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일이지만 불가피한 우리의 인간적 조건(혹은 한계)에 대해 비판을 하고, 우리가 자부하는 이성의 능력으로 그 조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잠정적이지만 이 과정을 일종의 윤리적 완성의 길이라고 불러보자. 나 혼자만의 연구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몫이라는 명목 하에 설득을 해야 할 입장이므로, 또 스타일을 추구하며 멋을 부리기에는 별로 시간이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그 모든 개인기를 접고(항상 노력 중이지만), 담백한 문체로, 사례를 들어가면서 가급적이면 쉬운 얘기로부터 시작하겠다.

의사이면서 작가인 케이트 스케넬(Kate Scannell)이라는 사람이 쓴 글 중에 "Skills and Pills"라는 짧은 에세이가 있다. 이 에세이는 암이나 에이즈 같은 불치의 환자들을 대하면서 느꼈던 개인적 심정, 의사로서의 자신의 직분에 대한 사명감, 나아가 자신의 인생의 변화 등을 병원생활의 사례를 적어가며 쓰고 있다. 글을 따라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겠다:

그녀는 처음부터 에이즈 환자들을 맡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대학에서의 연구보다는 지역 사회 의료 활동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에이즈 환자들이 있는 병동에서 2년 이상을 근무하고 있는 중이다. 근무한지 얼마 안 되어서는 에이즈 환자들의 슬픔, 복잡한 질병상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등을 경험하면서,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에 놀랐다.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나락 아래에서도, 작은 희망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애처로운 안간힘들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의사로서의 지식을 최대로 동원하는 것, 자신의 손에 든 노련한 솜씨(skills)와 가방에 든 약(pills)뿐임을, 그리하여 그들을 치료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그녀의 그와 같은 결심은 자신뿐 아니라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가장 최선의 선택처럼 보였다. 그 이후 그녀의 생활은 에이즈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병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마치 야전장(夜戰場)의 신병처럼, 질병과 싸우고 또 싸우고, 적이 보이지 않으면 현미경을 들이대어 색출하고, 보이는 적은 메스의 날카로움으로 모조리 자르고 태우고 . . . 자신이 보고 배운 의학의 놀라운 발전과 의학적으로 첨예한 문제들이, 서로 서로 부딪치면서 불꽃을 뿜으며 드러나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에이즈 전문 저격수와도 같았다.

환자들의 수척함이 너무 심해서, 언젠가 사진에서 본 아우슈비츠 포로들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종양으로 심하게 손상된 한 젊은이는 노틀담의 곱추를 연상케 한다. 이들과 함께 하면서 질병과 싸우고 있는 그녀를, 적을 앞에 두고 차디찬 심장을 소유한 병사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환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가슴 아픈 연민이 없었을 리 없다. 그녀는 이 병동의 슬픈 이야기와 불행을 입 밖에 낸다든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든가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왜 이들에게 감화되어 뜨거운 가슴을 억누르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 조차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겪은 저 불행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냉철한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즐기지도 않았고, 인간에 대한 진지함도 견지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럭저럭 몇 달이 지났다. 그러다가 라파엘(Raphael)이라는 한 환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 22살의 청년을 잠깐 동안 겪으며, 의사로서의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고백한다. 그 청년은 크게 부풀어 오른 자주색 혹 덩어리들이 두 눈을 가리고 있어서 앞을 볼 수 가 없었다. 흐르는 눈물은 눈꺼풀을 힘들게 쥐어짜야만 겨우 압착되어 비집고 나올 정도였다. 짙은 자주색 다발성 종양들이 림프 마디로 이리저리 스며들어 입천장까지 타고 올라와 버렸다. 또 다른 종양 덩어리가 오른쪽 발바닥에서 다리를 타고 올라와 걸을 수도 없었다. 폐 주변에는 액체 덩어리들이 누르고 있어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라파엘은 몇 번이나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우리의 저격수는 그 구조 요청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지, 또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내 갈고 닦은 실력으로 자동인형처럼 하나 씩 하나 씩 수행한다. 그녀의 귀에는 오래 전 선생님들이 의술을 연마하면서 가르쳐주었던 그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호흡 장애를 바로 잡아야지!" "아냐! 아냐! 빈혈 먼저 판독하고 !" "전해질 장애 교정하고, 약으로 붓기를 빼라구!" "그래! 그래! 간단한 문제가 아냐!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구! 마지막으로 카포시 육종 잊지 말라구!" 그녀는 한쪽으로는 라파엘의 애원을 들으면서, 다른 한 쪽으로는 참호에서 불호령처럼 떨어지는 명령을 무전기로 하달 받듯이, 단호한 선생님들의 최첨단 조언을 듣고 있었다.

긴박한 와중에도 그녀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환자의 요청이 긴박해질 때마다, 그녀는 환자의 신체 정보를 채취하기 위해 정맥과 동맥에, 딱딱하게 부어오르거나 종양으로 굳은 부분을 잘 골라 피하여, 재빠르게 그러나 슬며시 주사바늘을 꽂는다. 라파엘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다시 도와달라고 흐느낀다. 그러면 이번엔 신(神)만이 할 수 있을 생명(숨) 불어넣기처럼, 환자의 코에 플라스틱 캐뉼러를 꽃아 산소를 공급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다시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이번엔 그에게 꽂힌 IV line으로 칼륨을 투여한다. 그리고는 환자의 상태에 대해 조언을 잊지 않는다. "고비는 넘겼어요! 화학요법은 아침에 얘기해 보도록 하죠!" 그리고는 "휴우 !!" . . . 병원을 나오면서 그녀는 지쳐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버렸다고, 가방을 비웠다고, 그러니 환자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왠지 모를 확신을 느꼈다. 그 확신은 모든 것을 소모해버린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쾌감 같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날 밤 병원 당직 의사가 그 환자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라파엘은 그 의사에게도 도와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런데 당직 의사는 라파엘의 몸에 꽂힌 정맥 주사와 칼륨을 모두 중단하고, 혈액검사와 수혈도 취소하였다. 그리고는 라파엘에게 간단히 몰핀(진통제)만을 투여해 주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라파엘은 당직 의사에게 미소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그 날 밤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실적 이야기의 끝이다.

