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엉뚱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프로이드(G. Freud) 얘기 잠깐하고 시작해보자. 살아있는 유기체는 쾌감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편적 원리로서 바로 쾌락원칙이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논문에서, 그 보편적 원리로부터 벗어나 외부에서 떠도는 몇 가지 예외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현실원칙의 부정하는 기능이나 우회로에 의해 발생하는 불쾌라든지, 쾌를 불쾌로 전환시키도록 이끄는 정신 조직 요소들의 군사 지리학과도 같은 투쟁이라든지, 어머니의 사라짐과 같은 불쾌한 경험을 재생산하여 반복하는 아이의 놀이라든지, 외상성 신경증에서 자주 보이는 외상적 경험에의 고착이나 반복 강박, 기능적 장애나 전이 현상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예들은 모두가 특정 개인에 의해 반복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불쾌와 관련이 있다. 쾌락 원칙으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예외들인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은 치료 과정에서 발견되는 이와 같은 경험적 예외들이 아니었다. 하나의 동질적인 원리나 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잔여물들을 다루는 것은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이끄는 처사일 것이다. 이는 더 이상 그 체계를 고수할 수 없으며, 나아가 새로운 체계를 구성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여야 함을 뜻한다. 예외들이 발생시키는 이와 같은 복잡성에 의해 쾌락원칙은 초과용량에 달한 것이다. 이 때에 필요해 지는 것은 무엇일까? 프로이드가 반복해서 언급했던 사색적 고찰, 즉 철학적 반성이 아닐까? 사색적 고찰이란 개념화되고 보편화된 원리로부터 벗어나 주변을 맴도는 예외들을 찾아내거나 분류하는 과정이 아니다. 실제의 경험적 자료들과 법칙을 초월하여 이 원리를 가능케 하는 보다 상위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과정. 이것이 사색의 문제이다. 프로이드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삶 본능의 토대라고 할 죽음본능에 관한 논의 뿐 아니라, 어떤 경우든지 쾌락원칙은 지켜진다고 하는 애매 모호한 논의에까지 이른다. 뭐 이런 저런 구체적인 얘기야 정신분석의 사정일 테니 여기까지만 하고 한 가지만 기억해 두어야겠다. 체계의 문제 자체를 검토하고 조사하는 과정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철학적 반성에 입회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관료는 철학을 하고 싶은 것일까? 혹은 그들의 공무(公務)라는 것이 철학하기 인가? 내가 아는 한 공무원들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철학적 반성은 그들과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기질과도 무관하다. 그런데 이들은 끊임없이 체계를 반성하고 구성하면서 심지어는 체계 그 자체가 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예외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체계에 집착하거나, 심지어는 그 유령(예외)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망상에서 출발한다. 이들에게 있어 체계의 완벽함이란 주변에서 배회하는 예외들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달성된다. 이에 따르면 예외들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예외의 발생은 체계의 경제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체계의 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외들은 힘겨운 에너지와 아까운 비용을 의미한다. 이를 최소화하려면 소리를 낮추고 전방(前方)만을 주시하며 가던 길만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버스노선 체계, 민원 처리 체계, 주민 등록 체계, 병원 관리 체계, 각종 회의 체계, 체계에 의한 체계, 체계에 관한 체계, 체계의 체계, 체계를 위한 체계, . . . 한도 끝도 없는 이 소란한 체계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체계는 언제나 조용하고 지루하며 단조로울 뿐이다. 동사무소 등의 관공서에 가보면, 경력이 오래된 공무원일수록, 무슨 말 안 하기 대결에 참가한 사람들처럼 조용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체계 그 자체가 되는 과정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체계란 자질구레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매끄러운 절차들 위에 우발적인 질문들이 생긴다면 그 체계는 실패한 체계이다. 행정 관료가 질문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찮아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소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체계는 체계여야 한다는, 따라서 절차들은 자동화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침묵으로 관철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용지가 어디에 있죠?"라고 하는 간단한 질문에조차 절대로 대답하지 않는 그들의 침묵에는, 고집 센 철학자의 미간에서나 볼 수 있는 무늬와 유사한 강도의 고뇌와 신념이 있다. 용지가 어디에 있냐고? 