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타인 앞에 또는 밝은 곳에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것은 자신의 위상을 제한(혹은 부정)하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할 수가 있다.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자신이 자아낼 수 있을 모든 신비한 가능성의 힘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던 권력에 있어서의 “가시성(visibilité)의 역설”이다. 앙시엥 레짐(ancient regime)의 전제권력은 보여주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은 권력이다. 권력자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과장해서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우쭐해 하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을 하나의 볼거리(spectacle)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호화의복, 궁중예식, 왕의거둥, 개선행렬, 공개처형 등, 재화의 엄청난 소비와 지출로 이루어지는 이 모든 비효율적 스펙터클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이로움, 존경심, 또는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권력을 정복자로서 가시화한다. 대로의 밝은 빛 속에서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거나 걸어가는 권력자는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음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권력자의 이러한 가시성이 증대할수록 피권력자들은 어둠 속에 숨을 수가 있었다. 오히려 드러난 권력의 실체를 볼 수가 있어, 스펙타클의 애초의 의도와는 반대로 권력자의 무한한 권능에 제한을 가하는 결과가 일어난다. 권력자 자신이 스스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한정된 조건에 방치됨으로써, 혹은 그 자신의 몸뚱어리가 하나의 사물로서 현시됨으로써, 무한의 절대성을 암시해야 할 권력은 오히려 상대적이고 제한적인 힘으로 하강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잠재적 “권능(Power, Macht)”과 현실적 “물력(force, Gewalt)”의 역학관계—카네티(Elias Canetti)가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에서 구분했던—가 그렇듯이, 힘이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 되어갈수록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넓어지게 된다. 아니 범위가 넓은 힘일수록 비감각적이고 비실제적이다. 가까이에 있는 힘일수록 그 지속력은 짧다. 먼 곳에서 가능성을 암시하는 힘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성이란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 속에서 현실화된다. 뚜렷이 보이거나, 가까이에 있거나, 언제든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거나, 지시 가능하거나, 표현 가능한 것은 두려움을 갖게 하지 못한다. 단지 이미 사태의 종결이나 다름 없는 주체들의 치열한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들만이 현실을 설명해줄 뿐이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존재만이 만인을 지배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스피노자(Baruch Spinoza)나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Comte de Sade)가 생각했던 “자연” 혹은 “신”의 모습을 닮아있다. 상상 속에서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암시로 불안은 존재를 잠식한다. 불안 그 자체가 존재인 것이다. 푸코는 현대적 규율사회의 가시성의 역전—시선 주체의 전도 혹은 가시성의 교환—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불안의 잠식에 관한 문제였다. 더 이상 만인이 권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면적 타자로서의 권력이 만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권력은 언제나 현시한다. 언제 어디서든 머릿속에 떠오르고 나타나 주시하는 절대적 존재, 바로 이 가시성의 편재는 앞이 아니라 뒤에 임하는 것, 다시 말해 실제가 아니라 효과로서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해당되는 글 11건
- 2011/10/18 가시성의 역설 (2)
- 2006/11/07 추상관념(abstract concepts)과 공통개념(common notions)
- 2006/11/04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적합(convenance)과 부적합(disconvenance)
-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죽음에 대하여 (12)
-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신이 아담에게 금지한 열매의 의미 (6)
-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현실을 이해하는 두 길
-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선/악을 좋음/나쁨으로 바꾸면 무엇이 달라질까? (8)
-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 (3)
-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의식에 대하여 (6)
- 2006/10/26 Spinoza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개념 정리: 윤곽
- 2006/10/25 글을 쓰는 모든이들에게!
들뢰즈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논제는 추상관념(abstract concepts)과 공통개념(common notions)간의 본성적 차이라고 지적한다(Deleuze 44). 이 둘의 차이는 존재의 분류방식의 차이 뿐 아니라 신체와 관념 그리고 관념들간에 서로 결합하고 해체되는 양상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차이는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 공통성을 가지게되는가의 이론으로 확장된다.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는 심층적 내용은 초월성과 내재성이다.

추상관념은 존재에 대한 초월적 이해이며, 존재를 초월적으로 구성한다. 다시 말해 추상관념은 신체들간의 관계에 조응하는 관념이 아니라, 관념들간의 관계에 조응하는 일치된 관념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 내재적 관념이 아니라 존재로부터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신체들의 결합과 해체의 관계가 짜놓은 양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신체 외재적인 관념은 신체들의 공통성이 아니라 정신들의 일치에 의존하기 때문에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추상적인 관념은 상상력을 자극케 하거나 상상으로 존재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신체로부터 독립하여 그것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관념은 과도한 촉발능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 양태와는 관계없이 상상에 의존하는 촉발은, 존재의 구성 부분으로서 관계를 이루는 다른 신체들을 사유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오로지 사안이 되는 대상의 내적 구조나 단일성 혹은 유기적 체계만을 파악한다. 이런 이유에서 추상적 관념은 신체들간의 관계로부터 발생한 결과(효과)들을 우연적 유사성으로 대체하고 자의적인 유추들로 해석하여 텅 빈 허구들을 만들어낸다. 추상관념은 허구에 의존하며, 또한 허구는 추상관념을 필요로 한다. 추상과 허구는 자의적인 연상에 의해 만들어진 허위적 이미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둘은 서로 맞닿아 있다.
또한 추상관념은 일반적일 수 없다. 그것이 허위적 이미지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무엇 보다도 일반성은 구체적인 존재양태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관념이 일반적인 것은, 존재가 보다 많은 신체들간의 관계에 적합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일치된 관념 아래 모든 존재가 포함되거나 유사하기 때문이 아니다. 일반적 개념은 신체들에 외재적인 상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신체들간의 내재적 관계를 통해 발생한다. 일반성은 의식이 알고 있는 공통성이 아니라, 신체가 반응하는 공통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관념은 일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이지도 않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 주의는 사물들이 소유하고 있는 외재적인 특징이나 특성 혹은 기능적 구조를 통해서가 아니라(예로 강, 종, 속, 류 등에 따른 생물학적 개체 분류들), 변용능력이나 반응능력 그리고 자극능력에 따라 사물들을 분류한다. 우선 변용능력에 따라 존재들이 분류되기 위해서는 이들 각자들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능력들이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어떠한 상사성(similarity)을 갖는지 전제되어야 한다: 이들은 어떻게 서로간에 결합하고 해체되는가? 존재들은 관념의 일치가 아니라, 신체들의 능력의 공통성에 따라 서로간에 결합하거나 해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종, 속에 따른 분류는 자연 안의 모든 개체들을 초월적 규준 아래 배치한다. 초월적 규준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며, 존재하는 것들의 표면적 유사함(likeness)으로 유추된 하나의 모델이다. 개체들은 이 모델과 적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해 판별된다. 그러다 보니 개체들은 정상과 비정상, 완전함과 불완전함과 같은 비교에 의해 갈라진다.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개념은 사유의 양태이지 존재의 양태가 아니다. 적합한 관계의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특정한 하나의 모델에 기초한 닮음과 유사성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모델을 전제하지 않고 오로지 관계하는 것들간의 공통성에 기초한 상사적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째서 스피노자의 분류가, 즉 촉발능력들에 따른 분류가 동일한 규준으로서 혹은 추상적 허구로서 모델을 전제하지 않고, 능력들의 법칙에 따라 재배열되는지를 알 수가 있다.