이렇게 읽어가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환자의 불행을 저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행을 진심으로 가슴아파 하지 않았던가? 의사로서 양심적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사명감을 가지고 직분을 다 했으며, 개인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성실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사 아니 그런 인간을 찾아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그녀는 의사로서 또 인간으로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닌가? 그런데 라파엘은 그런 그녀를 몰라준 것일까?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었던 것일까? 종양이 뇌까지 퍼진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참 후 그녀는 라파엘을 생각하면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째서 라파엘은 그녀의 정성이 아닌 당직 의사의 성의 없는 조처에 미소를 지었는지를 회고하고 있다.

    ". . . 가끔 라파엘을 생각하면서, 그에게 용서를 빈다. 그가 죽은 후부터는 이전과 똑같이 치료할 수 없었다고. . . . 눈동자가 달라졌다고, . . . 이제는 화자의 말 속에 숨은 소리를 더 분명히 듣고 있다고. . . . 죽어서 질병에 찌든 시체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라파엘의 영혼처럼, 수년 동안 내게 스며든 전통 서구 의학이 마련해 준 옷이 너덜너덜해진 넝마처럼 흐드러져 버렸다고. 이제 내 안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고, 나를 가르쳐준 늙은 현자들의 합창이 아닌 연민 어린 감성이 더 크고 또렷이 들린다고. 나는 가끔 꿈을 꾼다. 수년 동안 의술을 배우며 긴장하고, 온 힘을 소진하고, . . . 24시간 내내 힘겹게 싸우며, 전통 서구 의학으로 중무장한 의사가 되려고 주어 모았던 잡석 더미에 압사 당하는 꿈을. 그 잡석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단단한 구조의 부분을 이루는 것들도 있다: 더 많은 테크놀로지를 끌어들이려는 경향; 유능한 의사라면 절대로 생명을 "잃지" 않고 구해낸다고 하는 왜곡된 철학; 환자를 다룰 때에 감각(sensor)을 사용한다든가 직관적 통찰에 의존하는 의사에 대한 가혹한 징벌; 연민에 호소하여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술의 금기 등."

서구인으로서 그리고 그 당사자로서 그녀가 취하고 있는 서구 의학(과학)에 대한 회의는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녀가 어떤 계기를 통해 저러한 통찰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저 구절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그녀와 라파엘의 관계 뿐 아니라, 의학, 과학, 나아가 그것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어떤 윤리적 문제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녀의 반성은 서구 의학이 물질적인 것만 보았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사물은 지각-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물적 상태를 취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정한 형태의 부피가 있고, 크기가 있으며, 온도가 있다. 또 사물은 특정한 외형을 취하고 있으며, 이 외형은 사회적 기능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고, 자연적 관계의 질서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또 사물들은 특정 공간에 위치하고, 그 공간의 일정량을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두 사물이 동일한 공간에 위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간 속에 위치한 사물들은 불연속 하여 서로 간에 고립되어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물들은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의 한계를 점하고, 혹은 그 한계를 모양 짓는 윤곽선(figure)을 띠고 있다. 우리의 지각-감각은 그 윤곽선이 마련해 놓은 구분에 따라 사물들을 구별한다. 그래서 산의 윤곽이 있으며, 나무의 윤곽이 있으며, 집의 윤곽, 사람의 윤곽, 물의 윤곽, 빛의 윤곽이 있다. 지각-감각이란 모든 사물을 공간 속에 위치시키고, 그 공간적 위치로부터 판독된 표면과 윤곽선을 식별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물은 사회적인 용도 또는 기능이 있다. 어떤 관점에서 사물은 무엇인가에 쓰이도록 생겨났으며, 무엇인가에 ‘대해’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 작용-반작용이나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다. 사물의 이와 같은 사회적 용도나 기능은 그 사물을 항상 다른 사물들과 상대적인 관계(‘. . .에 대해’, ‘. . . 를 위해’)를 갖도록 해준다. 그래서 이 관점에서 건물의 본질은 시멘트로 지어진 구조물로서의 그 건물 자체보다는, 주거환경으로서, 거주민들을 위한 거주지로서 존재한다. 또 그러한 용도와 기능을 위해 그 건물의 디자인이 결정될 것이다. 이때에 사물의 기능과 형태는 합목적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물이 취하고 있는 물적 상태란 컵에 담겨진 용액으로서의 물, 마실 수 있는 것으로서의 물, 혹은 산소와 수소의 특수한 결합으로서의 물, 물이라고 명명된 것으로서의 물, . . . 한이 없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집을 돌보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 살림을 꾸리는 안주인으로서의 어머니,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선생님, 여자를 보호하는 남자, 질병을 고치는 의사, . . . 이렇게 모든 존재자들은 물적 상태 즉 외면적인 형태와 기능을 가지고, 다른 존재자들과 사회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를 통해 살아간다. 라파엘 역시 물적 상태의 존재이다. 그는 육체적 존재이며 특정 좌표를 점유하고 일정량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공간적 존재이다. 또한 사회적 존재이기도 한 그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고용자이며, 누군가의 친구이다. 또한 지금 그는 이 병원의 환자이다. 사회적 존재인지 육체적 존재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존재인지 결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의사에게 있어 라파엘은 악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이다. 따라서 그의 본질은 (일시적이지만) 질병 속에 혹은 질병의 치유 속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구 의학(혹은 과학)은 이 질병을 육체적인 것, 더 정확히 말해 물적 상태의 존재로 환원하여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의사에게 있어 라파엘은 기관 부위별로 분류된 육체 혹은 질병을 담고 의료기기에 놓여있는 사물(死物)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라파엘의 육체적 상태란 바로 수학적 육안(수와 양으로 측정된)으로 보이는 혹은 과학적 지각(현미경의 지각, 청진기의 지각, 의사의 지각)에 의해 포착된 질병의 표현이다. 이렇게 해서 라파엘은 수와 양, 공간, 좌표들 위에 마취되어 놓인다.

