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4/04 동물의 울부짖음 (6)
  2. 2009/01/28 어색한 포즈와 불안 (15)
  3. 2007/09/20 세이렌(Seiren), 즉 포스트모던 신화
  4. 2006/08/20 은행에서 본 어느 조각상

수 주? 아니 수 개월 전 어느 날, 마치 헤롤드 핀터(Harold Pinter)의 난입극을 보는 것처럼, 개도 아니고 돼지도 아닌 기묘하게 생긴 두 명의 짐승들이 난입해와 꽥꽥 거리며 울부짖는 통에 잠을 설쳤다. 그 울부짖음은 고통스러워 보였고, 쌓여있던 무엇인가를 내 뱉는 성토 같아 보였고, 어떤 점에서는 애처로워 보였지만, 울부짖음의 덩어리가 가지런히 분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무지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는지, 무엇을 내뱉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카프카의 동물들처럼, 그 소리는 그냥 거기에 "어떠한 고통의 울부짖음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분절되는 소리를 낼 수 없는 동물들은 또한 분절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므로, 나 역시 그 울부짖는 소리에 아무런 응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시도를 해볼까 했지만, 그들은 들을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내 소리에 자극을 받아 더 꽥꽥 거릴 것 같았다. 단지 그 소리가 잦아들어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울부짖음의 본질은 그 동물 자신이 왜 울부짖고 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울부짖음의 코믹함이란 바로 울부짖음 자체가 울부짖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 울부짖는 이유를 스스로 알게 될 때, 울부짖음은 멈춘다. 그것을 알게 될 때까지 울부짖음은 계속되거나, 아니면 몽둥이나 어떤 두려움 때문에, 혹은 대부분은 스스로 열기가 빠져 사그러들 뿐이다. 사그러들고 나면, 마치 발광을 하다가 꽁무니를 빼는 똥개나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쳐버린 어린아이처럼, 머쓱한 표정으로 갈길을 가는 것이다. 울부짖음을 들으며 내가 혼란스러워지거나 정념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사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울부짖음에 화가 나지는 않는다. 단지 성가시거나 당혹스러울 뿐이다. 고통이 있다면 어떤 크고 작은 상실감 이랄까? 그러니까 마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사고를 당해서 내 물리적 몸의 한 부분을 잃었다든가, 물건을 잃어버렸다든가, 하던 일을 방해를 받았다든가 하여, 돌이킬 수도 후회할 수도 없이 벌어진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종류의 상실감. 혹은 본의 아니게 어떤 고약한 소동에 휩쓸리고 난 후의 당혹감.

울부짖음을 듣고 있자니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다가 난데없이, 혹은 내가 어쩌다가 본의 아니게 개를 자극하게 되어, 개가 달려들어 나를 물었다고 가정해보자. 충동을 누를 수 있는 이성의 힘이 우세한 사람이라면 말을 하거나 달랠 수 있겠지만, 개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개의 충동은 오로지 몽둥이 외에는 막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몽둥이가 주변에 없다면, 혹은 몽둥이를 집어들 겨를도 없이, 막무가내로 달려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기 위해 나 역시 개가 되어 악착같이 물어뜯고 싸워야 할까? 아니면, 힘이 닿는 한에서 적당히 피하고, 적당히 물리치고, 적당히 대응하면서 최대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할까? 아니면 개의 충동이 누그러질 때까지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할까?

분절 없는 정념에 사로잡힌 울부짖음은 어떤 덩어리처럼 나오기는 하지만, 항상 비틀려 있고, 가운데가 뚝뚝 잘려져 나가 있으며, 파편들이 나뒹굴고, 하나의 울부짖음이 다른 울부짖음으로 파고들어, 분절의 모든 가능성들을 차단해버리고, 중간과 중간을 뚝 잘라 부스러기들로 만들어 버린다. 정념과 충동은 모든 자연을 부스러기와 파편들로 향하게 하고, 또 모든 자연을 조각 내고, 그렇게 잘려져 나간 부분대상들에 모든 총력을 기울여 그 대상을 숭배한다. 그래서 분노는 맥주병이 되고, 원한은 칼날이 되고, 슬픔과 억울은 고층빌딩의 난간이 된다. 이것이 바로 충동이 이들을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단지 직접적 가해, 공격, 상처들만 나뒹굴게 하는 이유이다.

