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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26 예술과 도착 (6): 새도-매저키즘의 가설들
  2. 2006/11/22 예술과 도착 (5): 새도-매저키즘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하나의 실체로 보이거나 혹은 두 가지 상이한 본능이 하나의 메카니즘 안에 공존하면서 서로 전이되고 변형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새도-매저키즘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가설들이 있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가설을 세가지 범주 속에서 다룬다: 상반성, <경험의 동일성 43>, <변형 44>.

(1) 상반성 - 상반된 본능이나 충동이 동일한 인물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는 가설. 그래서 고통의 유발로 쾌감을 느끼는 개인은 고통의 경험으로도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디스트는 동시에 매저키스트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에는 상반적인 두 영역을 연결해 주는 만족스러운 고리를 제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와 고통을 경험하는 행위의 두 경우로부터 어떻게 유사하고 동일한 쾌감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자연스런 설명이 부족하다.

(2) 경험의 동일성 - 공격과 지배의 새디즘이 매저키즘적 고통을 경험한 후에만 다시 쾌락으로서의 새디즘이 가능하다는 가설. 이것은 프로이트가 새디즘을 두 부분으로 구분한 것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새디즘이며, 다른 하나는 순수하게 쾌락지향적인 새디즘이다. 그러나 새디즘의 이 두 영역은 서로 단절되어 있는 독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투사와 퇴행(projection and regression) 44>이라는 기제들을 통해 서로 연속성을 띠고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 연속성이 매저키즘이라는 상반된 경험으로써 유지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새디스트가 고통을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그가 체험한 고통과 그에 따른 쾌감간의 관계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43> 다시 말해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고통과 쾌감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나 연결고리 혹은 상관성을 경험해 보아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느낀다는 것, 바로 매저키즘적 경험인 셈이다. 새디스트는 매저키즘을 본질적이든 혹은 부수적이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매저키즘적 경험은 새디즘이 단순한 폭력에서 고차원적 쾌감을 도출하는 단계로 승화하고 지양되기 위한 상관적 매개인 셈이다. 매저키즘은 여기서 새디즘의 전개과정에서 하나의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새디즘이 첫 번째 새디즘에서 두 번째 새디즘으로 변이된다고 보았다. 단순히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새디즘(첫 번째 새디즘)에서 쾌락을 추구하고 망상하는 새디즘(두 번째 새디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받음으로써 쾌감을 느낀다는 매저키즘적 경험이 매개된다. 이런 식으로 프로이트의 논의에는 다음과 같은 연속성이 유지된다: <단순한 공격적 새디즘 43> ⇒ <자신에게로 역전된 새디즘 44> 즉 고통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경험 ⇒ <매저키즘적 경험 44> 즉 고통으로부터 쾌감을 경험 ⇒ <투사와 퇴행에 의한 쾌락지향적 새디즘 44> 즉 고통에서 쾌감을 경험하는 매저키즘을 새디즘의 피해자에게 제공하고 투사하면서 다시 새디즘으로 되돌아가는 퇴행적 연결고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메카니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투사와 퇴행이다. 이 기제들은 새디즘이 변이되는 전 과정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고통을 가하는 새디스트는 자신에게 고통을 투사하고 매저키즘을 경험하면서 다시 이 경험을 피해자에게 투사하고 자신은 새디즘으로 퇴행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의 연쇄과정 속에서 결국 새디즘의 피해자는 매저키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 과정을 운영하고 구현하는 새디스트로부터 피해자는 당연히 고통 속의 쾌락을 경험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새디스트는 <자신이 영향을 받았던 똑같은 방식으로 쾌락의 대상을 감동시키고 있다고 상상 44>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새디스트의 피해자는 매저키스트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앞서 논의했듯이 타당성이 없었다.

