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일이지만 불가피한 우리의 인간적 조건(혹은 한계)에 대해 비판을 하고, 우리가 자부하는 이성의 능력으로 그 조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잠정적이지만 이 과정을 일종의 윤리적 완성의 길이라고 불러보자. 나 혼자만의 연구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몫이라는 명목 하에 설득을 해야 할 입장이므로, 또 스타일을 추구하며 멋을 부리기에는 별로 시간이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그 모든 개인기를 접고(항상 노력 중이지만), 담백한 문체로, 사례를 들어가면서 가급적이면 쉬운 얘기로부터 시작하겠다.
의사이면서 작가인 케이트 스케넬(Kate Scannell)이라는 사람이 쓴 글 중에 "Skills and Pills"라는 짧은 에세이가 있다. 이 에세이는 암이나 에이즈 같은 불치의 환자들을 대하면서 느꼈던 개인적 심정, 의사로서의 자신의 직분에 대한 사명감, 나아가 자신의 인생의 변화 등을 병원생활의 사례를 적어가며 쓰고 있다. 글을 따라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겠다:
그녀는 처음부터 에이즈 환자들을 맡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대학에서의 연구보다는 지역 사회 의료 활동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에이즈 환자들이 있는 병동에서 2년 이상을 근무하고 있는 중이다. 근무한지 얼마 안 되어서는 에이즈 환자들의 슬픔, 복잡한 질병상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등을 경험하면서,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에 놀랐다.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나락 아래에서도, 작은 희망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애처로운 안간힘들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의사로서의 지식을 최대로 동원하는 것, 자신의 손에 든 노련한 솜씨(skills)와 가방에 든 약(pills)뿐임을, 그리하여 그들을 치료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그녀의 그와 같은 결심은 자신뿐 아니라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가장 최선의 선택처럼 보였다. 그 이후 그녀의 생활은 에이즈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병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마치 야전장(夜戰場)의 신병처럼, 질병과 싸우고 또 싸우고, 적이 보이지 않으면 현미경을 들이대어 색출하고, 보이는 적은 메스의 날카로움으로 모조리 자르고 태우고 . . . 자신이 보고 배운 의학의 놀라운 발전과 의학적으로 첨예한 문제들이, 서로 서로 부딪치면서 불꽃을 뿜으며 드러나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에이즈 전문 저격수와도 같았다.
환자들의 수척함이 너무 심해서, 언젠가 사진에서 본 아우슈비츠 포로들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종양으로 심하게 손상된 한 젊은이는 노틀담의 곱추를 연상케 한다. 이들과 함께 하면서 질병과 싸우고 있는 그녀를, 적을 앞에 두고 차디찬 심장을 소유한 병사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환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가슴 아픈 연민이 없었을 리 없다. 그녀는 이 병동의 슬픈 이야기와 불행을 입 밖에 낸다든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든가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왜 이들에게 감화되어 뜨거운 가슴을 억누르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 조차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겪은 저 불행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냉철한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즐기지도 않았고, 인간에 대한 진지함도 견지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럭저럭 몇 달이 지났다. 그러다가 라파엘(Raphael)이라는 한 환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 22살의 청년을 잠깐 동안 겪으며, 의사로서의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고백한다. 그 청년은 크게 부풀어 오른 자주색 혹 덩어리들이 두 눈을 가리고 있어서 앞을 볼 수 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은 눈꺼풀을 힘들게 쥐어짜야만 겨우 압착되어 비집고 나올 정도였다. 짙은 자주색 다발성 종양들이 림프 마디로 이리저리 스며들어 입천장까지 타고 올라와 버렸다. 또 다른 종양 덩어리가 오른쪽 발바닥에서 다리를 타고 올라와 걸을 수도 없었다. 폐 주변에는 액체 덩어리들이 누르고 있어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라파엘은 몇 번이나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우리의 저격수는 그 구조 요청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지, 또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내 갈고 닦은 실력으로 자동인형처럼 하나 씩 하나 씩 수행한다. 그녀의 귀에는 오래 전 선생님들이 의술을 연마하면서 가르쳐주었던 그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호흡 장애를 바로 잡아야지!" "아냐! 아냐! 빈혈 먼저 판독하고 !" "전해질 장애 교정하고, 약으로 붓기를 빼라구!" "그래! 그래! 간단한 문제가 아냐!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구! 마지막으로 카포시 육종 잊지 말라구!" 그녀는 한쪽으로는 라파엘의 애원을 들으면서, 다른 한 쪽으로는 참호에서 불호령처럼 떨어지는 명령을 무전기로 하달 받듯이, 단호한 선생님들의 최첨단 조언을 듣고 있었다.
