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란 존재의 사용불가능성과 비효율성을 선언하는 분과이다. 그리고는 그 쓸모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여기에 이렇게 엄연히 실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인문학은 바로 시간과 지속의 과학인데, 왜냐하면 시간과 지속은 사용불가능한 존재가 실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다루고 있는 시간이란 물리학적 의미에서의 공간적 시간(공간에 덧붙여진 또 다른 형태의 공간 즉 4차원)도 아니고,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최대로 단축시켜야 할 부정적 시간도 아니다('시간은 금'이라는 자본주의의 고전적 명제는 시간의 긍정이 아니라 시간의 부정이다). 인문학이 존재에게 부여하는 그 시간은, 무엇인가가 빠르고 순간적이고 한꺼번에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 모든 사물들이 그 자신의 완성을 향하여, 본질의 열림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속도를 낼 수 없도록 방해하는 그 무엇이다. 그 시간은 세계를 지연시키고, 우리를 망설이게하여, 시(詩)를 읽는 독자처럼, 우리로 하여금 오래토록 머무르도록 강요한다(또 이 머무름 속에서만 우리의 삶은 완전해 질 것이다). 이 강요의 한복판에 던져진 우리는 그 지연된 시간 속에서 "적절한 것"을 고뇌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스스로 짊어지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자신의 본질을 펼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이란 삶 속에 시간이라고 하는 아주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추가한 학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존재의 비효율적 가치를 긍정하는 유일한 영역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효율성과 사용가능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적 관점은 존재로부터 시간을 빼앗는 위치에 서 있다. 존재로부터 시간을 빼앗아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공간적인 것만 남겨놓는, 그래서 모든 존재를 불활성의 세계로 둔갑시켜서, 수동적 기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체계. 최대효율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순간성과 자동성, 나아가 최대 수동성이다. 그 첨단이 바로 로봇이라는 사실은 우리 다 같이 알고 있는 바가 아닌가? 만일에 인문학에 어떤 위기가 왔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지속 불가능한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혐의를 두고 그 환경에 적응을 종용하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환경을 바꾸든지는 우리가 할 탓이겠지만.
그 수 많은 한국의 인문학자들의 선언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근본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 신자유주의라는 다소 중화되어 모호한 이름으로, 그냥 단어들만 부르짖으며 말장난을 하느라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항상 놓쳐버리고 마는 주제: 자본주의! 그들이 비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같은 말이지만 대중과 괴리되었기 때문도 아니다(어떤 대중?).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오히려 그들의 반성은 잘못된 문제의식을 보여줄 뿐이다). 바로 인문학적이지 않았다는 것! 여전히 인문학적이지 않다는 것!
왜 그들은 항상 잘 나가다가도 맨 나중에가면, '적응'이라든지, '변화'라든지, '대중화'라든지, '응용'이라든지 하는, 우리를 맥빠지게 하는 추상적 용어들 속에 고착되어 틀어박히고 마는 것일까? 그들이 바로 그 체계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실상은 최대효율성의 체계 속에서 교육받고, 교육하고, 그 선배들과 그 스승들이 마련해 준 어떤 어떤 공허한 특권들 속에 안주하여, 실질적 자본의 토대위에 가까스로 앙상하게 버티고 서 있는 상징적-심리적 자본에 도취되어, 거기서 주어지는 가능한 모든 취미와 우울과 혐오 혹은 위선적 자애와 너그러움과 권태등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며,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자신도 모르게),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서들과 소재들을 발견하면서, 그 건전해보이지만 실은 밀폐된 환락을 만끽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결코 자신들의 그 강건해 보였던 지반, 그 안락한 환경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효율적 체계의 타도!