(3) 변형 - <목적과 대상에 따라 성 본능들이 서로 합치거나 변형된다는 가설 44>. 본능들의 기제로서 변형에 관한 프로이트의 논의는 혼동스럽다. 그가 본능들을 커다란 두 집단(Eros/Thanatos)으로 분류했을 때, 이 두 본능 군(群)의 요소들은 직접적으로 변형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소들의 직접적인 변형의 결과로서 서로 다른 본능의 구분이 완전히 모호해 지기 때문이다. 변형이란 직접적이고 유효적인 방식으로 발생하는 경우와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둘로 구분된다. 간접적 변형은 이분법적 체계 내에서 상반성이나 부정적인 매개를 통해서 발생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형태의 변형이란 언제나 매개적 기능을 갖는 이분법의 다른 항을 요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실질적 변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외양적이고 형식적인 양적 변형만을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능들의 변형가능성이 직접적인 것으로 발생한다면, 프로이트의 구분은 모호한 것이 된다. 목적과 대상에 따라 반대성향의 본능으로 역전하거나 혹은 원래 자신의 본능으로 회귀하면서 성 본능들이 서로 합치되고 변형된다는 논의는 프로이트 자신이 구분한 본능들의 제한적 변형가능성에 모순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프로이트 자신의 전체적인 체계와는 모순되거나 불일치되는 논의이며, 스스로 자신의 일관성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본능들의 변형가능성을 이분법적 체계로 제한하고 있으며(에로스/타나토스), 이러한 제한적 변형가능성은 결국 직접적인 변형가능성이나 변형의 다양성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랑과 미움이라는 본능의 요소들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본능들(에로스/타나토스)에 속한다는 사실을 통해 서로 직접적인 변형이 이루어진다는 가설을 완전히 부인한다. 44> 프로이트가 방어기제들을 설명하면서 아이러니나 역설 등과 같이 반대적이고 상반적인 요소의 항을 요구하는 언어 체계들을 주로 이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투사, 반동형성 등. 따라서 그에게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차이는 외형적이고 양적인 차이이지 실질적인 유효적 차이가 될 수 없다. 직접적 변형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본질과 실체로부터 외형적이고 부정적인 매개를 통한 양적 변형만이 가능하다. 또한 이것은 변태성을 <고착과 퇴행 44>의 기제로 이해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일치된다. <고착과 퇴행의 핵심적 개념은 조푸르와(Geoffroy)의 기형학(발달의 정지와 퇴보)에서 유래되어 직계를 이룬다. 조푸르와의 관점은 변형에 의한 모든 진화를 배제한다. 44> 따라서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변태는 실질적인 변형으로부터 발생하는 진화론적 전개과정이 아니라, 이미 개인의 발달단계에서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한 지점으로 남아있는 시기인 것이다.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경우에는 고착의 형태로, 다시 이 단계로 되돌아갈 경우에는 퇴행의 형태로. 이런 의미에서 변태성은 생물학적 개인의 발달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변태가 되기(becoming) 보다는 단지 유아기의 변태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44> 그러므로 <단지 가능한 유형이나 형태의 계층들이 있을 뿐이며, 이 계층들 속에서 발달이 다소 초기의 단계에서 멈추어지거나 '퇴행'이 다소 심하게 나타날 뿐 45>이라고 말하는 조프루아의 개념과 <두 가지 유형의 본능들이 서로 복잡하게 결합하여 전체적인 어떤 형태들의 계층을 이루어내며, 개인들은 이 중 어느 한 계층에서 고착되거나 퇴행한다. 45>는 프로이트의 논의가 완전히 일치한다. 이러한 식으로 프로이트는 고착과 퇴행의 단계적 변화와 발달에 따라 개인을 설명하지만, 또한 변태성을 특징 짓는 다른 부분들에서, <진화와 직접적 변형 가능성들을 가진 다형적 체계를 인정하는 듯하다 - 그러나 또한 신경계와 문화적 구성체의 영역에서는 수용되기 힘들다고 간주한다. 45>

