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과 물질 혹은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뒤죽박죽이다! 더 정확히는 지속의 물질화 혹은 시간의 공간화! 그리하여 삶 자체의 결정론적 기계론적 도식화!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정! 이것이 베르그송, 들뢰즈, 나아가 베르그송주의의 비판의 핵심이다.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하는 많은 체계들이 있다. 가령, 운동을 운동체나 운동궤도와 뒤섞어 혼동했던 고전철학(아킬레스와 거북의 동질성), 시간을 공간의 좌표체계로 환원하여 공간을 주파하는 운동의 무의식적 단위로 혹은 상대적 좌표에 배열된 불연속적인 간격들로 파편화한 근대 과학(근대역학이나 상대성이론), 더 지독한 경우로는 마르크스가 '사물화 과정'이라고 말했던 것, 즉 효율적이고 용이한 대상으로 존재를 기능화하기 위해 그것으로부터 지속을 배제하여 순간적 상태로 환원하는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효율과 기능에 대하여 지속과 시간은 일련의 장애 즉 병적인 상태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는 지속의 모든 두께와 부피의 제거, 나아가 본성적 차이의 무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주의는 이러한 역사적 체계들 이전에,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도식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살기 위해 현실적 필요에 사로잡혀 있다. 지각은 현재 필요한 것만을 수용하고 나머지는 놓쳐버림으로써 사물로부터 그 온전한 실재성을 왜곡하거나 변형한다. 말하자면 지속과 시간을 현재의 필요로 수축시키는 것이다. 현실적 필요의 완성은 바로 행동이다. 행동은 세계를 당기고 밀고 휘어지게 함으로써, 행동의 주체를 세계의 중심에 설정하고, 실재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그 중심에 대한 상대적 존재로 집결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주의의 중요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결정론적 기계론적 사유로부터 시간을 되찾는 '기계'를 발명하는 일이다. 기계론과 결정론에 빠지지 않을 것! 현실적 필요에 사로잡혀 삶을 진부함 속에 가두지 않을 것! 존재로부터 그 고유한 시간, 과거, 지속 전체를 구해낼 것!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했던 것처럼 사회 경제적 소유관계의 재구성보다도 더 근본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가장 훌륭한 기계는 물론 예술이다. 들뢰즈가 생각하는 예술의 힘은 존재 고유의 시간의 보존에 있다. 예술에 관한 그의 대부분의 저작은 '존재의 본성적 차이와 긍정'이라는 주제를 기반으로 한다. 가령 운동, 지각, 감정, 충동, 행동, 지속이 영화 이미지에서 어떻게 자신의 고유한 형태로 현존하는지를 분류하여 그 이미지 각각을 긍정한다든지(『영화』의 경우), 현재와는 본성적으로 무관하게 과거가 그 자체 즉자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주어 과거, 기억, 시간 전체의 순수현존을 긍정한다든지(『프루스트와 징후』의 경우), 정신분석이 새도-마조히즘이라는 증후군으로 뒤섞어놓았던 두 작가의 고유한 문학 혹은 변태성을 본성적으로 다른 계열들로 나눈다(『마조흐: 냉정함과 잔혹함』의 경우). 존재의 긍정이란 현실적 사회적 관계 속에서 다른 존재와 뒤섞여 있는 동안에도 가지게 되는 권리상의 해방, 즉 존재가 그 자신 안에서의 시간 전체의 보존을 의미한다. 본성상의 차이의 발견과 존재의 긍정이라고 하는 들뢰즈의 예술론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잠재적 보존 그리고 그 직접적 현시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다른 형태로 질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속 혹은 시간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시계추의 반복처럼 공간에 끼어 있거나, 달리는 자전거처럼 운동에 실려 있거나, 표정 짓는 얼굴처럼 육체(물질)에 묻어 나오는 식의 간접적 현시 말고, 그들―육체, 기능, 운동, 현재―로부터 해방되어, 그들이 사멸해도 여전히 그 순수현존이 스스로 남아 직접적으로 현시되는 시간 그 자체의 이미지. 어떤 점에서 시간을 직접적으로 본다는 것은 과거를 그 즉자적 상태에서 본다는 것이다. 현재적 필요라든가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순수한 상태의 비전의 통찰! 이것이 잠재미학의 조건이며, 이로부터 현시되는 실상의 이미지는 결국 우리를 삶의 긍정으로 이끌 것이다.

시간(이미지)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가능성이 있는 현실적 이미지들이 있다. 들뢰즈는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와 같은 전후(戰後) 현대영화의 공통적인 형식을 '순수 시지각적 이미지'(image pure optique)라고 불렀다. 예컨대, 고전적 리얼리즘에서는 행동 중심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계급이나 공동체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중심으로서의 주인공이 있고, 그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자연적 환경이 있다. 그는 현실의 필요에 따라 환경을 지각하고, 그의 지각은 곧 행동으로 연결되고, 나아가 그의 행동성은 환경 전체의 변화로 이어져 삶의 새로운 조건이 탄생하는 식이다. 그러나 전후의 현대적 상황은 이러한 행동 중심의 도식(“환경1-행동-환경2”)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지각이 행동으로 혹은 행동이 다른 행동으로 혹은 행동이 환경의 변화로 연장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중단, 망설임, 머뭇거림, 더듬거림과 같은 특이한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인 말이나 행동에 난데없이 끼어든 ‘공허’라든가, 일상적인 제스처가 중단되고 갑자기 무언가를 ‘주시’하며 순수한 관조에 사로잡힌 상태라든가, 여행이나 배회를 하는 가운데 맞닥뜨리게 된 어떤 ‘딜레마’, 익숙한 지각이나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는 참을 수 없는 광경의 ‘목격’, 낯선 풍경으로부터 감지하게 되는 ‘위기’ 혹은 막연한 ‘공포’, 이러한 관조적 이미지들은 현실에 행동성의 부재, 박탈, 균열을 끌어들인다. 행동이란 관념적 도식의 현재화 혹은 현재의 물질적 도식화인데, 이 도식 구도에 균열이 일어나 어떤 의도되지 않은 우연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순수한 시각적 청각적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 나아가 관조적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한편 이 관조적 상황은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시간의 발생이며 창조의 징후이다.

