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두 가지 동인을 생각해보자. 1) 실재하는 것의 완전한 소유를 위해 글이 짜여진다. 재현과 모사의 행위는 내가 손을 뻗쳐 닿을 수 있도록 대상을 실제로 여기에 다시 위치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쁨의 대상이므로 반복하고 재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파시즘의 전(前) 단계를 취한다. 이때에 소유의 과정으로서 글쓰기는 동일한 구절들과 표현들로 반복되고 과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강박 신경증에 사로잡힌 나는 표현의 수사적인 면모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수사 자체를 혐오한다. 문학적 사실주의는 사유의 유물론적 확장의 결과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실재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때에 사랑 받는 연인은 하나의 조형적 형상을 띠며 정지해 있다. 베르테르의 문형에 의해 재현된 로테는 일종의 조형미를 갖춘 조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느가 재현한 잠비넬라(Zambinella)의 조각처럼, 로테는 베르테르의 반복적 문형 속에서 핏기 없는 조각이 되어 버린다(문형의 첫 번째 아이러니). 2) 문형의 첫 번째 아이러니의 결과로서, 이제는 소유의 좌절과 그 보상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글이 짜인다. 글쓰기는 이제 더 이상 소유의 망상으로 추동된 우상숭배가 아니라 기억의 판타지로 채색된 물신주의의 성향을 띤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관능적 욕망에 제동을 걸고, 신체적 절제를 통해 심미적 취향에 빠져 버린다. 나는 이때에 모든 대상을 살아있는 것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특수한 이미지를 찾아내서 거기에 색을 입히기 시작한다. 조각난 것들이 유기적 전체로 보이기 위해서는, 마치 부패된 시신에 대한 혐오감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화장처럼, 과도한 허구의 질서로 공백들을 채우는 것이다(문형의 두 번째 아이러니). 베르테르가 그랬듯이, 손수건에 관한 수많은 요설(饒舌)들을 보면, 손수건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고려해봐야 할 판이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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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곧 삶이었죠. 지금의 개인적 가치가 고무된 시대에 와서 그것이 단지 어떤 일상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이해되어지게도 되었지만, 인간이 시간의 변화성을 극복하고 자기의 생각을 불변의 것으로 나타내어야 했던 것은 인간의 의미가 단순히 생물학적인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도 했었을 것 같더군요. 2006/03/15 15:43
제 생각엔, 文이란 "시간의 변화를 극복하고 자신의 생각을 불변으로 하는"식의 부정적 개념, 즉 시간을 마치 변질이라든가, 부패라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서, 다소곳이 앉아있는 나를 타락시키고, 노쇠하게 하고, 괴롭히는 존재로 생각하는..부정적이고도 초월적인 시간개념을 벗어나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文을 시간과의 투쟁 과정으로 보는 방식도 마찬가지구요. 제가 의미하는 文은 문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형(文形)이라고 한 것도 그런 차원이었구요..어쨌든 제 생각엔 文은 시간과의 투쟁이기 보다는 시간에의 참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삶을 창조하는 과정 자체가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글을 쓰는 행위가 바로 그런 과정 아니겠습니까? 2006/03/15 2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