본능들의 복합-결합과 같은 새도-매저키즘적 종합의 원리에서는 이미 보았듯이 몇 가지 특징적인 메카니즘이 발견된다: 대립적이고 상반적인 두 요소들의 필연적 관계, 또한 이 두 요소들을 포함하는 보다 상위의 종합적 실체, 그래서 이러한 실체 내의 모든 요소들의 변형가능성의 제한. 이 특징들은 상반성과 종합 그리고 제한적 변형으로 요약된다. 더욱이 전체-종합의 메카니즘에는 동일성의 본질이 내재한다. 상반적이거나 반대적인 두 요소를 제시함으로써 전개되는 논의의 결과는 언제나 맨 처음 정립된 문제로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두 요소들의 기원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두 번째 제시된 요소는 언제나 맨 처음 정립된 문제로부터 설정된 하나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는 모순과 통일이라는 변증법적 드라마가 작동하는데, 모순이든 통일이든 어떤 경우든지 동일성을 그 본질로 갖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상반적이고 반대적인 두 요소를 포함하는 하나의 실체(새도-매저키즘)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고통이나 쾌감이라는 단일한 실체가 요구된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새도-매저키즘적 실체 또는 <고통-쾌감 콤플렉스>로 설명하는 것은 기원의 동일성을 상정하는 것이며, 기원의 동일성을 통해 전혀 다른 두 신경장애의 메카니즘은 공통적인 하나의 물질로부터 파생된 제한적인 변형의 부산물로 환원되는 것이다. <새도-매저키즘, 복합본능 … 등은 성적활동 유형의 특이성을 간과 … 주체의 사용가능한 모든 에너지가 그의 특정한 변태성을 위해 동원된다는 사실을 간과 … 새디스트와 매저키스트는 완전히 자족적이며 개별적인 드라마를 연출 … 내적으로 외적으로 이 양자의 의사소통은 불가능 … 공통적인 리비도 물질이 여기저기 형태를 바꾸어 흘러 다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45> 공통적인 기원을 설정하는 분석은 언제나 개별적 대상들의 특수한 맥락을 놓치기 쉽다. 변형에 관한 논의들이 언제나 이러한 분석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경험은 동일하지 않으며 각자 경험의 주체에 적합한 특수한 개별적 메카니즘을 갖는다. 그러나 새도-매저키즘 논의에서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경험을 서로 동일한 하나의 메카니즘으로 설명함으로써 이 둘의 경험은 동일한 것으로 중화된다. 왜냐하면 가학으로부터 나오는 쾌감과 고통을 통한 쾌감 두 경우 모두 동일한 주체로부터 나오는 동일한 경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주체가 경험하는 서로 다른 쾌감의 질은 단지 하나의 원리로 설명 가능한 상반적인 효과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진화과정과 변형의 메카니즘을 하나의 원리나 술어로 설명 가능한 심층적이고 공통적인 하나의 실체나 물질을 전제하는 것은 추상적인 유추에 불과하다: <새디스트의 매저키즘적 성향이 매저키스트의 그것과 같지 않으며, 매저키스트의 새디즘적 성향이 또한 그렇다. 46>

새디스트나 매저키스트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 둘의 개별적 경험의 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새도-매저키즘적 진단은 두 개별적 경험을 하나의 명칭으로 양화(量化)시키는 경우이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두 신경장애를 하나의 술어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하나의 물질이나 실체가 요구되는 것이며, 연속적인 진화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상이한 요소들은 하나의 메카니즘과 원리 속으로 제한된다. 여기서 개별적 존재들의 질적 차이가 헐렁한 옷에 의해 덮혀지거나 강제적으로 재단된다. <두개의 다른 기관들이 서로 유사해도 반드시 그 사이에 진화론적 연관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로 상이한 요소들로 구성된 단일한 일련의 연속적 결과들을 연결시키면서 '진화론'에 빠져서는 안된다. … 새디즘과 매저키즘이 같은 기원을 가지며 동시에 병존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유추에 근거할 뿐이다. 46>


Posted by huun

차이와 차이학은 언제나 기원의 다양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하나의 존재에서조차도 그렇다. 이런 이유로 차이와 차이학을 위해서는 부지런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마조흐의 문학과 사드의 문학의 경우 많은 부분에서 서로 유사한 특징과 본질들을 공유한다. 이들 모두에게 문학은 <뒤틀린 거울로 자연과 세계를 반사하는 37∼38> 기능을 하며, 역사적 현실 속에서 구성된 모든 전통과 제도는 이들에게 부정과 파괴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역사적 시간은 언제나 혁명적 사태들에 와서야 끝이 난다 - 사드의 경우 1789년 프랑스 혁명, 마조흐의 경우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혁명. 또한 이들에게 문학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잠재된 폭력과 극단적 위반의 양태들을 발견하거나 되 비추는 장치이다. 아울러 이 두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쾌감을 도출하는 두 가지 방식에는 상반적이고 대칭적인 유사함을 볼 수 있다. 폭력과 악행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쾌감과 그것들을 감내 해가며 얻어지는 쾌감간의 미묘한 관계는 경험적 사실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도출할 수 있는 도식이다. 이 두 변태성은 서로 만나기도 하며, 혹은 서로 보완적 관계를 갖는다고. 실제로 마조흐와 사드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도식을 입증해 줄만한 풍부한 예들이 나온다. 사드의 주인공들의 난폭한 행위들은 결국 매저키즘적인 방향전환을 하기도 하며, 마조흐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새디즘적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38∼39참조).