라고 하는 명제의 실천은 냉소적인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무시무시한 것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7, 80년대의 공장 등지에서 블루칼라들이 겪었던 무지막지한 공포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선언이나 주장이 진지하고 진정한 것이라면, 아니 그들이 조금만이라도 총명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자신들이 서 있는 지반의 물적 토대를 송두리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짐작으로 속물정신에서 태어난 그들은 결코 그 지반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멋모르고 내뱉고 만 그들의 선언행위는 웃음조차 유발시키지 못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인문학의 해방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는 결코 완성될 수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해당되는 글 2건
- 2006/10/22 인문학과 선언행위 (6)
- 2006/09/30 비교와 부정에 관한 분석단상 (7)
여담 한마디 하겠다. KBS 텔레비젼 프로그램 중에,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가 있다. 지역을 돌면서 일반인들을 출연시켜 그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고, 즐기고, 상을 타게 하는 일종의 노래 경연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는 다른 경연 프로와는 다른 점이 하나가 있다. 심사위원이 노래를 듣다가, 영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 "땡!"하고 종을 쳐서 노래를 중지 시키는 것이다. 그 종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리고 웃는다. 참가자는 창피해 하면서 쥐구멍에 숨기라도 하듯이 무대 밖으로 재빠르게 내려간다. 쥐구멍으로 숨어드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사람들은 어떤 쾌감 같은 것을 느끼며 한바탕 웃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얼마 전에 북한에서 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방송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북한 방송과 합작하여 북한 사람들의 노래 경연을 연 것이다. 세계적으로 베일에 가려져 있는 그들을, 누군가의 소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화면으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궁금했겠는가? 그들은 어떻게 노래를 부를지 어떤 몸동작을 취할지 흥미롭지 않았겠는가? 어리둥절해가며 종소리에 반응하는 광대 같은 모습이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날 방송에는 실망스럽게도 이 프로그램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땡!"하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그 경연에서는 폭소도 나오지 않았고, 1등상이나 2등상 역시 가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사람들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무덤덤하게 쳐다보고, 그들의 몸동작과 발성법, 그리고 그들이 애창하는 노래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랑 타령 일색의 가요가 아니라 그들만의 독특하고도 새로운 감성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빠진 것 같았다. 우리 식으로 한 마디로 말해 좀 시시했던 것이다.
왜 종소리를 치지 않았을까? 또 왜 순위를 뽑지 않았을까? 한참이나 지나서 그 프로그램 사회자인 송해씨는 귀국을 하였고, 어느 아침 방송 토크쇼에 나와 그 뒷얘기를 우리에게 해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북한 방송 관계자가 그 "땡!"소리를 거부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설명하길, 왜 노래 부르러 나온 사람을 무안을 줍니까? 왜 누군가를 뽑아서 즐거움을 몰아줍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설명을 듣고 나서 갑자기 나는 저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간임을 깨달았다. 송해씨는 그 뒷얘기를 전해주긴 했지만,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이 프로그램은 여전히 그 "땡!"하는 종소리를 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몰래카메라는 또 어떤가? 자유진영(?)에서 방송하는 텔레비젼을 하루만 보고 있으면, 그들이 무엇에 즐거워하고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한 동안 많은 문화단체가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중단하라는 구호가 있어 왔지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고, 어떤 사고방식 속에서 살고 있는지에 대해 한 마디 하겠다.