관조적 상황에서는 모든 존재가 행위 주체에 종속되기를 그치고 그 고유한 실재성을 취한다. 말하자면 행동적 공간(리얼리즘적 공간)에서 세계를 견인하는 중력으로서의 중심에 난입한 균열로 인해, 관계하는 모든 사물을 특정 상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는 여행자나 떠돌이가 낯선 풍경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모든 감각적 편력을 설명해준다. 생경한 비전에 빠진 여행자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모든 감각능력을 동원하지만, 사물들은 즉각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하거나 어떤 쓰임을 위해 기능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해방감을 주는 자연물처럼 의미가 미결정적인 상태에서 그 고유한 실재성을 드러낼 것이다(비스콘티의 영화들). 따라서 관조적 이미지에서는 주관성과 객관성, 상상과 실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식별 불가능해진다. 현실적 필요로부터 벗어나 필요가 야기하는 행동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특정한 목표에 따라 행위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미결정된 상태로 지연시킴으로써, 거기서는 구체화된 것도, 정향된 미래도 없으며, 추억이나 몽상 혹은 주관적 공허와 함께 객관적인 사실들이 소멸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들의 잠재성이 강화된다(안토니오니의 영화들). 관조는 잠재성의 열림 그 자체이며, 이는 우리를 사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실상의 구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인물들 대부분은 어린 아이라든가, 여성이라든가, 낯선 곳에 다다른 여행자라든가, 프롤레타리아와 같이 사회로부터 행동성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약자 혹은 소수자로서, 예술가나 작가가 그렇듯이, 사회적 행동 영역을 박탈당하여 상대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있다. 이러한 무기력이 그들로 하여금 난폭하게 드러나는 실상을 맞닥뜨리게 하고, 그들은 거기서 표현할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실재를 바라본다.

관조적 상황이 가장 절대적인 형태로 현시되는 이미지가 바로 오즈 야스지로의 그 유명한 “정물” 혹은 “베게-샷”(pillow-shot) 혹은 “정적”(cases of stasis)이다. 오즈의 정물은 인물들의 기계적이고 진부한 일상적 제스처들―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술집으로, 술집에서 다시 집으로, 혹은 전형적인 말소리와 분위기의 대화―사이에 삽입된다. 그것은 간혹 고층건물로 나오기도 하고, 한적한 공원이나 공터의 자연물, 도시의 작은 골목이나 술집 네온사인, 산이나 바다의 먼 곳, 실내의 텅 빈 복도, 방안의 가구들, 특히 방 안에 배치된 꽃병, 골프채, 술병, 책, 책상, 스탠드, 복도와 벽에 비치는 물그림자, 밤길을 비추는 가로등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들뢰즈는 이 정물이미지가 이탈된 공간이라고 지적하였다. 장면들 간에 연결되는 공간도 아니고, 행동의 매개가 되지도 못하며, 행동하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이나 인물들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임의로 설정된 일종의 균열이다. 행동에 적합하게 설정되어 움직임이나 시지각 대상에 종속된 리얼리즘적 공간이 아니라, 연결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순수하게 자율성을 가지는 탈구 상태, 더 정확히 그 자체 지나가는 어떤 것, 즉 이미지에 담긴 특정 대상과도 무관한 지속 그 자체의 직접적인 이미지이다. 들뢰즈는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예로 든다: “『늦봄』에서의 그 꽃병은 딸의 온화한 미소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의 장면 사이에 삽입된다. 무엇인가가 생겨나고 변하고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의 형식은 그 자체 달라지지 않았고, 지나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시간, 시간 그 자체, ‘그 순수한 상태의 자그마한 시간’이다. . . . 오즈의 정물은 지속한다. 그 10초 동안의 꽃병이라는 하나의 지속을 취한다. 그 꽃병의 지속은, 변하고 있는 상태들의 연속을 통해, 정확히 바로 그 견디어내고 있는 것의 표상이다.”

