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02/28 지아 장커!
  2. 2006/12/29 사진과 영화의 존재론적 위상
  3. 2006/10/05 푼크툼(Punctum) (4)
  4. 2006/08/27 사진과 믿음 (1)
  5. 2006/08/12 사진과 운동 (1)

얼마 전부터 사진으로 찍어 두고 싶은 광경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가끔 산책을 하며 걷던 곳인데, 거기에는 오래 전부터 건설 중에 있는 아파트 단지가 횡 하니 솟아 있다. 단지 주변에는 마치 SF 전쟁물의 로봇처럼 거대한 기중기가 듬성듬성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건설현장 앞쪽으로는 여기 저기에 낙서가 지저분한 시멘트 벽이 만리장성처럼 가로놓여 있었는데, 그 시멘트 벽은 건설현장과 앞쪽의 개천을 둘로 가르는 경계가 되었다. 사진을 찍는다면 시멘트 벽이 수평선처럼 프레임의 좌에서 우로 반을 쭉 가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벽 위쪽으로는 기하학적으로 힘차게 솟아오른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는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푸른 산과 하늘이 있다. 다음으로 벽 아래쪽엔 흉하게 여기저기에 나 있는 잡초와 낮은 등성이 있고, 더 아래쪽은 얕은 개천 물이 돌덩이들에 부딪혀가며 지저분하게 흐르고 있다. 잡초가 나 있는 둔덕 여기 저기엔 중년 혹은 노인 남자들이 더운 날씨에도 땀 복을 입고 앉아 그 지저분한 개천 물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 극적인 광경은 동영상 보다는 사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바람이나 물의 흐름 혹은 날아가는 새 외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고(낚시꾼들 조차 미동이 없어 보였다), 그 광경이 자아내는 어떤 첨예함을 순간적으로 담기에는 지속적인 붓질이나 글의 묘사 보다는 대기를 단번에 갈라내는 칼끝과도 같은 민첩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그곳을 찍고 싶다고 생각한 후로 1년도 더 지나 카메라를 들고 그곳을 찾았다. 여러 장을 찍었지만 아무래도 카메라를 잘 다룰 줄 모르는 탓이었는지, 내가 느꼈던 광경의 첨예함이 좀처럼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체를 가르는 칼이 그렇듯이, 셔터의 순간을 포착하는 심리적 속도와 무게와 균형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싶다.

카메라가 생산하는 이미지는 펜촉이 생산하는 이미지보다도 그 물리적 속성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다. 종교적인 의례와도 무관하지 않은 예술이 그렇듯이 분위기를 잡고 포석을 깔고 절차를 밟으면서 서서히 우리를 압도하는 대신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혹은 사진을 보는 순간 실제적 균열 같은 것이 파고든다. 물론 그러한 민첩함이 없이도 첨예함을 드러내는데 탁월한 예술가도 있다. 지아 장커(賈樟柯)가 바로 그 이다. 안토니오니(Michellangelo Antonioni)나 데시카(Vittorio De Sica)와 같은 네오리얼리즘이 부활한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의 작품들은, 사회적 변화를 개인의 존재론적 몰락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된 심리적 저항과 병치시켜 놓으면서, 재빠르게 무언가를 포착하지 않고도 오히려 서서히 진행되는 걸음걸이와 오랫동안 주시하는 시선을 전광석처럼 날카롭게 한다. 변화를 그 자체로 목격하는 것 만큼 찌르는 고통을 맛보는 경험은 없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마천루 지각"의 장면들을 보며 가슴이 아픈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광경에 익숙해진 우리들로서는 고통스럽지도 그렇다고 무감각하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지아 장커의 작품에는 항상 두 가지의 세계가 평행한다. 2006년작『東』이나 2007년작 『無用』과 같이 예술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마치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나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이 두 작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향이지만—의 사진집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24city』, 그리고 특히 2004년 작품인 『世界』에서 다소 노골적이고 이례적으로 드러내고 있듯이, 급격한 변화 아래 그 존엄성을 상실한 육체들의 찰과상이 널려있는 세계가 한 편에 있고, 누군가에 의해(혹은 어떤 외계인들에 의해) 그 세계가 은폐되거나, 또 누군가에 의해 그 세계가 거부되어, 예술의 형태로 혹은 판타지의 형태로 고착된 매끈하고도 영원할 것 같은 그림의 세계가 다른 편에 있는 것이다. 무자비한 세계와 병적인 세계의 두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안타까운 것은, 언제나 후자의 세계는 전자의 세계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24city』에서의 그 놀라운 장면이 그것이다. 화려하게 분장을 하고 신화적인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어느 허름한 건물에 들어가 주민들에게 여흥을 주기 위해 그들 앞에서 노래와 춤을 공연한다. 다음 장면에서는 공연이 끝나고 배우 한 명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와 돌아 나오는 순간 그녀가 걸어가야 할 골목길이 갑자기 그녀의 뒷모습과 함께 화면 전체에 펼쳐진다. 외계식물들처럼 전선줄이 건물들을 휘감고, 빨래나 쓰레기 혹은 시멘트 벽에 낀 검은 자국 같은 삶과 시간의 부산물로 더럽혀진 그 골목길은 다름 아닌 판타지가 서식하는 토대이다. 영화 전체를 통해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이 토대 어디에선가 잠을 자고 꿈을 꾼 사람들이 날이 밝자 밖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이다. 처음엔 노동자가, 다음엔 빈민들이, 다음엔 배우가, 다음엔 명품으로 치장한 보따리 상인이, . . . 인물들이 대체되는 양상은 마치 토대의 이행—가령, 중국사회의 공장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의—을 보는 듯 하다. 이와 유사한 장면은 이미 『東』에서도 제시된 적이 있다. 거기서는 어느 여성 모델이 낙원 분위기의 수채화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작업이 끝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소음과 매연에 질식할 것 같은 도심지의 귀가길을 나선다. 이것이 바로 서서히 움직이며 한참 동안 주시하는 지아 장커 영화 전체에 잠재되어 있는 첨예함이다. 끝나지 않은 모순을 가리키며.(여기엔 또한 현실과 관계하는 예술의 달라진 위상에 대한 지아 장커식의 날카로운 비평이 있다)