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따져보지 않는다. 그 병폐야 은하수의 무리를 이루는 별들만큼이나 많지만, 우선 그것은 인간들의 관계를 물질적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물질적 관계란 물건이든 뭐든 교환이 가능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 사회는 교환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면서 모든 것들을 판단한다. 가치나 등급을 정하고, 그것을 다른 어떤 가치들과 바꿀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사물과 사람을 대면한다. 게다가 자본주의적 교환이란 옛날 사람들이 하던 식의 물물 교환이 아니다. 상인들의 교환이란 이윤을 내는 교환을 의미한다. 즉 교환되는 것들의 가치가 동등한 것이어서는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인들에게 있어 본전치기란 손해보다도 더 실망스럽고, 그들을 맥 빠지게 하는 것이다. 잉여가치. 이것이 등가적인 교환의 표면 아래에서 감돌고 있는 교환의 심층적인 의미이다. 노동자들의 노동과 임금의 교환이 동등한 가치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파업이나 노조는 불필요했을 것이다. 또 만일에 그러한 등가의 물물교환이 일어났다면 자본주의적 이윤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자본의 재생산 역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의 교환체계가 달라지지 않는 한에서는 파업이란 점근선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교환을 함으로써 가치들을 비교한다. 이것이 또한 "물질적 관계를 갖는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가치들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특정 형태의 물건들처럼 그것들을 측정해야만 한다. 우선 물건들을 측정하려면 자(尺) 라든가 저울과 같은 척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물건의 공간적 성질을 한정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척도로 잴 수 없는 경우에는 사물끼리 줄을 세운다. 이것과 저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혹은 나쁜가? 어느 것이 더 무거운가? 가벼운가? 어느 것이 더 큰가? 작은가? 어느 것이 더 예쁜가? 못생겼는가? 어느 것이 더 잘하는가? 못하는가? . . . 한이 없다. 이 교환행위 속에서는 사람들조차도 어떤 물건들처럼 비교되고, 측정될 수 있는 가치들로 환원되어야 한다. 우리는 "몸값"이라는 말을 비롯해 몸의 척도를 나타내는 용어들을 아무 느낌 없이 쓰고 있다. 더 비싼 몸이 있고, 싼 값의 몸이 있다. 이는 근수가 더 나가고 안 나가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 가치란 "이것은 좋다 혹은 저것은 나쁘다"의 문제를 훨씬 뛰어넘어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에까지 나아가곤 한다. 그것이 인격이든 부(富)이든 외모이든 간에 우리가 발명한 기준들은 무수하게 많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일류라든가 이류라든가 삼류 등을 구별하고, 심지어는 스스로 일류나 이류 혹은 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살다보면 감정들조차도 비교의 대상이 된다. 누가 더 슬픈가? 덜 슬픈가? 누가 더 기쁜가? 덜 기쁜가? 누가 더 행복한가? 덜 행복한가? 가령, 우리는 사랑과 우정을 비교하거나, 친구들 간의 행복을 비교한다. 무엇이 더 기쁜가? 아닌가? 혹은 무엇이 더 큰가? 적은가? 사랑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분자적 상태와 배열이 있고, 또 우정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분자적 상태와 배열이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영수의 행복과 철수의 행복 각각을 이루는 특이한 분자적 상태와 배열이 있는 법이다. 그 상태와 배열들은 서로 본성적으로 다른 행복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둘을 비교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무엇이 "더 . . . 한가?" 혹은 무엇이 "덜 . . . 한가?"를 따져보고, 궁극적으로 이 두 상태들을 일반화하고 단일화 한다. 그래서 사랑이 우정보다 더 강하고 우정이 덜 강하다든가, 영수가 철수보다 행복하고 철수는 영수보다 불행하다든가 하는 식의 차별적 발상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렸을 때부터 배운다: "엄마하고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아?" 학교라는 곳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싹틔우는 비닐하우스이다. 서로 무관할 뿐만 아니라 본성적으로 다른, 남의 집 귀한 아이들을 교실에 몰아넣고, 누가 더? 누가 덜? 의 이데올로기를 그 뿌리에서부터 심어준다. 이렇게 천박하고 무지한 사유체계 덕분에 아이들은 물건이 되어가면서, 그 비교로부터 샘솟는 슬픔을 몸속으로 내면화하고, 인상을 구겨가면서 인생을 망쳐간다.