긴박한 와중에도 그녀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환자의 요청이 긴박해질 때마다, 그녀는 환자의 신체 정보를 채취하기 위해 정맥과 동맥에, 딱딱하게 부어오르거나 종양으로 굳은 부분을 잘 골라 피하여, 재빠르게 그러나 슬며시 주사바늘을 꽂는다. 라파엘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다시 도와달라고 흐느낀다. 그러면 이번엔 신(神)만이 할 수 있을 생명(숨) 불어넣기처럼, 환자의 코에 플라스틱 캐뉼러를 꽃아 산소를 공급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다시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이번엔 그에게 꽂힌 IV line으로 칼륨을 투여한다. 그리고는 환자의 상태에 대해 조언을 잊지 않는다. "고비는 넘겼어요! 화학요법은 아침에 얘기해 보도록 하죠!" 그리고는 "휴우 !!" . . . 병원을 나오면서 그녀는 지쳐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버렸다고, 가방을 비웠다고, 그러니 환자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왠지 모를 확신을 느꼈다. 그 확신은 모든 것을 소모해버린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쾌감 같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날 밤 병원 당직 의사가 그 환자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라파엘은 그 의사에게도 도와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런데 당직 의사는 라파엘의 몸에 꽂힌 정맥 주사와 칼륨을 모두 중단하고, 혈액검사와 수혈도 취소하였다. 그리고는 라파엘에게 간단히 몰핀(진통제)만을 투여해 주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라파엘은 당직 의사에게 미소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그 날 밤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실적 이야기의 끝이다.
이렇게 읽어가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환자의 불행을 저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행을 진심으로 가슴아파 하지 않았던가? 의사로서 양심적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사명감을 가지고 직분을 다 했으며, 개인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성실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사 아니 그런 인간을 찾아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그녀는 의사로서 또 인간으로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닌가? 그런데 라파엘은 그런 그녀를 몰라준 것일까?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었던 것일까? 종양이 뇌까지 퍼진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참 후 그녀는 라파엘을 생각하면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째서 라파엘은 그녀의 정성이 아닌 당직 의사의 성의 없는 조처에 미소를 지었는지를 회고하고 있다.
". . . 가끔 라파엘을 생각하면서, 그에게 용서를 빈다. 그가 죽은 후부터는 이전과 똑같이 치료할 수 없었다고. . . . 눈동자가 달라졌다고, . . . 이제는 화자의 말 속에 숨은 소리를 더 분명히 듣고 있다고. . . . 죽어서 질병에 찌든 시체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라파엘의 영혼처럼, 수년 동안 내게 스며든 전통 서구 의학이 마련해 준 옷이 너덜너덜해진 넝마처럼 흐드러져 버렸다고. 이제 내 안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고, 나를 가르쳐준 늙은 현자들의 합창이 아닌 연민 어린 감성이 더 크고 또렷이 들린다고. 나는 가끔 꿈을 꾼다. 수년 동안 의술을 배우며 긴장하고, 온 힘을 소진하고, . . . 24시간 내내 힘겹게 싸우며, 전통 서구 의학으로 중무장한 의사가 되려고 주어 모았던 잡석 더미에 압사 당하는 꿈을. 그 잡석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단단한 구조의 부분을 이루는 것들도 있다: 더 많은 테크놀로지를 끌어들이려는 경향; 유능한 의사라면 절대로 생명을 "잃지" 않고 구해낸다고 하는 왜곡된 철학; 환자를 다룰 때에 감각(sensor)을 사용한다든가 직관적 통찰에 의존하는 의사에 대한 가혹한 징벌; 연민에 호소하여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술의 금기 등."
