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03/26 저렴한 미술 전시회
  2. 2007/10/11 가을 아침에 짧은 대화를 나누다 (2)
  3. 2007/06/14 예술과 삶 (2)
  4. 2006/08/20 은행에서 본 어느 조각상
  5. 2006/08/19 베르그송(Henri Bergson): 예술과 현실 (1)

영국 런던에는 Affordable Art Fair라는 미술 전시회가 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저렴한 미술 전시회> 정도쯤 것이다. 제목에서 있듯이 저렴한 값에 미술품을 감상하고 구입할 있도록 마련된 전시회이다. 1999년도에 처음 런던에서 열렸고, 후로 일년에 차례씩 전시회를 한다. 2009 들어서는 전시회가 3 12일에서 15일까지 런던 Battersea 공원에서 열렸다. 


예술작품을 거래하는 가격이 어느 정도로 저렴한가 하면 최고 3 파운드에서 최저 수십 파운드에 이른다. 참여하는 갤러리도 120여개에 이르고, 행사기간 동안 수만 명의 관람객들이 방문하여 작품을 감상하고 구매한다고 한다. 자세한 정보는 행사 홈페이지(www.affordableartfair.com) 참조하면 같다. 직접 방문해보라는 말이 아니라, 여기에는 우리가 배울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예술작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구매하는 관행은 예술의 생산과 유통과 보존 그리고 향유하는 과정의 민주화에 있어 중요한 단초이다. 재력과 권력을 소수가 예술을 독점하여 어두운 금고 같은 곳에 보관을 하고는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는 예술을 신비화하는 문화이다. 예술을 아무나 접근할 없는 신비로운 어떤 것으로 만드는 장본인들은 주로 예술 관련 지식인들과 예술 상인들 그리고 재력의 소비자들이다. 이들은 명성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술이 아닌 명성에 열광하기를 원한다. 열광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필요치 않으며, 평론가나 상인들이 선전하여 배출한 베스트셀러 작가 몇이면 충분하다. 예술에 대한 열광은 예술가들을 소멸하게 한다. 또한 열광의 본질은 신비화이고, 신비화는 무지의 소산이므로, 이는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냉소만을 환기할 뿐이다.


예술은 인생을 다르게 바라볼 있게 해주는 인간이 만든 유일한 수단이다. 어른이든 아이든 예술을 접하지 못한 인생은 악착같고 반복적인 생존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예술은 숙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완고한 삶의 굴레를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단절할 있게 한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낯설고도 이질적인 어떤 인생이 액자에 담겨져 놓여있을 , 혹은 인쇄된 활자로 적혀 있을 , 우리는 어느 순간에 홀연한 깨달음 혹은 가벼운 홀가분함을 안고 우리 자신의 인생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다. 삶에 이토록 평화로운 혁명을 있는 수단이 어디에 있을까?


벤야민(Walter Benjamin) 기술복제 때문에 생긴 서구 예술의 변화를 크게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종교와 계급에 의해 신비화되었던 예술이 신비를 벗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품을 복제할 있게 되면서 예술은 특정 계급이나 교회의 배타적 보호로부터 해방되어 대중적이고 민주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예술이 흔해빠지게 되고, 원본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어느 누구든지 변형하고 왜곡할 있게 되면서, 예술의 가치가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으로 예술이 이용될 있는 소지가 다분해지게 되었다. 나치정권과 파시스트들이 정치를 심미화했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요컨대, 예술품의 기술적 복제는 예술을 종교와 계급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대신에 예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예술의 이러한 무가치함 속에서 다시 신비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원본작품에 대한 열광이다. 원본작품은 예술작품이기 보다는 골동품이나 유적, 혹은 물적 재산의 가치를 갖는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향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과 사회적 수완을 상징하는 소유물이 것이다. 뉴욕 미술시장에서 유명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계층은 주로 펀드매니저라든가 부동산 업자라는 사실은, 단지 예술 애호 층이 변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예술품이 개인의 소장품 목록에 오르게 되고, 특정 장소의 밀실에 갇히게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벤야민은 "예술을 정치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정치화란 간단히 말해 예술이 민주적이 되도록, 예술의 가치가 모두에 의해서 부활할 있도록, 예술을 심미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수준에서 다루어야 함을 뜻한다. 판권, 재산권, 배포권, 저작권처럼 예술에 있어 이러한 법적 용어들이 나오게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접근할 있도록, 보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소명을 지속할 있도록, 사회가 그에 합당한 문화를 조성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열린 광장, 열린 시장, 바로 전시회 같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전시회에는 예술적 신비화가 없어 보인다. 예술 공간 전반에 명성이 . 따라서 열광도 없을 것이다. 단지 즐겁고 유쾌한 향유만이 있을 뿐이다. 관객은 이상 이유도 모른 신비화된 명성으로 작품을 감상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취향과 기억과 심미적 능력으로 작품들을 대면해야 것이다. 그러다가 왠지 끌리는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것이고, 작품에 머무르고 싶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하게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갑자기 작품에 대해, 작가에 대해, 혹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홀연한 깨달음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예술이다!