사실상 삶을 지배하는 것은 여행이나 배회가 아니라 일상적인 작은 행위들이다. 오히려 여행조차 일상의 한 이면의 반복일 정도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곳은 어김없이 전형적이고 진부한 공간(고궁, 온천지, 술집, 가정, 직장)이며, 우리의 대화 역시 대본이 마련된 퍼포먼스처럼 진부한 말소리와 분위기로 채워진다. 우리는 모두가 아주머니, 아저씨, 아들, 딸,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서 판에 박힌 캐릭터로 살아간다. 들뢰즈가 명명했던 이 “무료한 시간들”은 삶을 변화로 이끌지도 주어진 상황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도 못한다. 고요한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들, 가령 딸의 결혼식이 끝나고 혼자 숨죽여 흐느끼는 아버지의 서글픔(『꽁치의 맛』), 잠든 아버지를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딸의 연민(『늦봄』), 죽은 아버지에 대해 모질게 말을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딸의 애증(『마지막 변덕』), 심지어 죽음조차도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슬픔과 눈물 역시 결국은 진부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진부함은 삶 자체 나아가 대자연의 본성에 기인한다. 자연은 빈틈없는 규칙에 따라, 필연적 질서에 따라, 하나의 항에서 다른 항의 연쇄로, 거대한 방정식의 이항(移項)과도 같은 계열들의 움직임으로 짜여있다. 자기중심적으로 부분만을 지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에게 이 질서는 부서지고 혼란한 형태의 작은 단편들로만 보이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진 많은 것들이 우연적이며 특이한 경험이 된다. 일상의 한 국면이 다른 국면과 마주치면서, 마치 그 가운데에 침입한 드라마처럼, 그 국면들이 놀라운 사건이나 강렬한 첨점으로 보이는 것이다. 신의 지각에서 본다면 아주 단순하게 해명 될 만한 자연적 질서의 사소한 단편이 인간에게는 거대한 재앙으로 보이거나, 타인과의 우연한 만남조차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운명의 외관을 취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감동은 자연의 풍경에서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수학과도 같은 단순한 자연에 자신의 혼란한 감정을 투영하여, 그 지루한 일상적 규칙으로부터 벗어나 풀길 없는 격정을 만들고자 한다. 친구들의 농담(『꽁치의 맛』)이나 음흉한 익살(『가을햇살』) 혹은 시위 하듯 친정에 와서 살고 있는 여인의 남편에 대한 반항(『동경의 황혼』)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대자연의 고전주의에 맞선 기약 없는 낭만주의의 반항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어머니 때문에 생긴 동생의 깊은 상처를 깨달은 언니가 자신의 어린 딸을 생각하여 다시 남편에게 돌아갈 것을 결심하듯, 혹은 아버지가 딸의 죽음을 겪고 난 후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어 거대한 산이 환하게 드러나고 나무 그림자가 실내 복도를 드리우자 넥타이를 매고 새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가듯, 거스를 수 없는 막대한 힘 앞에서 굴복하고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무기력한 반항일 뿐이다. 때문에 우뚝 솟은 나무나 눈 덮인 산, 잔잔한 대양(大洋)의 장엄은 우리의 낭만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낭만주의가 빚어낸 요란한 동요와 혼란을 아무 말 없이 태연한 일상으로 되돌릴 뿐이다. 자연을 바라보며 우리는 떠나왔던 바로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또한 낭만주의자들이 간혹 산의 이미지에서 느끼는 무지막지한 대자연의 숭고이다.

바로 여기에 정물의 이미지가 가지는 심오함이 있다. 정물은 지나가는 그 무엇을 직접적으로 현시한다. 하루의 일상적 사건이 생겨나고, 밤이 되어 하루 동안의 동요를 추스르고 잠에 빠지듯, 정물은 사물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간의 잠재적 이행을 시각적으로 보존한다. 잠든 인물의 의식이 희미해지거나 꺼져있는 동안에도 날들은 스스로 보존되어 밤과 새벽을 지나 또 다른 날들로 운반될 것이다.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되어 해가 뜨거나, 외출에서 돌아와 잠시 앉아 있는 동안, 잠시 동안의 시간의 변화가 그 정물 안에서 잠재적으로 일어난다. 공간을 이동한 것도 달라진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물은 시간을 일정한 부피와 두께로서 보존한다. 빛, 명암, 색채 및 실재 전체가 겪는 변화의 구도! 의식적이고 행동적인 지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형상의 미묘한 질적 변화! 이것이 바로 정물이며 시간 그 자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물의 심오한 가치는 삶을 견디어내어야 할 그 무엇으로 체험하는 인물들의 내적 지속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오즈의 영화에는 많은 사회적 변화의 환경이 깔려 있다. 산업사회 혹은 패전의 절망, 전통적 가치의 변화와 붕괴, 이러한 변화를 가장 첨예하게 보존하는 장소로서의 가족과 이웃, 거기서 우리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형태의 실상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오즈의 이미지의 가치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의 기저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어떤 실상의 목격이다. 가정으로 난입한 산업(『동경이야기』), 의식의 변화(『부초이야기』), 전통과 현대 혹은 세대의 변모와 갈등(『꽁치의 맛』, 『부초이야기』, 『가을햇살』), 패전이후의 달라진 관계들(『꽁치의 맛』)과 같이, 일본인들의 잔잔한 일상 속에 들이닥친 현대성의 병리적 징후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삶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것―욕망, 이별, 죽음 등―을 견뎌내어야 하는 고통을 안고, 인간은 삶 자체에 내재한 참을 수 없는 슬픔에 파묻혀 있다. 아름다운 영화 『동경의 황혼』 마지막 장면에서 딸이 죽은 후 밤을 샌 아버지가 맞는 아침의 대기에는 그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힘겨운 슬픔이 배어있다. 오즈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여 정물을 통해 환기되는 이 슬픔의 정서는 무엇인가를 견디고 기다림으로써만 완성될 수 있는 시간 그 자체의 직접적인 계시이다. 결국 다시 대면 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새벽을 마중하기 위해, 아니면 대자연의 바람 속으로 흩어지기 위해, 삶과 인간에 대해 그 어떤 질문도 유보한 채 조용히 앉아 자기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우여곡절로 인해 빠져나와 버린 일상적 동요가 눈 덮인 산과 고요한 나무를 닮아가며 대자연의 질서로, 빠져나갈 수 없는 그 무지막지한 방정식의 한 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추스른다. 본질적으로 시간은 기다림(혹은 망설임)을 통해서만 체험된다. 특정 대상에 대한 상대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기다림, 즉 자신의 몸뚱이와 과거전체를 직접 짊어지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번민과도 같은 절대적 기다림이다. 오즈의 정물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정물은 시간-지속-기다림 그 자체인데, 그 기다림에는 하이쿠(俳句)에서의 기레지(切字)가 자아내는 일본 특유의 영탄(詠歎)―지성의 질문과 부정을 통해 존재의 이해에 도달하려는 서구의 지성과는 대조적인―에 비견할만한 삶과 존재의 긍정이 주는 슬픔이 있다. 정물은 그 자체 견디어내는 시간, 견딜 수 없는 내적 동요나 감당할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을 삭이는 시간이다. 그것은 개인이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지속-이미지이다. 세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에 봉착한 네오리얼리즘의 사유의 시간과는 다르게, 오즈의 정물에는 하염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애달픔의 시간이 있다. 설탕이 물속에서 녹아내리고 물이 끓어 수증기가 피어올라 대기에 퍼질 때까지(『창조적 진화』), 어머니라고 하는 한 사회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 한 인간 나아가 자연이라는 존재론적 수용에 도달할 때까지(『가을햇살』), 죽음을 자연의 한 흐름으로 수용함으로써 슬픔을 가눌 수 있을 때까지(『동경이야기』, 『동경의 황혼』),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욕망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포기할 때까지(『부초이야기』, 『가을햇살』, 『꽁치의 맛』), 개인은 기다림 속에서 자신을 초월한 ‘비개인적인 시간’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관조의 시간’이 최종적으로 이르게 될 일원론, 베르그송주의자 들뢰즈가 말했던 ‘지속의 세 번째 단계’, 즉 물의 흐름과 새의 비상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단 하나의 시간이다.