아마추어인 내가 찍은 그 광경 사진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사진을 보자마자, 아니 지아 장커의 작품들을 보자마자, 그 사진의 제목을 망설임 없이 떠올려 내었다: 지아 장커!

Posted by huun

사진이 표상 예술(회화나 문학과 같은)과 구별되는 요소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관계하고 있는 재료, 즉 이미지만을 검토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사진에 사영(寫影)된 사물의 형상은 주관적 의식에 의해 자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카메라는 빛의 흡수와 반사를 통해 사물의 표면을 복사한다. 빛의 연속 운동은 카메라에 의해 특정한 구역이 절단되고, 이 단편이 일으킨 화학작용으로 인해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빛을 이루고 있는 다수의 질점은 감강판의 특정한 영역으로 이동하고, 이로써 사물과 (사진)이미지의 관계는 기계적 대응이라는 함수를 이룬다. 사진 속에서는 “빛=사물의 표면”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빛은 물질의 피부”라는 표현을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재로서 대면하게 된다. 어느 모로 보나 사진의 형상(形象)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는 의식적 기억이나 사유와 같은 주관성의 자율적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 들뢰즈(G. Deleuze)는 베르그송(H. Bergson)이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에서 연역해낸 이미지의 개념을 바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미지란 물질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각된 대상을 실제의 사물이며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지에 대한 이 개념은 심리학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즉 이것은 이미지가 더 이상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는 비연장적인 표상이 아니며, 물질 역시 의식적 표상으로서의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주관성으로부터 초월적인 신비물이 아님을 함축한다.1) 들뢰즈에 따르면 베르그송은 이미지를 빛-물질과 동일한 것으로 정립함으로써, 의식(사유)과 물질(운동)의 이행, 즉 물질이 의식의 표상으로 이행하거나 혹은 의식의 표상이 (행동과 같이) 물질로 이행하는 관계를, 순전히 사진적 의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에 포착된 사물은 그림이나 이야기로 투사된 의식의 빛 이전에, 주관적 표상(이미지)의 개입 없이도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빛 그 자체이다.