한편 스피노자 주의는 사물을 수(number)에 의해 계량하지 않는다. 수는 실제하고 있는 존재의 양태들에 적용될 경우 추상적 관념의 매개가 된다. 그래서 수는 "상상의 보조자"(46)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수는 실체를 표현하지 못한다. 실체의 무한함은 속성들의 다수성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수는 그 자체 스스로를 현시할 수 없다. 수는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만 현시될 뿐이다. 수는 속성들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속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비에 의해서만 파악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체 자기 자신의 속성들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수는 구체적일 수가 없으며 추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는 상상을 불러들인다. 나아가 상상으로 매개된 자연은 허위적 이미지를 남긴다. "자연을 구체적으로 보면 어디에서든 무한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에 [자연을 이루는] 부분들의 수를 추리하는 방식으로는 무한함을 발견할 수 없다. 2, 3, 4. . .를 통하지 않고도 즉각적으로[직관적으로] 무한한 속성들이 긍정될 수 있는 실체도, 무한히 많은 부분들을 가지는 존재 양태도, [수를 통해서는] 무한하지 않다"(46). 존재의 구체적 속성들은 무한한 실존적 긍정성을 가지지만, 이들이 특정한 상상에 의해 즉 허위적 이미지에 의해 재현되고 수적(양적)으로 파악될 때('이것은 . . . 종류에 속한다', 혹은 '이것은 . . . 구성부분들로 이루어졌다' 등), 무한함은 제한되어 양적으로 고착될 것이다. 실체는 수적으로 계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속성들의 표현에 의해 현시 된다. 이런 의미에서 무한성은 수적인 다수성에 의해서는 나올 수가 없다. 수는 추상적 관념이므로, 실체와 양태를 수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로지 추상적으로만 그리고 상상으로만 구별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내재적으로 결정되는 존재의 의미를 초월적 가치로 확립하는데에 있다. 의미에 대한 초월적 이해는 존재의 발생적 원인을 배제하고, 존재들의 외연적 차이만을 수용함으로써, 초월적으로 상정된 개념(universal idea)에 모든 사물들을 종렬시킨다. 여기서 존재와 무에 대한 절대적 대립이 파생된다. 초월적으로 결정된 개념으로부터 이제 세계는 다음과 같은 절대적 대립 안에서 현시된다: "존재/비존재, 통일성/다양성, 진리/허위, 선/악, 질서/무질서, 미/추, 완전성/불완전성 . . . "(47). 사물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개념이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 4부, 서문>에 잘 나타나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어떤 사물이나 생산물에 대해 완전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완전함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또한 그 사물의 창조주의 의도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에 대해 완전한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며(우리는 자연의 완전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창조주의 의도나 목적도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이성의 개념적 활동에 의해(칸트의 경우) 완전함의 모델로서 일반적 개념을 설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성과 불완전성은 존재의 양태가 아니라 하나의 사유양태인 것이다: "우리는 다만 내재적 의미만을 갖는 것을 초월적인 가치로 확립하고, 상대적인 대립에 불과한 것을 절대적인 대립으로서 규정한다"(47).
한편으로 스피노자의 추상관념에 대한 논의는 특정한 존재에 정향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다시 말해 추상관념과 추상적 존재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도형들(원, 구 등)이 이성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단순히 추상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들을 통해 공통개념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설명할 수 있게된다. 대체로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적 존재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원인(발생적 원인)을 알지 못한다. 추상적 개념들은 이성의 도약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지어는 경험적 종합의 경우에도 해당된다(경험주의적 귀납의 오류): "이성적 존재들은 참된 원인에 대한 무지를 함축한다"(47). 그러나 우리는 특정한 기하학적 존재들에 대해 우리에게 적합한 것으로서 이러저러한 정의와 원인들을 부여할 수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한 도형에 특수한 정의(예로, 중앙의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위치하는 점들의 자취로서의 원)를 발생적 정의로(한 쪽은 고정되고 다른 한 쪽은 움직이는 모든 직선에 의해 그려지는 도형으로서의 원 . . . 혹은 반원의 회전으로서 그려지는 도형으로서의 구 . . .) 대체할 수 있다"(47). 이 원인의 규정은 특정한 형태로 우리에게 부여된 추상적 존재에 대해, 초월적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으로서의 기하학적 존재를 파악하는 우리 자신의 이러저러한 양태들의 집합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단순히 주어진 절차에 의해 하나의 도형을 판별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에게 조건으로 주어진 특정한 존재(대상)를 우리 자신에 적합한 방식에 따라 이해하는 과정이며, 나아가 우리 자신의 이해능력을 표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물론 기하학적 존재들은 여전히 허구적이다. 신체를 통해 경험하고 지각하는 (자연 안의)어떠한 사물들도 기하학적 존재들과 같이 구성되지 않으며, 또 우리가 그것들에 부여하는 이러저러한 원인들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발생하지도 않는다. 기하학적 존재들(예로, 점, 선, 원 . . . 등)은 자연의 운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추상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사유의 결과로서 개념적 양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을 추상관념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추상관념은 어떠한 존재와 관계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유양태와 관계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과 신체가 서로 평행한 관계에 놓여있다는 스피노자의 심신 평행론을 곧바로 진리이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 논의는, 이 둘간에 있을 수 있는 관계를 인과적으로 연결하고, 어느 한쪽에 의한 다른 한쪽의 지배와 우월성을 밝혀 냄으로써 궁극적인 기원을 찾고, 나아가 진리나 의미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두 계열간에는 어떠한 실질적 인과성도 없으며, 지배와 우월성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의미가 초월적으로가 아니라 (사유)내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의미는 내재적으로 결정된다. 의미의 내재성은 최소한 두 가지의 결과를 발생케 한다. 1. 절대적 의미의 부정. 왜냐하면 의미는 더 이상 초월적 원인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의미는 생산하고 생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절대성이 부정되어 초월적 참조대상에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우리는 원인을 내재적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내부에 이미 그 해답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존재는 의미의 원인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내재적 원인. 따라서 의미는 능동적 이해능력과 행위능력을 예증한다. 대상적 진리는 실천적이고 자율적인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원인을 자의적으로 구성한다(fingo ad libitum causam) . . . 관념들이 참인 것은 . . . 이 관념들의 진리가 대상에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의 자율적 능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 . . 기하학적 존재에 관한 허구적 원인은, 신의 능력(선이나 반원을 결정하는 신)에 도달하기 위한 발판으로서, 우리의 이해능력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47∼48).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기획했던 기하학적 방식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법칙들과 원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만을 의식할 뿐이다. 노예이며, 불완전한 존재이며, 불행한 자들로서 우리 자신! 그러나 (추상적 허구이긴 하지만) 다시 이 결과들에 대한 원인을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할 때 생산적으로 된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진리에 관한 어떠한 설명이나 재현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의 사상은 실천에 가장 가깝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하학적 개념들은, 그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추상적인 것을 쫓아내고, 그 자신들조차도 내몰아 버리는 허구이다. 결국 이들은 추상관념보다는 공통개념에 더 가깝다"(48).
