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들>은 "팩트(fact)는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밑바닥에 품고 있다. 왜냐하면 팩트의 본질은 모호성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시체 옆에 칼을 든 남자가 서 있다. 그는 죽이기 위해 칼을 찌른 후인가? 아니면 살리기 위해 찔려 있는 칼을 뺀 것인가? 이렇게 해서, 팩트는 기억이라느니, 필요라느니, 아니면 "욕망을 반영한다"는 식의 인식론적 존재론의 오래된 화두들이 등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다!"는 진술은 보고나 기술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것이다. 내 경험에도, 사람들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방식, 말하는 방식은 바로 그 사람이 사물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 신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모든 팩트의 실상에 도달하기 위해, 혹은 쉽게 말해 칼을 든 저 남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시간"이다. 이것이 바로 전후 유럽의 네오리얼리즘과 누벨바그 등의 현대적 영화감독들이 그토록 고민했던 "베리떼(verite)"의 최종 종착지가 시간인 이유이다. 따라서 시간을 제거할수록 베리떼는 물건너 간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에서 폭력이라고 하는 듣기도 싫은 단어가 탄생한다.

영화 <아이들>에서는 살인보다도 더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폭력이 등장한다: 속단!

여기서는 속단의 두 가지 형태 혹은 동기가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끼워맞추기식 속단이 그것이고(교수가 대변하는). 다른 하나는 필요(욕망)에서 비롯되는 선택식 속단(PD가 대변하는)이 그것이다. 믿음이든 필요이든,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정념이든, 이들은 실상을 보려는 욕망이 아니라, 보고싶고, 봐야만 하는 것을 욕망한다. 모호성의 근원적 환경인 리얼리티의 다양성은 "상식"이라는 무시무시한 무지 아래, "확신"이라는 저열한 의기양양 아래 무식하기 그지없이 왜곡된다. 영화의 나중에 가서(실상은 항상 나중에 나온다) 밝혀지게 되는 그 전화통화, 즉 아들로 추정되는 목소리와 어머니의 전화통화에서 보듯이, 실상은 항상 비상식적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나 정의감이 아니라, 유보시키는 힘, 햄릿과도 같은 우유부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햄릿의 고뇌를 흔히 우주론적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살인이나 학살과 같은 명시적 폭력보다도, 우리는 실제로 비명시적 폭력을 일삼는 괴물들에 더 자주 더 깊숙히 더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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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 년 전쯤, 친구는 내게 식물 하나를 선물하였다. 꽃무늬로 사방에 돋을 새긴 작은 화분에, 네 가닥의 잎이 단도처럼 쭉 뻗어 오른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산세베리아(Sansevieria, Bowstring Hemp), 혹은 천년란(千年蘭)이라고 부르고, 꽃말은 관용이라고, . . . 전자파를 차단해주는 식물이라며 어디서 정보를 듣고는, 컴퓨터 앞에 많은 시간 동안 앉아있는 나를 배려해서 사 온 것이다. 난 동물들뿐 아니라 식물을 기른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니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을 했다. 간혹 길을 가다 보면 멋진 옷으로 잘 차려 입고, 쇠사슬 목걸이를 채워 강아지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면상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침을 뱉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었다. 식물이라고 다를까? 차라리 요긴하게 쓸만한 물건을 선물하지, . . . 살아있는 식물은 별로 달갑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내 건강을 걱정해준 마음도 있고, 또 하도 성화를 부리기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띄지 않게 책상 한 구석에 밀어 놓았다. 전자파를 차단하려면 가급적 스크린과 내 눈 사이에 있어야 할 텐데, 저만치 구석에 숨어 있으니, 선물의 용도는 이미 무의미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가 가끔씩 집에 와서 물을 주거나 먼지를 닦아 내어 돌보았던 것 같은데, 나는 저 식물이 정말로 저기에 있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스크린이 너무 눈이 부셔, 녹색을 보면 괜찮아진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잠깐씩 응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쳐다보는 동안에도 나는 저것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되었다. 저것이 내 책상 한 구석을 점유한지 이 삼 년이 훨씬 넘었는데, 또 나는 물도 한 번 제대로 뿌려본 적도 없는데, 어느새 이파리가 세 가닥이나 자라나 있는 것이다. 하나는 가장 높이 솟아 올라 있었고, 나머지 둘은 서로를 정답게 감싸 안으며, 체조를 하듯이, 아니 탱고를 추듯이 비틀어져가며 자라나고 있었다. 처음엔 이파리가 네 가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식물인줄 알았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두 뿌리를 가진 두 개의 식물, 즉 한 쌍의 식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쌍 중 한 뿌리에서는 뾰족이 높게 치솟아 투사의 모습을 한 이파리가 생겨나고 있고, 다른 뿌리에서는 두 가닥이 무용수들처럼 나선형을 이루며 꼬여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뿌리의 저 아래쪽을 돋보기로 자세히 보니, 이미 또 다른 두 가닥의 이파리가 조금씩 조금씩 돋아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난 아직도 저 식물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모습일지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원래 한 뿌리가 두 뿌리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두 뿌리였는지, 아니면 세 뿌리가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 아니면, 결국에 가서는 하나의 거대한 뿌리에 매달려 공존하고 있는 잔가지들인지, . . .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 자신도 모를 것이다. 이제는 화분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저것들이 자라나 언젠가는 저 단단한 화분도 깨트리게 되겠지. 화분이 너무 단단해 깨트릴 수 없다면, 그냥 죽어버리던가.


