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6/09/05 어떤 충만한 허기에 대해 (21)
  2. 2006/08/20 은행에서 본 어느 조각상
  3. 2006/08/08 말과 침묵 (2)

대중 매체는 지구 전체를 나아가 우주 전체를 하나의 촌락으로 만들어 버렸다.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리는 그 촌락의 일원임을 분명히 자각하게 된다. 헤겔이 말했듯이 현대인은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읽으면서 중세 사람들에 버금가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교회가 서구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끌어 들였듯이, 현대의 신문과 텔레비전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마을로 포섭한다. 대중 매체는 서로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부분이나 개인들을 하나의 전체로, 다시 말해 추상적 관계로부터 파생하는 공동체 의식을 조직한다. 일종의 전도된 공동체라고나 할까? 그리하여 대중 매체에는 묘한 역설이 있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아는 세계, 체험하지도 않았음에도 익숙한 세계의 충만함이 있다는 점이다. 신의 전능한 품속에서 내가 태어났듯이, 나의 존재는 충만한 전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내가 속한 전능하신 아버지를 한번도 보지 못했듯이, 나의 충만한 전체 역시 그 처소를 알 길이 없다. 감각의 세계로부터 추상의 세계로의 전환. 매체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는 실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양태가 전혀 다른 실재이다. . . .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은행에 가면 많은 사람들과 기계들의 소음으로 복잡하고 분주해 보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매우 단순한 동작만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고객은 번호표를 뽑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례를 그냥 앉아서 기다린다. 이 절차는 입구에서 의자까지 나아있는 직선코스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 갈지자로 걷는다든지, 두리번거린다든지, 암묵적인 규칙이 우리의 심리에 그어놓은 선을 벗어나서 사선으로 이동 한다든지, CCTV의 외화면(offscreen)으로 빠진다든지 하는 일 등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별 탈 없이 살고 싶은 우리들로서는 말이다. 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을 필요도, 그럴만한 일도 없다. 그냥 돌아가는 디지털 번호표만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의 번호가 찍히면 직원에게 다가가 사무를 보면 된다. 대체로 그 사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지서에 적힌 금액과 지불한 현금의 기계적인 산술을 넘어서지 않는다.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참 동안을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다보니 직원들 역시 모든 일들을 계산기로 해결한다.


간혹 직원이 예상한 결과와 계산기가 내 놓은 결과 값이 일치하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고가 일어나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므로, 곧바로 수정하거나 배제해 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연한 사고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들을 제외하고 나면, 은행 직원들은 거의 하루 종일 숫자들을 반복해서 두드린다. 머리가 복잡하면 일을 그르치게 되므로, 머릿속을 텅 비워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계산하고 도출하고 다시 계산하고 지불하고 수금하고 다시 계산하고, . . . 계산기를 두드리는 여직원의 희고 고운 손등과는 대조적으로, 그 아래쪽은 움푹 패인 손가락 마디들이 시커멓게 줄이 가 있어, 그 동안의 기계적인 몸짓이 그녀의 자유롭던 영혼에 아로새겼을 흔적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흔적의 증거일까? 고객이 다가가면 왜 왔는지 궁금해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면 그 흔적에 대한 그녀 자신의 시위일까?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는다.