추상으로서의 기하학적 존재로부터 공통개념이 도출됨으로써, 이성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결합관계 아래에서 구성된다. 공통개념은 존재에 관한 관념들간의 공통성이 아니라, 관계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신체들 각각의 자발적 능력에 따라, 그들 사이에 공통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다: 공통개념은 정신의 공통성이 아니라, 신체들간에 공통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다. 따라서 공통개념은 신체들간에 발생하는 내적인 합의와 이들 서로간의 촉발에 의해 형성된 결합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공통개념 아래 관계를 맺는 신체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과 이해와 촉발의 양상에 의존하게 된다. 특정한 관계에 속하는 부분으로서의 신체들이, 제 각각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산되는 능력에 의해, 자신이 속한 관계를 특징짓기 때문에, 공통개념은 그 자체 내재적 구도에서만 형성될 것이다. 원인의 내재성은 공통개념의 형식적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공통개념은 적합한 관념들이 결합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된다. 예로, 기하학적 존재에 관한 공통개념에서 보았듯이, 기하학적 도형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 우리와 적합한 결합관계를 갖는 원인들을 재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개념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내재적 원인은 관계에 참여하는 신체들의 능동을 유발한다. 여기에는 우선적으로 결합의 원인이 신체들간의 관계 내에서뿐만 아니라 신체 자체에 준거하는 데에 이유가 있다. 스피노자는 내재적 원인을 맨 처음으로 정의함으로써『윤리학』을 시작한다: "자기 원인에 대해 나는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혹은 본성은 존재하는 것과 분리해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Ethics, I, def. 1). 전통적 관점에서는, 원인과 결과를 분리함으로써, 결과에 대한 원인과 원인의 파생적 의미로서의 결과를 구별했다. 이런 관점에서 유효적 인과성(efficient causality)은 초월적으로 구성된다: 모든 결과는 자기 자신과 다른 외적인 원인을 갖는다. 따라서 이 둘 간에는 근본적으로 공통하는 것이 없다. 신은 만물의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 신과 양태는 서로 동일하지 않으며, 어떠한 점에서도 서로 공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로지 신만이 능동적이며 자기 자신의 원인이다. 그렇지만 스피노자의 저 정의는 바로 이러한 관점을 전복시킨다. 인과관계를 내재성의 평면으로 끌어내림으로써, 그리고 원인을 더 이상 그 결과와 분리시키지 않음으로써, 신은 그 자신의 결과(양태)를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원인을 발견한다: "신은 자기 자신의 원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의 원인이다(Ethics I, 25, schol.). 그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산한다"(Deleuze 53).(주1)
이렇게 원인의 내재성은 존재를 그것의 본질과 분리시키지 않음으로써, 관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를 능동적 양태로 전환한다. 스피노자는 이 관계를 속성(attributes)을 통해 설명한다. 신과 양태가 서로 분리되어 공통하는 것이 없지만, 어떤 점에서 속성은 이들이 공통하는 것이 있음을 보여준다. 양태들은 속성 안에서 생산되며, 원인은 속성을 통해 작용한다. 따라서 신은 그 결과로서 양태들과 동일한 속성들을 공유한다. 이 때에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고 양태의 본질들을 함축한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펼치고 양태를 감싸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속성은 지성의 산물이나 소산적 자연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각각의 속성은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Letter II, to Oldenburg). 현실적으로 이 속성들은 제 각각 차이가 난다. 어떠한 속성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는다"(Deleuze 51-52).
내재적 원인은 존재를 능동적 양태로 이끌며, 존재의 능동은 속성들 안에서 혹은 속성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능동적 양태들의 관계는 또한 능동적 결합을 구성한다. 이 때에 결합의 능동성은 각각의 존재들에 적합한 방식에 따라 작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있어 존재들의 결합이란 곧 자기 자신의 신체를 지속시키고 능력을 증가시키려는 노력, 즉 코나투스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는 자신이 감싸고 있는 무수한 질들을 잃지 않고 나아가 증가시키려는 노력으로, 자기 자신과 적합관 관계 속에서 다른 신체와 결합한다. 따라서 서로 관계 맺는 신체들 간에는 공통하는 어떤 것이 반드시 내재한다.
내재적 원인과 이로부터 도출되는 능동성, 그리고 서로 적합한 관계들이 구성되는 양상을 따라가 보면, 어째서 공통개념이 추상적이지 않고 보편적인가를 알게 된다. 추상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공통개념은 정신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신체들간에 공통하는 어떤 것을 표상하기 때문에 추상이 아니라 보편적 관념이다. 결합하는 관계에 참여하는 각각의 신체들의 본성적인 것을 유지하고 확장하고 결합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서 공통개념. "공통개념은 둘 혹은 더 많은 신체들의 결합의 표상이며 이 결합의 단일성이다. 그 의미는 수학적이기 보다는 생물학적이다; 즉 그것은 존재하고 있는 신체들간에 일치되거나 결합된 관계들을 표현한다. . . . 정신에 관계하는 공통성은 여기서 이차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공통개념이 정신에 관계할 때에는 그 정신에 관한 신체들이 이미 결합되고 결합의 단일성에 의해서만 촉발될 때이기 때문이다"(Deleuze 54-55). 우리는 흔히 사물들과 투쟁적 관계에 있거나 다른 신체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일 때 공통개념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단일성을 추구함으로써 모순적 관계에 놓인 다른 신체를 제압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 추상에 관계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공통개념이다. 니체가 그랬듯이 우리도 곧바로 신체가 하는 일들을 살펴보면, 신체들의 질서는 언제나 이미 서로간에 적합한 결합관계를 갖는 것을 보게 된다. 신체들은 모순적이거나 대립적 관계들로써 결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개념은 필연적으로 적합한 관념들이다. 스피노자가 브레이흔베르에게 악이 그 무엇도 아니라고 썼던 것은, 언제나 공통개념을 상정하는 적합한 결합관계들만을 갖는 신체를 하나의 모델로 복원시키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공통개념은 결합의 단일성을 표상하면서, 결합된 신체들 각각에 내재하며 동시에 관계들의 전체에 내재한다. 공통개념이 보편적인 이유는, 그것이 초월적으로 분리된 추상에 의해 강요된 관계를 표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결합된 신체들간의 자발적 친화력으로 구성된 관계를 표상하기 때문이다. 공통개념의 후면에는 언제나 존재의 긍정이 자리잡고 있다. 존재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며, 나아가 자신의 능력을 증식하는 것이다: 공통개념은 기쁜 관계를 표상 한다.
공통개념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가를 짚어 보면, 이성(Reason)과 관계를 맺는 우리 자신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를 알게 된다. 우선적으로 우리 자신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며, 다음으로 우리는 공통개념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성적 존재가 된다는 점이다. 공통개념의 적용과 그것의 형성은 그 과정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 우리는 공통개념을 보다 덜 일반적인 것들에 적용함으로써, 이들을 보다 큰 일반성 안으로 포섭한다. 다시 말해 공통개념의 적용은 개별적인 존재들을 전체화한다. 따라서 공통개념은 전체화를 도출하는 미리 결정된 개념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공통개념이 형성되는 과정은 이와는 반대이다. 우리의 신체의 질서에 부합하거나 일치하지 않는 다른 질서에 속하는 신체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슬픈 정념에 사로잡힌다. 이 경우에 우리는 절대로 신체들간에 촉발되는 공통성을 경험할 수가 없다. 슬픔은 공통개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가 우연적 발생에 의해 우리 신체의 질서에 적합한 다른 질서에 속하는 신체를 만나게 되면, 특정한 형태의 촉발을 통해 기쁜 정념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 정념을 발생케 하는 서로 다른 신체들 간의 공통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공통개념은 우연에 의한 발생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한 이때의 공통성은 신체들간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쁜 정념은 우리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속시키거나, 다른 신체들과의 조응에 따라 더욱 커다란 행위능력으로 증식시킨다. 우리의 이해능력과 행위능력을 증식시키는 것으로서 기쁜 정념은 공통개념을 불러들인다.(주2)
따라서 이제 이성이 두 가지 형식으로 각각의 단계를 거치는 것을 보게된다. 1) 기쁜 수동 촉발과 관련되는 이성: "좋은 만남들을, 즉 우리와 결합하고 우리에게 기쁜 정념들(이성과 적합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양태들과의 만남들을 선택하고 조직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이성"(Deleuze 55). 2) 능동 촉발과 관련되는 이성: "공통개념들에 대한 지각과 이해, 즉, 신체들의 결합이 구성되는 관계들에 대한 이해. 이로부터 우리는 다른 관계들을 추론하고, 이 이해에 기초하여 새로운 감정을 경험한다. 이때에 이 경험은 이번엔 능동적 감정들이다(이성에 의해 탄생된 감정)"(Deleuze 56). 『윤리학』2부에서는 공통개념이 논리적으로 적용되는 질서에 대해 규정했던 반면, 4부에 오게되면 공통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생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공통개념이 구성되는 과정은 감정들과 관련하여 이성이 어떻게 능동적으로 되는가, 그리고 이성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기쁜 감정을 반복할 수 있도록 하는가를 명시화하는 것이었다. 수순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첫 번째 공통개념은 촉발된 신체들의 결합이 우리를 슬픔이 아닌 기쁜 정념으로 이끄는 공통성의 표상이다. 이것은 나의 신체와 관계를 맺는 다른 하나의 신체와의 공통성이다. 따라서 이 공통개념은 최소한의 일반성에 머문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일반성은 새로운 기쁨의 감정을 도출한다. 기쁨은 반복을 가능케 하지만, 또한 반복은 능동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에 이 감정들은 수동적이고 우연적 발생에 의한 정념이 아니라, 신체들의 결합에 참여하여 이들의 능력을 증식시키는 능동적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최소한의 일반성으로서의 공통개념과 행위를 불러들이는 능동적 감정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커다란 일반성을 구성하도록 촉구한다. 심지어는 서로 결합하지도 일치하지도 않는 다른 신체와, 따라서 나로 하여금 슬픔에 사로잡히도록 대립하고 모순적인 신체들에서조차 공통성을 찾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이성은 최소한의 일반성에서 보다 더 큰 일반성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최대한의 일반성으로 나아간 공통개념으로부터 이번엔 또 다른 감정들이 도출된다. 이 감정들은 슬픔 뿐만 아니라 슬픔으로부터 출현한 정념들을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킨다.