서구인으로서 그리고 그 당사자로서 그녀가 취하고 있는 서구 의학(과학)에 대한 회의는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녀가 어떤 계기를 통해 저러한 통찰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저 구절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그녀와 라파엘의 관계 뿐 아니라, 의학, 과학, 나아가 그것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어떤 윤리적 문제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녀의 반성은 서구 의학이 물질적인 것만 보았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사물은 지각-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물적 상태를 취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정한 형태의 부피가 있고, 크기가 있으며, 온도가 있다. 또 사물은 특정한 외형을 취하고 있으며, 이 외형은 사회적 기능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고, 자연적 관계의 질서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또 사물들은 특정 공간에 위치하고, 그 공간의 일정량을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두 사물이 동일한 공간에 위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간 속에 위치한 사물들은 불연속 하여 서로 간에 고립되어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물들은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의 한계를 점하고, 혹은 그 한계를 모양 짓는 윤곽선(figure)을 띠고 있다. 우리의 지각-감각은 그 윤곽선이 마련해 놓은 구분에 따라 사물들을 구별한다. 그래서 산의 윤곽이 있으며, 나무의 윤곽이 있으며, 집의 윤곽, 사람의 윤곽, 물의 윤곽, 빛의 윤곽이 있다. 지각-감각이란 모든 사물을 공간 속에 위치시키고, 그 공간적 위치로부터 판독된 표면과 윤곽선을 식별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물은 사회적인 용도 또는 기능이 있다. 어떤 관점에서 사물은 무엇인가에 쓰이도록 생겨났으며, 무엇인가에 ‘대해’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 작용-반작용이나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다. 사물의 이와 같은 사회적 용도나 기능은 그 사물을 항상 다른 사물들과 상대적인 관계(‘. . .에 대해’, ‘. . . 를 위해’)를 갖도록 해준다. 그래서 이 관점에서 건물의 본질은 시멘트로 지어진 구조물로서의 그 건물 자체보다는, 주거환경으로서, 거주민들을 위한 거주지로서 존재한다. 또 그러한 용도와 기능을 위해 그 건물의 디자인이 결정될 것이다. 이때에 사물의 기능과 형태는 합목적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물이 취하고 있는 물적 상태란 컵에 담겨진 용액으로서의 물, 마실 수 있는 것으로서의 물, 혹은 산소와 수소의 특수한 결합으로서의 물, 물이라고 명명된 것으로서의 물, . . . 한이 없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집을 돌보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 살림을 꾸리는 안주인으로서의 어머니,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선생님, 여자를 보호하는 남자, 질병을 고치는 의사, . . . 이렇게 모든 존재자들은 물적 상태 즉 외면적인 형태와 기능을 가지고, 다른 존재자들과 사회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 라파엘 역시 물적 상태의 존재이다. 그는 육체적 존재이며 특정 좌표를 점유하고 일정량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공간적 존재이다. 또한 사회적 존재이기도 한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고용자이며, 누군가의 친구이다. 또한 지금 그는 이 병원의 환자이다. 사회적 존재인지 육체적 존재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존재인지 결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의사에게 있어 라파엘은 악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이다. 따라서 그의 본질은 (일시적이지만) 질병 속에 혹은 질병의 치유 속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구 의학(혹은 과학)은 이 질병을 육체적인 것, 더 정확히 말해 물적 상태의 존재로 환원하여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의사에게 있어 라파엘은 기관 부위별로 분류된 육체 혹은 질병을 담고 의료기기에 놓여있는 사물(死物)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라파엘의 육체적 상태란 바로 수학적 육안(수와 양으로 측정된)으로 보이는 혹은 과학적 지각(현미경의 지각, 청진기의 지각, 의사의 지각)에 의해 포착된 질병의 표현이다. 이렇게 해서 라파엘은 수와 양, 공간, 좌표들 위에 마취되어 놓인다.
수학적 혹은 과학적 지각이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것이 있다. 두서너 가지만 추려보겠다.
(1) 저 방식은 모든 사물의 흐름과 운동을 정지시킨다. 그것은 마치 저격수가 날아가는 새를 맞추기 위해 겨냥하고 있는 구멍 속의 한 점과 그 새의 운동성을 일치시키듯이, 사안이 되고 있는 특정 구역을 절단하여 그 구역이 속해 있었던 원래의 전체의 흐름으로부터 완벽하게 고립시키고 추상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는 원자적 존재이다.