값비싼 대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자주, 많이 가게 것이고, 새로운 예술가들이 그들의 입담에 오르내릴 것이다. 굉장한 규모의 재력으로 작품에 값을 치르는 특정 소비자가 아니므로, 예술가들이 돈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명의 베스트 셀러 작가 외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신비화된 문화에서의 예술활동에는 비할 바가 못될 것이다.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돈은 상인들에게!), 자신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열광이 아닌) 있는 관객, 그리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예술활동을 있을 만큼의 약간의 돈이면 충분하다. 그들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직업은 사업이 아니라 다름아닌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술가 본인이든, 예술 소비자이든, 혹은 예술 상인이든, 모두의 문화를 고민하자. Why not? 그리고 모델들을 찾아 선례로 삼자.

Posted by huun

가을 아침. 팔등에 소름이 돗아 간지러울 만큼 싸늘했다. 그와 그녀는 벤취에 앉아 빵과 차를 마시고 있다. 그들은 서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함께하고 있다고 느꼈다. 기름진 빵과 향기롭고 따뜻한 차.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가! 따가운 햇살에 머리를 반쯤 묻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좀 역설적인 일인데,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는 새 삶을 찾기 위해, 자신이 간신히 빠져나왔던 술독의 소굴로 잠깐 되돌아간적이 있었어. 파리 몽마르뜨의 유흥가. 블랑슈의 거리들. . . 시간과 돈을 뿌려대며 방탕했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면서 이곳 저곳을 걸어다니다가, 그는 문득 '방탕'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 '방탕이란 엷은 공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에서 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 . . 내 생각인데, 아마도 저러한 생각 덕분에 자신이 버렸던 그 세월을 후회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랬기 때문에 진정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겠지. 무절제하게 다 써서 잃어버리는 와중에도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고 창조되고 있었다는 것. 무엇인가를 잃어버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했던 푸르스트(Marcel Proust)의 말처럼, 잃어버리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소득이 되는거야. 예술적 비젼 속에서는 저렇게 괴상망측한 형태의 경제가 실현되고 있지. 예술은 그를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게 했고, 그로써 자신과 삶의 악덕 조차도 끌어안을 수가 있었던 거라고 할까? 확신하건대, 예술의 궁극적인 주제 아니 목적은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문제'임에 틀림없어. 홀가분해지기 위해서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말야. 하지만 피츠제럴드처럼 술독에 빠지지 않고도 그럴 수 있으려면, 마약이나 알콜중독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그 무엇도 아닌 것'이 만들어지려면, 뭔가 굉장한 고통이 있어야 할거야. 술에서 깬 후의 허탈이나 금단의 환각으로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말야. 그 고통 역시 잃어버려야 할 하나의 댓가겠지만, 또 그것이 두려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가지만 말이지. . ."

그러자 그녀는 옆에 앉아 차를 한 두 모금 마신 후에, 태양을 한꺼번에 마셔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가슴 속 깊이 햇살을 들이마시고는 이렇게 말했다.

"가을은 있잖아, 모든 것이 영원할까? 하고 질문하게 만드는 계절인것 같아."

그는 궁금해진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흥미롭게 보았다. 방금 전에 자신이 했던 예술과 고통에 관한 요설들을 까맣게 잊어버린채, 그날 아침 그가 몸으로 느꼈던, 그래서 그를 저러한 사변적인 생각으로 이끌었던 삶의 분위기를, 어쩌면 그녀가 가을의 주제로 더욱 더 적절하게 표현해 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말을 계속 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 갑자기 나를 떠나버리는거야. 영혼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어. 어쨌든 내가 나를 떠나 저 먼 곳으로, 아니면 저 먼 미래로 가고 있어. 내가 여기에 있는 한, 나도 이 계절도 모두가 사라져버릴테니까. 이 짧은 계절을 갑자기 멈추기라도 하듯, 날아가버린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거야. 그리고는 이 빵과 녹차의 맛. 저 햇살. 내 옆에서 조근조근 들려오는, 강렬하지만 조용한 당신의 그 얘기들. 심지어는 그 예술과 고통까지, . . .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할 수 있을까? 하고 말야. 사람들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들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 아쉬워 하면서, 죽기전에 사진을 찍어놓듯이,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먼 곳으로 날아가보는 거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거들어 한 마디 덧붙였다.

