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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ugee from Gondan Mali, 1985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본 것일까?

저 양 미간에 어린 슬픔에 견줄 만한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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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urma-Rharous Mali, 1985

일그러뜨리고 있는 늙은 손,

그 패인 주름들을 비집고,

낡은 육신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 쥐어짜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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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porting bags of dirt in the Serra Pelada gold mine Brazil, 1986

아마도 나이키가 만들고 베네통이 광고한 운동화를 신고 있을 저 청년으로 하여금,

고대적인 속박의 포즈를 취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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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ra Pelada gold mine Brazil, 1986

저 자유로운 영혼들을 묶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일관된 상승운동을 지속시키는 것은 또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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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view of the Serra Pelada gold mine Brazil, 1986

그것은 어떤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고,

멀리서 보면, 마치 마스게임처럼 아름답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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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ugees from the Bihac pocket waiting for delivery of the letters from relatives and friends who stayed behind; mail is delivered once a week by the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Batnoga-Krajina (Croatian territory occupied by the Serbs). 1994

그래도 편지가 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기다리는 그 무엇도 오지 않는다면,

저 응시하는 소년의 눈이 암시하듯,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둘러쳐진 사슬을 끊거나 비집고,

그 너머로 흘러넘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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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less peasants attend a political meeting organized by the MST, the Landless Movement, In preparation for a land occupation. State of Parana, Brazil. 1996.

아이들은 언제나 정면을 주시한다.

그들만이 카메라 이편으로, 텍스트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 보인다.

저 순진하기 짝이없어 보이는 여인이 든 손! 무엇을 위해서일까?

그 쪽 말고, 아이를 따라 이 쪽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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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months of occupation of the Cuiaba plantation by landless families, the peasants celebrate the official expropriation. State of Sergipe, Brazil. 1996.


만장일치, . . . 다수결, . . . 그것은 인간의 최후의 비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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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ross the river looms the modern financial district of Pudong, with the Oriental Pearl TV Tower in the foreground and the Grand Hyatt Hotel to the right. Shanghai, China. 1998.

분쟁과 전쟁 지역 만큼이나, 도시적인 만장일치가 있다.

고요한 기하학적 만장일치라고나 할까?

그것은 가령, 프리츠 랑(Fritz Lang)이 <Metropolis>(1927)의 첫 시퀀스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의 기하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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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sants who used to sit on the window ledges of their rural homes continue to do so in crowded apartment buildings. Ho Chi Minh City, Vietnam. 1995.

체계, 효율, . . . 현대의 도덕이 만들어 놓은 무늬들.

그 불특정성 속에서 버림받은 개인들.

현대인이란 말하자면 도회지로 가출한 시골소년 같은 것이다.

또, 현대인의 정서란 바로 그 소년의 배회와 울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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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ies playing on the roof of a FEBEM (foundation for Child Welfare) center in the Pacaembu district. Some 430 children live here, 35% of whom were abandoned on the streets, the others delivered at the center by parents no longer able to care for them. Sao Paulo, Brazil. 1996.

거리에 팽개쳐져 버림받은 아이들, . . . 절망과 좌절로 출발하는.

야들거리는 이들의 몸뚱아리를 품기라도 하듯,

저 뒷편에는 무지막지한 콘크리트 기하학이 가슴을 열고 이들을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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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ruction of the Rasuna complex of apartment and office buildings in the commercial and financial district of Kuningan. Jakarta, Indonesia. 1996

비록 철근을 딛고 솟아오르긴 했지만,

어쨌든 태양이 가려진 그늘을 벗어나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살가도의 작품은 우리에게 차원을 좀 옮겨볼 것을,

개미처럼 이차원에만 머물지 말 것을,

새로운 좌표로 치솟을 것을 독려한다.

저 무늬들을 좀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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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p of "Granja Agricola", a squatters settlement where African migrants await permission to travel to the Spanish mainland, Melilla. Spanish enclave on the North African coast. 1997.

이상한 것은,

절망은 어째서 모든 존재들을 기어 들어가게 하는가이다.

절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바로 절망이다.

이것이 바로 절망의 블랙홀!


사진출처: http://windshoes.new21.org/gallery-salgado.htm


Posted by huun

전쟁이나 종교적 갈등보다도 더 심각한 현대사회의 비극은 아마도 냉소나 권태에 있을 것이다. 대중 매체가 알려주고 있는 그 어수선한 세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 개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 그 창백한 악몽 때문인지 저 밖의 소란함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할 정도이다. 아직은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절대적인 침묵의 상태가 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말이다. 과연 내가 살아있는 것일까? 소음과 공포와 분노는 사라져야할 비극이 아니라, 소극적이나마 이 끔찍한 악몽을 부정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구실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라크인들이나 탈북자들과 같이 죽음의 표지에 서있는 자들에 대해 애도를 취할 수가 있다. 애도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정작 죽음의 표지에 우뚝서 있는 자들은 바로 우리, 모든 감각과 지각이 마비되어, 가르쳐주는 것만을 배우고, 배운 것만을 되뇌이고, 알고 있는 것만을 느끼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왜 이렇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인지. 나는 정말이지 화가나서 미칠지경이다.


