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10/03 현실에 관한 최소한 두 개의 관점
  2. 2007/01/26 상품의 아이러니
  3. 2006/10/11 스투디움(Studium) (16)

몽따주의 대가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은 영화 예술이 해야 할 일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의 구성(창조)에 있다고 생각했다. 몽따주는 그 자체가 이미 변증법적 창조이고, 재료로서의 현실적 파편들의 파지(Aufhebung)이다. 각각의 조각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유인(attraction)하기도 하며, 대립, 모순, 보충, . . . 그러한 범 우주적 파동 속에서 폐지되었다가 새로운 현실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반복한다.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그러한 파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한데, 영화 예술이 바로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령, 마르크스 식으로 말해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로서의 분노!"를 창출하는 것이다.
반면에 네오-리얼리즘을 옹호했던 바쟁(Andre Bazin)은 몽따주가 자연에 뭔가를 억지로 덧붙이는 행위라고 못 마땅해 했다. 그에 따르면 현실은 살아있는 것이고, 스스로 지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예술은 그 살아있는 지속에 관념을 덧붙여 왜곡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며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영화란 무엇보다도 기다림으로부터 출발한다. 영화가 문학이나 회화와 본성적으로 다른 그 고유의 미학이 있다면, 다름 아닌 이 다큐멘터리즘이라는 것이다.
 

그들 말 대로 정말로 그런 것인지, 전제정권에 의한 민중의 학살이라는 유사한 테마를 다루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영상을 통해 이 대조를 확인해보자. 첫 번째 영상은 에이젠슈타인이 직접 구성한 몽따주 아니 새로이 창조된 현실의 이미지이다. 두 번째 영상은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포착한 살아있는 현실(약 2분간)의 이미지이다.  장면보기(용량이 커서 조금 기다려야 함)

Posted by huun

며칠전 기사에 통계청의 한 리포트가 보도되었다. 앞으로 잘 팔릴 상품의 목록들이 그것인데, . . . "소비자의 욕구와 마음을 꿰뚫어 보는 상품"이라며 . . . 멋도 모르는 풋내기 기자들은 무슨 대단한 정보라도 얻은 듯, 라디오나 텔레비젼이나 신문에 수회에 걸쳐 싣고 있다.

2007년 1월 23일자 KBS 뉴스 기사

http://news.kbs.co.kr/article/economic/200701/20070123/1288618.html

저 기사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다.

1. 사람들이 출퇴근 이동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므로 그 길어진 무료한 시간을 때울 수 있게 해주는 상품이 잘 팔릴 것이다(DMB TV, PMP 등).

2. 또 20대 인구의 절반이 아침을 굶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간단한 아침을 제공해 주는 상품이 잘 팔릴 것이다(샌드위치, 조각케잌을 파는 커피 전문점 등).

3.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므로 건강을 고려한 식품 상품이 잘 팔릴 것이다(지방을 뺀 우유, 칼로리 낮춘 면 류 등)

4. 이 외에도 아주 많은데, 가령 범죄에 두려움을 느끼는 여성을 위한 상품, 일하는 엄마를 위한 상품, 피곤한 직장인들을 위한 상품, . . .

저 내용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떤 구조가 보인다: 출퇴근 시간이 길어져 무료한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므로 DMB TV가 잘 팔린다. 사람들의 건강이 나빠졌다, 그러므로 건강식품이 잘 팔린다, . . . 이것이 상품이 기획되고 만들어지는 전모이다. 즉, 현실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 현실인식 --> 대안. 기업주들이 상품광고를 통해 말하는 모든 메시지의 요체는 바로, "당신께 대안을 드립니다"이다. 그러나 그럴까? 어떤 대안?

좋은 상품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상품들도 있다. 어떤 상품들은 꼭 필요한 것도 있고, 어떤 상품들은 필요하지도 않은데, 필요를 강요하는 상품들도 있다. 하지만 어떤 상품이 되었든, 상품에는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나쁜 성격이 있다. 기업이 상품을 만들면서 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불편함이나 고통을 정말로 없애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불편과 고통을 미끼로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 뿐이라는 사실이다. 돈이 먼저이다 보니까, 잘 팔리지 않으면 상품을 만들지 않는다. 가령, 아침을 굶는 사람들은 도시에도 있고, 변두리 지역에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직장이 많이 모여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 보다는, 멀리까지 움직여야 하는 변두리 사람들이 더 굶기가 쉽다. 하지만, 변두리에는 사람 수가 별로 없기 때문에, 상인들은 아무리 사람들이 아침을 굶어도, 아침 대용 상품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많이 몰려드는 도심지 사람들만 아침을 먹을 수 있다. 이것이 상품이다.

거기서 더 생각을 해보면, 상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성질이 있다. 상품은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보다는, 오히려 잘못된 현실을 바란다. 아침을 굶는 사람들을 위해 샌드위치를 만드는 상인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굶기를 바랄 것이다. DMB TV를 만드는 기업주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길 바랄 것이다. 심지어는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화장실에서도, . . 온통 무료한 시간들로 채워지길 바랄 것이다. 범죄에 두려움을 느끼는 여성을 위한 상품을 만드는 상인이 있다면, 그의 천국은 바로 범죄의 천국이 아닐까? 뼈빠지게 가사일을 하는 엄마들을 위해 어떤 상품을 만드는 이가 있다면, 그의 목적은 그 엄마들이 계속 계속 뼈빠지게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상품의 이와 같은 나쁜 성질 때문에, 백신을 만드는 회사가 바이러스를 만들고, 보안회사가 범죄를 저지르고, 심지어는 전쟁도 대신 해주는 업체들이 생겨나는 것 아니겠는가? 아! 자본과 상품의 아이러니여!

