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6/12/30 지적인 백수에게 추천하는, 시간 때우는 한 가지 방법 (2)
  2. 2006/09/26 체계와 그 예외들 (5)

다들 잘 알다시피, 농담 잘하는 유쾌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자신만의 거대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 우연히 영상으로 그의 서재를 보고 난 후 언뜻 든 생각이 있는데, 그의 장서는 그의 지식의 양을 말해주기 보다는 그의 재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개인이 소유한 장서의 본래 의미는 지식보다는 사회적인 수완을 말해주는 경우가 더 많다.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여차 저차하여 교수직을 얻어 안주하는 시기가 되면, 비로소 책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한 5년 쯤 지나면, 그들의 책 수집에 관한 열정은 사실 헌책방 주인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연구실을 들어가 보면, 책장과 책장을 한참을 돌아 들어가서야 겨우 장본인을 만나볼 수 있는 미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책을 모으는 일이 관심사라고 공공연히 말하고는 했던 한 얼뜨기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안달이 나서 추구했던 일은 사실은 교수가 되는 일이었다. 책 수집에 관한 편견만큼이나, 그에게 있어 교수가 된다는 것은 지식인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물론 에코의 박식함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 해박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저열한 본성의 소유자처럼 보이는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지식뿐만 아니라 재력도 과시한다. 행이 바뀔 때마다 해대는 수많은 책의 인용, 자신이 직접 가본 무수한 지명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명사들, . . .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왜 그렇게 허기가 지는지! 지식은 돈 게임이라는 료따르(J-F Lyotard)의 말이 어렴풋이 실감난다. 우리가 그의 글을 보며(읽는 것이 아니라) 감탄하고 재밌어하고 낄낄 거린다면, 그것은 고매한 지식이 주는 명쾌한 묘미나, 웅장한 문체 때문이기보다는, 그 지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갖춘 사회적 능력에, 애매모호한 존경심(?)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먼 고장을 여행하고 돌아온 친구가 뻐기며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그의 배짱과 폭넓은 인간관계 같은 세속적인 수완에 압도되듯이.

그의 글 중에 "지적인 휴가를 보내는 방법"(『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268쪽에 수록된)이라는 작은 칼럼이 있다. 이 칼럼의 문제의식은 시사-문화 잡지들이 바캉스 때만 되면 추천하는 지적인 책들이 너무 진부하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이미 배웠거나, 따분하리만큼 잘 알려진 것들, 가령, "『친화력』의 독일어 원서나 플레이야드 판 프루스트, 페트라르카의 라틴어 저작 따위"를 추천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추천서들을 첨부한다.

(1) 아타나시우스 키르허(1601-1680) 신부의 『빛과 그림자에 관한 위대한 이론(Ars magna lucis et umbrae)』(1635)가 있다. 이 책은 고서적상을 뒤져보면, 어쩌면 1645년 로마 판은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에코는 부연한다. 몇 가지 사소한 애로사항들이 있다고 빈정거리며.

(2) 유럽 여행을 준비 중인 사람에게는 조반 바티스타 라무지오(1485-1557)의 『항해와 여행에 대해서』가 있다. 에코의 말, "여행 중에 여행 이야기를 읽는다는 건 아주 자극적이고 강렬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총 6권 중에서 여행 중에 3권만이라도 모두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3) 제3세계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이슬람 철학의 걸작 몇 권이 있다는데, 우선 아델피 출판사에서 나온 카이카우스 이븐 이스칸다르의 『교훈서』가 있다. 이란어 원문이 없어 맛은 떨어지지만. . . . 또, 압둘 하산 알 아미리의 『키타브 알사다 왈리사드』도 있는데, 이 책은 테헤란에 가면 1957년 교정판을 구할 수 있다. 중동 여행 중에는 미뉴(1800-1875) 신부의 『교부 신학 전집』을 가지고 다니며 읽으면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덧말을 추가한다:

    "하지만 1440년 피렌체 공의회 이전의 그리스 교부들의 저서는 피하기 바란다. 그리스 라틴어 대조판 1백 60권과 라틴 어판 81권을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1216년 이전의 라틴 교부들의 저서는 2백 18권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중에는 서점에서 살 수 없는 것도 있을 터인데, 그럴 때는 복사본을 구하면 될 것이다."(270쪽)

(4) 이 외에도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가령, 유대교 신비주의 경전들의 아람어 원서들(『조하르』, 『세페르 예시라』, 모제스 코드로베로와 이작 루리아의 저작 들)이라든가, 라틴어로 된 『연금술 전집』이라든가, 장황하고 짜증스러운 대목이 너무 많은 바실리데스보다는 그노시스 파인 발렌티누스의 저작들, . . . 맑스의 『그룬트리세(Grundrisse)』나 『경외 성서』나 아니면 마이크로 필름으로 된 피어스(C.S.Peirce)의 미발표 논문 등이 있다.

