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서는 텔레-스크린(Tele-screen)이라는 매체가 나온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일방향 텔레비젼인데, 사람들은 텔레-스크린을 통해 당의 메시지를 시청하고, 당은 사람들에게(개인에게까지) 메시지를 하달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든, 집에서 쉬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거리를 걷고 있든, 심지어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오세아니아(Oceania) 국민들은 텔레-스크린을 경청해야만 한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텔레-스크린에 새겨진 빅부라더(Big Brother)의 눈이 사람들 각자를 주시하며 현실을 일깨운다. 텔레-스크린은 당 간부외에는 절대로 끄지도 켜지도 못하는 명령 그 자체이다. 그러니 윈스턴(Winston Smith)씨처럼 외화면(off-screen)으로 빠져서 기억에 사로잡히거나 자기만의 퇴폐적인 일기를 쓰거나 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사상범(thought criminal)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텔레-스크린이 실시간으로 보도하는 내용은 주로 반역자들의 처형에 대한 소식이나 오세아니아의 승전보--유라시아(Eurasia) 및 이스트아시아(Eastasia)와 벌이는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재화 생산량이다. 다음주부터 쵸콜릿 배급량이 25그램으로 늘어난다든지, 녹음기 생산량이 14% 증가 했다든지, 기관총과 로켓포가 수백만정 생산되었다든지, 버터나 우유가 20% 더 증가했다든지, 생활수준이 10% 더 나아졌다든지 등등. 사람들은 보도가 나올 때마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뭔가 일이 되어가고 있구나! 잘살게 될거야!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부강한 나라가 될거야! 더욱 더 충성해야 해! 라고 뿌듯해하며 입술을 치켜 올려(upper lips) 각오를 다진다. 면도날이 없어 일주일째 면도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말이다. 진짜 설탕은 고사하고 그를 대신할 사카린조차 구할 수 없으면서도 말이다. 진짜 커피나 흰빵은 구경도 못해봤으면서도 말이다. 최소한 한번만이라도 스크린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거리를 두고 생각했더라면, 텔레-스크린이 반복해서 전달하고 있는 내용이 언제나 실상과는 반대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기운이 없어서인지,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피로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너무나 영리해서들 그런지, 모두 모여 "2분간의 증오"시간에 "반역자에게 죽음을!" 우렁차게 외치는 힘 외에는, 그 누구도 목청과 핏대를 올릴 힘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 미래시대인 1984년을 한참이나 지나 더 미래적인 2010년의 SF적 시대를 코 앞에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실상은 어떠한가? 외견상 오웰이 예견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처럼 보인다. 쏟아지는 재화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현대인들, 길을 나서면 눈에 채이는 상품들,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주머니에 넣을수 있을만큼 실질적으로 진열된 식료품이며, 옷이며, 가전제품이며, . . .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점과 쇼핑몰, 우리의 나약한 감각을 사정없이 폭격해대고 있는 울긋불긋한 물건들, 그리고 그 광고들, 심지어는 남아도는 식량--사카린이 아니라 진짜 설탕, 진짜 커피--을 주체할 수가 없어 매년 수천 수만톤이 바다에 버려지고, 따로 '비용을 들여' 세운 공장으로 운송되어 분해되고 해체되는 제고품들, 쓰레기 하치장에서 나뒹구는 물건들 조차 윈스턴이 신기하게 바라보던 고물상의 물건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고급스러운 것들이 아닌가? 윈스턴 시대와는 다르게 우리는 질좋은 쓰레기들을 돈을 지불해가며 버리고 있을 정도이다. 텔레스크린이 반복했던 예언이 실현이라도 된 것 처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가가호호 붙박혀 있는 우리의 텔레비젼은 텔레스크린과는 정 반대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반복하고 있다. 경제, 실업, 파업, 성장, 민생, 안정, 질서, 교육, . . . 매일매일 반복되고 있는 그 모든 이슈들 속에 감추어진 한 가지 메시지를 찾으라면, 그것은 바로 궁핍과 빈곤의 미래가 아닌가?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다! 언젠가는 바닥이 날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다 굶어죽을 것이다! (심지어는 음식을 비유하여) 샌드위치가 될 것이다! . . .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질문하지 말고, 되돌아보지 말고, 쉬지도 말라! 끊임없는 생산! 축적! 성장! 만이 살길이다. 질좋고 고급스러운 쓰레기더미 위에서 흥청망청 허우적거리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상한 것은, 빈곤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극대화된 우리의 이 미래사회에서, 비만에 대한 공포 또한 이렇게 극대화된 시대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웰의 1984년처럼 피골이 상접한 사람들의 동공 속에 부강하고 풍요로운 국가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뱃살이 오를대로 올라 개기름 좔좔 흐르는 체구에 TV에 중독된 흐리멍텅한 눈동자 속에는 가난과 빈곤의 해골바가지 깃발이 위협적으로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INGSOC의 간부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첨단-과학-기술-세계화-자본-무한경쟁-파워-국가 시대에.


