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6/10/12 Walter Benjamin의 Erzähler 에 관한 몇 가지 주관적 요약 (1)
  2. 2006/08/15 봉지커피를 마시며 (1) (2)

경험이 기능화 된 현대 사회에서 이야기 문화가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설정이다. 이야기 문화의 감소는 경험을 교환하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한다. 기억은 환타지의 형태로 과거의 시간을 보존한다. 그것은 고양된 상태에서의 이상화된 이미지이기도 하며, 이를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시간의 아우라(Aura)를 발산한다. 기술 중심 사회에서 이러한 독특한 분위기(후광)는 새로운 것들로 대체되거나 파괴된다. 기억의 잔상으로 남는 경험의 영속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외부 세계 뿐 아니라 도덕적 세계에 변화를 가져온다. 이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구술 전통의 영역으로서 이야기 문화가 경험적 삶 속에서 어떠한 특징과 의미를 가지는지를 (Nicolai Lesskow에 관한 단편적 연구를 통해)논의하고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따라서 이 논의를 몇 가지로 추려보자. . . . 

1. 이야기의 원천으로서 구술문화는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이야기꾼들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이야기 혹은 들은 이야기를 기억의 형태로 되살려내어 청자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글쓰는 작가는 독자와 분리되어 있는데 반해, 이야기꾼은 직접 청자들과 호흡한다. 따라서 청자들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하나의 신체적인 경험이 된다. 이야기는 육체를 통해 소통되는 것이다.

2. 구체적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구술을 통한 이야기는 주로 실용적인 경향을 띤다(농업에 관한 충고나 기타 생활에 관련된 조언들). 실제 이야기들의 본질은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도덕적, 실용적 충고, 교훈, 계율 등)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삶의 지혜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야기 기술의 쇠퇴는 진실하고 지혜로운 경험적 서사(epic)가 사라지고, 역사적으로 세속화되거나 생산적인 힘으로 변모하여 실제의 말에서 서사성이 제거된다. 이것이 현대성의 징후들이다.

3. 구술문화가 쇠퇴하는 징후로서 소설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책의 형태로 독자에게 보급되면서 작가와 독자는 서로 분리된다. 소설은 경험의 산물이기보다는 고독한 개인의 사유의 산물에 가깝다. 작가와 독자는 각각 소외된 존재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4. 이야기 문화의 리듬은 사회적 변화의 리듬과 궤를 같이 하면서 변한다. 중산층의 출현과 이들에 대한 통제(자본의 유용한 도구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을 발생시킨다(저자와 독자간의 거리를 극복 할 수 있는 형태로). 따라서 이야기의 성격은 먼 곳에서 온 지혜이기보다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정보의 형태로 변모한다. 정보의 가치는 이제 조언이나 지혜에 있지 않고 충분한 설명과 언술을 통한 설득력에 있다.

5. 정보의 가치는 새로운 해석을 부활시키거나 재생산 할 수 없다. 그것은 순간적인 시간에서만 존속 가능하기 때문에 지속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이야기는 소비적이지 않으며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속성을 띠면서 그 자체의 힘이 보존되고 유지되는 것이다(Psammenitus의 예). 이야기에는 설명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해석도 가능하며, 따라서 항상 새롭게 해석될 수가 있다. 이야기는 잠재태이다.

6. 구술 이야기의 지속성은 반복을 통해 가능해진다. 따라서 이 반복적 패턴의 경험은 지루함과 권태(정신적 휴식) 속에서 심층화된다. 도시사회의 빠른 삶은 개인들로 하여금 반성적 시간이나 지루한 시간을 빼앗아, 이들로 하여금 내면적 경험을 불허한다. 구술 이야기의 청자들은 사라지고 이들의 공동체가 부재하게 된 것이다. 구술담이 이야기를 반복하는 기술이라면, 이제 이 예술은 이야기가 더 이상 유지되거나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질 수밖에 없다. 기능화 된 노동의 리듬에 따라 듣고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몰입을 통한 기억의 보존은 불가능해 진 것이다.

7. 구술담은 이야기꾼의 삶과 연결되면서 나온다. 어떤 형식으로든 이야기꾼의 흔적이 그 속에 묻어있다. 자신의 직접적인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거나 보고하면서 자신의 흔적을 내러티브에 각인 하는 것이다. 소설은 다른 형태의 장르와는 다르게, 작가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다른 이야기나 정황들을 자신과 관계하는 듯 하게 꾸며서 이야기한다.

