 상실이 바로 매저키즘이 새디즘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이다. 환타지의 형식은 몇 가지 조건들을 수반하는데, 여기에는 기능들의 전이와 치환이 요구되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어머니라는 상징적 신화를 구성할 수 있다. 매저키스트의 환상에는 본질적으로 어머니의 왕국이 내재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화를 단순히 아버지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어머니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매저키즘의 환상을 이와 같이 투쟁과 승리의 강박충동으로 이해하게 될 때 새디즘과의 혼동을 피할 수 없다. 매저키스트의 환상 어디에도 공포의 음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매저키즘의 전 과정은 이미 승리한 어머니이며, 나쁜 이미지의 두 어머니를 굴복시키고 이상적인 구강적 이미지의 어머니가 권위를 실현하는 테마로 구성된다. 이로써 두 어머니(창녀적 이미지의 어머니와 외디푸스적 이미지의 어머니)의 기능과 역할이 구강 어머니에게 전이되는 과정이 실현된다. 환타지는 두 개의 극단을 중화하고 승화하는 것으로부터 나타난다. 이것이 또한 환타지의 일반적 구조이다.
어머니들간의 기능전환과 구강 어머니의 이상 실현은 매음과 매춘에 대한 매저키즘적 독특함을 설명해 준다. 실제로 마조흐는 완다로 하여금 매춘을 설득하고 권유한다. 그러나 매춘의 행위를 새디스트가 보여주는 매춘의 강요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매춘은 이상적 어머니에게 나쁜 어머니의 이미지와 기능들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선한 어머니로서 순수함을 가지는 한에서 구강 어머니는 모든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창녀 어머니를 위해 남겨진 매춘의 기능을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또한 잔혹함을 집행함으로써 외디푸스 어머니의 새디스틱한 이미지를 변형하고 승화한다. 이로써 매저키스트로 하여금 속죄를 통한 재 탄생의 이상으로 가는 과정이 실현된다). 그러나 새디즘에서 매춘은 외디푸스 어머니를 파괴하기 위해 자궁 어머니의 기능을 끌어들이는 제도로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딸이 공범자가 된다. 결국 새디즘의 매춘과 매저키즘의 매춘은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매춘은 두 변태성을 연결시키는 공통적 모습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매춘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작동한다. 1. 사드에게서 보편적 매춘의 꿈은 "객관적 제도"로 구체화되어 어머니(이차적 자연)를 파괴하고 딸을 격상시키는 것이다(어머니는 폐물이 되고 딸은 동반자가 된다). 2. 마조흐에게 매춘의 이상적 형태는 "은밀한 계약"에 근거한다. 거기서 매저키스트는 자신의 아내를 설득하고 선한 어머니의 자격으로 스스로 다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게 하는 것이다. 매저키즘의 이상으로서 구강 어머니는 다른 여성의 모든 기능들을 흡수한다; 여기서 기능들은 변형되고 승화된다. 63>
이와 같이 아버지가 무효화되는 과정은 환상 속에서 구성되는 세 어머니들의 기능전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절대적 기능과 역할이 세 어머니에게 재분배되어 더 이상 아버지가 기능하지 못하는 순수시간의 왕국. 이것이 매저키즘적 환상의 본질이다. 이 왕국에서 <세 여인은 상징계를 구성함으로써, 그 안에서 아버지를 무효화한다. 이와 같은 영원함과 무 시간성의 권력과 통치는 신화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매저키즘의 본질적 요소는 신화이다. 63> 아버지의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는 상징계의 질서는 매저키즘적 신화의 언어를 통해 이제 어머니의 모계적 질서로 대체된다. 자연(어머니)과 대립되어 역사와 문화를 지배하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아버지의 언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아버지는 이제 문화와 법을 대표하지 않는다. 세 겹으로 주름진 어머니의 왕국에 아버지를 위해 비워둔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질서 안에서 어머니는 특별하게 서명되고 계약된 조건들에 따라 법을 재현한다; 그녀는 상징을 탄생시키고, 매저키스트는 이 상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 아버지는 이제 매저키즘의 상징계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 상징적 기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63>
매저키즘에서 이상적 여인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마조흐의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박해자 여성들을 모두 매저키즘의 이상적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추구하는 이상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매저키스트가 경험하는 고통의 제공자로서 박해자 여성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층위들 위에 존재한다. 하나는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환상과 망상 속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두 층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매저키즘의 망상 속의 여인은 첫 번째 층위의 여성들 속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조흐의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박해자 여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들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모피를 입고, 채찍을 휘두르며, 남자를 노예처럼 다루고 … 진정한 사마리아 여인(Sarmatian woman)의 모습을 하고 있다. 47> 그러나 이들이 공유하는 특징들 속에는 완전히 구별되는 극단적인 두 전형이 나타나고 있다: 1. <그리스적 여인>. 2. <새디스틱한 여인>.
마조흐의 여인들은 그리스적 여인의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며, 때로는 새디스틱한 여인으로 구별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대부분 소설의 초반부에서 후반부로 진행 되어감에 따라 그리스적 이미지의 여인은 새디스틱한 여인으로 탈바꿈 하게된다. 『비너스』,『이혼한 여자』,『싸이렌』등의 초반부에서 보여주는 여인의 모습들은 한결같이 그리스적 여인의 모습이다<48참조>. 이들은 현대적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이교도적이며 관능적이다. 또한 제도 안에 안주하여 살수 없는 존재로서, 제도에 저항하거나 질서를 전복하려 한다. 이들은 여성의 독립과, 남성 여성의 동등함을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제도로서 결혼을 거부하고, 가부장제를 파괴하며, 여성의 지배를 확신하는 자웅동체이다. 이들은 모두 혼돈이라는 본질을 표현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제도 안에서는 언제나 사악한 마녀, 혹은 창녀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녀는 현대적이며, 결혼, 도덕, 교회, 국가등과 같은 남성의 산물을 비난한다. 48> 마조흐의 작품들 속에서 그리스적 여인의 모습은 언제나 초반부에 등장한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에 갈수록 처음의 그리스적 여인의 이미지는 새디스틱한 여인의 이미지로 변한다. 매저키스트와의 관계 즉 대화나 계약의 이행의 과정을 통해 박해자 여인들은 점점 새디스틱한 여인으로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사냥하기를 좋아하게 되거나 고문을 즐기게 된다. 이것은 가학을 행하는 것으로부터 삶의 해방을 경험하는 지배자의 모습이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는 매저키즘적 자아가 요구하는 이상적 여인으로 기능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여인의 새디스틱한 면모는 사실 독립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제 삼자인 남성의 지배아래 있거나, 혹은 그 남성의 매개를 통해서만 새디즘을 실행한다. 그녀가 행하는 새디즘의 본질은 남성의 지배에 정체된 셈이다. 새디스틱한 여인은 가부장제의 법 아래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뿐이며, 때로는 남성의 피해자로서 혹은 사랑 받는 존재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외디푸스적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조흐의 소설에서는 <그리스인, 아폴로 … 등으로 불리는> 제 3자가 등장하는데, 새로 등장하는 이 남성의 매개를 통해 박해자 여성들은 새디즘적 충동을 고양하며 새디스틱한 행위의 자극을 받는다. 새디스틱한 여인은 제 3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남자에 의해 고무되고, 남자와 연대함으로써만 해방되는 관능성을 추구한다. 『젊음의 샘물』에서 엘리자베스(Elizabeth Nadasdy) 백작부인, 『파우스타의 하이에나』에서 안나(Anna Klauer), 『영혼의 낚시꾼』에서 드라고미라(Dragomira)와 같은 여인들은 모두 자신의 새로운 애인 혹은 제3의 남성과의 연대나 그들의 지배아래 새디스틱한 행위를 드러낸다.<48참조>
이러한 극단적인 여인들의 두 양태는 매저키즘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매저키스트에게 이 두 극단적인 여성의 모습은 이상적인 여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 번째 여인의 경우에는 아직 매저키즘적 과정이나 행위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두 번째 여인의 경우에는 매저키즘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비너스』에서 완다(Wanda)는 초반부에 스스로 그리스 여인으로 설명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새디스트로 변모한다. 그녀는 스스로 자웅동체이며, <고통없는 쾌락, 그리스인의 고요한 관능성 … 을 이상으로 추구하며, 기독교와 현대적 영혼에 의해 교육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49>고 단언한다. 처음에 그녀는 현대적인 여성으로 묘사되며, 제도와 기독교를 불신하고 여성의 독립을 원하는 자웅동체적인 여인으로 확신한다. 남성의 산물인 기독교는 부패하고 있다고 믿으며, 더 이상 남성의 지배를 묵과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남성과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는 아직 세베린(Severin)의 매저키즘이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후반부에 드러나는 완다의 새디스틱한 면모는 매저키즘적 과정의 본질적 요소로서 등장하기보다는 새로이 등장한 새디스트인 그리스인의 지배아래 이루어진다. 그녀는 이 제 3자로 하여금 세베린을 처벌하도록 요구하지만, 여기서 매저키즘은 사라져 버린다. 세베린은 두려워하고 있으며, 매저키즘적 쾌감은 새디스트인 제3자의 등장으로 인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디스트와의 대면에서 이미 <매저키즘의 존재이유 50>는 상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소설은 새디즘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완다는 잔인한 그리스인과 함께 새로운 잔인성으로 방향 전환하지만 … 세베린은 새디스트 즉 "망치"로 변해버린다. 49>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동일한 박해자 여성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매저키즘적 과정의 동질적 요소들로 보아서도 안 된다. 또한 매저키스트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새디즘적 가학의 양태를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매저키즘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사실 매저키스트가 요구하는 계약에 따른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여성 박해자들은 이 극단 속에서 두려움과 혐오감과 유혹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녀는 처음의 그 역할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 그들은 원시적 창녀 혹은 새디즘과 같은 반대적 극단으로 빠져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50> 이들이 극단적인 새디스트로 변하는 것은 오히려 극단으로 치달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반동형성의 기제를 운용하고 있는 셈이다: <완다가 새디스트로 변한 것은 더 이상 세베린이 부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0> 결국, 두 극단적 여성들의 모습들 속에서는 매저키스트가 요구하는 이상적 여인의 역할을 하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이들은 매저키스트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이다.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본질적인 요소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두 극단적인 여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극단의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혼한 여자』에서 평등주의적 이교도 여인은 주인공이 아니며 … 『싸이렌』에서 창녀 제노비아(Zenobia)는 결국 젊은 나탈리(Natalie)에 의해 패배당하며 … 『영혼의 낚시꾼』에서 새디스트인 드라고미라 역시 솔틱(Soltyk)와 연대하여 새디스트가 되지만 … 결국 젊은 아니타(Anitta)에 의해 패배 당하고 죽음을 맞는다. 49> 이 작품들 속에서 매저키즘의 이상적 요소로 기능하는 여인은 오히려 젊은 나탈리나 아니타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중간지점의 새로운 요소, 진정한 매저키즘적 요소는 무엇인가? 매저키즘의 본질적 요소, 즉 창녀와 새디스트 사이에 있는 매개적, 중간적 여성 유형은 무엇인가? 마조흐의 이상적 여인들의 형태는 양면성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은 경험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모습이기보다는 하나의 환타지 안에서만 가능한 존재들이다. 이런 이유로 마조흐의 이상은 현실세계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중화된 이미지로서만 제시될 뿐이다. 이들에게서는 따뜻함과 냉정함이 공존하고, 온화한 마음과 잔혹한 본능이 공존하며, 새디스트적이면서도, 냉혹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성적이고 친절하며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또한 점잖고 쾌활하면서도 동시에 완고하고 냉정한 모습들이다. -『추함의 미학』에서 어머니의 이미지나 마샤(Martscha)에 대한 묘사들 그리고 로라(Lola)의 양면성, 『신의 어머니』에서 마돈나(Mardona)와 니에라(Niera Baranoff) 등<50∼51참조>. 결국, 이것은 마조흐의 이상이면서 동시에 대자연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양면성 사이에는 모성애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 여성들은 차갑고 얼어붙은 특질과 엄격하고 가혹한 특질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따뜻하고 모성애적인 감성이 자리하고 있다: <마조흐적 꿈에서 삼위일체는 "냉정함-모성애-엄격함", "차가움-감성-잔혹함"으로 요약할 수 있다. 51>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극단적 관능성을 보여주는 초반과 후반의 두 여성의 이미지들이 바로 이 매개적 여성의 중화된 이미지로 대체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스적 여인의 관능성과 혼돈은 이상적 여인의 냉정함과 감성으로 혹은 엄격한 질서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두 극단적 여성들이 소유하는 관능성의 파토스는 <초 감각적 감성 51>으로 치환되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매저키즘에서 이상화된 여인의 초 감각적 감성은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는 매저키즘이 새디즘과는 완전히 다른 이상화 과정을 밟는다는 점이며, 따라서 다른 하나는 매저키즘이 새로운 형태의 사랑과 쾌감을 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1)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새디즘과 매저키즘에는 모두 차가움과 냉정함이 중요한 하나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사드는 이를 냉담성(apathy)이라 불렀으며, 마조흐의 소설들 속에서는 얼어붙은(freezed) 이미지들로 묘사되었다. 이 둘에게는 차가움(coldness)의 요소가 있으며, 이러한 유사한 요소들로부터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소통적 관계를 이룬다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 이상화된 이미지(대자연의 모습)가 초 감각적 감성을 띤다는 점은 마조흐가 의미하는 차가움이 결코 새디즘의 차가움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변태성에서 작동하는 차가움과 냉정함은 서로 질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새디즘에서 냉담성은 이차적 자연의 존재성에 대한 기제로 등장한다. 절대적 악은 감정에 휩싸여서도 안 되며 열정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순수 악의 실현이란 반드시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존재성을 초월해야 하며 이차적 자연으로 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새디스트의 냉담성은 <감정(feeling) 그 자체를 향하고 있다. 모든 감정 심지어는 악을 행하는데서 오는 감정까지도 비난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방탕함을 가져오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방탕함은 에너지의 응축을 막으며, 비 개인적이고 논증적인 관능성(sensuality)의 순수한 요소로 침전해 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 모든 열정은 이차적 자연에 머물며, 우리 내부의 선함에 머물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 51> 새디즘의 본질적 요소로서 기능하는 이상화된 이미지는 개인을 넘어서는 순수한 관능성이다. 이것은 이차적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일차적 자연 그 자체이다. 일차적 자연의 비 개인적인 순수한 관능성은 이차적 자연에 대한 냉담함으로 유지되고 도달된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의 차가움은 이차적 자연의 파토스나 감정 그 자체를 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관능성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능성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52> 그리스적 여인의 관능성(열정-파토스)과 새디스트적 여인의 수동성(천박함-조야함)은 이상화된 여인의 초 감각적 감성과 엄격함에 의해 거부되고 치환되고 있는 것이다: 열정과 관능성에 대해서는 냉정함으로 반응하며, 수동성과 조야함에 대해서는 엄격함과 잔혹함으로 처벌한다. 매저키즘에서 얼어붙은 이미지는 이차적 자연의 관능적 쾌감이 중화된 육체 없는 감성(sentimentality)인 것이다. 여기서 이차적 자연으로서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매저키즘의 이상화 과정이 환타지로 구성되는 이유이다.