사진이 물질의 표면을 기계적 함수로 처리함으로써 형상을 재현했다면, 영화는 거기에 운동과 시간의 형식을 덧붙여 실재의 재현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꽤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 명제는 베르그송의 운동 개념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운동의 두 수준을 구분하였다. 하나는 운동하는 물체와 그것이 지나간 공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질적 강도로서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고대철학은 운동하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과 운동성 그 자체를 혼동함으로써, 운동의 질을 양적인 것으로 대체하여, 실질적인 운동을 동질적 공간 속에서의 물체의 위치 이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는 특정한 위치로부터 출발하여 또 다른 특정한 위치로 이동하고, 다시 특정한 위치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는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운동을 위치의 이동으로 이해하는 순간,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을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고대철학이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을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서로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성을 단순히 좌표 위에서의 점들의 이동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의 제4장 전체에 걸쳐, 영화적 환영(cinematographic illusion)이라는 이름 아래, 영화를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영화를 사진들의 결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진들을 결합하고 이를 하나의 운동으로 만드는 장치와 영화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고대철학이 했던 운동의 주관적 재구성을 기계의 양적 이동을 통해(기계론적 착각)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움직이는 사물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는 제거하고, 순전히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정지된 형상(사진)들의 추상적이고도 양적인 결합만을 유도한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실제의 운동이 아니라 장치들의 공간적 위치 이동, 더 정확히는 정신적 추상과 동일한 방식에 의해 재구성된 운동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영화는 사물들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만을 증류해낸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가 기계장치의 반복적인 메카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로, 운동의 양적인 일관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름에 동일한 길이의 구멍을 뚫는다. 그렇게 해서 영화 이미지는 필름조각들을 균등하게 분할된 속도에 따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이미지에서 운동성의 본질은 필름조각 자체가 아니라, 필름조각들간의 대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성은 움직이지 않는 추상적 점들간의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속이 공간들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던 베르그송의 운동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이미지의 운동성이 정신적 추상이 아닌 물질적 분석에 의해 수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사진적 의미에서의 이미지를 언급했던 베르그송이 잘 설명하고 있다. 사진은 운동을 초월적 추상으로 요약한 포즈들의 결합(정신적 결합)이 아니라, 물질-빛의 구역, 즉 운동성의 블록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에 의해 조명된 빛이 아닌 물질-빛 그 자체의 기계적 운동. 이 운동과 지각의 동일성은, 지각=물질=빛의 내재적 관계들을 이루면서, 운동 중에 있는 지속의 부피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영화는 실제의 운동(물질)에 대한 분석적 냉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기계장치가 필름조각들의 시간적 균등분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말이다. 사진의 물질성은 곧바로 영화의 운동성으로 확대된다. 그리하여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이란 신체나 공간과 같은 다른 모든 부수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운동성 그 자체만을 고스란히 남긴 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미소짓고 있는 고양이로부터 고양이는 빼고 미소만을 남기는 것이다. 비록 영화의 재현성이라는 개념으로 오해하기는 했지만, 바쟁(Andre' Bazin)이 영화를 사진적 의미에서 그 고유한 존재론적 위상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영화가 표상예술과 구별되는 점은 영화 그 자체의 존재론 속에서, 그 고유의 존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운동과 물질의 내재적 관계로부터 확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영화는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물질과 동일한 외연을 갖는 이미지이며, 동시에 운동성을 증류해 낸 것으로서의 운동 그 자체이다. 들뢰즈가 영화의 존재론적 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조합해낸 “운동-이미지”의 개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사진과 영화는 유물론적 토대 위에서만 성립 가능하며, 그 자체로 유물론을 예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기계 테크놀러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토대에 기인한다. 우리의 정신은 테크놀러지를 통해서만 물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과 영화에도 회화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주관적 요소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무대 배치나 조명과 같은 화면의 조형성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예술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형식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시간 속에서 체험되는 삶과는 무관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객관적인 르포르타주에도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에 있어 근본적인 것은 인간적 의식 이전에 존재하는, 심지어는 주관성의 조건이 되는 물질(의 운동과 시간)일 것이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하나의 정지된 쇼트를 진정한 회화적 의미에서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면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운동과 시간, 즉 배치된 요소들(인물이나 사물)의 움직임이 배제되는 경우에도 지각을 초과하여 흐르고 있는 모종의 굴곡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시간이란, 아킬레스의 한 발이 의미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수준에서, 화면 자체가 이미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미세하지만 거대한 파동을 의미한다. 제 아무리 근사한 기획에 의해 가공된 화면구성이라 해도, 또 상상력의 빛이 아무리 찬란하다 해도, 스크린 표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저 피사체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파동은 마음대로 생략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실재이다. 몽따쥬와 같은 문학적 장치를 통한 허구적 효과 역시 영화의 관점에서는 다른 문제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종합 이전에 발생하는 기계적 사영(寫影)의 문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일찍이 소련의 몽따쥬 유파들―예로, 쿨레쇼프나 푸도푸킨―의 실험들(모주킨 효과나 벽돌쌓기와 같은)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화적 실험이기보다는 회화적 혹은 문학적 실험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영된 피사체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었으며, 관객은 그 근원적 시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탄생 혹은 진화와 관련하여 초기의 역사를 훑어보면, 한결같이 물질의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표현의 방법론적 노력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술이 직접적으로 물질적 제약에 직면한 예는 아마도 영화(사진적 의미에서)가 초유의 일일 것이다.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일종의 (빛의)물리학이었던 셈이다.


사유의 측면에서 볼 때, 운동-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백지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빛의 착란 상태 (지각의 소거로 돌아가려는 베케트에 관한 부분을 들뢰즈가 말한 것 설명해본다) . . . 그런데 왜 이러한 회귀를 언급해야만 하는가? 그 유용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유의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 . . (베르그송의 제임스 논문에서 과잉실재가 중요한 이유 . . 표면화 . . ., 미리결정된 것의 소거 . . .등으로 가기위해)/// (그런데 왜 잉여실재를 말하는가? ⇒ 열린 우주를 말하기 위해 . . . 영화가 재현하는 실재는 미리결정된 사유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 . . 그 순수한 의미에서의 베르그송적인 영화는 이미 베르그송이 비난했던 그 자리에서 생겨나고 있었으며, 그의 생각(창조적 진화)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바로 주관적 구성에 의해서가 아닐까?)