"말하자면 떠나기 직전의 계절이로군. 다시는 영원히 오지않을 계절처럼, 어쩌면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것이 두려워 견딜 수 없는 계절처럼말야."

다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응, 그래서 모든 것이 예사롭지가 않아. 나와 당신의 숨소리까지, 모든 것이 뜻깊게 느껴지고, 매 순간의 경험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만약에 내 말이 맞다면, 예술은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남기는 것이 아닐까? 죽음을 의식하는 자만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아. 죽음을 극복하는, 소극적이지만 유일한 길이지. 이런 아침이 또 올까? 하고 계절이 사라지길 아쉬워하면서, 조용하고도 자그마한 아침 만찬을 만끽하는 우리처럼. . . ."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는 또 사변적인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혀 엉뚱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녀의 말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가령, 성실한 삶 만이 뜻 깊다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Posted by huun

사람들은 누군가의 글에 매료 되었을때, 글을 쓴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작품 만큼이나 그의 삶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이다.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넌센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넌센스는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주로 속물적인) 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나아가 이는 예술과 예술가 그리고 예술작품을 마음대로 뒤섞어서, 그들을 한꺼번에 폄하하거나 망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예술가나 작가 개인의 전기적 사실들에 대한 관심, 가령, 그의 출신은 어디인지, 학력은 어떤지, 유년시절이나 가족관계는 어땠는지, 연애를 얼마나 했는지, 버릇이나 취향이 무엇인지, 동성애자는 아닌지, 결혼은 했는지, 주변의 누구와 친분이 있었는지, 도덕심이 어땠는지, 성격은 어떤지, 앉은 자리가 얼마나 높았는지 하는 식으로, 한 개인과 작품에 접근함으로써, 우리는 예술가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는 예술가 개인에 대한 실망감을 그의 작품에 대한 비난으로 대신하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예술과 개인, 예술과 삶을 묶어서 예술이 삶으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일을 막아보려 한다. 그래도 예술은 삶에 꼭 필요하다든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은 예술의 적이다. 인맥과 겸손으로 작업을 하는 협잡꾼들은 주로 그런 인간들 속에서 나온다.

한 번만 숨을 죽이고 생각을 해보자. 만일에 하나의 작품이, 그 예술가나 작가의 전기적인 사실들과 동류의 문제이고, 그 예술가 개인의 삶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의 전기적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예술 작품이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가령,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작품이 그의 소소한 과거사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의 개인적 시간 경험의 기록이며, 그가 관계한 많은 사교계와 사랑에 관한 보고서이며,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소묘이며, 작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래서 마르셀(작가의 이름이며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개인에 대한 이해가 작품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의 소설이 벽장 속의 사진첩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예술작품이나 이론은 작가나 예술가 개인의 사회적 삶과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가령, 방금 전 불륜의 밤을 보낸 후에 쓴 한 예술가의 연애시는 얼마든지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과 이론은, 육체와 대상에 필연적으로 묶여있는 그의 지리멸렬한 삶보다 더욱 심오한 어떤 통찰 속에서, 그의 내적인 영혼에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의 기록이나 감정 표현이 아니다. 그런 이유였다면, 당장에 손에든 책과 그림을 던져버리고, 차라리 당신 자신의 일기를 써라! 작품은 그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현실세계에서 살아가고, 생각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바로 그 개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심지어는 인간 조차도 아닌), 전혀 다른 관점과 세계와 가능성의 펼침이다. 우리가 그림 앞에서 모자를 벗고, 소설 속에서 전 우주의 떨림을 체험하고, 그 예술가에게 위대함의 찬사를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치 않다면 예술작품은 화장실의 신문지보다도 가치가 없다. 예술가는 사실들을 가지고 자질구레하게 신변의 넋두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존재를 넘어서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붉게 충혈된 동공으로 새벽의 작업실을 빠져나온다. 우리가 그 작품에 빨려들어 매료되는 것은, 그의 덕망도, 인품도, 겸손도 아닌, 그가 펼쳐 놓은 어떤 풍경,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 때문이다. 삶이 없어도 예술은 존재한다거나, 예술이 삶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과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말이다. 신변잡기의 얘기를 썼다 해도, 그의 작품은 그 자신과 무관하다. 신적인 광채를 지닌 작품을 쓴 작가를 실제로 만나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의 한 주정뱅이 노인을 발견하고는(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의아해 하며 그의 작품을 다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예술과 삶을 혼동한 우리의 편견 때문이다.