들뢰즈는 공통개념 이론이 어째서 가치가 있는지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서, 특히 공통개념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즉 우리가 어떻게 적합한 관념을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Deleuze 56). 이로써 스피노자 주의는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성 개성론』이 기하학적 관념들로부터 적합한 출발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허구에 침잠했던 반면에, 공통개념 이론은 실제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에 관한 수학을 구성하면서, 기하학적 방법의 실천에 제동을 거는 모든 허구와 추상들을 제거했다. 공통개념들은 오로지 현존하는 양태들과 관계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것이다. 이들은 양태들로부터 어떠한 단일한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결코 허구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공통개념은 현존하는 양태들 혹은 개별적인 것들 간에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관계들의 구성을 표상한다. 기하학이 오로지 추상적 관계들을 포섭하는 반면에, 공통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를 그 자체로 이해하게 한다. 즉 살아있는 존재들 안에 필연적으로 구체화된 것들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변이들과 구체적 관계들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구체화된 존재들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통개념은 수학적이기 보다는 생물학적이다. 공통개념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자연 안의 모든 것들이 구성되는 단일성을 이해하게 해주며, 이 단일한 것들의 수많은 변이들의 양태를 이해하게 해주는 자연주의적 기하학을 형성한다"(Deleuze 57).
어떻게 우리에게 적합한 공통개념을 구성할 것인가? 나는 근본적으로 이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하는 것이 이론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또한 어떻게 기쁜 감정들을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통개념은 이론이 설명하고 재현해야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재현할 대상으로서 초월적 규범이 아니라, 구성해야할 내재적 규율이다. 내재적 규율은 초월적 토대에 의존하지 않는다. 슬픔은 토대를 잃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토대에 복종함으로써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추상관념은 무능력한 존재들의 구세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존재들의 무능력을 입증해주는 증거이다. 또한 추상관념으로 증명된 무능력은 존재로 하여금 한없는 슬픔에 사로잡히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슬픈 존재들은 자신들의 무능력을 치유해줄 지배자(초월적 신)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때의 지배자는 무능력한 존재들의 슬픔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공통개념 아래 결합하는 관계에 참여하는 모든 부분적 요소들은 능동적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참조해야할 토대를 잃은 존재들은, 오로지 관계들 속에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능력에 따라 적합성을 찾기 때문이다. 공통개념의 구성이 존재들의 능동을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능동적 존재는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원인을 내부에서 발견하는 존재는 능동적이다. 내재성은 능동을 도출하고, 능동은 내재성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만일에 능동적인 내재적 존재들이 결합하는 관계에 참여한다면, 그래서 이 관계 아래 공통하는 것을 각자들이 포함하고 있다면, 이 존재들은 최소한의 보편성을, 나아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보편성의 문제는 관념의 문제 이전에 신체들과 살아있는 양태들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때의 모든 신체들은 영원한 자연의 법칙 아래, 서로 자발적 친화력으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결합하는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윤리학』은 존재들의 행위에 관한 단순한 법칙들을 나열하고 증명한 도덕이 아니라 공통개념에 관한 연구이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치학이란 지배와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들의 힘의 관계에 관한 고찰이며, 역능(puissance)의 구체적 현실화에 관한 연구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을 "존재하는 것들의 내재적 양태들의 유형학"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Deleuze 23). 원인의 내재성, 존재의 능동, 그리고 능동적 기쁨으로서 지복(blessedness)의 보편성(추상적 보편성이 아닌)은 공통개념을 둘러싼 세 개의 축이다. 이 축들 주위에서 존재들은 자신들의 조건에 따라, 자신들의 본성을 잃지 않으며, 자신들의 능력을 증가시키고, 공통하는 기쁨들을 창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공통개념을 창조적 생산의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1) 그런데 신의 능동과 무한한 능력이 어떻게 존재들의 능동과 무한한 능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이를 형식논리학적으로 증명한다. 신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그의 능력은 자연 안의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신은 절대적 원인이다. 따라서 양태들의 모든 운동과 인과관계 속에서 매번 원인으로서 신이 개입되어야 한다. 양태들의 이행은 그 이행의 첫째 항에서부터 원인으로서의 신과 동일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은 멀리 있는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이행의 첫 번째 순간에서부터 도달되어야 한다. . . . 원인은 필연적으로 내재적이다"(Deleuze 54).
(주2) 스피노자에 따르면, 촉발은 이미지 촉발과 감정 촉발로 구분되는데, 이미지 촉발은 신체가 현존하고 있음을 이미지 혹은 관념으로 표상 한다. 따라서 이것은 신체의 특정한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에, 비록 이것이 이미지나 관념에 속하지만 여전히 신체와 관계하는 한에서이다. 반면에 감정 촉발은 존재하고 있는 신체의 특정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에 의해 발생한다. 따라서 감정들은 촉발된 이미지들의 이행과 상관 관계들 속에서 나온다.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가 혹은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가에 따라, 신체의 능력은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이때에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 혹은 행위능력의 증가를 기쁨과 사랑이라 하고,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 혹은 행위능력의 감소를 슬픔이라 한다. 그런데, 촉발된 이미지(관념)가 혼란한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 상태를 본질적으로 표현하거나 적합한 것일 때, 그리고 내적으로 촉발된 이미지가 우리 자신의 본질과 타자의 본질, 그리고 나아가 신의 본질의 내적인 공통성을 나타낸다면, 즉 촉발된 이미지들이 내적 합의에 이르게 되고, 신체의 본성에 적합한 관념이 형성될 때, 촉발 이미지로부터 발생한 감정 촉발은 곧바로 그 자체 행위가 된다. 일치된 관념 아래에서 감정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사랑과 기쁨이 된다. 촉발과 감정, 그리고 기쁨의 발생에 관한 논의는 (Deleuze 48-51)을 참조.