(2) 흐름과 운동성이 제거된 추상적 존재들은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과 동류(同類)의 다른 존재와의 지시 관계가 상정되어야만 한다. 사물들을 현실적으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한계(윤곽선)와 특정한 위치(고정성) 같은 것이 필요하고, 그 공간성과 고정성은 사물들을 상대화함으로써만 분명해 질 것이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혹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가 이러한 외면적 관계 혹은 상대적 관계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언어의 질서, 지성의 질서 혹은 수의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다. 가령, 우리는 절대적 크기라든가 절대적 양과 같은 개념을 생각할 수가 없다. 사물의 크기나 양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다른 것과 대 보거나, 특정 좌표에 배치하여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자연수 2는 그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자연수 1이나 3이 아닌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또한 단어 “길”은 그 자체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단어 “김”이나 단어 “골”이나 단어 “굴”이 아닌 것으로서, 다시 말해 그 단어와 통사적 관계를 맺는 다른 단어와의 차이나 부정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서로간의 현실적 관계 즉 외면적 관계 내에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 상대적이다. 특히 어떤 것이 “더 . . . 한가” 혹은 “덜 . . . 한가”를 따져봄으로써 훨씬 선택이 용이해지기도 한다(주1). 이들은 모두가 사회적 존재이다. 언젠가 카프카(F. Kafka)는 이런 종류의 사유를 통한 존재의 이해를 두고 허기가 느껴진다고 말한 바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텅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3) 이와 같이 수적이고 양적인 사유 체계 속에 우리의 근본적인 환상이 있다. 비교하거나 부정하는 행위에서처럼, 사물들을 상대적 지시 관계로 이해하려면 특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전혀 다른 본성을 갖는 사물들이라고 해도, 이 관계에 들어가는 대상들은 동일한 하나의 기준(본성)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푸른 하늘과 붉은 하늘은 비교할 수 있어도, 푸른 하늘과 선인장은 비교하지 않는다. 또 우리는 “효율성”을 “(비)효율성”으로 부정할 수는 있어도, “효율성”을 “허기”로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든지 상대적 지시 관계란 본성의 동일화이며, 이 동질성의 체계 속에서 사물들은 본성상의 차이가 소거되고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운동을 수와 공간의 이행으로 이해한 엘레아학파를 비판하면서, 베르그송[H. Bergson]이 아킬레스와 거북을 두 마리의 거북이라고 표현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본성상이 차이가 없이 동일한 것으로 뒤섞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4) 지시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짝이 필요한데, 만일에 그러한 짝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은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데, 가령 라파엘과 같은 환자가 그녀 앞에 주어졌듯이, 우리 앞에 제시된 사물이 둘이 아닐 때, 하나 즉 일자(一者)일 때, 그래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이 때에 긴요하게 쓸 수 있는 우리의 고유한 능력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비교를 하든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억이나 지식을 견주어, 우리 앞에 주어진 그 대상과 공유하고 있다고 가정된 동일한 본성(기준)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출해내는 것이다. 우리의 아주 오래된 습관, 즉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유아적 습관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홀로 설 수 없는 우리의 정신적 박약! 다시 말해 언제나 하나의 중심, 기둥을 움켜쥐어야만 비로소 일어설 수 있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오만!
물론 의사들은 라파엘을 환자로 간주하면서 자신들과 견주어 비교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 자신의 기억이나 배운 지식을 그 환자와 견주어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라파엘의 물적 상태들은 그녀의 기억과 지식이 되어, 암이라든가 에이즈라든가 나병이라든가 하는 그녀의 명명법으로 만들어진 좌표와 공간 속에서 뒤섞인다. 의학의 역사는 일종의 분류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질병이란 특정한 형태로 분류되어 특정한 형태의 치료방식이 결정된 분류된 증후들이라는 것이다. 질병의 이름이 주로 증후들을 발견하고 분류한 사람의 이름에서 명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날에 역병이나 나병환자들이 많았던 이유는 사회적 역사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질병을 분류하는 당시의 관행이 특정한 유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기억과 개념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을 마중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우리 자신이 질문하고 해답을 선택하여 결정한 용어와 개념들의 총체에 불과하다. 우리가 철썩 같이 믿고 움켜쥔 그 기둥이 사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넓적다리였다는 것! 공중으로 뛰어올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 꽉 붙든 것은 고작 우리 자신의 발모가지였다는 것!
