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개념에서 볼 수 있었던 법의 아이러니와 유머는 이제 현대적 형식에 의해 법을 공격하고 전복하기 위한 기제로 변모한다. 사드와 마조흐는 저항 방식의 차이로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드는 법의 아이러니적 자기모순을 아이러니적 발화방식으로 공격한다. 순수 형식으로서 대상과 내용을 가지지 않는 법칙이 처벌과 권위를 실현하는 과정은 언제나 위반이 유지되면서 작용한다. 내용을 갖지 않는 형식은 언제나 모순적 내용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재현할 대상(상위근거로서 선)을 잃어버린 법은 제한적 존재인 이차적 자연을 재현한다. 따라서 절대적 원리가 실현되지 않음으로써만 유지되었던 법은 이제 그 대상(이차적 자연)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표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모든 형식에서 - 본성적, 도덕적, 정치적 - 법은 언제나 보존되어야 할 이차적 자연의 법칙을 표상한다. 86>
법이 규정하는 모든 대상과 그 형식들은 합리적이든 정치적이든 이차적 자연의 보존을 위해 우리가 요구하는 어떤 것들을 구현할 뿐이다. 여기서 법이 강자의 표현이라든지 혹은 약자의 연대라든지 하는 것은 부수적 문제이다. <주인과 노예, 강자와 약자 모두가 이차적 자연의 산물이다. 약자의 연대는 절대자의 출현을 선호한다. 절대자의 존재성은 그 연대에 달려있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서 법은 속임수이며 신비화이다. 86> 이차적 자연의 산물은 자신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법을 요구한다. 따라서 법은 이차적 자연의 존재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 약자들의 연대에서조차 법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존재의 보존의 문제가 달려있는 한 법은 이차적 존재들로부터 절대화되며, 따라서 또한 신비화된다. 그러나 이제 법은 이차적 자연의 표상으로만 기능한다. 즉 이차적 자연의 법칙들을 구현한다는 임무를 통해, 그것은 모든 자연을 초월하는 절대적 지배의 지위를 빼앗긴다. 법의 존재성은 이차적 자연에 의존한다. <그것은 위임된 권력이 아니라 주인과 노예의 수치스러운 공모에 의존하는 빼앗긴 권력이다. 86> 사드에게 법이 구현하는 권력의 절대성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것은 신비화되었을 뿐이다.
이차적 자연의 법칙에 의존하여 신비화된 법은 정치적 강제력과 폭정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자연을 보존해야 하는 임무는 법으로 하여금 강제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강자의 표현이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계약이든 그것은 폭정을 불러들이며, 폭정은 법의 이름으로 권위를 도출해 낸다: <폭정은 법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87> 사드가 법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것은 그것이 이차적 존재의 법칙에 의존하며 신비화되고 절대화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폭정을 불어온다는 사실이다. 사드의 아이러니는 폭정에 향해있다.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언어는 독특한 열정에 사로잡혀 폭정에 저항한다. 그러나 법을 초월하고자 하는 시도는 플라톤처럼 상위의 근거로서 선의 개념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절대적 선은 악의 이상으로 대체된다. 이것이 사드의 언어가 내포한 아이러니이다.
내용이나 대상을 갖지 않는 순수형식의 메카니즘이 띠게 되는 미결정성(不定)은 사드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선의 개념으로 법을 초월하기보다는 사악함의 원리와 <플라톤 주의의 전복의 원리>로 작용하는 악의 이상으로 나아간다. 사드에게 법과 관련된 모든 내용들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그는 형식의 유희를 통해 플라톤과 대립한다. (1) 플라톤이 선을 재현하는 이차적 존재로서 법을 이해했듯이, (2) 사드는 악을 표상하는 이차적 존재로서 법을 이해한다. (1) 플라톤에게 절대적 선이 법을 초월하는 원리이듯이, (2) 사드에게 법을 초월하는 새로운 원리는 절대적 악이다. 따라서 이것은 보잘 것 없으며 미숙한 법의 지배로부터 보다 영속적인 지배의 원리로서 악의 제도화로 치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법을 초월하는 방식의 새로움은 아이러니라는 반어(反語)의 독특함과 연결된다. 그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약자의 변호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그 보다 더 절대적인 폭력으로 약자를 비난한다. 사드의 언어를 법이 보여주는 악의 미숙함에 대한 충고이며 괴로움을 극한의 상황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진정한 악이란 바로 이런 것이야!