수학적 혹은 과학적 지각이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것이 있다. 두서너 가지만 추려보겠다.

(1) 저 방식은 모든 사물의 흐름과 운동을 정지시킨다. 그것은 마치 저격수가 날아가는 새를 맞추기 위해 겨냥하고 있는 구멍 속의 한 점과 그 새의 운동성을 일치시키듯이, 사안이 되고 있는 특정 구역을 절단하여 그 구역이 속해 있었던 원래의 전체의 흐름으로부터 완벽하게 고립시키고 추상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는 원자적 존재이다.

(2) 흐름과 운동성이 제거된 추상적 존재들은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과 동류(同類)의 다른 존재와의 지시 관계가 상정되어야만 한다. 사물들을 현실적으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한계(윤곽선)와 특정한 위치(고정성) 같은 것이 필요하고, 그 공간성과 고정성은 사물들을 상대화함으로써만 분명해 질 것이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혹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가 이러한 외면적 관계 혹은 상대적 관계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언어의 질서, 지성의 질서 혹은 수의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다. 가령, 우리는 절대적 크기라든가 절대적 양과 같은 개념을 생각할 수가 없다. 사물의 크기나 양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다른 것과 대 보거나, 특정 좌표에 배치하여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자연수 2는 그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자연수 1이나 3이 아닌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또한 단어 “길”은 그 자체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단어 “김”이나 단어 “골”이나 단어 “굴”이 아닌 것으로서, 다시 말해 그 단어와 통사적 관계를 맺는 다른 단어와의 차이나 부정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서로간의 현실적 관계 즉 외면적 관계 내에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 상대적이다. 특히 어떤 것이 “더 . . . 한가” 혹은 “덜 . . . 한가”를 따져봄으로써 훨씬 선택이 용이해지기도 한다(주1). 이들은 모두가 사회적 존재이다. 언젠가 카프카(F. Kafka)는 이런 종류의 사유를 통한 존재의 이해를 두고 허기가 느껴진다고 말한 바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텅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3) 이와 같이 수적이고 양적인 사유 체계 속에 우리의 근본적인 환상이 있다. 비교하거나 부정하는 행위에서처럼, 사물들을 상대적 지시 관계로 이해하려면 특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전혀 다른 본성을 갖는 사물들이라고 해도, 이 관계에 들어가는 대상들은 동일한 하나의 기준(본성)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푸른 하늘과 붉은 하늘은 비교할 수 있어도, 푸른 하늘과 선인장은 비교하지 않는다. 또 우리는 “효율성”을 “(비)효율성”으로 부정할 수는 있어도, “효율성”을 “허기”로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든지 상대적 지시 관계란 본성의 동일화이며, 이 동질성의 체계 속에서 사물들은 본성상의 차이가 소거되고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운동을 수와 공간의 이행으로 이해한 엘레아학파를 비판하면서, 베르그송[H. Bergson]이 아킬레스와 거북을 두 마리의 거북이라고 표현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본성상이 차이가 없이 동일한 것으로 뒤섞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4) 지시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짝이 필요한데, 만일에 그러한 짝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은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데, 가령 라파엘과 같은 환자가 그녀 앞에 주어졌듯이, 우리 앞에 제시된 사물이 둘이 아닐 때, 하나 즉 일자(一者)일 때, 그래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이 때에 긴요하게 쓸 수 있는 우리의 고유한 능력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을 투사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비교를 하든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억이나 지식을 견주어, 우리 앞에 주어진 그 대상과 공유하고 있다고 가정된 동일한 본성(기준)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출해내는 것이다. 우리의 아주 오래된 습관, 즉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유아적 습관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홀로 설 수 없는 우리의 정신적 박약! 다시 말해 언제나 하나의 중심, 기둥을 움켜쥐어야만 비로소 일어설 수 있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오만!

물론 의사들은 라파엘을 환자로 간주하면서 자신들과 견주어 비교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에 그 자신의 기억이나 배운 지식을 그 환자와 견주어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라파엘의 물적 상태들은 그녀의 기억과 지식이 되어, 암이라든가 에이즈라든가 나병이라든가 하는 그녀의 명명법으로 만들어진 좌표와 공간 속에서 뒤섞인다. 의학의 역사는 일종의 분류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질병이란 특정한 형태로 분류되어 특정한 형태의 치료방식이 결정된 분류된 증후들이라는 것이다. 질병의 이름이 주로 증후들을 발견하고 분류한 사람의 이름에서 명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날에 역병이나 나병환자들이 많았던 이유는 사회적 역사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질병을 분류하는 당시의 관행이 특정한 유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기억과 개념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을 마중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우리 자신이 질문하고 해답을 선택하여 결정한 용어와 개념들의 총체에 불과하다. 우리가 철썩 같이 믿고 움켜쥔 그 기둥이 사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넓적다리였다는 것! 공중으로 뛰어올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 꽉 붙든 것은 고작 우리 자신의 발모가지였다는 것!

