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 순간 현실의 다양성에 직면한다. 가령, 아무데에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눌러보라. 그 안에 찍힌 현실의 다양성에 놀라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그 아래에 강아지 한 마리도. 강아지는 보도 블럭 위에 흩어져있는 수 많은 서로 다른 낙엽들을 밟아가고 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줄지어 있으며, 바람 때문인지 가지들이 한 곳으로 쏠려 있다. 나뭇잎의 색을 보니 가을이다. 청명하지만 싸늘해 보이는 날씨이다. 그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은 열심이 말을 하고, 한 사람은 화가 나 있는 듯, . . . 이 사물들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에 깃든 감정들, 정서들, 힘, 특질, . . . 한이 없다.
그 사진 안에는 무하하게 많은 존재들이 들어가 있으며, 그것들을 셈하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이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한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그 다양한 현실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여 사물들을 지각한다. 그 두 사람과 강아지 그리고 그 주변에 펼쳐진 무수한 존재들은 엄연히 내 앞에 있는 것이지만, 나 자신과 무관하다면 나는 그들을 알 수가 없으며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저들의 외형만을 알 뿐이다. 우리의 지각과 그 지각기능이 만들어 놓은 지식이란, 다양한 현실 중에서 어떤 특정 부분, 그것도 나를 위해 필요하다고 가정된 잘려진 조각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팽개쳐 버린다. 우리는 현실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삶이 요구하는, 그리고 신체의 한계가 요구하는 고정된 관점으로 변형된 일부만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비극이다. 무식하고 편협하게도 우리는 무한하게 변하고 움직이고 있는 삶 그 자체를 자의적으로 잘라서 박제시켜 놓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오해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지각 능력, 감각 능력, 오성 능력, 이성 능력, . . . 이들을 보다 많은 것으로, 보다 높은 것으로, 보다 탁월한 것으로 확장시켜야만 한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 보다도 더 많은 실재를 지각하고 느끼도록 노력하고 훈련해야만 한다. 그 전문가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삶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놀라운 지각능력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술가들만큼 현실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역설처럼 다가온다: 예술가들은 삶으로부터 초연해지면서, 비로소 삶과 직접적 관계를 갖는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이 문제에 대해 짧지만 매우 아름다운 구절들로 표현하고 있다.
". . .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 관심이 그것을 옆으로 치워놓는다. . . . 현재의 생활을 유용하게 조명하고 완성시키는 부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 . . 이러한 선택을 유발시키는 데 한 몫을 하는 것이 두뇌이다. 두뇌는 유용한 기억을 현실화시키고 쓸모없는 기억들은 의식의 보다 낮은 층 속에 간직한다. 지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행위의 보조수단인 지각은 실재 전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을 분리시켜낸다. 지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다. 지각은 미리 분류하고 미리 명칭을 붙인다. 우리는 거의 대상을 보지 않는다. 단지 그 대상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가를 알면 족하다. 그러나 때때로 다행스럽게도 그 감각과 의식이 생활과 보다 덜 밀착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자연은 그들의 지각기능을 그들의 행위 기능에 덧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사물을 볼 때, 그 사물 자체로 보며 자신들을 통해서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행위를 목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각하기 위해 지각한다―다른 목적은 없다. 오직 즐거움을 위해서다. 그들 자신의 어떤 측면을 통해서, 즉 의식을 통해서건 아니면 감각을 통해서건 그들은 초연히 태어난다. 그 초탈이 어떤 감각의 초탈인가 아니면 의식의 초탈인가에 따라, 그들은 각각 화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며, 음악가가 되고 시인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 예술에서 보는 것은 좀더 직접적인 실재의 상(像)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더 많은 수의 사물을 보는 이유도 그가 자기의 지각을 이용하는 데 관심을 보다 덜 갖기 때문이다."(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문예출판사, 2001. pp. 165-167)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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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철학자 베르그송도 이성주의보단 주정주의쪽에 가깝군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플라톤이나 기타 고대 히랍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로고스나 진리에 대한 편중되거나 편협된 이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이성이나 진리가 결코 지각이나 감성을 배제한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닐테니까요. 아마 그런것이 감성이나 지각을 배제했다면 과연 이성이나 본질이란 말로 이야기 되어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2005/11/30 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