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가면 많은 사람들과 기계들의 소음으로 복잡하고 분주해 보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매우 단순한 동작만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고객은 번호표를 뽑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례를 그냥 앉아서 기다린다. 이 절차는 입구에서 의자까지 나아있는 직선코스를 따라 움직이면 된다. 갈지자로 걷는다든지, 두리번거린다든지, 암묵적인 규칙이 우리의 심리에 그어놓은 선을 벗어나서 사선으로 이동 한다든지, CCTV의 외화면(offscreen)으로 빠진다든지 하는 일 등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별 탈 없이 살고 싶은 우리들로서는 말이다. 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을 필요도, 그럴만한 일도 없다. 그냥 돌아가는 디지털 번호표만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의 번호가 찍히면 직원에게 다가가 사무를 보면 된다. 대체로 그 사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지서에 적힌 금액과 지불한 현금의 기계적인 산술을 넘어서지 않는다.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참 동안을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다보니 직원들 역시 모든 일들을 계산기로 해결한다.
간혹 직원이 예상한 결과와 계산기가 내 놓은 결과 값이 일치하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고가 일어나긴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므로, 곧바로 수정하거나 배제해 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연한 사고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들을 제외하고 나면, 은행 직원들은 거의 하루 종일 숫자들을 반복해서 두드린다. 머리가 복잡하면 일을 그르치게 되므로, 머릿속을 텅 비워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계산하고 도출하고 다시 계산하고 지불하고 수금하고 다시 계산하고, . . . 계산기를 두드리는 여직원의 희고 고운 손등과는 대조적으로, 그 아래쪽은 움푹 패인 손가락 마디들이 시커멓게 줄이 가 있어, 그 동안의 기계적인 몸짓이 그녀의 자유롭던 영혼에 아로새겼을 흔적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흔적의 증거일까? 고객이 다가가면 왜 왔는지 궁금해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면 그 흔적에 대한 그녀 자신의 시위일까?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는다.
모든 일들은 서류들로 처리되고 그 서류에는 고객들의 얼굴색과 시큰둥한 표정조차도 약속된 기호들로 연산되어 기록된다. 그러다보니 고객은 자신이 지나치게 평준화되어 다루어지는 것에 불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은행과 같은 곳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첫 번째 목적은 모든 의심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거나 의구심을 갖는 모든 행동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편안한 안도감을 취한다. 편안한 삶이 대체로 안정된 자연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가 피타고라스주의자가 아닐까? 또 그 안도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한 것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것이 보인다면 오히려 머리에 쥐(경련)만 날 뿐이다. 은행과 같은 곳에 가는 두 번째 목적은 바로 단순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은행의 광경만큼 현대인의 악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도 없다. 사실 그 악몽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는 우리는 감각의 굳은 정도가 생각보다 심하다. 모든 의례적인 것들!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자행되는 행동들! 일상적이고도 상투적인 수순들! 어느 하나 위험할 것 없는 예측된 동작들! 사선과 빗금의 부재 혹은 거부! 탈선의 결과 혹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따라서 그저 다소간의 권력에서 비롯된 다소간의 우쭐함! 또 그에 적당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샛노란 냉소에 깃든 새하얀 권태! 그리하여 아무런 일도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버림받은 개인들의 지긋 지긋한 인생! 그 자리에서 번호를 기다리고 있는 몇 십분 동안, 나는 많은 것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의 시선과 주의를 잠시만이라도 잡아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들의 불행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불행. 넓은 창으로 난입해 온 빛이 너무 눈이 부셨던 탓일까? 저 앞의 모든 군상들은 그 빛 속에 휘감겨 부드러운 윤곽선 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듯 했다. 나는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가 세끼니 제공되는 토끼를 보며 느끼는 권태만큼이나 나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또 저들 역시 자신만의 정해진 궤도만을 묵묵히 따르고 있을 뿐, 누군가의 시선과 관심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화의 사회적 생산을 최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국가적 사활이었던 시절에는 저 묵묵함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미간에서 종종 그 미덕을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묵묵함이란 그 시절의 낭만적 집단주의의 침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아닌가? 지금의 권태는 어쩌면 그 시절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무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시 동안의 7, 80년대식 히스테리에서 치유되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일까? 20대 후반의 몇 몇 후배들은(아마 70년대 후반에 태어나 90년도 후반에 대학을 다녔을) 자꾸만 자신들의 자살에 대한 언급을 유행처럼 하곤 했는데, 그것은 사회적 혹은 개인적 불의에 대한 반동이 아니었으며, 권태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적극적(혹은 소극적) 반항조차도 아니었다. 반대로 그 자신의 삶을 반동적 충동을 통해 재확인하고, 심지어는 자살 충동조차도 그 삶의 일부로 용해시켜 버리는 블랙홀과도 같은 권태의 완벽한 수행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살담(自殺談)만큼이나 지루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유사-마조히즘(pseudo-masochism)이라고나 할까? 날기는커녕 날갯짓 시늉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몸에 상처는 고사하고 칼날조차 세우지 못한 것이다. 반동조차도 아닌, 무한한 되돌아오기 자체인 그것은 하품이 그렇듯이 전염성이 있다.