두 가지의 지배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안심시키는 길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겁을 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둘 모두는 빈곤을 이용해 왔는데, 전자는 "실질적 빈곤"을 감추고, 후자는 "관념적 빈곤"을 부추긴다. 어떤 경우든 둘 모두는 실상과는 전혀 다르며 실상을 왜곡한다. 빈곤을 감출때 사람들은 가난했고, 아무리 빈곤의 공포를 부추기고 떠벌려도 가난은 해결되지 않았다. 작가나 지식인들조차 알게 모르게 이 빈곤 담론에 몸을 실어 가난과 궁핍을 신비화하고 낭만화하여(고역스러운 밥벌이? 힘겨운 민생?), 빈곤의 실상을 혼탁하게 만들어, 그 공포 자체가 지배와 착취의 한 형태일 수 있음을 고스란히 감춘다. 물론 오웰의 1984년에도 불안과 공포는 있었다. 레지스탕스라고 불리는 골드스타인(Emmanuel Goldstein)-공포, 유라시아-공포, 동아시아-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골드스타인-실존이 진정 존재하는지, 전쟁-실존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지는 알수 없지만, 어쨌든 그 공포들 덕분에 모든이들은 단결할 수 있었고(Studs Turkel은 미국인들의 개별주의를 개탄하며 미국의 단결력에 대한 향수로 2차 대전이 가장 훌륭한 전쟁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반역자와 적에 대한 분노 만큼이나 강렬한 충성심과 복종이 가능했다. 우리의 이 미래시대에도 단결과 복종을 부추기는 레지스탕스가 존재한다. 경쟁력이라는 구호 속에 암시된 그 수많은 가상의 적들! 그들과의 전쟁에서 패할 경우 감수해야할 바로 무시무시한 빈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우리를 사로잡는 레지스탕스-공포는 바로 빈곤 그 자체이다.