저런 어리석은 질문에 까지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다소 코믹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대답할 수 없는 그들의 애로사항을 이해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예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망상에서 비롯된 그 애로사항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애로사항은 애초부터 잘못 설정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체계로부터 이탈하여 자유롭게 떠도는 예외들은 필연적으로 있기 마련이다. 다르게 말해 완벽한 체계는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우선 완벽한 체계란 앞으로 생겨날지도 모르는 변수에 대해 완전한 예측과 통제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체계 혹은 모든 독립변수의 최초의 상태를 완벽하게 정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그 체계가 소모하는 양에 맞먹는 양의 에너지를 지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다. 보르헤스(L. Borges)의 글에 좋은 예가 있다. 제국의 완벽한 통제에 대한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국을 완벽하게 재현한 지도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지도와 제국의 일대일 대응을 가능케하는 현척지도에 대한 꿈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제국을 파멸로 이끈다. 전 국민이 지도 제작에 온 힘을 소진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Umberto Eco는 IL SECONDO DIARIO MINIMO(1992)에서 매우 짖꿎은 방법으로 이 현척지도의 불가능성을 논증한 바가 있다). 변수를 예측하고 통제하기 위한 여러 정보는 그 자체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정보가 창출하는 역 엔트로피는 소모되는 에너지량에 의해 반드시 다른 곳에서 엔트로피를 생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체계의 완벽한 통제가 효율성을 증가시킬 것 같지만, 사실은 효율성의 정도가 낮아진다. 국가나 사회경제의 관료제적 운용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관료는 자신들이 통제하는 전체체계나 하위체계를 숨막히게 하고, 그 과정에서 관료 자신 또한 질식시켜 버린다. 이를 부정적 피드백이라고 하는데, 하나의 상태는 그것이 관계하는 다른 상태들과의 평형을 유지한다는 일반 경제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어쨌든 완전한 체계는 관료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예외들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된다.
예측과 통제의 연속성에 기초한 완벽한 체계는 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할 비용 혹은 대가 때문에 실패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같은 체계 외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물질 자체의 성질과 같은 체계 내적인 한계 역시 존재한다. 료따르(J-F.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한 논문에서,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지면이 필요한 과학적 성과들(양자역학이나 원자 물리학의 도입, 새로운 수학적 인식과 같은)을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나열만 하자면 이러하다: 구(求)체의 부피에 따라 변화하는 내부 공기 량의 밀도 측정에서 나타나는 산발성(Jean Perrin의 실험), 비누와 소금이 섞인 물거품의 외형과 같이 표면에 접선을 그을 수 없는 불규칙성을 갖는 함수의 존재(Mandelbrot의 도함수 논의), 정밀측정의 한계를 보여주는 미소입자의 브라운 운동(Brownian movement), 브리타니 해안선, 분화구로 뒤덮인 달의 표면, 별을 이루는 물질의 분포, 전화 통화중의 혼선 발생 빈도, 대기의 난류나 구름의 모양과 같이 윤곽이나 분포의 규칙성을 보여줄 수 없는 대상, 만델브로(Mandelbrot)가 보여주었던 자기-상사성(self-similarity)을 갖는 프랙탈(Fractal)구조, 둘 이상의 통제변수가 동시에 역치(threshold)에 도달하였을 때 발생하는 상태변수의 예측불가능성에서 보듯이 결정된 현상들 속에서 발생하는 불연속성에 관한 르네 통(Rene' Thom)의 파국이론(catastrophe theory), 역설이론을 정신분열증에 화용론적으로 적용한 팔로알토(Palo Alto) 학파의 이중구속 이론(Double Bind Theory) 등이 바로 그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무엇일까? 료따르에 따르면 "연속 미분함수는 지식과 예측의 패러다임으로서 더 이상 우월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예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확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불확실성(통제의 결여)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며, 불확실성은 정확성과 함께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체계의 구성은 예외들을 배제하는 과정이 아니라 반대로 예외로부터 파생하는 것이 아닐까? 프로이드가 두개의 본능(생의 본능과 죽음 본능)을 불가분한 것으로 보았듯이, 체계는 그 자신 안에 체계를 벗어나는 예외들, 다시 말해 그 자신의 역설을 스스로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존재 윤리학적 질문을 하나 덧붙여야겠다. 