은행이나 대기업과 같은 공공 기관에 예술 작품이 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 장식으로 이용되면 그 공간은 그럭 저럭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로 연출된다. 이것이 저 기관 구매자들의 최종적인 바램일 것이다.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그 바램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의 장식은 주변 경관이나 실내의 다른 장식들과 어우러져 용해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두드러져 보이거나 특이한 시선을 끄는 장식은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전체 공간의 한 부분이 되어 그 공간 전체의 수준에서 계획된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목적. 고전 미학은 '아름다움'을 정의할 때, 일치된 감정이라든지 혹은 능력의 합목적성과 같은 개념들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것과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적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는 정확히 위에서 말한 장식으로서의 바람직함, 즉 저 구매자들의 바램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 건물에 세워진 조각상과 그 벽에 걸린 그림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참 동안을 감상하거나 주시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경비원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무의미한 짓일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놓여진 원래의 목적과도 상충하기 때문이다.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만 파악되어, 그 자체의 고유함이 드러나지 않은, 돌출될 위험이 거의 없는, 격자로 구획된 선분을 따라 고통없이 아름다움에 이르는, 그리하여 우리가 은행에서 보게되는 직원과 고객의 시선에 깃든, 부드러운 빛과도 같은 편안함을 주는 예술작품. . . . 한마디로 버려지는 것이다. 유기성, 역사, 구조와 같은 개념들과 나란히 놓이게 됨으로써, 예술작품은 어떤 전체의 상관적 좌표 속에서 버림받는다. 이것이 은행과 같은 곳의 익숙하고도 편안한 분위기가 별 탈없이 유지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만일에 은행 내부의 구석에 놓여진 저 조각상을 좀 유심히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 약간 비틀어진 모양이고, 어린 아이의 두 팔을 꼬아 놓은 듯한, . . . 메비우스의 띠 처럼 보이기도 하는, 보통 크기의 조각상이 선반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다.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 조각상을 보면서, 어떠한 질문들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은행의 소사(小事)들과 같은 부차적인 삶의 필요와는 그 근본에 있어 다른 질문들. 예를들어, 예술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저것이 무슨 형상일까? 왜 저렇게 비틀어 놓았을까? 와 같은 평범한 질문들로부터, 저것은 형상이 아니라 특질 자체가 아닐까? 부드럽지만 다소 무거운 듯한 저 색감은 아마도 나의 꿈 속이 아닐까? 어째서 존재는 비틀어진 위상 속에서만 본질적일까? 와 같은 다소 심오한 질문까지. . . . 이미 익숙한 것들만 있어 편안하고도 안전한 그러나 나른한 이 은행에서, 저 작품은 나로 하여금 저와 같은 질문들과 아울러 이름모를 경련같은 것을 일게 할 것이다. 그 작품은 생소한 물건이 아니라 이상함 자체이다. 지적인 질문 이전에 존재하는 경련상태.
