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침. 팔등에 소름이 돗아 간지러울 만큼 싸늘했다. 그와 그녀는 벤취에 앉아 빵과 차를 마시고 있다. 그들은 서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함께하고 있다고 느꼈다. 기름진 빵과 향기롭고 따뜻한 차.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가! 따가운 햇살에 머리를 반쯤 묻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좀 역설적인 일인데,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는 새 삶을 찾기 위해, 자신이 간신히 빠져나왔던 술독의 소굴로 잠깐 되돌아간적이 있었어. 파리 몽마르뜨의 유흥가. 블랑슈의 거리들. . . 시간과 돈을 뿌려대며 방탕했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면서 이곳 저곳을 걸어다니다가, 그는 문득 '방탕'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 '방탕이란 엷은 공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에서 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 . . 내 생각인데, 아마도 저러한 생각 덕분에 자신이 버렸던 그 세월을 후회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랬기 때문에 진정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겠지. 무절제하게 다 써서 잃어버리는 와중에도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고 창조되고 있었다는 것. 무엇인가를 잃어버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했던 푸르스트(Marcel Proust)의 말처럼, 잃어버리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소득이 되는거야. 예술적 비젼 속에서는 저렇게 괴상망측한 형태의 경제가 실현되고 있지. 예술은 그를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게 했고, 그로써 자신과 삶의 악덕 조차도 끌어안을 수가 있었던 거라고 할까? 확신하건대, 예술의 궁극적인 주제 아니 목적은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문제'임에 틀림없어. 홀가분해지기 위해서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말야. 하지만 피츠제럴드처럼 술독에 빠지지 않고도 그럴 수 있으려면, 마약이나 알콜중독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그 무엇도 아닌 것'이 만들어지려면, 뭔가 굉장한 고통이 있어야 할거야. 술에서 깬 후의 허탈이나 금단의 환각으로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말야. 그 고통 역시 잃어버려야 할 하나의 댓가겠지만, 또 그것이 두려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가지만 말이지. . ."

그러자 그녀는 옆에 앉아 차를 한 두 모금 마신 후에, 태양을 한꺼번에 마셔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가슴 속 깊이 햇살을 들이마시고는 이렇게 말했다.

"가을은 있잖아, 모든 것이 영원할까? 하고 질문하게 만드는 계절인것 같아."

그는 궁금해진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흥미롭게 보았다. 방금 전에 자신이 했던 예술과 고통에 관한 요설들을 까맣게 잊어버린채, 그날 아침 그가 몸으로 느꼈던, 그래서 그를 저러한 사변적인 생각으로 이끌었던 삶의 분위기를, 어쩌면 그녀가 가을의 주제로 더욱 더 적절하게 표현해 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말을 계속 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 갑자기 나를 떠나버리는거야. 영혼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어. 어쨌든 내가 나를 떠나 저 먼 곳으로, 아니면 저 먼 미래로 가고 있어. 내가 여기에 있는 한, 나도 이 계절도 모두가 사라져버릴테니까. 이 짧은 계절을 갑자기 멈추기라도 하듯, 날아가버린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거야. 그리고는 이 빵과 녹차의 맛. 저 햇살. 내 옆에서 조근조근 들려오는, 강렬하지만 조용한 당신의 그 얘기들. 심지어는 그 예술과 고통까지, . . .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할 수 있을까? 하고 말야. 사람들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들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 아쉬워 하면서, 죽기전에 사진을 찍어놓듯이,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먼 곳으로 날아가보는 거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거들어 한 마디 덧붙였다.

"말하자면 떠나기 직전의 계절이로군. 다시는 영원히 오지않을 계절처럼, 어쩌면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것이 두려워 견딜 수 없는 계절처럼말야."

다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응, 그래서 모든 것이 예사롭지가 않아. 나와 당신의 숨소리까지, 모든 것이 뜻깊게 느껴지고, 매 순간의 경험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만약에 내 말이 맞다면, 예술은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남기는 것이 아닐까? 죽음을 의식하는 자만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아. 죽음을 극복하는, 소극적이지만 유일한 길이지. 이런 아침이 또 올까? 하고 계절이 사라지길 아쉬워하면서, 조용하고도 자그마한 아침 만찬을 만끽하는 우리처럼. . . ."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는 또 사변적인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혀 엉뚱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녀의 말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 가령, 성실한 삶 만이 뜻 깊다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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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물질의 변화와 이동에 관한 관념적 이미지. 혹은 물질의 변화와 이동에 대하여 다른 물질이 내적으로 소유한 그 변화에 대한 관념. 한마디로 죽음이란 윤리적이거나 심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질병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물적 상태를 반복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신체의 부분들 간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움직임에 따라, 평소에는 없었던 주의력을 자신의 몸에 집중하고, 이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떠올린다. 신체의 특정 부분의 물적 변화에 대해 신체의 다른 부분이 반응하는 것이다. 병원에 가서도 우리는 몸의 물적 상태를 경험한다. 환자들은 자신의 몸이 물질적인 기능들로 다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경이로움과 함께 불쾌함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뼈, 세포, 혈액, 두뇌, 종양, 흉부, 대뇌, 안구, 수정체,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검푸른 감광판 위에 영사한 엑스레이 . . .