우리는 내면화된 구조와 법칙에 따라 사물을 인지하고 느낀다. 지각과 행동의 대상은 현실적 필요와 흥미를 반영하는데, 우리는 실재의 다양한 측면들 중에서 흥미롭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을 지각에서 제외한다. 자연에 대한 이 편협한 이해는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라든가, 이데올로기적 믿음,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삶의 요구에 적합한 것만을 수용한 결과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판에 박힌 것’만을 지각하고, 또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부하고 판에 박힌 연쇄에 균열이 생긴다면 어떨까? 네오리얼리즘의 풍경이나 오즈의 정물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 이미지들은 일상적이고 도식적인 진부함 속에 난입한 단절과 균열이며, 행동적 현실의 파탄과 붕괴이다. 그러나 한편 그 균열은 편협한 행동-도식이 놓쳐버린 어떤 실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지각 가능한 현실을 넘어서고, 행동보다 더 근원적이고 강렬한 어떤 것의 현시. 실상이란 판에 박힌 인식에서가 아니라 도식화할 수 없는 어떤 것 속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숭고한 자연과의 대면에서 그랬듯이 능력의 불일치와 부조화 속에서, 능력들 각각이 해방되어 반(反)기능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즉 알려진 것 외부의 잠재성 속에서 탄생한다. 네오리얼리즘이나 오즈의 이미지는 모두가 잠재적 세계, 즉 가시적이고 결과적인 것 ‘이전’ 혹은 그 ‘이후’의 저편에 은밀하게 내재하는 투시적 세계를 향해있다. 그것은 ‘견딜 수 있는’ ‘허용 가능한’ 지각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습관적 도식이 되어버린 망막의 기능을 효력 정지시켰을 때에만 희미하게 현시되었다가, 우리가 생활의 요구로 돌아갈 때 다시 꺼져버리는 과잉의 세계이며 절대적 타자성의 세계이다.

따라서 실상의 투시는 이미지의 존재론이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길과 멀지 않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이미지란 실재 그 자체이다(“우리는 사물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물을 지각한다”). 이미지가 기만적이고 실상을 왜곡하는 부정적 존재라면, 그것은 이미지로부터 흥미로운 것만을 취해 이미지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수용하는 우리의 판에 박힌 지각과 행동의 악습 탓이다. 거기에는 그 악습이 초래하는 삶의 진부함을 필요로 하고 이용하고 조장하는 현실적 이해관계 혹은 권력이 있다. 삶의 기만을 꿰뚫고 그로부터 단절하려면, 그 무엇도 덧붙이거나 빼지 않은 채 이해관계와 권력이 덧붙여 놓은 색채들을 소거시키고 비워내어 진상을 투시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과 기만에 맞선 피로한 투쟁이나 구호 그리고 그 힘을 얻기 위한 휴머니즘적 감동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그것은 어쨌든 또 하나의 행동성으로 뒤섞일 것이고, 나아가 또 다른 진부함의 상태로 떨어져 버릴 테니까. 결국 진정한 이미지는 물질과 공간의 도식으로부터 시간을 해방시킬 때에만 현시될 것이다. 이미지가 단지 감각적 운동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아도 혹은 가시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담장에 기대어 서 있을 때조차 그 고유의 존재성을 보존하는 자전거처럼, ‘읽혀지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읽는다는 것은 사물로부터 잠재적인 것, 즉 과거 전체를 끄집어내는 활동이다. 읽기는 사물의 현재성을 과거로 되돌린다. 그리하여 우리의 현실적 필요 때문에 지각이 왜곡시킨 존재의 고유한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물론 읽기에 머물지 않고 쓰기(아상블라주)로 더 나아가야겠지만 말이다. 이미지는 그 전체가 읽혀져야 하고, 이 독서 자체가 바로 이미지에 지속을 부여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세계에 ‘문학성’을 부여하는 직관의 잠재적 역량―신비주의적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음을 배제하지 않는―이 아닐까?