(2) 매저키즘이 새디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상화 과정을 현실화한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매저키즘이 새로운 형태의 사랑과 쾌감을 도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디즘의 이상화 과정에서 가장 본질적 요소로 기능하는 것은 비 개인적이고 논증적인 관능성이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 일차적 자연에 도달하기 위해 보다 본질적인 기능을 하는 것은 관능성이 아니라 감성(sentimentality)이다. 반면에 <관능성(sensuality)은 우리로 하여금 특수성 속에 가두고 이차적 자연의 불완전함에 가둔다. 매저키스트적 이상의 기능은 냉정함(coldness)의 힘으로 차갑고 냉정한 감성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이다: 여기서 냉정함은 말하자면 이교도적 관능성을 억압하고 새디스트적 관능성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데 사용된다. 관능성은 거부된다. 52> 이런 식으로 두 극단적인 여인들에서 이차적 자연의 관능성과 파토스가 이상적 여인의 초 감각적이고 초 관능적인 감성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저키즘의 과정에서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이 없음을 의미한다. 새디스트에게 감정은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의 대상이다. 따라서 새디즘에서 감정과 열정은 존재한다. 하지만 매저키스트는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사랑을 거부하기 때문에, 두 극단적인 여인들의 관능적 사랑은 매저키스트의 조회대상에서 배제된다. 따라서 관능적 사랑은 매저키즘에서 이미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조흐는 "성적인 사랑이 결여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공언할 수 있는 것이다. 52>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과 쾌감. 이것이 바로 매저키즘이 새디즘과 다르며 또한 이미 그 자체로 차이화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사랑을 원한다. 그에게 육체는 거부되고 사라져 버리거나 심지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는 부정되지 않으며 거부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매저키즘이 플라톤과 변증법의 메카니즘과 관계하는 이유이다.
매저키즘에서 볼 수 있는 얼어붙은 이미지들은 바로 이 독특한 형태의 사랑을 감싸고 있다. 이차적 자연에 속하는 관능적 이상과 새디즘적 남성지배의 이상에서 새로운 형태의 모계적 이상으로의 전환이 가능한 것은 바로 이 얼음과 같은 냉정함에 기인한다: <이 냉정함 아래에는 초 관능적 감성이 매장되어 있으며, 이것은 모피로 보호되고 있다. 이 감성은 얼음을 통해 빛을 발하며, 새로운 질서의 생성원리로서 기능하며, 특정한 분노이며 특정한 잔혹성이다 … 그것은 초 관능적 감성을 내적 삶으로서 보호하며, 외부적 질서로 표현하며, 분노와 엄격함으로 표현한다. 52> 냉정함 속에는 새로운 잠재성이 응축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변증법의 전화> 지점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하나의 단계로 전이되는 단절의 지점. 매저키즘은 단절의 순간을 쾌감으로 전화한다. 거기에는 숨막히는 서스펜스와 질식의 순간이 내재한다. 따라서 모피는 차갑게 냉각된(될) 그리스 여인의 관능적 미숙함과 남성이 지배하는 기독교적 조야함으로부터 이상적 여인을 보호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기능 53>을 부여받는 것이다. <빙하기의 파국 … 관능성의 억압과 엄격함의 승리 … 얼어붙은 기독교 왕국 … 그리스 세계를 삼키는 빙하기의 파국 … 그리스 여성과 남성의 지배는 약화된다. 53∼54>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하나의 실체로 보이거나 혹은 두 가지 상이한 본능이 하나의 메카니즘 안에 공존하면서 서로 전이되고 변형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새도-매저키즘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가설들이 있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가설을 세가지 범주 속에서 다룬다: 상반성, <경험의 동일성 43>, <변형 44>.
(1) 상반성 - 상반된 본능이나 충동이 동일한 인물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는 가설. 그래서 고통의 유발로 쾌감을 느끼는 개인은 고통의 경험으로도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디스트는 동시에 매저키스트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에는 상반적인 두 영역을 연결해 주는 만족스러운 고리를 제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와 고통을 경험하는 행위의 두 경우로부터 어떻게 유사하고 동일한 쾌감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자연스런 설명이 부족하다.
(2) 경험의 동일성 - 공격과 지배의 새디즘이 매저키즘적 고통을 경험한 후에만 다시 쾌락으로서의 새디즘이 가능하다는 가설. 이것은 프로이트가 새디즘을 두 부분으로 구분한 것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새디즘이며, 다른 하나는 순수하게 쾌락지향적인 새디즘이다. 그러나 새디즘의 이 두 영역은 서로 단절되어 있는 독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투사와 퇴행(projection and regression) 44>이라는 기제들을 통해 서로 연속성을 띠고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 연속성이 매저키즘이라는 상반된 경험으로써 유지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새디스트가 고통을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그가 체험한 고통과 그에 따른 쾌감간의 관계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43> 다시 말해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고통과 쾌감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나 연결고리 혹은 상관성을 경험해 보아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느낀다는 것, 바로 매저키즘적 경험인 셈이다. 새디스트는 매저키즘을 본질적이든 혹은 부수적이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매저키즘적 경험은 새디즘이 단순한 폭력에서 고차원적 쾌감을 도출하는 단계로 승화하고 지양되기 위한 상관적 매개인 셈이다. 매저키즘은 여기서 새디즘의 전개과정에서 하나의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새디즘이 첫 번째 새디즘에서 두 번째 새디즘으로 변이된다고 보았다. 단순히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새디즘(첫 번째 새디즘)에서 쾌락을 추구하고 망상하는 새디즘(두 번째 새디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받음으로써 쾌감을 느낀다는 매저키즘적 경험이 매개된다. 이런 식으로 프로이트의 논의에는 다음과 같은 연속성이 유지된다: <단순한 공격적 새디즘 43> ⇒ <자신에게로 역전된 새디즘 44> 즉 고통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경험 ⇒ <매저키즘적 경험 44> 즉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경험 ⇒ <투사와 퇴행에 의한 쾌락지향적 새디즘 44> 즉 고통에서 쾌감을 경험하는 매저키즘을 새디즘의 피해자에게 제공하고 투사하면서 다시 새디즘으로 되돌아가는 퇴행적 연결고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메카니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투사와 퇴행이다. 이 기제들은 새디즘이 변이되는 전 과정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고통을 가하는 새디스트는 자신에게 고통을 투사하고 매저키즘을 경험하면서 다시 이 경험을 피해자에게 투사하고 자신은 새디즘으로 퇴행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의 연쇄과정 속에서 결국 새디즘의 피해자는 매저키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 과정을 운영하고 구현하는 새디스트로부터 피해자는 당연히 고통 속의 쾌락을 경험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새디스트는 <자신이 영향을 받았던 똑같은 방식으로 쾌락의 대상을 감동시키고 있다고 상상 44>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새디스트의 피해자는 매저키스트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앞서 논의했듯이 타당성이 없었다.