<Picture of Mouth disease sourced from a book bought by Bacon c1928>


간혹 의사들은 환자의 신체와 그 상태에 대해 시니컬한 묘사를 즐긴다: "귓속이 썩었네요", "기관지가 좀 지저분하군요", "대장 청소 좀 합시다" . . . 그렇다고 언짢아하지는 말아야겠다. 신체를 물질의 덩어리(혹은 물질들의 생화학적 이행)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의 속사정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악의가 있어서도 아니고, 환자의 몸을 함부로 다루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습관적으로 "당신의 몸은 단백질 덩어리 그 이상이 아닙니다"라고 숙지시킴으로써, 그 자신 뿐 아니라 의료 행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물적 상태로 끌어들여, 이 모든 사태들이 단지 물질의 현상일 뿐이라고 전문가적 조언을 해 줌으로써, 몸의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당혹감과 무지로부터 비롯된 신비화된 공포를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한 일종의 과학적 노력일 뿐이다. 아울러 이것은 심리적 고통을 극복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의사들은 질병을 탈심리화 혹은 탈인간화하여, 환자가 없어도 질병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특정 질병에 걸린 환자가 호소하는 고통이라든가 증상들을 부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환자의 호소는 질병존재에 대한 비과학자의 주관적 심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심은 질병존재 그 자체이지, 질병에 걸린 환자가 아니다. 심지어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조차도 정신을 물적상태에 의존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의식(Bewuβtsein)이 육체의 가장 표면에 자리잡은 특정 조직(<Bw.>라고 명명되는)의 기능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외부의 자극을 지각(Wahrnehmung)하고, 내부의 감정(쾌/불쾌)과 같은 정신 조직들을 감싸면서 외부 세계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일종의 <지각-의식 W.-Bw.>조직이라고 하는 공간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프로이트는 이를 대뇌 해부학을 참고하여, 의식조직의 위치는 두뇌의 가장 안쪽이 아닌, 바로 대뇌 피질, 즉 중추 기관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표층에 위치하고 있다고 적는다(『쾌락원칙을 넘어서』).

어쨌든 질병은 나 자신의 신체를 하나도 부서지지 않은 완전한 전체(유기체적 전체 혹은 조화로운 자연)가 아니라, 부스러기처럼 잘려지고 부분적인 대상으로, 마치 베이컨(Francis Bacon)의 고깃 덩어리 그림들처럼, 그 자체 독립한 뒤틀린 물상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개인은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혹은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의 객관적 물상에 직면한다. 그렇게 본다면, 질병이란 가고싶지 않은 그러나 가야할 힘들고 고독한 여행과도 같다. 한동안 유지되었던 온전한 신체가 몽우리지고, 경직되어 진부한 상태가 되면, 신체는 스스로 어떤 동요를 찾아 떠난다. 혹은, 외부의 동요를 받아들일 틈을 스스로 벌려 놓는다. 그리하여 그 동요는 고집스럽게 얽혀있는 부분들을 한바탕 휘집어 놓으며, 한꺼번에 분산되었다가, 다시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는 것이다. 작게는 감기에서부터 크게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생에 걸친 몇 차례의 사랑이나 열병처럼, 딱딱하게 고인 신체를 갈아치우듯, 썩어가는 물밑을 걸러내듯, 질병은 우리로 하여금 물상의 변화에 대면하여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이를 견뎌내라고 채근질을 한다. 질병은 부패가 아니라 오히려 부패를 예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Francis Bacon, Figure with Meat 1954>