<참고문헌>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스피노자에게 있어 선과 악이 좋음과 나쁨으로 치환된다면, 좋음과 나쁨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즉 어떤 대상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근거로 그 대상을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한가지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 있는데,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이라고 간주할 때에는, 그것을 절대적 가치로서 좋음(선 good)과 나쁨(악 bad)으로 결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좋음과 나쁨은 가치의 상대적 결정에 의존한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내가 좋은 것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나의 본성에 적합하거나 나의 본성과 결합하는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하며, 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나의 본성에 적합하지 않거나 나의 본성과 결합하지 않는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동일한 대상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어떤 관계 아래에서는 적합하다고 말하기도 하며, 또 다른 관계 아래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사물들은 적합성과 부적합성에 따라 갈라질 것이다: "그 자체로서의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에게) 나쁜 것이 존재한다. <인간 신체의 부분들 사이에 존재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다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갖도록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나의 관계와 결합되는 관계를 갖는 모든 대상은 좋은 것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적합 convenance). 나의 관계를 해체하는 관계를 갖는 모든 대상은, 다른 관계들과 결합되긴 하지만, 나쁜 것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부적합 disconvenance)"(Deleuze 33). 따라서 우리가 변형과 변화라고 간주하는 것들은 대상 자체의 변형과 변화라고 이해되기 전에, 우선적으로 관계들의 변형과 변화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떠한 행위가 좋은 것인지 혹은 나쁜 것인지를 구분하는 근거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고, 그 행위가 어떤 관계에 의해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관계를 생기게 하는지에 달려있다. 그런데 심지어 범죄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규준을 적용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네로(Nero)와 오레스테스(Orestes)의 친모살해의 예를 통해 이 문제를 설명한다. 네로가 자신의 어머니(Agrippina)를 살해할 때와는 달리, 오레스테스가 어머니(Clytemnestra, 오레스테스의 아버지 Agamemnon을 죽인)를 죽일 때는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가 무자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행위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떠한 행위가 부도덕한 것 혹은 선한 것으로 구별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어떠한 사물의 이미지와 연결되는가에 달려있다. "어떠한 행위에 의해 해체되는 관계를 갖는 사물의 이미지와 연결될 때 우리는 이를 나쁘다고 한다(내가 누군가를 때려죽인다). . . . 동시에 같은 행위가 만일 서로 결합하는 관계를 갖는 사물의 이미지와 연결될 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연철행위)"(Deleuze 35). 어떠한 행위에 의해 해체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 혹은 결합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에 따라 우리는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따라서 오레스테스가 친모를 살해 할 때 결합되는 관계의 이미지는, 죽어가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오레스테의 행위가 아니라, 클리템네스트라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가멤논의 이미지와 오레스테스의 행위이다. 어머니에 의해 살해된 아버지의 이미지와 아들의 복수의 이미지가 서로 적합한 관계로 연결될 때 우리는 오레스테스의 행위를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반면에 네로의 경우, 서로 연결되는 이미지는 네로의 살해행위와 아그리피나의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들의 행위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파괴한다. 연결되는 관계는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가 해체되는 이미지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네로에 대해 나쁜 것 혹은 무자비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분명히 악덕과 덕은 구별된다. 선한 행위가 나쁜 행위도 구별된다. 그러나 이 구별은 행위 그 자체나 행위의 이미지 자체에서 나오지 않는다('어떤 행위도 그 자체를 고려하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Deleuze 36). 따라서 의미는 계열화되는 관계들에 따라 결정된다. 의미는 관계들이 적합하거나 부적합한 관계들의 위상학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지 그 자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용 및 참고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죽음은 독립된 혹은 폐쇄된 하나의 개체의 관점에서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신의 관점에서 죽음은 불합리하며 심지어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죽음이란 신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적 요소들이 더 이상 그 신체를 유지하는 관계를 가지지 않을 때이다. 즉 서로 다른 질서를 갖는 부분 요소들이 특정한 관계 아래에서 특정한 개체를 구성하는데, 만일 이 개체를 특징 짓는 특정한 관계가 해체되거나, 더 이상 부분 요소들의 결합하는 관계가 파괴되기에 이르면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처럼 특정한 신체를 이루고 있는 관계가 파괴되거나 해체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인 이 관계가 더 이상 현재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에 의해 실행되지 않게 될 때를 가리킨다. 사라진 것은 영원한 진리인 관계가 아니다. 사라진 것은 그 관계가 그것들 사이에서 성립되었던 바의 부분들이고, 이제는 다른 관계를 취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예를 들면, 독은 혈액을 해체시켜, 즉 혈액의 부분들을 다른 신체들을 특징 짓는 다른 관계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결정한다(더 이상 혈액이 아니다)"(Deleuze 32-33). 죽음은 신체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부분적 요소들의 특정한 관계가 파괴되면서, 이 부분적 요소들이 새로운 특정한 관계로 이행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음은 관계 그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분들이 새로운 다른 부분들과 맺는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파괴되는 것은 신체를 특징 짓는 특정한 관계이며, 이 관계 아래 배치된 특정한 부분적 요소들인 것이다. 따라서 신의 관점으로 볼 때, 죽음은 관계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계에서 다른 특정한 관계로의 변형일 뿐이다. 신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어떤 무엇도 아니라는 논제는 . . . 온갖 방식을 통해서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 . . [관계들의 적합 부적합에 따른 상이함들] . . . 이런 의미에서, 신체가 시체로 전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는 죽음이 있다. . . . 슈바르첸 베르크는 죽음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혹은 윤리학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신체는 시체로 변할 경우에만 죽은 것이다 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 . . . 왜냐하면, 때때로 어떤 사람은 아주 심한 변화를 겪어서,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Deleuze 33-34).
인용 및 참고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윤리'라고 불리는 행위 양식을 금지의 결과라고 이해할 때, 윤리는 가치에 대한 종교적 결정을 수반하게 된다. 가치의 종교적 결정은 존재가 선한 것인가 혹은 악한 것인가를 판별하는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 양태는 신의 말씀과 계율에 따라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의 두 계열로 분할될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학은 선과 악을 결정하는 (의미의)종교적 계열화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난점이 있다. 이 난점은 선과 악의 결정이 무엇에 연유하는가에 관한 발생적 정의의 차례가 돌아오면 반드시 맞게 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차례가 되면,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결정했던 가치들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모든 존재의 근원을 신의 계율에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윤리가 금지의 결과로서, 존재의 행위를 결정하는 종교적 가치들의 문제로 간주되는 순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어째서 신은 아담에게 열매를 금지했는가? 금지된 열매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왜 금지된 열매를 우리 자신의 윤리로서 이해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아담은 따라서 신의 계율을 금지와 도덕으로 이해한다. 도덕은 계율을 재현하고 받아 적는 과정이다. 신의 법칙과 섭리들이 이러한 식으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신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양태들을 원인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의식이 포착한 자연의 섭리가 원인으로 이해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우리가 복종해야 할 금지가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있어 신의 섭리는 금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은 아무 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신은, 그 열매는, 그 구성 때문에 아담의 신체를 해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아담에게 인식시킨다. 열매는 비소처럼 작용한다. . . . 나쁜 것은 중독, 소화불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논제 . . . 심지어 그것은, 개별적 요소들을 고려한다면 배척이나 알레르기로 이해될 수 있다"(Deleuze 31). 다시 여기서 신체들의 결합 방식들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 각각의 신체들은 자기자신에 적합한 다른 신체와 결합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신체들은 자기자신과 적합하지 않은 다른 신체와는 해체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런 식으로, 결합하려는 속성을 갖는 부분적 요소들의 결합에 따라 특정한 다른 신체가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혹은 존재 양태로서 신체는 언제나 결합하려는 본성에 따라 특정한 개체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적합하지 않은 다른 신체와 만날 때 신체는 자신의 특정한 개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해체될 것이다.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 그리고 나쁜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 혹은 선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 그리고 악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신체들간의 결합하는 관계들에 따라 분류된다. 금지된 열매가 아담에게 나쁜 것으로 이해되는 이유는, 그것이 신의 계율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열매를 섭취함으로써 아담은 더 이상 그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적 요소들(신체들)의 결합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아담이라는 특정한 개체성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합하는 관계들의 양태들에 따라 사물들을 분류함으로써, 스피노자는 자연 안의 모든 가치들을 무색 무취화하고 있다. 신체들의 결합 관계. 그리고 이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이러저러한 존재들이 결정된다. 또한 존재의 가치는 결합하거나 해체되는 관계들의 양태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에게 윤리학은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이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원리들을 따라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들 간의 윤리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존재의 관계 양태로부터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을 구분하고 판별해 내는 모든 종교적 뒷 냄새들을 제거하기 위함에서 비롯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은 더 이상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학의 문제이다. 심지어 금지의 의미조차도, 신학적 의미가 아닌 자연학의 관점에서 이해하자.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자연주의적 토대 위에 서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악이 어떤 무엇도 아니라면, 그것은 오직 선만이 존재하고 혹은 선만이 존재의 인상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악과 마찬가지로 선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l'Etre)는 선악을 넘어서 있다"(Deleuze 31).