(3) 변형 - <목적과 대상에 따라 성 본능들이 서로 합치거나 변형된다는 가설 44>. 본능들의 기제로서 변형에 관한 프로이트의 논의는 혼동스럽다. 그가 본능들을 커다란 두 집단(Eros/Thanatos)으로 분류했을 때, 이 두 본능 군(群)의 요소들은 직접적으로 변형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소들의 직접적인 변형의 결과로서 서로 다른 본능의 구분이 완전히 모호해 지기 때문이다. 변형이란 직접적이고 유효적인 방식으로 발생하는 경우와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둘로 구분된다. 간접적 변형은 이분법적 체계 내에서 상반성이나 부정적인 매개를 통해서 발생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형태의 변형이란 언제나 매개적 기능을 갖는 이분법의 다른 항을 요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실질적 변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외양적이고 형식적인 양적 변형만을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능들의 변형가능성이 직접적인 것으로 발생한다면, 프로이트의 구분은 모호한 것이 된다. 목적과 대상에 따라 반대성향의 본능으로 역전하거나 혹은 원래 자신의 본능으로 회귀하면서 성 본능들이 서로 합치되고 변형된다는 논의는 프로이트 자신이 구분한 본능들의 제한적 변형가능성에 모순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프로이트 자신의 전체적인 체계와는 모순되거나 불일치되는 논의이며, 스스로 자신의 일관성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본능들의 변형가능성을 이분법적 체계로 제한하고 있으며(에로스/타나토스), 이러한 제한적 변형가능성은 결국 직접적인 변형가능성이나 변형의 다양성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랑과 미움이라는 본능의 요소들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본능들(에로스/타나토스)에 속한다는 사실을 통해 서로 직접적인 변형이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완전히 부인한다. 44> 프로이트가 방어기제들을 설명하면서 아이러니나 역설 등과 같이 반대적이고 상반적인 요소의 항을 요구하는 언어 체계들을 주로 이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투사, 반동형성 등. 따라서 그에게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차이는 외형적이고 양적인 차이이지 실질적인 유효적 차이가 될 수 없다. 직접적 변형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본질과 실체로부터 외형적이고 부정적인 매개를 통한 양적 변형만이 가능하다. 또한 이것은 변태성을 <고착과 퇴행 44>의 기제로 이해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일치된다. <고착과 퇴행의 핵심적 개념은 조푸르와(Geoffroy)의 기형학(발달의 정지와 퇴보)에서 유래되어 직계를 이룬다. 조푸르와의 관점은 변형에 의한 모든 진화를 배제한다. 44> 따라서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변태는 실질적인 변형으로부터 발생하는 진화론적 전개과정이 아니라, 이미 개인의 발달단계에서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한 지점으로 남아있는 시기인 것이다.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경우에는 고착의 형태로, 다시 이 단계로 되돌아갈 경우에는 퇴행의 형태로. 이런 의미에서 변태성은 생물학적 개인의 발달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변태가 되기(becoming) 보다는 단지 유아기의 변태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44> 그러므로 <단지 가능한 유형이나 형태의 계층들이 있을 뿐이며, 이 계층들 속에서 발달이 다소 초기의 단계에서 멈추어지거나 '퇴행'이 다소 심하게 나타날 뿐 45>이라고 말하는 조프루아의 개념과 <두 가지 유형의 본능들이 서로 복잡하게 결합하여 전체적인 어떤 형태들의 계층을 이루어내며, 개인들은 이 중 어느 한 계층에서 고착되거나 퇴행한다. 45>는 프로이트의 논의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러한 식으로 프로이트는 고착과 퇴행의 단계적 변화와 발달에 따라 개인을 설명하지만, 또한 변태성을 특징 짓는 다른 부분들에서, <진화와 직접적 변형 가능성들을 가진 다형적 체계를 인정하는 듯하다 - 그러나 또한 신경계와 문화적 구성체의 영역에서는 수용되기 힘들다고 간주한다. 45>
본능들의 복합-결합과 같은 새도-매저키즘적 종합의 원리에서는 이미 보았듯이 몇 가지 특징적인 메카니즘이 발견된다: 대립적이고 상반적인 두 요소들의 필연적 관계, 또한 이 두 요소들을 포함하는 보다 상위의 종합적 실체, 그래서 이러한 실체 내의 모든 요소들의 변형가능성의 제한. 이 특징들은 상반성과 종합 그리고 제한적 변형으로 요약된다. 더욱이 전체-종합의 메카니즘에는 동일성의 본질이 내재한다. 상반적이거나 반대적인 두 요소를 제시함으로써 전개되는 논의의 결과는 언제나 맨 처음 정립된 문제로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두 요소들의 기원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 제시된 요소는 언제나 맨 처음 정립된 문제로부터 설정된 하나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는 모순과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드라마가 작동하는데, 모순이든 통일이든 어떤 경우든지 동일성을 그 본질로 갖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상반적이고 반대적인 두 요소를 포함하는 하나의 실체(새도-매저키즘)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고통이나 쾌감이라는 단일한 실체가 요구된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새도-매저키즘적 실체 또는 <고통-쾌감 콤플렉스>로 설명하는 것은 기원의 동일성을 상정하는 것이며, 기원의 동일성을 통해 전혀 다른 두 신경장애의 메카니즘은 공통적인 하나의 물질로부터 파생된 제한적인 변형의 부산물로 환원되는 것이다. <새도-매저키즘, 복합본능 … 등은 성적활동 유형의 특이성을 간과 … 주체의 사용가능한 모든 에너지가 그의 특정한 변태성을 위해 동원된다는 사실을 간과 … 새디스트와 매저키스트는 완전히 자족적이며 개별적인 드라마를 연출 … 내적으로 외적으로 이 양자의 의사소통은 불가능 … 공통적인 리비도 물질이 여기저기 형태를 바꾸어 흘러 다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45> 공통적인 기원을 설정하는 분석은 언제나 개별적 대상들의 특수한 맥락을 놓치기 쉽다. 변형에 관한 논의들이 언제나 이러한 분석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경험은 동일하지 않으며 각자 경험의 주체에 적합한 특수한 개별적 메카니즘을 갖는다. 그러나 새도-매저키즘 논의에서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경험을 서로 동일한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설명함으로써 이 둘의 경험은 동일한 것으로 중화된다. 왜냐하면 가학으로부터 나오는 쾌감과 고통을 통한 쾌감 두 경우 모두 동일한 주체로부터 나오는 동일한 경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주체가 경험하는 서로 다른 쾌감의 질은 단지 하나의 원리로 설명 가능한 상반적인 효과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진화과정과 변형의 메카니즘을 하나의 원리나 술어로 설명 가능한 심층적이고 공통적인 하나의 실체나 물질을 전제하는 것은 추상적인 유추에 불과하다: <새디스트의 매저키즘적 성향이 매저키스트의 그것과 같지 않으며, 매저키스트의 새디즘적 성향이 또한 그렇다. 46>
새디스트나 매저키스트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 둘의 개별적 경험의 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새도-매저키즘적 진단은 두 개별적 경험을 하나의 명칭으로 양화(量化)시키는 경우이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두 신경장애를 하나의 술어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하나의 물질이나 실체가 요구되는 것이며, 연속적인 진화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상이한 요소들은 하나의 메카니즘과 원리 속으로 제한된다. 여기서 개별적 존재들의 질적 차이가 헐렁한 옷에 의해 덮혀지거나 강제적으로 재단된다. <두개의 다른 기관들이 서로 유사해도 반드시 그 사이에 진화론적 연관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로 상이한 요소들로 구성된 단일한 일련의 연속적 결과들을 연결시키면서 '진화론'에 빠져서는 안된다. …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같은 기원을 가지며 동시에 병존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유추에 근거할 뿐이다. 46>
차이와 차이학은 언제나 기원의 다양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하나의 존재에서조차도 그렇다. 이런 이유로 차이와 차이학을 위해서는 부지런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마조흐의 문학과 사드의 문학의 경우 많은 부분에서 서로 유사한 특징과 본질들을 공유한다. 이들 모두에게 문학은 <뒤틀린 거울로 자연과 세계를 반사하는 37∼38> 기능을 하며, 역사적 현실 속에서 구성된 모든 전통과 제도는 이들에게 부정과 파괴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역사적 시간은 언제나 혁명적 사태들에 와서야 끝이 난다 - 사드의 경우 1789년 프랑스 혁명, 마조흐의 경우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혁명. 또한 이들에게 문학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잠재된 폭력과 극단적 위반의 양태들을 발견하거나 되 비추는 장치이다. 아울러 이 두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쾌감을 도출하는 두 가지 방식에는 상반적이고 대칭적인 유사함을 볼 수 있다. 폭력과 악행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쾌감과 그것들을 감내 해가며 얻어지는 쾌감간의 미묘한 관계는 경험적 사실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도출할 수 있는 도식이다. 이 두 변태성은 서로 만나기도 하며, 혹은 서로 보완적 관계를 갖는다고. 실제로 마조흐와 사드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도식을 입증해 줄만한 풍부한 예들이 나온다. 사드의 주인공들의 난폭한 행위들은 결국 매저키즘적인 방향전환을 하기도 하며, 마조흐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새디즘적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38∼39참조).
이 두 변태성은 서로 만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의 개념은 작가들뿐 아니라 정신분석 의사들에게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새도-매저키즘적 실체를 프로이드가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크레프트 에빙(Crafft-Ebing)이나 엘리스(Havelock Ellis) 그리고 페게(Fere')의 글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38> 그러나 이러한 공분모를 통해 이 두 작가를 연결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들이 연결되어 상반성이나 동일성으로 묶이기 위해서는 특별히 요구되는 관점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저항문학의 역사에서 드러난 두 작가의 삶의 형태 등과 같은 특정한 관점에 의해서만 잠시 연결될 뿐이다. 두 실체간의 보다 본질적인 파악을 위해서는 각각의 실체가 안고 있는 그들만의 기원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으며, 이들의 상반적 연결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요구된다. 두 변태성과 두 작가들은 차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이라는 실체를 통해 두 변태성을 정의할 경우, 불가피하게 이 둘을 연결 지을 고리를 필요로 한다. 사실 프로이드나 여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의된 새도-매저키즘은 변태성의 과정을 속죄나 양심 혹은 죄의식이라는 윤리적 관점에서 마련된 틀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쾌락과 죄의식의 상호 메카니즘을 통해 변태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쾌락에 대한 처벌의 과정을 통해 이 죄의식을 드러낸다. 새디즘의 악행은 곧바로 죄의식을 통해 매저키즘으로 변형되고, 매저키즘의 죄의식의 해소는 또다시 새디즘의 악행으로 변형된다는 생각이 새도-매저키즘적 실체에서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서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 연결되거나 동일한 하나의 실체에서 드러나는 상이한 측면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한 인물로부터 두 가지 변태성이 모두 존재하거나, 서로 다른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상호 보완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 이러한 추측은 죄의식과 처벌이라는 관념의 틀 안에서만 가능해 지는 생각이며, 따라서 이것은 두 독립된 실체를 하나의 관념적 틀 속으로 환원한 경우이다. 사실 이 두 변태성은 절대로 죄의식과 처벌이라는 동기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들의 도착은, 삶이 그렇듯이, 그렇게 고상한 유희가 아니다. 두 변태성은 오히려 악행과 쾌락을 통해 구성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둘은 서로 목적과 방식, 심지어는 악행의 동기조차도 다르며, 이 둘은 독립적인 기원을 각각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매저키즘의 마지막에서 볼 수 있는 새디즘의 경향은, 처벌의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수행된 죄의식의 해소가 새디스틱한 악행을 허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서 금지된 악행의 쾌감을 인가받기 위해 매저키스트는 처벌의 고통을 예비적으로 스스로 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쾌감을 위해 (예비적으로)처벌을 원하는 것이지, 쾌락에 대한 죄의식을 속죄하기 위해 처벌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처벌과 고통이 수행되고 나면, 처벌과 고통들이 금지했던 악의 실행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39> 또한 새디즘의 종국에서 나타나는 매저키즘 역시 죄의식과 속죄라는 메카니즘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새디스트는 자신의 악행에 대한 죄의식과 속죄로서 마지막에 매저키즘적 고통을 감내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악행을 스스로 맛봄으로써 자신의 악이 얼마나 완벽하고 성공적이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디스틱한 행위의 절정이며, 자신의 영광스러운 불명예를 인가해 주는 대관식이다. 새디스트는 자신이 행했던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받는 고통은 궁극적인 쾌락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죄의식이나 속죄의 필요성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양도 불가능한 힘을 확인 시켜주거나 절대적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39> 새디스트는 악행을 되돌려 받으면서 오히려 고통과 모욕과 치욕을 즐기고 있다. 따라서 매저키즘에서 나타나는 새디즘과 새디즘에서 나타나는 매저키즘은 죄의식과 속죄를 통과하면서 발생하는 상반적인 변태성으로의 변형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의 변태성을 극대화하는 쾌락의 절정인 것이다.