Posted by h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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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 가면 많은 사람들과 기계들의 소음으로 복잡하고 분주해 보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매우 단순한 동작만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고객은 번호표를 뽑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례를 그냥 앉아서 기다린다. 이 절차는 입구에서 의자까지 나아있는 직선코스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 갈지자로 걷는다든지, 두리번거린다든지, 암묵적인 규칙이 우리의 심리에 그어놓은 선을 벗어나서 사선으로 이동 한다든지, CCTV의 외화면(offscreen)으로 빠진다든지 하는 일 등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별 탈 없이 살고 싶은 우리들로서는 말이다. 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을 필요도, 그럴만한 일도 없다. 그냥 돌아가는 디지털 번호표만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의 번호가 찍히면 직원에게 다가가 사무를 보면 된다. 대체로 그 사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지서에 적힌 금액과 지불한 현금의 기계적인 산술을 넘어서지 않는다.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참 동안을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다보니 직원들 역시 모든 일들을 계산기로 해결한다.


간혹 직원이 예상한 결과와 계산기가 내 놓은 결과 값이 일치하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고가 일어나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므로, 곧바로 수정하거나 배제해 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연한 사고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들을 제외하고 나면, 은행 직원들은 거의 하루 종일 숫자들을 반복해서 두드린다. 머리가 복잡하면 일을 그르치게 되므로, 머릿속을 텅 비워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계산하고 도출하고 다시 계산하고 지불하고 수금하고 다시 계산하고, . . . 계산기를 두드리는 여직원의 희고 고운 손등과는 대조적으로, 그 아래쪽은 움푹 패인 손가락 마디들이 시커멓게 줄이 가 있어, 그 동안의 기계적인 몸짓이 그녀의 자유롭던 영혼에 아로새겼을 흔적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흔적의 증거일까? 고객이 다가가면 왜 왔는지 궁금해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면 그 흔적에 대한 그녀 자신의 시위일까?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는다.


모든 일들은 서류들로 처리되고 그 서류에는 고객들의 얼굴색과 시큰둥한 표정조차도 약속된 기호들로 연산되어 기록된다. 그러다보니 고객은 자신이 지나치게 평준화되어 다루어지는 것에 불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은행과 같은 곳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첫 번째 목적은 모든 의심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거나 의구심을 갖는 모든 행동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편안한 안도감을 취한다. 편안한 삶이 대체로 안정된 자연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가 피타고라스주의자가 아닐까? 또 그 안도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한 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것이 보인다면 오히려 머리에 쥐(경련)만 날 뿐이다. 은행과 같은 곳에 가는 두 번째 목적은 바로 단순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은행의 광경만큼 현대인의 악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도 없다. 사실 그 악몽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우리는 감각의 굳은 정도가 생각보다 심하다. 모든 의례적인 것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자행되는 행동들! 일상적이고도 상투적인 수순들! 어느 하나 위험할 것 없는 예측된 동작들! 사선과 빗금의 부재 혹은 거부! 탈선의 결과 혹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따라서 그저 다소간의 권력에서 비롯된 다소간의 우쭐함! 또 그에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샛노란 냉소에 깃든 새하얀 권태! 그리하여 아무런 일도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버림받은 개인들의 지긋 지긋한 인생! 그 자리에서 번호를 기다리고 있는 몇 십분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의 시선과 주의를 잠시만이라도 잡아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들의 불행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불행. 넓은 창으로 난입해 온 빛이 너무 눈이 부셨던 탓일까? 저 앞의 모든 군상들은 그 빛 속에 휘감겨 부드러운 윤곽선 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듯 했다. 나는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가 세끼니 제공되는 토끼를 보며 느끼는 권태만큼이나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또 저들 역시 자신만의 정해진 궤도만을 묵묵히 따르고 있을 뿐, 누군가의 시선과 관심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화의 사회적 생산을 최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국가적 사활이었던 시절에는 저 묵묵함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미간에서 종종 그 미덕을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묵묵함이란 그 시절의 낭만적 집단주의의 침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아닌가? 지금의 권태는 어쩌면 그 시절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무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시 동안의 7, 80년대식 히스테리에서 치유되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일까? 20대 후반의 몇 몇 후배들은(아마 70년대 후반에 태어나 90년도 후반에 대학을 다녔을) 자꾸만 자신들의 자살에 대한 언급을 유행처럼 하곤 했는데, 그것은 사회적 혹은 개인적 불의에 대한 반동이 아니었으며, 권태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적극적(혹은 소극적) 반항조차도 아니었다. 반대로 그 자신의 삶을 반동적 충동을 통해 재확인하고, 심지어는 자살 충동조차도 그 삶의 일부로 용해시켜 버리는 블랙홀과도 같은 권태의 완벽한 수행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담(自殺談)만큼이나 지루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유사-마조히즘(pseudo-masochism)이라고나 할까? 날기는커녕 날갯짓 시늉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몸에 상처는 고사하고 칼날조차 세우지 못한 것이다. 반동조차도 아닌, 무한한 되돌아오기 자체인 그것은 하품이 그렇듯이 전염성이 있다.