저렇게 무럭무럭 커 가고 있는 걸 보며, 저 식물이 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환경이 맞지 않아 죽어가는 식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로부터 거절을 당한 듯한 불쾌함이 느껴진다. 난 처음에 저것이 내 방에 들어온 순간, 얼마 되지 않아 죽어버릴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내 몸에서 풍기는 냄새라든가, 호흡이라든가, 정신과 영혼이 오염시킨, 이 음산하고도 폐쇄적인 방안의 공기에, 저것이 질식해 버릴 것이라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 조차 숨이 막혀 버릴 것이라고, . . . 정말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저 미물에게 어리석은 희망을 품지 않고, 오히려 귀찮아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죽어가거나 시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너무도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난 살아있는 것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지 않았다. 특히 식물의 죽음에는 동물과는 전혀 다른 서글픔이 있다.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나의 거부는, 말하자면 나 자신의 절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바래가고 있는 녹색의 식물들을 방 안에 들여놓으며, 또 하나의 절망과 죽음을 하루 하루 바라보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를 비웃듯, 저것이 저렇게 버젓이 고개를 쳐들고 살아있는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잠에 들어 있거나, 나 자신의 의식에 빠져 몽롱한 상태에 있거나, 어떤 일에 열중해 있는 동안에도, 저 식물은 내 옆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방에는 스스로 달라져가는 것이 나 말고도 또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의식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우리가, 즉 의식적 존재가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싫든, 좋든,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우리와는 무관하게, 우리를 외면하며, 자신 안에서 스스로 살아간다. 어느 날 내 의식에 주의력이 생겨나서 바라보고 이해한 것은 그 결과일 뿐이다. 식물은 그 자체가 시간-존재이다. 지각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동물의 자연에의 투쟁이나 공간적 운동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강렬한 삶이 거기에는 있다. 그래서 식물은 경이로운 존재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동물이 움직이거나 자라난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차라리 붙박여 있는 책상이나, 콘크리트 건물이나, 조각난 쇳덩어리가 꿈틀거리며 커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 만큼이나 놀라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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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만들어지는 미국 영화들 중에는, 과학에 대한 미국인들의 맹목적인 신뢰가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특히, 거기에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도 포함되고 있다. 물론 상대성 이론의 실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 탓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무지와 편견의 배후에는 다소 복잡한 정치 사회적 문제도 들어가 있다. 서둘러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식 과학-기술주의 이데올로기가 문화 전반에 퍼져 있어, 과학에 대한 무지와 편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9세기 이후의 미국문학을 접해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낭만주의적 확신을 과학 기술에 의존했던가! 그 문제는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그 보다 사실 그것은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주의 일반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시간의 과학으로 알고 있다. 타임머신에 대한 많은 과학적 우화들 속에 항상 상대성 이론의 단편적 지식들이 많든 적든 활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서 논의하고 있는 시간이란 "어떤" 시간인가? 다들 잘 알고 있을 테니 간단히 결론만 말해, 일반적 사차원의 독립된 좌표를 갖는 시간이든(즉, (ds)2 = (dx)2 + (dy)2 + (dz)2 + (dt)2), 상대적 사차원 시-공간이든(즉, (ds)2 = (dx)2 + (dy)2 + (dz)2 - c2(dt)2),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이란 다름 아닌 "공간"이다(물론, 후자의 경우에서 지시된 시공간 항은 단순한 공간은 아니지만). 