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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커피는 해방의 이미지와 관계가 깊다. 한동안 유럽에서 이교도의 음료로 불리던 커피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처음 커피를 마시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명성황후가 가장 애호했던 음료였다고도 들었다. 한 독일인이 정동구락부에서 커피를 팔면서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명동이나 종로 등지에 여러 다방(진고개 다방이 최초였다던가?)들이 생기게 되었고, 해방 이후 미군에 의해 대중들에게 퍼졌다고 한다. 특히 명동 등지에서 배회하던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은 다방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는 것으로 소일을 삼았으며, 카페에서 노닥거리며 신세계의 열망을 나누던 18세기 유럽의 쁘띠 부르주아지처럼, 이들에게 있어 커피 마시는 일은 신선한 바다 바람을 쐬는 일 만큼이나 이국의 취향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거의 다방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죽은 한 시인(空超 吳相淳)이 죽기 전에 남긴 방대한 양의 방명록 이름이 사실은 다방 이름으로부터 유래하기도 하였다(淸銅文學). 그가 가장 즐기던 메뉴는 허기까지 배려하여 달걀노른자를 띄운 모닝 커피였다고 한다. 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가만히 회상해보면 우리에게 있어 커피란 다름 아닌 서구(western)를 의미한다. 아시아(소위 동양)의 근대사에서 서양의 체취를 더듬다보면, 모르긴 몰라도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진하게 저 야릇한 커피향이 스며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서양의 묘한 냄새가 우리들 개개인에게 주는 이미지란 어떤 것이었나? 이 작은 반도에 피비린내를 몰고 온 야수의 이미지였을까? 아니면 다소 그늘진 그 어둠 때문에 신비롭게 뒤틀려 보이는 동양적 혼돈을 가지런히 정돈해 줄 한줄기 계몽의 빛이었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도 더, 우리에게 있어 서구의 이미지란 우선 자유분방을 환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환한 빛과는 조금 다른. . . .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인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두려운 와중에 느꼈을, 또 거기서 배운 조선의 지식인들이 다소 허위의식을 가지고 꿈꾸었을, 뭐 대충 그런 저런 식의 이국적 자유분방 말이다. 바다 넘어 그 자유분방은 꽉 막힌 한반도에, 소극적이긴 하지만, 출구 같은 것을 마련해준 것은 아니었을까? 무수한 세월을 버티고 서서 바다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도 더 가혹했던 이 땅의 모든 고귀한 가치들, 개인으로서는 그 완강함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어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을 그 고집 센 가치들, 또 그럭저럭 적응해 나가다 보면 생활에 스며들어 지루해지기 짝이 없었을 그 가치들을 잠깐이나마 잊게 해줄 출구 같은 것 말이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와, 갈 곳이 없어 헤매던 아이가 우연히 알게 된, 불량한 친구들과의 작은 환락 같은. 많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서구의 이미지란 아버지의 완강한 강요를 뿌리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혹은 피비린내의 공포와는 아주 다르게 바다 너머로부터 산들거리는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어떤 음악소리가 아니었을까?

저와 같은 의미에서 커피는 생활의 여유를 암시한다. 커피의 서구적 이미지에 깃든 부(副)와 풍요의 환타지. . . . 수 십 년간을 궁핍에 허덕이던 우리에게, 서구의 옷을 걸친 모든 것들은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최 고~급"에 속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생활의 작은 스캔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풍요의 한 결과에 불과한 커피가 우리에게는 마치 물신주의적 환타지처럼 풍요와 여유의 원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그것을 소유하고 나면 그 소유자의 모든 자격이 생기기라도 하듯이! 이러한 환유적 욕망은 특히 여성들이 더 크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서구는 저러한 긍정적인 이미지 모두를 제공해 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서구가 아니었다. 다만 답답한 이 질서를 좀 벗어나고 싶었을 뿐—정신사적 의미에서 외세(外勢)란 우리 자신의 허물이나 과오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가 아닐까? 아마도 외세에 대해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우며 강한 거부감을 보였던 이들은 그 허물 많은 답답한 질서의 주체였을 것이다—모든 면에서 궁핍했던 우리에게 커피의 본질은 바로 저 환타지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해방의 환타지. 다도(茶道)라는 이름의 다소 위선적인 절차(그래서인지 녹차는 남성의 냄새가 짙다)를 필요로 하지 않는 쾌활한 환타지. 그러다보니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버지를 닮은 남편의 얼굴을 애인이나 남자친구의 미소로 탈바꿈시키는 평등과 친교의 환타지. 이 모든 것을 몰고 오면서 커피는 거실이라는 그 자체 환타지의 공간을 열어 제친다: 흔들의자, 벽난로, 정원이 보이는 창밖, 고풍스런 Tea Table, 앙징맞은 Tea Spoon, 그에 어울리는 다소곳한 이야기, . . . 거실의 이러한 풍경을 소유하는 순간, 그녀는 이전의 그 자신이기를 멈추고 전혀 다른 인간이 되는 꿈을 꾸며 스르르 잠이 든다.

