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진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05/17 지속의 삼중성(triplicity)과 비개인적이고 단일한 시간
  2. 2006/08/30 추상이란 무능력을 의미한다 (3)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주장했던 동시성의 파괴(특권적 체계의 부정)를 비판하면서, 베르그송은 단일한 시간의 실재에 대해 논증한다. 그의 비판의 기본 틀은, 상대성 이론이 공간과 시간을 혼동했으며, 아인쉬타인이 주장했던 동시성의 파괴는 수학적 시간의 동시성, 시계의 동시성, 공간화된 시간의 동시성, 혹은 상징적 시간의 동시성의 파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의 동시성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Pierre와 Paul의 상대적 운동이나, Jean과 Jacques의 상대적 크기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단일한 시간, 그리고 오히려 그들의 상징적 실재를 가능케 하는 일원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베르그송은 지속의 일원론적 가능성을 논증한다. 다소 복잡하지만, 그 논의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원론에서 일원론으로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물질과 기억>에서 주로 상정했던, 일반적 다원론 혹은 절대적 다원론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지속과 흐름과 기억과 시간을 갖는다. 이들은 각각이 질적으로 다르며, 보편적 다양성을 형성하고 있다. 새의 비상, 물의 흐름, 배의 미끄러짐, 나의 의식, . . . 모두가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2) <창조적 진화>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했던, 제한적 다원론 혹은 상대적 다원론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지속과 흐름과 기억을 갖지만, 서로간의 관계 혹은 실제적 참여 속에서, 흐름의 관계를 형성한다. 가령, 나는 설탕물을 마시려면, 설탕이 녹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기다림은 흐름의 동시성 혹은 서로 다른 내적 지속에의 참여를 통한 공존을 보여주는 실존적 근거가 된다.


(3) <지속과 동시성>에서 주장했던, 비개인적이고, 절대적이며, 단일한 시간의 일원론

일반적 다원론과 제한적 다원론은, 닫힌 좌표, 닫힌 체계를 이루고 있다. 제한적 다원론의 경우, 흐름의 공존은 수동적 경험 속에서, 우연적으로 형성된 공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설탕이 녹기를 기다리는 행위는 여전히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참여와 공존의 본성이 무엇인지 설명할 길이 없이, 단지 우연적으로 경험만할 뿐이다. <지속과 동시성>에서 베르그송은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시간을 넘어서는 실재적 시간을 언급하면서, 모든 지속을 하나의 단일성으로 묶어주는 일원론적 시간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주장은 아인쉬타인에게 가해지는 마디의 질문으로 요약할 있을 것이다: 피에르와 폴의 상대적 운동, 혹은 쟝과 쟈크의 상대적 크기를 바라보는 당신, 물리학자로서의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만일에 당신이 피에르의 좌표계나 폴의 좌표계 중 한 쪽에 있다면, 피에르와 폴의 차이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들뢰즈는 그 일원론적 시간이 삼중성(Triplicity)을 띄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모호하지만 놀라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내가 강둑에 앉아 있을 , 물의 흐름, 배의 미끄러짐 혹은 새의 비상, 깊은 내적 삶의 계속되는 속삭임은, 내가 어떻게 주의를 집중하는가에 따라, 나에게는 개의 서로 다른 흐름이 되기도 하고, 단일한 하나의 흐름이 되기도 한다."(DS, 52(67)). 여기서 베르그송은 주의력에다가 "나누지 않고도 배분할 있는 능력"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여럿이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Bergsonism, 80)