사람들은 해석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을 때, 즉 애매모호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바로 저러한 경련을 느낀다. 그 발작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존재와 시간을 끄집어 내어 삶을 거대한 무게로 감당한다. 그것은 창조를 위한 일종의 준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를 포함하여 저러한 경련에 몸부림치는 많은 독신자들은 그와 같은 고독을 일종의 미학적 단련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고독을 견디기 힘들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예술작품에 대해 냉소적이 된다: "저게 뭐야 ! 저게 무슨 예술작품이야 !"(이런 점에서 결혼과 냉소는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내심 알 수 없는 좌절감을 맛볼 것이다. 당혹감에서 비롯된 그들의 불평에는 진실같은 것이 있다. 예술작품은 당혹스럽게 하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단련에 임하게 한다는 것. 어떤 단련? 예를들어, 카프카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동물에 가까운 자들의 소리를 듣게하고, 은행과 같은 곳에 나 있는 격자 무늬의 선분들 사이 사이에 끼인 고깃덩이를 보게 해주는, 혹은 주파수를 넘어간 파동을 감지하게 하는, 뭐 그런 종류의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단련. 예술은 경련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지각으로 나아가는 능력을 준비하게 한다(능력이라는 말은 바로 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모든 예술의 윤리적 목적일 것이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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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의 대면에서 승리 하는 수도 있는가요? 음...중독과 즐김의 경계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러 갑니다...=3=3 2005/12/23 00:34
공동체의 경험이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거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동감입니다. 그이상 거창하면 저도 많이 헷갈리거든요. 하지만 신문이나 소설같은 매체가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단순하게 헷갈렸을 것이고 거대매체가 있기에 종합적으로 다양하게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섬세한 표현에 늘 감탄을 합니다. 이런 표현 미안하지만 여하간 칭찬입니다. 여인이 아름다우면 나머지는 다 용서해 주는 남성의 심경을 체험합니다.^^생각을 많이 하고 쓰신 글이라 같은 글 두 번 잘 안읽는데 읽을 때마다 다른 뜻이 보이네요. 나중에 읽을 기회가 있으면 또 코멘트 하겠습니다. 2005/12/23 02:00
인류공동체나 대중매체공동체만을 이야기할 때엔 존재의 체험이 '말'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혈연/지역공동체에서는 단순히 던져진 말 뿐
아니라 공유한 언어 속에 퇴적된 공통의 역사와 공통의 몸의 체험들이 포함
되므로 인류/대중매체공동체와 구별되야 하지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간접체험'이 그 전부는 아닐거라는 거죠.
한 민족이 함께 겪은 역사의 한 사건은, 제 삼자(매체)를 통해서 듣는 단순한 '이야기'의 체험에만 가둘 수 없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있을 듯 합니다.
역시 엉뚱한가요? ^^;; 2005/12/23 08:51
아는것은 별로 없지만, 종합적으로 몇 마디 드리겠습니다.
2005/12/24 05:20
물론, 중독은 즐거움이 아니라 즐거움의 맹목적인 추구일 텐데요 . . 가령, 즐겁지 않아도 반복적으로 원한다든가 하는, . . 그래서 중독은 과도해질수록 즐거움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를 의미하겠죠. 특히 중독은 어떤 대상에 집착하면서, 그 대상에 쾌락을 고착시키는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술이나 담배나 육체와 같은 대상 자체가 쾌락으로 오인된다든지, 심지어는 어떤 상징이 쾌락과 동일시되는 경우도 그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신숭배처럼요, . . . 특정 대상에 집착하다보니 쾌락의 조건이 우연적으로만 주어지기 때문에, 중독은 슬픔을 만들어내는 행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술, 담배, 육체, 상징 등이 사라진다면 곧 바로 슬픔에 빠지는 것이 그런 경우겠죠. 그래서 중독은 욕구를 결코 현실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욕구의 향기만을 잠깐 맛보게 해준다면 맞을까요? 중독이란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쾌락인 것 같습니다. 2005/12/24 05:20