생명에 위협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나 역시 본능적으로 악착같이 물어뜯게 될 것이다. 이 위협과 공포에 대한 본능적 반응 때문에, 화와 충동에는 항상 약자의 가련함이 있다. 저 동물들의 울부짖음 역시 어떤 공포와 고통의 산물이 아니겠는가?(그러나 궁금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모든 자연적 공포가 말살된 이 대도시에서!) 결국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을 때, 정념에 사로잡힌 혼란에 뒤섞이지 않으려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수 밖에 없다. 소란은 반드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정념의 혼란은 지속적이지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무게도 없다. 그것은 한 순간의 끓어오르는 수증기의 부글거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은 속을 비우고 난 공허감, 과거 오래 동안 삭힌 냄새를 풍기며 몸 밖으로 빠져나와 버린 질척한 국물, 충동의 소란이 휘젓고 간 후 잘려져 나간 부스러기와 파편들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아무리 애처로워 보이고, 당장에 임박한 문제가 그들의 고통을 누그러트리는 문제라고 해도, 결코 그들과는 뒤섞일 수도, 뒤섞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서둘러 도망을 가야 한다.

Posted by huun

동(洞) 사무소나 구청 같은 곳을 가보면, 어딘지 내 자신이 어색한 포즈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이곳에 왔는지를 떠올리며 두리번거리거나, 나의 용무를 맡아줄 공무원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하거나, 어떤 서류를 집어 들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라면 익숙해지겠지만, 그곳은 언제든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부름에 의해 가게되는 곳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잊고 지내는 곳이며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마찬가지로,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나 새내기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저와 같은 어색한 포즈들을 금새 발견할 수가 있다.

이는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더 절실히 느껴보았을 것이다. 훈련병 시절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 행위가 끝나고 나면 어떤 행위를 해야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 동작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또는 다른 무엇인가의 요구였다. 군대가 훈련병들에게 반복해서 숙지시키려는 것은 개인에 앞선 체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군대는 개인에게 모든것을 포기할 것을 끊임없이 권고한다. 이런 이유로 거의 모든 초년병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색한 몸짓은 바로 의지와 포기의 딜레마에 처한 한 개인의 망설임에 기인한다. 고참이 된 후 내 동료는, 뽀얀 살결을 드러내며 잔뜩 겁에 질려 막 들어온 초년병을 보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신참들은 왜 저렇게 한결 같이 똑같지? 다들 겁먹은 얼굴을 하고, 사지가 얼어붙어 뻣뻣하니 말야! 저 우스꽝스럽게 걷고 있는 놈들을 좀 보라구!"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 의기양양함 이면에는 포기하기로 작정한 한 인간의 서글픔 같은 것이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uderborg)가 감독한 <카프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카프카는 문서의 형태로 성(城)의 부름을 받는다. 여차 저차 하여 그는 성의 문서고에 있는 서랍장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성에 들어간 카프카의 행적을 담은 몇 개의 시퀀스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신병이라도 된 듯이, 아니면 동사무소에 막 들어간 우리 자신처럼, 여기저기를 서성이며 수상한 포즈를 연출한다. 누가 자신을 부른 것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 . .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들키지나 않을까 숨어보기도 하고, 인기척이 들리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얼어붙는다.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제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는 대체로 저 어색한 포즈를 욕망의 언어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몇 안 되는 연기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서툴고도 수상한 포즈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언제든지 그 불안은 서스펜스를 불러들이며, 이 영화가 주는 재미란 바로 그 서스펜스에 있다. 히치콕(Alfred Hitchcok)은 서로 관계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던 두 힘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는 경향성을 띠고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거나, 균형 잡힌 계획이 깨어질 것을 예고하는 방식으로 서스펜스를 창조한다. 인물들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면서, 한 편에는 이와 동일한 양의 반 테제의 힘에 직면한다. 가령, <이창>에서 범인을 속임수로 유인하고 그의 집에 숨어들어 증거를 찾는 장면이라든가, <사보타지>에서 길 한가운데 멈춘 자동차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다른 자동차의 서스펜스라든가, 자유의 여신상에서 하강운동과 상승운동을 봉합했던 소매가 점점 튿어지는 쇼트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가 파국에 대한 관객의 두려움을 담보로 하여 숨막히는 줄타기 곡예와도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그 서스펜스의 심층에는 불안이 내재한다. 물론 그것은 인물의 불안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관객, 즉 그 곡예를 목도하고 있는 자의 불안일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의 불안한 눈빛은 도래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은 그 자신의 것이기보다는(이미 그는 목격하고 있으므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불안을 의미한다.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항상 프레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언제든지 저 바깥쪽이 문제이다.