따라서 커피는 화학식 C8H10O2N4의 크산틴 구조를(그게 뭐지?) 갖는 카페인 향을 띤 음료이지만, 그 본질은 그와 같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 주변을 연기처럼 맴돌고 있는 한줄기의 환타지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물질이 아니라 자아의 환영에 도취되어 있다. 커피에 중독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깊은 나르시스의 환영을 쫓아 자기 자신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뜻이다. 문을 닫고 한 없이 들어앉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알코올 중독이나 미디어 중독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실 대부분의 중독에는 이와 같은 폐쇄적 욕망이 많이 있다. 그러나 커피는 이 욕망을 육체적 파괴라든가 다른 대상에의 정신적 의존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분위기를 통해서만 욕망을 실현한다. 혀끝의 맛으로부터 나오는 감각적 분위기 뿐만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필요한 이런 저런 준비물들을 꾸리면서, 우리는 이미 모종의 의식(儀式)과도 같은 분위기에 젖어든다. 커피는 환타지를 조성하는 환경, 즉 분위기를 만드는 가장 훌륭한 물신이다. 멋들어진 잔에, 브라운 색조의 대기(大氣)에, 세련된 이국의 향에, 우아한 손 매무새에, 쁘띠 부르주아의 여유에, . . . 뭐 이런 것들을 자신의 기억과 욕망에 담아 한껏 표현해 보는거다. 그러다가 커피를 마시며 내가 하는 일이란 나를 바라볼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묘하게도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되면서 자기 자신에 도취된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르시스가 그랬듯이. . . ! 커피는 나르시스가 선사한 멋들어진 선물이다.

젊은이들은 커피 맛 때문에 그 카페에 가지 않는다. 조명, 의자, 실내 디자인, 분위기, . . . 이런 것들이 카페를 선택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일 처럼, 단조로운 절차나 의례와 같이 지루한 습관이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곧 죽어도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저러한 물신들을 갖추어야만 한다. 아마도 최근에 가장 유행하는 카페의 유형을 잘 살펴보면,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커피를 포함하여 차를 마시는 모든 일에는 좀 더 급진적인 의미가 있다. 우선 차를 마시는 일은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실용적으로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쳐다보거나, 앉아서 생각하거나, 무엇인가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하다. 차를 마시며 하는 유일한 행동이란 그저 입을 놀리면서 해대는 손짓 정도이다. 탁상공론(卓上空論)이란 용어는 아마도 차를 마시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또 그 "탁(卓)"자는 아마도 찻상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금새라도 실현 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 자리를 뜨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화하는 일 만큼이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부지런한 일꾼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커피숍에 앉아 얘기하는 일이다. 뭔가를 해 봅시다!하고 외치며 모이는 곳이 커피숍이라면, 십중팔구 그 모임은 남녀의 밀교집단(?) 정도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차와 커피는 사람들을 동물적이 아니라 식물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 식물을 정성스럽게 길러본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안다. 거기에는 자신에게 유해한 환경에 대한 급진적인 거부가 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퇴폐적이 되면서, 그 자신의 환경을 몸소 예증 한다고나 할까? 계란 노른자를 띄운 커피를 즐겼던 공초(空超) 선생의 식물과도 같은 삶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어 감으로써 탁한 환경을 조용히 거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투쟁이나 저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그 비(非) 행동적인 거부를 완성시키는 것이 있다. 바로 부르주아적 근검-절제와 가장 대립적인 가치로서의 사치이다. 그것이 불러올 결과 때문인지, 우리는 그 가치를 가장 두려워하고 또 혐오한다: 아무데나 가면 어때? 어차피 똑같은 커피! 더 심하면, 커피숍은 무슨! 집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데! 내 학창시절 어머니는 내게 용돈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다방이나 커피숍엔 절대 가지 말거라! 다 쓸데없이 돈 쓰는 거란다! 차라리 친구 만나면 식당이나 빵집에서 얘기해라!" 그러면 나는 돈을 챙긴 후에 꼭 한마디 한다: "배만 채우고 살아요?" 배를 채우기 위해 차를 마시는 얼간이는 없을 것이다. 커피나 차는 아무리 마셔도 배가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몇 잔만 마시면 오줌이 마렵기 때문에 오히려 귀찮기만 하다. 