사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조흐 역시 형식의 유희를 통해 법에 저항한다. 그러나 형식의 유희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매저키즘의 전체과정이 법과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매저키스트는 법을 준수하는 것과 법의 주체로서 현존하는 문제가 일치하지 않음을 말하려 한다. 매저키즘은 법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법을 이용해 법에 도발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조흐의 유머는 법적 처벌의 과정이 위반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서 작용할 때, 즉 위협과 금지와 불안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할 때, 어떻게 그 안에서 저항하고 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금지된 쾌락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경우든지 처벌을 수반한다. 복종함으로써 처벌을 받거나, 법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처벌을 받거나. 마조흐에게 법은 처벌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 경우 그는 법에 강렬하게 복종함으로써 법을 경멸하거나 비판한다. 매저키즘의 저항은 사드의 경우처럼 법의 상위원리로 향하는 아이러니적 과정이 아니라, 법의 처벌의 과정으로 하향하는 유머를 통해 진행된다. 아이러니가 사물들의 표면을 심층적인 것으로 조소하거나 비판하는 기능을 띤다면, 유머의 기술은 사물의 심층을 표층으로 끌어내리는 힘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유머 안에서 존재들의 위상은 우스꽝스러워지며, 그 무게는 가벼워진다. 마조흐는 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법에 복종함으로써 넌센스를 만들어낸다.
피학적 욕망의 실현과 표현은 그 자체로 법의 넌센스를 예증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처벌을 스스로 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법적 과정의 효과와 목적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매저키즘의 시작은 우선 욕망의 충족으로부터 처벌로 연결되는 인과관계를 단순한 시간상의 연속으로 이해하면서 작동한다. 따라서 금지하는 것을 욕망하거나 위반했을 때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명제는 이제 역으로 진행된다: 처벌 후에는 반드시 위반(금지된 쾌락)의 자격이 주어진다. 매저키스트는 법의 전체과정을 <처벌의 과정 88>으로 이해한다. 위반하면 처벌이 온다는 인과적 연쇄가 시간상의 단순한 연속으로 이해됨으로써 법의 진행은 이제 처벌에서 위반으로 역전되는 순서로 바뀐다: 처벌 후에는 반드시 쾌락이 온다. 여기에는 더 이상 대상과 내용을 가지지 않으며 그 자체 순수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현대적 개념의 법을, 무한한 공식으로 밀고 감으로써 가능해 지는 수사적 과장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은 이제 처벌의 원인이 아니라 처벌의 결과가 되어 버린다. 같은 의미로 처벌은 쾌락을 인가해주는 의례이다. 유머가 아니라면 어떻게 미리 처벌을 받고 쾌락을 허가 받는다는 넌센스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법의 순수 형식의 특성과 이에 따른 법의 고정성을 표층화하지 않고 이러한 행위는 불가능하다. 매저키스트는 과장(hyperbole)하면서 저항한다. 유머의 표층구조 안에서 처벌은 이제 더 이상 위반의 금지나 쾌락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위반과 쾌락의 조건이 되고 있다. 매저키즘적 쾌락은 처벌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진행된다. 처벌은 쾌락의 금지나 결과가 아니라 전제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매저키스트는 처벌 후에 올 쾌락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주1). 법의 형식은 매저키즘적 과정 속에서 처음에 의도하던 목적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채워진다. 매저키스트 앞에서 법은 난감해 진다. 자발적으로 처벌을 애원함으로써 처벌의 최초의 목적은 무효화되고 우스꽝스럽게 전복되기 때문이다. 매저키즘적 유머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제발 날 좀 때려 줘! … 더 세게! 더 세게!