8. 글쓰기는 장인이나 기능공과 같이 희생적 노력의 대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조형예술품의 마지막 단계에 정성스럽게 유약을 발라, 흐르는 시간을 생생한 현재 속에 붙잡아 두어, 그것을 완벽하고도 영원한 현재 속으로 끌어들이는 행위와 같다. 글쓰기는 장인 혹은 기능공의 작업과 같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이러한 완전무결한 이미지로서 구현된 존재를 그려 낼 수가 없다. 시간은 과거의 형태로 제시되면서 별 중요한 의미를 띠지 않게 된다. 영원히 보존되는 현재로서 아우라와 같은 이상적 이미지들은 과거에서는 불필요하다. 이야기는 간결해지고 요약가능해 지면서, 시간의 생생함이나 살아있는 현재로서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이야기의 반복을 통해 시간은 구체적 경험으로 축적되면서, 서사적 인과관계가 점차적으로 증식되고 팽창하는 형식을 띤다. 그러나 단편소설은 이와는 반대로 축적된 시간적 경험을 요약함으로써 이 구술전통에서 벗어난 형태를 갖춘다. 편집된 시간 속에서 영원함의 이미지들은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9. 영원성의 개념의 소멸은 희생적 노력에 대한 혐오가 증가되면서 나온다. 그 개념은 죽음과 관계하면서 비롯되는데, 따라서 이것의 쇠퇴는 죽음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또한 고립된 개인과 관계하면서 나오는데, 부르주아 사회가 도래하면서 죽음을 혐오스럽고 개인적인 것으로 금기시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공적 영역으로 확대하여 경험함으로써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았던 사회(중세사회와 같은)가 사라지면서, 죽음은 이제 영속적인 세계와는 관계가 없어지게 되고, 그것은 삶의 영역에서 분리된다. 이야기가 죽음(영원한 세계)과 관계할 때에는 모종의 권위가 부여된다. 이런 이유로 이야기꾼은 죽음의 담론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들이 언제나 되돌아가 의지하는 것은 바로 자연사(natural history)이다(Johann Peter Hebel의 예). 그는 역사적 사실성과 시간에 핍진성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자연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태도변화는 이야기로부터 그 권위를 빼앗아 버리게 된다.

10. 역사서술과 연대기의 차이는 담론의 유무에 있다. 역사서술은 주로 담론이나 삶에 대한 해석으로 구성되지만, 연대기는 주로 서술로 구성된다. 따라서 연대기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한다(레스코프의 이야기에는 연대기 서술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남). 그런데 구술전통에 뿌리내린 이야기들은 주로 연대기적인 특징을 지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야기의 이러한 연대기적인 면모는, 이미 언급했듯이, 청자나 독자로 하여금 해석의 능동성을 요구한다.

11. 듣거나 본 경험의 재생능력으로서 기억은 서사시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서사시는 포괄적인 기억에 의해 사건의 진행을 자신의 것으로 변형하여, 사건의 소멸이나 죽음의 폭력 등과 화해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기억의 여신 Mnemosyne는 그리스인들에겐 서사시적 예술의 시신이었다). 기억은 사건을 지속적으로 전해주는 전통의 연쇄를 만듦으로써, 넓은 의미에서 서사시의 예술적 요소이다. 기억은 또한 예술적 변형물들을 포괄하면서, 마지막에 가서 모든 이야기를 서로 얽어 짜는 그물을 만든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 이야기꾼의 짧은 기억과는 정 반대되는 지속적인 기억이 요구된다. 소설가의 이러한 지속적 기억은 소설의 예술적 요소로서, 이야기의 예술적 요소인 기억을 도와주는 회상이다. 회상은 서사시의 몰락과 더불어, 기억을 통한 이야기의 근원적인 통일성이 사라지면서, 이야기 속에 새롭게 출현한 요소인 것이다.

12. 기억은 일종의 유산을 남기기이다. 이것이 없다면 시간의 구성성은 없다. 루카치는 소설에서 <선험적 고향의 상실>이라는 개념을 포착했는데, 그에 따르면 선험적 관계가 소멸하면서 비로소 이원적 세계가 가능해진다(오직 소설에서만 의미와 삶 그리고 이를 통해 본질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이 분리됨). 소설을 통해 경험하는 내면적인 행위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힘에 대항하는 투쟁의 과정이다. 진정한 서사시적 시간의 경험으로서 희망이나 기억이 이러한 투쟁 속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영원히 멈추어버린 시간이라는 문화주의적 형태를 띠면서 등장한다. 그런데 (루카치에 따르면) 단지 소설에서만 대상을 꿰뚫고 변화시키는 창조적 기억이 나온다. 내면성과 외부세계라는 이원성이 관념 안에서 지양될 수 있는 것은, 주체의 기억 속에서 응축되고 있는 지나간 삶의 통일성을 인식하게 될 때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예시적이고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의 의미. 이것이 소설의 중심이다.

