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3/25 혼란스러운 욕망과 물질의 흉내
  2. 2006/08/30 추상이란 무능력을 의미한다 (3)

현대인이 불안해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물질적 부의 양과 행복이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족할수록 더 행복해지고, 빈곤할수록 덜 행복해 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물질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있지만, 행복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물질적 부는 그 많고 적음을 잴 수 있는 척도가 분명히 있지만, 행복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행복"이나 "더 적은 행복", 혹은 "더 큰 행복"이나 "더 작은 행복"과 같이 행복의 많고 적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실은 우스꽝스러운 용어법이다. 그것은 마치 "더 크고 많은 음악" 혹은 "더 작고 적은 멜로디"이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난센스이다.

이렇게 "더" 그리고 "덜"의 개념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습관은 우리의 삶이 물질이나 물건을 측정하거나 비교하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비교하다 보니, 그 소유자가 느끼는 행복감도 덩달아 비교가 되는 식이다. 심리적인 가치를 물질이나 물건으로 둔갑시키는 예는 아주 많이 있다. 선물의 가격에 따라 애정과 존경의 정도를 가늠한다든지, 재산의 양으로 인격을 판단한다든지, 성적표의 점수로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모두가 물질의 양적인 가치와 심리적 질적 가치를 혼동하는 데서 발생하는 윤리적 오류들이다. 에피쿠로스(Epicurus)는 이 오류를 "어리석은 판단(idle opinion)"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건에 대한 우리의 욕망도 어리석은 판단의 좋은 예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쇼핑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물건을 구매하거나 소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어 보인다. 특히 현대인은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핍한 기분을 잊기 위해 쇼핑몰을 기웃거린다(이와는 반대로 기업과 상인은 사람들이 쇼핑몰을 기웃거리도록 그들이 공허해지고 울적해지고 궁핍감을 느꼈으면 하고 바란다). 아름다운 원피스 한 벌이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준다고 정말로 믿는 푼수 떼기는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한 벌 장만하고 나면 최소한 새로운 사람은 만날 것 같아 보인다. 또 근사한 벤츠가 친구들 사이에서 본질적인 위신을 세워줄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바보는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한 대 뽑아 동창회에 나가면 왠지 자신감 비슷한 것이 솟아날 것만 같다. 터프해 보이는 흰색 코란도를 타면 기어 다니는 붉은색 티코 운전자를 깔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우중충한 철티비 보다는 뽀대나는 MTB가, 한 송이 보다는 한 다발의 장미가, 모나미 보다는 몽블랑이, 인스턴트 보다는 스타벅스 원두가 더 근사해 보이고, 무엇보다도 더 크고 더 많은 행복을 기대해도 될 것만 같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저렇게 "더" 부담스러운 물건들이 많을수록, 허기와 공허의 빈 자리는 "더" 커진다.

물질이 우리의 본질적인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데도, 우리는 왜 자꾸만 물질을 더 선호하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이에 대해 귀여우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Objects mimic in a material dimension what we require in a psychological one."(Alain de Botton,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p. 65)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물건들은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흉내를 낸다."

이 멋진 말이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무능력과 태만이다. 우리가 심리적인 차원에서 욕망하는 것들, 가령 '사랑', '우정', '행복', '자신감', '자유', . . . 이 가치들은 우리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상태이다. 이들은 획득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 불가해한 심리 때문에, 예컨대 우리가 사랑에 빠져 버렸을 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내뱉는 말은 "내 마음 나도 몰라!"이다. 뿐만 아니라 우정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가치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잠을 설친다. 이때! 우리는 이들을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좀 더 쉽게 가질 수 있고, 좀 더 분명하게 그릴 수 있고, 좀 더 단단하게 잡을 수 있는 그 무엇, 바로 물건을!

사랑을 심장(Heart, ♡)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런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그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아는 것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려오는 것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사랑=심장이라는 도식이 생긴다. 한편, 사랑 받을 때 그녀는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랑을 받을 때 혹은 오르가즘을 느낄 때, 눈 앞에서 화사한 꽃밭이 보인다. 이제 그녀는 한 다발의 꽃을 받을 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질주의 쾌감을 주는 자동차가 자유를 주고, 열 잔의 술이 우정을, 고급스러운 저택이 행복을 준다고 믿게 되었다. 물건들이 우리의 심리적 욕망을 닮아가면서 물질적으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정복하려면 참을성이 필요한 우리의 복잡한 감정과 욕망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것과 대충 닮아 보이는 물건으로 재빨리 얼버무리는 것이다(사실, 문학에서의 은유라든가, 심지어 우리의 언어 자체가 이러한 재빠른 얼버무림이다).

이러한 얼버무림이 좀더 심해지면, 물신주의에서 보는 것과 유사한 가치들의 전도가 일어난다. 다이아몬드가 사랑의 원인이 되고, 대저택과 통장의 잔고가 행복의 출발이 되고, 자동차가 자유의 조건이 되는 식이다. 고착성 혹은 퇴행성 도착이라고 알려진 물신주의자가 스타킹을 성적 쾌감의 증표로 여기듯이, 우리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여 사회활동이나 우정을 대신해줄 것 같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우두커니 앉아있다.