인용 및 참고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현실에 관한 실천적 혼동으로부터 발생하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관점이 있다. 1) 삶 속에서 맺는 다양한 관계의 양태들을 필연적 법칙으로 이해하는 방향.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현실을 피할 수 없는 당위로 간주하면서, 모든 현실적 실천의 문제를 우리가 파악하는 법칙에 귀속시키며, 우리의 행위능력을 준법의 한계 위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와 같은 윤리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인식과 사유의 대상으로 파악하게 하기보다는, 우리의 의식이 포착한 현상을 그 자체 원인으로서 혹은 그 원인에 고유한 결과로서 파악하게 함으로써, 절대적인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상정한다. 자연 안의 다양한 양태들과 이들을 무리 짓는 이러저러한 법칙들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이 법칙들은 우리에게 부여된 도덕적 명령들로 돌변한다. 자연의 법칙과 질서들이 도덕적 강령들로 변할 때, 우리의 인식과 사유의 능력들은 영원한 진리에 의존하게 되고, 초월적 신의 이미지를 자신 안에 강렬하게 각인시키면서, 우리가 따를 수 있는 한 모든 능력들에 우선하는 하나의 모델을 세우게 된다. 우리는 특정한 하나의 사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들을 제한하고 포기함으로써, 그 사태들과 조건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암묵적인 복종의 강령들과 타협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때에 우리는 현실에 대해 아무 것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고, 그리고 우리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식이 제한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때에 우리는 인식과 사유의 질서가 아닌, 무지한 의식의 법칙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신학은 성서에서 주어진 것들이 인식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인식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고, 심지어는 이성에 의해 옮겨지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여기에서 도덕적이고 창조적이며 초월적인 신이라는 가정이 나온다. . . . 여기에는 존재론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혼동이 숨어있다. 이해해야 할 것을 명령과 혼동하고 인식을 복종과 혼동하며 존재(l'Etre)를 당위(Fiat)와 혼동하는 오랜 오류의 역사가 있다. 법칙은 언제나 선악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결정하는 초월적 심급이지만, 인식은 언제나 좋음-나쁨이라는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를 결정하는 내재적 능력이다"(들뢰즈 41-42). 따라서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 현실적 관계들을 우리의 신체가 할 수 있는 능력들에 따라 조직하고 구성하는 방향.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통해 말하는 신체의 능력이란, 우리가 아는 한에서, 촉발(변용)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자연 안의 모든 개체들은 새롭게 분류되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동물들, 식물들, . . . 이러 저러한 다양한 사물들은 형태론적이고 기능적인 기관과 외양들에 따라 군집을 이루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이 존재들이 서로를 결합하고 자신들의 군집을 형성하는 유일한 방식은 "유(類)나 종(種)과 같은 추상적 개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촉발 능력에 의해서, 즉 그것들이 <할 수 있는> 촉발들에 의해서, 그것들이 자신들의 능력의 한계 내에서 반응하게 되는 자극들에 의해서"이다(들뢰즈 45). 신체의 능력을 표현하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는 하지만, 그 보다는 그 능력들을 제한하고 능력에 앞서 우연적으로 결정된 신체의 기관과 기능에 의해 존재가 분류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반응 능력, 동일한 기관과 기능 속에서도 무수히 많은 다양한 능력, 현실화된 것으로서 기관과 이 기관에 상응하는 특정한 기능보다도 어쩌면 더 심오한 심급에서 발생했던, 기관이 미 결정된 신체에서조차 잠재하는 능력, 바로 공명하는 능력에 따라 서로를 결합하며 집단을 형성한다. 촉발과 변용은 공명능력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를 역능(puissance)이라 부른다. 스피노자의 촉발이론 전체는 바로 우리가 어떻게 이 역능을 최대화하고, 어떻게 이 역능을 현실화할 수 있는 관념을 생산하고, 어떻게 이 역능 안에서 자신과 신 그리고 자연의 모든 사물들과 필연적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관한 실천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촉발이론에서 능동 촉발과 수동 촉발, 그리고 수동 촉발에서 기쁜 수동 촉발과 슬픈 수동 촉발, 그리고 기쁜 능동 촉발에 관한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윤리학』3부(Of the Origin and Nature of the Affects)를 읽어보자!). 확실히 이 이론은 존재의 내재적 양태에 관한 위상학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법칙들에 조응하는 우리 자신들의 덕목을 말하지도 않으며, 우리 자신의 덕목과 행위 능력들을 법칙들에 따라 설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이론 안에서 법칙들은 오로지 우리 자신 안에 본성적인 능력들과 이 능력들간의 관계, 그리고 다른 신체의 능력들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의 모든 길은 내재성(immanence)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내재성은 무의식 그 자체이며, 무의식의 정복이다. 윤리학적 기쁨은 사변적 긍정(affirmation)의 상응 개념이다"(들뢰즈 47).