13. 구술담의 경우에는 화자와 청자가 공동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 작가와 독자는 서로 유리되어 있다. 그래서 오히려 독자들은 소설의 재료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낼 줄 안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독자는 소설 속의 인물의 죽음을 체험해야 한다(상징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죽음에 맞닥뜨릴 때 비로소 인간은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기억이나 회상은 반추와 반성을 의미하며, 이것이 삶의 본질이나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형상화된 인물의 삶의 본질은 죽음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14. 죽음과 관계하는 삶의 의미를 논의하는 과정은 무생물의 심연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창조물의 위계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사물을 보는 관점은 신비주의적 경향을 띤다. 또한 사물에 관한 신비주의적 관점은 세계를 원환(圓環)의 고리 속에서 파악하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살아있지 않은 무생물(돌과 같은)에서도 역사적 존재의 의미와 본질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마치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과 흡사하다. 그에게는 화석화되고 생명이 없는 자연을 통해서도 그가 살고 있는 역사적 세계에 대한 자연적 예언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 장인(匠人)이다. 폴 발레리는 인물들의 수를 놓는 장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예술적 관찰은 거의 신비적 깊이에까지 이른다. 예술적 관찰을 통해 포착된 대상은 그 이름을 잃어버린다. 즉 예술적 관찰에는 명암이 독특하게 체계를 이루고 있다. 예술작품의 이러한 독특한 명암은 어떠한 지식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영혼과 눈 및 손이 한데 어울려 생겨나는 화음에 의해서만 그 존재가치를 획득하게되는 독자적 명암체계인 것이다.> 영혼과 눈과 손으로 결합되는 예술 속에서 물질과 영혼은 서로 만난다. 이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삶의 실천의 본질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장인의 실천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순히 목소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 행위의 진정한 의미는 노동으로 단련되어 장인의 질료적 표현을 담고있는 손에서 나온다. 수공업적 관계 속에서 장인과 사물은 서로 비밀스럽게 소통한다. 이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질료적 총계로서)영혼과 관계하는 기능으로서 수공업이다. 자신의 경험의 재료들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가공하는 수공업과 마찬가지로, 이야기꾼은 자신의 생애와 품위를 자유자재로 변형해서 <이야기의 불꽃으로 완전히 연소>시키는 사람이다. 수많은 예술가들 각각으로부터 서로 비교 할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Aura)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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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게으름 탓이다. 가장 흔하고 값쌀 뿐만 아니라, 가장 습관적인 음료, 그래서 또 가장 편리한 음료. 커피는 상품의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무엇이든 상품이 되고 나면 편리해지고 습관이 된다. 그러다 보니 지겨워지기도 한다. 다른 신선한 음료는 없을까? 이러한 욕망이 채워지려면 부지런해야 하고, 이는 또 새로운 비용이나 에너지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 그냥 저냥 커피를 마시며 살고 있다.

사람들이 대체로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다른 신선함을 몰라서가 아니다. 식후 커피는 마치 어떤 의례(儀禮)처럼 보인다. 친구를 만나거나 데이트하고 있는 저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우선 약속 장소에서 만나면 식사를 하러 간다. 약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지나면, 곧바로 식당을 나와 찻집으로 들어간다. 아주 익숙한 사이가 아니면, 사실 모든 얘기는 이미 식당에서 끝냈을 것이다. 밥 먹고 헤어지기 뭐하니 예의로 차를 마시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즉 내가 정말로 마시고 싶은 것인가? 하고 자문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손은 의무적으로 커피에 닿아 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친구들과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봉지커피를 타거나, 봉지커피의 변신이랄 수 있는 동전커피를 뽑는다. 동전커피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구멍이 외부에 노출되어 위생상 좋지 않을 것이다. 대장균이 꽤 서식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간혹 배가 아파 오기도 한다. 그런데도 열심히 들 마시고 있다. 마시면 헛배만 부른, 콜라 다음으로 가장 게으른 음료. 가끔은 이게 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커피에는 게으르고 지루한 속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속성이 더 많다(이 점이 콜라보다는 우월한 이유이다). 그것은 대체로 커피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것이 품고 있는 다른 것에 있을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내가 아는 한 커피는 여자들이 더 좋아한다. 왜일까? 그들에게 카페인을 더 선호하는 호르몬이 있는 것일까? 남자들은 만나면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치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일부러 다방이나 카페에 가는 일은 드물다. 간혹 실수로 그런 곳에 간다해도, 앉아서 담배만 피워대거나, 쭈뼛 쭈뼛 고개를 젖히며 하품이나 해 대는 게 전부이다. 그러다가 몇 십 분이 지나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야! 나가자!" 혹은 "술 한잔 어때?" 심한 경우엔 "에이, 지겨워!" 그러나 여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커피숍에서 밤을 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커피를 앞에 놓고 하루종일 수다를 떨어도 즐겁다. 담배를 즐겨 피우는 일도 별로 없고, 술을 찾는 일도 많지 않다. 딱히 몸을 기댈 수 있는 물신(fetish)을 별로 가지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인지, 이들에게 허락된 저 커피와 그 분위기에 자신들의 몸을 맡기기를 서슴지 않는다. 커피에 죽고 커피숍을 위해 태어난 존재! 이들이 바로 여자들이다. 남자들의 환타지가 술집이라면, 커피숍은 바로 여자들의 환타지일 것이다. 모두가 일종의 출구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장소이다. 이렇게 우리는 술에 취하는 것만큼이나 커피에도 취한다.