더구나 커피는 오줌을 많이 나오게 하는 요소가 있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차나 커피 마시는 일을 사치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어머니가 우려했던 것은 바로 사치였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치를 겁내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치란 일종의 자존심이라고. 과도하게 써 버림으로써, 물질적 재화에 미련을 두지 않음으로써, 폭죽을 터뜨리듯이 그것을 한 순간의 유희로 날려 버림으로써, 우리가 아직은 자연에 목숨을 구걸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빵을 살 돈이 부족해도 남아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오히려 그 물적 재화의 천박한 속성을 거절할 줄 안다는 것을, 그래서 부르주아는 알지 못하는 그 외의 다른 중요한 삶이 있음을 안다는 것을, 소극적이지만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며칠을 굶은 노숙자가 개죽과도 같은 밥그릇을 앞에 두고도 허겁지겁 달려들지 않고, 허름하게 찢겨지긴 했지만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 입을 줄 아는 조용한 자존심 같은 것. 차와 커피에는 바로 이와 같은 자존심이 있다. 가난한 연인들이 값싼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면서도, 실내 디자인이 우아한 비싼 커피숍을 찾는 것. 식모처럼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저 여인이, 자신의 본래적 우아함을 훼손시켰던 아버지나 남편 혹은 시어머니 몰래 거실에 나와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만끽하는 것. . . . 바로 저와 같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Posted by huun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것은 순전히 게으름 탓이다. 가장 흔하고 값쌀 뿐만 아니라, 가장 습관적인 음료, 그래서 또 가장 편리한 음료. 커피는 상품의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무엇이든 상품이 되고 나면 편리해지고 습관이 된다. 그러다 보니 지겨워지기도 한다. 다른 신선한 음료는 없을까? 이러한 욕망이 채워지려면 부지런해야 하고, 이는 또 새로운 비용이나 에너지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 그냥 저냥 커피를 마시며 살고 있다.

사람들이 대체로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다른 신선함을 몰라서가 아니다. 식후 커피는 마치 어떤 의례(儀禮)처럼 보인다. 친구를 만나거나 데이트하고 있는 저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우선 약속 장소에서 만나면 식사를 하러 간다. 약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지나면, 곧바로 식당을 나와 찻집으로 들어간다. 아주 익숙한 사이가 아니면, 사실 모든 얘기는 이미 식당에서 끝냈을 것이다. 밥 먹고 헤어지기 뭐하니 예의로 차를 마시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즉 내가 정말로 마시고 싶은 것인가? 하고 자문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손은 의무적으로 커피에 닿아 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친구들과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봉지커피를 타거나, 봉지커피의 변신이랄 수 있는 동전커피를 뽑는다. 동전커피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구멍이 외부에 노출되어 위생상 좋지 않을 것이다. 대장균이 꽤 서식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간혹 배가 아파 오기도 한다. 그런데도 열심히 들 마시고 있다. 마시면 헛배만 부른, 콜라 다음으로 가장 게으른 음료. 가끔은 이게 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커피에는 게으르고 지루한 속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속성이 더 많다(이 점이 콜라보다는 우월한 이유이다). 그것은 대체로 커피 자체에 있기보다는 그것이 품고 있는 다른 것에 있을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내가 아는 한 커피는 여자들이 더 좋아한다. 왜일까? 그들에게 카페인을 더 선호하는 호르몬이 있는 것일까? 남자들은 만나면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치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일부러 다방이나 카페에 가는 일은 드물다. 간혹 실수로 그런 곳에 간다해도, 앉아서 담배만 피워대거나, 쭈뼛 쭈뼛 고개를 젖히며 하품이나 해 대는 게 전부이다. 그러다가 몇 십 분이 지나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야! 나가자!" 혹은 "술 한잔 어때?" 심한 경우엔 "에이, 지겨워!" 그러나 여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커피숍에서 밤을 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커피를 앞에 놓고 하루종일 수다를 떨어도 즐겁다. 담배를 즐겨 피우는 일도 별로 없고, 술을 찾는 일도 많지 않다. 딱히 몸을 기댈 수 있는 물신(fetish)을 별로 가지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인지, 이들에게 허락된 저 커피와 그 분위기에 자신들의 몸을 맡기기를 서슴지 않는다. 커피에 죽고 커피숍을 위해 태어난 존재! 이들이 바로 여자들이다. 남자들의 환타지가 술집이라면, 커피숍은 바로 여자들의 환타지일 것이다. 모두가 일종의 출구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장소이다. 이렇게 우리는 술에 취하는 것만큼이나 커피에도 취한다.


