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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13 일본 미인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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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일본 문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 이미지는 서구 유럽이나 동양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 느낌은 일본과 한국의 남다른 역사적 배경과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갖는 이미지일 것이다. 심지어 서구인들조차도 일본의 이러한 독특함을 알고, 때로는 열광하여 좋아하는 듯하다. 이를 기호의 어떤 것으로 폄하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게 편협한 관점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 전 일본 근대미술 전시관을 돌아보고, 역시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한 나의 느낌을 다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전시회의 규모가 생각보다는 조야했고, 또 일본에서 예술적 가치를 갖는 작품들이기보다는, 일제 때에 강매 식으로 입수한 것들이기 때문에, 이 몇 점의 작품들로 일본 미술을 언급하고, 나아가 한국이나 중국의 미술과 비교하는 것은 상당히 편협한 일일 것이다. 나에겐 아직 그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일본에 관한 나의 느낌을 언급하고, 이 이미지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미키 스이잔(三木翠山, 1887-1961)의 “꽃의 여행[花乃旅]”(1939)그 전시회에 걸린 다양한 회화들 속에서 몇 가지 특징을 선별해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색조와 선, 운동감 없이 정지되어 있는 듯 한 대상들, 형상들의 단순함과 평면성,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아예 배제된 명암, 색채의 분명한 대조를 통한 강렬함과 섬세함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회화들 중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미키 스이잔(三木翠山, 1887-1961)의 “꽃의 여행[花乃旅]”(1939)이라는 작품이다(아래 각주1 참조). 그리고 이 작품은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일본 회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일본화들을 볼 때 공통적으로 갖는 느낌과 이미지를 이 그림이 단번에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여인을 감싸고 있는 공간과 그녀의 자태를 완전히 구분하기 위해 묘사된 굵고 검은 선. 그녀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신체 요소들(머리칼, 눈썹, 입술, 코, 목선, 시선, 귓불,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얼굴과 머리의 우아한 경계 . . .)과 장식들 그리고 옷 주름을 표현하기 위한 섬세한 필선. 운동감이 전혀 없는 형상. 화려한 색조에 담긴 단순함 그리고 명암의 부재에서 오는 평면성. 비현실적 구도와 제재. 붉은색과 검은색 그리고 흰색의 분명한 대조를 통한 강렬함. . . .

이러한 것들이 이 그림의 질료를 이루고 있으며, 이 질료가 발산하는 이미지가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우키요에 풍의 미인화들을 이리 저리 찾아보았고, 그 작품들 속에서 유사한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공통적인 이미지를 언어로 재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데, 한 마디로 이 이미지를 이렇게 말해보자: 시체의 부패된 신체를 숨기기 위해 몸에 짙은 화장을 하여, 화가는 저 미인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2

내가 언어로 재현한 저 이미지는 일본적 감성을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 요소들은 직접 말하기보다는 일본적 감성에 의해 언어로 재현된 다른 작품을 통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이쿠(俳句)이다. 예술적 독특함에 중독된 프랑스인들은 하이쿠를 매우 좋아하는데, 특히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는 사랑에 관한 한 저서에서 한편의 하이쿠를 인용하고 있다. 이 인용을 통해 그는 사랑의 감정과 그 슬픔의 관계를 하나의 묘한 형태의 사랑과 연결 짓고 있다(일본어로 된 하이쿠가 아니므로, 나는 여기서 영어로 인용해 보겠다).

      The full moon this fall,
      All night long I have paced
      around the pond.(Barthes 97)

어느 가을. 보름달이 한껏 연못 속에 내려 앉아있다. 그 달이 저렇게 연못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온 밤 내내 연못 주위를 서성이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연못 주위를 서성이는 것뿐. 환한 달을 가슴속에 파묻고 내 손에 잡아보고 싶지만, 물가를 서성이는 것으로 만족해야하는 애달픔. 아마도 바르뜨는 이 감정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애달픔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래서 또한 다음과 같이 자신 스스로 하이쿠 한편을 지어 보인다.

      This morning, the bay sparkling,
      I stayed here, motionless,
      Thinking of who is gone.(Barthes 97)

연인이 떠나고 난 후 처음으로 눈을 뜬 첫날 아침. 그/그녀가 배를 타고 지나가며 남긴 자취로 반짝거리는 바닷가. 나는 아무 동작도 없이 여기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본다. 가버린 사람을 생각하며. 나는 허용된 구역의 끝자리를 서성이면서 밤새 혹은 온종일 말더듬이처럼 웅얼거린다. 이 옹알이의 반복은 마치 (마법의)주문이 그렇듯이 모든 에너지를 응축 또는 팽창시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너무나 많은 말을 해대는 반복. 그래서 바르뜨는 예술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글 보다 훨씬 거대하지만 동시에 글을 쓰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 . . 글 속에 이 모든 것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Barthes 98). 이때에 영혼은 불순해지고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온몸에 히스테리의 경련이 일기 시작하면, 나의 언어는 서서히 수다스럽고 지저분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영혼과 언어는 서로 채우거나 비우면서 시이소 놀이를 해댄다. 영혼이 수다스러워지면 나는 말이 없고, 내가 수다스러워지면 나의 영혼은 텅 비거나 침묵한다.

