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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19 이모와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보며 (2) (11)

지금 생각해보면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이모의 화사함은, 내가 서울로 이사오기 전까지만 남아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우선, 나는 국민학교 2학년 2학기에 서울로 전학을 왔다.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투리를 심하게 쓴다는 이유로 반 아이들은 나를 놀리고는 했으며, 나 역시 녀석들의 억센 텃새에 눌려 주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쉬는 시간이 겁이 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성적도 좋을 리가 없었다. 시험만 끝나면 어머니가 불려오기 일쑤였다. 이모가 그렇게 칭찬했던 서울 생활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헛된 상상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생각했던 탓인지, 한편으로는 밉기도 했던 이모의 모습은 그렇게 점점 잊혀지고 있었다.

그녀의 화사함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은 더 큰 이유가 있다. 내 마음 속에 그녀를 나타나게 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향긋한 냄새가 아니었다. 분홍빛 뺨의 부드러운 촉감은 더더욱 아니었다. 또 그녀의 깔깔거리는 장난이 나를 당혹스럽게 해서도 아니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이제 그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식구들의 입담에 의해서만 내게 전달될 뿐이었다. 시골에서 할머니나 할아버지 혹은 삼촌이 올라왔을 때라든가, 엄마 아버지의 대화 속에서만 이모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거나 마주보는 인칭이 아니라, 내가 빠진 인칭, 나 와는 관계가 없는 "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식구들이 저만치에서 거리를 두고 요모조모 살피는 시선 속에만 있었고, 그것은 내가 예전에 보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농사 일을 돕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집을 갈 생각도 없었다. 학벌이 없어 취직은 더 어려웠다. 집안 일을 부지런히 배우고 도울만큼 참한 처녀도 아니었다. 그녀가 가족을 위해 또는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식구들 마음에 새겨진 이모의 빛은 더 이상 생기에 차 있지 않았다. 산 너머를 주시하는 포부를 가진 처녀도 아니었다. 다만 한 명의 시골 여자일 뿐이었으며, 자신이 해야할 의무나 할 일을 미룬 채, 소녀적 감성에 고착되어 비현실적인 동경만을 품은 철부지에 불과했다. 그러니 바람이 한껏 들어간 이 시골 여자를 근엄한 촌구석 가부장 기계가 곱게 보았을 리가 없다. 밭을 일구는 것이 무엇인지, 밥물은 얼마나 채워야 하는지, 김치에 젓갈은 어떤 것을 넣어야 하는지, 결혼 생활이 어떤 것인지, 아버지와 남편이 무엇인지, 또 아내가, 여자가 무엇인지, . . . 이러한 질문들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엔 막연한 약속만이 채워져 있었고, 그녀를 둘러싼 시골의 토담 한 가운데에서 한없는 갈증만을 느끼고 있었던, 말하자면 그녀는 소멸이 예고된 초라한 빛이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의 이모는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다. 첫 번째 결혼식 날은 비가 많이 왔었다. 결혼식 날 비가 오면 불행하다는 어른들의 걱정 소리가 들렸지만, 정작 결혼할 남자가 대머리라고 수군거리며 비아냥대던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나 시집간다!고 들뜬 목소리로 이모가 내게 왔을 때, 그녀의 진한 화장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었다. 나는 결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 진한 화장을 보고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모는 1주일이 채 못되어 시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녀로부터 직접 듣지 못했으므로 정확한 이유야 알 길이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남자의 대머리가 생각보다 심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후로 이모에 관한 어른들의 얘기는 반은 걱정이었고 반은 비웃음이 되어갔다. 그녀에 대한 화제는 결국 웃음으로 이어지고, 가족이나 친척들끼리 모여 서먹서먹함을 중화해야할 필요가 느껴지면, 여지없이 화제는 그녀에게 가 있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두 번째 결혼이 조용히 치러졌다. 창피하다는 이유로 아무도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는 무슨 군수(郡守)의 아들이라고 들떠있었지만, 귓속말로는 재처(再妻) 자리라고 쑥덕거리고들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채 1달이 못되어 이모는 다시 시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두 번이나 결혼을 하고도 그녀는 완전한 처녀였다고 했다. 그 후로 이모는 웃음거리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미 그들의 눈과 귀를 통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던 나 역시 그랬다. 심지어는 막내 여동생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비난 할 때면, 너 이모하고 똑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여동생에게 그 비난은 일종의 수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모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본의 아니게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을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 구실 못한다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었을 할아버지의 싫은 소리. 고집스런 시골 사람들의 질긴 시선. 서울 가서 공부 잘하는 막내 동생(삼촌)과의 비교. 또 누나를 창피해하는 그가 집으로 내려올 때마다 겪게 되는 사소한 언쟁들. 그리고 싸움. 모욕. 비웃음. . . . 실제로 나는 할아버지의 웬수인 이모와 그의 우상인 삼촌의 큰 싸움을 몇 차례 목격한 일이 있다. 두 번째 결혼이 실패한 후 3개월이 채 못되어, 결국 그녀는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가게 되었다.

그 절망적인 가출은 한편으로는 해방이었고, 어쩌면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남들의 눈을 피해서 동네를 나와야 했으므로, 새벽에 일찍 혹은 밤 늦게 대문을 나섰을 것이다. 아니, 밤이 늦으면 갈 곳이 없으니, 새벽 일찍 나가야 한다. 계획된 가출이 아니었기 때문에, 짐을 싸들고 나오며 어디를 갈까 망설였을 것이다. 우선 잘 곳을 알아봐야겠지? 친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그러나 그 시절에는 친구를 받아들일 만큼 여유있게 독립한 여자들이 흔치 않았다. 또 그녀는 중학교를 겨우 나온 학벌이었기 때문에, 사회에 나가 어깨를 피고 살고 있을 친구란 찾아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남편이나 아버지 혹은 다른 어떤 조명 아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집을 나서자 마자 실감을 했을 것이다. 어른들이 왜 자꾸만 자신을 시집 보내려 했는지, 동년배 친구들이 왜 자유로워지기 위해 결혼들을 해대는지, 또 배우지 못해 독립이 힘든 여자에게 결혼이, 그리고 현재 자신의  일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이 고독과 두려움이 무엇인지, . . . 나이 어린 처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뭐 이런 복잡한 사안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을 것이다. 대문을 나선 것이 후회스러웠을 것이다. 처음으로 맡아보는 차가운 새벽공기가 가로막고 있음을 느끼며, 자신 안에 있는 생기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살기 위해서는 취직을 해야했고, 그러려면 틀림없이 도회지 쪽으로 가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 서울이었을지도. . . . <계속>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