따라서 수상하거나 서툰 몸짓은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예증하고 있다. 어떤 두려움? 익숙한 것, 자동화된 것, 매끈한 것이 파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대부분의 서스펜스 장르는 자동화된 현실과 그 파국이라는 두 테마를 하나의 구도 안에서 동시에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예로, 이 불안과 두려움을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표현했던 사람이 바로 채플린(Charlie Chaplin)이다. 그는 순수하게 유쾌한 유머를 구사했던 사람은 아니다. 채플린의 웃음에는 통쾌함이 있기 이전에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유쾌한 해학은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맨 나중에 모든 것이 파국으로 돌입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 파국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사람이 히치콕이라면, 채플린은 이를 기꺼이 드러냄으로써 불안을 웃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예로, <모던 타임즈>에서 떠돌이의 서툰 몸짓은 제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 나사못이 됨으로써, 생산라인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에는 공장 자체를 파괴하게 된다. 그는 자동화된 몸짓(혹은 사유)을 불안과 견주어 지연시키는 대신에, 궁극적인 파국을 통해 그 자동성을 비웃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카프카나 히치콕 혹은 채플린의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은 파국적인 상황에 대한 예고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상한자를 발견하는 일이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을 주로 매체나 허구를 통해서만 경험한다. 그리고는 이 경험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주로 매체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것에 대한 환각을 통해 어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환각적인 것이 현실적인 믿음이 되려면, 우리 자신의 현실이 자동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환각이 더 현실적으로 보일수록 우리는 이미 모든 것에 익숙하게 행동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일상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길거리를 다니고, 출근을 하고, 지하철에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을 보라. 수상하거나 어색한 몸짓의 소유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공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어디를 가든 이미 수상하거나 서투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낯선 공간에서조차 금새 그 코드를 해독하여 익숙해 질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흄(David Hume)이 과학적 현실에 대해 그렇게 말했듯이,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물이 떨어지고, 별이 뜨는 것처럼, 확고하고도 안정적인 현실을 만드는 것은 바로 반복과 자동이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라든가, 러시아 형식주의자라든가, 아니면 벤야민(Walter Benjamin)이라도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현대의 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이 예술을 통해 낯선 장치(alienation)들을 고안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익숙하여 자동화된 소외(alienation)에 대한 의식의 대항이었다.

익숙함이 몸에서 일기 시작하면 모든 일들이 마치 죽음 본능에 마취된 듯이 너무나 쉬워지며 편안해 진다. 그러나 이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그와 동일한 양의 불안과 공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공 교육이 한창이던 내 초등학교 시절 최대의 사건은 간첩에 대한 소문이나 삐라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뿐 아니라 지금도 역시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반공체제의 편안한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간첩이나 삐라는 반드시 있어야한다. 그것은 마치 공통의 적(敵)이 설정되고 나면 우정이 돈독해지고, 나아가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공통의 적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한 허구나 조작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환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언제든지 불안과 공포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면서도 요구했던 것이다. 불안의 강도는 바로 저 편안한 육체의 강도와 정확히 비례한다.

Posted by huun

사실은, 예술의 기능을 그 본질과 동일한 위상에 놓았던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한 희랍신화를 새로 번역하는 가운데 예술의 기능에 대한 그의 심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바로 오디세우스(Odysseus)와 세이렌(Siren)의 한판 대결에 관한 그의 코멘트(혹은 의문)가 그것이다. 그의 의문은 아주 간단한데, 요점은 이러하다: 오디세우스는 거짓말쟁이가 아닐까? 세이렌이 그 매혹적인 노래를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가 그 유혹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세이렌은 죽었고, 선원들은 귀가 막혀 있었고, . . . 돛대에 사슬을 묶고 그녀들의 노래를 들었다고 주장한 것은 이제 오디세우스뿐이지 않은가?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잊지 않는다.

    이 천하 무적의, 닳고 닳은 여자들이 아무런 행동의 자유도 없는 사람들에게 정말 자기들의 예술을 낭비했을까?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 마녀들이 뭔가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 것처럼 뱃사람들이 본 것은, 실은 그녀들이 그 째째하고 소심한 촌놈에 대해 욕을 퍼부은 것이었으며, 우리의 주인공은 그래도 결국은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짐짓 몸부림 친 것이었다고 믿고 싶다.(『상어가 사람이라면』, 한마당, 1993. pp.23-24)