이 두 변태성은 서로 만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의 개념은 작가들뿐 아니라 정신분석 의사들에게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새도-매저키즘적 실체를 프로이드가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크레프트 에빙(Crafft-Ebing)이나 엘리스(Havelock Ellis) 그리고 페게(Fere')의 글들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38> 그러나 이러한 공분모를 통해 이 두 작가를 연결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들이 연결되어 상반성이나 동일성으로 묶이기 위해서는 특별히 요구되는 관점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저항문학의 역사에서 드러난 두 작가의 삶의 형태 등과 같은 특정한 관점에 의해서만 잠시 연결될 뿐이다. 두 실체간의 보다 본질적인 파악을 위해서는 각각의 실체가 안고 있는 그들만의 기원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으며, 이들의 상반적 연결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요구된다. 두 변태성과 두 작가들은 차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이라는 실체를 통해 두 변태성을 정의할 경우, 불가피하게 이 둘을 연결 지을 고리를 필요로 한다. 사실 프로이드나 여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의된 새도-매저키즘은 변태성의 과정을 속죄나 양심 혹은 죄의식이라는 윤리적 관점에서 마련된 틀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쾌락과 죄의식의 상호 메카니즘을 통해 변태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쾌락에 대한 처벌의 과정을 통해 이 죄의식을 드러낸다. 새디즘의 악행은 곧바로 죄의식을 통해 매저키즘으로 변형되고, 매저키즘의 죄의식의 해소는 또다시 새디즘의 악행으로 변형된다는 생각이 새도-매저키즘적 실체에서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서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 연결되거나 동일한 하나의 실체에서 드러나는 상이한 측면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한 인물로부터 두 가지 변태성이 모두 존재하거나, 서로 다른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상호 보완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 이러한 추측은 죄의식과 처벌이라는 관념의 틀 안에서만 가능해 지는 생각이며, 따라서 이것은 두 독립된 실체를 하나의 관념적 틀 속으로 환원한 경우이다. 사실 이 두 변태성은 절대로 죄의식과 처벌이라는 동기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들의 도착은, 삶이 그렇듯이, 그렇게 고상한 유희가 아니다. 두 변태성은 오히려 악행과 쾌락을 통해 구성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둘은 서로 목적과 방식, 심지어는 악행의 동기조차도 다르며, 이 둘은 독립적인 기원을 각각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매저키즘의 마지막에서 볼 수 있는 새디즘의 경향은, 처벌의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수행된 죄의식의 해소가 새디스틱한 악행을 허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서 금지된 악행의 쾌감을 인가받기 위해 매저키스트는 처벌의 고통을 예비적으로 스스로 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쾌감을 위해 (예비적으로)처벌을 원하는 것이지, 쾌락에 대한 죄의식을 속죄하기 위해 처벌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처벌과 고통이 수행되고 나면, 처벌과 고통들이 금지했던 악의 실행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39> 또한 새디즘의 종국에서 나타나는 매저키즘 역시 죄의식과 속죄라는 메카니즘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새디스트는 자신의 악행에 대한 죄의식과 속죄로서 마지막에 매저키즘적 고통을 감내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악행을 스스로 맛봄으로써 자신의 악이 얼마나 완벽하고 성공적이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디스틱한 행위의 절정이며, 자신의 영광스러운 불명예를 인가해 주는 대관식이다. 새디스트는 자신이 행했던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받는 고통은 궁극적인 쾌락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죄의식이나 속죄의 필요성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양도 불가능한 힘을 확인 시켜주거나 절대적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39> 새디스트는 악행을 되돌려 받으면서 오히려 고통과 모욕과 치욕을 즐기고 있다. 따라서 매저키즘에서 나타나는 새디즘과 새디즘에서 나타나는 매저키즘은 죄의식과 속죄를 통과하면서 발생하는 상반적인 변태성으로의 변형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의 변태성을 극대화하는 쾌락의 절정인 것이다.