베르그송이 자주 예를 드는 "음악"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것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 음표 하나 하나를 떠올리거나 구별하지 않는다. 멜로디 전체를 하나의 단일한 흐름으로 듣는다. 하지만, 흐름들 가운데, 내가 특히 어떤 음에 주의를 집중한다면, 음악의 흐름은 중단되고, 내가 집중한 음표만이 떠올려질 것이다. 베르그송은 예를 통해, 지속이 가지고 있는 "분할과 연속의 " 언급하고 있다. 지속(반성, 주의력, 의식, 사유, 회상, 음미, 주관성 . .) 단일한 하나의 흐름이면서, 동시에 다수의 흐름들이다. 그것은 존재를 직접 나누지 않고도 분할 있는 , 하나이면서도 여럿일 있는 힘이다. 물의 흐름, 배의 미끄러짐, 새의 비상, 나의 의식의 흐름들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단일한 하나의 흐름이 되기도 하고, 각각이 다른 여럿의 흐름들로 분할되기도 하는 것이다.
(
참고: 잠재적이고 연속적 다수성으로서의 지속을 베르그송은 어떻게 설명하나? 우선, 지속은 본성적으로 다른 것들로 나뉘어진다. 하지만, 나뉨은 우리의 의식이 마음을 먹고 나눔을 적절히 행했을 때만이 현실화된다. 마음을 먹지 않으면 나누어지지 않는다. 가령, 책을 읽는 행위를 생각해보자. 물질로서, 공간으로서의 책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붙들고 페이지를 넘기며 수많은 잠재적, 본성적으로 다른 흐름들로 끊임없이 나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물질로서, 공간으로서의 책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만일에 나눔을 행하지 않은 상태나 위치에 자리를 잡는다면, 오로지 잠재적이고, 단일한 하나의 시간만이 있을 것이다. 나와 새의 비상과, 아킬레스의 발걸음과 거북의 발걸음, 물의 흐름은 하나의 단일하고도 보편적인 시간으로 흐를 것이다. . .그러다가 우리가 갑자기 어느 순간 나눔을 행하게 된다면, 본성적으로 다른 흐름들이 나뉘어져, 가령, 아킬레스의 흐름과 거북의 흐름으로 나뉘고, 나의 흐름과 물의 흐름으로 나뉘고, 이렇게 본성적으로 다른 개의 흐름들로 나뉠 것이다. 이것은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본성적으로 다른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여기서 나아간다. 베르그송이 지속에게 부여한 그러한 분할과 연속의 힘보다, 심오하고, 훌륭한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감쌀 있는 (the power to encompass itself)"이다.


    [. . .] 물의 흐름, 새의 비상, 삶의 속삭임은 가지 흐름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나의 지속이 흐름들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나머지 흐름들을 포함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흐름은 되는가? 가령, 나의 지속과 새의 비상은 되는가? 왜냐하면 흐름은 번째의 다른 흐름 안에 포함되지 않으면 공존한다거나 동시적이라고 말해질 없기 때문이다. 새의 비상과 나의 지속이 동시적이 되려면, 나의 지속이 둘로 나뉘어져야 한다. 그래서 나뉘어진 다른 지속이, 새의 비상을 포함하고, 동시에 나의 원래 지속도 포함함으로써, 나뉘어진 지속 안에서 원래의 지속이 반성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흐름들의 근본적인 삼중성이 있다.  (Bergsonism, 80)


의식의 흐름과 날아가는 새의 흐름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할 있는 근거는, 관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새의 관점에 있는 것도 아니다. 둘이 공존하려면, 3 흐름이, 나의 흐름과 새의 흐름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그래서 흐름이 동시에 붙들고 있는 번째 흐름이 나오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나와 새의 공존이 가능해지려면, 나는 둘로 분열되어야만 것이다. 분열된 하나의 지속, 새의 지속과 나의 지속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3 지속이 안으로부터 나올 때만이, 비로소 자신과 새는 공존할 수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코기토(Cogito)와도 같은 것인데, 새와 내가 공존하기 위한 조건은, 내가 자신과는 다른 낯선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자신으로부터 낯설어지는 것은 말하자면, 좌표계의 전면적인 단념이고 포기이며, 자신과 거리를 두고 3자의 관점에서 나를 하나의 요소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 . 공존은 비개인화되기, 역사성을 갖기, 3자가 되기, . .아인쉬타인에 대한 베르그송의 질문의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흐름들이 매번 본성상의 차이를 가지며, 수축과 이완의 차이를 가지며, 차이들의 조건이 되는 단일하고도 동일한 하나의 시간 안에서 소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 . . '오로지 하나의 비개인적인 시간만이 있게 것이다. 그리고 안에서 모든 사물들은 흐르게 것이다.' "(Bergsonism, 82)).