또한 그 용어와 개념들을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주어진 외적인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는 안경을 쓰고 있는 조건 속에서 사물을 보기도 하고, 현미경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맨눈이라고 다를까? 근시(近視)일 수도 있고, 원시(遠視)일 수도, 색맹일 수도, 시력 1.5일 수도, 또 1,0일 수도, . . . 자연적 조건 역시 완전한 기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깨달았던 서구과학의 조건이란 바로 사물들을 겨냥해서 공간 속에 정지시켜 놓고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위치에 서서 사물들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인간적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더욱이 과학은 우리의 신체 위에 여러 가지 보철물들(수, 테크놀로지, 개념, 언어 등)을 삽입해서, 그렇게 확장된 공간의 넓이만큼이나 왜곡된 상(像)을 가지고 진리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상상으로 정지시켜 이해하고 있는 저 표범은 사실은 아주 빠르게, 우리가 눈치 챌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는 중이다. 환자를 질병이라는 물질 상태 즉 스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육체 덩어리로 파악하면서, 심지어는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부위별로 뚝 잘라 사진도 찍고 채취도 하고 해가며, 그 죽은 것을 되살리기 위해 기억을 불러들이고, 오래 전의 그 수다스러운 늙은 현자들의 합창을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 그녀에게 있어 라파엘의 소리는 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는 의사들이나 과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학이나 과학 성적이 좋지 못한 우리 또한 무엇이든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경유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반응하고 행동한다.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싶으면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의 욕망과 바람을 가지고 적당히 눈감으면서 사물들을 뒤섞어 혹은 상대화하여 이해한다. 머릿속에 만들어 놓은 허구를 무엇인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투사하고, 마치 보자기로 물건을 뒤덮어 버리듯이, 제멋대로 어림짐작으로 지각을 기억으로 덮어 버린다. 이러한 만행은 머릿속에 한두 가지의 지식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한다. 비교하거나 견주어서 생각할 기준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 사람? 응 . . . 내가 저런 사람은 좀 알지!” 이러한 부류의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 욕망하는 것(대부분 타인을 부정하는)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타인으로부터 그것과 비슷해 보이는 이미지들을 추상하고, 거칠게 묶어서, 바다보다도 넓은 편견의 고랑 한복판에 타인을 끌어들여 그의 순수한 셔츠에 흙탕물을 튀긴다.
과학은 사물을 객관화하고, 양적으로 잘라내고(가령, 수학적 미분의 균등분할처럼), 혈액으로 분류하고, 세포를 떼어내어, 공간에 버티고 있는 물질적 상태의 불연속으로 이해함으로써, 그 사물을 대하는 사람과 대상을 분리하여 서로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이런 말을 고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과학이 나쁘다거나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그 조건과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라파엘의 소리를 자신이 알고 있는 늙은 현자들의 목소리로 대체했던 것은, 그녀 자신이 라파엘에 대해 무지했으며 무관했기 때문이다. 무지(無知)란 기억을 떠올리거나 암기 하는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바로 내적인 체험의 부재를 의미한다. 아마도 그녀의 귀에는 카프카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소리 같은 것만 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파엘의 소리를 성실히 듣지 않았으며, 라파엘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단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편협한 기억과 지식에 의존했다. 의사들은 환자의 통증조차도 생리학적 수치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이와 같은 기하학적 믿음이 그들을 부정확하며 무식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이다. 의사는 환자가 아픔을 호소하거나 외과적 상태에 대한 심리적 변화를 호소하면 대체로 믿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심리 현상이나 감정과 같은 주관적 경험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감정이나 심리가 다소 변덕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엄연히 어떤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영향 관계이며, 우리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심리적 실재이다. 심지어는 의사들조차도 매시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환자의 호소를 엄살쯤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지식 안에 그 통증이 아직 등록이 되지 않은 탓인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그를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실제로 내 경험상 이런 의사도 있었다.
"아프다구요? 그럴리가요?!"
" . . . . ?! . . @#$%^&*"
사물들을 무관한 것으로 고립시켜서 파악하는 방식으로 수 년 동안 중무장된 그녀는, 단 한 번도 라파엘 같은 사람을 알지도 못했으며, 그와는 무관한 관계 속에서 그의 치료를 담당했으며, 그녀가 해댄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그의 애원이 들릴 때 마다 자신들이 만든 기계를 들이대어, 피를 뽑고, 살 속에 주사바늘을 밀어 넣어 투약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성실과 진지함이란 얼마나 조잡하고 가볍고 무성의한 것인가!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눈을 가리고 자신들이 만든 신체 지도만 보면서, 환자의 몸에다가 금속과 기계들을 삽입해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것도 일이라면 뭐 할 말은 없다. 현대 과학은 주관성을 배제함으로써, 마치 의사들이 의학을 일종의 공업으로 이해하고, 스스로를 육체 수리공으로 축소시켜버렸듯이, 사물로부터 시간을 몰아내고, 내적 체험의 기회를 박탈하고, 그것을 침상 위에 마취된 환자로 간주해 버렸다. 그녀가 미안해했던 것은 그를 살려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질병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도 아니다. 가방에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라파엘을 온전한 존재로 알지 못했다는 것, 편협하게 한쪽 부분만 알고 있었다는 것, 과학이 너무나 투박하고 거칠고, . . .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 그것을 사과하고 싶었던 것이다.