1)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Bergson, Matter and Memory의 1장 특히 서문과 Deleuze의 Cinema I p.56-61을 참고하라.

Posted by huun

바르뜨(Roland Barthes)는 사진에 관한 한 에세이(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Eng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81)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가를 “푼크툼(punctum)"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나는 이 생소한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이 단어에 속하는 몇 가지 술어들을 찾아내었다. 사전적 정의로부터(점(點), 순간, 날카로운 것, 자극하거나 찌르는 것, . . .), 그것이 환기하는 의미까지(욕망의 부분대상, 물신주의적 환유, 프루스트적 의미에서 비자발적 추억을 불러들이는 징후, 사물들이 종합되는 순간 그어진 사선, 특정한 감정을 촉발하는 파문, . . .). 나는 이렇게 많은 술어와 의미들을 열거하고 난 후에 이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아마도 주체가 예술작품이나 인물과 같은 특정한 대상을 만나게 될 때 우연히 그를 자극하는 이미지. 또한 그것은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우연적이긴 하지만, 그가 발견한 이미지. 이제 나는 경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주 뇌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하나씩 되새겨보면서, 그것들이 푼크툼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곧 사라져 버리기가 십상이었고, 더구나 억지로 떠올린 이미지들로 가득 차 버려서 나를 기쁘게 하지도 못했다. 또 이미지들은 다른 의미들을 불러오지도 않고, 텅 빈 그림들만 내게 현시 될 뿐이었다. 결국 나는 푼크툼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했고, 몇몇의 그럴 듯한 술어들만 암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를 만날 때면 가끔 드나드는 식당이 있다. 그곳은 서구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 실내를 한껏 장식했고, 벽과 천장에는 커다란 서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테이블들 사이에 놓인 칸막이 난간에는 빈양주병들이 놓여있었다. 웨이터와 웨이트레스가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앉아있는 손님들로부터 새어나오는 수다스런 소리. 어둠침침한 조명들 사이사이를 휘감고 오르내리는 담배연기. 출처를 알 수 없는 멜로디. 주방과 테이블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 이 냄새는 서로 엉키고 섞여서 각각을 구별할 수 없이 그냥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되어 버렸다.

웨이터와 웨이트레스들은 검은색 조끼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목과 가슴부분, 그리고 팔은 흰색 와이셔츠가 드러나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실내의 조명과 잘 어울렸다. 대비가 강한 두 색은 산뜻해 보였지만, 아마도 눈을 자극하기 위해 고안된 지배인의 시각적 조작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걸친 옷에만 조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가 비슷한 톤으로 손님들과 사무적 대화를 나누었다. 제각각 다른 얼굴 모양새였음에도, 신분과 역할을 의미하는 동일한 미소가 한결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정중하게 손님들을 대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미소와 말투는 나를 불쾌하게, 아니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의 불쾌감은 따지고 보면 신경증적 불안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 뿐 아니라 나 역시 이러한 대면이 반복되면서 무감각해 질 것이다. 아무런 기대도 호기심도 없는 무감각.

특히 나를 불쾌하게 했던 것은 그 식당의 지배인쯤으로 보이는 사람의 태도였다. 손님이 오면 테이블로 안내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손님을 보면서 미리 마련된 미소를 내보인다. 언제나처럼 메뉴를 건넨 후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가,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옷매무새와 표정을 점검하고 나서 주문을 받으러 온다. 레스토랑이니 카페니 하는 곳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공통하지 않은 목적들을 가지고 각자만의 방을 가지기 위해 이곳에 모인다. 누가 이곳을 사교모임의 장소라 했을까? 현대 사회는 이곳을 특이한 시장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환상이 거래되고 있다. 이곳이 사교모임의 장소라는 말은 틀린 말이지만 또한 동시에 옳은 말이다. 어쨌든 그 지배인은 언제든지 이곳이 시장임을 상기시킨다. 그에 대한 나의 불쾌감은 아마도 거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몇 살 정도인지를 가늠해 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는 틀림없지만, 20대인지, 30대인지, 혹은 40대인지 조차 구분이 되질 않았다. 아마도 그가 취하는 제스처나 의복 등이 나이를 말해주는 어떠한 기호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었을 것이다. 동일하게 프로그램화된 그의 말투 역시 그를 어떤 사람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통일감을 자아내기 위해 고안된 유니폼 제도는 개인이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 완성을 이루었다.

