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몇 해동안 한 예술가와 친분을 가져왔다. 그들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서로의 교제와 우정에 만족해 했다. 그들은 간혹 자신들의 작품을 주고 받았다. 특별한 날의 선물처럼, 그것들을 받아들고 좋아했다. K는 예술가의 그림에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그 작품에 대한 찬사와 비평을 헌사하였다. 읽혀지는 의미라든가, 형식의 새로움이라든가, 느껴지는 분위기 등, . . . 자신이 알고 있는 희귀한 단어들을 꿰어가면서, 그의 그림들을 단어들로 다시 세우고는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작품들의 의미가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곧 친구의 작품을 정당화하는 일이라고 뿌듯해했다. 그리고 그의 정당화는 대부분이 긍정적인 것이었다. . . .
<문예 노트>
expressive_mystic.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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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은 설명되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단지 느끼라는 말은 광의적이고 얼핏 그럴듯 하게 들리지만
설명되지 않는 작품은 우연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개인의 느낌을 표현했다 하더라도 표현 할 당시의 생각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시에 대해 칭찬의 단계를 넘어선 평론을 썼다가
호되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몇 개월 먼저 문단에 나온 사람이죠.ㅎㅎㅎ
감히 너 따위가 내 시를 비평하느냐는...
그 상처가 아직도 제게 있습니다.
인간이 되지 않고는 예술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사생활이 엉망인 사람이 숭고한 사랑의 시를 쓴다면 그건
허구에 불과합니다. 인격적으로 비열하고 추잡한 사람이
공자 운운하며 교훈적인 칼럼을 썼다면 그는 위선자이고
앵무새와 다름 아니겠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6/05/15 09:13
대단히 교훈적인 말씀을 하시는군요.^^
"칭찬의 단계를 넘어선 평론" . . . 멋진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칭찬의 단계를 넘어선 인간관계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 그런 인간관계는 단순한 도덕이나 교훈적인 선행 혹은 듣기 좋은 덕담 따위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6/05/17 20:35
훌륭한 사람, 공자같은 사람이 훌륭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글을 쓰려는 노력이 바로 훌륭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훌륭한 글은 반드시 그 글을 쓴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고,
글의 완성 자체가 이미 인격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구요 . . .
그러니, 작가들에 대해 논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 작가의 글이지, 그의 사생활이나 인격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하구요. . . 글을 그렇게 쉽게 속일수 있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 . .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우리가 쓰는 글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 . . 그런 생각이 듭니다 . . . 2006/05/17 20:46
어지간한 맷집이 아니고는 간단한 자기생각도 다른사람에게 표현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요. 인격/사생활..상당히 어려운 말인것같습니다. 김기덕감독의 영화에 대한 비호감비평을 읽을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공감을 합니다만 감독은 작품비평과는 동떨어진 본인에 대한 인신공격이라고 느끼는 모양이더군요. 작품으로 인해 작가가 비난받을 수 있는 기준점은 타인의 인권에 대한 작가의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사생활 엉망여부는 누가 판단하는 건가요? 단적인 예를 들면 김기덕감독의 사생활에 대해 저는 관심없습니다.다만 영화속에 드러나는 여성비하적 관점에 대해서는 작품에 대한 판단을 넘어서 감독에 대한 판단으로까지 이어지더군요... 2006/05/18 00:14
어려운 일입니다. 작가나 감독의 사회관이나 역사관과 그 사람의 예술의 관계를 결정하는일이 말이죠..하지만, 최소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작가와 개인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가령, 서정주 같은 인물의 사회인으로서의 정치적 친일행각 때문에, 그의 시를 송두리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 그의 시에는 분명히 그러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이죠..아무리 훌륭한 예술가라고 해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한계는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예술가들을 칭송하는 것은, 그의 사회적 도덕적 행위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의 예술적 표현 속에서, 개인의 현실적 한계들을 뛰어넘는 (시적, 예술적)자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6/05/20 07:47
셰익스피어는 상당한 바람둥이였다고 하는데도, 인류는 그를 위대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셰익스피어 개인으로서의 위대함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위대함이겠죠. 시대와 역사와 사회를 뛰어넘어,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 우리들을 데려다주고, 보다 완성된 존재의 가능성을 제시해주기 때문이겠죠. 개인이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이해관계의 소산이기 때문에, 살아가려면 불가피하게 겪어야할 이데올로기적 한계가 있습니다. 또 거기서 대부분의 인생의 고통이 나오는 거구요. 인간이라는게 그렇게 일관된 존재가 아니잖습니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면, 사는 것도 아름다워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게 문제죠.^^ 하지만,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예술적 자아는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서 우리 자신을 생각하게 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로 데려다주는 것이죠.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는것일 테구요..
어쨌든, 두부자르듯이 뚝 잘라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식으로 가를 수는 없겠지만 . . 그 둘은 확실히 구별을 해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둘을 뒤섞으면 혼란이 올 것 같습니다.
또 그러려면 예술가의 개별적인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안되겠죠, 사회적 행각들에 대한 고증 만큼이나 말이죠...그런 의미에서, 김기덕 감독 영화의 경우는 좀 더 얘기를 해 보아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대부분 보긴 했지만, 아직 분석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여성을 비하하는 면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드네요. 어떤 점이 여성비하적인 면이 있는 것인지 . . . 2006/05/20 07:52
화이트헤드의 모든 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란 말을 베르그송의 직관에서도 볼 수 있는 것 같군요. 개인의 절대화는 우리가 오랜 세월 지속시켜왔던 신의 대한 태도와도 상응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어찌보면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무지와 별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언제나 인간이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향하고 세계를 향하기에 존재의 확실성을 신에 의존하고 또 그러한 것이 중세의 세월속에 탄생한 ego의 그림자에 의탁하기도 하지만, 개인이든 신이든 다 허상일 수 밖에 없는 인간 개체의 한계를 자각한다면 데카르트의 에고도 플라톤의 이데아도 결국은 무지의 다른 표현일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철학의 탄생이 다름아닌 신화에서 이성으로의 변화였다면 개인의 신화이든 이성의 신화이든 그러한 모호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술과 문학을 막론하고 자기규정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네요. 2006/06/01 13:39
직관의 방법에 대해서는 베르그송과 플라톤이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사물을 나누고 분류하는 방식도 그렇고, 순수함에 대한 열정도 그렇고, . . 그 두 사람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흔히들 언급을 하지요 . . 하지만, 그 두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실재에 대한 관점인데요, 플라톤에게서 실재는 초월적 대상이었죠..반면에 베르그송은 삶에 내재적이었죠 . .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의 직관은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방향이 달랐던 거죠..하나는 직관을 통해 삶의 초월적 대상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 삶으로 가고, . . <모든 철학이 플라톤철학의 주석>이라는 말도, 바로 대부분의 철학이 그 실재를 초월적인 것으로 상정한 데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네요 . .
가령, 칸트라든지, 셀링이라든지, 헤겔이라든지, . . .모두가 직관의 대상을 초월적 실재로 보았기 때문에, 직관의 불가능성 혹은 신비주의적 측면에 대해 말했던 사람들이죠. . 그래서 그 말이 쓰여진 맥락은 플라톤이 대단하니까 칭찬해야 한다고 한 말이라기 보다는, 관념철학의 계보를 말하기 위해 쓴 말이었지 않나싶습니다. . 2006/06/05 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