물질적인 관계 속에서 비교되는 것들은 모두가 부정적인 것(the negative)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을 비교하려면 반드시 그것과 유사하거나 동류(同類)의 것이라고 판단된 다른 사물과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짝을 맺어야 하고, 따라서 그 사물의 본질과 가치는 짝을 맺는 다른 사물의 본질과 가치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비교란 사물을 상대적 존재로 추려냄으로써, 그것의 가치와 본질을 특정 영역으로 가두는 행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존재에 부여된 의미 외에 다른 어떤 자격을 가질 수 없도록 한다. 비교란 존재의 상대적 규정이고, 규정이란 바로 존재의 부정이다. 가령, 코끼리와 손톱깍기를 비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의미한 짓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둘은 서로 본성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견주어 논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코끼리와 기린은 비교한다. 그들은 동물이라는 공통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이라고 하는 하나의 일반관념이 만들어지고, 서로 다른 존재인 코끼리와 기린은 동물의 일반성 아래에 집결된다. 무관할 뿐만 아니라 본성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능력과 취향과는 상관없이 교실에 모여 동일한 학습을 받듯이, 하나의 단일하고도 동질적인 존재로 뒤섞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코끼리는 기린이라는 척도를 통해 가치를 갖고, 기린 역시 코끼리라는 척도를 통해 가치를 갖는다. 우리의 영수와 철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감정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느끼는 행복감이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의 감정 상태가 행복이라는 단일한 용어 아래 뒤섞이면, 마치 완벽하게 비교 가능한 것처럼 둔갑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영수와 철수는 단일한 용어 속에 뒤섞여 인간이라는 동일한 용어를 부여받고, 나아가 누가 더 행복한가? 라는 질문 속에 던져져서,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복을 결정짓는 조건들, 가령 돈이라든가, 명예라든가, 외모라든가, 글쓰는 능력이라든가, 말하는 능력이라든가, . . . 하는 공통성의 조건들을 가질 것을 강요당한다. 그리하여 그 공통적 조건을 더 충족시켜 주는사람이 결정되면, 그들 중 하나가 보다 우월한 존재 혹은 열등한 존재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시력이 정상인 사람과 장님 중에 누가 더 시력이 좋은가? 하고 질문하는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으며, 또 어떤 것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는 사물들을 특정 기준에 의해 재배열하고, 그럼으로써 사물 각각의 고유함을 박탈한다. 존재들의 그 고유함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다양성 역시 부정된다. 또한 차이가 사라짐으로써 사물들은 지루한 존재(the indifferent)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본성적이고도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을 마음대로 뒤섞어서 비교하고, 동일화하고, 하나를 다른 하나에 귀속시키고, 부정하고, 일반관념을 만들어댄다. 이것이 바로 옛날부터 서양인들이 잘 해왔던 철학적 이분법이다. 그러한 이분법이란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구분하고 갈라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진짜를 선택하고, "누가 더 ~ 한가" 혹은 "누가 덜 ~ 한가"를 차별하여, 나머지는 그 진짜에 귀속시켜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상사성(similarity)과 유사성(likeness)이라고 하는 두 가지 형태의 닮음 관계로 설명할 수가 있다. 간단히 풀어 설명하자면, 상사성이란 두 친구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해 보일 때를 뜻하고, 유사성은 아이가 어머니를 닮은 경우를 뜻한다. 그래서 상사성은 서로 닮은 관계를 갖는 두 존재가 어느 누구에도 귀속되지 않고 우연히 친화성에 의해 관계를 맺는 경우이고, 유사성이란 하나가 다른 하나의 모델이 되어 그 닮은 관계가 종속적인 형태로 나누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에는 "너희 둘이 닮았구나!"라고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너 엄마 닮았구나!"라고 한다. 유사성의 경우엔 모델과 복사물의 관계가 성립되어 모델은 진짜가 되고 복사물은 가짜가 된다. 지금까지 위에서 설명해 왔던 "비교에 의한 사물의 부정"이란 바로 이 유사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말한다. 