매저키즘은 새디즘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쾌락을, 새디즘은 매저키즘이 아니라 새디즘적 쾌락을 통해 자신의 변태성을 구성한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계열을 보다 공고하게 한다. 따라서 새디즘을 매저키즘으로, 매저키즘을 새디즘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각각의 경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역설적 산물들로서, 매저키즘의 유머러스한 결과로 나타난 새디즘이며, 새디즘의 아이러니적 결과로 나타난 일종의 매저키즘인 것이다. 39∼40>(주1) 매저키스트는 속죄(보상)로써 새디스트로 변하며, 새디스트는 속죄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매저키즘으로 변한다. 그러나 매저키즘의 경우 속죄의 기능은 악행의 쾌감을 부정하기 보다는 쾌감으로 도달키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셈이다. 따라서 두 변태성의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속죄와 처벌의 매카니즘을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매저키스트가 보여주는 새디즘은 새디스트의 새디즘과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새디스트가 보여주는 매저키즘은 매저키스트의 매저키즘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매저키스트와 새디스트는 또한 서로 상보적일 수 없다. 사실 고통을 주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점은 이들이 상호보완적이라는 주장에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이들은 서로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저키스트가 새디스트에게 때려 달라고 요구한다면, 새디스트는 거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새디스트는 고통을 쾌락으로 즐기는 피해자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고통을 즐긴다면, 새디스트의 입장이 난처해짐과 동시에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통해 쾌감을 도출하는 새디스트로서는 자신의 목적과는 다른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지는 매저키스트의 경우에서도 같다. 매저키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교육과 설득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새디스트를 교육하고 설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교육과 설득을 통해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목적에 맞는 하나의 매저키즘적 본성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매저키즘에서 가학을 하는 여성의 역할은 새디즘적 자아의 발현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자아의 한 요소로 남아있는 일이다. <물론 여성 고문자에게서 새디스트적 성향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그 성향들의 역할은 결코 직접적이거나 진정한 의미로서가 아니라, 다만 그 이전의 (매저키즘적)상황들과 연관되는 한에서만 중요해 진다. 41>
가학하는 여성의 새디스틱한 면은 결코 본질적인 요소로 기능하지 않고 부수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따라서 마조흐가 새디즘의 성향을 가진 여성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새디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매저키스트를 가학하는 여성이 매저키스트라는 것은 더욱 아니다. <매저키즘에서 가학하는 여성은 결코 새디스트가 될 수 없다. 그 여성은 매저키즘적 상황의 요소로 기능하며, 그 일부로서 매저키스트의 환상이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그녀가 매저키즘적 상황에 속하는 이유는 그 여성이 보여주는 '새디즘'이 진짜 새디스트에게서 발견되는 새디즘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녀는 매저키즘의 반영 내지는 분신이다. 41> 이것은 새디즘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새디즘에서 고문을 당하는 여성은 매저키스트가 아니라 새디즘적 상황의 한 요소인 것이다. 두 변태성에는 쾌감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상반적인 모습을 띠는 어떠한 요소를 필요로 한다. 매저키즘에서는 새디즘이 아니라 새디즘적 가학을, 그리고 새디즘에서는 매저키즘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고통을.
존재들의 상호보완적 관계나 새도-매저키즘과 같은 동일한 실체의 두 양면적 결합은 존재들을 결코 차이화하지 못한다. 존재들이 진정으로 결합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존재들은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고문이나 학대가 피해자로 하여금 고통을 제공할 수 없거나, 고통을 통해 쾌감을 제공해 줄 고문자가 고통받는 주체의 목적과 상이한 가학을 행할 때, 이 둘은 서로 만날 수 없으며 양립될 수 없는 관계에 돌입한다. 이들은 모순적이지도 않으며, 갈등하지도 않으며, 목적이 다르며, 심지어 만날 수도 없는 것이다. 존재론적 차이의 이종구조(heterogeniety)내에서는 어떠한 기획도 - 매저키스트의 기획 혹은 새디스트의 기획 - 순조롭지 않다. 만일 새디스트와 피해자 여성이 새디즘적 상황을 연출하거나, 매저키스트와 가해자 여성이 매저키즘적 상황을 재연한다면, 이 여성들은 결코 새디스트나 매저키스트에 대해 존재론적 차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새디즘이나 매저키즘 내에 용해된 것이다. 결합과 종합과 통합의 원리는 존재들을 환원하고 용해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새도-매저키즘의 메카니즘은 새디즘 혹은 매저키즘을 하나의 실체로 환원하거나 녹여버린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매저키즘은 언제나 새디즘의 부수적인 하나의 결과나 효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그 고유한 세계에서 분리하여 추상적인 실체로만 다루게 된다면 혼동이 발생 … 일단 그들을 둘러싼 고유의 환경에서 분리하여 살과 뼈를 제거하고 나면 서로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42> 베르그송의 어조로 말하자면, 새도-매저키즘의 개념은 매저키즘과 새디즘에게 너무도 헐렁한 옷인 셈이다. 따라서 서로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두 변태성은 새도-매저키즘이라는 헐렁한 옷을 입혀놓으면 하나도 다르지 않은 실체들이 된다.
변태성의 과정에서 변태성의 주체와 요소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언급한 두 변태성 내에서 하나의 요소로 기능하는 박해자 여성과 피해자 여성의 본질은 각각의 변태성 과정에서 주체로 기능하지 못한다. 매저키즘과 새디즘에서 주체는 매저키스트이며 새디스트이다. 따라서 이 주체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상반된 다른 변태성의 주체가 아니다. 하나의 상황에 둘 이상의 주체가 양립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매저키즘이나 새디즘과 같은 변태성의 상황 내에서 모순적 갈등은 벌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저키즘의 주체는 매저키스트이며, 박해자 여성은 매저키즘적 행위가 요구하는 특정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새디스트의 피해자가 새디스트이며, 매저키즘의 박해자 여성이 진정으로 새디스트이거나 새디스트를 가장하고 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42>
정확히 말해, 매저키즘에서 가학하는 여성이 보여주는 새디스틱한 면은 매저키즘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녀는 매저키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저키스트가 원하는 능동적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냉혹하게 함으로써 매저키즘적 상황을 벗어나려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완다가 보여주는 모습들 속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녀는 매저키스트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새디스틱한 면을 보여주지만, 이는 매저키즘적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하나의 아이러니이지 결코 새디스틱한 성향을 통해 쾌감을 즐기는 행위가 아니다. <변태성의 각 주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상반되는 변태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같은 변태성을 가진 사람의 어떤 특정한 '요소'인 것이다. … 매저키즘적 상황의 박해자 여성은 진짜 새디스트도 가짜 새디스트도 아닌 다른 어떤 경우 … 근본적으로 그녀는 매저키즘에 속하지만, 주체가 아니며, 매저키즘의 상황하에서만 '고통을 부과하는' 요소를 구현 … 마조흐와 그 주인공은 계속해서 특이하고 희소성을 가진 여성적 '본성'을 찾아 헤맨다. 42∼43>(주2)
(주1) 매저키즘과 새디즘이 각각 유머와 아이러니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은 뒤에서 계속 다룰 것이다. 또한 이 두 사유방식은 초자아와 제도에 대한 저항의 특수한 방식들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특수한 방식의 운용을 통해 매저키즘과 새디즘은 겉보기에 상반적인 변태성으로 변형되는 효과를 보이는 것이다.
(주2) 매저키즘적 주체가 현실적 상황이나 이차적 자연을 거부하고 부인함으로써 물신 혹은 부분적 대상과 이차적 자연을 선택하고 타당성을 따지는 사법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은 지적한 바 있다. 매저키스트는 박해자 여성에게 매저키즘적 상황이 요구하는 하나의 역할과 요소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본질을 찾아 요소들을 횡단한다.
사드가 의도하는 제도화의 망상은 관점에 따라서는 저항의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외부대상에게 행하는 저항이든 혹은 자기자신에게 되돌리는 저항이든, 새디즘적 자아에게 순수한 죽음본능의 제도화는 이차적 자연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만이며 저항인 것이다. 그리고 사드의 언어에서 우리는 부정의 논증이라는 방식을 보았으며, 그 과정속에서 폭력의 가속화와 응축의 냉담성이라는 기제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제들 속에서 묘사의 반복과 단조로움이라는 미적 효과들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저키스트도 이러한 방식을 고수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과 반대적인 어떤 메커니즘을 상반된 짝으로서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매저키즘에서 볼 수 있었던 변증법과 설득 그리고 신비적 상상들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저항의 메커니즘을 볼 수는 없을까? 사드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방어기제를 도출해 낼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물신숭배(fetishism)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저키즘적 자아는 새디즘의 부정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서, '거부' 혹은 '부인'이라는 매개로 저항한다. 이것은 부정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저항의 방식을 보여준다. <거부는 아마도 부정으로도 심지어는 파괴로도 구성되지 않는 새로운 운용의 출발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그것은 오히려 존재나 현존하는 것의 유효성 혹은 적합성(validity)을 급진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신념을 지연시키고 주어진 것 즉 즉자를 중화한다. 즉자적인 것을 넘고 자리 바꿈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지평을 연다. 31>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부정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컬한 면모를 띤다. 그것은 존재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며, 살아 남는 한에서만 가능한 파괴로 운용된다. 따라서 새디스틱한 자아가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상황에는 상당한 아이러니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는 거부나 부인의 메커니즘에서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거부와 부인에서는 존재의 유무 자체가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디스트는 근원적 질문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새디즘의 존재론적 파괴에는 이미 존재의 필연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존재(혹은 파괴대상)는 필연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존재란 무엇인가?)은 존재로 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반해 매저키스트의 질문 방식은 새디스트의 근원성과는 다르다. 그에게 존재는 필연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존재의 필연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존재가 왜 필연적인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런 의미에서 매저키즘에서는 존재의 유효성과 적합성이 급진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부의 메커니즘에 대한 예를 프로이트가 제시한 물신숭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신(대상물 fetish)은 여성남근의 이미지 혹은 대체물로서, 그를 통해 우리는 여성이 페니스가 없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 있다. 물신숭배자가 하나의 물신(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페니스가 없다는 (현실적)사실을 알기 전, 어렸을 때 보았던 마지막 대상물에 의해 결정된다(예로, 발에서부터 위로 점점 바라볼 때 마지막 보았던 신발). 이 대상물, 즉 이 출발지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 가는 것은, 그로 하여금 아직 의심 속에 던져진(논쟁 중에 있는, 즉 있는가 없는가가 미심쩍은) 기관의 존재를 유효하게(확인) 만든다. 따라서 물신은 하나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얼어붙은, 체포된, 이차원적 이미지이며 한 장의 사진이다. 여기로 그는 반복적으로 되돌아가서 움직임의 위험한 결과(즉 현실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결과들)들을 제거하고, 탐구로부터 도출되는 해로운 발견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되돌아 간다. 물신은 여전히 신념이 가능했던 마지막 지점이다. 31>
물신 숭배자가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이차적 자연의 대상을 보게 되면, 이를 폭력의 강화 혹은 응축의 냉담성으로써 파괴하고 부정하는 메카니즘으로 일차적 자연에 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관념 안에 상정된 물신 - 물론 이 물신은 유일한 어떤 것이 아니라, 대상에 각각 조응하는 이미지이며 이차원적 사진이다 - 으로 되돌아 간다. 물신은 이미 관념 안에 포착된 이미지로서, 물신 숭배자는 현실적 대상들 속에서 물신의 이미지를 유추하거나 조합한다. 따라서 현실적 대상으로부터 물신의 이미지를 획득하지 못할 때는 곧바로 이 이미지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차적 자연의 현실적 대상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거부되는 것이다. 부정의 경우처럼 순수망상의 이데아를 이차적 자연에 제도화하려는 의도는 여기서 발생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이차적 자연은 이데아에 조응하면서 끊임없이 그 적합성과 유효성이 조회되고 점검된다. 그것이 적합한지 혹은 유효 한지를 말이다. 따라서 부인과 거부의 메커니즘은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이나 기관을 선택하는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물신주의자에게 물신은 여전히 남아 있는 가능성으로서 마지막 지점일 수 있는 것이다. 물신은 실재하는 세계와 관념세계 사이에 위치한 일종의 매개인 셈이다. 물신주의자는 이 중간지점을 계기로 관념세계로 올라간다.