모든 일들은 서류들로 처리되고 그 서류에는 고객들의 얼굴색과 시큰둥한 표정조차도 약속된 기호들로 연산되어 기록된다. 그러다보니 고객은 자신이 지나치게 평준화되어 다루어지는 것에 불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은행과 같은 곳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첫 번째 목적은 모든 의심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거나 의구심을 갖는 모든 행동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편안한 안도감을 취한다. 편안한 삶이 대체로 안정된 자연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가 피타고라스주의자가 아닐까? 또 그 안도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한 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것이 보인다면 오히려 머리에 쥐(경련)만 날 뿐이다. 은행과 같은 곳에 가는 두 번째 목적은 바로 단순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은행의 광경만큼 현대인의 악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도 없다. 사실 그 악몽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우리는 감각의 굳은 정도가 생각보다 심하다. 모든 의례적인 것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자행되는 행동들! 일상적이고도 상투적인 수순들! 어느 하나 위험할 것 없는 예측된 동작들! 사선과 빗금의 부재 혹은 거부! 탈선의 결과 혹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따라서 그저 다소간의 권력에서 비롯된 다소간의 우쭐함! 또 그에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샛노란 냉소에 깃든 새하얀 권태! 그리하여 아무런 일도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버림받은 개인들의 지긋 지긋한 인생! 그 자리에서 번호를 기다리고 있는 몇 십분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의 시선과 주의를 잠시만이라도 잡아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들의 불행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불행. 넓은 창으로 난입해 온 빛이 너무 눈이 부셨던 탓일까? 저 앞의 모든 군상들은 그 빛 속에 휘감겨 부드러운 윤곽선 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듯 했다. 나는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가 세끼니 제공되는 토끼를 보며 느끼는 권태만큼이나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또 저들 역시 자신만의 정해진 궤도만을 묵묵히 따르고 있을 뿐, 누군가의 시선과 관심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화의 사회적 생산을 최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국가적 사활이었던 시절에는 저 묵묵함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미간에서 종종 그 미덕을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묵묵함이란 그 시절의 낭만적 집단주의의 침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아닌가? 지금의 권태는 어쩌면 그 시절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무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시 동안의 7, 80년대식 히스테리에서 치유되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일까? 20대 후반의 몇 몇 후배들은(아마 70년대 후반에 태어나 90년도 후반에 대학을 다녔을) 자꾸만 자신들의 자살에 대한 언급을 유행처럼 하곤 했는데, 그것은 사회적 혹은 개인적 불의에 대한 반동이 아니었으며, 권태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적극적(혹은 소극적) 반항조차도 아니었다. 반대로 그 자신의 삶을 반동적 충동을 통해 재확인하고, 심지어는 자살 충동조차도 그 삶의 일부로 용해시켜 버리는 블랙홀과도 같은 권태의 완벽한 수행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담(自殺談)만큼이나 지루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유사-마조히즘(pseudo-masochism)이라고나 할까? 날기는커녕 날갯짓 시늉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몸에 상처는 고사하고 칼날조차 세우지 못한 것이다. 반동조차도 아닌, 무한한 되돌아오기 자체인 그것은 하품이 그렇듯이 전염성이 있다.


은행이나 대기업과 같은 공공 기관에 예술 작품이 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 장식으로 이용되면 그 공간은 그럭 저럭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로 연출된다. 이것이 저 기관 구매자들의 최종적인 바램일 것이다.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그 바램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의 장식은 주변 경관이나 실내의 다른 장식들과 어우러져 용해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두드러져 보이거나 특이한 시선을 끄는 장식은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전체 공간의 한 부분이 되어 그 공간 전체의 수준에서 계획된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목적. 고전 미학은 '아름다움'을 정의할 때, 일치된 감정이라든지 혹은 능력의 합목적성과 같은 개념들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것과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적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는 정확히 위에서 말한 장식으로서의 바람직함, 즉 저 구매자들의 바램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 건물에 세워진 조각상과 그 벽에 걸린 그림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참 동안을 감상하거나 주시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경비원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무의미한 짓일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놓여진 원래의 목적과도 상충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만 파악되어, 그 자체의 고유함이 드러나지 않은, 돌출될 위험이 거의 없는, 격자로 구획된 선분을 따라 고통없이 아름다움에 이르는, 그리하여 우리가 은행에서 보게되는 직원과 고객의 시선에 깃든, 부드러운 빛과도 같은 편안함을 주는 예술작품. . . . 한마디로 버려지는 것이다. 유기성, 역사, 구조와 같은 개념들과 나란히 놓이게 됨으로써, 예술작품은 어떤 전체의 상관적 좌표 속에서 버림받는다. 이것이 은행과 같은 곳의 익숙하고도 편안한 분위기가 별 탈없이 유지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만일에 은행 내부의 구석에 놓여진 저 조각상을 좀 유심히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 약간 비틀어진 모양이고, 어린 아이의 두 팔을 꼬아 놓은 듯한, . . . 메비우스의 띠 처럼 보이기도 하는, 보통 크기의 조각상이 선반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다.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 조각상을 보면서, 어떠한 질문들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은행의 소사(小事)들과 같은 부차적인 삶의 필요와는 그 근본에 있어 다른 질문들. 예를들어, 예술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저것이 무슨 형상일까? 왜 저렇게 비틀어 놓았을까? 와 같은 평범한 질문들로부터, 저것은 형상이 아니라 특질 자체가 아닐까? 부드럽지만 다소 무거운 듯한 저 색감은 아마도 나의 꿈 속이 아닐까? 어째서 존재는 비틀어진 위상 속에서만 본질적일까? 와 같은 다소 심오한 질문까지. . . . 이미 익숙한 것들만 있어 편안하고도 안전한 그러나 나른한 이 은행에서, 저 작품은 나로 하여금 저와 같은 질문들과 아울러 이름모를 경련같은 것을 일게 할 것이다. 그 작품은 생소한 물건이 아니라 이상함 자체이다. 지적인 질문 이전에 존재하는 경련상태.