감각과 운동을 넘어 참된 시간의 이미지로 열리는 잠재미학의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 우선 이미지는 공간, 감각, 물질의 관계를 벗어나야만 하고, 나아가 운동성으로부터 단절하여 바라보는 단계가 필요하며, 필요와 관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미지의 부분만을 지각하는 편협한 단계를 지나 해방된 지각으로 이미지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지속과 시간의 진정한 이미지는 우주가 책이 되어가는 과정과 나란히 공존한다. 그러나 독서는 진부하고 판에 박힌 세계로부터 실상을 추출해 낼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로는 판에 박힌 세계의 해방일 수는 없다. 그를 위해서는 다른 역량, 즉 무한한 관계 이미지의 구성으로 사유를 전개하는 쓰기의 역량과 연계되어야만 할 것이다.
. . . (원본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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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따주의 대가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은 영화 예술이 해야 할 일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의 구성(창조)에 있다고 생각했다. 몽따주는 그 자체가 이미 변증법적 창조이고, 재료로서의 현실적 파편들의 파지(Aufhebung)이다. 각각의 조각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유인(attraction)하기도 하며, 대립, 모순, 보충, . . . 그러한 범 우주적 파동 속에서 폐지되었다가 새로운 현실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한다.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그러한 파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한데, 영화 예술이 바로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령, 마르크스 식으로 말해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로서의 분노!"를 창출하는 것이다.
반면에 네오-리얼리즘을 옹호했던 바쟁(Andre Bazin)은 몽따주가 자연에 뭔가를 억지로 덧붙이는 행위라고 못 마땅해 했다. 그에 따르면 현실은 살아있는 것이고, 스스로 지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예술은 그 살아있는 지속에 관념을 덧붙여 왜곡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며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영화란 무엇보다도 기다림으로부터 출발한다. 영화가 문학이나 회화와 본성적으로 다른 그 고유의 미학이 있다면, 다름 아닌 이 다큐멘터리즘이라는 것이다.
 

그들 말 대로 정말로 그런 것인지, 전제정권에 의한 민중의 학살이라는 유사한 테마를 다루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영상을 통해 이 대조를 확인해보자. 첫 번째 영상은 에이젠슈타인이 직접 구성한 몽따주 아니 새로이 창조된 현실의 이미지이다. 두 번째 영상은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포착한 살아있는 현실(약 2분간)의 이미지이다.  장면보기(용량이 커서 조금 기다려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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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란 비개인성에 도달한 상태이다. 그것은 나의 현재적 관심과 필요와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벗어나, 존재를 그 자체로 보려는 노력이고, 그 가능성에 대한 비젼이다. 오로지 이 방식만이 모든 존재들을 종속 상태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역사성의 정신적 토대이자 조건이며, 우리와 같은 고매한 취향의 소유자를 흥분시키는 유일한 시간이다.

미국인들이 만든 문화 상품은 언제나 굉장한 규모와 테크놀로지로 우리를 놀라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멜 깁슨이 또 등장했으니, 그의 얘기를 잠깐 해보자.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예술적인 관점에서보다는 상품의 관점에서 얘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모두들 박수를 치고 있으니, 한번 따져볼 수 밖에.

그의 영화 이미지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가 대단한 강박과 집착의 소유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강박적 태도의 요체는 한 마디로 말해, "실재적인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말할 것도 없고, <아포칼립토>에서 그가 주로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언어와 역사의 고증이었던 것 같은데(인물들, 건축, 공동체, 문화, 제례, . .), 고증에 대한 미국인들의 열망을 나는 잘 믿지 않지만, 어쨌든 그의 영화를 보면 바로 생생한 것, 실재적인 것에의 철저하고도 고집스런 집착이 있어 보인다. 긍정적으로 말해 일종의 역사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설정된 인물들의 본래의 언어를 영화 속에 그대로 안배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단적인 예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첫 시퀀스에서 보여주었던 그 놀라운 아람어를 듣는 순간, 우리는 경련을 일으키게 된다. 화면 속의 인물들과 예수와 그들을 감싸고 있는 시간 전체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내 안에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로부터, 바로 그들 고유의 존재로부터 튀어나와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그 많은 인물들이 모여서 알 수 없는 아람어를 읊조리는 시간 동안, 우리는 정서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어떤 야수에게 침탈 당한 것처럼, 우리의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순전히 고대 아람어 하나만으로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 시간은 나와는 완전히 무관한 타자로부터 경험된 것이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동네 뒷동산이 아니라 진정한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멜 깁슨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멜 깁슨의 인터뷰 내용 한 구절을 들어보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처럼 <아포칼립토>를 마야어로 촬영한 건 정말 옳은 판단이었다. 어렸을 때 추억을 떠올려보면 더욱 극명하다. 그 당시 본 것들 가운데, 한 무리의 바이킹이 수녀원을 습격하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다. 덩치가 산 만한 바이킹 남자가 천천히 배에서 내려 수녀에게 말을 건넨다. 얼마나 흥분되는 장면이던지, 하지만 내 감응은 바로 다음 순간 산산조각 났다. 바이킹이 영어로 "나는 여기 내 선조들의 도끼를 가지러 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안녕, 난 로스ㅡ앤젤레스 동쪽에서 왔어"라는 말과 똑같이 들렸다. 하지만 만약 그 바이킹이 아주 낮은 음성의 독일어를 사용했다면, 오, 나는 아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오줌을 싸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위 내용을 보면 그는 뭔가를 아는 사람임엔 틀림없다. 그 자신이 한 명의 관객으로서, 그리고 이제는 이미지를 직접 디자인하는 감독으로서, 실재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철저함에 찬사를 보낸다.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철저해야 한다. 자신이 다루는 재료의 티끌 하나라도 성의 없이 대충 마무리 지어서는 안 된다. 관객이 문제가 아니다. 하늘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성의 깊이는 곧 예술가의 윤리이다(임권택 감독의 예술에 관한 영화들 대부분은 바로 이 주제를 담고 있다). 남의 작품을 베낀다든가, 적당히 얼버무린다든가, 눈속임을 한다든가 하는 예술가에게 우리가 비난을 하는 것은, 결코 그가 법을 어겼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이킹 영화의 영어 더빙처럼, 시시하기 때문에, 우리를 맥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술적 타락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 윤리와 예술성은 같은 말이다. 어린 멜 깁슨이 그 바이킹 장면에 실망하면서 감독에게 항의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왜 바이킹의 고유함을 훼손시키는가?"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과연 멜 깁슨이 예술적인가? 그는 정말로 철저한 사람인가? 많이도 필요 없고, 한 가지만 말해보자. <아포칼립토>의 첫 시퀀스와 두 번째 시퀀스는 마야인들의 사냥과 마을 공동체에 관한 긴 내러티브로 꾸며져 있다. 이 두 시퀀스에서 우리는, 고대 마야인이라고 지시된(referred), 원시인들처럼 가죽을 걸치고, 그들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고, 수십 수백의 집단이 각자의 가족을 이루며, 여가 생활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 . . 정확히 미국인들의 가족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기독교적인 냄새까지 나는 가족의 모습, 헐리웃 영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행복하고도 건전한 가족의 모습 말이다. 시퀀스가 끝나고, 그들이 단잠에서 깨어나면, 침입자가 쳐들어오지만 않았더라면, 다들 모여 당장에 예배당이라도 나갈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공동체. 놀랍게도, 철저한 이미지를 추구할 것 같았던 기독교인 멜 깁슨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였던 디에고 드 란다가 쓴 정말 좋은 책(<유카탄 지역 문물들의 제 관계>1566), . . .  관습과 사회적 습속을 직접 목격하고 쓴 책, . . . 드 란다는 그 책에서 마야 문명과 용기, 절제, 의지, 서로 화합하는 기독교적 미덕을 보여준 원주민들의 모습을 자주 묘사했다. 이는 영화 속 표범 발의 마을을 형상화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영어로 바이킹의 언어를 더빙한 것에 대해 실망했던 그가! 더 무시무시한 더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디에고 드 란다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나 역시 오줌을 지릴 뻔 하다가, 그 헐리웃-예배당-oriented 패밀리들을 보는 순간(실은 사냥하면서 미국식 장난을 치던 청년들의 모습이 더 먼저였지만), 완전히 기분을 잡쳤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더 이상 기대감을 접고, 고차원적 흥분을 포기한 채, 헐리웃 액션영화를 보듯, 이미지의 감각적 자극이 주는 진부한 쾌감에만 몰두하며 스크린을 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중간 부분에서 대단히 감각적으로 보여주었던 마야인들의 희생제의의 경우, 타락한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어리석은 대중의 종교적 야만적 열광 쯤으로 해석한 것은, 오히려 현대 서구 사회 특히 미국의 정치-종교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스포츠, 전쟁, 종교, . . 미국의 정치 문화를 비판한 것일까?).