기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 수동적이기 때문에 슬픈 기쁨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중독에 의한 쾌락이란 오히려 어설프고 서투른 쾌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맨정신에서도 쾌락이 느껴져야 할텐데, . . 맨정신에서는 슬프거든요. 오직 술먹는 날, 바로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신나는 우리들 처럼요. 2005/12/24 05:21
이런 것들을 좀 종합해서 도식화해보면, 제 생각엔, 중독은 수동성에서 발생하고, 또 수동적 정서와 수동적 행위를 유발시키는 것 같습니다(좀 상투적인 도식이네요^^). . . . 관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능동적 관계가 있고 수동적 관계가 있는 것이죠 . . 따라서 관계들의 총체라고 말할수 있는 공동체 역시 능동적 공동체와 수동적 공동체가 있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 수동적 공동체가 바로 중독적 관계를 이루고 있을 텐데요, . . 가령, 우상이나 상징으로 결집된 집단과 같은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죠. . .좀 단순화시켜서 쉽게 예를든다면, 포탈사이트 회원들과 동호회 회원들, 학교의 학생들과 동아리 멤버들, 동료집단과 친구(또래)집단, . . . 등, .. 부여된 자격으로 결합된 관계와 자발적 친화력으로 결합된 관계의 차이라면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2005/12/24 05:22
중독적이라는 말은 바로 수동적 상태, 의존상태, 주어진 관계, 즉 주체가 가만히 있어도 자신의 역할이나 할일이 결정되는 공동체를 지칭하기 위해 쓴 말이었구요. . 그런데 대중매체는 대부분(전부는 아닐지라도) 상징적이고 추상화된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 국가라든가, 민족이라든가(이 말은 원래 정치체로서의 국가와 그리 멀지 않은 개념입니다), 인류라든가, 지구촌이라든가, . . . 중독적 현실들이죠 . . 교육에 의해 알려진 공동체, 심하게 말하면 강요된 공동체이고, . . 좀 덜 심하게 말하면 어떤 목적에 써보겠다고 발생한 공동체이고, . . 가령, 지구촌이라는 말은 원래 지구인들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우주개척을 위해 그 중심지 혹은 발상지로서의 개념으로 출발했다고 하더군요, . . 그리고 지금은 지구촌이라는 말이 세계시장을 꿈꾸는 세계화 담론의 주역들의 입에서 주로 거론되고 있구요, . . 2005/12/24 05:23
민족-국가(Nation-State)라는 개념도 따지고 보면, 근대에 와서야 생긴 개념이잖습니까? 근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자본, 식민지, 전쟁, . . . 그 이전에는 공동체의 개념이 완전히 달랐겠지요. . .베네딕트 앤더슨 말인데요,. . 민족이나 국가라는 상징(어떤 사람들은 '알레고리'라고도 합디다)이 우리의 뇌리에 박힐 수 있었던 것은 신문과 소설이 주역이라고, . . . 에구. . .더 이상 나아가면, 논문이 되겠네요 . .
다음엔 이야기의 문제인데요, . . 그건 좀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 . 다만, 이야기는 단순히 말을 통해 경험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시간성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2005/12/24 05:27
文才님^^의 중독과 즐김에 관한 멋진 풀이, 재밌게 읽었습니다.
'즐김'은 huun님 말씀마따나 능동적인 '행위'이고,
'중독'은 능동성을 잃어버리고 즐김의 대상이었던 것과 '주종 관계'가 성립
되어 수동적으로 주체가 휘둘리는 '상태'인가 합니다. 담배를 스스로 즐긴다 생각하고 피우기 시작했다가, 어느새 담배가 없으면 불안하고 허전/초조해지는
몸의 상태가(뉴로트랜스미터의 부족감) 정신적인 공황까지도 몰고오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이건 마치 봉건영주에게 해마다 빚을 얻어 원금은 커녕 이자도 갚기 어려운 소작농 같군요 ㅎㅎ 2005/12/24 06:40
-_-a;; 님들 글 읽다가, 정신적인 공황에 다다랐습니다. ㅠ.ㅠ
담배라도 피우러 갔다와야겠습니다... 2005/12/24 13:24
흑...내가 이럴 줄 알았어...ㅠ.ㅠ 중독이란 과연...=3=3 2005/12/24 18:57
사과꽃님의 소작농 비유는 아주 멋집니다. . . 문재는 따로 있었네요 . . . 그리고, deca님 . . 저 위에서 했던 중독에 관한 말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뭔지 아세요? . . . 담배 끊으세요!! . . 입니다. ^^ . . . 땡글땡글님 . .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요, . . 모든 꼬리말 끝에 적은 표시 "=3=3"가 뭔지 몰랐는데. . . 혹시 달음질 치는 모습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방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 . 그쪽으로 가면 글자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 ^^. 2005/12/25 23:28
병문안 왔어요^^ 아무때나 도망가는 것은 아니고 민망했을 때만 달아나는 것입니다. 전 글자들이 허들인줄 알고..그짝으로다가...^^
뭐 암튼 중독과 즐김의 경계를 생각해보려면 우선 즐거움의 주 객체를 논하기 전에 중독의 네거티브한 면이 강조되어서는 중독에게 살짝 불리한것 같아서 잠시 생각 좀 해보려고 했습니다. 잘 정리가 되면 트랙백으로다 모십지요...