다시 말해, 운동이라든가 실제적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이 가진 도구 즉 수학을 이용하여, 그 운동과 변화의 특정 위치와 궤도 등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양적으로 공간화한 번역물! 이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이다. 하나의 중심 혹은 기준으로 작용하는 특권적인 체계의 소멸, 운동에 따른 공간의 수축과 시간의 지연, 동시적 시간의 파괴, 서로 다른 체계들의 상대적 관계, . . . 상대성 이론에서의 이러한 일련의 시나리오는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어, 가령 시계의 눈금으로 환원한 생각의 결과이다. 그 시간이란 공간을 최대로 밀고 나가, 공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과학의 시간, 더 정확히 말해 과학자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론 상대성 이론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실재의 시간과 과학의 시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만일에 이와 같은 상징과 실재를 혼동하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극단적인 경험의 예로, 사진과 실물을 혼동 한다든지, 사이버상의 존재와 실제의 존재를 혼동한다든지, 영화와 인생을 혼동한다든지, 현재와 과거를 혼동한다든지, . . . 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한 혼동은 시간(타임머신, 시간여행, 기억 등)을 다루는 미국영화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현상이다(최근에 개봉된 <데자뷰>는 그 현상의 극단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제각각 소재는 조금씩 다르지만, 구조적으로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타임머신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여러 매체라든가, 그도 아니면 어떤 우연적이고 신비한 사건으로 인해,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다른 "시대"로 "이동"하여, 잘못된 현재를 바로잡는다는 구조로 되어있다. 위에서 언급한 <데자뷰>의 경우엔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우주가 마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어서, 어떤 우주적 에너지를 그 두루마리에 가하면, 저 편으로 가고 있는 두루마리 한 쪽 끝이 이쪽으로 접힌다는 것이다. 두루마리를 접으면 접점이 생길 것이고, 그것은 바로 공간의 결합지점이 될 것이고, 공간의 결합은 곧 시간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의 어떤 지점과 만나는 상태, 즉 과거로 이동이 가능해 진다. 이것은 중력장, 블랙홀 등의 현대 물리학 이론 비스무레한 것들을 뒤섞어서 만들어낸 논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논리가 가능할까? 어떻게 공간을 이동하고 접어서 과거로 갈 수가 있나? 바로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시대"라고 하는 시간의 용어를 "이동"이라고 하는 공간의 용어와 뒤섞어 쓰는 것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공간의 이동이 시간의 변화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 발자국 앞으로 간 만큼, 시간도 한 발자국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공간의 이동은 곧 시간의 진행이라는 믿음을 도식으로 확대시켜, 뒤로 한 발자국 가면 시간도 뒤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과거-공간으로 간다고 하는, 헐리웃 스타일의 변형된 상대성 이론은 바로 이러한 유치한 발상에서 파생된 시나리오이다. <데자뷰>는 그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뒤섞고 동일화해서, 시간을 공간에 완전히 종속시켜 버린다. 거대한 충격으로 두루마리-공간을 접어, 순간 이동으로 과거-공간으로 가서, 어떤 어떤 행위를 가하여 환경을 바꾸고, 그 바뀐 환경은 미래의 나 즉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디서 본듯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현재의 이상한 일들이(데자뷰 현상) 결국은 몇 시간 전에 과거의 내가(더 정확히 말해 과거로 이동한 현재의 내가) 저질러 놓았던 일이었음을 알게 되고, 심지어는 현재의 공간에 있는 사람이 과거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력(자외선, 동영상)을 미치고, . . . 나중에는 제작진 자신들 조차도 헷갈렸는지, 시간과 공간의 그 뒤섞인 관계를 풀지 못해, 방금 전에 물에 빠져 죽었던 사람이 저쪽 골목에서 살아서 되돌아오는, 기상천외한 드라마를 만들어 클라이맥스를 마무리한다. 뒤섞인 것은 시간과 공간 뿐만이 아니다. 장사를 위해 스릴도 넣어야 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니 개연성도 필요하고, 대중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해피엔딩도 잊지 말아야 하고, . . . 문학적 이미지, 과학적 이미지, 사회학적 이미지, 윤리적 이미지, . . . 그 모든 것들을 성의 없이 뒤섞어, 미국 사회를 말해주는 모든 환타지-오락-카탈로그가 집결되어 작성된 것이다. 아마 그들은 그 장면을 만들면서, 과학과 환타지의 경계선 위에서 나자빠지며 이렇게 외쳤을 것 같다: "아! 나도 몰라, 될 대로 되라!"