고문서 학자들이나 이슬람 취미의 유럽 부르주아의 입에서나 오르내리는 저서들을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일반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것일까? 물론, 에코의 텍스트의 본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학교에서 나오는 교양 생활 정보지에나 수록된 교과서와 같은 책들만 추천해주는 문화-시사 잡지들을 험담하려는 의도 보다는, 도무지 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을 나무라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저러한 책들을 바캉스 중에 읽을 만한 것으로 여긴단 말인가? 새로운 형태의 바캉스 장르를 제안한 것인가? 마치, 그 오만한 오지 탐험의 전신이었던 19세기 유럽인들의 고고학 취미처럼. . . .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의 모든 백수 동지들, . . . 뭘 해야 할지 고민이 될 만큼 충분한 시간도 있고, 또 돈과 세속적 수완도 충분히 갖춘 세계의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은 통신문을 타전하는 바이다: "저 고물들을 좀 찾아서, 정말로 있기는 한 것인지 확인 좀 해 달라!"고. 그것만으로도 수 개월의 바캉스를 족히 써야겠지만.

p.s. 아무리 지적이고, 취미가 다양해도, 직업이 있는 분은 양보해 주시길.

Posted by huun

다소 엉뚱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프로이드(G. Freud) 얘기 잠깐하고 시작해보자. 살아있는 유기체는 쾌감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편적 원리로서 바로 쾌락원칙이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논문에서, 그 보편적 원리로부터 벗어나 외부에서 떠도는 몇 가지 예외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현실원칙의 부정하는 기능이나 우회로에 의해 발생하는 불쾌라든지, 쾌를 불쾌로 전환시키도록 이끄는 정신 조직 요소들의 군사 지리학과도 같은 투쟁이라든지, 어머니의 사라짐과 같은 불쾌한 경험을 재생산하여 반복하는 아이의 놀이라든지, 외상성 신경증에서 자주 보이는 외상적 경험에의 고착이나 반복 강박, 기능적 장애나 전이 현상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예들은 모두가 특정 개인에 의해 반복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불쾌와 관련이 있다. 쾌락 원칙으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예외들인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은 치료 과정에서 발견되는 이와 같은 경험적 예외들이 아니었다. 하나의 동질적인 원리나 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잔여물들을 다루는 것은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이끄는 처사일 것이다. 이는 더 이상 그 체계를 고수할 수 없으며, 나아가 새로운 체계를 구성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여야 함을 뜻한다. 예외들이 발생시키는 이와 같은 복잡성에 의해 쾌락원칙은 초과용량에 달한 것이다. 이 때에 필요해 지는 것은 무엇일까? 프로이드가 반복해서 언급했던 사색적 고찰, 즉 철학적 반성이 아닐까? 사색적 고찰이란 개념화되고 보편화된 원리로부터 벗어나 주변을 맴도는 예외들을 찾아내거나 분류하는 과정이 아니다. 실제의 경험적 자료들과 법칙을 초월하여 이 원리를 가능케 하는 보다 상위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과정. 이것이 사색의 문제이다. 프로이드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삶 본능의 토대라고 할 죽음본능에 관한 논의 뿐 아니라, 어떤 경우든지 쾌락원칙은 지켜진다고 하는 애매 모호한 논의에까지 이른다. 뭐 이런 저런 구체적인 얘기야 정신분석의 사정일 테니 여기까지만 하고 한 가지만 기억해 두어야겠다. 체계의 문제 자체를 검토하고 조사하는 과정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철학적 반성에 입회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관료는 철학을 하고 싶은 것일까? 혹은 그들의 공무(公務)라는 것이 철학하기 인가? 내가 아는 한 공무원들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철학적 반성은 그들과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기질과도 무관하다. 그런데 이들은 끊임없이 체계를 반성하고 구성하면서 심지어는 체계 그 자체가 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예외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체계에 집착하거나, 심지어는 그 유령(예외)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망상에서 출발한다. 이들에게 있어 체계의 완벽함이란 주변에서 배회하는 예외들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달성된다. 