사람들은 해석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을 때, 즉 애매모호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바로 저러한 경련을 느낀다. 그 발작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존재와 시간을 끄집어 내어 삶을 거대한 무게로 감당한다. 그것은 창조를 위한 일종의 준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를 포함하여 저러한 경련에 몸부림치는 많은 독신자들은 그와 같은 고독을 일종의 미학적 단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고독을 견디기 힘들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예술작품에 대해 냉소적이 된다: "저게 뭐야 ! 저게 무슨 예술작품이야 !"(이런 점에서 결혼과 냉소는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내심 알 수 없는 좌절감을 맛볼 것이다. 당혹감에서 비롯된 그들의 불평에는 진실같은 것이 있다. 예술작품은 당혹스럽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단련에 임하게 한다는 것. 어떤 단련? 예를들어,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동물에 가까운 자들의 소리를 듣게하고, 은행과 같은 곳에 나 있는 격자 무늬의 선분들 사이 사이에 끼인 고깃덩이를 보게 해주는, 혹은 주파수를 넘어간 파동을 감지하게 하는, 뭐 그런 종류의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단련. 예술은 경련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준비하게 한다(능력이라는 말은 바로 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모든 예술의 윤리적 목적일 것이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말과 침묵

monograph_column 2006/08/08 16:49

여담 한 마디 하겠다. 나는 최근에 말수가 적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오래 전부터 그렇게 된 것 같다. 특별히 누군가를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경우가 적어졌고, 혼자 살다보니 일주일에 며칠씩이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말이 없어진 것이다. 이제는 조리 있게 설명하거나 상대의 말에 재치 있게 응수하는 테크닉조차 다 사라지고 없다. 말이란 습관이 아닌가? 심지어는 사람들을 만나서 잡담을 하는 일이 점점 고역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내 직업상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지만, 그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우선 충분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나마 정리하고, 이런 저런 상상을 감미료로 채색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교재가 있으니 할말이 없으면 그것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강의 시간에는 학생들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준비된 것만 잘 기억하여 낭독하고, 마지막에 가서 그들의 수긍하는 고개 짓만 확인하면 만사형통이기 때문이다. 강의란 결코 대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나는 몇 년 동안을 말 한 마디 없이 수월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수가 적어진 것은 내 주변의 불가피한 조건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지하철이나 대합실과 같은 공공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대면하고 부딪치지만, 결코 한번도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아무 곳에서나 군중들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관찰해 보라. 제각각의 낯선 눈빛들에 놀랄 것이다. 자신만의 방으로 향하는 그 시선들은 마치 거리에서 혹은 다리 위를 걷고 있는 뭉크(Edvard Munch)의 초상들을 보는 듯하다. 개인들은 바로 그 낮선 시선을 통해 다가올 미래의 관계에 대한 이름 모를 불안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날 좀 내버려둬!"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현대인들의 소외는 고립이나 고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져올 상상된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뭉크가 고독을 절망과 관계짓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정신적 소외는 고독이 아니라 오히려 수다가 예증하고 있다. 말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말이 이어지지 않으면 죽음 뿐!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며, 그래서 말이 중단된다면 절대적인 무(無)의 상태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니 우리의 수다는 견딜 수 없는 고독에 대한 가련한 자기변론이 되거나, 나아가 더 심해진다면 환상적 도피 같은 것이 되기 십상이다. 정신적 소외란 고립이나 고독이 아니라 그에 대한 공포, 즉 자기 자신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일종의 돌림병이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치 수건을 돌리듯이 자신의 공포를 한없이 돌려가면서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로부터 일종의 공범의식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절대적 무에 직면하지 않도록, "나뿐만이 아니라 바로 당신도 노력을 해야할 것 아니오!"라고. 말이 없는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를 불쾌함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말을 강요하는 관계가 된다.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얘기 좀 해봐!" 