더빙은 우리를 맥 빠지게 한다. 언어 뿐만 아니라 주관성의 더빙은 더 그렇다. 역사에 있어, 문제는 누가 침략을 했는가? 왜 멸망을 했는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와 같은 것이 아니다. 언어와 건축물과 육체들의 배열과 운동, 그리고 몇 몇 감각적 이미지들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아니, 오히려 그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역사성에 도달하려면, 진정한 실재성을 보여주려면, 보다 근본적인 철저함이 있어야 한다. 언어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자신의 신념으로부터 벗어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과거에 관한 이러한 편협한 관점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오류들이 있었나! 역사적 고증은 기계나 사진 혹은 남아있는 자료들의 감각적 직접성이 아니라, 주관성 내부로부터 시작하는 직접성이어야 한다. 역사는 비개인적 관점에 도달한 상태라고 했던 나의 명제는 바로 이런 뜻이다. 영화는 문학이나 다른 매체와는 다르게,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매체이다. 그러나 그 직접성이란 감각 이미지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바이킹에게 그들 고유의 언어를 돌려주고자 했던 멜 깁슨 자신의 철학처럼, 영화는 마야인들의 언어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과거 전체를 되돌려 주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는 것! 상품과 예술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이란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것의 소유가 아니라 과거 전체를 되돌려 주기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비로소 예술은 역사적인 것을 구체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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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표상 예술(회화나 문학과 같은)과 구별되는 요소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관계하고 있는 재료, 즉 이미지만을 검토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사진에 사영(寫影)된 사물의 형상은 주관적 의식에 의해 자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카메라는 빛의 흡수와 반사를 통해 사물의 표면을 복사한다. 빛의 연속 운동은 카메라에 의해 특정한 구역이 절단되고, 이 단편이 일으킨 화학작용으로 인해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빛을 이루고 있는 다수의 질점은 감강판의 특정한 영역으로 이동하고, 이로써 사물과 (사진)이미지의 관계는 기계적 대응이라는 함수를 이룬다. 사진 속에서는 “빛=사물의 표면”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빛은 물질의 피부”라는 표현을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재로서 대면하게 된다. 어느 모로 보나 사진의 형상(形象)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는 의식적 기억이나 사유와 같은 주관성의 자율적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 들뢰즈(G. Deleuze)는 베르그송(H. Bergson)이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에서 연역해낸 이미지의 개념을 바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미지란 물질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각된 대상을 실제의 사물이며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지에 대한 이 개념은 심리학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즉 이것은 이미지가 더 이상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는 비연장적인 표상이 아니며, 물질 역시 의식적 표상으로서의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주관성으로부터 초월적인 신비물이 아님을 함축한다.1) 들뢰즈에 따르면 베르그송은 이미지를 빛-물질과 동일한 것으로 정립함으로써, 의식(사유)과 물질(운동)의 이행, 즉 물질이 의식의 표상으로 이행하거나 혹은 의식의 표상이 (행동과 같이) 물질로 이행하는 관계를, 순전히 사진적 의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에 포착된 사물은 그림이나 이야기로 투사된 의식의 빛 이전에, 주관적 표상(이미지)의 개입 없이도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빛 그 자체이다.