매저키즘은 새디즘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쾌락을, 새디즘은 매저키즘이 아니라 새디즘적 쾌락을 통해 자신의 변태성을 구성한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계열을 보다 공고하게 한다. 따라서 새디즘을 매저키즘으로, 매저키즘을 새디즘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각각의 경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역설적 산물들로서, 매저키즘의 유머러스한 결과로 나타난 새디즘이며, 새디즘의 아이러니적 결과로 나타난 일종의 매저키즘인 것이다. 39∼40>(주1) 매저키스트는 속죄(보상)로써 새디스트로 변하며, 새디스트는 속죄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매저키즘으로 변한다. 그러나 매저키즘의 경우 속죄의 기능은 악행의 쾌감을 부정하기 보다는 쾌감으로 도달키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셈이다. 따라서 두 변태성의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속죄와 처벌의 매카니즘을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매저키스트가 보여주는 새디즘은 새디스트의 새디즘과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새디스트가 보여주는 매저키즘은 매저키스트의 매저키즘과 다르다. 이런 이유로 매저키스트와 새디스트는 또한 서로 상보적일 수 없다. 사실 고통을 주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고, 고통을 받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점은 이들이 상호보완적이라는 주장에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이들은 서로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저키스트가 새디스트에게 때려 달라고 요구한다면, 새디스트는 거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새디스트는 고통을 쾌락으로 즐기는 피해자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고통을 즐긴다면, 새디스트의 입장이 난처해짐과 동시에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통해 쾌감을 도출하는 새디스트로서는 자신의 목적과는 다른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지는 매저키스트의 경우에서도 같다. 매저키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교육과 설득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새디스트를 교육하고 설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교육과 설득을 통해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목적에 맞는 하나의 매저키즘적 본성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매저키즘에서 가학을 하는 여성의 역할은 새디즘적 자아의 발현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자아의 한 요소로 남아있는 일이다. <물론 여성 고문자에게서 새디스트적 성향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 그러나 그 성향들의 역할은 결코 직접적이거나 진정한 의미로서가 아니라, 다만 그 이전의 (매저키즘적)상황들과 연관되는 한에서만 중요해 진다. 41>

가학하는 여성의 새디스틱한 면은 결코 본질적인 요소로 기능하지 않고 부수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따라서 마조흐가 새디즘의 성향을 가진 여성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새디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매저키스트를 가학하는 여성이 매저키스트라는 것은 더욱 아니다. <매저키즘에서 가학하는 여성은 결코 새디스트가 될 수 없다. 그 여성은 매저키즘적 상황의 요소로 기능하며, 그 일부로서 매저키스트의 환상이 현실화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그녀가 매저키즘적 상황에 속하는 이유는 그 여성이 보여주는 '새디즘'이 진짜 새디스트에게서 발견되는 새디즘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녀는 매저키즘의 반영 내지는 분신이다. 41> 이것은 새디즘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새디즘에서 고문을 당하는 여성은 매저키스트가 아니라 새디즘적 상황의 한 요소인 것이다. 두 변태성에는 쾌감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상반적인 모습을 띠는 어떠한 요소를 필요로 한다. 매저키즘에서는 새디즘이 아니라 새디즘적 가학을, 그리고 새디즘에서는 매저키즘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고통을.