결국은 예술의 기능에 관한 문제가 되겠지만("예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보다도 우선 예술의 실현에 있어 그가 필요로 했던 것, 즉 예술의 조건은 바로 살아있는 관객이었던 것이다. 밀랍으로 틀어막아 아무것도 들을 수 없고, 쇠사슬로 몸을 묶어 소리 나는 쪽으로 접근할 수조차 없는 반수면 상태의 식물인간들에게 예술은 무슨 예술! 그래서 그는 무대 위에 끊임없이 낯선 장치들을 고안한다(중국 경극이나 스타니슬라프스키로부터 착안한, 행위의 분리, 대사의 인용, 인위적 연기나 제스처, 서사의 역사화 등). 그의 시도들을 현실과의 단절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무디어진 지각과의 단절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더 그럴 듯하게 무디어진 지각이 주조해낸 현실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불러야 할지. 어쨌든 어떤 경우든지, 그의 단절 프로젝트는 지각이든 현실이든, 그 도식으로부터의 깨어남이었고, 마치 하이든의 교향곡처럼, 수면상태의 관객을 깨우는 일이었다(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잠이 들지! 혹은 그들의 관객은 언제까지 잠을 자고 있을지!). 알튀세(L. Althusser)의 술어를 빌자면, '다중적 모순으로 충만한 실재'로의 외출이랄까? 그것은 마치 빔 벤더스(Wim Wenders)가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1987)에서 보여주었듯이, 모순 없는 영원한 시간 속에 살던 천사 가브리엘이 인간이 된 바로 그 순간부터 직면해야 했던 충돌이라든가, 아니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역시 빔 벤더스가 『사물의 상태(The State of things)』(1982)의 초반 시퀀스에서 보여 주었듯이, 감독의 "컷(Cut)" 소리가 들리는 순간, 모든 인물들과 스텝들이 텍스트 밖으로 빠져 나와, 냄새가 나고, 시야가 트이고, 모순으로 충만한 대기의 소란한 충돌소리가 들렸던 것과 정확히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브레히트의 말은 바로 예술이 그 순간을 열어 젖혀야 한다는 것이었다.(문학에서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 그리고 그 유명한 영화적 충돌의 신화를 만든 에이젠슈타인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브레히트가 고전시학 혹은 모방시학에 가한 그 비판이란, 따지고 보면, 그것이 너무나 진부하다는 것,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쏟아지는 하품과 그 찔끔거리는 눈물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무대 위에서도 보라고? 맙소사! 흉내 낼 것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 그것은 자연의 실상이 아니라, 그 도식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권력관계를 깨지 않고서는 실상에 도달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려면 당신들의 그 몽롱한 상태로는 불가능해! 일어나라고! 일어나! 어쨌든 브레히트는 살아있는 관객이 필요했고, 상연도 하기 전에 예술이 떠맡은 임무, 즉 졸고 있는 관객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 임무가 예술의 본질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시대, 후기 공장 자본주의 시대에 예술이 처한 조건이었으며, 세이렌에 관한 브레히트의 정치-경제-예술론이 의미했던 바이다. 사실 그 때만 해도 희망은 있어 보였을 것이고, 심지어는 생산력의 최대화라고 하는 그 시대의 야심 혹은 적의 구호에 몸을 싣고, 승리감에 도취된 전진 퍼레이드에 동참하는 것도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본질이 그러한 임무에 있다면, 한 가지가 궁금해진다. 관객이 잠에서 깬다면, 즉 밀랍이 뚫리고 밧줄이 풀어져 행동의 자유가 생겨났다면, 예술은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실상, 살아서 저기에 저렇게 뻣뻣이 눈 부릅뜨고 깨어있는 관객이라면 굳이 예술이 필요할까? 그랬다면 예술은 그 기능과 본질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브레히트 말대로 만일에 세이렌이 진정한 예술가였다면, 바로 그러한 과업, 저 무지한 뱃놈들을 좀 깨우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당시에 밀랍에 귀가 막힌 선원들이나, 우리 자신은 들은 바가 없으므로, 오디세우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세이렌은 실패했다. 노래가 쳐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관객이 수면제를 먹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예술은 아무 문제가 없단 말인가?