영국 작가 테드 휴즈(Ted Hughes)는 글을 쓰라고 한다. 특히 이야기를. 그래서 작년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했는지, 옆으로 누가 지나갔는지, 그의 모습이 어땠는지, 손짓을 어떻게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짓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는지를 떠올리라고. 우선 삶에 흥미가 생긴다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글을 쓸때에 우리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가 사물들을 그 자체로 온당하게 이해하고 느낄만큼 자세히 보고 있지 않으며, 깊숙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쓰려면 그 모든 것들을 자세히 기억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는 한 사건에 대한 모호한 인상들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쓰는 일이 고역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율동을 하기에는 너무나 뻣뻣해진 지각! 내가 겪은 저들을 완전하게 이루고 있는 나머지는 다 빼고, 나에게 직접 감화를 주었던, 혹은 내가 필요하다고 간주했던, 한 두가지 디테일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것을 겪고도 서로들 완전히 다른 기억들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방 속에 들어앉아 저 편의 타자들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래서 천적이 많은 설치류의 청각처럼, 거리를 필요로하는 감각기능이 발달한 나머지, 타인들뿐 아니라 사물들의 내부로 파고들어 지각하는 법을 잃어만 간다. 테드 휴즈의 말을 들어보자.


  ". . . 우리 모두가 사건의 다른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는 옳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며, 한 두 가지만 보고 사실들의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만일에 배심원들이 평결을 검토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서, 지난주에 당신이 받은 수업을 당신이 기억하는 식으로, 당신의 사건을 기억한다면, 그들의 평결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이 소음많고, 분주하고, 편리한 현대 생활 속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광경들과 소리들로 폭격을 받는다. . . . 그것들은 말 그대로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교통 소음처럼, 혹은 텔레비젼 소음처럼 그냥 우리의 흥을 돋굴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실제로 듣지 않고 실제로 보지 않고, 다만 모든 것들을 우리 주변으로 미끄러지게 내버려두는 지루한 습관을 발전시킨다. [무감각해지는 법을 배워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거나 듣는 모든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며, . . . 우리는 상처도 안 받고, 거기에 열광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인생을 부유하면서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수족관의 뚱뚱한 돌고래처럼. 거기에는 상어도 없고 범고래도 없다. 사육사가 가져다주는 음식만 있으면 된다. 거기서 사람들은 창 저편에 서 있지만, 그들은 그냥 다른 세계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며, 오로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라고는 지루함 뿐이다.

  나는 최근에 한 실험을 적어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잠수함이 물 속으로 항해하는 영화인데, 이 영화를 미국인들과 아프리카 부족 원주민 관객들을 섞어 놓고 보여주었다. . . . 그 영화가 끝이 나고, 그들에게 무엇을 보았는지를 적으라고 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내가 말했듯이, 미국인들은 우리 만큼 살고 있고, 우리 만큼 사물을 본다. 그들의 보고를 보면, 그들이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 . 그들은 물론 잠수함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이었는지 거의 대부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떤 종류의 잠수함이었는지, 그것이 심지어는 물 속에서 움직였는지 조차 추측하지 못했다. 아프리카인들의 보고는 전혀 달랐다. 아프리카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기억하고 있었다. 잠수함의 모양, 시각적인 외모들; 그들은 그 움직임까지도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물의 외양까지도 자세하게 묘사했고, 잠수함이 지나간 바닷길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 . . 당신은 어떨 것 같은가?

  이제 당신이 쓰려는 이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연습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냥 쓰기, 혹은 당신의 상상에 맡기기 그리고 펜으로 그것을 따라 최대로 빠르게 쓰기.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연스러워질때 까지 계속하기. 두 번째로 당신의 관찰을 연습하기. 물론 당신이 특별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그것들을 소설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전에 당신이 했던 것보다 더 세밀해져야 한다. 만일에 어떤 사물이나 장소가 글 속에서 실제적이지 않으면, 그것 혹은 그 혹은 그녀는 거기에 없는 것이다. 사물, 사람, 장소들에 대하여 글을 쓸 때의 요점은, 그들이 스스로 드러나서 실제로 거기에 있듯이 써야한다. . . . 그러면 당신의 소설의 매 페이지 마다 새로운 관찰의 연습장이 될 것이다. 곧, 무엇인가가 사진적인 관찰처럼 당신에게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Ted Hughes. "Writing a Novel: Beginning" 중에서. [  ]표시는 편집자)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