피에르와 폴의 상대적 운동과 시간지연에 있어, 동시성의 파괴를 말하고 있는 물리학자 자신은 실제로 어디에 있는 것인가? 새의 흐름과 물의 흐름을 구분하듯이, 피에르의 시간과 폴의 시간을 상대적 관계 속에서 구분하는 물리학자는 어디에 있는가? 베르그송은 상대적 물리학의 시간 이전에 이미 물리학적 시간을 가능케 실제의 시간을 상정한 것이다 . . 그렇기문에 그는 아인쉬타인이 동시성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성을 공고히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반성, 주의력, 회상, 음미와 같은 주관성의 능력은 다른 지속을 열어 제치고( 본성적인 차이를 구분하고), 다른 지속을 포함하기도 하고(하나의 시간으로 단일화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조차도 하나의 요소로서 포함한다. 이것은 바로 회상과 사색의 힘이라고 말할 것인데, 이것은 지속과 주관성의 본질을 드러내는 문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나누어질 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형태의 나눔이다; 그것은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형태의 공존, 흐름의 동시성이다."(Bergsonism, 81) . . . 우리를 내적인 지속으로 이끄는 것은, 공존하는 요소들이 서로 동시에 붙들고 흐를 있는 3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흐름의 동시성" 본질적인 측면이다. . . . (들뢰즈가 Cinema에서 언급했던 Dividual 문제 역시 이와 같은 뜻이다) . . . .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의 다원론과 일원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일원론은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한 현실적 흐름들(일반화된 다원론) 있다. 흐름들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잠재적 전체에 참여하고 있다(제한된 다원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유일한 시간이 있다(일원론). . . . 잠재적 다양성은 하나의 단일한 시간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잠재적 다양성으로서의 지속이 바로 단일하고도 동일한 시간이다."(Bergsonism, 82-83).

Posted by huun

베르그송은 생명의 미시적 운동이 전체 진화과정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일 수 있는가를 한 가지 예를 통해 이론적으로 논증하였다. 물론 그는 실제의 운동이 양적으로 추상화됨으로써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아킬레스는 실제로 어떻게 거북이를 추월할 수가 있는가? 사물의 운동을 공간화해서 이해하는 수학적 방식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운동을 직선 위의 무수한 점들의 통과와 이행으로 이해한다면(우리는 실제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운동하는 사물은 직선 위의 무한수의 점들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실제적인 이동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쏜 화살은 과녁에 도달 할 수 없으며,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와는 반대가 아닌가? 우리는 실제로 과녁에 도달하는 화살을 본 바가 있으며,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완전한 이행 또한 경험한 바가 있으며, 거북을 추월하는 아킬레스를 보지 않는가? 이론과 경험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을 그리고 나아가 사유의 양(量)적인 메커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했던 질문이다. 실제의 경험에 대해 이론적 한계에 직면할 때, 필요해지는 것은 그 경험을 설명해줄 하나의 연역이다. 이 부분에서 베르그송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존재의 생성(진화)과 지속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운동에는 구별되어야 할 두 수준이 내재되어 있다. 한편에는 양적으로 분할 할 수 없는 운동 그 자체(운동성)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이 있다. 운동성이란 순수한 질 혹은 강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측정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궤적)을 운동 그 자체와 혼동한다. 여기에 바로 엘레아 학파의 오류가 있다. 그들은 운동하는 아킬레스로부터 질적 운동성을 제거하고 아킬레스와 거북이 지나간 궤적을 운동 자체와 혼동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의 서로 다른 질적 운동을 동질적인 공간에서의 동질적 운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운동 중에 있는 물체를 상상적으로 정지(imaginary stop)시켜놓고 보면, 그 물체가 지나간 공간(거리)를 운동과 동일한 외연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킬레스의 운동은 동질적인 공간 속에서 앞서가고 있는 거북의 운동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한 점과 다른 점의 거리를 균등 분할하여 측정할 수 있듯이, 운동 역시 그것이 지나간 좌표의 점들의 이행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엘레아 학파] 아킬레스 전체의 운동을 아킬레스의 운동이 아니라 거북의 운동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거북을 쫓고 있는 아킬레스가 아니라, 동일한 종류의 발걸음으로 동시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두 마리의 거북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Henri Bergson.
Time and Free Will. Eng trans by F. L. Pogson. New York, 1921. p. 113)