이렇게 모호한 이 식당은 내게 불쾌감을 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했기 때문에, 내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불쾌감은 금세 사라질 수 있었으며, 나는 더 이상 이 실내의 분위기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떼기 시작했다. 이곳은 더 이상 나의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변화 없이 단단한 것들, 동일한 반복이 계속되는 것들은 언제나 지루함과 태만을 낳는다. 내가 이 고급 식당에서 보고 있는 시각적 조작이나 사무적 몸짓 그리고 모호함 등을 그럭저럭 긴 시간 동안 견딜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 모호함이 더 이상 나의 시선을 붙들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 역시 그들로부터 무감각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템이나 권력이 그렇게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그것은 저 먼 곳에서 신비한 광채를 띤 채 공포나 불안에 호소하기보다는, 아무런 미동도 들키지 않을 만큼 아주 가까이에서 지루함과 태만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사교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유한부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왜 그렇게 하품이 나오는지.

어쨌든 나는 이 식당에서 특별히 긴장하거나 호기심을 가지지 않은 채,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여느 때처럼 담소를 나눌 수가 있었다. 내 시선은 마주 앉은 친구의 모습과 실내 사람들의 움직임, 그리고 이리저리 바쁘게 걸어 다니는 종업원들을 번갈아 가며 훑어 내리고 있었다. 웨이터들은 경직된 표정으로 지배인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시선에 오랫동안 남아있지 않기 위해 괜히 이곳저곳을 움직인다. 그 지배인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휘하에 있는 종업원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어른스러운 몸짓과 어투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그는 자신의 앞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넌지시 친근한 어투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이 관계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지배인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더 나은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만 종업원들이 자신의 직분에 더 충실할 것을 요구했던 것  뿐이며, 그 직분에는 지배인에 대한 성심(존경은 아닐지라도)과 경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단순한 계약관계에 놓여있었지만, 그 계약의 심층에는 훨씬 더 한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농담은 음흉한 것이었고, 이를 눈치라도 챈 듯 종업원들은 모두 그 농담에 거리를 두곤 했다.

종업원들 중에는 근사한 모습을 한 웨이트레스가 있었다. 중간쯤 되어 보이는 키이지만, 날씬한 다리와 잘록 들어간 허리. 특히나 유니폼이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한껏 드러내어 주고 있었다. 유니폼이란 항상 저런 미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니폼이 우리를 참담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손님들을 접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종업원이기보다는, 젊은 귀부인이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해 만찬이라도 베풀고 있는 듯 우아해 보였다. 하얀 유니폼의 소매보다도 더 맑아 보이는 손등. 접시를 내리고 올리는 팔이 드러내는 포물선의 자취. 경박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살짝 안쪽으로 당겨 접은 턱. 아래로 떨군 눈매에 길게 드러난 검고 고운 속눈썹. 그녀는 이 모든 동작과 표정들을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했으며, 타인들의 시선과 갈채를 스스로 품은 채, 자신의 연출에 도취되어 나르시스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시선이 언제나 아래로 향해있는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눈동자는 늘 자기 자신으로 향해 있었다.

한참이나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지배인은 그 웨이트레스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아마도 그녀가 연출하거나 그녀 자신도 모르게 발산한 수많은 질적 이미지들에 매료되어 취해버렸을 것이다. 우선 그의 시선에 그녀가 들어올 때면 표정이 달라진다. 그녀가 다가와 그에게 사무적인 질문이나 의견을 말할라치면, 그는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다른 질문들을 도리어 던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그녀와 관계있는 모든 것들에 긴장하고 민감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때의 그 태도와 몸짓은 더 이상 지배인의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때로는 그녀의 동정심에 호소하기 위해, 또 때로는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지위를 이용해, 그는 끊임없이 그녀 주위에서 배회하며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어지러운 선분들을 허공에 그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지위와 권력이 보증했던, 그래서 단단하고 강하게만 보였던 그의 위엄은 너무나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렸으며, 자신의 달콤한 타락을 깨닫지 못한 채, 공포와 태만 위에 군림한 힘이 아니라 기쁨을 주관하는 더 위대한 힘에 굴복해야만 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뒤바뀌어 있었다.