일단 제일 큰 의문은 중독 이후 금단 증상의 두려움인데 쉽게 우리가 극복하지 못할꺼라는 전제에 합의한것은 아닐까 입니다. 물론 아는것, 좋아하는 것이 즐기는것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이는 신선의 경지에서나 득도한 자만이 가능한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봤구요. 2005/12/26 00:50
그래서 중독이 주는 즐거움 혹은 쾌락의 정도를 시간의 축으로 수치적으로 나타내 본다면 시작하는 단계나 혹은 금단의 고통이 찾아오기 전까지의 중독이 주는 쾌감은 가히 기하급수적 증가 곡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즐김이 시간을 두고 조금씩 골고루 쾌락을 나누어 준다면 중독은 금단의 위험 대신 강력한 거부 못 할 에너지를 내뿜으니까요.
"나는 그의 목소리와 그의 눈빛을 하루라도 못 보면 미칠것 같아...난 아마 그이를 즐기나봐..."이러면 이상하잖아아?
더우기 금단 현상의 한계를 극복 하고 났을 때의 짜릿한 쾌감도 있구요..그래서 전 중독의 에너지 응집 상태(?)를 즐긴답니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는데...쾌차 하시면 여쭈어 볼께요...^^ 2005/12/26 00:54
허들?! . . 그걸 생각못했군요 . . 그렇군요 . .
. . 중독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부정적인 측면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일테니 . . 그렇게 얘기를 해야겠죠 . . 그렇지 않다면 중독/즐김 이라고 분할해서 비교할 이유가 없겠죠. . 혹여 중독의 의미를 다시 정의내리고 싶으신 건가요? ^^ . . . 그런 문제라면 제 생각엔 중독/즐김의 일반적 개념을 문제삼기 보다는. . 특정 형태의 중독을 가지고 말해야 하지 않나 싶네요. . 가령, 알콜중독이 중독인가? 즐김인가? 커피중독이 중독인가? 즐김인가? . . .와 같이요. . . 정신의학에서는 중독을 정의할 때에, 주로 "기능장애"를 언급하더군요. 어떤 물질이 신체의 기능장애를 일으킨다든지 하는 경우요 . . . 금단증상의 경우엔 물질에 대한 신체적 내성의 발현이구요, . . 어떤 경우든지, 중독이라고 할 때에는 신체가 지속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에, 중독의 윤리적 측면 혹은 심리적 측면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위에서 언급했던 능동과 수동의 문제로 말할수 있을 것 같구요, . . 무엇보다도 쾌감을 지속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독은 쾌감을 어떤 대상에 의존함으로써 . . 쾌감의 지속을 우연적이고 외적으로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구요, . . . 뭐, . . 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말이죠. . .
다시 공동체 얘기로 돌아와서 . . 이야기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볼까 합니다. 다시 이어서 말씀드리면, . . 사실, 공동체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언어공동체, 민족공동체, 혈연공동체, 가족공동체, 유, 종, . . .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는 형성되겠죠. . .하지만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 .능동적 공동체가 문제인데요, . . 그것이 지속력을 갖추어서 완성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관계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만 완성되는 것이고 . . 그 형태는 주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 이야기는 말로 소통한다는 뜻도 되겠지만 . . 보다 근본적으로는 시간의 경험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 시간이란 기다림이고, 망설임이고, 지루함이고, 고민이기도 하고, 고독이기도 하고, . . 그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듣고 . . 하는 것 같습니다.