인용문헌
들뢰즈, 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선/악을 좋음과 나쁨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가치들을 순수 형식적 관계로 표면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에게 악이란 사물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의 관계를 해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에게 더 궁극적인 것으로서 악의 의미는 새로운 관계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신의 관점에서 관계들의 해체(악)는 다른 결합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관계들로의 이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치로서 선과 악의 심급은 좋음과 나쁨의 심급으로 치환되면서, 가치들의 상대적 관계가 형성된다. 가치들의 상대적 관계는 동등한(동일하지 않은) 능력을 가진 신체들간의 만남을 긍정하게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상대적 가치인 한에서 그렇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과 악으로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좋은 것과 선, 혹은 나쁜 것과 악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가치들을 순수 형식적 관계로 표면화한다는 것은 이 둘을 구분하고, 모든 선과 악이라는 종교적 배후를 관계들로부터 걷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치들의 표면화는 모든 신체들간의 이러저러한 관계들의 우연적 만남을 긍정한다. 표면 위에서 이들간의 만남은 우연적이며 상대적이다. 만남의 우연적 본성이 긍정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들이 출현한다. 1) 그것은 우선 죄의식을 없앤다. 슬픈 정념의 도덕적 원인으로서 죄의식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발생한다. 수동성이 죄의식과 그와 관련된 모든 슬픈 정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픈 정념은 또한 수동성을 불러들인다. 이들 양자는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서로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이차적 존재에게 다른 모든 존재들은 원인 그 자체가 되거나 혹은 원인과 관계하는 계시가 될 것이다. 이차적 존재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결과로 혹은 목적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앞에 주어진 모든 현실적 관계들은 하나의 명령이 되거나 복종해야 할 법칙이 된다. 그는 삶을 필연적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긍정은 이와는 반대의 결과를 끌어낸다. 우연의 긍정은 묘하게도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우연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이 때의 우연성이란 능동적인 것들간의 만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 안에 존재의 원인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들간의 관계. 이러한 관계들의 양태를 결정하는 윤리학적 토대는 이제 더 이상 선과 악이라는 "심판의 체계"가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라는 질적 차이가 될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상대적인 것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면서, 존재의 문제는 관계들의 양태의 문제로 귀결된다. 2) 능동적인 존재들간의 관계가 존재론적 윤리학의 테마라면, 이제 윤리학은 신체들이 좋은 관계를 맺는가 혹은 나쁜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그들을 분류하게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좋은 관계는 신체들이 서로간에 관계들을 형성하면서 각각 자신 안에 깃든 본성적인 것을 완성하거나, 자신의 능력들을 보다 완전한 것으로 증식시킬 때이다(음식물의 경우). 반대로 나쁜 관계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구성하는 고유한 관계가 다른 신체와의 관계를 통해 해체될 때이다(혈액을 해체하는 독의 경우). 좋은 관계는 신체의 능력이 보다 완전한 것으로 이행하는 한에서 기쁨을 생산하고, 나쁜 관계는 신체의 능력이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한에서 슬픔을 유발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체는 지속과 연장(extension)의 속성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신체는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유지하고 나아가 보다 완전한 것으로 자기 자신을 확장하려는 노력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 이유에서 좋은 관계는 신체들 각각이 적합한 관계들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완성시키는 과정이며, 나아가 이 관계는 신체들을 기쁨의 과정으로 유도한다. 이와 같이 능동적인 것들 간의 이러저러한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만남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능동적인 존재의 양태적 관계. 능동적인 존재는 만남들 속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속성을 표현하는 다른 신체들을 선택한다. 자신에게 적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구별하는 능력을 통해 신체들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표현하고, 자신의 능력과 조응하는 한에서 기쁜 만남을 조직하고, 다른 신체의 능력들을 자신의 고유함 속에서 발견하고, 이들과 결합하고 통일을 이루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끈다. 따라서 모든 결합하는 관계들은 명령이나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친화적인 양태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만남은 그 자신으로부터 조직된 것이기 때문이며, 어떠한 만남도, 필연적으로 결정된 관계(선/악의 경우), 죄의식과 슬픈 정념을 유발하는 관계를 통해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슬픈 관계, 즉 신체를 결합하는 고유한 관계가 해체되는 관계의 경우, 신체는 더 이상 지속과 연장이라는 고유한 본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슬픈 관계 속에서 신체는 수동적이다. 신체가 수동적 본성을 갖추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표현할 수 없으며, 자신의 능력과 조응하는 다른 신체를 선택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보다 큰 완전성으로 자기 자신을 이끌 수가 없다. "우연한 만남에 따라 살아가고, 그 결과들을 수동적으로 겪지만, 정작 자신이 겪는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나타나고 자신의 무능력을 드러낼 때마다 한탄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열등하다고, 혹은 예속적이라고, 혹은 약하다고, 혹은 미련하다고 말해질 것이다"(들뢰즈 39). 이들은 모두가 서로를 알 수 없는 무지한 관계들로 삶을 이루며, 따라서 삶을 폭력이나 기만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소극적 관계를 통해] . . . 어떻게 좋은 만남보다는 나쁜 만남을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의식으로 인하여 어떻게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원한 때문에 어떻게 타인들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고유한 무능력, 자신의 고유한 예속성, 자신의 고유한 질병, 자신의 고유한 소화불량, 독약 그리고 독물을 어떻게 도처에 퍼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들뢰즈 40) 윤리학이 선과 악을 좋음과 나쁨(기쁨과 슬픔)으로 치환한다는 것은, 존재들이 맺는 관계가 절대적 법칙에 의해 설명되거나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초월적인 법칙에 맡길 수가 없다. 자신의 능력과 본성에 적합한 것(좋은 것, 기쁨을 유발하는 것)과 결합하고, 적합하지 않은 것(나쁜 것, 슬픔을 유발하는 것)을 거부하는 과정은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속한 본성과 능력이 어떠한 양태들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과정이며, 따라서 다른 것들과의 결합과 해체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속한 본성과 능력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런 이유에서 상대적 가치들과 우연적 만남들을 단순히 가치들에 대한 순간주의나 관계들에 관한 수동성을 의미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가치의 내재적 판(The plane of immanence) 위에서 신체들간의 우연적인 만남은 각자의 능동성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능동적인 만남들이 조직되기 위해 필요한 가치들의 상대성은 각자들간에 내재하는 공통성이 전제되는 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용문헌
들뢰즈, 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도덕은 결과를 의식하고 그 결과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한다. 따라서 도덕적 계율들의 토대와 근거 자체에 대한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행위하도록 강요된 초월적인 법칙이다. 그것은 주어진 법칙을 내면화하고 학습하여 우리의 신체를 어떻게 그 내용에 부합시킬 것인가에 집중한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에서, 그 발생적 과정을 알지는 못한 채, 우리 앞에 미리 던져진 계율들과 덕목들을 발견하게 된다. 도덕은 한편에서는 의식과 나란히 발생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식으로부터 구성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의식을 구성한다. 또한 그것은 의식과 결과들의 법칙이기 때문에,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강령들에 의해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윤리학은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법칙이 부여한 양적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좋음과 나쁨이라는 질적 차이의 체계를 통해 구성된다. 이런 이유에서 윤리학은 발생적인데, 우선 그것은 강요되지 않은 질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강요로 이루어진 제도적 규칙들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적 질서 안에서 관계들의 원인과 결과(인과관계)는 관계 내재적 양상을 띤다. 내재적 관계는 자연 안의 어떠한 신체도 다른 신체에 대해 절대적 원인이 되지 못하며, 신체를 구성하는 어떠한 제1원인도 없음을 의미한다. 윤리학은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이다(들뢰즈 40). 우리는 때때로 초월적 법칙이나 계율이 사라질 때 출현하게 될 혼란과 파괴적 상황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법칙을 당위적인 것으로 의식하고 수용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수동적 존재들의 두려움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인식(사유)하지 못한다고 가정할 때에 발생한다. 윤리학은 우리가 법칙을 설명할 수 있고, 의식의 수준에서 당위로 부여된 진리들이 어째서 그런지를 인식할 줄 알 때에 비로소 우리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존재가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 가해진 명령과 복종의 법칙을 확인하고 이를 인과적 질서로 내면화하려는 노력이 도덕이라면, 윤리학은 쉼 없는 질문들과 결정(선택)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은 피부와 근육을 통해 신체 전체에 퍼져있으며, 나아가 우리의 사유의 종합으로 귀결된다. 윤리학의 내재적 본성은 육체와 정신의 순환작용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대립적이지 않으며 서로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다만 바톤을 이어가면서 증식될 뿐이다. 윤리학의 유일한 토대는 법칙을 이해하는 정신에 있지 않고 좋고 나쁨을 구별할 줄 아는 우리의 연약한 신체에 있다. 그러나 이것이 윤리학의 본질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윤리학의 본질은 적극성에 있는데, 이 적극성이란 연약한 신체로부터 출발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를 강하게 다져줄 인식(사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용문헌