은행이나 대기업과 같은 공공 기관에 예술 작품이 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 장식으로 이용되면 그 공간은 그럭 저럭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로 연출된다. 이것이 저 기관 구매자들의 최종적인 바램일 것이다.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그 바램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의 장식은 주변 경관이나 실내의 다른 장식들과 어우러져 용해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두드러져 보이거나 특이한 시선을 끄는 장식은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전체 공간의 한 부분이 되어 그 공간 전체의 수준에서 계획된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목적. 고전 미학은 '아름다움'을 정의할 때, 일치된 감정이라든지 혹은 능력의 합목적성과 같은 개념들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것과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적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는 정확히 위에서 말한 장식으로서의 바람직함, 즉 저 구매자들의 바램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 건물에 세워진 조각상과 그 벽에 걸린 그림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참 동안을 감상하거나 주시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경비원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무의미한 짓일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놓여진 원래의 목적과도 상충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만 파악되어, 그 자체의 고유함이 드러나지 않은, 돌출될 위험이 거의 없는, 격자로 구획된 선분을 따라 고통없이 아름다움에 이르는, 그리하여 우리가 은행에서 보게되는 직원과 고객의 시선에 깃든, 부드러운 빛과도 같은 편안함을 주는 예술작품. . . . 한마디로 버려지는 것이다. 유기성, 역사, 구조와 같은 개념들과 나란히 놓이게 됨으로써, 예술작품은 어떤 전체의 상관적 좌표 속에서 버림받는다. 이것이 은행과 같은 곳의 익숙하고도 편안한 분위기가 별 탈없이 유지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만일에 은행 내부의 구석에 놓여진 저 조각상을 좀 유심히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 약간 비틀어진 모양이고, 어린 아이의 두 팔을 꼬아 놓은 듯한, . . . 메비우스의 띠 처럼 보이기도 하는, 보통 크기의 조각상이 선반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다.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 조각상을 보면서, 어떠한 질문들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은행의 소사(小事)들과 같은 부차적인 삶의 필요와는 그 근본에 있어 다른 질문들. 예를들어, 예술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저것이 무슨 형상일까? 왜 저렇게 비틀어 놓았을까? 와 같은 평범한 질문들로부터, 저것은 형상이 아니라 특질 자체가 아닐까? 부드럽지만 다소 무거운 듯한 저 색감은 아마도 나의 꿈 속이 아닐까? 어째서 존재는 비틀어진 위상 속에서만 본질적일까? 와 같은 다소 심오한 질문까지. . . . 이미 익숙한 것들만 있어 편안하고도 안전한 그러나 나른한 이 은행에서, 저 작품은 나로 하여금 저와 같은 질문들과 아울러 이름모를 경련같은 것을 일게 할 것이다. 그 작품은 생소한 물건이 아니라 이상함 자체이다. 지적인 질문 이전에 존재하는 경련상태.


