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09/08 질투와 횡단 (8)
  2. 2008/02/09 마른 겨울
  3. 2007/01/22 소유
  4. 2006/07/14 사랑의 윤리학 (4)
  5. 2006/07/14 문형(文形, Figure)에 관하여 (18)

질투의 경우 보다 실질적인 횡단(transgression)이 일어난다. 질투란 연인으로부터 발견한 많은 영혼과 풍경에서 나의 부재를 각성하거나 망상하면서 생기는 감정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애인에 의해 발산된 징후에 의해 펼쳐지는 세계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어떤 실재임에 대한 통찰이다. 내 눈에 보이는 애인의 모든 말과 몸짓은 매순간이 배신이며 거짓이며 이별의 선언이다. 그러나 나를 배신하는 그 풍경들로 인해 나는 더욱 더 애인에 대한 열망과 사랑에 이끌린다. 질투에 빠진 나는 애인이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보고 경험하는 모든 있을 법한 행위와 상황들을 밝히기 위해 고통스런 해석을 쉼 없이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언제나 좌절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해석 행위가 깊어질수록 나는 애인의 세계로부터 배제되고,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존재가 될 뿐이다. 질투하는 여성이나 남성은 연인의 조각난 영혼들과 부스러기의 세계 속으로 끊임없이 파고들어야 할 운명에 처한다. 그 세계는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며, 거짓말과 배신으로 베일이 가려져 애인의 표정이나 말의 진실을 감추고 있는 암흑의 세계이다. 바로 이 세계와의 대면 속에서 횡단이 일어난다. 애인이 내뱉는 단어 한마디는 그녀의 동성애 상대와의 대화를 암시하기도 하고, 슬쩍 엿본 그녀의 곁눈질 속에는 다른 남성에 대한 타오르는 욕망이 있으며, 내게 보내는 미소와 호의조차도 하나의 거짓된 음모로 꾸며지며, 감추고 있는 표정들 하나하나가 천근만근의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그것은 “연적戀敵을 발견하는 것보다도 더 잔인한 부분 대상들”을 발견하면서 겪어야할 절망적인 전투이다.(Deleuze, Proust and Signs, 139~141)

<들뢰즈의 잠재론: 소멸과 창조의 형이상학>중에서 pp. 372-373에서 발췌

Posted by huun

마른 겨울

monograph_column 2008/02/09 02:39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토마스 하디(Thomas Hardy)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흔히 하디의 문학을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라고 말한다. 특히 시들을 보면 그러한 면이 강하다. 사실 그것은 하디만 그런 것이 아니라, 19세기 후반의 서구 현대인이 지배적으로 취한 정서였다. 산업, 과학, 사회, 계급, 문화. . . 모든 측면에서 현대인들은 점차 자신들을 객관화해서 바라보기 시작했고, 환상과 바램 속에서만 떠올릴 수 있었던 자신의 욕망을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으로 취하고자 했고, 또 그럴 수 있었다. 상상으로만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 보고는 깜짝 놀란 것이다. 어쩔줄 모르던 서구 현대인은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냉소와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커져 사리를 분별할만큼 성장한 아이가 아버지를 죽이고(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고아가 되어 혼자 남아 훌쩍이면서, 느닷없이 쟁취한 무한한 자유와 그 그림자인 불안과 공포를 안고, 과학이나 산업 그리고 도시가 개인에게 가했던 무성의한 푸대접을 감수하며, 모든 것에 회의를 느낀다. 인생은 생각했던 것에 비해 그다지 의미있는 그 무엇도 아니고, 단지 어쩌다 태어나, 어쩌다 마주치게 된 사소한 사건들의 연속일 뿐이다. 그 사소한 사건들을 최종적으로 거두워, 그래도 그것들은 의미가 있었어! 라고 위안을 주며 나를 구원해줄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고 해도 꾸지람이나 처벌만 내리는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존재라고 말이다. 희망이라는 것 또한 그가 부여한 도덕적 책임의 한 형식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이다. 낭만주의자들과 서정시인들이 그토록 부르짖고 찬양해 마지 않던 "사랑"조차도 이들에게는 지독한 기만이고 거짓이고, 그 믿음이 크면 클 수록 되돌아올 비수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더 이상 달콤한 봄이나 요란한 여름이나 우아한 가을날의 화사한 색채가 아니라, 음산하고도 우울한 회색조 마른잎이 나뒹구는 겨울에 불과했다.