또한 그 용어와 개념들을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주어진 외적인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는 안경을 쓰고 있는 조건 속에서 사물을 보기도 하고, 현미경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맨눈이라고 다를까? 근시(近視)일 수도 있고, 원시(遠視)일 수도, 색맹일 수도, 시력 1.5일 수도, 또 1,0일 수도, . . . 자연적 조건 역시 완전한 기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깨달았던 서구과학의 조건이란 바로 사물들을 겨냥해서 공간 속에 정지시켜 놓고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위치에 서서 사물들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인간적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더욱이 과학은 우리의 신체 위에 여러 가지 보철물들(수, 테크놀로지, 개념, 언어 등)을 삽입해서, 그렇게 확장된 공간의 넓이만큼이나 왜곡된 상(像)을 가지고 진리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상상으로 정지시켜 이해하고 있는 저 표범은 사실은 아주 빠르게, 우리가 눈치 챌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는 중이다. 환자를 질병이라는 물질 상태 즉 스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육체 덩어리로 파악하면서, 심지어는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부위별로 뚝 잘라 사진도 찍고 채취도 하고 해가며, 그 죽은 것을 되살리기 위해 기억을 불러들이고, 오래 전의 그 수다스러운 늙은 현자들의 합창을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 그녀에게 있어 라파엘의 소리는 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는 의사들이나 과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학이나 과학 성적이 좋지 못한 우리 또한 무엇이든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경유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반응하고 행동한다. 유사하거나 동일하다 싶으면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음속의 욕망과 바람을 가지고 적당히 눈감으면서 사물들을 뒤섞어 혹은 상대화하여 이해한다. 머릿속에 만들어 놓은 허구를 무엇인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투사하고, 마치 보자기로 물건을 뒤덮어 버리듯이, 제멋대로 어림짐작으로 지각을 기억으로 덮어 버린다. 이러한 만행은 머릿속에 한두 가지의 지식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한다. 비교하거나 견주어서 생각할 기준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 사람? 응 . . . 내가 저런 사람은 좀 알지!” 이러한 부류의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 욕망하는 것(대부분 타인을 부정하는)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타인으로부터 그것과 비슷해 보이는 이미지들을 추상하고, 거칠게 묶어서, 바다보다도 넓은 편견의 고랑 한복판에 타인을 끌어들여 그의 순수한 셔츠에 흙탕물을 튀긴다.

과학은 사물을 객관화하고, 양적으로 잘라내고(가령, 수학적 미분의 균등분할처럼), 혈액으로 분류하고, 세포를 떼어내어, 공간에 버티고 있는 물질적 상태의 불연속으로 이해함으로써, 그 사물을 대하는 사람과 대상을 분리하여 서로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이런 말을 고의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과학이 나쁘다거나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그 조건과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라파엘의 소리를 자신이 알고 있는 늙은 현자들의 목소리로 대체했던 것은, 그녀 자신이 라파엘에 대해 무지했으며 무관했기 때문이다. 무지(無知)란 기억을 떠올리거나 암기 하는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바로 내적인 체험의 부재를 의미한다. 아마도 그녀의 귀에는 카프카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소리 같은 것만 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파엘의 소리를 성실히 듣지 않았으며, 라파엘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단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편협한 기억과 지식에 의존했다. 의사들은 환자의 통증조차도 생리학적 수치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이와 같은 기하학적 믿음이 그들을 부정확하며 무식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이다. 의사는 환자가 아픔을 호소하거나 외과적 상태에 대한 심리적 변화를 호소하면 대체로 믿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심리 현상이나 감정과 같은 주관적 경험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감정이나 심리가 다소 변덕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엄연히 어떤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영향 관계이며, 우리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심리적 실재이다. 심지어는 의사들조차도 매시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환자의 호소를 엄살쯤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지식 안에 그 통증이 아직 등록이 되지 않은 탓인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혀 그를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실제로 내 경험상 이런 의사도 있었다.
"아프다구요? 그럴리가요?!"
" . . . . ?! . . @#$%^&*"

사물들을 무관한 것으로 고립시켜서 파악하는 방식으로 수 년 동안 중무장된 그녀는, 단 한 번도 라파엘 같은 사람을 알지도 못했으며, 그와는 무관한 관계 속에서 그의 치료를 담당했으며, 그녀가 해댄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그의 애원이 들릴 때 마다 자신들이 만든 기계를 들이대어, 피를 뽑고, 살 속에 주사바늘을 밀어 넣어 투약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성실과 진지함이란 얼마나 조잡하고 가볍고 무성의한 것인가!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눈을 가리고 자신들이 만든 신체 지도만 보면서, 환자의 몸에다가 금속과 기계들을 삽입해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그것도 일이라면 뭐 할 말은 없다. 현대 과학은 주관성을 배제함으로써, 마치 의사들이 의학을 일종의 공업으로 이해하고, 스스로를 육체 수리공으로 축소시켜버렸듯이, 사물로부터 시간을 몰아내고, 내적 체험의 기회를 박탈하고, 그것을 침상 위에 마취된 환자로 간주해 버렸다. 그녀가 미안해했던 것은 그를 살려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질병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도 아니다. 가방에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라파엘을 온전한 존재로 알지 못했다는 것, 편협하게 한쪽 부분만 알고 있었다는 것, 과학이 너무나 투박하고 거칠고, . . .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 그것을 사과하고 싶었던 것이다.