3

하이쿠는 일본의 예술에 깃든 하나의 원형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묘한 역설이 내재되어 있다. 강렬함과 냉정함. 팽창하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열망과 이를 부추기는 감성의 유혹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를 한없이 차단하는 막다른 길이 있다. 그리고 이 사이에 히스테리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히스테리 영역의 한편에는 한없이 팽창하고 있는 감정의 과잉이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는 이 감정을 중화하고 정돈하려는 코드가 발생시키는 결핍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미학적 딜레마인데, 이는 우리 자신의 능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데에 기인한다. 가령, 감각능력의 탈 코드화가 이성능력의 지배에 반항하고 있는 것처럼. 이 딜레마 속에서 두 힘의 긴장이 도출되어 하나의 히스테리의 영역이 발생한다. 이 히스테리에 빠진 예술가는 이제 가혹한 에너지의 응축을 감행할 것이다. 너무나 많고 큰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 너무나 빈약하여 그 과잉을 감당할 수 없는 예술가의 손놀림은, 거의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은 채, 매우 조심스럽고도 섬세하게 그 예술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에드가 앨런 포우(Edgar Allan Poe)가 규정했던 아름다움의 영원성에 대한 망상과도 흡사하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소녀의 죽음이다”).

따라서 저 애달픔으로부터 비롯된 미학적 긴장은 우리의 능력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과잉과 결핍의 충돌과 긴장은 우리로 하여금 초 감성이라는 영역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냉정하고도 가혹한 에너지의 응축의 결과가 바로 하이쿠에서 보게 되는 감성의 클라이맥스이다.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위한 주변의 모든 부수적 서사들을 배제해 버리고, 하이쿠는 그 자체가 하나의 클라이맥스가 되어 버린다. 마치 죽음으로써 자신의 아름다움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래서 우리가 저 17음절에서 보는 것은 체포된 순간, 즉 모든 우주의 에너지를 하나의 점(點)의 상태로 응축시켜버린 순수 이미지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절정 속에 해소할 수 없는 역설이 있다. 감정의 과잉이 극한에 이른 너무나 커다란 영혼 때문에, 이제 예술가의 수다스러움은 점점 침묵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침묵은 우리 영혼의 강렬한 수다와 불순함을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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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의 이 같은 응축과 긴장이 바로 우키요에의 미인화들로부터 느끼게 되는 저 독특한 이미지가 아닐까? 나는 저 미인의 정지된 포즈 속에서 일종의 수다스러움과 불순함 같은 열정을 읽는다.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자아내는 초 감성적 긴장 속에 깃든 강렬한 관능미 또한. 그런데 이 관능미에는 표면화된 사물들의 천박함이 스며들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사물을 그 자체로 내보이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 같다. 육체를 육체 자체로 드러내려는 시도 속에서, 관능적 열정은 희미하게 하나의 외설적 형태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하이쿠에서 볼 수 있는 응축된 에너지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모든 영혼의 에너지와 열정을 물질적 자연으로 팽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 점(點)의 형태로 응축된 것을 조형적 형상으로 물질화 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천박함 같은 것이다. 물질성 즉 2차적 자연성 그 자체로 육화시키려는 시도는 우키요에의 형식이 반복적 패턴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 잘 보여주고 있다. 육체 자체의 외설적 조형미는, 강렬한 에너지를 냉혹한 절제 속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인을 죽은 존재인 것처럼 정지시키고 있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 죽은 여인을 재생코자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채색된 화려한 색채를 보라). 살아있는 영혼의 열정을 과도하게 억압하여 침묵의 상태로 전이시키는 미학적 절제! 그리고 이 절제로 인해 존재의 운동감을 일거에 제거해 버리고, 이를 하나의 응축된 점이 아닌 다수의 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사물(死物)의 상태로 치환하는 외설! 이러한 이중적 패턴이 바로 저 미인화의 조형미를 낳고 있는 것이다. 저 싸늘한 전쟁의 강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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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다가온 빙하기로 인해 차가운 얼음으로 정지되어 버린 여인의 가장 아름답던 순간의 포착. 그리고 이제 화가는 그 여인을 유물론적 팽창을 통해 재생시키고자 열망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일본 미인화에서 보게 되는 미학적 절제의 밑바닥에는, 자연에 대한 가차 없는 혐오와 자연의 소유라고 하는, 새디즘과도 같은 이중적 망상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한편에는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고 이를 소유하기 위한 강렬함이 있으며, 또 한편에는 수동적이고 운동하지 않는 죽어버린 시체에 대한 혐오와, 이 혐오의 직접적 반응으로서 냉혹한 절제와 냉담함이 있다. 이 두 영역이 한 폭의 작품 안에 동시에 충돌하고 있으며, 이것이 살얼음 같은 긴장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여인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잔혹하고도 가혹한 시간과 운동을 그 여인으로부터 모두 제거해 버린, 화가의 아름다운 시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애달픔.

참고 문헌
Barthes, Roland.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lish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1) 이 작품은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는 일본 특유의 스타일로 제작된 것이다. 우키요에는 일종의 일본식 풍속화인데, 16세기 후반부터 서민들의 문화가 대중화되면서, 物見遊山, 歌舞音曲 등을 다룬 초기 풍속화가 우키요에의 전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작가나 감상 계급은 주로 귀족이나 무사계급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江戶(에도)幕府를 열고나서 사회적 변화가 매우 빠르게 진전되어, 강호는 신개발지 혹은 신천지였기 때문에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로부터 강호의 서민들은 직접 그림을 제작하고 감상하는 미술의 주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서민 예술로서 우키요에가 발생한다. 우키요에는 주로 서민들의 현실적 생활(現世)을 소재로 다루었으며, 특히 향락적이고 선정적인 요소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유럽과의 무역이 성행하면서, 일본 도자기를 포장한 종이에 그려진 우키요에를 본 유럽인들은 그 독특한 이미지에 매료되었으며,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를 모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미키 스이잔의 작품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우키요에라기보다는, 그것의 현대적 변형이라 할 만 하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