Posted by huun

베르그송은 생명의 미시적 운동이 전체 진화과정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일 수 있는가를 한 가지 예를 통해 이론적으로 논증하였다. 물론 그는 실제의 운동이 양적으로 추상화됨으로써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아킬레스는 실제로 어떻게 거북이를 추월할 수가 있는가? 사물의 운동을 공간화해서 이해하는 수학적 방식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운동을 직선 위의 무수한 점들의 통과와 이행으로 이해한다면(우리는 실제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운동하는 사물은 직선 위의 무한수의 점들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실제적인 이동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쏜 화살은 과녁에 도달 할 수 없으며,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와는 반대가 아닌가? 우리는 실제로 과녁에 도달하는 화살을 본 바가 있으며,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완전한 이행 또한 경험한 바가 있으며, 거북을 추월하는 아킬레스를 보지 않는가? 이론과 경험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을 그리고 나아가 사유의 양(量)적인 메커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했던 질문이다. 실제의 경험에 대해 이론적 한계에 직면할 때, 필요해지는 것은 그 경험을 설명해줄 하나의 연역이다. 이 부분에서 베르그송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존재의 생성(진화)과 지속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운동에는 구별되어야 할 두 수준이 내재되어 있다. 한편에는 양적으로 분할 할 수 없는 운동 그 자체(운동성)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이 있다. 운동성이란 순수한 질 혹은 강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측정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궤적)을 운동 그 자체와 혼동한다. 여기에 바로 엘레아 학파의 오류가 있다. 그들은 운동하는 아킬레스로부터 질적 운동성을 제거하고 아킬레스와 거북이 지나간 궤적을 운동 자체와 혼동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의 서로 다른 질적 운동을 동질적인 공간에서의 동질적 운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운동 중에 있는 물체를 상상적으로 정지(imaginary stop)시켜놓고 보면, 그 물체가 지나간 공간(거리)를 운동과 동일한 외연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킬레스의 운동은 동질적인 공간 속에서 앞서가고 있는 거북의 운동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한 점과 다른 점의 거리를 균등 분할하여 측정할 수 있듯이, 운동 역시 그것이 지나간 좌표의 점들의 이행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엘레아 학파] 아킬레스 전체의 운동을 아킬레스의 운동이 아니라 거북의 운동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거북을 쫓고 있는 아킬레스가 아니라, 동일한 종류의 발걸음으로 동시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두 마리의 거북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Henri Bergson.
Time and Free Will. Eng trans by F. L. Pogson. New York, 1921. p. 113)


실제의 운동은 좌표 위에 결정되어 있는 수학적 의미의 점과는 다르다. 하나의 순간으로 즉 움직이지 않는 점으로 파악되는 운동은 우리의 지성이 재구성한 결과이지, 단숨에 일어나는 실제의 운동은 아니다. 아킬레스를 추상적 존재로 파악할 때, 즉 부동하는 점들을 소극적으로 통과하고 있는 수학적 존재로 이해할 때, 우리는 아킬레스를 거북과 동일한 방식의 걸음을 반복적으로 내딛고 있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두 마리의 거북이란 그런 의미이다. 존재들의 운동이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은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질이 된다. 그러나 실질적 존재로서의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방식의 적극적인 노력, 직선 위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노력을 취하지 않겠는가? 이 노력이란 거북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 자신만의 독자적인 발걸음으로 구성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들은 동일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수준의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 다른 운동을 취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아킬레스와 거북의 한 발 한 발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의 점들간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운동이 공간의 이동으로 환원되고 나면, 실제적인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제의 운동이란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이행과 생성일 것이다. 그것은 운동체만의 이행과 생성일 뿐만 아니라, 운동체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 전체의 이행과 생성이다. 그래서 그 한 발은 아킬레스와 거북 사이에 놓인 장(field), 즉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포함하는 그들간의 관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그 변화란 그들의 의식을 넘어서 있다. 나아가 이것은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이는 공간적 운동에만 관련되지 않는다. 유년기에서 청년기 혹은 성년기로의 성장과 같은 존재의 질적 변화에도 동일한 공식을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운동에는 운동하는 사물이 연속하여 지나온 각각의 위치 이상의 것이 있으며, 하나의 생성에는 순간 순간 통과하였던 (정태적인)형상보다 더 한 이상의 것이 있으며, 형태의 진화 또한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잇따르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 Eng trans by Arthur Mitchell (New York: Random House, 1944). p. 343.)


위의 논거를 약간 변형시켜 보면, 우리는 베르그송과 맑스의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은 우리의 무능력을 예증한다. 추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심지어는 우리 앞에 놓인 대상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우선 추상은 존재를 정지된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고립시켜 놓으면서 출발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지된 존재의 실제적인 이행과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그 존재 외부의 원인으로서의 초월적 실체를 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부정(negativity)으로 결정하는 추상은 바로 노예상태를 전제로 한다(맑스는 이를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두 원자론의 차이로 설명한 바가 있다. 참고로, 칸트나 버크(Edmund Burke) 그리고 료따르나 들뢰즈가 논의했던 숭고미와 추상충동에 대한 문제는 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존재란 바로 (실제로 운동하는 아킬레스처럼)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의해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쓰는 존재이다. 인간의 노예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이미 맑스가 역사적 수준에서 정식화했던 이 내재성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더 근본적인 수준 즉 생명의 진화의 문제로 파고들었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