사람들은 해석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을 때, 즉 애매모호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바로 저러한 경련을 느낀다. 그 발작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존재와 시간을 끄집어 내어 삶을 거대한 무게로 감당한다. 그것은 창조를 위한 일종의 준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를 포함하여 저러한 경련에 몸부림치는 많은 독신자들은 그와 같은 고독을 일종의 미학적 단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고독을 견디기 힘들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예술작품에 대해 냉소적이 된다: "저게 뭐야 ! 저게 무슨 예술작품이야 !"(이런 점에서 결혼과 냉소는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내심 알 수 없는 좌절감을 맛볼 것이다. 당혹감에서 비롯된 그들의 불평에는 진실같은 것이 있다. 예술작품은 당혹스럽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단련에 임하게 한다는 것. 어떤 단련? 예를들어,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동물에 가까운 자들의 소리를 듣게하고, 은행과 같은 곳에 나 있는 격자 무늬의 선분들 사이 사이에 끼인 고깃덩이를 보게 해주는, 혹은 주파수를 넘어간 파동을 감지하게 하는, 뭐 그런 종류의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단련. 예술은 경련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준비하게 한다(능력이라는 말은 바로 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모든 예술의 윤리적 목적일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우리는 매 순간 현실의 다양성에 직면한다. 가령, 아무데에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눌러보라. 그 안에 찍힌 현실의 다양성에 놀라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그 아래에 강아지 한 마리도. 강아지는 보도 블럭 위에 흩어져있는 수 많은 서로 다른 낙엽들을 밟아가고 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줄지어 있으며, 바람 때문인지 가지들이 한 곳으로 쏠려 있다. 나뭇잎의 색을 보니 가을이다. 청명하지만 싸늘해 보이는 날씨이다. 그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은 열심이 말을 하고, 한 사람은 화가 나 있는 듯, . . . 이 사물들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에 깃든 감정들, 정서들, 힘, 특질, . . . 한이 없다.


그 사진 안에는 무하하게 많은 존재들이 들어가 있으며, 그것들을 셈하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이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한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그 다양한 현실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여 사물들을 지각한다. 그 두 사람과 강아지 그리고 그 주변에 펼쳐진 무수한 존재들은 엄연히 내 앞에 있는 것이지만, 나 자신과 무관하다면 나는 그들을 알 수가 없으며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저들의 외형만을 알 뿐이다. 우리의 지각과 그 지각기능이 만들어 놓은 지식이란, 다양한 현실 중에서 어떤 특정 부분, 그것도 나를 위해 필요하다고 가정된 잘려진 조각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팽개쳐 버린다. 우리는 현실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삶이 요구하는, 그리고 신체의 한계가 요구하는 고정된 관점으로 변형된 일부만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비극이다. 무식하고 편협하게도 우리는 무한하게 변하고 움직이고 있는 삶 그 자체를 자의적으로 잘라서 박제시켜 놓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오해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지각 능력, 감각 능력, 오성 능력, 이성 능력, . . . 이들을 보다 많은 것으로, 보다 높은 것으로, 보다 탁월한 것으로 확장시켜야만 한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 보다도 더 많은 실재를 지각하고 느끼도록 노력하고 훈련해야만 한다. 그 전문가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삶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놀라운 지각능력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술가들만큼 현실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역설처럼 다가온다: 예술가들은 삶으로부터 초연해지면서, 비로소 삶과 직접적 관계를 갖는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이 문제에 대해 짧지만 매우 아름다운 구절들로 표현하고 있다.

". . .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 관심이 그것을 옆으로 치워놓는다. . . . 현재의 생활을 유용하게 조명하고 완성시키는 부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 . . 이러한 선택을 유발시키는 데 한 몫을 하는 것이 두뇌이다. 두뇌는 유용한 기억을 현실화시키고 쓸모없는 기억들은 의식의 보다 낮은 층 속에 간직한다. 지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행위의 보조수단인 지각은 실재 전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을 분리시켜낸다. 지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다. 지각은 미리 분류하고 미리 명칭을 붙인다. 우리는 거의 대상을 보지 않는다. 단지 그 대상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가를 알면 족하다. 그러나 때때로 다행스럽게도 그 감각과 의식이 생활과 보다 덜 밀착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자연은 그들의 지각기능을 그들의 행위 기능에 덧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사물을 볼 때, 그 사물 자체로 보며 자신들을 통해서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행위를 목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각하기 위해 지각한다―다른 목적은 없다. 오직 즐거움을 위해서다. 그들 자신의 어떤 측면을 통해서, 즉 의식을 통해서건 아니면 감각을 통해서건 그들은 초연히 태어난다. 그 초탈이 어떤 감각의 초탈인가 아니면 의식의 초탈인가에 따라, 그들은 각각 화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며, 음악가가 되고 시인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 예술에서 보는 것은 좀더 직접적인 실재의 상(像)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더 많은 수의 사물을 보는 이유도 그가 자기의 지각을 이용하는 데 관심을 보다 덜 갖기 때문이다."(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문예출판사, 2001. pp. 165-167)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