당 간부인 오브라이언(O'brian)이 윈스턴의 사상범죄를 간파하기 위해 건네 준 책(아이러니하게도 오브라이언 자신이 만든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 오웰은 이중사유(double thought)라고 하는 이론을 소개하는 가운데, 전쟁과 빈곤에 관한 가상의 이론을 주장한다. 바따이유(George Bataille)의 일반경제 이론과 약간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이론에 따르면, 전쟁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생산한 모든 (잉여)생산물의 파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외부의 적이 실제로 위협을 가하기 때문도 아니고, 적에 맞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전쟁은 실제로 벌어지든 벌어지지 않든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 즉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계급사회가 유지되어 지배와 착취가 고착화되려면, 실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빈곤과 궁핍 그리고 무지가 뿌리내려야 하는데(윈스턴이 하는 일은 바로 이 무지를 조장하기 위해 과거를 지우고 단어를 줄이는 일이다), 빈곤을 가속화하고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전쟁만큼 훌륭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오웰의 말을 유추해보면, 전쟁은 적과의 생존 투쟁이 아니라 바로 빈곤의 창조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배와 착취의 사회구조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빅부라더-우상을 위시한 지배 세력이 자신들의 국민들과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다.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우리는 틀림없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성장과 부의 구호 아래서 실체도 없는 내부 외부의 적과 싸우며, 가난과 빈곤이라고 하는 레지스탕스의 위협에 사로잡혀 막연한 공포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빈곤은 제도가 되었고, 삶의 조건이 되었고, 신비가 되었다. 물론 빈곤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빈곤인지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빈곤한 것인가? 즉 사회적 총 생산력과 인구의 견지에서 실제로 빈곤한 것인가? 아니면 빈곤이 합법화되고 제도화 되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가? 누구의 빈곤이고, 누가 만든 빈곤이고, 누가 극복해야할 빈곤이며, 누구의 논리인가? 몇몇 얼빠진 작가나 예술-사기꾼들이 멋도 모르고 낭만화하면서 사기를 치듯이, 우리가 혹시 가난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마치 가난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삶의 굴레인 것처럼 여겨지고, 말해지고, 기억되며,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밥! 밥! 밥! 해가며 모든 것을 송두리채 포기하고 살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오웰이 충고했던 그 빈곤과 무지 덕분에, 짊어지어야 할 책임을 카리스마-우상에게 미루어가며 편안하고 영악하게 살고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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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실업(失業)의 사회적 해결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 종종 있지만 한번 웃어보자고 하는 소리일 것이다. 사실은 그 사람조차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실업이 거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는 노-자간의 협상테이블이 잘 예증해주고 있다. 그들은 그 테이블에서 상호간의 호혜 원칙을 발견하고 싶어하며, 양자간의 신뢰를 다지는 기회를 엿보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가족주의적 단결(업주들이 가장 좋아하는 경쟁 or 전쟁모드) 아래 회사와 공장을 일종의 가계(家系)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테이블의 현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근본적으로 무엇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를 보다 일상적으로 환기시켜 줄뿐이다. 해소할 수 없는 모순. 어떤 식으로든 대립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시장경제의 태생적 한계(간혹 맑스주의 입장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또는 후기 자본주의라고 하는 색다른 시기라고 해서 근본적인 모순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는 관점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다만 어떤 모순인가를 따져봐야 할 문제이며, 특히 현실의 이해와 그에 대한 대응방식을 혼동함으로써 비롯되는 오해들이 있긴 하지만). 어떤 점에서 협상이란 우리가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 즉 아직은 안정된 사회가 파괴되는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다고 하는 믿음을 지연시키고 유보시키려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혼란한 사회란 협상이 불가능한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협상을 필요로 하는 사회이다. 적절한 협상 타결에 의해 결정된 생산과 분배의 특정 시기가 의미하는 것은 사회적 안정이 아니라, 다음에 열릴 협상 테이블을 기다리는 동안 만연해 있을 긴장과 불안이 팽배한 사회가 아닐까? 또한 완벽한 체계는 그래야만 유지된다. 그래서 하나의 사회란 언제나 혼란과 동요가 있기 마련이다. 사실 불안과 동요는 업주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윤활유이다.


노동자 운동이 갖는 (긍정적) 의미는 사회 전체의 부(富)가 무의식적으로 재분배되는 효과에 있을 것이다. 임금투쟁이나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파업의 성공은 곧바로 기업주가 계획했던 생산 단가의 상승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기업주에게 할당된 지분과 그가 축적할 수 있는 부의 몫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생산성뿐만 아니라 이윤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윤의 축소는 기업주로 하여금 더 많은 생산성 투자를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서 노동임금과 같은 생산비용의 확대를 초래한다. 하나의 사회가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존해 있는 경우, 이와 같은 사태는 결국 경제성장의 퇴행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귀가 닳도록 듣고 있는 부진한 경제성장의 실체는 기업의 부진한 이윤과 그에 따른 재생산 투자의 축소에 다름 아니다. 그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에 기업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경제침체를 체감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가계가 이미 기업과 뿌리깊은 유착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편중된 부를 상거래나 교환행위들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파업이 실패하는 경우, 즉 노동자의 수입이 감소하거나 노동 시간이 증가한다는 것은 생산의 증가와 그 이윤의 특정 부분이 생산력 발전을 최대로 도모하기 위한 투자에 쓰였음을 의미한다. 자본가의 관점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사회가 안정되었다고 말할 때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우리가 자본가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얘기다.