사드와 마조흐의 수사적 반항은 순수형식으로 변화한 현대적 개념의 법 체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구체적 내용이 삭제되고 난 후, 형식은 새로운 원리와 처벌의 메커니즘으로 채워진다. 이들은 하나의 체계가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면서 어떻게 부조리함을 드러내며, 또한 거기서 어떻게 유희가 가능해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드와 마조흐는 형식의 유희를 통해 저항한다. (1) 사드는 법의 상위원리로 근거하는 선을 비워내고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악으로 그 내용을 채운다. 새디즘의 수사는 보다 높은 상위원리로 자신의 근거를 소추시키는 심층적 메카니즘을 유지하면서 그 내용의 치환을 통해 플라톤을 패러디한다. (2) 마조흐는 순수 형식으로 존재하는 법의 메카니즘을 과정과 절차들의 단순한 역전과 뒤집기를 통해 비웃고 있다. 금지된 쾌락 이후에 처벌로 이행되는 인과적 메카니즘은 처벌과 쾌락의 단순한 시간적 연속으로 간주되면서 표층적 메카니즘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쾌락의 결과로서 처벌이라는 형식은 처벌의 결과로서 쾌락이라는 형식으로 간단히 방향 전환한다. 우리는 매저키즘에서 법이 부여하는 죄의식이 어떻게 쾌락으로 전환되는지 보게 되는 것이다. 그는 결과를 통해 사유하는 결과론자이다: <매저키즘은 고통이나 처벌 속에서 쾌락을 얻지 않는다. 처벌이나 불안함으로부터는 기껏해야 예비적 쾌감을 얻을 뿐이다. 그의 진정한 쾌락은 결과적인 것으로 획득한다. 처벌에 의해 가능해질 어떤 것 속에서. … 매저키스트는 아부 속에서도 오만하며, 복종 속에서도 저항한다. 그는 유머리스트이며 결과의 논리학자이다. 이는 원리의 논리학자인 아이러닉한 새디스트와 다른 면이다. 89>
사드의 저항에는 확실히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왜냐하면 새디즘의 주체는 법과 이차적 자연을 초월하여 절대적 근거로서 동일시된 자신이기 때문이다. 사드의 언어에서 우리는 저항하고 반항하는 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마조흐의 저항은 유머러스하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진행되는 처벌의 강렬함은 그의 은밀한 망상 속에서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유머는 넌센스의 미학이다. 그의 언어에서 우리는 당혹해하는 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매저키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저키즘적 과정에서 신은 더 이상 처벌의 주체가 아니다. 이미 논의했듯이 매저키즘의 과정은 법의 주체가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치환된 이후에 시작된다. 따라서 계약을 통해 법의 주체를 어머니에게 양도함으로써 오히려 매 맞고 추방당하는 실패한 신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이다. 외디푸스적 관계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역할들을 가지게 된다. 새디즘의 경우 아버지는 상위근거로서 법을 초월한다. 그러나 매저키즘의 경우 처벌의 주체가 어머니에게 투사됨으로써 아버지의 법(처벌)은 완전히 무의미 해진다. 실패한 아버지의 법. 실패한 법의 선언. 이것이 바로 유머러스한 마조흐의 수사적 테크닉이 겨냥하는 본질이다.
(주1) 그러나 처벌을 쾌락의 원인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매저키즘은 처벌 자체를 쾌락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처벌이 가져오게 될 결과로서 쾌락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처벌을 기다리면서 쾌락을 기대하고 있다. 진정한 쾌락을 가져다 줄 예비적 쾌감으로서 처벌. 여기서 사법적 과정은 예비적 단계로 축소되면서 동시에 그 원래의 목적이 전복되는 효과가 드러난다. 매저키스트는 법적 과정을 쾌락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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