과학이 일반화시킨 사물의 단단한 외형이나, 텅 빈 물적 상태와는 본성적으로 다른 질서가 있다. 비교나 부정과 같은 외면적인 관계를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내적 질서, 그래서 존재를 보다 완전하게 하는 것, 존재가 본질을 그 자신 안에서 스스로 표현하게끔 하는 것. 가령, 저기에 서있는 저 건물은 그 용도나 기능만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품고 있는 육중함이라든가 우람함 혹은 높게 치솟은 빼어남이 있다. 칼은 자르는 도구이며 무기이지만, 동시에 그 칼끝에는 날카로움이 서려있다. 그녀는 의사이며 여자이며 혹은 어머니이지만, 그녀 자신만의 온화함, 열정, 좌절, 미소가 있다. 이 바위덩이는 움직이지 않고 쓸모도 없고, 그냥 여기에 던져져 한없이 이렇게 있지만, 그 자신만의 고유한 단단함이 있다. 라파엘은 종양덩어리들이 흉측하게 둘러싼 육체의 소유자 혹은 질병의 발현이지만, 그 자신만의 슬픔과 절망과 포기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권리상 본성상 그 자신 안에 존재한다. 물론 이 모든 감정들(affects)은―사람만이 감정의 소유자가 아니다. 사물들도 그 자신의 감정이 있다―자신들을 담고 있는 육체나 외형을 필요로 한다. 물질로서의 칼이 없다면 그 날카로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건물의 형상이 없다면 그 육중함과 빼어남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면 그 온화함이나 미소가 무슨 현실적 효력이 있겠는가? 바위덩이가 아니라면 그 단단함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용기(容器)에 담겨진 물이 그렇듯이, 저러한 감정들 역시 육체나 물질에 담기면서만, 그 조건에 묶이면서만 현실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본질을 그릇으로부터는 찾을 수 없듯이, 그 감정들은 육체가 아니며, 육체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육체를 파고들기도 하고, 거기에 흔적을 남기고, 힘의 덩어리를 느끼게 하고, 육체 안팎으로 이리저리 들락거린다. 얼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얼굴은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 감정이다. 몸속에서 무수하게 울려대고 있는 분자들의 진동과 그 감정들은 안면 근육이라고 하는 육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얼굴에서 느끼는 그 고유함은 안면 근육 때문이 아니다. 안면 근육 위에 표현된 것이긴 하지만, 안면 근육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감정들, 혹은 무수한 시간 속에서 축적된 고유한 진동의 패턴, 혹은 다른 육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표현하는 얼굴의 진정한 주체 때문이 아닐까? 얼굴의 색조를 이루고, 얼굴에 파선을 내고, 얼굴을 강렬하게 하고, 평온하게 하고, 그 안면 근육에 말할 수 없는 파동 같은 열정을 표현하게 하는 것! 지각이나 지시체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느껴지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기구나 연장을 들이대면서 대면하는 의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존재는 아닐 것이다. 최소한 언제나 표정을 관찰하라고 권유하는 바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그의 육체로부터 무엇인가가 빠져나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주2)

따라서 참을성 있는 사람도 있고, 민감한 사람도 있으며, 외과적 상태에 무디게 반응하는 사람, 소심한 사람, 대담한 사람, 겁쟁이 등 무한하게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동일한 물적 상태를 소유한 육체들이지만, 본성적으로 다른 감정의 표현들 역시 가지고 있다. 육체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감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를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바로 그것까지도 느껴야 한다. 따라서 의학이나 과학의 인간적 완성이란 그 분야 자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명목상 인간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의학이 필요하다). 그것은 보다 더 심오한 차원에서 제기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다. 더 정확히 말해 사물의 완전한 이해란 시간의 차원에서 드러난 본질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조바심을 견디지 못해 우리 자신 안에서 저 사물과 비교할 기준을 아무리 도출해 낸다고 해도, 감각이 허용하는 한계 내의 저 육체들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기억으로 그것을 뒤덮어 버리거나, 내 의식의 빛으로 그것을 환희 투사한다고 해도, 그 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생각 속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오로지 기다림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사물 자체에 도달하고, 그 사물이 스스로 표현하고 있는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본질은 언제든지 나중에, 맨 나중에 나타나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간성 속에서 배워야할 윤리이다.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적당한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적 지각이나 삽시간의 포착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거나 아니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으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주3)

사물의 단단한 그러나 얇은 윤곽선 아래에는 무거운 상태가 내재하고 있다. 어떤 통증이 배제된 채로는 느낄 수 없는. 가까이 다가가 접촉함으로써 발생하는 피부의 자극일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에 쌓인 감내, 그 무게가 주는 통증이랄까? 그래서 마음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냥 곁에서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그래서 가령, 환자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그의 육체 상태를 포함하여, 그를 표현하는 것 혹은 그의 뉘앙스를 보는 능력의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의사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추고 완성해야 할 능력일 것이다. 수학의 균등분할 식의 거친 미분이 아니라 예술의 섬세한 미분, 시간이 아니라면 결코 완성할 수 없는, . . . "질적 미분"의 능력!

이것을 깨달은 그녀는 실제로 어떻게 했을까? 다소 소박한 형태이긴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방식을, 그리고 그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통찰을 들어보자.

    "결국, 내가 진찰하면서 쏘아대었던 과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작아졌다. 나는 더 이상 이 경이로운 질병 때문에 공포에 질리지 않았으며, 더 이상 악몽을 꾸지도 않았다. 이따금 울기도 했고,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들의 소리를 또렷이 듣고, 그들을 분명히 보고, 머릿속에서 만큼이나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음을 알고 나니, 이젠 환자들과 소통할 수도 있게 되었다. 몇 몇 에이즈 환자들에게는 "복잡한 의학적 질병" 대신에, 아이스크림이나 동네 제과점 빵을 가장 중요한 치료법으로 대체해 왔다. 나는 공식적으로 햇볕 쬐기나 Macy's 백화점으로의 여행을 처방하였으며, 내 구닥다리 솜씨와 알약이 필요 없는 환자들에게는 마사지를 처방하였다.

    일일 회진 시간에는, 어떤 정신착란 증세가 있는 에이즈 환자를 방문하였다. 그는 가끔 도리깨질을 하면서, 자신의 텍사스 목장에 돌아가서 돼지와 닭을 기른다고 생각하였다. 며칠 동안 우리는 말썽부리는 돼지들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달걀을 팔아 수지맞을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하였다; 한번은 옆집(다른 병동의 다른 환자)을 방문하여 농장식 아침을 먹었다. 그는 한 번도 내 청진기를 보거나 자신의 팔에 꽂힌 주사바늘을 보지 않았다; 죽을 때 평화로웠고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에이즈 환자들은 자신의 질병과 죽음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몇 가지 단계를 경험한다(주4). 그럴 때면 나 역시 에이즈의 유령들에 맞서고 있는 의사로서 비슷한 단계를 거쳐 왔다고 느낀다.

    나는 이 질병의 슬픔과 순응 사이에서 흔들거리고 있다. 나는 희망을 현실로 누그러트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가 본 모든 죽음들에 대답해야만 하는 오랜 불행을 통해, 평화를 찾는 법, 하루하루를 약속된 내 죽음과 편안하게 나란히 걷는 법을 배워왔다. 그리고 나는 감사한다. 내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연민을 느낄 줄 아는 감성의 힘을 다시 느끼게 된 것을. 가끔 라파엘 생각이 난다."