이에 따르면 예외들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예외의 발생은 체계의 경제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체계의 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외들은 힘겨운 에너지와 아까운 비용을 의미한다. 이를 최소화하려면 소리를 낮추고 전방(前方)만을 주시하며 가던 길만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버스노선 체계, 민원 처리 체계, 주민 등록 체계, 병원 관리 체계, 각종 회의 체계, 체계에 의한 체계, 체계에 관한 체계, 체계의 체계, 체계를 위한 체계, . . . 한도 끝도 없는 이 소란한 체계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체계는 언제나 조용하고 지루하며 단조로울 뿐이다. 동사무소 등의 관공서에 가보면, 경력이 오래된 공무원일수록, 무슨 말 안 하기 대결에 참가한 사람들처럼 조용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체계 그 자체가 되는 과정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체계란 자질구레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매끄러운 절차들 위에 우발적인 질문들이 생긴다면 그 체계는 실패한 체계이다. 행정 관료가 질문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찮아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소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체계는 체계여야 한다는, 따라서 절차들은 자동화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침묵으로 관철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용지가 어디에 있죠?"라고 하는 간단한 질문에조차 절대로 대답하지 않는 그들의 침묵에는, 고집 센 철학자의 미간에서나 볼 수 있는 무늬와 유사한 강도의 고뇌와 신념이 있다. 용지가 어디에 있냐고? 저런 어리석은 질문에 까지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다소 코믹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대답할 수 없는 그들의 애로사항을 이해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예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망상에서 비롯된 그 애로사항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애로사항은 애초부터 잘못 설정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체계로부터 이탈하여 자유롭게 떠도는 예외들은 필연적으로 있기 마련이다. 다르게 말해 완벽한 체계는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우선 완벽한 체계란 앞으로 생겨날지도 모르는 변수에 대해 완전한 예측과 통제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체계 혹은 모든 독립변수의 최초의 상태를 완벽하게 정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그 체계가 소모하는 양에 맞먹는 양의 에너지를 지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다. 보르헤스(L. Borges)의 글에 좋은 예가 있다. 제국의 완벽한 통제에 대한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국을 완벽하게 재현한 지도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지도와 제국의 일대일 대응을 가능케하는 현척지도에 대한 꿈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제국을 파멸로 이끈다. 전 국민이 지도 제작에 온 힘을 소진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Umberto Eco는 IL SECONDO DIARIO MINIMO(1992)에서 매우 짖꿎은 방법으로 이 현척지도의 불가능성을 논증한 바가 있다). 변수를 예측하고 통제하기 위한 여러 정보는 그 자체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정보가 창출하는 역 엔트로피는 소모되는 에너지량에 의해 반드시 다른 곳에서 엔트로피를 생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체계의 완벽한 통제가 효율성을 증가시킬 것 같지만, 사실은 효율성의 정도가 낮아진다. 국가나 사회경제의 관료제적 운용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관료는 자신들이 통제하는 전체체계나 하위체계를 숨막히게 하고, 그 과정에서 관료 자신 또한 질식시켜 버린다. 이를 부정적 피드백이라고 하는데, 하나의 상태는 그것이 관계하는 다른 상태들과의 평형을 유지한다는 일반 경제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어쨌든 완전한 체계는 관료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예외들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된다.