카프카(F. Kafka)? 그는 물론 예술가이고(브레히트보다도 더), 전혀 다른 관점의 소유자이다. 브레히트는 카프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카프가가 본질에 접근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본질(특히 시대를 초월한)이란 행동 속에서가 아니라 관조 속에서만 드러나기 마련이다. 카프카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행동과 실천의 범주들 속에서 사유하는 정신은 카프카와 같은 식물학적 관점의 예술론이 변태스러워 보였을 것이고, 혹은 동물들의 울부짖음이나 식물들의 잠재적 운동처럼 지각이 전혀 불가능한 소리였을 것이고, 따라서 브레히트 자신의 야심찬 단절 프로젝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프카 역시 세이렌을 예술가로 생각한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만 그는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줌의 밀랍과 한 다발의 밧줄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유치한 수단을 가지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단-순-진-무식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뚫어 버리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 무엇으로도 당해낼 도리가 없는 교만, 자만심이라고. 브레히트 말마따나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욕을 해대고 있었는지(브레히트 자신의 욕이기도 한), 아니면 밀랍과 밧줄만을 꽉 움켜쥔 오디세우스의 도취된 자만 혹은 단호함에 말문이 막혀서인지(이렇게 놓고 보니 카프카 역시 브레히트와 그 다지 멀리 있지만은 않다), 어쨌든 세이렌은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침묵을 하고 있었다고. 오디세우스의 눈에 비친 그녀들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호흡을 내쉬며", "눈물이 고인 눈"과 "반쯤 열린 입을 통해"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던 것은, 승리감의 지속을 위해, 그 교만을 보증하기 위해, 그 판타지와 공모하여 자신의 시(視)-지각-기억이 만들어낸 어떤 환각이 아니었을까?

예술가는 침묵하는 존재이다. 심지어 그가 노래를 부르고, 문장을 지으며, 표현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본질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 교만에 빠진 우리는 침묵을 바라보며 성급해지고, 그러다가 감춰놓았던 것을 우리 스스로 폭로해 버리고, 석연찮은 승리감으로 주춤해 한다. 그렇게 침묵 속에는 교만한 정신의 생장과 소멸의 드라마가 있다. 무서운 것은 세이렌의 노래가 아니다. 소수자(minor)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언어는 바로 침묵이다―가령, 테오 앙겔로풀로스(Theo Angelopoulos)가 <울부짖는 초원(Trilogy: The Weeping Meadow)>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 바로 소수자의 침묵과 아코디언 연주의 상동관계처럼. 그 침묵의 소리가 단-순-진-무식이나 권력에 미약하나마 흠집을 내고 해를 가했다면, 그것은 대기에 퍼진 어떤 불안 때문일 것이다. 세이렌은 침묵을 들을 수 없는 교만한 정신의 소유자를 어떻게 대했는가?

    ". . . 그 섬뜩한 머리카락을 온통 바람결에 나부끼게 했고, 바위 위에서 발톱을 한껏 드러내놓고 힘을 주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유혹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오디세우스의 커다란 두 눈이 뿜는 빛을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변신(카프카단편전집1)』. 솔 출판사, 2003. p575.)

그러나 이제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얘기로 돌아와서. 우리의 무대 위에 서 있는 예술이란 과연 어떤 예술이란 말인가? 브레히트가 생각했듯이, 잠든 관객을 깨우는 예술? 아니면 카프카가 보았듯이, 식물과도 같은 침묵의 운동 속에서, 권력과 체계와 그 교만을 또렷이 주시하는 예술? 우리가 처한 실상에 따라, 나는 이렇게 말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세이렌이 실패를 했다면, 그것은 뱃사람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다고. 그들은 죽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잠든 것도 아니었다고. 교만은 더욱 아니었다고. 그와는 반대로 귀를 틀어막고, 몸을 칭칭 감아, 화려하고도 요란한 유혹들을 거부했던 것이라고. 화끈한 도시의 플레이보이가 유혹에 취해 한판 멋지게 놀아 보려다, 빈 주머니로 머리를 쭈뼛거리며 나오지 않으려면, 바로 저러한 결연한 단-순-진-무식이 아니면 안 된다고.