(주1)
비교를 통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부정(否定)의 관념―가령, B의 부정으로서의 A, 없음의 부정으로서의 있음, ". . . 이 아님"으로서의 ". . . 임", 죽음이 아님으로서의 삶, 정지의 부정으로서의 활동 등―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사유에 있어 근본적 무기력 상태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너무 이론적이고 복잡하므로 하지 않겠다.

(주2)
베르그송주의자인 들뢰즈(G. Deleuze)라는 철학자는 "탈영토화(deterriorization)"라는 용어를 쓰면서, 예술의 목적이 탈영토화라고 말했는데, 바로 육체로부터 그 감정들을 빼어내는 것, 육체로부터 그 미소와 온화함과 빼어남을 해방시키는 것, 종양으로 죽어 가는 물적 상태로부터 그 슬픔과 절망과 포기를 자유롭게 하는 것, . . . "고양이는 빼고 그 미소만을 추출하는 것" , . . . 그리하여 사람이나 물건과 같은 육체들이 사라져도 남아야할, 그 자체 느껴지는 영원한 본질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 . . . 이것이 바로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라는 뜻 이었다: "젊은 여자는 수천 년 전에 취했던 자세를, 더 이상 그녀에게 의존하지 않는 몸짓을 그대로 유지한다. 대기는 작년 어느 날 한줄기의 바람과 빛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 날 아침 그것을 들이마셨던 어느 누구와도 관계가 없다."

(주3)
가령, 영화에서 만큼이나 문학 고유의 클로즈업이 있다. 영화적 클로즈업이 사물에 가까이 접근하거나 크게 확대하는 방식이라면, 문학의 클로즈업이란 바로 시간성 속에서 드러나는 본질의 열림을 의미한다. 공간적 클로즈업이 사물의 감정을 추상해내는 것만큼이나, 시간적 클로즈업은 기다림 속에서 사물로 파고들게 한다. 이야기가 그 좋은 예이다. 도망치고 있는 사람을 멀리서 보면서, 뒤쫓는 경찰이 보이면 그가 도둑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혹은 시계를 자꾸만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그가 약속시간에 늦었음을 생각한다. 지각의 대상이 포착된 것이다. 그러나 도망가면서 그가 경험하고 있을 공포와 긴장을 느끼려면 직접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경찰이나 시계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사물을 지각할 수 있게 하는 공간적 정보들(거리나 주변 환경 등)을 클로즈업으로 제거하고, 그 사물을 독단적 대상―비판과 성찰이 불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것으로부터 감정을 추출해낸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대상은 지식이나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 느껴지는 것이 된다. 가까이 다가가 보라. 감정이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또한 최근의 광고가 상품의 이미지를 통해 소비자들을 감동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이와 같이 공간적 조건들의 변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를 들어 그의 사연이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식으로, 시간적 수준에서 그 도둑을 가까이 들여다 볼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광고가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독특한 클로즈업을 소유하고 있다. 어쨌든 영화적 클로즈업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반면, 시간의 클로즈업은 우리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한다(그리하여 우리를 초인이 되게 한다).

(주4)
Kubler-Ross 도식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따르면 환자들은 대략 다섯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첫 번째는 부정의 단계이다(This isn't happening to me!). 두 번째는 분노의 단계이다(Why is this happening to me!). 세 번째는 타협의 단계이다(I promise I'll be a better person if . . . ). 네 번째는 절망의 단계이다(I don't care anymore). 그리고 다섯 번째는 순응의 단계이다(I'm ready for whatever comes).