둘 중에 더 ~한 것을 선별하여 골라내고, 그 나머지는 선별된 참된 모델에 따라 재 정의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본성적인 차이가 아니라 동질적인 차이, 즉 모델을 기준으로 하여 정도상의 차이를 구별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분법의 진짜 문제는 사물들을 구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뒤섞어서(즉, 동질적인 부류로 만들어서) 그 고유의 존재를 훼손시키는 것에 있다. 사이드(Edward Said) 말마따나 서양인들이 동양과 서양을 구분했던 것은 단순히 그들 간의 본성상의 차이를 나눈 것이 아니었다. 인류학적 야망에 부풀어 있었던 그들은 인류(Human Being)라는 단일한 용어 속에서 진짜 인종을 선별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렇게 선별된 동양론(Orientalism)을 후손들에게 오랫동안 가르쳐왔던 것이다. 유색인종을 대하는 백인들을 가만히 살펴보라. 이 말뜻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하다는 것은 본성적으로 다르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사물들을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비교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성을 부정하는 행위들을 통해 각각의 사물들에게 그 본질과 가치를 강요한다. 불가능한 것을 실천하면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 억지와 폭력의 감행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강요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에게는 없는 능력을 가져야만 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배타적으로 소유해야 한다. 다양성을 부정하고 특정한 가치를 강요하는 사회 체계는 다양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리를 찾지 못하게 한다. 그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 가치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삶이 빈곤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교와 부정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유이다.
<문예노트>
on_negation.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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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불가능성' 이란 말의 정확한 풀이가 무엇인가요? 정의불가능이라던가 증명불가능도 아니고,, 막시즘에서 그러하듯이 인간의 존재를 노동의 가치로 환산하려하는 그런 '사용/효용가치'와 대치되는 본질적인 가치, 타자가 정의를 내려주기 전에, 인위적인 문명과도 관계없이..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이 이미 스스로 실재한다는, 그런 걸 의미하기도 한 건가요?....한참 생각해봤습니다^^
사용불가능 = 사용할 수 없음 = 쓸모없음 = 비효율성 = 시간의 지연 = 에너지 소모 = 지출증가 = 생산성 부진 = 이윤율 저하 = 자본주의 멸망 = 인문학 승리!!!
윗 부분을 약간 수정했어요 . . 읽기 편하게 . . .
본문은 아직 안읽었는데, 위의 설명으로 충분히 알겠습니다
존재의 사용불가능성=비효율성=에너지 소모(시간)
이 부분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해를 돕네요^^ 감사합니다.
본문도 다시 읽어보죠 그럼
인문학이야 원래 비효율적인 학문이라는 건 초등학생도 알 겁니다.
소위 책읽는다고 밥이 나오는 건 아니니...
하지만, 요즘은 인문학을 진정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없어서
인문학이 위기인것 같습니다.
위기를 선언한 사람들도 진정한 인문학자들은 아닌 것 같구요.
그들은 대학에서 밥벌이를 하는 직업인들인 것이죠..
진정한 인문학을 하려면,
사실 대학을 박차고 나와야
혹은 정신적으로 라도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요.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한 사람들은
아마도 직업에 연연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 의해 인문학이 남용되고 있지나 않나 싶어요..
찾아보면 진정으로 인문학을 연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실존으로 만들기 위해 배고파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요.
인문학에 대한 어떤 선언이 있었야 한다면,
그들로 부터 진정한 선언다운 선언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사실, 최근에 교수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했을때 정말 픽~ 하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직업이 없으면 . .오히려 더 괴롭던데요^^ . . 직업에 더 연연하게 되고 . . ㅎㅎ . . 공부도 안 되고 . . 책 읽기도 싫고 . .
대학을 박차고 나오라면 . . 굶어죽으라는 얘기?
가혹한 요구를 하고 계시는군요. .
그런 요구보다는 . . "인문학 하러 대학 가지 말기" 운동을 벌이는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 .
앞으로는 바뀌겠죠 . .
네트워킹으로 중무장을하고 있는,
우리 같은 블로거들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