물론, 허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고, 재미로 웃어 넘길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저 헐리웃 스타일 시간 개념 시나리오는 유치한 것으로 덮어 버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미국 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의 일면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저러한 시간개념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병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잘못된 현실, 슬픈 현실, 지옥 같은 현실(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같이 개인적인)을 견딜 수가 없어, 우리가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에나 미친 척 하고 잠깐 빠져드는 바램을, 과학적 기술로 현실화시키려는 망상으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학-기술주의는 대단히 퇴행적이고 병적이다. 그것은 그 자체 슬프고 애처로운 망상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떠나버린 사람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앨범을 뒤척이다가, 실사출력 기술을 떠올리며 그 사람을 되살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 사진 속의 그 사람과 떠나버린 실제의 그 사람을 혼동하는 것처럼. 이미지와 실체를 혼동하여 과거로 퇴행하고자 하는 물신주의적-기술-맹신-광란은, 한편으로는 과학에 대한 무지와 오만의 결과이고, 또 한편으로는 시간과 삶에 대한 슬픈 생각, 가령 후회의 가정법(". . . 했어야 했어(should have . . .)")으로 현실을 이해한 결과이다. 되돌릴 수 있다는 회고적 망상은 과학기술의 능력이 아니라, 현실적 삶의 실패이다. 그것은 과학적이기는커녕, 과학의 남용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이다.

과학은 모든 것을 공간화 한다. 모든 사물에 좌표를 부여하고, 운동의 변화를 양으로 환산하고, 존재성을 기능으로 치환한다. 감정이라든가 회상이라든가 음미와 같은 주관성의 영역이 과학에서 논의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이 악당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과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기 때문에, 언어이기 때문에, 번역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날아가는 새를 잡기 위해, 날고 있는 경로에 임의로 몇 개의 점을 찍어 궤도를 설정하고, 이동의 간격을 계산하여, 과녁을 만들어 새를 맞추는 식으로 시간을 계산한다 . 이것은 새를 맞출 수는 있지만, 새 자체가 아니며, 새의 실재적 궤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일종의 도표, 다이어그램이다. 과학자들은 점을 하나 찍고는, "이게 너라면. . ."하고 가정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시작한다. 그것은 새의 육체와 임의로 설정된 새의 상징적 위치를 동일시 하는 방법이다. 그래야 계산이 명료해지고, 논리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상환경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가능해 보인다. 공간의 이동 뿐만 아니라, 시간의 공간화, 육체의 소멸과 순간 이동, . . . 육체가 없어도 존재가 가능한 것이 바로 가상공간인데, 안 되는게 어디에 있겠나?

그렇지만 순진하게 가상공간을 실재의 공간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수학자들이 찍어 놓은 그 점과 궤적은, 저렇게 날아가며, 숨을 쉬고, 소화를 하고, 땀을 흘리며, 허기가 져서 헐떡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매 순간 변화와 우연성의 산물인 바로 저 뱁새가 아니다. 그들이 찍어놓은 그 점들을 아무리 무한대로 적분을 한다 해도, 참새의 존재, 독수리의 비상, 따오기의 질적 변화와 운동을 재구성 할 수는 없다. 점들이 적어서가 아니다. 그것과 그것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 과기주의는 모든 존재를 양적으로, 공간으로 재현할 수 있다고 망상한다. 매 순간 날라가는 새를 잡을 수 있다는 신념이, 살아있는 황새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번호라든가, 자리배정이라든가, 기능들을 할당해 주지 않고서는 효율적인 생산이 불가능하듯이, 과학기술주의는 삶을 효율성이나 목표중심으로 설정하여(사이버네틱스? 목표진입 메커니즘?), 인간을 하나의 점으로, 함수(function)관계의 좌표로 용해해 버리고는, 이번엔 그 반대로 여러 점들과 좌표들의 집적으로 삶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로봇공학?).  나아가 점들로 상징화된 그 모든 육체들을 대신하는 거대한 상징의 점 하나를 형성하며. . . .