실제의 운동은 좌표 위에 결정되어 있는 수학적 의미의 점과는 다르다. 하나의 순간으로 즉 움직이지 않는 점으로 파악되는 운동은 우리의 지성이 재구성한 결과이지, 단숨에 일어나는 실제의 운동은 아니다. 아킬레스를 추상적 존재로 파악할 때, 즉 부동하는 점들을 소극적으로 통과하고 있는 수학적 존재로 이해할 때, 우리는 아킬레스를 거북과 동일한 방식의 걸음을 반복적으로 내딛고 있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두 마리의 거북이란 그런 의미이다. 존재들의 운동이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은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질이 된다. 그러나 실질적 존재로서의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방식의 적극적인 노력, 직선 위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노력을 취하지 않겠는가? 이 노력이란 거북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 자신만의 독자적인 발걸음으로 구성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들은 동일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수준의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 다른 운동을 취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아킬레스와 거북의 한 발 한 발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의 점들간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운동이 공간의 이동으로 환원되고 나면, 실제적인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제의 운동이란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이행과 생성일 것이다. 그것은 운동체만의 이행과 생성일 뿐만 아니라, 운동체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 전체의 이행과 생성이다. 그래서 그 한 발은 아킬레스와 거북 사이에 놓인 장(field), 즉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포함하는 그들간의 관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그 변화란 그들의 의식을 넘어서 있다. 나아가 이것은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이는 공간적 운동에만 관련되지 않는다. 유년기에서 청년기 혹은 성년기로의 성장과 같은 존재의 질적 변화에도 동일한 공식을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운동에는 운동하는 사물이 연속하여 지나온 각각의 위치 이상의 것이 있으며, 하나의 생성에는 순간 순간 통과하였던 (정태적인)형상보다 더 한 이상의 것이 있으며, 형태의 진화 또한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잇따르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 Eng trans by Arthur Mitchell (New York: Random House, 1944). p. 343.)


위의 논거를 약간 변형시켜 보면, 우리는 베르그송과 맑스의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은 우리의 무능력을 예증한다. 추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심지어는 우리 앞에 놓인 대상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우선 추상은 존재를 정지된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고립시켜 놓으면서 출발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지된 존재의 실제적인 이행과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그 존재 외부의 원인으로서의 초월적 실체를 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부정(negativity)으로 결정하는 추상은 바로 노예상태를 전제로 한다(맑스는 이를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두 원자론의 차이로 설명한 바가 있다. 참고로, 칸트나 버크(Edmund Burke) 그리고 료따르나 들뢰즈가 논의했던 숭고미와 추상충동에 대한 문제는 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존재란 바로 (실제로 운동하는 아킬레스처럼)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의해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쓰는 존재이다. 인간의 노예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이미 맑스가 역사적 수준에서 정식화했던 이 내재성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더 근본적인 수준 즉 생명의 진화의 문제로 파고들었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