브레히트의 주문과는 달리, 우리 사회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오히려 아무 일도 안 하고 버티는 일, 귓구멍에 밀랍이 아니라 시멘트를 발라서라도, 그 유혹들을 듣지 않는 일이 아닐까? 수렁에 빠진 뮤즈의 딸 세이렌의 노래는 예술이 아니라, 바로 딴따라였다는 것! 그래서 그녀들은 더 이상 가여운 요제피나(Josephina)라든가 죽어가는 단식광대가 아니라, 대머리에 배 나온 율리시스(Leopold Bloom)가 드나들던 Ormond Bar에서 호객을 하며, 손님을 위해 젓가락 아니 포크와 나이프를 두드리며 몽롱한 노래들을 반복해서 불렀던 호스티스 미나(Mina Kennedy)와 리디아(Lydia Douce)였다는 것! 오디세우스의 그 단호함(그는 집에 가서 빈대떡을 붙여먹고 싶었던 것이다)에 좌절했던 것은, 그녀의 예술혼의 좌절이 아니라, 호객의 실패였다는 것! 더 이상 구매자가 없어, 더 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아, 굶어 죽어가며 화장한 얼굴이 추해질까 봐 자살한 것은 아닐까? 소비유혹('당신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욕망의 조작과 단일화('삶을 드립니다!', '아름다운 세상!', '편리한 사회!',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그리고는 결국 다양성의 부정, . . . 이러한 것들이 바로 소비사회의 음모이고, 이 음모 속에서는 구매만 잘하는 관객이면 만사가 오케이! 아니면, 보다 고급스러운 취향을 선택할 줄 아는 관객, 그래서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이윤이 높은 상품을 구매할 만큼은 깨어있는 존재, 한마디로 말해 도시적 취향의 세련된 관객이 필요한 것이다. 고다르(Jean Luc Godard)가 자신의 영화 『카르멘(Pre'nome Carmen)』에서 보여 주려고 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카르멘이라는 여인이 가진 아름다움의 바로 그 현대적 실체! 다시 말해 매디슨 애비뉴(Madison Avenue)의 끔찍하고도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한 심리학과 그 정신조작기술(psychic technology)에 의해 서서히 우리에게 역하(subliminal) 이식되고 있는, 그 진부하고도 판에 박힌 모델,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실체! 눈을 보지 마라! 걸려든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두 눈을 똑바로 떠서, 그 상투적 아름다움에 가려진 썩어가는 속살을 보는 일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반수면 상태의 우리를 홀리고 있는, 더욱 더 그 진부함의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눈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시대에 브레히트의 바램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공장 자본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그의 세대는, 우리처럼 쇼핑몰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다소 비관적인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감독의 컷 소리가 우리를 영화 밖으로 나가게 해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얼핏 보기엔 이사야의 예언과 비슷하게(실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빌로니아 카페 앞에서 도깨비처럼 화장한 세이렌들의 춤판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차라리 영화보다도 더 영화적인 현실, 더 이상 모순이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충돌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현실이 촬영로케를 빠져나오면 찬란하게 펼쳐진다(백화점, 쇼우 윈도우, TV, 쇼핑몰, . .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화의 판타지를 내면에 아로새기는 훈련장, 학교!). 예술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관객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술 자체의 딴따라 기질이 아닐까? 대중문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도 더 포퓰러한, 고급의 탈을 쓴 딴따라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생포되어 오히려 선봉이 되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총알받이가 되어, 첨병이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 예술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잠든자! 더 정확히 말해 아무런 불평 없이 예술을 소비해줄 구매자를 필요로 한다. 관객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취향과, 그러한 관객을 양산하기 위해 이런 저런 교육이 필요해지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신장 개업집 앞에서 한 짐을 풀어놓고 풍선을 날려가며, 저것이 경찰차의 협박 사이렌인지, 구급차의 공포의 사이렌인지, 소방차의 야단법석 사이렌인지, 아니면 짐 모리슨(Jim Morrison)이 무대 위에서 딸딸이를 쳐가며 중얼거리던 최면의 싸이키델릭 사이렌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요란한 사이렌을 울려가며, 배꼽을 드러내고, 어수선한 도시 한가운데 왠지 모를 황량함이 깔린 아스팔트 위에서, 도대체 저 아이들이 누구를 위해 저렇게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 자신을 위해서인지, 고객을 위해서인지, 업주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신-민족성을 위해서인지, 짐 모리슨을 위해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도취된 표정과 몸부림으로 흔들고 있는 나이 어린 세이렌들과, 어떤 어떤 거대한 상인들에 고용되어(딴에는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량을 올리기 위해 떠들어대는 그들의 허풍과 과분한 찬사에 도취되어, 펜이나 붓을 휘저어대며, 문학상이나 비평가상이나 또 여타 무슨 무슨 상-수상-생산품을 제조해내는 자칭 뮤즈들과의 차이를, 나의 오성으로는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다.

카프카가 생각했던 침묵하는 예술가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침묵을 들을 수 있는 경야(經夜)의 관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로지 스켄들을 암묵적인 모토로 삼으며 아무 뜻도 없는 쓰레기 같은 수다로 인생을 허비하는, 뉴스나 미디어의 주체가 바라는 세계를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세이렌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던 신화에 관한, 비관적인, 그러나 실상의 지도이다.