친구나 애인과 함께 오랫동안 앉아있거나 지내다보면,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 뿐만 아니라, 이야기란 그 에게서 혹은 그와 나 사이에 놓여있을 시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느껴지고, 그것이 표현되는 것 자체가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죠. 가령,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만, "그림을 읽는다"고도 합니다. 읽는다는 표현을 씀으로써, 그 그림으로부터 느껴지는 어떤 것을 이야기로 풀어낸다는 말을 하는 것이죠. . 그림 속 인물들을 둘러싼 사연들을 풀어내고, 정황설명이나, 배경, 인물들간의 관계 등등 . . 그림속에 재현된 모든 것들을 정지되어 있거나 죽어있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각각이 자기 자신의 사연을 가지고, 자신의 시간을 갖는 존재들, . . 즉 살아있는 존재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
. . 아마도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절대로 다른 존재들을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 . 그림을 읽음으로써, 그것을 시각이나 촉각과 같이 무시간적인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간성 속에서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관계들을 살아있는 것으로 . . 가령, 책은 절대로 직접적인 감각으로는 읽을 수가 없잖아요. 오랫동안 기다리고 망설이고 지루하게 감내하면서, 즉 오로지 시간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듯이 말이죠. 그래서 능동적 공동체라는 것은 시간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인가가 느껴져야 하는 것이고, 개인들로 하여금 느낌을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는 공동체라는 것은 느껴지는 공동체이기 보다는 주로 (지식으로) 알려진 공동체, 강요된 공동체, 교육된 공동체 . . . 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중매체는 사람이나 사물들간의 관계를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편집 속에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A라는 사람이 집에서 나와서 차를 타고 학교에 가는 과정을 보면, 그 A는 한 발 한 발 걸어서 1초. . 1초를 보내면서, 매우 지루한 시간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 . 그런데 편집된 현실은 A가 집에서 나오는 장면 한 컷, 차 타는 장면 한 컷, 학교에 도착하는 장면 한 컷 . . 이런 식으로 시간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어요. . . 무수한 시간들 속에서 특정한 정점의 시간만을 포착하여, 그것들을 추상적으로 종합하는 것이죠 . . . 예전에, 트뤼포 라는 영화감독이 만든 <400번의 구타>라는 영화에서, 아이들이 방과후에 집으로 가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 영화에 출현했던 아이들이 개봉된 영화를 보고나서, 감독에게 엄청나게 비난을 퍼부엇다고 하더군요. .
왜냐면,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과정을 너무 짧고 성의 없이 만들었다는 거예요 . . 자기네들이 학교에서 집에까지 얼마나 고생하면서 가는데 . . 그렇게 짧게 만들수가 있냐구요 . . 그 영화를 보면 학교와 집 거리가 별로 멀지 않아 보였다구요 . . . 매체가 만들어 놓는 경험은 항상 시간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 그래서 매체의 공동체란 언제든지 충만해 보이지만. . 동시에 허기지게 하는 . . 무엇인가가 부족한 . . .마치 한국사람이 세끼 식단을 버터를 먹은 것 처럼 ^^ . . . 뭐 그렇다는 얘기 . . 2005/12/26 02:01
담배는 마음의 일요일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아직은 흡연이라기보단 애연이(라고 주장하는 거지만)어서 금연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 사는 동네에선 담배타박이 심해서요... 좀 불편하긴 합니다^^ 2005/12/26 02:03
'이야기'에 시간의 역사가 들어있다고 말씀하시니 한결 이해하기가 편합니다^^
그러고보니 그림을 해석하는 사람이나 소위 시를 '비평'한다는 사람들도 자신의
주관적 경험과 통시/공시적 세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 그림을 '재해석'하는
것,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의 총체적 이해를 '이야기/언어'의 매체를 빌어 타인에게 이해를 시키려는 작업이 되는군요. 또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자신만의 '의미의 체계'로 또 다시 재해석하여 이해를 할테니, 결과적으론 끊임없는 '재해석'의 연속이라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ㅎㅎㅎ 2005/12/26 09:51
'대중매체'에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해도,이는 혈연/가족공동체와