과학이 일반화시킨 사물의 단단한 외형이나, 텅 빈 물적 상태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질서가 있다. 비교나 부정과 같은 외면적인 관계를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내적 질서, 그래서 존재를 보다 완전하게 하는 것, 존재가 본질을 그 자신 안에서 스스로 표현하게끔 하는 것. 가령, 저기에 서있는 저 건물은 그 용도나 기능만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품고 있는 육중함이라든가 우람함 혹은 높게 치솟은 빼어남이 있다. 칼은 자르는 도구이며 무기이지만, 동시에 그 칼끝에는 날카로움이 서려있다. 그녀는 의사이며 여자이며 혹은 어머니이지만, 그녀 자신만의 온화함, 열정, 좌절, 미소가 있다. 이 바위덩이는 움직이지 않고 쓸모도 없고, 그냥 여기에 던져져 한없이 이렇게 있지만, 그 자신만의 고유한 단단함이 있다. 라파엘은 종양덩어리들이 흉측하게 둘러싼 육체의 소유자 혹은 질병의 발현이지만, 그 자신만의 슬픔과 절망과 포기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권리상 본성상 그 자신 안에 존재한다. 물론 이 모든 감정들(affects)은―사람만이 감정의 소유자가 아니다. 사물들도 그 자신의 감정이 있다―자신들을 담고 있는 육체나 외형을 필요로 한다. 물질로서의 칼이 없다면 그 날카로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건물의 형상이 없다면 그 육중함과 빼어남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면 그 온화함이나 미소가 무슨 현실적 효력이 있겠는가? 바위덩이가 아니라면 그 단단함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용기(容器)에 담겨진 물이 그렇듯이, 저러한 감정들 역시 육체나 물질에 담기면서만, 그 조건에 묶이면서만 현실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본질을 그릇으로부터는 찾을 수 없듯이, 그 감정들은 육체가 아니며, 육체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육체를 파고들기도 하고, 거기에 흔적을 남기고, 힘의 덩어리를 느끼게 하고, 육체 안팎으로 이리저리 들락거린다. 얼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얼굴은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 감정이다. 몸속에서 무수하게 울려대고 있는 분자들의 진동과 그 감정들은 안면 근육이라고 하는 육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에서 느끼는 그 고유함은 안면 근육 때문이 아니다. 안면 근육 위에 표현된 것이긴 하지만, 안면 근육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감정들, 혹은 무수한 시간 속에서 축적된 고유한 진동의 패턴, 혹은 다른 육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표현하는 얼굴의 진정한 주체 때문이 아닐까? 얼굴의 색조를 이루고, 얼굴에 파선을 내고, 얼굴을 강렬하게 하고, 평온하게 하고, 그 안면 근육에 말할 수 없는 파동 같은 열정을 표현하게 하는 것! 지각이나 지시체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느껴지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기구나 연장을 들이대면서 대면하는 의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존재는 아닐 것이다. 최소한 언제나 표정을 관찰하라고 권유하는 바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그의 육체로부터 무엇인가가 빠져나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주2)
따라서 참을성 있는 사람도 있고, 민감한 사람도 있으며, 외과적 상태에 무디게 반응하는 사람, 소심한 사람, 대담한 사람, 겁쟁이 등 무한하게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동일한 물적 상태를 소유한 육체들이지만, 본성적으로 다른 감정의 표현들 역시 가지고 있다. 육체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감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를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바로 그것까지도 느껴야 한다. 따라서 의학이나 과학의 인간적 완성이란 그 분야 자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명목상 인간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의학이 필요하다). 그것은 보다 더 심오한 차원에서 제기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다. 더 정확히 말해 사물의 완전한 이해란 시간의 차원에서 드러난 본질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조바심을 견디지 못해 우리 자신 안에서 저 사물과 비교할 기준을 아무리 도출해 낸다고 해도, 감각이 허용하는 한계 내의 저 육체들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기억으로 그것을 뒤덮어 버리거나, 내 의식의 빛으로 그것을 환희 투사한다고 해도, 그 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생각 속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오로지 기다림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물 자체에 도달하고, 그 사물이 스스로 표현하고 있는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본질은 언제든지 나중에, 맨 나중에 나타나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성 속에서 배워야할 윤리이다.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적당한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적 지각이나 삽시간의 포착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거나 아니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으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주3)
사물의 단단한 그러나 얇은 윤곽선 아래에는 무거운 상태가 내재하고 있다. 어떤 통증이 배제된 채로는 느낄 수 없는. 가까이 다가가 접촉함으로써 발생하는 피부의 자극일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에 쌓인 감내, 그 무게가 주는 통증이랄까? 그래서 마음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냥 곁에서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그래서 가령, 환자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그의 육체 상태를 포함하여, 그를 표현하는 것 혹은 그의 뉘앙스를 보는 능력의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의사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추고 완성해야 할 능력일 것이다. 수학의 균등분할 식의 거친 미분이 아니라 예술의 섬세한 미분, 시간이 아니라면 결코 완성할 수 없는, . . . "질적 미분"의 능력!