    Neutral Tones

    We stood by a pond that winter day,

    And the sun was white, as though chidden of God,

    And a few leaves lay on the starving sod;

    --- They had fallen from an ash, and were gray.


    Your eyes on me were as eyes that rove

    Over tedious riddles of years ago;

    And some words played between us to and fro

      On which lost the more by our love.


    The smile on your mouth was the deadest thing

    Alive enough to have strength to die;

    And a grin of bitterness swept thereby

      Like an ominous bird a-wing . . . .


    Since then, keen lessons that love deceives,

    And wrings with wrong, have shaped to me

    Your face and the God-cursed sun, and a tree,

      And a pond edged with grayish leaves.


    우린 그 겨울 연못가에 서 있었지,

    해는 창백했어, 신의 꾸지람을 받았는지,

    굶주린 잔듸 위에 낙엽들만 있었어;

    --- 물푸레나무에서 떨어져, 잿빛이었어.


    나를 보던 당신의 눈은 배회하는 눈 같았어

    수년전의 따분한 수수께끼들을 배회하던;

    서로 주고 받았던 몇 마디 단어들을 기웃거리던

      우린 사랑으로 잃은게 더 많았지.


    당신 입가의 미소는 맥빠진 것이었지

    죽을 힘이나 겨우 남아있는;

    그러니 쓴 웃음만 스쳐가는

      불길한 새의 날개짓 같았지 . . . .


    그로부터, 사랑은 기만이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고,
    쓰라린 교훈이 내 마음 속에 새기더군
    당신의 얼굴과 신이 저주한 태양, 한 그루의 나무,

      그리고 잿빛 낙엽이 에두른 연못을.


그러나 이 감상적이리만큼 지독한 우울과 비관과 회의의 한편에는, 지금의 우리였다면 팔짱을 끼고 서서 시큰둥했을 생소한 믿음과 희망에 대한 분노,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항변 같은 것이 있다.

Posted by huun

소유

2007/01/22 22:52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횡설수설하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시를 운동경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글의 제목들을 주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단어가 변태적이라고, 혹은 문장들이 미쳤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말들을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말 그 자체일까? 문법일까? 약속? 규칙? 그렇다면 단어들의 호응하는 관계가 일탈적이고 일그러진 모든 말들은 믿겨지기 위해 우리의 경험 내부로, 마무리가 잘 된 연결 관계들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두 가지 기로에서 방황한다. 우리의 삶에서 추방되어야 할 언어가 돌연히 난입하고, 우리 자신이 이미 이 언어에 매우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생각에 다다르면, 우리는 미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여기에 너무나 깊이 빠져있다! 내가 미치기 시작하면 사물들은 이리저리 갈라지고 흩어지고 조각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아포리즘이 써진다.


니체(F. Nietzsche)의 어수선한 아포리즘을 읽다보면, 사물과 현상들이 무수하게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은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는 대상의 갈라지는 선과 에피파니의 빛을 따라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어떠한 흠집도 내지 않기 위해, 그것의 결을 따라 매우 조심스럽게 표면을 벗겨내고 있는 것 같다.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다시 증축하기 위해서인가? 근대 수학은 아무런 흠집을 내지 않고도 존재를 고스란히 가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방법은 너무나도 거칠다. 라이프니츠나 뉴턴보다도 더 섬세한 미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니체가 시도한 작업들은 수학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생소할지도 모른다. 그의 미분은 우선적으로 표면의 결을 발견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신의 표면에 포함하고 있는 시간의 결 혹은 주름들. 그래서 잘려져 나간 것들에 익숙하지 않고,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불완전한 것들에 생경한 우리에게, 사물은 한없이 갈라지고 부서지고 파편들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이 다루는 어떠한 것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쌓아놓은 모래성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모래알을 하나 씩 하나 씩 떼어내듯, 갈라지는 선과 빛을 따라 사물의 표면들을 벗겨낸다.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잘려나간 고대 화석 앞에 선 한 고고학자의 흥분과 섬세함의 십분의 일이라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러면 더 이상 존재는 잘리기 위해 이리저리 놓이고 거칠게 다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움직여야 할 것은 대상이 아니라 바로 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테르가 사랑한 로테는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베르테르이다. 로테는 말해지지 않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리와도 같다.