그리하여 노동과 자본의 이 해소할 수 없는 모순의 시이소 놀이는 실업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업주 입장에서 고용의 확대는 곧바로 생산비용의 확대를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특히 어려운 시기가 주기적으로 도래할 때마다 등장하는 고용 감축이나 권고퇴직 바람이 사회 전체를 휩쓰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단순하고도 명료한 모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윤율이 증가하려면 최소의 인원이 최대의 생산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성장률은 고용율에 반비례하여, 그것을 따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사회적 부가 축적되려면 노동자가 사라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본가에게 있어 노동자란 비용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과 노동의 모순적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역설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늘어나고 있는 고용인원이 어느 한계에 치달으면 성장을 위해 도리가 있겠는가? 구조조정이란 냉철하고도 합리적인 계산하에 이루어지는 비용의 절감 외에는 어떠한 도덕도 개입되지 않는다. 마치 이 사회의 주기율표라고나 할까? 우리 사회에서 경제 성장률은 올라가고 있는데 고용은 줄어들고 있다는 이 이상한 신비는 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이 없다.


자본가들의 눈에 비친 노동자란 재화를 생각 없이 방탕하게 써버리며 저축할 줄 모르는 벌레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노동자들에게 너무 많은 부를 건네주었다가는 이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구렁으로 곤두박질 할 것이다. 이들에게 가혹한 현실을 일깨우고, 그 현실을 잘 버티기 위해 필요한, 절약하는 삶과 가족의 신성함 등을 가르쳐야만 한다: 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굶어죽지 않고 출근할 수 있는 기력이 있는 만큼만 베풀어야 한다. 상품 소비사회 혹은 후기 자본주의는 다소 달라졌을 것이다: 이들이 퇴근하여 자신이 만든 물건을 더 많이 살 수 있을 만큼은 베풀어주어야 한다. 한참 전부터 이미 우리는 소비의 미덕을 체화하여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베풀려면 나누어 줄 여분의 몫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아도는 부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가? 바닷물에 밀가루를 빠뜨리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해줄 여분의 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금 당장에 필요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나누어 줄 몫의 합리적 배분이 아니라, 성장에 필요한 이윤을 가급적이면 최대로 쌓아놓아야 한다는 것. 언제든지 협상테이블은 이를 수치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설득하기 위해 항상 "아직은. . . "이라는 수사(修辭)를 동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회에 있어 만족스러운 분배란 언젠가는 도래할 하나의 신화가 되어 버린다.


완전고용이 실현된 사회를 가정해본다면 어떨까? 과연 거기서 이윤이 최대화 될 수 있을까? 과연 기업주들이 그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이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중 몇 몇은 흔히 완전고용을 꿈꾸면서도, 정작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대한 집착은 버리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자본이나 시장은 단순히 생산과 분배의 체계가 아니라 일상적 행위를 결정하는 윤리적 토대가 되어버렸다. 교육이 이를 가능하게 했으며, 이런 저런 실천들이 이를 유지시켜왔다. 그러니 곧 죽어도 그 안에서 해결하고 싶어하며, 반드시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해답이라고 믿고 감사해하며 손에 잡은 것은 모두가 소똥(bull-shit)이 아니었던가? 전혀 반어적인 의도 없이 말해서, 십중팔구 해답은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좌파가 스스로 숙지하고 민중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할 사실이다. 니체가 허무주의를 비판한 이유는 해답의 불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정 반대로 그들의 의기양양한 해답의 도래신화 때문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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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는 얘기지만 한번 더 상기하는 의미에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맑스(Karl Marx)가 말했던 노동 소외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그것은 노동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즐겁게 여기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고역으로 느낀다면,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이 정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굶어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길,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 체제가 여차저차 하여 사람들로부터 모든 생산수단(토지, 기계, 건물, 원료 등)을 빼앗고,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의 구호들 속에 항상 등장하는 '빼앗긴 노동', '강요된 노동', '소외된 노동'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맑스가 쓴 <자본>(Das Kapital)이라는 책에 그 좋은 예가 하나 있다. 19세기에 한 영국 자본가가 공장을 세우기 위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이런 저런 생산수단을 싣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스완강 지역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고 나니 아무도 일하러 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그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땅을 차지해서 자신만의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장이 생산을 하려면 즉 자본주의가 가동되려면, 저 사람들로부터 땅이나 일체의 생산수단을 빼앗아, 그들이 공장에 들어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한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중세때부터 수세기에 걸쳐 토지를 합병하고, 농지를 전환하고, 사유화하는 등의 운동이 있었는데, 이를 인클로져(Enclosure movement)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쫓겨나 갈곳이 없었던 수많은 농민들이 대도시로 몰려들어 공장노동자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산업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6, 70년대의 한국도 이러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본의 품 안에서 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이미 무엇인가를 빼앗긴 결과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인가?


