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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14 지배권(支配圈)의 향략 (2)

자본이나 노동 혹은 재산의 소유와 같이 지배관계를 규정하는 정치경제학적 요소들을 파악하기 전에 짚고 넘어 가야할 주제: 이 사회는 묘하게도 지배자보다 피지배자들이 더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 관계가 초래하는 부도덕과 비효율을 세 살 먹은 애들조차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계급성에 관한 분명한 의식을 취하는 것이 관건이었던 적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구한날 서로들 앉기만 하면 불만에 차 내뱉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상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배자들은 소수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얼마나 왜소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는 한 사회나 특정 집단이 뜨거운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서둘러서 고백하자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 . . 어째서 인류는 여전히 지배관계를 존속시키고 있으며 오히려 더 강화하고 있는 것일까? 더 구체적으로 말해 지배자의 위상에 도달하기 위해 항상 조심스럽게 긴장하면서 투쟁하는 역사로서의 지배권(支配圈) 전체가 유지되는 근본적인 심리학은 무엇일까?

심리학의 대가 니체(F. Nietzsche)의 대답을 들어보면, 그것은 지배자의 강압적 힘이나 피지배자라고 간주되는 이들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도덕과 처벌로 이루어진 잔인한 문화 내에서의 인간 관계를 통해 개인이 겪는 쾌감과 고통의 함수 때문이다. 니체의 말을 길게 요약해보면 이렇다: 도덕의 목표는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도덕적인 인간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인간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자기의 의지 즉 미래를 약속할 줄 아는 인간이며, 심지어는 도덕이 요구하는 행위양식(관습)을 자율로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이다. 책임과 의무를 자신의 존재양태로 스스로 인식하는 인간! 자신의 의지와 힘과 자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그 자신 스스로 주권자인 인간! 도덕이 양성하고자 하는 완성된 인간이란 바로 주권적 개체(sovereign individual)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책임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양심을 갖는 인간이 되어야 하며, 미래를 약속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에 의해서든 자신에 의해서든 예측가능한 인간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도덕을 하나의 자율로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억력이 좋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주권적 개체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도덕의 3부 모델이다. 한편에는 왠지 미안한 마음(양심이나 죄의식이나 유죄임의 자백)이 있어야 하며, 다른 한편에는 행위의 규약(약속이나 다짐이나 지속적인 의지)을 잘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저 두 모델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둔하고 경박하고 찰나적인 인간이, 스스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미래의 행위를 다짐하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의 자백과 다짐의 자국을 그의 마음 깊숙이 새겨 넣을 수가 있을까?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려면 고통이 있어야 한다. 뜨겁고 따갑고 쓰라린 것이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다. 바로 이 고통과 기억이라는 심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형벌이 태어난다. 우리의 마음이 엄숙하고 무거워질 때면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종교적 희생이나 제의라든지, 사법적 고문과 형벌, 금욕주의, . . . 등, 이 모든 절차들은 고통의 재생을 위해 기억이 필요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잔인한 고통이 필요하다. 준엄한 형법은 인간의 건망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리고 순간적인 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의 뇌리에서 사회적 공동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규정들을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의 야만적인 본능과 추한 언행을 통제하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여 마음속에다가 몇 가지 기억의 이미지를 아로새겨 온 것이다. 신체의 일부를 돌로 치는 형벌,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 삶아 버리는 형벌, 불로 지지는 형벌, 어떤 단단한 이(異)물질을 그의 몸 속으로 쏘아서 죽이는 형벌, 밧줄에 목을 매다는 형벌, 태생적 죄인을 의미하는 붉은 색 십자가 낙인을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새겨 넣는 창세기적 형벌, 선량함과 겸손과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이리저리 따돌려가며 개인을 밑도 끝도 없이 주눅들게 하는 형벌, . . .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왜 당신은 미안해하지 않는가?'라고 따져 묻는 문화, 도덕과 처벌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자아낸 잔인한 문화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문화는 관객을 필요로 한다. 그 처벌의 광경이 발산하는 뜨거운 빛을 내면(內面) 깊숙이 하나의 인상으로 새겨 넣을 관객을. 형벌에는 연극과 축제의 요소가 참으로 많이 들어 있다고 니체가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잔인한 문화에는 희생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잔인한 종류의 인간 역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해 고통을 각인하는 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주는 자, 고통을 즐기는 자가 있는 법이다. 채찍에는 고통뿐만 아니라 쾌락이 있다. 채찍과 그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에 있어 동종의 계보를 갖는 연민이나 동정과 같은 매저키즘적 정서에도 역시 쾌락이 있다. 프로이트가 고통과 쾌락의 연결 즉 고통이 쾌락이 되고 쾌락이 고통이 되는 그 알 수 없는 신비에 대해 언급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의 매'라고 해서 다를까? 우리는 선생님이나 부모 혹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행하는 처벌을 저 용어로 정당화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간혹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추상화해서 그의 모든 표현이나 행위를 그 추상적 사랑과 혼동한다. 아주 위험한 경우이다. 선의의 매라는 것에도 역시 다소간의 쾌감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쾌감이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쾌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처벌은 오로지 악행을 범한 자의 양심이나 책임 때문에 가해지지는 않는다. 유죄인 사람만이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처벌이 행해진 것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처벌이란 자신이 피해자라고 스스로 간주하는 자가 가해자라고 판단된 자에게 가하는 일종의 분노이다. 피해자의 의식은 재산상의 손해나 신체의 상해와 같이 구체적인 물적 변동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의 거만한 태도에서 느끼는 불쾌함이나, 백인이 흑인의 피부색을 보고 느끼는 불결함이나, 그 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언짢음을 포함하여 모든 감정상의 동요로부터도 야기된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사회적 분노의 표현이 바로 형법의 기원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도덕과 법(즉 제도와 계약)의 형식으로 분노와 고통을 해소하는 예를 니체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배상형식을 통해 설명하였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힌 자(채무자)는 피해를 입은 자(채권자)의 고통을 보상하고 그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혹은 부채 상환 약속의 신용을 얻기 위해, 혹은 그 약속의 진지함과 신성함을 보증하기 위해, 그리고 그 책임과 의무를 자신의 양심에 새겨두기 위해, 예를 들면 자신의 재산이나 신체의 일부 혹은 처(妻)나 가족 심지어는 목숨을 저당 잡힐 것을 맹세한다. 이 저당물은 그에게 보다 소중한 것일수록 적합할 것이다. 반면에 채권자는 자신이 입은 손해의 고통을 상쇄해 줄 보상을 어떤 식으로든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증 받는다. 보상은 주로 손해에 상당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금전이나 토지 혹은 그 외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직접적인 손해나 피해를 고의로 입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고문을 가하거나 모욕을 준다든가 혹은 샤일록(Shylock)이 안토니오(Antonio)에게 그랬던 것처럼 육체의 일부를 베어내는 일 등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고의든 아니든) 내 발을 밟아 나를 아프게 했다면, 나 역시 그의 발을 밟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최소한 나와 동일한 고통을 그에게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배상이란 한마디로 물적 혹은 심리적 복수의 권리를 말한다.