예측과 통제의 연속성에 기초한 완벽한 체계는 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할 비용 혹은 대가 때문에 실패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같은 체계 외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물질 자체의 성질과 같은 체계 내적인 한계 역시 존재한다. 료따르(J-F.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한 논문에서,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지면이 필요한 과학적 성과들(양자역학이나 원자 물리학의 도입, 새로운 수학적 인식과 같은)을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나열만 하자면 이러하다: 구(求)체의 부피에 따라 변화하는 내부 공기 량의 밀도 측정에서 나타나는 산발성(Jean Perrin의 실험), 비누와 소금이 섞인 물거품의 외형과 같이 표면에 접선을 그을 수 없는 불규칙성을 갖는 함수의 존재(Mandelbrot의 도함수 논의), 정밀측정의 한계를 보여주는 미소입자의 브라운 운동(Brownian movement), 브리타니 해안선, 분화구로 뒤덮인 달의 표면, 별을 이루는 물질의 분포, 전화 통화중의 혼선 발생 빈도, 대기의 난류나 구름의 모양과 같이 윤곽이나 분포의 규칙성을 보여줄 수 없는 대상, 만델브로(Mandelbrot)가 보여주었던 자기-상사성(self-similarity)을 갖는 프랙탈(Fractal)구조, 둘 이상의 통제변수가 동시에 역치(threshold)에 도달하였을 때 발생하는 상태변수의 예측불가능성에서 보듯이 결정된 현상들 속에서 발생하는 불연속성에 관한 르네 통(Rene' Thom)의 파국이론(catastrophe theory), 역설이론을 정신분열증에 화용론적으로 적용한 팔로알토(Palo Alto) 학파의 이중구속 이론(Double Bind Theory) 등이 바로 그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무엇일까? 료따르에 따르면 "연속 미분함수는 지식과 예측의 패러다임으로서 더 이상 우월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예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확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불확실성(통제의 결여)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며, 불확실성은 정확성과 함께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체계의 구성은 예외들을 배제하는 과정이 아니라 반대로 예외로부터 파생하는 것이 아닐까? 프로이드가 두개의 본능(생의 본능과 죽음 본능)을 불가분한 것으로 보았듯이, 체계는 그 자신 안에 체계를 벗어나는 예외들, 다시 말해 그 자신의 역설을 스스로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존재 윤리학적 질문을 하나 덧붙여야겠다. 만일에 완벽한 체계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이 가정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 간단한 예로, 어느 공무원이 자신의 공무를 매끄럽게 해줄 완벽한 체계를 확립했다면, 그래서 더 이상 불필요한 예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이 질문에는 이상적 관료체계를 추구하는 개인의 모순적 존재를 설명해줄 근거가 있다. 완벽한 체계가 불변의 상태에 이르면, 그 체계의 수행자들은 소멸되어야 한다. 우발적인 예외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 공무원이 왜 거기에 앉아 있어야 하겠는가? 어떤 체계에 있어 예외들의 소멸이란 그 수행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칸트(I. Kant)적 의미에서 순수 형식이 되어 가는 현대의 법체계에 있어, 그 주체가 더 이상 입법부나 사법부가 아니며 법관이나 법인은 더더욱 아니듯이 말이다. 이것이 시스템의 이데아가 아니겠는가? 포이에르바하(Ludwig. A. Feuerbach)는 『기독교의 본질 Wesen des Christentums』에서, 신이란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절대적인 표상으로 전화된 인간 자신의 속성이라고 쓴 바가 있다. 하나의 대상 일반 혹은 그 이데아가 확립되고 나면, 이제 모든 현상들의 배후에 바로 그 표상이 원인으로 자리 잡는다. 이것이 이른바 소외된 사회 속에서의 주체의 전도(顚倒)된 이미지이다. 지고(至高)의 존재는 종교적 환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는 그 보다 더 종교적인 강박이 있다. 신경증적이기까지 한 체계에의 망상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주체는 더 이상 그 체계를 운용하는 수행자가 아니다. 수행자란 운용 절차상의 한 기능일 뿐이다. 체계의 신경증적 망상이란 바로 체계 그 자체가 순수 형식으로서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개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추상적 인간으로 혹은 인간 일반으로 부정하거나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에 살아갈 수 있다면 체계에 내재한 궁극적인 역설이란 바로 이 개인들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이 하나의 예외이다.


이러한 얘기들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예외들이 사라진 사회, 완벽한 체계의 사회가 실현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손가락만 빨고 있겠다는 말인가? 스스로 체계 자체가 되어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 사회의 관료에게 필요한 것은 예외 없는 체계나, 그 체계에 대한 사색이 아니다. 완전한 체계란 무능력의 망상적 반어(反語)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외들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음을 수긍하는 것, 그리고 이들을 단발적으로 처리하는 능력, 즉 땜질 작업에서나 있을 법한 유연함과 협상능력이다. 엔지니어가 아니라 땜쟁이가 될 것을 당부한다. 또 그들이 거기에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목적이 아니겠는가? 개인의 삶이란 최종적인 체계나 목적을 향한 과정이 아니다. 최종적이라고 가정된 체계의 예외들, 그 내부의 역설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예외 없이 지켜지는 원칙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관료라고 해서 이 원칙이 달라질까?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