광고들은 자기네 회사가 만드는 상품이 우리들의 고통과 가려움을 긁어주고 쓰다듬어 줄 것처럼, 갖가지 교태와 입발림 소리들로 우리를 유혹하지만("삶과 행복을 드립니다~!"), 실상 상품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위선 뿐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상품이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바로 코앞에서, 슬픈 표정을 하며 다가온 상인이 제공한 수의(壽衣)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결코 도움이 아니다.

상품은 우리가 맞닥드린 현실을 정말로 현실로 만드는 마력이 있다. 상품이 만들어지는 순간, 현실은 당연한 것으로, 기정 사실화 된다. 피곤한 직장인을 위한 상품은, 그 자체 이미 직장의 피곤함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범죄의 공포를 느끼는 여성을 위한 상품은, 그 자체 이미 범죄 사회에 대한 암묵적인 묵인을 선포한다.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에게 수의를 구매하게 함으로써, 그에게 죽음을 선포하듯이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기업은 상품을 만들어서, 소비자들의 현실을 공고히 하고, 나아가 잘못된 현실의 공범이 된다. 업주들은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현실이 더 강화되기를 바라고, 또 그러한 현실을 만들기 위해 투자까지 감행하는 인간들이다. 그 같은 냉소적인 현실인식 위에서 제시하는 대안이 치유나 약이 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바라보는 방식은 결코 현실의 직시가 아니라 현실의 악용이고, 현실의 거짓이고, 궁극적으로는 권력 관계가 만들어낸 왜곡된 현실의 기정사실화이다. 그러한 위선이 바로 상품이 출시되는 순간, 구매하는 순간, 그 교환 행위와 교환된 물건 속에 고스란히 현존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기자들은 이러한 실상을 똑바로 알고 제대로 판단해서 보도를 해야한다. 최소한 신중하게!

Posted by huun

일반적 관점, 담론, 공유 가능한 양식, 위험하지 않은 사회적 관계, 문화적 감정, 중화된 욕망, 허용된 행위, 계약이나 공모로 이루어진 관계, 친숙함, 친구들, 의심스러운 믿음, 텅 빈 실체들, 제한적 기쁨 . . . 등. 이렇게 나열된 것들이 바로 스투디움의 윤리적 양태를 이룬다. 스투디움을 일종의 대리자(타자, 대리 기표)의 언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스투디움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이나 자극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내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내가 부재 하는 어떠한 것에도 나는 흥미를 느낄 수가 없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의 언어 즉 스투디움의 말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현실로 이해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현실이란 오로지 사랑이 주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보기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과 스투디움을 혼동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스투디움은 안정된 것을 보장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혀 변하지 않는 동일한 관계가 반복될 때, 그래서 나의 생명과 생활이 미래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보증 받을 때, 우리를 실재의 위험들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을 선택하고 나아가 이를 확신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이것을 현실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을 계약관계에 종속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스투디움이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실 안에서 우리가 슬픈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스투디움은 나를 배제함으로써만 생겨나므로 한없이 나에게 지루함만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지루함 때문에 나는 반대로 더 사랑의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실연 당한 내게 어떤 친구가 다정한 손길로 나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의 위로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모든 무용한 것들에 화가 난다! 그의 말들은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더욱더 나로 하여금 내가 떠나왔거나(그래서 나는 상심해 있는데), 더 이상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그래서 나는 절망하고 있는데)으로 돌아가라고 강요할 뿐이다. 이 현실은 내게 상심과 절망만을 안겨주는 것이다. (2) 나를 배제하는 언어로서 스투디움은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게 한다. 현실은 이제 내게 아무런 매개도 되지 않으며, 나의 연상(聯想)에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다만 그것들을 무심하게 쳐다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있는 한, 나는 이 강요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살아야하니 말이다. 이 경우, 현실은 내게 권력 체계로 경험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에 연민을 느껴야하며, 사랑해야 하며, 공감해야 하며 . . . 심지어는 내가 현실에 적개심을 품을 때조차도 현실과 관계해야만 한다(알베르 까뮈가 뫼르소라는 한 괴물을 등장시켜 보여준 슬픔이 이것일까?). 내가 권력의 노예나 공범이나 증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권력체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노예가 아니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를 방해하거나 나를 배제하는 모든 현실들을 나의 의식으로부터 축출하여, 나도 알지 못하는 내 안의 깊은 다른 곳으로 밀어두고, 그것이 되돌아올 때마다 부정하고 억압하고 고문을 가하거나, 또는 새로운 다른 이미지들로 대체시켜 버리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렇게 해서 나는 모든 것에 열광한다. 혹은 더 나아가, 이 무용한 것들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 효력을 정지시키고 얼어붙게 하여, 그것이 사실은 현실이 아니라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앞으로 인류는 반드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사랑이 현실인가? 아니면 스투디움이 현실인가? 이렇게 바꿔서 말해보자. 은둔자들의 삶이 현실인가? 아니면 세속인의 삶이 현실인가? 이렇게 질문을 하고 보니 두 가지 현실이 있는 셈이다. 현실이라고 불리는 현실. 그리고 현실이 아니라고 혹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불리는 현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