<문예노트>
Posted by huun

은행에 가면 많은 사람들과 기계들의 소음으로 복잡하고 분주해 보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매우 단순한 동작만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고객은 번호표를 뽑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례를 그냥 앉아서 기다린다. 이 절차는 입구에서 의자까지 나아있는 직선코스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 갈지자로 걷는다든지, 두리번거린다든지, 암묵적인 규칙이 우리의 심리에 그어놓은 선을 벗어나서 사선으로 이동 한다든지, CCTV의 외화면(offscreen)으로 빠진다든지 하는 일 등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별 탈 없이 살고 싶은 우리들로서는 말이다. 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을 필요도, 그럴만한 일도 없다. 그냥 돌아가는 디지털 번호표만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의 번호가 찍히면 직원에게 다가가 사무를 보면 된다. 대체로 그 사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지서에 적힌 금액과 지불한 현금의 기계적인 산술을 넘어서지 않는다.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참 동안을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다보니 직원들 역시 모든 일들을 계산기로 해결한다.


간혹 직원이 예상한 결과와 계산기가 내 놓은 결과 값이 일치하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고가 일어나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므로, 곧바로 수정하거나 배제해 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연한 사고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들을 제외하고 나면, 은행 직원들은 거의 하루 종일 숫자들을 반복해서 두드린다. 머리가 복잡하면 일을 그르치게 되므로, 머릿속을 텅 비워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계산하고 도출하고 다시 계산하고 지불하고 수금하고 다시 계산하고, . . . 계산기를 두드리는 여직원의 희고 고운 손등과는 대조적으로, 그 아래쪽은 움푹 패인 손가락 마디들이 시커멓게 줄이 가 있어, 그 동안의 기계적인 몸짓이 그녀의 자유롭던 영혼에 아로새겼을 흔적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흔적의 증거일까? 고객이 다가가면 왜 왔는지 궁금해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면 그 흔적에 대한 그녀 자신의 시위일까?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는다.


모든 일들은 서류들로 처리되고 그 서류에는 고객들의 얼굴색과 시큰둥한 표정조차도 약속된 기호들로 연산되어 기록된다. 그러다보니 고객은 자신이 지나치게 평준화되어 다루어지는 것에 불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은행과 같은 곳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첫 번째 목적은 모든 의심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거나 의구심을 갖는 모든 행동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편안한 안도감을 취한다. 편안한 삶이 대체로 안정된 자연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가 피타고라스주의자가 아닐까? 또 그 안도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한 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것이 보인다면 오히려 머리에 쥐(경련)만 날 뿐이다. 은행과 같은 곳에 가는 두 번째 목적은 바로 단순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은행의 광경만큼 현대인의 악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도 없다. 사실 그 악몽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우리는 감각의 굳은 정도가 생각보다 심하다. 모든 의례적인 것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자행되는 행동들! 일상적이고도 상투적인 수순들! 어느 하나 위험할 것 없는 예측된 동작들! 사선과 빗금의 부재 혹은 거부! 탈선의 결과 혹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따라서 그저 다소간의 권력에서 비롯된 다소간의 우쭐함! 또 그에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샛노란 냉소에 깃든 새하얀 권태! 그리하여 아무런 일도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버림받은 개인들의 지긋 지긋한 인생! 그 자리에서 번호를 기다리고 있는 몇 십분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의 시선과 주의를 잠시만이라도 잡아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들의 불행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불행. 넓은 창으로 난입해 온 빛이 너무 눈이 부셨던 탓일까? 저 앞의 모든 군상들은 그 빛 속에 휘감겨 부드러운 윤곽선 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듯 했다. 나는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가 세끼니 제공되는 토끼를 보며 느끼는 권태만큼이나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또 저들 역시 자신만의 정해진 궤도만을 묵묵히 따르고 있을 뿐, 누군가의 시선과 관심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화의 사회적 생산을 최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국가적 사활이었던 시절에는 저 묵묵함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미간에서 종종 그 미덕을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묵묵함이란 그 시절의 낭만적 집단주의의 침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아닌가? 지금의 권태는 어쩌면 그 시절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무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시 동안의 7, 80년대식 히스테리에서 치유되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일까? 20대 후반의 몇 몇 후배들은(아마 70년대 후반에 태어나 90년도 후반에 대학을 다녔을) 자꾸만 자신들의 자살에 대한 언급을 유행처럼 하곤 했는데, 그것은 사회적 혹은 개인적 불의에 대한 반동이 아니었으며, 권태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적극적(혹은 소극적) 반항조차도 아니었다. 반대로 그 자신의 삶을 반동적 충동을 통해 재확인하고, 심지어는 자살 충동조차도 그 삶의 일부로 용해시켜 버리는 블랙홀과도 같은 권태의 완벽한 수행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담(自殺談)만큼이나 지루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유사-마조히즘(pseudo-masochism)이라고나 할까? 날기는커녕 날갯짓 시늉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몸에 상처는 고사하고 칼날조차 세우지 못한 것이다. 반동조차도 아닌, 무한한 되돌아오기 자체인 그것은 하품이 그렇듯이 전염성이 있다.