따라서 채권자가 자신의 손해에 대해 받을 수 있는 보상의 본질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자격에 있으며, 그 자격으로부터 발생하는 쾌감을 즐길 권리를 말한다.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형벌권 혹은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는 관람권은 하나의 자격이고 권리일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무르익는 무한한 쾌락이다. 무력한 자에게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쾌감!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춤으로써 생기는 탐욕스러운 쾌감! 타인의 불행을 보며 은근히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음흉한 쾌감! 나아가 동정과 연민으로 더 우울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적 쾌감! 이 모든 폭행의 향락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천한 사람일수록 더 커지는 법이다. 드높은 지위를 미리 맛보는 경험은 그 낙차가 크면 클수록 달콤하다. 채무자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채권자는 자신도 모르게 지배권(支配圈)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침내는 그 역시 다른 사람을 아랫사람으로 경멸하고 학대하고 야유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아니면 자신의 권력에 따라 채무자를 처분할 수 있는 집행권이 관료에게 넘어갔다 해도, 최소한 그 사람이 경멸 당하고 야유거리가 되는 불행을 안전한 발코니에 멀찌감치 앉아 목격할 수 있다는 우월감과 그 권리의 현실적 가능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지배권의 역사란 바로 저 자격과 권리에 도달하여 지상에서 가장 달콤한 고통의 쾌락을 맛보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작든 크든 다들 그러고 있지 않은가? 내 주변에서도 하루에 몇 번씩 저 지독한 냄새를 맡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맨 위에서 했던 질문, 즉 우리는 더 많은 피지배자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의식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배권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강화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줄 심리적 근거가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말해 즐거운 것이다.


그러니 누가 그 쾌락을 맛보는가? 라고 질문하지 말자. 국왕도 아니며, 귀족도 아니며, 자본가도, 남성도, 영국, 미국, 유럽, 아버지, 관료, . . . 에이! 모두가 아니다. 이 모든 도식화된 지배주체를 통해 지배권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하고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서툴기 짝이 없는 대답이 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 모든 결과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것을 고민하자. 예를 들면 지금까지 설명한 이런 것 말이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거지와 미세한 숨소리까지, 행위의 양태 전반을 하나의 지배권의 구도로 견인하는,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가 지배의 무의식을 실천하고, 또 모든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생활의 경향, 이데올로기보다도 훨씬 더 깊숙이 윤리적 에피스테메를 이루고 있는 모종의 쾌감들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권에의 참여를 독려하고, 그 권역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정당화를 가능케 한다. 헤게모니? 아비투스? 그 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까? 지배권의 쾌락이란 지배자의 쾌락이 아니다. 취향에 따라 혹은 주어진 몫에 따라 혹은 능력에 따라, 우리 모두는 많든 적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런 저런 고통의 쾌감들을 통해 살맛을 느낀다. 서로들 마주 앉으면 불평의 원인이고, 돌아서면 불만의 씨앗이며, 자리에 누으면 불면(不眠)의 테마임에도 불구하고, 지배권이 끊임없이 유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