강요된 일은 우리의 삶을 여러가지 면에서 비참하게 만든다. 그 모든 비참함의 목록을 전부 나열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쉽게 체감하는 비참함을 단 한가지만 말한다면, 우리는 일하지 않을때 가장 행복해진다는 점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 평생 일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가장 기다려지는 토요일 오후! 지금은 좀 나아져서 금요일 오후! (엄밀히 말해 나아진 것도 아니다. 휴일을 잘 보내려면 돈이 필요하다) 점점 배가 아파오는 일요일 저녁! 월요병! 실제로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파오는 증후군이 있을 정도이다. 일 자체에서 오는 고역도 있지만, 이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쾌함도 역시 우리의 배를 아파오게 하는 요인이다. 그들은 동료이기 보다는 잠재적 적(敵)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노동과 관련하여 겪고 있는 이 모든 불쾌함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월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그 현장들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는 불쾌함의 원인이 적응을 못하는 자신의 성격탓이라거나, 사회화가 덜 된 탓이라거나, 등등의 이름모를 죄의식을 가지며, "인내가 부족해!"라고 자위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흔히 인간관계가 좋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잘 참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에서는 노동이란 낙원에서 추방당한 벌, 즉 인간 자신의 죄값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삶 자체는 노동의 과정이고, 노동이란 으례 고역이며, 참아야 할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힘든 고역을 참고 견뎌 내었다. 그런데 단 하루 좀 편하게 있어볼까 했더니, 별안간 '우리의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교회에 나가 기도를 드리란다. 인생 자체가 무슨 극기(克己) 훈련장 같다.

맑스는 인간의 본질을 노동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이며,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의미했던 노동이란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이 말했던, 또 대부분의 우리가 배워왔던 의미에서의 노동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노동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면서 삶의 충만을 경험하고, 일 그 자체가 주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지, 더 많은 임금과 더 많은 댓가를 받음으로써 얻게되는 승리감 따위로 유지되는 그런 저질적 노동이 아니었다. 노동의 의미가 다른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댓가를 바라는 일! 그리하여 지겹고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눈치보며 하는 일! 잔머리를 굴리는 일! 그 자체 경쟁이고 싸우는 일! . . . 이것이 우리를 노예 상태로 만드는 일이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속박하는 쇠사슬이다. 우리가 풀어헤치고 벗어나야 할 것은 궁핍이 아니다. 바로 쇠사슬 그 자체로서의 노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금투쟁은 근본적이지 못하다. 심지어 그것은 쇠사슬에 흉측한 흠집들만을 냄으로써, 그에 묶인 우리의 상처를 더 아프게 할 수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월급이 아니라 바로 즐거운 월요일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 아닐까? 예술가들이 밥을 굶으며 궁핍에 허덕이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맛을 본 것이다.


노동을 강요한 것은 삶 자체가 아니다. 여차저차 하여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체계, 쇠사슬로 발목을 묶었던 고대나, 아버지의 이름 아래 말씀의 무게로 정신을 내리 눌렀던 중세의 서구처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어떤 규칙들이 거꾸로 우리의 노동을, 나아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한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