들뢰즈, 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의식은 결과로서 주어진 실재를 하나의 전체로 이해한다. 그러나 의식은 전체를 이루고 있는 "살아있는 부분"들이 결합하거나 해체되는 관계들의 원인과 본질(원인들의 질서)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원인과 본질 그리고 결과로서 전체만을 수용하는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부적합한 관념들, 혼란스럽고 절단된 관념들, 즉 자신들의 고유한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결과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들뢰즈 34-35). 의식은 세 가지 환상으로 구성되고 작용하는데, 1) 의식이 맨 처음 포착한 내용은 신체들과 관념들간의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물의 질서를 역전시켜 이해한다(목적인의 환상). 2) 따라서 신체들간의 관계의 질서에서 파생된 결과를 통해 의식은 자기 자신을 운동의 제1원인으로 간주하게 되면서, 신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여긴다(자유명령이라는 환상). 3) 그러나 제1원인으로서 신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인할 수 없거나, 목적에 대한 원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없게 되면, 보다 큰 전체성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목적으로서, 그리고 자유명령의 주체로서,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신에게 그 영예를 돌린다(신학적 환영). 의식은 이 세 가지 환상들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로부터 어떠한 원인의 결과들에 따라, 이 결과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결과를 원인으로 환상한다. 의식은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외부적 신체와 외부적 관념들이 우리에게 끼친 결과들만을 수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것을 욕망할 때에, 의식이 그 대상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우리의 욕구에 의식을 각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이 관계는 역전된다. "욕구는 각 사물이, 즉 연장에 속하는 각각의 신체와 사유에 속하는 각각의 영혼, 각각의 관념이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 conatus)에 다름 아니다"(들뢰즈 36). 자신의 존재 속에 머무르려는 노력은 다양한 다른 신체들과 대상들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매 순간 우리 자신에게 강요하거나 촉발되는 것(변용 affections)에 의해 결정된다. "바로 결정인자로서의 이 변용들이 필연적으로 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의 원인이 된다"(들뢰즈 37). 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은 촉발에 의해 일어난다. 또한 기쁨이나 슬픔(즉 매 순간 조우하는 관계들로부터 나오는 결합적 관계나 해체되는 관계)의 반복적 주기는 코나투스의 변용을 발생시키고, 이 변용에 의해 발생하는 이행(즉 보다 큰 전체에서 보다 적은 전체로, 혹은 보다 적은 전체에서 보다 큰 전체로의 이행)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지속적인 감정이 의식이다. 의식은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에 따라 변형되는 운동의 이행에 관한 감정일 뿐이다. 의식은 우선적으로 신체들의 촉발과 변용들로부터 발생한다. 촉발과 변용은 코나투스의 이행을 촉구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존재성에 머무르려는 노력으로서 욕구에 대한 의식을 각인시킨다. 이런 이유에서 의식은 이행에서 나오는, 이 이행에 대한 감정이며, 변용들의 결과이며, 결과들의 법칙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것을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은, 의식이 "그 대상을 좋은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원하고 욕구하고 욕망하기 때문이다"(들뢰즈 36). 관계들의 결합(기쁜 관계)과 해체(슬픈 관계)와 같은 이행과 운동의 결과들에 대한 감정을 통해 의식은 일정한 법칙(도덕, 선악 등)을 도출한다. 즉 의식은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 도덕을 만들어낸다. 도덕적 가치들은 의식의 기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열매와 자신의 신체와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아담은 자신에게 부여된 신의 금지(금단의 열매)의 의미를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 도덕을 만들어 낸다. 의식은 무지에서 나온다. 그것은 그 자체 결과이며 동시에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수용된 결과를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의식은 수동적 실천의 원인에 불과하다. 그것을 인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인용문헌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의식, 가치(선악의 가치), 슬픈 정념에 대한 비판. 사유, 좋음-나쁨, 기쁨에 대한 옹호. 유물론자, 비 도덕론자, 무신론자로서의 스피노자. 1) 유물론자로서의 스피노자: 의식이 아니라, 신체(그리고 이를 긍정하는 사유)를 새로운 모델로 제시. 2) 비 도덕론자로서의 스피노자: 선-악이라는 도덕적 본질의 가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좋음-나쁨이라는 존재의 양태를 통해 세계를 이해. 3) 무신론자로서의 스피노자: 신에 정체되어 죄의식과 슬픔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역능에 적합한 관계를 조직하고 결합함으로써 무한한 증식과 완성을 꾀하는 존재.

금연(禁煙)이나 아픈 이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얘기지만, 모든 일은 첫발을 내딛는 것 즉 결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천한 미물들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생기론자들 중에는 생명을 정신으로 환원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돌멩이조차도 결심을 해야하지 않을까? 오래 전부터 벼른 것이든 아니면 갑작스런 충동이든 간에, 결심은 주체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모든 것과 대면하게 만든다. 그 같은 결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 결심을 할 수 없었던 사연들, 결심을 미루며 해댄 궁색한 변명들, 해이한 자의식과 그로 인한 자기 외면, 실패에의 두려움, 결심에 대한 책임, . . . 등. 이처럼 결심에는 당사자가 감당하기에는 아주 벅찬 무게가 실려있다. 그래서 결심은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결심을 앞두거나 결심에 임한 존재는 인생의 결과라고 할 만한 자기 자신의 무게를 초과량으로 경험한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이 지구를 짊어지는 일 보다도 더 힘든 것처럼. 중력이 잡아당겨 내 몸이 땅 속으로 꺼지지 않도록 버티고 서 있는 일! 아니면 중력을 잃은 내가 스스로 중심이 되어 발목을 잡고 몸뚱아리 전체를 들고 서있는 일! 그리하여 나 자신을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떠맡는 일!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실존이 그 자체로 고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저 동일한 두 존재(들고 있는 나와 들려진 나)가 서로 팽팽히 대면하여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불연속 상태가 된다. 물론 다소 상반된 반응들을 취했지만, 키에르케고르나 니체가 간파했듯이 신이 사라진 상태와 같은. 아니면 카프카가 자주 그랬듯이 자신의 방 창가에 서서 창 밖을 바라보던 상태와 같은. 아니면 스피노자가 원했듯이 신이 된 상태와 같은. 아니면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영화 <La Strada> 에서 짐승같은 잠파노가 바닷가에 널브러져 갑자기 하늘과 대지를 보며 울던 상태와 같은. 이 실존적 고독과의 대면이 한없이 유보되었을 때, 다시 말해 해야할 일이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갈 곳이 정해졌을 때처럼, 미래가 연속되어 주저함이 없이 그것을 예측할 수 있을 때, 그래서 어떤 중대한 결심이 필요치 않을 때, 나는 이를 혼미한 상태 즉 중독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삶의 대부분은 중독 상태가 아닐까?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미디어 중독 같은 것들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중독 상태이며, 또 그렇지 않으면 살수가 없을 것이다. 작가들이 글을 쓰기에 앞서 언제나 다른 중독상태(담배를 물거나, 수화기를 들거나, 화장실에 가거나, . . .)에 빠져들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녁에 홀로 남겨져 골목을 두리번 거리는 외톨이처럼. 프랑스의 루이 11세 때 발뤼(Balue)라는 한 국무대신은 반역죄로 약 11년간(1469-1480)을 감옥에서 살았는데, 그 감옥은 그의 몸에 비해 너무 작아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그의 자세가 고통스러웠다면, 그것은 바로 중독을 벗어난 불연속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떠맡게 된 자신의 무게와 힘. 그 고독의 엉거주춤함! 그는 아마도 감당하기 힘든 그 기간 동안 생애를 통틀어 가장 명료한 의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댓글을 달아 주세요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