Posted by huun

최근에 만들어지는 미국 영화들 중에는, 과학에 대한 미국인들의 맹목적인 신뢰가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특히, 거기에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도 포함되고 있다. 물론 상대성 이론의 실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 탓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무지와 편견의 배후에는 다소 복잡한 정치 사회적 문제도 들어가 있다. 서둘러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식 과학-기술주의 이데올로기가 문화 전반에 퍼져 있어, 과학에 대한 무지와 편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9세기 이후의 미국문학을 접해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낭만주의적 확신을 과학 기술에 의존했던가! 그 문제는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그 보다 사실 그것은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주의 일반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시간의 과학으로 알고 있다. 타임머신에 대한 많은 과학적 우화들 속에 항상 상대성 이론의 단편적 지식들이 많든 적든 활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서 논의하고 있는 시간이란 "어떤" 시간인가? 다들 잘 알고 있을 테니 간단히 결론만 말해, 일반적 사차원의 독립된 좌표를 갖는 시간이든(즉, (ds)2 = (dx)2 + (dy)2 + (dz)2 + (dt)2), 상대적 사차원 시-공간이든(즉, (ds)2 = (dx)2 + (dy)2 + (dz)2 - c2(dt)2),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이란 다름 아닌 "공간"이다(물론, 후자의 경우에서 지시된 시공간 항은 단순한 공간은 아니지만). 다시 말해, 운동이라든가 실제적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과학이 가진 도구 즉 수학을 이용하여, 그 운동과 변화의 특정 위치와 궤도 등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양적으로 공간화한 번역물! 이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간이다. 하나의 중심 혹은 기준으로 작용하는 특권적인 체계의 소멸, 운동에 따른 공간의 수축과 시간의 지연, 동시적 시간의 파괴, 서로 다른 체계들의 상대적 관계, . . . 상대성 이론에서의 이러한 일련의 시나리오는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어, 가령 시계의 눈금으로 환원한 생각의 결과이다. 그 시간이란 공간을 최대로 밀고 나가, 공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과학의 시간, 더 정확히 말해 과학자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론 상대성 이론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실재의 시간과 과학의 시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만일에 이와 같은 상징과 실재를 혼동하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극단적인 경험의 예로, 사진과 실물을 혼동 한다든지, 사이버상의 존재와 실제의 존재를 혼동한다든지, 영화와 인생을 혼동한다든지, 현재와 과거를 혼동한다든지, . . . 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한 혼동은 시간(타임머신, 시간여행, 기억 등)을 다루는 미국영화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현상이다(최근에 개봉된 <데자뷰>는 그 현상의 극단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제각각 소재는 조금씩 다르지만, 구조적으로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타임머신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여러 매체라든가, 그도 아니면 어떤 우연적이고 신비한 사건으로 인해,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다른 "시대"로 "이동"하여, 잘못된 현재를 바로잡는다는 구조로 되어있다. 위에서 언급한 <데자뷰>의 경우엔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우주가 마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어서, 어떤 우주적 에너지를 그 두루마리에 가하면, 저 편으로 가고 있는 두루마리 한 쪽 끝이 이쪽으로 접힌다는 것이다. 두루마리를 접으면 접점이 생길 것이고, 그것은 바로 공간의 결합지점이 될 것이고, 공간의 결합은 곧 시간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의 어떤 지점과 만나는 상태, 즉 과거로 이동이 가능해 진다. 이것은 중력장, 블랙홀 등의 현대 물리학 이론 비스무레한 것들을 뒤섞어서 만들어낸 논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논리가 가능할까? 어떻게 공간을 이동하고 접어서 과거로 갈 수가 있나? 바로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시대"라고 하는 시간의 용어를 "이동"이라고 하는 공간의 용어와 뒤섞어 쓰는 것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공간의 이동이 시간의 변화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 발자국 앞으로 간 만큼, 시간도 한 발자국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공간의 이동은 곧 시간의 진행이라는 믿음을 도식으로 확대시켜, 뒤로 한 발자국 가면 시간도 뒤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과거-공간으로 간다고 하는, 헐리웃 스타일의 변형된 상대성 이론은 바로 이러한 유치한 발상에서 파생된 시나리오이다. <데자뷰>는 그런 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뒤섞고 동일화해서, 시간을 공간에 완전히 종속시켜 버린다. 거대한 충격으로 두루마리-공간을 접어, 순간 이동으로 과거-공간으로 가서, 어떤 어떤 행위를 가하여 환경을 바꾸고, 그 바뀐 환경은 미래의 나 즉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디서 본듯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현재의 이상한 일들이(데자뷰 현상) 결국은 몇 시간 전에 과거의 내가(더 정확히 말해 과거로 이동한 현재의 내가) 저질러 놓았던 일이었음을 알게 되고, 심지어는 현재의 공간에 있는 사람이 과거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력(자외선, 동영상)을 미치고, . . . 나중에는 제작진 자신들 조차도 헷갈렸는지, 시간과 공간의 그 뒤섞인 관계를 풀지 못해, 방금 전에 물에 빠져 죽었던 사람이 저쪽 골목에서 살아서 되돌아오는, 기상천외한 드라마를 만들어 클라이맥스를 마무리한다. 뒤섞인 것은 시간과 공간 뿐만이 아니다. 장사를 위해 스릴도 넣어야 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니 개연성도 필요하고, 대중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해피엔딩도 잊지 말아야 하고, . . . 문학적 이미지, 과학적 이미지, 사회학적 이미지, 윤리적 이미지, . . . 그 모든 것들을 성의 없이 뒤섞어, 미국 사회를 말해주는 모든 환타지-오락-카탈로그가 집결되어 작성된 것이다. 아마 그들은 그 장면을 만들면서, 과학과 환타지의 경계선 위에서 나자빠지며 이렇게 외쳤을 것 같다: "아! 나도 몰라, 될 대로 되라!"

물론, 허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고, 재미로 웃어 넘길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저 헐리웃 스타일 시간 개념 시나리오는 유치한 것으로 덮어 버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미국 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의 일면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저러한 시간개념은 유치할 뿐만 아니라 병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잘못된 현실, 슬픈 현실, 지옥 같은 현실(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같이 개인적인)을 견딜 수가 없어, 우리가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에나 미친 척 하고 잠깐 빠져드는 바램을, 과학적 기술로 현실화시키려는 망상으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학-기술주의는 대단히 퇴행적이고 병적이다. 그것은 그 자체 슬프고 애처로운 망상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떠나버린 사람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앨범을 뒤척이다가, 실사출력 기술을 떠올리며 그 사람을 되살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 사진 속의 그 사람과 떠나버린 실제의 그 사람을 혼동하는 것처럼. 이미지와 실체를 혼동하여 과거로 퇴행하고자 하는 물신주의적-기술-맹신-광란은, 한편으로는 과학에 대한 무지와 오만의 결과이고, 또 한편으로는 시간과 삶에 대한 슬픈 생각, 가령 후회의 가정법(". . . 했어야 했어(should have . . .)")으로 현실을 이해한 결과이다. 되돌릴 수 있다는 회고적 망상은 과학기술의 능력이 아니라, 현실적 삶의 실패이다. 그것은 과학적이기는커녕, 과학의 남용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이다.

과학은 모든 것을 공간화 한다. 모든 사물에 좌표를 부여하고, 운동의 변화를 양으로 환산하고, 존재성을 기능으로 치환한다. 감정이라든가 회상이라든가 음미와 같은 주관성의 영역이 과학에서 논의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이 악당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과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기 때문에, 언어이기 때문에, 번역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날아가는 새를 잡기 위해, 날고 있는 경로에 임의로 몇 개의 점을 찍어 궤도를 설정하고, 이동의 간격을 계산하여, 과녁을 만들어 새를 맞추는 식으로 시간을 계산한다 . 이것은 새를 맞출 수는 있지만, 새 자체가 아니며, 새의 실재적 궤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일종의 도표, 다이어그램이다. 과학자들은 점을 하나 찍고는, "이게 너라면. . ."하고 가정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시작한다. 그것은 새의 육체와 임의로 설정된 새의 상징적 위치를 동일시 하는 방법이다. 그래야 계산이 명료해지고, 논리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상환경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가능해 보인다. 공간의 이동 뿐만 아니라, 시간의 공간화, 육체의 소멸과 순간 이동, . . . 육체가 없어도 존재가 가능한 것이 바로 가상공간인데, 안 되는게 어디에 있겠나?