이것을 깨달은 그녀는 실제로 어떻게 했을까? 다소 소박한 형태이긴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방식을, 그리고 그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통찰을 들어보자.
"결국, 내가 진찰하면서 쏘아대었던 과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작아졌다. 나는 더 이상 이 경이로운 질병 때문에 공포에 질리지 않았으며, 더 이상 악몽을 꾸지도 않았다. 이따금 울기도 했고,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들의 소리를 또렷이 듣고, 그들을 분명히 보고, 머릿속에서 만큼이나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음을 알고 나니, 이젠 환자들과 소통할 수도 있게 되었다. 몇 몇 에이즈 환자들에게는 "복잡한 의학적 질병" 대신에, 아이스크림이나 동네 제과점 빵을 가장 중요한 치료법으로 대체해 왔다. 나는 공식적으로 햇볕 쬐기나 Macy's 백화점으로의 여행을 처방하였으며, 내 구닥다리 솜씨와 알약이 필요 없는 환자들에게는 마사지를 처방하였다.
일일 회진 시간에는, 어떤 정신착란 증세가 있는 에이즈 환자를 방문하였다. 그는 가끔 도리깨질을 하면서, 자신의 텍사스 목장에 돌아가서 돼지와 닭을 기른다고 생각하였다. 며칠 동안 우리는 말썽부리는 돼지들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달걀을 팔아 수지맞을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하였다; 한번은 옆집(다른 병동의 다른 환자)을 방문하여 농장식 아침을 먹었다. 그는 한 번도 내 청진기를 보거나 자신의 팔에 꽂힌 주사바늘을 보지 않았다; 죽을 때 평화로웠고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에이즈 환자들은 자신의 질병과 죽음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몇 가지 단계를 경험한다(주4). 그럴 때면 나 역시 에이즈의 유령들에 맞서고 있는 의사로서 비슷한 단계를 거쳐 왔다고 느낀다.
나는 이 질병의 슬픔과 순응 사이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나는 희망을 현실로 누그러트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가 본 모든 죽음들에 대답해야만 하는 오랜 불행을 통해, 평화를 찾는 법, 하루하루를 약속된 내 죽음과 편안하게 나란히 걷는 법을 배워왔다. 그리고 나는 감사한다. 내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감성의 힘을 다시 느끼게 된 것을. 가끔 라파엘 생각이 난다."
(주1)
비교를 통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부정(否定)의 관념―가령, B의 부정으로서의 A, 없음의 부정으로서의 있음, ". . . 이 아님"으로서의 ". . . 임", 죽음이 아님으로서의 삶, 정지의 부정으로서의 활동 등―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사유에 있어 근본적 무기력 상태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너무 이론적이고 복잡하므로 하지 않겠다.
(주2)
베르그송주의자인 들뢰즈(G. Deleuze)라는 철학자는 "탈영토화(deterriorization)"라는 용어를 쓰면서, 예술의 목적이 탈영토화라고 말했는데, 바로 육체로부터 그 감정들을 빼어내는 것, 육체로부터 그 미소와 온화함과 빼어남을 해방시키는 것, 종양으로 죽어 가는 물적 상태로부터 그 슬픔과 절망과 포기를 자유롭게 하는 것, . . . "고양이는 빼고 그 미소만을 추출하는 것" , . . . 그리하여 사람이나 물건과 같은 육체들이 사라져도 남아야할, 그 자체 느껴지는 영원한 본질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 . . . 이것이 바로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라는 뜻 이었다: "젊은 여자는 수천 년 전에 취했던 자세를, 더 이상 그녀에게 의존하지 않는 몸짓을 그대로 유지한다. 대기는 작년 어느 날 한줄기의 바람과 빛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 날 아침 그것을 들이마셨던 어느 누구와도 관계가 없다."