나는 우선 내 앞에 마주한 대상이 포함하고 있는 무수하고도 무한한 속성들을 발견함으로써 사랑에 빠진다. 존재에의 긍정이란 한마디로 말해 무한한 속성의 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속성의 무한함은 연인에게 속한 무수한 속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우선 나의 속성을 촉발케 하는 연인의 속성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교환하거나 치환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그(녀)에게만 속하는 그 단성성(singularity)은 어떠한 단어로도 바꿀 수가 없다. 존재에 깃든 단성성이란 원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넘어서 있거나 언제나 일탈한다. 에피쿠로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클리나멘(clinamen)이라는 존재를 고안해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일반적인 의미에 불과한 하나의 단어에, 그(녀)의 충성스러운 대변인이 되어 서명이라도 하듯, 소유를 암시하는 수식어를 하나 첨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향기! 그(녀)의 순진함! . . . ”. 좀더 나아가 나의 격앙된 감정이 들킬 만큼 나의 어법이 서툴러지거나 유치해지면, 내 언어는 더 상투적이고 진부해져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따뜻한 미소! 그(녀)의 따뜻하고도 감미로운 향기! 그(녀)의 따뜻하고도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순진함! . . .”.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나면 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러 저러한 감각 이미지들을 아무 곳에나 제 멋대로 결합시키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떠한 짓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파고드는(그래서 내가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이미지는 치환이나 재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벌려놓은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표현함으로써 끝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모호한 후렴구를 내뱉으며 잠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긍정의 과정은 사랑 받는 연인의 본질의 발견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본질의 발견에서 비롯된다. 속성은 사랑의 대상에 속한 것임에도, 언제나 사랑하는 주체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반드시 능동을 포함하고 있다. 긍정은 능동을 지시하고, 능동은 긍정을 생산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윤리학이다.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그랬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인을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해 스스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 자신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사랑의 명제이다. (무한한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수동과 능동에 의해 주파수가 맞았다. 사랑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 안에서 발산하는 능동은 스스로 형상이 되거나 스스로를 재현한다. 때로는 대상의 가치에 대해 채울 수 없는 의혹을 한껏 품다가 가냘픈 충동을 느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혹은 사라진느(Sarrasine)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상상하며 수도승의 엄격함으로 조각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베르테르는 자신의 편지를 로테에게 보낼 의도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거울단계에 머무르고 싶어 하거나 우상숭배자가 되기도 하며(사랑이 좌절되었을 때, 사라진느는 조각상을 깨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가장 소극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간혹 물신주의자가 된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가 하나의 무늬를 짜 놓고 싶어 하며,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진 연인으로 하여금 언제나 글을 쓰도록 하는 동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지면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가 문형 제작자이다. 또한 긍정과 능동을 운용하여 문형을 제작하는 이들은 모두가 윤리학자이다.

<문예노트>
Posted by huun


― 글, 시, 비유, . . . 이들을 사랑에 빠진 자의 언어가 짜놓은 무늬라고 정의해보자. 그리고 그들을 통틀어서 문형(文形, figure)이라고 불러보자.


―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에는 언제나 “나”가 등장한다. "나", "내가" 화자가 됨으로써, 형태상 전면에 부각된 나! 그러나 사실상 나는 가장 깊숙이 그러나 가장 가까이 숨어버린다. 어째서 '내'가 화자가 되어야 하는가? 사랑의 이야기 속에는 왜 내가 복귀되어야 할까? 가장 구체적인 존재로서 나 만큼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모든 언어의 근본적 시점은 일인칭 화자이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나는 내 앞의 모든 것들을 극화(劇化, dramatization)하기 시작한다. 또 그래야만 가장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인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와 관계하는 다른 많은 인물들,
이들(간)의 감정들, 몸짓들, . . . 아주 복잡한 실재가 가지런히 정돈되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모든 감정과 인상과 몸짓들을 표현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없이 어떻게 이 모든 이야기들을 이끌어 나갈까? 이 지루한 시간을 구원해주는 것은 오로지 이야기 뿐. 또 이야기는 이 지루한 시간 자체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줄 것이다. 나는 맨 앞에서 말하는 화자이며 동시에 어디에서든 현존하는 주인공이다. 그런데 극화하는 화자로서, 그리고 극화된 주인공으로서 나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가장 깊숙이 숨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들이 살아 있으니, 나 역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도대체 내가 있는 곳은 정확히 어디인가? 사랑에 빠진 사람! 글을 쓰는 사람! 이들은 모두가 길을 잃은 자들이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은 감동하거나 좌절할 때 언어를 찾는다. 갑자기 그의 연상에 떠올려진 연인의 미소 때문에, 아니면 더 이상 몸속에서 팽창하고 있는 기운을 가눌 수가 없어서, 그래서 또한 이리저리 이 방 저 방을 배회하다가, . . . 로테를 사랑한 베르테르를 보라! 갑작스런 언어의 분출은 그를 수다쟁이로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어로의 분출이라고 말해야 할까? 무엇인가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갑자기 혹은 우연히 안으로 난입해버린 것이다. 베르테르의 수많은 편지들! 문형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여기서 시작된다.