물신주의는 다음의 세가지 기제로 나타난다. (1) 거부 (2) 방어적 중화 (3) 보호와 이상화의 중화. 물신주의자는 평면적이고 이차원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물신으로 반복적으로 되돌아 감으로써, 역으로, 현실적 원리들 즉 고정적이지 않은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문제들에 대해 우선 부인하고 신념을 지연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물신주의자가 되돌아가는 평면적 신념은 긴장으로만 남아있는 이미지이지만, 이를 통해 현실적 즉자들은 효력 정지되며, 그 의미가 지연되는 효과를 드러낸다. 이것은 곧 현실의 거부이며 부인이다: <아니. 여성은 페니스를 결여하고 있지 않아! 31∼32> 부정과 부인의 차이는 현실상황을 수용하는 방식과 태도에 있다. 부정은 그 주어진 현실을 파괴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나타나지만, 심층(적 의도)은 언제나 대상(현실)을 존속시키는 한에서 유지된다. 그러나 부인의 과정에서 주어진 대상은 존속되는 형태로 나타나기 보다는, 효력이 정지되고 지연되며 미 결정된 상태로 중화된다. 중화는 물신주의자로 하여금 반복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미적 전개과정이다. 다시말해 물신주의자는 이차적 자연을 중화시키면서 물신으로 되돌아 가며, 물신의 확인으로부터 다시 이차적 자연을 조회하고 검토하도록 하는 왕복운동을 낳는다. 이로써 주어진 대상은 물신과의 조응과 불일치로 인해 끊임없이 그 구성에 있어서 재 배열되는 것이다. 물신주의자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대상은 왕복운동 과정에서 차이화된 것으로 지각된다. 현실적인 대상에 대한 지식에서 오는 고통의 의미를, 이상화된 물신의 이미지를 통해 교환하고 대체하면서, 주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재조직하거나 효력을 정지시켜 버린다. 이상화된 세계로의 도약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부인은 새디스트의 부정처럼 현실의 변형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새디스트가 현실적 대상과 맺는 관계는 아이러니적이지만 - 부정은 대상의 존속을 전제하며, 따라서 새디스트는 이차적 자연과의 필연적 연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 물신주의자가 주어진 대상과 맺는 관계는 선택적이다. 그는 거부와 부인을 통해 대상을 선택하고 골라낸다. 새디스트의 저항이 모순과 투쟁이라는 특징을 띠는 반면, 물신주의자는 움추리기와 지연 혹은 중화의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그에게 현실과 대면하는 모든 순간들 속에서 긴장감이 멈추지 않는다. 이 긴장감은 이상적인 것 속에서 감돈다.
물론 새디즘과 물신주의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물신과 맺는 폭력의 과정에서 매저키즘과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폭력의 두 가지 다른 유형이 있으며, 물신 자체에 대한 잠재적 폭력이 있으며, 물신의 선택과 구성과 연결 되면서만 발생하는 폭력이 있다. 32> 새디즘에서 물신은 그 자체로 부정되며, 새디스트가 이차적 자연이나 현실상황과 직접 대면하는 순간 물신은 오히려 멀리 달아나 버린다. 새디즘에서 일차적 자연은 이차적 자연의 극복이며, 그로부터 얻어지는 논증적 이성의 열매이다. 따라서 새디스트는 물신 자체 보다는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이차적 자연을 주로 다룬다.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물러서거나, 그것을 거부하거나, 자신의 이상 속에 숨어있으면서 긴장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새디스트에게서 물신의 의미가 이차적이며 왜곡된 방식의 의미이다: <물신주의가 새디즘에서는 이차적이고 왜곡된 의미에서만 발생한다. 그것은 거부와 지연과의 필연적 관계를 상실하며, 부정성과 부정의 완전히 다른 문맥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거기서 물신은 응축이라는 새디스트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매개가 된다. 32> 그러나 물신주의가 보여주는 거부와 지연 그리고 중화의 과정은 매저키즘과 일치한다. 매저키즘에서 이차적 자연은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 아니다. 그는 꿈 속으로 도약할 뿐이다. 물신은 이차적 도약의 매개이기 보다는 우연히 주어지는 부가물에 불과하다. 매저키즘에서 이데아는 <환타지> - 물신주의에서 선택된 물신 - 속에서 긴장된 채로 남아있다. 따라서 그는 굴욕에서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이차적인 이익을 도출할 수 있다. 마조흐의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서스펜스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완벽한 세계라는 이상화의 목적은 그 자체로 현실세계와의 관계를 상정한다. 그러나 매저키즘에서 이상화된 세계는 완벽하든 그렇지 않든 현실세계와는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매저키스트는 현실세계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는 새디스트처럼 <완벽한 세계>를 제도화하기 위해 부정하고 파괴하며 이상화하는 것을 회의한다. 그에게 완벽한 세계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가 오로지 집중하는 것은 <날개를 달고 꿈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이상(물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이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현실세계를 효력정지 시키고 지연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 자체로 환타지 속에서 지연되고 있는 하나의 이상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의 순수한 이상적 실재를 창조하기 위해 그가 질문하는 것은 현존하는 실재의 타당성, 적합성, 유효성이다. 매저키즘이 사법적 정신과 완벽하게 맞물리는 점이 바로 이점이다. 33>
따라서 현존하는 실재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폭력과 도착이 있다. (1) 증명하고 예증하고 논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부정. 그러나 또한 이러한 부정은 주어진 대상에 의존하거나 대상을 전제하면서 진행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2) 환타지 속에서 긴장된 채로 남아있는 이상을 상상하면서, 그에 조응하는 대상을 선택하거나 거부하고 부인하는 과정. 또한 이 과정에서 대상의 적합성과 유효성이 급진적으로 검토된다.
물신주의와 매저키즘에서 보여지는 유사한 운용법칙은 실재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다는 특징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실재를 미결정된 상태로 지연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유보와 지연의 특징은 마조흐의 예술로 하여금 긴장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산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긴장의 효과로부터 그의 예술은 신비적 관조 속에서 오히려 더욱 격렬한 외설적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마조흐 예술의 긴장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역설이다. 그의 예술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면서 보다 극도로 과장하고 있는 셈이다: <마조흐의 삶과 작품에서 중요한 물신은 모피, 신발, 채찍 … 이상한 모자들 … 다양한 위장이다.『이혼한 여자』에서 … 여러 장면은 물신주의에서 발생하는 분열을 설명해 주며 그에 상응하는 이중적 '긴장'을 설명해 준다. 한편으로 주체는 실재를 알고 있지만 이 앎을 지연한다. 다른 한쪽에서 주체는 자신의 이상에 얽매여 있다. 거기에는 과학적 관찰에 대한 욕망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신비적 관조의 상태가 존재한다. 33>
긴장의 상태를 지연시키는 과정에서 매저키스트는 새로운 이상화의 단계 속으로 진입한다. 그는 이차적이고 경험적인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이상화된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망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이차적 자연 속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들은 <가능한 오래 연기되며 따라서 거부되고 부인된다.> 이것이 바로 외설적 자극을 경험하거나 관능적 상태를 경험하기 직전에 오히려 매저키스트가 종교적 환영에 휩싸이는 이유이다. 그는 <성없는(sexless) 새로운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 현실적 실재적 기쁨을 경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쾌감을 경험한다는 매저키즘의 역설은 설명할 길 없는 성도착의 궤변이 아니다. 도착의 의미를 신비적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것을 일종의 궤변적 일탈로 이해 해서도 안된다. 매저키스트가 쾌감을 지속적으로 지연하고,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관념에서 이데아를 가능케 하거나(물신), 이상적인 것(성없는 새로운 인간)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되돌아갈 유보조항을 상상하고 있다. 그에게 현실은 반드시 필연적일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실패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다. 새디스트가 분노와 절망으로 현실을 부정한다면(제도화의 과정), 매저키스트는 이상적 망상으로 현실을 거부한다(이상화의 과정).
두 도착에서 우리는 반복의 두 양태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강화와 응축이라는 메카니즘의 확대된 반복으로 나타나며, 다른 하나는 긴장과 관련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마조흐의 소설에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화면은 정지되며, 모든 움직임들은 갑자기 <얼어붙은> 이미지로 긴장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목을 매거나, 십자가에 박히거나 교수형 당한다. 또한 고문자인 여자가 자신을 하나의 상태, 그림 혹은 사진과 동일시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얼어붙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율과 서스펜스라는 미적 효과들은 반복의 두 양태들과 관련해서 가장 격렬한 효과를 얻는다. 조심스럽게 절제되면서 점점 확대되는 폭력의 강화된 힘은 전율의 효과를 극대화하며, 움직이던 형상들과 속도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취하게 되는 얼어붙음과 정지는 숨막힐 듯한 서스펜스의 심미적 효과를 최대로 감싸 안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극단적 형태의 미적 감흥은 반복이라는 메카니즘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서스펜스의 미적 쾌감은 사실 마조흐의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효과들 중 하나이다. 그의 소설들 속에서 외설적 묘사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등한 효과들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서스펜스에는 상당한 역설이 숨어있다. 우선 묘사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효과를 낸다는 것뿐만 아니라, 긴장에는 매우 요란한 소음들이 편재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숨막히는 긴장 속에 가장 격렬한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창백한 정지화면 속에서 보다 많은 활동들이 밑바닥으로 스며들거나 비 가시적으로 꿈틀거린다. 사실 우리가 저항방식을 설명하면서 보았듯이, 물신주의나 매저키즘은 환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따라서 물신과 이상화된 인간 혹은 다른 어떤 부분대상들이 치환되고 자리 바꿈 되면서 이들의 도착이 형성된다. 이런 이유로 어떠한 대상에 대한 묘사가 정지된 후 나오게 될 연속적 화면들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급진적인 단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들은 독자들에게도 일어난다. 우리는 서스펜스의 심미성을 환유와 단절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긴장의 순간은 다른 장면으로의 치환과 급진적인 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얼어붙은 화면을 보면서 독자들은 곧바로 물신주의자 혹은 매저키스트로 변화되는 것이다. 긴장 속에는 매우 요란한 소음들이 편재한다. 따라서 마조흐가 외설적 묘사들을 중화하고 정지시키는 가운데서도 가장 커다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점잖음에 대해 이렇게 거의 공격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또 다른 예술의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분위기 소설의 대가이며 암시의 예술가이다. 34>
<죽음의 본능(the Death Instinct)>을 이해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 - 이미 언급했듯이 죽음의 본능은 절대로 현실세계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은 술어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드는 논증과 부정의 메카니즘을 통해 망상을 제도화하며, 이 과정 속에서 폭력의 강화와 응축이라는 구체적 기제들이 기능한다. 따라서 심미적 효과들은 외설적 묘사들을 통해 실현된다. (2) 마조흐는 변증법과 신비적 상상을 통해 이데아를 이해하고 망상하며, 현실세계와 이차적 자연은 그에 의해 거부되거나 부인된다. 현실세계는 따라서 중화되고 지연되며 얼어붙은 이미지로 정지된다. 여기서 긴장(서스펜스)의 심미적 효과들은 암시적 묘사들이 지배하면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가장 기본적인 구별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드에게서는 부정적인 것과 부정의 과정, 마조흐에게서는 거부나 부인 그리고 서스펜스의 과정. … 사드에게서는 관조적이며 분석적 방식으로 죽음의 본능을 이해하며, 마조흐는 똑같은 대상을 추구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 즉 상상 속에서 신비적으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35>
논증과 변증법이라는 언어의 두 메카니즘은 자연스럽게 두 작가의 묘사의 차이를 도출한다. 두 경우 모두 순수 이데아의 상태를 목적으로 하지만, 사드의 경우 외설적 묘사가 반복되는 반면에 마조흐의 경우에는 외설적 묘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미 언급했듯이 매저키스트는 고통과 굴욕 자체에서 오는 쾌감을 경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굴욕적인 상황으로부터 "이차적인 이익"을 이끌어 내고 있으며, 이는 바로 매저키즘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27> 매저키스트의 목적은 고통이나 굴욕에 있지 않으며,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는 셈이다. 흔히 고통을 넘어서는 쾌감이나 굴욕을 견뎌냄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자유로움이나 해방 감이 매저키스트의 쾌락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그는 굴욕에 처했을 때 그것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방식으로 쾌감을 경험한다. 쾌감은 플라톤적 상상력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외설적 묘사의 반복이나 노골적인 묘사의 자극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피함으로써 초월적 묘사가 암시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적인 표현이나 외설적 묘사보다는 우회적인 다른 방식의 묘사가 오히려 더욱 큰 효과를 보여준다.