하지만 그 상징들은 일을 하는 동안에만, 수학문제를 푸는 동안에만, 사냥을 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규약이다. 그것을 가정에까지 가져와 자신의 모든 삶을 그러한 규약으로 육화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육체(더 정확히는 주관성)를 잃어버린 삶이 될 것이다. 생산성을 최대로 하기 위해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삶 속에서 상징과 규약을 내면화시키고자 한다. 업주들은 수억의 돈을 투자하여 그러한 현장(인프라)을 구축해 놓았고, 학교와 같은 여타 기관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동맹자들은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내면화된 신체를 만들어 내었다. 노동을 위한 규칙들은 퇴근 후에도 지켜져야 하고, 생산성을 위해 건전한 삶을 유지해야 하며, 생산관계의 질서를 위해 순응적인 인간성을 연마해야 하고, 매출증대를 위한 건전한 소비와 약간의 방탕한 기질 정도는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효율성을 위해서는 실제적인 육체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모던 타임즈>의 떠돌이 챨리처럼 콘베이어 벨트 앞에서 가려움증이 생긴다든가, 배가 고프다든가, 웃는다든가, 한참 동안 먼 곳을 주시한다든가 해서는 안 된다. 이탈해서도 안되고, 실제적이어서도 안 된다. 육체는 오로지 가상적이어야만 하고, 따라서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어야 하고, 배치되고, 동원되고, 설명 가능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생산 과정은 온 삶을 지배하게 되어, 삶 자체가 하나의 가상적 공간, 매트릭스 공간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시간 조차도 공간으로 얼어붙게 하여, 몇 가지 기술적 장치들 만으로도 얼마든지 시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망상을 키웠다. 날아가는 새를 잡아 작은 우리 안에 새를 기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뚜껑을 열어봐도, 새는 없고, 새를 지시하는 기표들과 좌표들과, 기능들만이 손을 벌리고 넘쳐흐른다. 미국식 과학 기술주의는 존재로부터 육체를 박탈해 버렸다. 미국인들은(우리 역시) 육체를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삶의 느낌이 없는 것이다. 그 육체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병적이고 퇴행적인 과학기술들을 동원해봐야, 나오는 것은 한없는 허기뿐이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과거로 되돌아가는 미국식 과학의 병적인 실상이 아닐까?(매체 메커니즘을 가지고는 결코 과거를 재구성할 수 없다고 지적했던 영화는 Christopher Nolan의 <메멘토(Memento)> 뿐이었다.)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상당히 자본주의적이고 파쇼적이다. 또한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은 초상화를 그린 화가에게 왜 그림과 모델이 똑같지 않은가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실사 화가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내라고 요구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고 서글프다. 낮은 코를 실리콘으로 높이세우고, 작은 가슴에 이물질을 삽입해 성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믿으며,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을 디지털로 수정하면 삶의 실재가 아름다워지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망상 하는 것 만큼이나 애처롭고 바보 같다. 굉장한 단어들로 장식을 한다고 해서 곧 문학이 될 수는 없듯이, 사진을 아무리 수정해 봐야 변하는 것은 사진뿐이다. 그것으로 가면을 만들어, 끝나고 나면 공허한 파티나 기껏해야 한 두번 즐길까? 그러한 망상이 실제로 개인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망상을 필요로하고, 망상을 획책하는 이상한 관계가 우리의 현실 속에 끼어들어, 우리를 혼란하게 하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아니라 제 아무리 많은 발자국을 뒤로 이동을 해봐야 시간은 뒤로 가지 않는다. 시간은 원래부터가 그렇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현대의 많은 영화들이 그토록 시간과 공간을 탈구시키고자 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괴로운 현실을 되돌리기 위해 과거로, 원래의 그것으로, 가능했었을 수도 있었을 그 어떤 시-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는 수단,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실상이 무엇인지, 어떤 미래로 갈지에 대한 판단과 통찰력이다. 과학과 기술은 그 목적에 쓰여야 한다. 미래의 돈벌이 말고. . .