그러나 알콜도 없는 커피를 마시며 무엇에 취하는 것일까? 아마도 말(言)일 것이다. 그리고 더 정확히는 대화. 커피 뿐 아니라 차를 마시는 일은 대화를 의미한다. 동양인들은 차를 마시면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거기에 도(道)라는 심오한 세계를 품에 안았다. 차를 마시면서 우리는 물질과 정신을 왕복운동 하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자신과 대화하면서 명상 속에 잠기면 나의 몸은 끝간데 없는 정신적 심연으로 빠져들어 에테르 상태가 된다. 그러다가 차를 마시면 입안으로 퍼지는 모든 감각들―뜨거움, 차가움, 신맛, 단맛, 향기―로 인해 내 몸은 다시 공간을 점유하고 무게를 갖는 몽뚱아리가 되어 내려온다. 감각과 추상의 왕복 운동 속에서 나는 마치 그네를 타듯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저 여자들 역시 수양(修養)에 버금가는 무엇인가를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몸을 데운다. 이야기를 하려면 서로가 이미 잘 알고 있거나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낯선 인물이나 사건 혹은 장소들조차도 이야기 속에 들어오면 반복적인 등장으로 친숙해 지고 거기에 특별한 감정이 느껴진다. 두 번째로 지나가는 길이 익숙하고 가깝게 느껴지듯이, 반복은 거리를 없애고 감정을 촉발한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훨씬 낯설다. 저 만치에 떨어져 그 주인인 우리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이 낯선 일상이 이야기 속에 실리면, 우리는 그것을 이리저리 만져볼 수도 있고 냄새를 맡아볼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 누군가가 등장한다면, 그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선망의 대상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참 지나고 나면 그의 오밀조밀한 사건과 사연들이, 단단히 주름진 색종이가 물 속에서 흐물흐물 퍼지듯이, 하나 둘 씩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펼쳐진다. 소설가란 먼 거리에서 신비로운 광채를 띤 어떤 것을 이 편으로 가져와, 그 신비를 벗겨보았더니 실은 별것이 아니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환희의 탄성을 지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같은 평면 위에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같은 세계를 그린다. 곁에 바짝 붙거나 바로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나 사물들은 한편으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얄밉거나 귀찮기도 하며, 또 때로는 무섭기도 하지만, 모든 것들은 친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두려움과 냉소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야기를 통해, 떨어져 있던 간극이 식혀 놓은 차가워진 신체를 데우며, 가족을 느끼고 외로움을 없앤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식사를 하면서 몸을 데우듯이,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다. 커피와 이야기는 살아가는 것 자체이다.


그러다가 간혹 우리의 몸은 매우 뜨거워지는 경우도 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 . . 이야기를 하다보면,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뜨거운 스프 상태가 되어 잘 구별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따지고 보면 선이나 악은 살아가는데 있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거나 들으면 저 선과 악을 떠올리며 쉽게 뜨거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 자체를 그 뜨거움 속에 내맡길 만큼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야기는 그냥 놀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 속의 모든 것은 가여워 보이기만 하다. 죽도록 미운 것도 없으며 영원한 사랑도 없다. 지고한 선도 추악한 악도 모두가 그냥 이야기의 한 소절일 뿐이다.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초인이 되게 한다. 그리고 이 초인은 간혹 뜨거워지는 자신의 몸을 달래기 위해 커피나 차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커피를 들고 대화에 임하려는 것은 미리 뜨거워질 몸을 스스로 배려해서이다. 내 어린 시절 무섭기만 했던 저러한 뜨거움에 울고 있으면, 어른들은 "괜찮아! 다 그런 거야!"라고 타이르곤 했었다. 마찬가지로 커피를 마시며 그 뜨거워질 시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은 어른이다. 화나는 일이든, 슬픈 일이든, 자신의 통제력으로는 가눌 수 없는 온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커피나 차와 같은 물질의 힘을 빌어 누그러트릴 줄 아는 초인 말이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