사드는 부정의 메카니즘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망상인 순수 이데아를 실현한다. 물론 부정은 개인적 요소와 비 개인적 요소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부정의 두 수준을 목격할 수 있다. 하나는 부분적인 과정으로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총체적인 이데아로서. 부정의 이러한 두 수준은 사드의 세계에 나타난 두 자연의 개념과 일치한다: 이차적 자연과 일차적 자연. 이차적 자연은 경험세계의 영역으로서, 인과관계와 필연의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프로이트가 구분한 본능의 두 차원 - 에로스/타나토스 - 에서 에로스의 영역과 일치하는 이차적 자연은 따라서 쾌락원칙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여기서도 법칙의 부정과 자연으로부터의 위반이 가능하지만, 언제나 그 위반은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죽음의 본능(Death Instinct or Thanatos)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여기서의 부정과 파괴와 죽음은 쾌락원칙의 지배 안에서만 가능한 제한적 파괴인 것이다. <파괴는 단지 창조와 변화의 역일 뿐이며 무질서는 또 다른 형태의 질서이고 죽음에 의한 해체는 생명의 구성과 동일시된다. 모든 곳에 부정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죽음과 파괴는 단지 부분적인 과정일 뿐이다. 27> 이러한 자연 안에서 새디스트는 자신의 망상을 실현할 수 없다. 언제나 이 자연 안에서는 경제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생명의 보존과 유지를 필연적 조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여기서 절대적 악의 실현과 제도화라는 사드의 망상은 언제나 실패하게 되어 있다. 새디스트는 <완전범죄의 불가능성>을 경험한다. 이차적 자연 안에서 순수한 이데아의 실현이 불가능함을 목격한 새디스트는 실망한다. 심지어는 타인에게 부과한 고통으로부터 이끌어지는 자신의 쾌감마저도 이차적임을 알게 된다. 이차적 자연에서는 철저히 개인화된 요소들 속에 갖혀 버림에 따라 그가 실행하는 악의 차원은 절대적 순수 이데아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주1). <이러한 자연에 직면할 때 새디스트는 실망 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느 것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 자아-만족 메커니즘에서 부정적인 것은 긍정의 역에 의해서만 가능해 진다는 점이다. 27> 쾌락원리는 부분적 과정으로서의 부정에 의존하는 원리이다. 부정 혹은 부정적인 것은 언제나 살아남는 한에서만 요구되는 자극인 셈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층위가 있다. 경험적 사실 속에서는 주어지지 않는 자연으로서, 이것은 관념의 수준에서만 영위가능한 <원초적 망상>이다. 일차적 자연에서는 경제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지배권이라는 최종적 진리를 초월한다. <일차적 자연은 … 모든 통치권과 모든 법을 초월하는 순수부정의 자연이며, 창조와 개인화 혹은 보존의 필요로부터도 자유롭다. 순수부정은 기반이 불필요하며, 모든 기반을 초월한다.… 이차적 자연만이 경험의 세계를 구성한다. 부정은 다만 부정적인 것이라는 부분적 과정으로만 주어진다. 따라서 근원적 자연은 필연적으로 순수 이데아의 대상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순수부정은 망상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 이성 자체의 망상이기도 하다. … 그것은 오히려 그가 망상의 관념을 전개하고, 이성의 특권인 과대망상을 전개 시키는데서 오는 내적 필연성이다. 27> 우리는 이와 같은 자연을 파괴적 자연 혹은 타나토스라고 말한다. 이것은 에로스와도 구분되며 쾌락원칙 내에서의 파괴본능과도 구분되는 근본적 부정이다. 여기서 죽음본능은 대문자로 표기된다: the Death Instinct. 일차적 자연에서의 부정은 부분적 과정으로서 제한적일 수 없으며, 근원적 토대의 부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창조와 긍정의 역으로서도 아니며, 경제적 체계 내의 전략으로서 부정도 아니다. 이것은 무(nothing) 그 자체이며 경제를 초월한다. 따라서 이것은 <침묵 30>으로 유지된다. 여기에는 투쟁의 원리로서 지배권을 상정하지도 않으며, 합리주의가 들어설 자리도 없다. 여기서 개인화되는 요소들은 아무 것도 없다.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할 어떠한 개인이나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고통은 절대적 극한 속으로 스며들면서 고통과 쾌락의 경계가 불분명해 진다. 그러나 일차적 자연이 침묵으로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모든 사물을 결정하는 기원적 토대가 된다. <모든 것이 이 침묵에 의존한다. … 우리는 이에 대해 논증과 신화의 술어들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30> 이것이 새디스트가 악의 실행들 - 사드의 경우 논증 - 속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절대적 악의 제도화인 것이다.
새디스트의 망상을 통해 구성되는 일차적 자연은 그로 하여금 이차적 자연의 부정을 반복하게 해주는 근원적 동기가 된다. 왜냐하면 폭력의 대상으로서 피해자나 폭력 그 자체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아직 이러한 자연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실망은 언제나 새로운 폭력과 가학의 메커니즘을 반복하게 해주며 강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하는 것이다. 절대적 악을 구체화하고 육화하기 위해서는 이차적 자연과 심지어는 자기자신까지도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새디스트는 이차적 자연 뿐 아니라, 그것에 갇혀있는 자아 까지도 부정하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이것이 사드의 언어에서 보여주는 부정의 두 층위이다. 그러나 파괴적 본능이 대상에 집중하면서 부정을 강화하고 반복하는 과정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순수 이데아의 부정이란 그 토대까지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상에 집중하는 자아가 여전히 이차적 자연의 제한적 존재라면 대상의 부정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디스트는 순수 이데아를 실현하고 육화하기 위해 자기자신까지도 파괴하는 완전부정을 실현하고자 한다. 보존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되돌아올 이익이란 어디에도 없는 부정, 이것이 새디스트의 근원적 망상 속에서 드러나는 논증의 제도이다. 사드에게 있어서 제도화는 과장의 아이러니를 요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일차적 자연의 부정, 즉 총체적인 부정의 가능성은 경험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순수 이데아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어떤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지도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으며, 완전히 폐기되거나 부정되는 <부재하는 대상 즉 악의 개념> 그 자체, 이것은 경험세계에서는 주어지지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논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 새디스트는 논증을 필요로 한다 - 반면에 매저키스트는 이데아를 논증하지 않으며 상상한다. 외설적 묘사가 새디스트에게는 강화되는 반면, 매저키스트에게는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새디스트에게 이러한 논증은 한 번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어떤 경우든 이차적 자연의 존재임을 확인할 뿐이다. 개념적 논증의 완벽함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면서만 가능한 이러한 부정의 진리는 매번 그로 하여금 <악의 허위>를 보여주며, 따라서 그는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그가 꿈꾸고 있는 것은 범 우주적인 것이며, 비 개인적 범죄이며 … 영속적인 유효성(perpetual effective)이다. … 새디스트의 임무는 두 요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즉 실질적인 것, 경험적인 것과,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가능한 것, 비 실재하는 것 간의 다리. 이것은 파생적인 것과 근원적인 것 간의 다리이며, 개인적인 것과 비 개인적인 것 간의 다리이다. 28> 이런 식으로 그는 <이성의 순수망상의 이데아>를 완벽하게 전개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성은 경험세계와 이차적 자연 속에 나타나면서 현실화(자신의 범죄가 영속적 효과를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주2). 새디즘적 자아는 논증이라는 형식을 통해 바로 완전부정 혹은 죽음본능(the Death Instinct)의 실현과 제도화라는 임무를 부여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이러한 도약이 가능해 지는가? <이차적 자연에서 생산된 구체적이고 특정한 고통이 어떤 조건에서 일차적 자연 속에서 스스로 반향되고 재생산되는가? … 이 질문에 대한 해결이 바로, 사드의 글쓰기에서 반복과 단조로움이 의미하는 핵심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28∼29>
새디스트가 자신의 영향력을 일차적 자연에까지 도달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부수적이며 구체적인 이차적 자연과 연관된 실행을 통과 하면서만 가능하다. 다시말해 그는 일차적 자연을 논증을 통해서 전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논증의 과정에서 그는 이차적 자연 속에서 <부분적 귀납과정> 외에는 자신의 총체적 논증을 설명할 수 없다. 부분적 귀납과정은 이차적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분적인 폭력의 몸짓을 강화하거나 응축할 뿐이다. 29> 강화와 응축의 형식이 새디스트의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두 개의 커다란 극점이다. 폭력의 강화 속에서 (피해자들의)고통의 강도는 더욱 격렬해 질 것이며, 폭력의 응축은 새디스트의 <냉정함>속에서 재현된다. 가해자의 냉담성과 자기통제는 열정과는 대조적인 것이며, 새디스트는 열정을 경멸한다. 따라서 그에게 악은 기쁨이나 즐거움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다만 냉담함으로 묘사된다. <폭력은 영감이나 충동에 따라 낭비되어서는 안되며, 폭력이 주는 쾌감에 부속되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쾌감은 난봉꾼을 여전히 이차적인 자연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력은 냉정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응축은 바로 이 냉정함, 즉 논증적 이성의 냉정함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 진다. … 물론 이러한 냉담성은 강렬한 쾌감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아가 이차적인 자연에 참여하여 얻게 되는 쾌감이 아니라 반대로 자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자연을 부정하는 쾌감이며, 나아가 자아 자체마저 부정하는 쾌감이다. 즉 논증적 이성의 쾌감인 것이다. 29> 새디스트의 쾌감의 지연과 완성된 쾌감으로 가기 위한 경로는 이와같이 부정이라는 개념과 연관되면서 이루어진다. 다시말해 논증적 이성이 사용하는 기제는 부정의 거리 두기와 소외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드에게서 보여지는 묘사의 기능은 반복과 부정의 틀 속에서 그 효과를 발휘한다. 반복에서 묘사들은 강화되며 또한 응축된다. 묘사들이 강화됨으로써 <피해자수와 고통이 증가>할 것이며 따라서 외설적 묘사와 난삽한 표현들이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새디스트의 제도화가 실현된 것이 아니다. 망상은 충족되지 않으며, 따라서 또다른 몸짓이 요구된다. 이 묘사들은 절제되어야 한다. 일차적 자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이차적으로 주어진 자연들을 강화하고 증가시키는 극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반면, 이러한 열정으로 이차적 자연상태에 집착하는 것은 동시에 여전히 이차적 자연에 머무른 존재성을 확인시켜 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차적 자연에서 고통의 강화를 보여주는 외설적 묘사들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는 열정과 자제의 이중회기를 경험하며, 이러한 과정의 반복과 묘사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반복은 폭력의 강화와 응축으로 점철되고 있다. 이차적 자연과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외설적 묘사들의 이러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사드의 글이 지니는 단조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논증적 기능이 묘사적 기능을 복종시키고 절제된 방식으로 묘사적 기능을 확대 응축시킨다. … 묘사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세밀해야 하며, 또한 잔인한 행위와 역겨운 행위라는 두 영역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 역겨움과 비 순수함, 혹은 잔인성으로부터 쾌감을 갖는다는 것. … 두 경우 모두에서 논증적인 기능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반복이 가지는 강화와 응축의 효과와 묘사의 매개가 완전하게 이루어 질 때이다. 29∼30>
(주1) 이차적 자연과 일차적 자연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술어들과 같은 맥락에서 풀이해 볼 수 있다: 제한경제/일반경제, 제한적 사유/초과적 사유, 지배권/지상권, 경제/비경제,….