(주3)
가령, 영화에서 만큼이나 문학 고유의 클로즈업이 있다. 영화적 클로즈업이 사물에 가까이 접근하거나 크게 확대하는 방식이라면, 문학의 클로즈업이란 바로 시간성 속에서 드러나는 본질의 열림을 의미한다. 공간적 클로즈업이 사물의 감정을 추상해내는 것만큼이나, 시간적 클로즈업은 기다림 속에서 사물로 파고들게 한다. 이야기가 그 좋은 예이다. 도망치고 있는 사람을 멀리서 보면서, 뒤쫓는 경찰이 보이면 그가 도둑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혹은 시계를 자꾸만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그가 약속시간에 늦었음을 생각한다. 지각의 대상이 포착된 것이다. 그러나 도망가면서 그가 경험하고 있을 공포와 긴장을 느끼려면 직접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경찰이나 시계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사물을 지각할 수 있게 하는 공간적 정보들(거리나 주변 환경 등)을 클로즈업으로 제거하고, 그 사물을 독단적 대상―비판과 성찰이 불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것으로부터 감정을 추출해낸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대상은 지식이나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 느껴지는 것이 된다. 가까이 다가가 보라. 감정이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또한 최근의 광고가 상품의 이미지를 통해 소비자들을 감동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이와 같이 공간적 조건들의 변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를 들어 그의 사연이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식으로, 시간적 수준에서 그 도둑을 가까이 들여다 볼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광고가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독특한 클로즈업을 소유하고 있다. 어쨌든 영화적 클로즈업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반면, 시간의 클로즈업은 우리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한다(그리하여 우리를 초인이 되게 한다).
(주4)
Kubler-Ross 도식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따르면 환자들은 대략 다섯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첫 번째는 부정의 단계이다(This isn't happening to me!). 두 번째는 분노의 단계이다(Why is this happening to me!). 세 번째는 타협의 단계이다(I promise I'll be a better person if . . . ). 네 번째는 절망의 단계이다(I don't care anymore). 그리고 다섯 번째는 순응의 단계이다(I'm ready for whatever c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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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의사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으로서
가져야할 진정한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hyuk 님
읽고 말 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이렇게 한 말씀 해 주시니, 진정 고맙습니다.
어려운 공부 하시는군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공부이기도 하구요
아무튼 의사분들, . .
공부하시랴, 환자들 돌보시랴,
고생 많이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hyuk 님도 꼭 훌륭한 의사 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그녀가 반성하는 내용을 몇 가지로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한정하고, 냉소주의적 직업의식만을 가지고, 환자들을 보았다. 마치 주어진 것만 하겠다는 식으로. 상투적이고 성의없는 신념만을 가진 의사로서. 그녀의 글 어디에도 환자를 인간으로서 알고싶어하기 보다는, 환자로서만 보려고 했고, 그것만을 알고싶어 했다.(3문단)
2. 그렇기 때문에 결국 환자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의 말이나 고통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편견으로 그의 고통을 규정했다(7,8문단).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바라본 것이다. 관찰도 하지 않았고, 들어보지도 않았고, 어림짐작으로 보았던 것.
내가 이미 알고 있고, 내가 생각하고 추측하는 대상으로서의 타인이 아니라, 내가 전혀 모르는, 나를 파괴하고, 당혹스럽게하는 absolute other, 진정한 타자를 아는 문제 . . 모두가 자신만의 주관성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은 언제나 오해위에 세워진 사회 . . 이를 가리기 위해 타협하고, 협잡함. 그러나 타협은 근본적일 수 없고, 계약관계가 근본적일 수는 없다. 오로지 진정한 타자성을 획득해야하고, 타자의 주관성을 보려고 노력해야함. . .어떻게? 기다리고 지내고, 시간을 보내며 . .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내부의 주관성이 만들어놓은 타인이 아니라, 알고나면 깜짝놀라 기절해버릴 수도 있는 진정한 타자성 . . rading이 필요함
3. 객관성이란 외면적인 것이다. . 누구가 볼 ㅜㅅ 있는 것, 그것은 분명한 것이 아니라 외면적인 것 . . 같은 모습을 보고 동의한 상태가 객관성 . .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 아니라 동의하고, 합의하고, 약속된 상태에 불과 . . 즉 모두에게 드러난 상태 . . 따라서 그것은 보이는 것 . . 알려진 것,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 . . . 더 중요한 것은 타자의 주관성, 절대적 차이의 풍경 보이지 않는 것, 가시적이지 않고 모호한 것 속에 진실이 있다. . . 서구의학은 주관성을 배제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배제한다. 객관성, 물질성, 육체만을 쫒으며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의학이 공업(engineering)과 별반 차이가 없어져 버렸다. 그녀가 반성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4. 이 글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 혹은 그녀가 깨달은 것은 생각보다 심오한데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냉소적이고, 무성의하게 살아지고 있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속에서, 의사로서, 환자로서, 학생으로서, 점원으로서, . . 우리의 직업인으로서,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는 한 기능인으로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아무일도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한 삶이란 얼마나 무성의하고 냉소적인가? 얼마나 불성실하고 차가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