그는 지금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특별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그 미소는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냉정히 가다듬으며, 최소한 당신과 나 사이에 별 일이 없기를 바라는, 그러한 두려움을 품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 푼크툼을 발견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미소는 어쩌면 나에게만 들켜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진하고 앳된 미소. 최초로 그 특별한 미소를 내가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푼크툼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쑥스러움을 가리기 위해 그녀에게 살짝 곁눈질을 하며 흰 치아를 드러냈지만, 그 표정은 나에게 그의 모든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혼자 있을 때, 친구들과 어울릴 때, 어렸을 적에 등등, . . . 자라온 일생만큼이나 긴 시간동안 그와 함께 있었을 그 표정을 다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러고 나니 그의 속살들이 마치 물속에서 색종이가 퍼지듯이 하나 둘씩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나이는 20대 후반쯤. 확실히 그는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저 웨이트레스를 사랑하고 있다. 특히 그의 손목에 찬 시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분한 복장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자유가 허용된 몇 안 되는 신체의 자투리 구역에, 그는 환심을 살만한 온갖 전리품을 달아놓고 싶었을 것이다. 젊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스포츠용 방수시계. 점잖은 양복 유니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에 걸린 핸드폰. 그녀에게 젊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그의 촌스러운 취향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동안 그와 함께 지낸다면 이러한 푼크툼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푼크툼은 순식간에 뚜렷이 돌출하기도 하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주체의 기억과 감각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떠나가 버린 사람을 사랑했음을 깨닫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 지배인은 내게 들켰던 것들 보다 더 강도 높은 푼크툼을 그녀에게서 보았으며, 그의 사랑은 아마도 이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더 이상 (어디든 널려있는 혹은 누구여도 상관없는)지배인으로서가 아니라 유일한 그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듯이, 푼크툼은 섬세한 눈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섬세한 눈을 가지게 한다. 그가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남다르듯이. 사랑이란 일종의 특이화(specialization)인데, 사랑과 관계하는 모든 용어들은 바로 저 의미를 향해 있다(그러나 부르주아 사회는 이 사랑을 경쟁과 독점적 소유의 문제로 해석해 버림으로써, 우리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푼크툼의 발견은 기쁨이나 사랑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를 통해 야비함이나 포악함 혹은 역겨움 등을 볼 수도 있다. 또한 사랑의 대상을 전혀 엉뚱한 존재로 치환해 버리기도 한다. 바르뜨는 앤디 워홀(Andy Warhole)이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는 사진(Duan Michael 1958)을 보면서 워홀의 손가락에 혐오감과 역겨움을 느꼈다(Barthes. Camera Lucida, 45). 손톱을 짧게 깎아 손끝의 살이 마치 손톱을 감싼 것처럼 둥글고 연하게 보이는 손. 그는 이 손가락과 관련된 앤디 워홀의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손가락을 닮은 다른 사람에 대한 혐오스러운 기억이 떠올려진 것일까? 현실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 보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더 많이 보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하고 슬픔을 주기도 한다. 어떠한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지배하여, 그 대상의 조야한 본질을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서 역겨움이라는 새디즘적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내 본성과 잘 어울리지 않는 다른 본성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나 메스꺼움이라고 할까?