(주2) 매저키스트는 그러나 비 개인적 요소를 이차적 자연으로 구체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차적 자연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는 상상 속에서 이데아를 그리면서 상승한다. 새디스트가 자신의 순수관념을 논증을 통해 구체화하면서 끌어 내리려 하는 반면에(스피노자적), 매저키스트는 이차적 자연을 거부하면서 순수관념으로 상승한다(변증법적, 플라톤적). 새디스트는 망상을 현실화하고 실재적인 것으로 육화 하고자 하는 반면에, 매저키스트는 실재적인 것 이차적인 자연을 회의하며 부인하고 감각적인 것을 단계로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상향하는 메커니즘을 띤다.
언어와 묘사의 기능은 동작이나 신체적 운동을 통해 확인된다. 다시말해 그 기능의 효과는 동작의 반복을 불러일으키면서 증폭된다. 사드와 마조흐의 언어는 물론 이러한 기능들의 효과들을 가지고 있으며 신체의 자극을 도모한다. 구체적인 동작 표정 혹은 행위들을 요구하거나 지시하는 요소,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 행동과 동작에 대한 묘사들이 나오는 요소가 포르노 그라피의 전형적 틀이다. 만일 이와 같이 <명령과 외설적 묘사>가 포르노 그라피의 특징적 요소들이라면, 분명 사드와 마조흐의 언어는 포르노 그라피의 틀 안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사드의 작품들 속에서 중간중간에 보여지는 논증이나, 마조흐에게서 볼 수 있는 계약과 제휴들(예를 들어, 편지, 광고, 계약서들)은 포르노 그라피의 이러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요소들이다. 논증이나 계약등은 피해자나 박해자로 하여금 구체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흥분과 자극의 발생은 곧바로 기쁨과 쾌락의 결정적 요인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언어와 묘사는 구체적인 실행과 연결되면서, 동작을 강요하며 반복을 가능케 하며 소통되기 위한 기능의 효과를 최대한 발휘한다.
그러나 묘사의 기능이나 외설성의 본질은 이 두 작가들에게 엄연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드에게 명령은 논증의 형태를 띠며, 공유와 소통을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에게 논증은 설득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폭력임을 보여주려 한다. 반면에 마조흐의 경우에는 계약과 협약을 통해 박해자(여성)로 하여금 동작의 반복과 활동을 요구한다. 이것은 사드의 경우와는 다르게 소통을 전제로 한 계약으로 이루어 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조흐에게는 지시의 기능이 설득적인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묘사의 기능에서도 이 두 작가는 서로 다르다. 사드에게 묘사는 외설적인 형태를 드러내지만, 마조흐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차이들을 본다면, 이 둘을 포르노 그라피의 기능으로서 명령과 묘사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포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드는 언어를 논증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그에게 논증은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폭력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확실히 논증은 확신시키고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드의 논증과 증명에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 그에게 논증은 허울에 불과하다. 새디스트에게 설득이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드에게서 논증과 폭력의 연결고리는 그가 이성의 논증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스스로 폭군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는 폭력적 이성의 논증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논증이나 이성 자체가 하나의 폭력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그는 논증을 이용한다. 그에게 쾌감이나 논증의 결과들은 공유될 필요도 없다. 논증 자체가 폭력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폭력에 집중한다.(주2) 그러므로 새디스트적 박해자의 논증은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새디스트에게 논증은 피해자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폭력이 피해자와 공유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종류의 무관함이다. 피해자는 논증의 증인으로서 혹은 청중으로서, 새디스트 자신의 고독이나 독특함을 확인하는 부수적 역할만을 갖는다. 새디스트의 논증은 설득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행위들은 논증이 증명하거나 조회하는 폭력의 고차원적 형식의 반영일 뿐이다. 이성적이고 논증적인 박해자는 자신의 고독과 독특함이라는 해석학적 순환에 빠져있다. 이점이 매저키스트적 '교육'과 다르다. 19>
새디스트의 논증적 폭력과 매저키스트의 계약적 설득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 변태성이 구성하는 언어의 이중적 요소를 구별해야 한다: 개인적 요소/비 개인적 요소. 전자는 명령과 묘사들 속에서 박해자의 개인적 취향이나 폭력을 드러낸다. 그러나 후자는 개인적 폭력이나 특수한 묘사들 속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고차원적인 비 개인적 요소를 재현한다. <이것은 순수이성의 이데아로서 비 개인적 폭력과 동일시된다. 20> 따라서 사드의 경우 논증은 비 개인적 요소를 실현하거나 재현하는 폭력의 기제로 짜여진다. 이론적 논증이 완결된 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을 통해 새디스트는 자신의 이데아를 피해자의 몸짓들 속에서 구현하려 한다: <"이론적으로 보여줬으니까 … 이제 그것을 실행해 보자구." 19> 그러나 또한 사드에게 논증의 비 개인적 요소는 명령이나 묘사등과 같은 개인적 요소들을 반복하게 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사드는 논증과 묘사들을 통해 순수이성의 이데아를 구체적 실행들 속에서 재현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며, 순수하게 비 개인적인 요소들은 특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논증들로부터는 외부의 힘을 경험하지 못한다. 새디스트의 힘은 언제나 순수 이성적 논증에서 오는 힘이며, 그러나 또한 이것은 특정한 개인이나 신체들과의 관계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재현된다. 이러한 아이러니 - 경험적인 것을 통해 실현되는 이상적인 것 - 가 새디스트로 하여금 반복적인 논증들의 순환을 가능케 한다: <사드에게서 스피노자와의 놀라운 친화성을 보게 된다 … 수학적 영혼으로 고취된 자연과학적, 기계주의적 접근의 시도 … 따라서 이는 끝없는 반복과 반복되는 설명들의 복수적인 양적 팽창과정과 피해자를 증가시키고, 계속해서 수많은 환원불가능한 고독한 논증들의 순환을 되풀이한다. … 순수하게 비 개인적인 요소가 그의 도착에서 보여진다. 그러나 반면에 이러한 유형의 대부분의 개인들은 힘의 감정을 특정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다. 사드는 지리적 수학적 패턴을 띤다. 20>
마조흐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사드의 명령과 묘사가 논증적이며 제도적이며 소통을 부정하는 방식이라면, 마조흐의 그것은 설득과 교육의 형태를 띤다. 사드는 피해자의 동의나 설득을 통해 쾌감을 느끼지 않으며, 반대로 동의하지 않거나 설득당하지 않음으로부터 쾌감을 느끼지만, 마조흐의 경우는 동의와 제휴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마조흐에게서 광고의 언어가 중요한 까닭이다. … 매저키스트는 계약을 선호하며, 새디스트는 이것을 혐오하고 파기한다. 새디스트는 제도가 필요하며, 매저키스트는 계약적 관계가 필요하다. 20> 소유와 제휴는 소통과 연결의 두 방식이다. 전자는 증명이나 논증의 활동을 요구하며, 후자는 설득과 타협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자는 과학(특히 자연과학)과 법의 형태로, 후자는 철학과 정치의 형태로 구성된다. 마조흐의 언어가 변증법적이며 플라톤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디스트는 제도화된 소유를 통해 사고 하며, 매저키스트는 계약적 제휴나 동맹을 통해 사고 한다. … 소유는 새디스트 특유의 광기이며, 계약은 매저키스트의 광기이다. 그는 여성의 사인이 필요하다. 매저키스트는 교육자이며, 교육적 책무에 내재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21>
매저키즘적 인물들의 모든 고통은 이상(the Ideal)으로 가기 위한 단계들이다. 매저키스트는 이러한 단계들을 (통과의례로서) 순서대로 밟으면서 자신의 이상주의적 쾌락에 대해 <역사적 문화적 비준을 얻으려 한다. 21> 따라서 그는 육체적 육감적 지각과 체험을 하기 전에 종교적 감정이나, 이상적 경험에 휩싸이는 것이 보통이다. 즉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이차적 자연의 경험 이전에 이미 그는 비 개인적 요소들 - 평면적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물신들 - 로 되돌아 간다. 이것이 물신숭배(fetishism)의 두 가지 기본적 단계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 대해 정신적인 것을 통해 정당화하거나 비준을 얻으려는 목적이다. <인간의 신체에서 예술작품으로의 상향, 예술작품에서 이데아로의 상향은 채찍의 그늘 아래에서 일어난다. 마조흐는 변증법적 정신으로 활동한다. 22> 매저키스트는 현실적 고통에 직면할 때 이데아로 되돌아 가는 방식으로 고통을 쾌감으로 경험한다. 즉 그는 이데아로 되돌아 감으로써 느끼는 쾌감을 현실적 고통의 거부로부터 끌어들인다. 그래서 그는 이데아로 가기 위해 고통을 원한다. 매저키스트에게 고통은 쾌감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또한 매저키스트는 폭력의 피해자 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입을 빌어서 말한다. 그는 가해자(여성)를 교육시켜야 하며, 계약서의 이행을 위해 그녀를 설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매저키스트가 탁월한 변증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요소이다. 마조흐의 작품들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역할들의 <변증법적 반전>과 <이중반복>의 테크닉들은, 이러한 변증법적 상향과 역할전이들을 강화시키는 기제들이다. <매저키즘의 주인공은 권위적인 여성에 의해 교육받고 변형되는 듯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그이다. 그녀에게 옷을 입히고 거친말을 하게 하며, 그를 가학하도록 하는 것은 그이다. 이것은 자신도 포함해서 가해자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피해자이다. 변증법은 단순히 담론의 자유로운 교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같이 입장의 전이나 치환을 의미한다. 이것은 역할과 언술의 할당에 있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차원에서의 반전과 이중반복에 의해 이루어지는 장면으로 구체화된다. 22>
우리는 마조흐와 사드의 언어를 구별하기 위해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말했다. 어느 경우든 개인적인 요소와 비 개인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으며, 이들이 이행하는 방향과 단계들의 차이에 따라 마조흐와 사드의 언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드는 비 개인적인 순수이성의 이데아를 이차적이며 경험적인 자연과 신체에 구현하고자 하며, 마조흐는 이차적 경험적 자연을 통과하거나 고통을 거부(부인) 함으로써 이상화된 이데아로 상승하려 한다.(주2) 하향과 상향의 두 이미지가 이 둘의 언어를 구별하는 요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이미지가 개인적 요소와 비 개인적 요소의 역할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 두 변태성에는 초월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명령과 묘사의 기능은 분명 자신을 초월하여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개인적 요소는 자아 반영을 통해 비 개인적 요소로 방향 전환해야 한다. 23> 다시말해 자신의 언어가 한계에 부딪칠 때, 이들의 언어는 스스로 분열하면서 이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이런 식으로 이들의 명령과 묘사는 개인적 요소에서 비 개인적 요소로의 초월적 전환을 추구한다. 다만 사드에게 초월적 전환은 순수이성의 이데아라는 비 개인적 요소를 경험적 자연이라는 개인적 요소 위에 육화하고 재현하려는 망상으로 드러나며, 마조흐에게는 개인적 요소들을 부인하는 과정을 통해 비 개인적 이데아에 도달하려는 환영으로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사드의 경우 언어의 명령적 묘사적 기능은 스스로를 초월하여 순수한 논증적 제도적 기능을 지향하며, 마조흐의 경우 변증법적 신비적 설득적 기능을 지향한다. 23>
어떤 형태로든 개인적인 요소에서 비 개인적인 요소로의 초월적인 기능들이 두 작가의 언어(명령과 묘사)에서 나타난다. 언어의 초월적 기능은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1. 논증적, 분석적: 순수이성의 비 개인적 이데아의 제도화. 2. 설득적, 변증법적: 변증법적 정신의 비 개인적 이데아로의 승화.