― 문형은 산채로 포착된, 생포된 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그 무엇으로 귀속되지도 않는다. 다만 살짝 숨어서 단 한번만 엿 볼 수 있을 뿐. 문형을 한 폭의 이미지로 말해야 한다면? 부서진 몸짓들! 숨어 엿보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가까이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부서진 채로만 보인다. 가령, 누군가 숨어서 베르테르의 좁다란 방을 엿본다고 해보자. 이리저리 방황하는 몸짓을. 혹은 그의 편지를 훔쳐본다고 해보자. 그 횡설수설하는 말들을. 꿈틀거리는 존재는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것이 이리저리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다. 그래서인가? 생명 앞에 선 지성은 한 없이 부분에만 고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을 소유한 존재는, 사랑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를 엿보는 자 역시, 밀도가 낮은 그물망처럼 아주 많은 것들을 놓쳐 버린다. 그는 오로지 몇 안 되는 잔상들만을 소유한 채, 그들 사이에 가능한 빈약한 조합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린다. 그런데도 즐거워하고 있다. 어쨌든 꿈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 문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혹은 문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 있어야 한다. 문형은 누구나 소유하거나 공유하는 담론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 빠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목적은 소통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와 소통을 한단 말인가? 특별한 섬광을 발견하거나 경험한다면, 그는 곧 바로 이 무형의 섬광에 특정한 모양새를 갖춘 육체를 부여한다. 기쁨의 강도에 따라, 그 부름에 따라 반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문형은 반복의 언어이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혐오하기까지 한다.


― 세련된 문화의 주체, 즉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문형은 반복적 패턴과 지루한 코드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중세 기사 로맨스나 궁정 연애담 혹은 여인의 이야기들의 일정한 패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는 용질(溶質)이 형태를 갖추기 위해 단단해지는 주조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과잉된 촉발로부터 비롯된 감정이 형체를 갖고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언어의 허용된 경계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형은 언제나 낡은 코드의 끝자락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 끄트머리에서 그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이리저리 구석들을 탐색하지만 곧 좌절하면서, 끊임없이 입에서 맴도는 같은 말들의 참담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연속되는 감탄사들! 그 반복되는 역겨운 말들! 그 낭만주의! 오! 사랑! 이걸 어쩌지! 말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마치 말더듬이의 웅웅거리는 소리와 흡사하다. 마치 잠자(Gregor Samsa)나 화부의 울부짖음이나, 이름 모를 동물소리. 반복. 과잉. 말더듬. . . . 이들은 모두 문화가 우리에게 금지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지양하도록 권고하는 있는 변태성이다. 걷잡을 수 없는 이 변태성의 분출을 막기 위해 개인과 사회는 대단히 중화된 여러 가지 형태들을 고안해 낸다. 허가받은 변태성! 결혼! 잘 다듬어진 욕망! 이 변태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르긴 몰라도 동일한 위험의 강도(强度)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이 없는 존재는 문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문형이란 문화적 제한구역의 경계 주위에서 배회하는 연인이 남겨놓은 자취들이다. 연인은 그 제한구역을 넘어서지 못한 채 그 너머를 바라보고 갈망한다. 그러나 한편, 이 제한된 구역의 경계 근처에 가보지 못한다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신비체험을 경험한 이방인의 헛소리일 뿐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가 버리기 십상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