어찌 되었든 이런 경우에도 푼크툼은 존재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집단적 환영이 만들어낸 우리의 망상이나 믿음을 변질시킨다. 그래서 나의 망상에서 비롯된 사랑하는 사람의 순수한 이미지조차 변질되어 생생한 실제의 장소에 위치하게 된다. 존재는 두 번 변질되어 불순한 이미지로 뒤바뀌는 것이다. 푼크툼은 존재를 이중으로 변질시키면서, 심지어 사랑조차도 타락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짙게 화장한 시체의 코에 살짝 내려앉은 검은 반점(Roland Barthes.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p. 25). 부패의 징후. 사랑으로 채색되었던 나의 신념과 최면은 이 점 하나로 인해 송두리째 전복되기 시작한다. 사랑의 대상은 평범한 존재가 되어 실제의 세계에 놓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푼크툼은 사랑을 지나 연민으로 가는 통로인 것 같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사진은 죽어버린 것들을 담고 있지만, 말하자면, 더 이상 현실적 효력이 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죽음 그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그 본성상 사진은 사물의 죽음을 선언하고 거기에 애도를 표하는 묘비명과도 같다.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이 말했듯이, 사진은 우리의 공포―특히, 죽음에 대한―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 목적이라든가, 환기하는 효과를 감안해 본다면, 사진은 죽음의 예술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진의 역설이란 이러한 것이다: 사진은 무엇인가를 보존함으로써 그 죽음을 보증하는 동시에 부정한다. 현상으로서의 사진과 그것이 담고 있는 대상 자체는 확실히 구별되어야 한다. 고다르[Jean Luc Godard]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근육이나 피가 아니야! 그냥 인화용 종이에 찍힌 붉은 색 잉크일 뿐이라구!” 사진이 죽음과 함께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멈춘 시간과 관계하기 때문에, 더 정확히는 보존과 관계하기 때문이지, 그 자체 죽음이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죽음을 떠올리지만, 동시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갖는다. 사진이 표상 예술과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이 점일 것이다. 가령, 우리는 그림이나 문학작품을 하나의 과거로서 혹은 과거의 기억으로서만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작품 속에 재현된 대상을 실존적 가치들과 관계 짓기보다는 그 본질의 열림에 더 열중하게 된다. 우리는 젊은 베르테르나 유태인 블룸의 행적을 쫓으며 그들의 실존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속한 어떤 본질이 펼쳐지는 과정을 목도하는 것이다. 재현된 존재란 예고된 본질이 확인되는 형식으로 우리 앞에 주어지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소설작품이란 곧 그 자체 베르테르이며 블룸이다. 나아가 그들은 그 자체 인생이며, 우주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거기서 우리가 갖게 되는 믿음이란 하나의 비전 혹은 통찰이 될 것이다. 문학의 주변에는 언제나 죽음의 악령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바로 이 암울함 속에서 비극적이지만 의미심장한 삶에의 통찰과 태도가 준비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을 목도한 한 영혼의 자기 독백과도 같은 것이다. 가령,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주인공 정원이 사진가라는 점이다. 그 작품은 사진을 죽음과 관계 지음으로써,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으로서, 즉 기억하는 것으로서의 사진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 서는 모든 사람들은 수의(壽衣)를 맞추거나 한마디의 유언을 남기듯 특별히 마련된 한 차례의 예고된 시간을 경험한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사진관을 나오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걸어가면서, 자신만이 완성할 수 있을 어떤 서정시 한편을 읊조릴 것이다. 사진을 문학적 풍요로움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정원은 사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는 문학적 독백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은 추억으로 번진다!”(『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의 독백). 그러나 사진 자체는 이처럼 사물의 본질을 이루고 있지 않다. 담긴 대상물조차 그 자신의 본질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펼치는 과정은 더더욱 아니다. 심지어 사진은 사물의 본질을 감추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그것은 외양이며 현상이며 따라서 실체의 사라짐이다. 문학과는 다르게 사진에 찍힌 블룸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다. 심지어 그 블룸은 사진에 찍힘으로써, 더욱 더 사진과는 무관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종종 실물과의 비교 속에서 실체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곤 한다: “이 사람 맞아?”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는 실체에 근접하고자 하는 강박이 있다. 보존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과 사진은 대단히 상반적인 입장에,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본질에 닿아있고, 다른 하나는 육체에 닿아 있다. 그래서 정원이 자신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을 때라든가, 어떤 할머니가 장례식에 쓸 사진을 가족 몰래 찍는다든가, 정원과 함께 모든 친구들이 카메라 앞에 선다든가 할 때, 그들이 남기고 싶은 것은 육체 자체이지, 인생의 최종적 본질이나 진실이나 사연이 아니다. 하지만 사진이 남기는 육체란 어떤 육체일까? 가령,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무엇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흐르는 지속의 한복판에서 출처 없이 잘라낸 단순한 어떤 구간일까?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사진이란 철학의 과학적 알리바이, 다시 말해 지식의 세계가 실재와 동일한 위상 속에서 뒤섞이게 된 것이다. 물리학적 혹은 기하학적 규준과 그 공식들이 자연의 존재를 증명하고,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시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은 영원한 실재―고전철학의 관점에서 파악된―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그러나 막연했던 믿음을, 마치 환각처럼, 감각의 규준과 그 도식들로써 증명한 셈이다. 그리하여 인상파 예술이 그랬듯이, 사진은 회화를 좌절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화로 하여금 실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그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가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진은 죽은 대상(즉 활동을 멈춘)과 관계함으로써 죽음의 영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한편으로 사진은 그 죽은 대상조차도 현실적으로 살아있었으며, 실재 한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부여함으로써 현실과 관계한다. 대상물이 어떤 것이든지 혹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정서와 효과를 발생시키든지, 일단 사진으로 포착된 존재는 그 존재가 이미 증명된 셈이다. 사진은 존재에 애도를 취하기에 앞서, 그 자체 실제적 기념비가 된다. 보도자료, 증거자료, 법정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현실적 증거들! 이들은 모두 확증성을 보증 받기 위해 가장 먼저 사진의 형식을 띠게 될 것이다. 신문에 게시된 사진을 접하는 우리는, 마치 어떤 자명한 수학적 진리에 이른 것처럼, 혹은 어떤 절대적 존재의 서명을 확인한 것처럼, 어떠한 의심도 취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에 대해 이 만큼 확고한 믿음을 주는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이 과학적 망상인지, 아니면 윤리적 망상인지, 형이상학적 망상인지, . . . 어쨌든 우리는 그로 인해 현실에 절대적인 우월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영원한 가치를 투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문학이나 그림보다도 훨씬 더 종교적이다.