다르게 내가 그 것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고자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혈연공동체와 크게 다른 점 인 듯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공동체를 '능동'과 '수동'으로 분류할 때, 소위 대중매체공동체는 '능동적'인 성격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게다가 언어(이야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간 '소통'의 수단인 '육체적인 텃치'가 빠져있으니 역시나 '대중매체공동체'는 여타의 다른 공동체와는 구분이 되야할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윗글에서 "이러한 것들이 바로 대중매체를 통해 개인들이 망상하는 내 가족 내 민족 내 인류라는 공동체 의식이다"라고 쓰신 부분에서 드는 의문때문입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조작되어지는 모래성같은 공동체의식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해나가시다가 갑자기 내 가족 내 민족을 (내 인류는 빼겠습니다^^) 2005/12/26 09:54
언급하셨기에 제가 헷갈렸거든요^^
암튼, 그 부분만 빼고는 '충만한 듯 보여도 허기지게 하는 대중매체 공동체'에
대하여 크게 공감을 하며 읽었습니다. 언제나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들을
불러 일으켜주는 글에 탄복을 하면서... ^----^* 2005/12/26 09:54
네. . . 다른 얘기들은 넘어가기로 하구요, . .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 . "내 가족 . . ." 이라고 한 이유는, 현대사회에서의 가족이라는 것이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봅니다. . 사실, 가족을 깊이있게 연구해보지는 않았지만요, . . 일단,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가족이 가부장적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가부장 시스템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가족의 개념 역시 매우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가족의 개념과 현실에서의 가족의 괴리가 생각보다 매우 큽니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는 가족의 이미지는 상당히 비현실적이에요. 사라져가고 있는 것에 대한 마지막 가련한 믿음처럼 . . "그래도 그것은 지켜져야만 한다!!" 라든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라든가, 심지어는 가족주의적인 믿음을 이용해서 스캔들을 즐기고 있기 까지 합니다. . 2005/12/26 17:52
가족이 자본주의를 강하게 유지시키는 가장 훌륭한 메커니즘이라는 것은 잘 아실테구요, . .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사회에서 개인들을 폐쇄적으로 만드는 것중 가장 강력한 기제가 바로 가족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구요 . .전 가족들이 모여있는 공원이나 유원지 같은 곳을 가 보면, 그들의 그 폐쇄적인 도취를 아주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또, 제가 아는 사람들 몇 명만 꼽아서 보아도, . 그 가족의 형태를 명확하게 구분짓기가 힘듭니다 . . 우리가 알고 있는, 양부모와 아이들 . . 이 개념이 아주 복잡해요 . . 또 사회생활들 속에서 그 관계들이 매우 뒤틀려있고,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 그런데 가족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대중매체는 강요하고 있죠. .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면 비정상적인 가정이고 잘못된 삶인 것 처럼요, . . .어쨌든 그러한 환상들을 만들어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가족에 대한 제대로된 고민을 못하게 하죠, . . 2005/12/26 18:13
이것 뿐만이 아니라, 사실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 어쨌든 . . 우리가 너무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가족도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그것도 역시 하나의 공동체라고 본다면, . . 좀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구요, .. 2005/12/26 18:13
민족-국가란 개념이 따지고 보면 고조선 시대이야기 인데 요사인 포퍼가 이야기하는 민족은 허구다란 명제를 보고 많이 이야기하는 거겠죠?원래 나라란 게 혈연적인 관계를 피할 수 없는 거였는데, 국가가 거대화되고 다원화 되면서 허구가 된 것이죠.... 2005/12/26 18:50
huun님, 친절하신 설명 감사드립니다 ^^ 꼬리글로 님의 글에 대한 이해를 높였으니 저로선 성과가 크네요. 골치 아프게 해드려서 죄송하구요 ㅎㅎ 2005/12/26 19:16
지적과 관심. . 진정 감사합니다. 총명한 사과꽃님 . . 덕분에 페이지가 춥지 않습니다. . . 저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구요. . 질문에 답하면서, 내심 깊은 한계를 느낍니다.^^ . .
song님 오랜만입니다. . 포퍼가 그런 말도 다 했나요? . . 그랬군요 . . 니체는 그러더군요 . . 국가는 . . .? . . . "금발의 야수"다!! ^^ . . 니체 답죠? 2005/12/26 23:45
음...이 방에만 오면 연필이랑 공책을 쳉겨와야 할것 같은...참 그리고 돋보기도...deca님 따라 넘던 허들이나 마저 넘을까부다...=3=3 2005/12/27 01:10
참 . . 늦은 감이 있지만 ,. . . 위에 deca님의 말씀에 답하면요, . . 전 약 1년 반 전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 . 거의 20년 가까이 피워오던 담배를요 . . 한 동안 꿈 속에서 담배피우고 죄의식에 빠지는 장면들이 주기적으로 나오곤 했어요 . . 담배 피우는 장소도 꼭 지하실 어두 컴컴한 암실 같은 곳에서 천장에 조그마하게 달린 환풍기에 연기품어가며 피우는 장면들이 대부분이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