영화 <데자뷰>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미국식 과학-기술주의는, 시간을 공간으로 뒤섞어, 모든 것을 잴수 있다고 망상하는 기계론을 닮았다. 그리하여 또한 모든 것이 어떤 초월적 지성의 기획에 의해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망상하는 목적론을 따른다. 이들은 모두가 같은 정서 속에서 뒤섞인 결과인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 자유의 소산이 아니라 절망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이다. 미국식 과학-기술주의는 삶의 절망과 그 슬픔에서 비롯된, 종교적 망상의 과학적 번역물이다. 그것은 과학에 있어 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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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존재의 사용불가능성과 비효율성을 선언하는 분과이다. 그리고는 그 쓸모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여기에 이렇게 엄연히 실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인문학은 바로 시간과 지속의 과학인데, 왜냐하면 시간과 지속은 사용불가능한 존재가 실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다루고 있는 시간이란 물리학적 의미에서의 공간적 시간(공간에 덧붙여진 또 다른 형태의 공간 즉 4차원)도 아니고,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최대로 단축시켜야 할 부정적 시간도 아니다('시간은 금'이라는 자본주의의 고전적 명제는 시간의 긍정이 아니라 시간의 부정이다). 인문학이 존재에게 부여하는 그 시간은, 무엇인가가 빠르고 순간적이고 한꺼번에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 모든 사물들이 그 자신의 완성을 향하여, 본질의 열림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속도를 낼 수 없도록 방해하는 그 무엇이다. 그 시간은 세계를 지연시키고, 우리를 망설이게하여, 시(詩)를 읽는 독자처럼, 우리로 하여금 오래토록 머무르도록 강요한다(또 이 머무름 속에서만 우리의 삶은 완전해 질 것이다). 이 강요의 한복판에 던져진 우리는 그 지연된 시간 속에서 "적절한 것"을 고뇌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스스로 짊어지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자신의 본질을 펼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이란 삶 속에 시간이라고 하는 아주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추가한 학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존재의 비효율적 가치를 긍정하는 유일한 영역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효율성과 사용가능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적 관점은 존재로부터 시간을 빼앗는 위치에 서 있다. 존재로부터 시간을 빼앗아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공간적인 것만 남겨놓는, 그래서 모든 존재를 불활성의 세계로 둔갑시켜서, 수동적 기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체계. 최대효율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순간성과 자동성, 나아가 최대 수동성이다. 그 첨단이 바로 로봇이라는 사실은 우리 다 같이 알고 있는 바가 아닌가? 만일에 인문학에 어떤 위기가 왔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지속 불가능한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혐의를 두고 그 환경에 적응을 종용하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환경을 바꾸든지는 우리가 할 탓이겠지만.

그 수 많은 한국의 인문학자들의 선언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근본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 신자유주의라는 다소 중화되어 모호한 이름으로, 그냥 단어들만 부르짖으며 말장난을 하느라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항상 놓쳐버리고 마는 주제: 자본주의! 그들이 비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같은 말이지만 대중과 괴리되었기 때문도 아니다(어떤 대중?).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오히려 그들의 반성은 잘못된 문제의식을 보여줄 뿐이다). 바로 인문학적이지 않았다는 것! 여전히 인문학적이지 않다는 것!

왜 그들은 항상 잘 나가다가도 맨 나중에가면, '적응'이라든지, '변화'라든지, '대중화'라든지, '응용'이라든지 하는, 우리를 맥빠지게 하는 추상적 용어들 속에 고착되어 틀어박히고 마는 것일까? 그들이 바로 그 체계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실상은 최대효율성의 체계 속에서 교육받고, 교육하고, 그 선배들과 그 스승들이 마련해 준 어떤 어떤 공허한 특권들 속에 안주하여, 실질적 자본의 토대위에 가까스로 앙상하게 버티고 서 있는 상징적-심리적 자본에 도취되어, 거기서 주어지는 가능한 모든 취미와 우울과 혐오 혹은 위선적 자애와 너그러움과 권태등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며,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자신도 모르게),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서들과 소재들을 발견하면서, 그 건전해보이지만 실은 밀폐된 환락을 만끽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결코 자신들의 그 강건해 보였던 지반, 그 안락한 환경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효율적 체계의 타도!라고 하는 명제의 실천은 냉소적인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무시무시한 것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7, 80년대의 공장 등지에서 블루칼라들이 겪었던 무지막지한 공포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선언이나 주장이 진지하고 진정한 것이라면, 아니 그들이 조금만이라도 총명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자신들이 서 있는 지반의 물적 토대를 송두리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짐작으로 속물정신에서 태어난 그들은 결코 그 지반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멋모르고 내뱉고 만 그들의 선언행위는 웃음조차 유발시키지 못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인문학의 해방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는 결코 완성될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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