만일 이 대사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어떤 부부의 것이었다면, 그들만큼 불행한 관계가 또 있을까? 그 대사가 암시하는 대화의 부재 때문에 불행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불행은 그 대사 자체, 저 수다에 있다는 말이다. 저토록 수다스러운 배우자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저주받은 인간이다. 사람들이 도서관만큼이나 조용한 출근 만원 지하철을 문제삼지 않는 것은, 그 질식할 것 같은 침묵 속에서나마 저러한 수다를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의 제도처럼 애초부터 거세되어버린 관계를 축복처럼 묵인하고 있는 그들의 태연한 침묵을 보라. 그러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진공 상태의 지하철 속에서 태연한 죽음으로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서로 아무 말이 없는 동안에도 우리는 자주 저와 같은 수다를 듣게된다. 침묵 속의 수다를 느끼는 관계를 우리는 불편한 사이라고 말하곤 한다. 수다쟁이들을 간혹 보게되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말을 못하게 하는 억압에 대한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입을 막는 소극적 억압보다 더 억압적인 요구, 즉 말하게 하는 강요를 통해 억압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기제이다. 억압적 고문은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강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히스테리를 넘어 새디즘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오랜 시간동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가 하는 모든 말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흥미로운 토론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이야기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화두들, 이것이든 저것이든 언제든지 교정이 가능한 사실들, 모종의 의도 하에 뒷 냄새를 풍기는 사족(蛇足)들, 다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궁금하지 않은 정보들. . . . 정치가들의 수다야 지적할 가치도 없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뉴스 기자들의 수다를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역겨움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심지어는 모든 방송국의 뉴스가 한결같이 내보내는 똑같은 대사와 똑같은 각도의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겁이 나기까지 한다. 저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수다가 강요인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상투성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억압은(그래서 심지어 악이 되는) 바로 그 진부하고도 상투적인 말들이 아닐까?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류의 적(혹은 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공할 만한 그들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맥빠지게 하는 그 진부함과 상투성에 있다. 그들은 예측된 감동을 제조하는 경이로운 능력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침략전쟁에 반대 할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최선을 다하여, 헐리웃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들의 하이힐이 걸쳐진 다리, 키스할 때면 여지없이 올라가는 그 왼쪽 종아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드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고문을 맛보게 해주는 요소는 다양하게 묘사된 새디스트의 외설과 고문들 때문이 아니라, 상투적이고도 진부한 논증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복이야 처절한 의도를 품고 자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상투성이란 물론 대중매체에 의해 실천된 것이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담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왜소한 부르주아의 산물이다. 자본가들은 결코 도박을 모른다. 시장판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은 이를 잘 내면화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이 상투성에서 나오는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거나, 많은 사람들이 들떠있는 장소에 나가 춤이라도 한 판 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기름을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더 위험한 짓이다. 그것은 오히려 부르주아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두절미하고, 차라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침묵을 메우려는 두려움에 찬 불필요한 화두들이 아니라, 정말로 값진 화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 바로 침묵의 자리가 아닐까? 흥미롭고도 중요한(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말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고독! 아무 할 말이 없어도 두렵지 않은 정다움! 말하지 않아도 전혀 심리적 처벌이 가해지지 않는 조용한 신뢰! 흥미로운 대화 뿐 아니라, 진정으로 값진 것이 창조되려면 바로 저와 같은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