그렇지만 순진하게 가상공간을 실재의 공간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수학자들이 찍어 놓은 그 점과 궤적은, 저렇게 날아가며, 숨을 쉬고, 소화를 하고, 땀을 흘리며, 허기가 져서 헐떡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매 순간 변화와 우연성의 산물인 바로 저 뱁새가 아니다. 그들이 찍어놓은 그 점들을 아무리 무한대로 적분을 한다 해도, 참새의 존재, 독수리의 비상, 따오기의 질적 변화와 운동을 재구성 할 수는 없다. 점들이 적어서가 아니다. 그것과 그것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 과기주의는 모든 존재를 양적으로, 공간으로 재현할 수 있다고 망상한다. 매 순간 날라가는 새를 잡을 수 있다는 신념이, 살아있는 황새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번호라든가, 자리배정이라든가, 기능들을 할당해 주지 않고서는 효율적인 생산이 불가능하듯이, 과학기술주의는 삶을 효율성이나 목표중심으로 설정하여(사이버네틱스? 목표진입 메커니즘?), 인간을 하나의 점으로, 함수(function)관계의 좌표로 용해해 버리고는, 이번엔 그 반대로 여러 점들과 좌표들의 집적으로 삶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로봇공학?).  나아가 점들로 상징화된 그 모든 육체들을 대신하는 거대한 상징의 점 하나를 형성하며. . . .

하지만 그 상징들은 일을 하는 동안에만, 수학문제를 푸는 동안에만, 사냥을 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규약이다. 그것을 가정에까지 가져와 자신의 모든 삶을 그러한 규약으로 육화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육체(더 정확히는 주관성)를 잃어버린 삶이 될 것이다. 생산성을 최대로 하기 위해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삶 속에서 상징과 규약을 내면화시키고자 한다. 업주들은 수억의 돈을 투자하여 그러한 현장(인프라)을 구축해 놓았고, 학교와 같은 여타 기관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동맹자들은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내면화된 신체를 만들어 내었다. 노동을 위한 규칙들은 퇴근 후에도 지켜져야 하고, 생산성을 위해 건전한 삶을 유지해야 하며, 생산관계의 질서를 위해 순응적인 인간성을 연마해야 하고, 매출증대를 위한 건전한 소비와 약간의 방탕한 기질 정도는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효율성을 위해서는 실제적인 육체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모던 타임즈>의 떠돌이 챨리처럼 콘베이어 벨트 앞에서 가려움증이 생긴다든가, 배가 고프다든가, 웃는다든가, 한참 동안 먼 곳을 주시한다든가 해서는 안 된다. 이탈해서도 안되고, 실제적이어서도 안 된다. 육체는 오로지 가상적이어야만 하고, 따라서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어야 하고, 배치되고, 동원되고, 설명 가능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생산 과정은 온 삶을 지배하게 되어, 삶 자체가 하나의 가상적 공간, 매트릭스 공간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시간 조차도 공간으로 얼어붙게 하여, 몇 가지 기술적 장치들 만으로도 얼마든지 시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망상을 키웠다. 날아가는 새를 잡아 작은 우리 안에 새를 기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뚜껑을 열어봐도, 새는 없고, 새를 지시하는 기표들과 좌표들과, 기능들만이 손을 벌리고 넘쳐흐른다. 미국식 과학 기술주의는 존재로부터 육체를 박탈해 버렸다. 미국인들은(우리 역시) 육체를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삶의 느낌이 없는 것이다. 그 육체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병적이고 퇴행적인 과학기술들을 동원해봐야, 나오는 것은 한없는 허기뿐이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과거로 되돌아가는 미국식 과학의 병적인 실상이 아닐까?(매체 메커니즘을 가지고는 결코 과거를 재구성할 수 없다고 지적했던 영화는 Christopher Nolan의 <메멘토(Memento)> 뿐이었다.)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상당히 자본주의적이고 파쇼적이다. 또한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은 초상화를 그린 화가에게 왜 그림과 모델이 똑같지 않은가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실사 화가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내라고 요구하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고 서글프다. 낮은 코를 실리콘으로 높이세우고, 작은 가슴에 이물질을 삽입해 성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믿으며,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을 디지털로 수정하면 삶의 실재가 아름다워지고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망상 하는 것 만큼이나 애처롭고 바보 같다. 굉장한 단어들로 장식을 한다고 해서 곧 문학이 될 수는 없듯이, 사진을 아무리 수정해 봐야 변하는 것은 사진뿐이다. 그것으로 가면을 만들어, 끝나고 나면 공허한 파티나 기껏해야 한 두번 즐길까? 그러한 망상이 실제로 개인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망상을 필요로하고, 망상을 획책하는 이상한 관계가 우리의 현실 속에 끼어들어, 우리를 혼란하게 하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아니라 제 아무리 많은 발자국을 뒤로 이동을 해봐야 시간은 뒤로 가지 않는다. 시간은 원래부터가 그렇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현대의 많은 영화들이 그토록 시간과 공간을 탈구시키고자 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괴로운 현실을 되돌리기 위해 과거로, 원래의 그것으로, 가능했었을 수도 있었을 그 어떤 시-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는 수단,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실상이 무엇인지, 어떤 미래로 갈지에 대한 판단과 통찰력이다. 과학과 기술은 그 목적에 쓰여야 한다. 미래의 돈벌이 말고. . .

영화 <데자뷰>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미국식 과학-기술주의는, 시간을 공간으로 뒤섞어, 모든 것을 잴수 있다고 망상하는 기계론을 닮았다. 그리하여 또한 모든 것이 어떤 초월적 지성의 기획에 의해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망상하는 목적론을 따른다. 이들은 모두가 같은 정서 속에서 뒤섞인 결과인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 자유의 소산이 아니라 절망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것은 대단히 종교적이다. 미국식 과학-기술주의는 삶의 절망과 그 슬픔에서 비롯된, 종교적 망상의 과학적 번역물이다. 그것은 과학에 있어 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h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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