은행이나 대기업과 같은 공공 기관에 예술 작품이 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 장식으로 이용되면 그 공간은 그럭 저럭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로 연출된다. 이것이 저 기관 구매자들의 최종적인 바램일 것이다.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그 바램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의 장식은 주변 경관이나 실내의 다른 장식들과 어우러져 용해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두드러져 보이거나 특이한 시선을 끄는 장식은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전체 공간의 한 부분이 되어 그 공간 전체의 수준에서 계획된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목적. 고전 미학은 '아름다움'을 정의할 때, 일치된 감정이라든지 혹은 능력의 합목적성과 같은 개념들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것과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적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는 정확히 위에서 말한 장식으로서의 바람직함, 즉 저 구매자들의 바램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 건물에 세워진 조각상과 그 벽에 걸린 그림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참 동안을 감상하거나 주시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경비원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무의미한 짓일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놓여진 원래의 목적과도 상충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만 파악되어, 그 자체의 고유함이 드러나지 않은, 돌출될 위험이 거의 없는, 격자로 구획된 선분을 따라 고통없이 아름다움에 이르는, 그리하여 우리가 은행에서 보게되는 직원과 고객의 시선에 깃든, 부드러운 빛과도 같은 편안함을 주는 예술작품. . . . 한마디로 버려지는 것이다. 유기성, 역사, 구조와 같은 개념들과 나란히 놓이게 됨으로써, 예술작품은 어떤 전체의 상관적 좌표 속에서 버림받는다. 이것이 은행과 같은 곳의 익숙하고도 편안한 분위기가 별 탈없이 유지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만일에 은행 내부의 구석에 놓여진 저 조각상을 좀 유심히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 약간 비틀어진 모양이고, 어린 아이의 두 팔을 꼬아 놓은 듯한, . . . 메비우스의 띠 처럼 보이기도 하는, 보통 크기의 조각상이 선반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다.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 조각상을 보면서, 어떠한 질문들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은행의 소사(小事)들과 같은 부차적인 삶의 필요와는 그 근본에 있어 다른 질문들. 예를들어, 예술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저것이 무슨 형상일까? 왜 저렇게 비틀어 놓았을까? 와 같은 평범한 질문들로부터, 저것은 형상이 아니라 특질 자체가 아닐까? 부드럽지만 다소 무거운 듯한 저 색감은 아마도 나의 꿈 속이 아닐까? 어째서 존재는 비틀어진 위상 속에서만 본질적일까? 와 같은 다소 심오한 질문까지. . . . 이미 익숙한 것들만 있어 편안하고도 안전한 그러나 나른한 이 은행에서, 저 작품은 나로 하여금 저와 같은 질문들과 아울러 이름모를 경련같은 것을 일게 할 것이다. 그 작품은 생소한 물건이 아니라 이상함 자체이다. 지적인 질문 이전에 존재하는 경련상태.


사람들은 해석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을 때, 즉 애매모호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바로 저러한 경련을 느낀다. 그 발작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존재와 시간을 끄집어 내어 삶을 거대한 무게로 감당한다. 그것은 창조를 위한 일종의 준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를 포함하여 저러한 경련에 몸부림치는 많은 독신자들은 그와 같은 고독을 일종의 미학적 단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고독을 견디기 힘들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예술작품에 대해 냉소적이 된다: "저게 뭐야 ! 저게 무슨 예술작품이야 !"(이런 점에서 결혼과 냉소는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내심 알 수 없는 좌절감을 맛볼 것이다. 당혹감에서 비롯된 그들의 불평에는 진실같은 것이 있다. 예술작품은 당혹스럽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단련에 임하게 한다는 것. 어떤 단련? 예를들어,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동물에 가까운 자들의 소리를 듣게하고, 은행과 같은 곳에 나 있는 격자 무늬의 선분들 사이 사이에 끼인 고깃덩이를 보게 해주는, 혹은 주파수를 넘어간 파동을 감지하게 하는, 뭐 그런 종류의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단련. 예술은 경련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준비하게 한다(능력이라는 말은 바로 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모든 예술의 윤리적 목적일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