Posted by huun

사진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분류방식, 미적 효과, 역사적 고찰 등)이 있지만, 우선 그것의 본질은 활동하지 않는 시간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사진이 미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라든가, 혹은 현재적 지각에 특별한 촉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도 사진은 과거와 관계를 맺고 있다. 사진을 이해하는데 있어 현상학적 관점이 개입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일단 사진 속에 담고자 하는 사물이 포착되고 나면, 그 포착된 대상물은 더 이상 살아있길 멈춘다. 사진 속의 객체들은 모두가 정지된 시간에 감싸인 채 얼어붙어 있다. 마치 저 풍경이 시간의 한 구역 혹은 이미지라도 된다는 듯이! 영화는 어떤가! 만일에 우리가 영화를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간주한다면, 영화의 실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가지게 될 것이다.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주려는 노력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을 테니까! 베르그송(H. Bergson)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것은 생명과 운동에 관하여 잘못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진과 영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살아있지 않은 사물에 실을 매달아 그것이 마치 움직이는 듯 보이게 하는 인형극과 같은 기술이,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정의된 영화보다는 훨씬 더 감동적일 것이다. 인형극은 차라리 죽음에 관한 유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영화나 인형극은 죽어있는 시간과 관계가 있음에도, 모두가 운동이나 시간과 직접적으로 호응한다. 그런데 사진은 경우가 좀 다르다. 사진은 존재로부터 그 본성인 시간의 지속을 따로 떼어내고 모든 영혼들을 빼앗아 박제해 놓은 것처럼 무미건조해 보인다. 동작이나 움직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며, 애초에 그러한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사진은 관념과 유사한 외연을 갖는다. 관념은 우선 사물을 운동성으로부터 분리하고 추상한다. 이는 운동이나 생명 그 자체를 다루는 경우에도 그렇다.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흐르는 실재를 경험 내부로 포섭하듯이, 관념은 운동과 시간을 공간적 범주로 고정시킨다. 마찬가지로 사진은 활동이 멈춘 사물의 순간적인 포즈(pose)를 포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상학적 에포케(epoche)라고나 할까? 풍경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모든 시간이 괄호 안에 묶여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 포착된 포즈는 사물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어떤 경우든지 포즈란 “대상물의 자세(태도)나 카메라를 다루는 사람의 테크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읽어 내려는 의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Editions du Seuil, 1981), p.78. 참고로, 이 책은 Richard Howard가 영어로 번역하여 Hill & Wang(New York)에서 1998년에 Camera Lucid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사진은 실제의 대상물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상학적이다. 사진에서의 포즈란 의식의 활동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 말하자면 현상학적 노에마(noe`me)이다. 반면에 영화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순간적인 자태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자태들로 끊임없이 대체되고 치환되면서, 지시되고 있는 사물의 포즈가 변질되어 노에마는 끊임없이 흐르게 된다. 영화에서의 컷(Cut)은 새로운 것들로 인해 그 고유한 자태를 박탈당하거나 거부된다. 영화가 운동 그 자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는 운동이나 시간 속에 순간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순간성에 관한 이 망상은 두 가지 이미지로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는 완전하고 결정된 순간으로서의 포즈 혹은 자태가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신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불완전하고 미결정된 순간으로서의 컷이 있다. 바로 감각적으로 포착된 것으로서의 물질적 순간이다. 또한 이 두 이미지는 운동을 설명하는(혹은 그것을 재구성하는) 두 가지의 관점을 나타내준다―운동에 관한 이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Cinema I 첫 장에 자세히 연구되어 있으므로, 나는 그 내용을 요약하는 식으로 활용하겠다. 전자의 경우에는 고전 철학의 관점인데, 여기서 운동은 culminating point, privileged instant, telos, acme` 등의 용어로 정의할 수 있는 정신적 사건들, 즉 지적인 요소들의 변증법적 질서 혹은 이상적인 종합으로 이해된다. 즉 운동이란 영원한 것으로서의 형상이나 이데아들 간의 이행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운동, 해소할 길 없는 모순 혹은 비존재로서의 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후자의 경우에는 현대 과학의 관점을 보여준다. 현대 과학은 운동을 이상적인 것들의 이행이나 종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도 불특정한 파편들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가령, 현대의 천문학은 하나의 궤도와 그것을 횡단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관계로 운동을 분석하였다(Kepler의 경우). 또 현대 물리학은 떨어지는 물체가 뒤덮어버리는 공간을 시간으로 연결하였다(Galileo의 경우). 현대 기하학은 직선 위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순간의 점의 위치, 즉 평곡선의 방정식으로 운동을 분석하거나(Descartes의 경우), 공간적 단면이나 구역(section)을 무한하게 근접시킴으로써 곡선 즉 운동을 분석하고 재구성하였다(Newton과 Leibniz의 경우). 어떤 경우든지 현대 과학은 자태들의 변증법적 질서가 아닌 불특정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으로 운동을 정의한 것이다. “현대 과학은 무엇보다도 . . . 시간을 독립변수(independent variable)로 취하려는 열망이라고 정의 되어야 한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Eng trans. Arthur Mitchell, 1954). p. 355.) 마찬가지로 사진과 영화의 존재론적 차이는 바로 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와 관계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완결된 풍경의 이미지로서의 포즈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물질적 파편으로서의 컷이 존재한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