(주1) 따라서 여기에는 상당한 아이러니가 있다. 뒤에서 계속 논의하겠지만 사드의 언어가 가지는 역설적 면모는 이 폭력과 관련해서 나오게 된다. 사드에게 폭력에 대한 대상집중은 이중적 효과를 띤다. 폭력이 그에게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사드의 언어가 지니는 아이러니적 측면이다. 사드는 아이러니로 말함으로써 아이러닉한 효과들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폭군으로서 자연과 신에 대한 증오와 흉내의 아이러니에 관련한 내용은 Georges Bataille, Literature and Evil. Trans by Alastair Hamilton. London: Marion Boyars. 1997. p. 110 참조.
(주2) 앞으로 계속 논의되겠지만, 여기서 '거부'의 의미는 부정과 억압의 의미와는 다르다. 매저키스트가 고통을 거부하는 문제와 고통을 원하는 문제(즉 고통을 끌어들이는 문제)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매저키스트의 목적은 고통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매저키스트에게 고통은 쾌감으로 가기 위한 단계인 셈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는 앞으로 두 변태성의 쾌락의 도출방식 혹은 저항의 방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변태성을 흔히 일탈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정상적인 성 행태로부터 벗어나서 비 정상적인 성행위를 자행하거나 강요하는 행위. 이와 같은 정의를 수반하기 위해서는 선행과제가 있다. 정상적인 것과 비 정상적인 것의 구분의 확실성.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예술에서 다루는 문제는 아니다. 예술은 정의이기 보다는 발견이라 해야 할 것이다. 발견과 표현이 예술 속에서 드러나는 운동이다. 그러나 예술이 정의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곧 정의와 분리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발견과 표현은 정의를 토대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정의를 낳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매저키즘을 예술 속에서 다루는 목적은 변태성 자체를 변호하기 위함도 아니며, 변태성에 대한 정의를 위함도 아니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변태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차이화 함으로써, 존재의 보다 미세한 차이들을 발견하고 표현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로써 들뢰즈가 매저키즘과 새디즘을 다루는 방식을 차이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차이학이란 통계적으로 그룹화된 하나의 현상 - 이것을 흔히 실체로 말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그렇게 인식하기도 한다 - 을 근본적 실재로 혹은 환원불가능한 존재의 연쇄고리들로 계열화하는 과정을 말하며, 이것은 차이가 나오는 선을 따라 분류하고 경계선을 가르는 작업이다. 이 책은 정신분석에서 종합과 상반성의 원리로 전체화되어 이해되고 있는 새도-매저키즘에 대한 개념을 차이화 과정 혹은 환원불가능한 존재들의 연결고리들의 단절을 분류하는 과정을 통해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고유한 질적 차이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차이학은 존재들의 힘을 긍정하는 것이다. 종합이나 상반성의 원리에 의한 전체화는 존재들의 힘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정을 통해 존재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증상들은 전이(轉移) 되어야만 하며, 마조흐와 반대되는 본능은 사드일 것이라는 상반성과 종합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보편화 …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종합이라는 주제와 새도-매저키즘적 실체의 개념은 마조흐에게 커다란 불이익으로 작용 … 그의 작품이 잊혀지는 것으로 뿐 아니라, 보완성과 변증법적 종합으로 사드와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불공정한 가정들 때문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13>
우리는 이 책에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가 증명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테크닉이 다르며, 문제의식, 관심사, 경향들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새도-매저키즘이라는 종합적 원리의 실체는 이 둘에게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새도-매저키즘으로 알려진 실체의 개념 13> 자체에 문제 제기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증후군(syndromes) 14>과 <징후(symptoms) 14>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의학에서는 이들을 구별하고 있는데, 후자를 가시화되는 존재들의 양상으로, 전자를 이 존재들의 기원들이 서로 모여 군집을 이루는 현상들의 장소로 분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징후는 어떤 질병의 존재를 보여주는 특수한 기호 혹은 신호이며, 증후군은 서로 다른 기원들로부터 제기되어 명시화되며, 다양한 문맥들 속에서 발생되는 징조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는 장소이다. 14> 서로 다른 기원들을 가진 존재들이 이질적 총계를 이루고 있는, 증후군 자체의 개념으로는 존재들의 질적 차이를 분간하기 어렵다. 추상적 개념의 오해와 오류는 이로부터 생겨난다. 심지어 오해와 오류는 마조흐와 사드의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게도 가해질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의 관점에서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부정의 존재론을 통해 이 둘을 결정하는 메카니즘임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차이학이 필요하다. 실재하는 것들은 차이화 되어야 한다: <새도-매저키즘은 일종의 증후군으로서, 환원불가능한 인과적 연쇄들로 쪼개져야 한다. 14>
이 둘을 차이화의 과정으로 접근해 가는 방식은 <문학적 접근방식 14>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새디즘과 매저키즘이라는 용어가 문학에서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술은 질적인 본성들의 미묘한 차이들과 부분적 대상들의 환원불가능한 즉자적 존재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주1). 따라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차이학은 마조흐와 사드의 문학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 작품들 속에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징후들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또한 어떤 계열들을 통해 서로 차이화되고 있는지 분명해 질 것이다. 차이학은 두 영역을 비판한다. 하나는 정신분석이며, 다른 하나는 부정과 상반성이라는 추상적 개념화이다. 물론 전자는 후자의 방식으로 매저키즘과 새디즘을 전체화하여 하나의 실체(새도-매저키즘)로 종합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우리는 전체화의 메카니즘이 차이학으로 치환되는 과정들을 보게 될 것이다. 각 장들 여기저기서 혹은 각 문단들 여기저기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은 서로 소통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기원들을 가진 독립적 존재로서 분리되고 있음을 다양한 관점들 속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비평적(문학적 의미에서)관점과 임상의학적 관점은 상호 배우는 관계로 진입해야 한다. 증후학(symptomatology)은 언제나 예술의 문제이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의학적 특수성들은 사드와 마조흐의 특별한 문학적 가치들과 뗄 수 없다. 14>
차이학과 증후학은 서로 보완적 관계에 있다. 하나는 특이성들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하나는 이 특이성들의 재 집단화를 도모한다는 측면에서이다. 그래서 차이학의 진보는 곧 보다 세련된 증후학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일 예술을 다양한 질적 차이들의 육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작품 속에서 특이성들이 어떤 모양새들로 위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문제인 것이다. 특이성은 환원불가능한 질적차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단수이며 결코 복수화된 전체로 불리지 않는다. 예술에서 복수성이란 단수들의 복수이지 복수들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에서 반복이 결코 반복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위험, 오히려 동일한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보다도 더 치명적인 위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동일화의 또 다른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함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면서 우리의 게으름을 합법적으로 인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서로 동일하지 않음을 발견하거나 주장함을 통해 서로 동일한 것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플라톤의 아이러니가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사드와 마조흐의 상호보완적 관계(새도-매저키즘)라는 상반성과 종합의 원리는, 이 두 병리학적 증상들을 동일한 하나의 실체가 갈라진 두 측면으로 간주하려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나치즘과 사드의 관계에 관한 이론에서, 바타유는 사드의 언어가 역설적으로 피해자의 언어라고 말한다. 피해자만이 고통을 묘사할 수 있으며; 박해자는 제도화된 질서와 힘이라는 위선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 "박해자는 권위의 언어를 사용, 침묵하며, 속임수를 묵과하며 … 그러나 사드는 박해자와는 반대적인 태도… 속임수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태도를 실제 삶에서는 침묵만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돌렸으며, 그들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모순적인 언급을 하도록 했다." 그러면 피해자는 박해자의 언어로 말한다는 이유로 마조흐의 언어도 역설적인가?17>
상반성의 종합원리는 단 한 번의 분석으로 충족된다. 그래서 사드의 언어를 정립하고 나면 그와 상반되는 마조흐의 언어가 이미 정립된 셈이다. 고통에 대한 묘사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된다는 역설이 마조흐의 언어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면 - 사드의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의 언어로 그리고 마조흐의 경우 피해자는 가해자의 언어로 - 서로 상반된 차이로 연결된 사드와 마조흐는 양적관계로 축소된다. 다시말해 이 둘은 양화된 차이를 띠면서 표정만 다른 동일한 얼굴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증상의 분석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이러한 식으로 두 변태성을 정의하고 명명하게 된다면, 두 변태성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치료는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특정한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질병의 증상들은 역사적 사회적 원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증상들의 분류방식과 그것들을 차이화하는 관점들에서도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역병과 나병이 과거에 보다 보편적이었던 것은 … 지금은 따로따로 분류된 질병의 다양한 유형들을 집단화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6>
따라서 차이학과 증후학은 차이를 양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단절의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실질적 차이들을 발견하고 종합하는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예술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사드와 마조흐 혹은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정신분석적 구조의 문제이기 보다는 예술의 문제이다. 이 두 증상들과 징후들은 작품들 속에서 판별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상반성의 종합을 통한 양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질적차이들의 긍정의 문제가 제대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분석과 통찰은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사드와 마조흐를 말하기 위해서는, 사드를 통해 마조흐를 말하거나 혹은 그 반대를 말함으로써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이 둘 모두를 말해야 한다. 시기적으로도 스타일에서도 전혀 다른 이 두 작가와 이들의 변태성에 대해 막연한 종합의 원리로 연결 지으려는 시도는 언제나 배후에 또 다른 정치가 장악하고 있다. 마조흐가 사드에 비해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은, 이 둘의 관계를 하나의 실체 속에 가두어 두거나 혹은 다른 하나를 통해 나머지를 판단하는 종합과 대칭의 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 두 변태성과 두 작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의 기원을 모두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학은 비교 가능성을 곧바로 종합과 대칭의 원리 속으로 용해하지 않는다.
(주1) 환원불가능한 즉자적 존재성은 존재들의 질적 차이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질적 차이로부터 즉자적 존재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며, 즉자적 존재성이 또한 질적 차이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간단히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부정(negation)의 결정에 의한 차이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의 차이이다. 부정의 차이는 존재성이 외부 즉 타자로부터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소쉬르의 기호학에서는 음소들의 결정이 각 음소 자체에서 구성되지 않고 다른 음소와의 차이(부정)에 의해 결정된다. 즉 존재성은 타자와의 차이에 의해 획득된다. 그러나 긍정의 차이는 이와 다르다. 그것은 외부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결정되지 않는, 존재 그 자체 내에서 스스로 자신을 감싸고 펼지는 발생적 차이 즉 표현(expression)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존재는 스스로 분리되고 타자가 된다. 이것은 존재의 복수성을 의미하며 이 복수성으로부터 존재성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차이의 문제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의 틀을 통해 정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좀더 심오한 분석과 설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논의할 것이다. 들뢰즈는 예술기호들을 통해 존재들의 질적 차이들을 감싸고 펼치는 차이학의 메카니즘을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 여기저기에서 동성애와 자웅동체의 존재들은 서로가 발산하는 기호들을 통해 소통한다. 그러나 이들의 소통은 전체화되고 통계화된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이 개인들이 내뿜는 기호들의 부분적 대상들 속으로 향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은 예술에서 가능하다. 예술에서 스타일이 중요해 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타일은 질적차이를 복수적으로 육화하는 일종의 통로인 셈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 역, 민음사, 1997. 을 참고. 특히 이 책 pp. 69∼85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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