사진이 물질의 표면을 기계적 함수로 처리함으로써 형상을 재현했다면, 영화는 거기에 운동과 시간의 형식을 덧붙여 실재의 재현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꽤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 명제는 베르그송의 운동 개념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운동의 두 수준을 구분하였다. 하나는 운동하는 물체와 그것이 지나간 공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질적 강도로서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고대철학은 운동하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과 운동성 그 자체를 혼동함으로써, 운동의 질을 양적인 것으로 대체하여, 실질적인 운동을 동질적 공간 속에서의 물체의 위치 이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는 특정한 위치로부터 출발하여 또 다른 특정한 위치로 이동하고, 다시 특정한 위치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는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운동을 위치의 이동으로 이해하는 순간,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을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고대철학이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을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서로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성을 단순히 좌표 위에서의 점들의 이동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의 제4장 전체에 걸쳐, 영화적 환영(cinematographic illusion)이라는 이름 아래, 영화를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영화를 사진들의 결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진들을 결합하고 이를 하나의 운동으로 만드는 장치와 영화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고대철학이 했던 운동의 주관적 재구성을 기계의 양적 이동을 통해(기계론적 착각)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움직이는 사물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는 제거하고, 순전히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정지된 형상(사진)들의 추상적이고도 양적인 결합만을 유도한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실제의 운동이 아니라 장치들의 공간적 위치 이동, 더 정확히는 정신적 추상과 동일한 방식에 의해 재구성된 운동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영화는 사물들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만을 증류해낸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가 기계장치의 반복적인 메카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로, 운동의 양적인 일관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름에 동일한 길이의 구멍을 뚫는다. 그렇게 해서 영화 이미지는 필름조각들을 균등하게 분할된 속도에 따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이미지에서 운동성의 본질은 필름조각 자체가 아니라, 필름조각들간의 대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성은 움직이지 않는 추상적 점들간의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속이 공간들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던 베르그송의 운동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이미지의 운동성이 정신적 추상이 아닌 물질적 분석에 의해 수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사진적 의미에서의 이미지를 언급했던 베르그송이 잘 설명하고 있다. 사진은 운동을 초월적 추상으로 요약한 포즈들의 결합(정신적 결합)이 아니라, 물질-빛의 구역, 즉 운동성의 블록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에 의해 조명된 빛이 아닌 물질-빛 그 자체의 기계적 운동. 이 운동과 지각의 동일성은, 지각=물질=빛의 내재적 관계들을 이루면서, 운동 중에 있는 지속의 부피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영화는 실제의 운동(물질)에 대한 분석적 냉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기계장치가 필름조각들의 시간적 균등분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말이다. 사진의 물질성은 곧바로 영화의 운동성으로 확대된다. 그리하여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이란 신체나 공간과 같은 다른 모든 부수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운동성 그 자체만을 고스란히 남긴 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미소짓고 있는 고양이로부터 고양이는 빼고 미소만을 남기는 것이다. 비록 영화의 재현성이라는 개념으로 오해하기는 했지만, 바쟁(Andre' Bazin)이 영화를 사진적 의미에서 그 고유한 존재론적 위상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영화가 표상예술과 구별되는 점은 영화 그 자체의 존재론 속에서, 그 고유의 존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운동과 물질의 내재적 관계로부터 확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영화는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물질과 동일한 외연을 갖는 이미지이며, 동시에 운동성을 증류해 낸 것으로서의 운동 그 자체이다. 들뢰즈가 영화의 존재론적 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조합해낸 “운동-이미지”의 개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사진과 영화는 유물론적 토대 위에서만 성립 가능하며, 그 자체로 유물론을 예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기계 테크놀러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토대에 기인한다. 우리의 정신은 테크놀러지를 통해서만 물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과 영화에도 회화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주관적 요소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무대 배치나 조명과 같은 화면의 조형성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예술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형식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시간 속에서 체험되는 삶과는 무관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객관적인 르포르타주에도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에 있어 근본적인 것은 인간적 의식 이전에 존재하는, 심지어는 주관성의 조건이 되는 물질(의 운동과 시간)일 것이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하나의 정지된 쇼트를 진정한 회화적 의미에서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면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운동과 시간, 즉 배치된 요소들(인물이나 사물)의 움직임이 배제되는 경우에도 지각을 초과하여 흐르고 있는 모종의 굴곡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시간이란, 아킬레스의 한 발이 의미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수준에서, 화면 자체가 이미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미세하지만 거대한 파동을 의미한다. 제 아무리 근사한 기획에 의해 가공된 화면구성이라 해도, 또 상상력의 빛이 아무리 찬란하다 해도, 스크린 표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저 피사체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파동은 마음대로 생략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실재이다. 몽따쥬와 같은 문학적 장치를 통한 허구적 효과 역시 영화의 관점에서는 다른 문제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종합 이전에 발생하는 기계적 사영(寫影)의 문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일찍이 소련의 몽따쥬 유파들―예로, 쿨레쇼프나 푸도푸킨―의 실험들(모주킨 효과나 벽돌쌓기와 같은)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화적 실험이기보다는 회화적 혹은 문학적 실험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영된 피사체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었으며, 관객은 그 근원적 시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탄생 혹은 진화와 관련하여 초기의 역사를 훑어보면, 한결같이 물질의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표현의 방법론적 노력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술이 직접적으로 물질적 제약에 직면한 예는 아마도 영화(사진적 의미에서)가 초유의 일일 것이다.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일종의 (빛의)물리학이었던 셈이다.


사유의 측면에서 볼 때, 운동-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백지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빛의 착란 상태 (지각의 소거로 돌아가려는 베케트에 관한 부분을 들뢰즈가 말한 것 설명해본다) . . . 그런데 왜 이러한 회귀를 언급해야만 하는가? 그 유용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유의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 . . (베르그송의 제임스 논문에서 과잉실재가 중요한 이유 . . 표면화 . . ., 미리결정된 것의 소거 . . .등으로 가기위해)/// (그런데 왜 잉여실재를 말하는가? ⇒ 열린 우주를 말하기 위해 . . . 영화가 재현하는 실재는 미리결정된 사유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 . . 그 순수한 의미에서의 베르그송적인 영화는 이미 베르그송이 비난했던 그 자리에서 생겨나고 있었으며, 그의 생각(창조적 진화)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바로 주관적 구성에 의해서가 아닐까?)