좀 다른 관점에서, 질병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혐오나 거부는 '온전하고도 아름다운 상태'와 같은 윤리적(미적) 가치들에 관한 우리의 집착을 반영한다. 그 가치에는 생명의 유기적 완전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형이상학적 이상이 있으며, 물적 상태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보수주의적 성향이 깊게 배여 있다. 어쩌면 베이컨의 저 그림(성직자와 고깃덩어리)과 같은 어떤 이미지에 대한 혐오감은 우리 안에 내재한 보수성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깡끼옘(Georges Canguilhem)은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Le Normal et le pathologique)』에서, 다양한 생리학적-병리학적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질병 등의 구분이 실존하는 존재의 문제이기 보다는, 규범적 존재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개념임을 논의한다. 생명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에 단순히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구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킨다. 심지어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환경에의 적응조차 어떤 "합목적적 활동"(자크모노)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명체는 자기 자신과 외적인 환경 간에 특정한 유형의 관계와 가치를 형성한다. 깡끼옘은 이를 "생물학적 규범성"이라고 불렀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자신의 생물학적 규범성을 가지지 않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생명은 자신에게 적합한 가치를 형성하고, 그 가치에 따라 자신의 생명 활동을 지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병리적 상태란 정상성이 결핍된 상태라든가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궤도를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병적이라고 부르는 어떤 상태 역시 생명이 자신의 규범에 따라 지속되어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모든 존재가 그 자신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비정상이라는 개념이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어떤 허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병적 상태라고 불리는 어떤 상태 역시 그 자신의 존재를 갖는다.

그러나 물론 건강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거나 공허한 말은 아니다. 정상적인 상태와 건강한 상태는 구별되어야 한다. 깡끼옘은 이를 "생리적 항상성"과 "병리적 항상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설명에 따르면, 건강 상태는 환경의 변화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거나 안정된 상태를 회복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리적 항상성은 변화와 전진의 가치를 갖는다. 다시 말해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생물학적 규범의 폭이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병리적 상태는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적 기준의 폭이 축소 되었음을, 말하자면 질병 즉 물적상태의 변화에 대해 쉽게 불안정해지고, 회복 능력이 감소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병리적 항상성은 퇴행적이고 자기보존적 고착으로 나아가는 가치를 갖는다. 치유란 생명체의 자기 규범이 안정된 상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달리 말해, 건강한 상태와 병적인 상태의 차이는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의 여부와 정도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된다는 것은 규범과 가치의 보존이 아니라, 새로운 규범 혹은 보다 우월한 규범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체의 환경에 대한 적응, 그리고 환경의 내재화의 척도이다.

보수적 가치들 역시 그 자신의 항상성과 규범을 갖는 어떤 삶의 상태이다. 따라서 긍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를 수용하는 규범의 기준이 협소할수록, 그 가치의 지속가능성의 정도는 적어질 것이다. 그 폭과 깊이는 바로 건강함의 정도를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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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독립된 혹은 폐쇄된 하나의 개체의 관점에서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신의 관점에서 죽음은 불합리하며 심지어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죽음이란 신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적 요소들이 더 이상 그 신체를 유지하는 관계를 가지지 않을 때이다. 즉 서로 다른 질서를 갖는 부분 요소들이 특정한 관계 아래에서 특정한 개체를 구성하는데, 만일 이 개체를 특징 짓는 특정한 관계가 해체되거나, 더 이상 부분 요소들의 결합하는 관계가 파괴되기에 이르면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처럼 특정한 신체를 이루고 있는 관계가 파괴되거나 해체된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인 이 관계가 더 이상 현재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에 의해 실행되지 않게 될 때를 가리킨다. 사라진 것은 영원한 진리인 관계가 아니다. 사라진 것은 그 관계가 그것들 사이에서 성립되었던 바의 부분들이고, 이제는 다른 관계를 취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예를 들면, 독은 혈액을 해체시켜, 즉 혈액의 부분들을 다른 신체들을 특징 짓는 다른 관계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결정한다(더 이상 혈액이 아니다)"(Deleuze 32-33). 죽음은 신체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부분적 요소들의 특정한 관계가 파괴되면서, 이 부분적 요소들이 새로운 특정한 관계로 이행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음은 관계 그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부분들이 새로운 다른 부분들과 맺는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파괴되는 것은 신체를 특징 짓는 특정한 관계이며, 이 관계 아래 배치된 특정한 부분적 요소들인 것이다. 따라서 신의 관점으로 볼 때, 죽음은 관계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계에서 다른 특정한 관계로의 변형일 뿐이다. 신의 관점에서 절대적인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어떤 무엇도 아니라는 논제는 . . . 온갖 방식을 통해서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 . . [관계들의 적합 부적합에 따른 상이함들] . . . 이런 의미에서, 신체가 시체로 전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는 죽음이 있다. . . . 슈바르첸 베르크는 죽음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혹은 윤리학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신체는 시체로 변할 경우에만 죽은 것이다 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 . . . 왜냐하면, 때때로 어떤 사람은 아주 심한 변화를 겪어서,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이 동일한 사람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Deleuze 33-34).

인용 및 참고
Deleuze, Gilles. Spinoza: Practical Philosophy. trans. Robert Hurley.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88.
Spinoza, Benedict de. A Spinoza Reader. ed & trans. Edwin Curley. New Jersey, Princeton UP,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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