존재들의 상호보완적 관계나 새도-매저키즘과 같은 동일한 실체의 두 양면적 결합은 존재들을 결코 차이화하지 못한다. 존재들이 진정으로 결합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존재들은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고문이나 학대가 피해자로 하여금 고통을 제공할 수 없거나, 고통을 통해 쾌감을 제공해 줄 고문자가 고통받는 주체의 목적과 상이한 가학을 행할 때, 이 둘은 서로 만날 수 없으며 양립될 수 없는 관계에 돌입한다. 이들은 모순적이지도 않으며, 갈등하지도 않으며, 목적이 다르며, 심지어 만날 수도 없는 것이다. 존재론적 차이의 이종구조(heterogeniety)내에서는 어떠한 기획도 - 매저키스트의 기획 혹은 새디스트의 기획 - 순조롭지 않다. 만일 새디스트와 피해자 여성이 새디즘적 상황을 연출하거나, 매저키스트와 가해자 여성이 매저키즘적 상황을 재연한다면, 이 여성들은 결코 새디스트나 매저키스트에 대해 존재론적 차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새디즘이나 매저키즘 내에 용해된 것이다. 결합과 종합과 통합의 원리는 존재들을 환원하고 용해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새도-매저키즘의 메카니즘은 새디즘 혹은 매저키즘을 하나의 실체로 환원하거나 녹여버린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매저키즘은 언제나 새디즘의 부수적인 하나의 결과나 효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그 고유한 세계에서 분리하여 추상적인 실체로만 다루게 된다면 혼동이 발생 … 일단 그들을 둘러싼 고유의 환경에서 분리하여 살과 뼈를 제거하고 나면 서로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42> 베르그송의 어조로 말하자면, 새도-매저키즘의 개념은 매저키즘과 새디즘에게 너무도 헐렁한 옷인 셈이다. 따라서 서로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두 변태성은 새도-매저키즘이라는 헐렁한 옷을 입혀놓으면 하나도 다르지 않은 실체들이 된다.

변태성의 과정에서 변태성의 주체와 요소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언급한 두 변태성 내에서 하나의 요소로 기능하는 박해자 여성과 피해자 여성의 본질은 각각의 변태성 과정에서 주체로 기능하지 못한다. 매저키즘과 새디즘에서 주체는 매저키스트이며 새디스트이다. 따라서 이 주체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상반된 다른 변태성의 주체가 아니다. 하나의 상황에 둘 이상의 주체가 양립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매저키즘이나 새디즘과 같은 변태성의 상황 내에서 모순적 갈등은 벌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저키즘의 주체는 매저키스트이며, 박해자 여성은 매저키즘적 행위가 요구하는 특정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새디스트의 피해자가 새디스트이며, 매저키즘의 박해자 여성이 진정으로 새디스트이거나 새디스트를 가장하고 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42>

정확히 말해, 매저키즘에서 가학하는 여성이 보여주는 새디스틱한 면은 매저키즘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녀는 매저키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저키스트가 원하는 능동적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냉혹하게 함으로써 매저키즘적 상황을 벗어나려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완다가 보여주는 모습들 속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녀는 매저키스트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새디스틱한 면을 보여주지만, 이는 매저키즘적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하나의 아이러니이지 결코 새디스틱한 성향을 통해 쾌감을 즐기는 행위가 아니다. <변태성의 각 주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상반되는 변태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같은 변태성을 가진 사람의 어떤 특정한 '요소'인 것이다. … 매저키즘적 상황의 박해자 여성은 진짜 새디스트도 가짜 새디스트도 아닌 다른 어떤 경우 … 근본적으로 그녀는 매저키즘에 속하지만, 주체가 아니며, 매저키즘의 상황하에서만 '고통을 부과하는' 요소를 구현 … 마조흐와 그 주인공은 계속해서 특이하고 희소성을 가진 여성적 '본성'을 찾아 헤맨다. 42∼43>(주2)

(주1) 매저키즘과 새디즘이 각각 유머와 아이러니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은 뒤에서 계속 다룰 것이다. 또한 이 두 사유방식은 초자아와 제도에 대한 저항의 특수한 방식들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특수한 방식의 운용을 통해 매저키즘과 새디즘은 겉보기에 상반적인 변태성으로 변형되는 효과를 보이는 것이다.

(주2) 매저키즘적 주체가 현실적 상황이나 이차적 자연을 거부하고 부인함으로써 물신 혹은 부분적 대상과 이차적 자연을 선택하고 타당성을 따지는 사법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은 지적한 바 있다. 매저키스트는 박해자 여성에게 매저키즘적 상황이 요구하는 하나의 역할과 요소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본질을 찾아 요소들을 횡단한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