1)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Bergson, Matter and Memory의 1장 특히 서문과 Deleuze의 Cinema I p.56-61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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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분류방식, 미적 효과, 역사적 고찰 등)이 있지만, 우선 그것의 본질은 활동하지 않는 시간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사진이 미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라든가, 혹은 현재적 지각에 특별한 촉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도 사진은 과거와 관계를 맺고 있다. 사진을 이해하는데 있어 현상학적 관점이 개입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일단 사진 속에 담고자 하는 사물이 포착되고 나면, 그 포착된 대상물은 더 이상 살아있길 멈춘다. 사진 속의 객체들은 모두가 정지된 시간에 감싸인 채 얼어붙어 있다. 마치 저 풍경이 시간의 한 구역 혹은 이미지라도 된다는 듯이! 영화는 어떤가! 만일에 우리가 영화를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간주한다면, 영화의 실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가지게 될 것이다.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주려는 노력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을 테니까! 베르그송(H. Bergson)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것은 생명과 운동에 관하여 잘못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진과 영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살아있지 않은 사물에 실을 매달아 그것이 마치 움직이는 듯 보이게 하는 인형극과 같은 기술이,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정의된 영화보다는 훨씬 더 감동적일 것이다. 인형극은 차라리 죽음에 관한 유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영화나 인형극은 죽어있는 시간과 관계가 있음에도, 모두가 운동이나 시간과 직접적으로 호응한다. 그런데 사진은 경우가 좀 다르다. 사진은 존재로부터 그 본성인 시간의 지속을 따로 떼어내고 모든 영혼들을 빼앗아 박제해 놓은 것처럼 무미건조해 보인다. 동작이나 움직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며, 애초에 그러한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사진은 관념과 유사한 외연을 갖는다. 관념은 우선 사물을 운동성으로부터 분리하고 추상한다. 이는 운동이나 생명 그 자체를 다루는 경우에도 그렇다.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흐르는 실재를 경험 내부로 포섭하듯이, 관념은 운동과 시간을 공간적 범주로 고정시킨다. 마찬가지로 사진은 활동이 멈춘 사물의 순간적인 포즈(pose)를 포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상학적 에포케(epoche)라고나 할까? 풍경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모든 시간이 괄호 안에 묶여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 포착된 포즈는 사물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어떤 경우든지 포즈란 “대상물의 자세(태도)나 카메라를 다루는 사람의 테크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읽어 내려는 의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Editions du Seuil, 1981), p.78. 참고로, 이 책은 Richard Howard가 영어로 번역하여 Hill & Wang(New York)에서 1998년에 Camera Lucid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사진은 실제의 대상물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상학적이다. 사진에서의 포즈란 의식의 활동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 말하자면 현상학적 노에마(noe`me)이다. 반면에 영화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순간적인 자태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자태들로 끊임없이 대체되고 치환되면서, 지시되고 있는 사물의 포즈가 변질되어 노에마는 끊임없이 흐르게 된다. 영화에서의 컷(Cut)은 새로운 것들로 인해 그 고유한 자태를 박탈당하거나 거부된다. 영화가 운동 그 자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는 운동이나 시간 속에 순간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순간성에 관한 이 망상은 두 가지 이미지로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는 완전하고 결정된 순간으로서의 포즈 혹은 자태가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신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불완전하고 미결정된 순간으로서의 컷이 있다. 바로 감각적으로 포착된 것으로서의 물질적 순간이다. 또한 이 두 이미지는 운동을 설명하는(혹은 그것을 재구성하는) 두 가지의 관점을 나타내준다―운동에 관한 이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Cinema I 첫 장에 자세히 연구되어 있으므로, 나는 그 내용을 요약하는 식으로 활용하겠다. 전자의 경우에는 고전 철학의 관점인데, 여기서 운동은 culminating point, privileged instant, telos, acme` 등의 용어로 정의할 수 있는 정신적 사건들, 즉 지적인 요소들의 변증법적 질서 혹은 이상적인 종합으로 이해된다. 즉 운동이란 영원한 것으로서의 형상이나 이데아들 간의 이행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운동, 해소할 길 없는 모순 혹은 비존재로서의 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후자의 경우에는 현대 과학의 관점을 보여준다. 현대 과학은 운동을 이상적인 것들의 이행이나 종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도 불특정한 파편들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가령, 현대의 천문학은 하나의 궤도와 그것을 횡단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관계로 운동을 분석하였다(Kepler의 경우). 또 현대 물리학은 떨어지는 물체가 뒤덮어버리는 공간을 시간으로 연결하였다(Galileo의 경우). 현대 기하학은 직선 위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순간의 점의 위치, 즉 평곡선의 방정식으로 운동을 분석하거나(Descartes의 경우), 공간적 단면이나 구역(section)을 무한하게 근접시킴으로써 곡선 즉 운동을 분석하고 재구성하였다(Newton과 Leibniz의 경우). 어떤 경우든지 현대 과학은 자태들의 변증법적 질서가 아닌 불특정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으로 운동을 정의한 것이다. “현대 과학은 무엇보다도 . . . 시간을 독립변수(independent variable)로 취하려는 열망이라고 정의 되어야 한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Eng trans. Arthur Mitchell, 1954). p. 355.) 마찬가지로 사진과 영화의 존재론적 차이는 바로 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와 관계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완결된 풍경의 이미지로서의 포즈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물질적 파편으로서의 컷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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