그러나 알콜도 없는 커피를 마시며 무엇에 취하는 것일까? 아마도 말(言)일 것이다. 그리고 더 정확히는 대화. 커피 뿐 아니라 차를 마시는 일은 대화를 의미한다. 동양인들은 차를 마시면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거기에 도(道)라는 심오한 세계를 품에 안았다. 차를 마시면서 우리는 물질과 정신을 왕복운동 하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자신과 대화하면서 명상 속에 잠기면 나의 몸은 끝간데 없는 정신적 심연으로 빠져들어 에테르 상태가 된다. 그러다가 차를 마시면 입안으로 퍼지는 모든 감각들―뜨거움, 차가움, 신맛, 단맛, 향기―로 인해 내 몸은 다시 공간을 점유하고 무게를 갖는 몽뚱아리가 되어 내려온다. 감각과 추상의 왕복 운동 속에서 나는 마치 그네를 타듯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저 여자들 역시 수양(修養)에 버금가는 무엇인가를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몸을 데운다. 이야기를 하려면 서로가 이미 잘 알고 있거나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낯선 인물이나 사건 혹은 장소들조차도 이야기 속에 들어오면 반복적인 등장으로 친숙해 지고 거기에 특별한 감정이 느껴진다. 두 번째로 지나가는 길이 익숙하고 가깝게 느껴지듯이, 반복은 거리를 없애고 감정을 촉발한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훨씬 낯설다. 저 만치에 떨어져 그 주인인 우리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이 낯선 일상이 이야기 속에 실리면, 우리는 그것을 이리저리 만져볼 수도 있고 냄새를 맡아볼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 누군가가 등장한다면, 그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선망의 대상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참 지나고 나면 그의 오밀조밀한 사건과 사연들이, 단단히 주름진 색종이가 물 속에서 흐물흐물 퍼지듯이, 하나 둘 씩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펼쳐진다. 소설가란 먼 거리에서 신비로운 광채를 띤 어떤 것을 이 편으로 가져와, 그 신비를 벗겨보았더니 실은 별것이 아니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의 탄성을 지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같은 평면 위에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같은 세계를 그린다. 곁에 바짝 붙거나 바로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나 사물들은 한편으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얄밉거나 귀찮기도 하며, 또 때로는 무섭기도 하지만, 모든 것들은 친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두려움과 냉소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야기를 통해, 떨어져 있던 간극이 식혀 놓은 차가워진 신체를 데우며, 가족을 느끼고 외로움을 없앤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식사를 하면서 몸을 데우듯이,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다. 커피와 이야기는 살아가는 것 자체이다.


그러다가 간혹 우리의 몸은 매우 뜨거워지는 경우도 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 . . 이야기를 하다보면,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뜨거운 스프 상태가 되어 잘 구별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따지고 보면 선이나 악은 살아가는데 있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거나 들으면 저 선과 악을 떠올리며 쉽게 뜨거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 자체를 그 뜨거움 속에 내맡길 만큼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야기는 그냥 놀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 속의 모든 것은 가여워 보이기만 하다. 죽도록 미운 것도 없으며 영원한 사랑도 없다. 지고한 선도 추악한 악도 모두가 그냥 이야기의 한 소절일 뿐이다.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초인이 되게 한다. 그리고 이 초인은 간혹 뜨거워지는 자신의 몸을 달래기 위해 커피나 차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커피를 들고 대화에 임하려는 것은 미리 뜨거워질 몸을 스스로 배려해서이다. 내 어린 시절 무섭기만 했던 저러한 뜨거움에 울고 있으면, 어른들은 "괜찮아! 다 그런 거야!"라고 타이르곤 했었다. 마찬가지로 커피를 마시며 그 뜨거워질 시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은 어른이다. 화나는 일이든, 슬픈 일이든, 자신의 통제력으로는 가눌 수 없는 온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커피나 차와 같은 물질의 힘을 빌어 누그러트릴 줄 아는 초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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