만일에 완벽한 체계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이 가정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 간단한 예로, 어느 공무원이 자신의 공무를 매끄럽게 해줄 완벽한 체계를 확립했다면, 그래서 더 이상 불필요한 예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이 질문에는 이상적 관료체계를 추구하는 개인의 모순적 존재를 설명해줄 근거가 있다. 완벽한 체계가 불변의 상태에 이르면, 그 체계의 수행자들은 소멸되어야 한다. 우발적인 예외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 공무원이 왜 거기에 앉아 있어야 하겠는가? 어떤 체계에 있어 예외들의 소멸이란 그 수행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칸트(I. Kant)적 의미에서 순수 형식이 되어 가는 현대의 법체계에 있어, 그 주체가 더 이상 입법부나 사법부가 아니며 법관이나 법인은 더더욱 아니듯이 말이다. 이것이 시스템의 이데아가 아니겠는가? 포이에르바하(Ludwig. A. Feuerbach)는 『기독교의 본질 Wesen des Christentums』에서, 신이란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절대적인 표상으로 전화된 인간 자신의 속성이라고 쓴 바가 있다. 하나의 대상 일반 혹은 그 이데아가 확립되고 나면, 이제 모든 현상들의 배후에 바로 그 표상이 원인으로 자리 잡는다. 이것이 이른바 소외된 사회 속에서의 주체의 전도(顚倒)된 이미지이다. 지고(至高)의 존재는 종교적 환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는 그 보다 더 종교적인 강박이 있다. 신경증적이기까지 한 체계에의 망상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주체는 더 이상 그 체계를 운용하는 수행자가 아니다. 수행자란 운용 절차상의 한 기능일 뿐이다. 체계의 신경증적 망상이란 바로 체계 그 자체가 순수 형식으로서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개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추상적 인간으로 혹은 인간 일반으로 부정하거나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에 살아갈 수 있다면 체계에 내재한 궁극적인 역설이란 바로 이 개인들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이 하나의 예외이다.
이러한 얘기들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예외들이 사라진 사회, 완벽한 체계의 사회가 실현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손가락만 빨고 있겠다는 말인가? 스스로 체계 자체가 되어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 사회의 관료에게 필요한 것은 예외 없는 체계나, 그 체계에 대한 사색이 아니다. 완전한 체계란 무능력의 망상적 반어(反語)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외들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음을 수긍하는 것, 그리고 이들을 단발적으로 처리하는 능력, 즉 땜질 작업에서나 있을 법한 유연함과 협상능력이다. 엔지니어가 아니라 땜쟁이가 될 것을 당부한다. 또 그들이 거기에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목적이 아니겠는가? 개인의 삶이란 최종적인 체계나 목적을 향한 과정이 아니다. 최종적이라고 가정된 체계의 예외들, 그 내부의 역설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예외 없이 지켜지는 원칙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관료라고 해서 이 원칙이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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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은 하늘의 것이지요.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만이 완벽할 수 있고 완벽하고 또 그래서 부족한 인간은 신에 의지해야한다는 것이 서양이 그리스도 이후로 바탕했던 그들 존재의 근간이요 지향이었죠. 사회의 완벽성이라던가 체계의 완벽성이란 것은 그러한 그들의 의식과 존재의 바탕에 드리워진 것에 대한 투시일 것이고 또 따라서 그러한 것이 현실적으로 많이 추구되었었던 것 같더군요.
료타로의 이야기도 재미있군요.얼마전 다른 웹사이트에서 포이에르바하를 열심히 번역하던 웹서퍼를 보면서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보았던 포씨가 단지 플라톤과 형이상학에 대한 몰이해자란 생각도 들더군요. 우리의 현실이 결코 완벽할 수 없고 또 그러한 완벽에 알레르기를 보일지 몰라도 하지만 관료에 있어서 그 어떤완벽이란 게 없다면 관료가 관료일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세상에 필요한 완벽이 있고 안그런 완벽이란 게 있는 것 같기도 한 아이러니한 말인지도 모른다면, 그 어떤 완벽(어떤 건지는 몰라도)조차도 없다면 내가 나이고 관료가 관료가 관료일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언제나 불만인게 그거지만, 진정한 완벽의 세계는 너에게도 아닌 나에게도 아닌 그 무한의 시공속에서 변치않고 영원하다는 플라톤의 이데아가 다시 생각나는군요.
2006/02/01 15:03
고도의 질서?를 향해 나아가려는 닫힌 계,(세상)에선 각 개인이 '엔트로피'이고 허상의 목적을 향해 질주하는 '나'라는 '닫힌' 계에선 '오늘'이 바로 '내일'을 위해 소모된(변화된) 엔트로피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오늘'이 없는 내일을 위해서만 달려가는 이들에게 '오늘'은, 미래의 '질서'를 위해 소비된 에너지의 죽은 형태, 즉 '무질서' 밖엔 안되니까요..
제가 혹시 훈님의 글을 잘못 이해했는가요?
아뭏든,, 마지막 문장, "개인의 삶이란,,,달라질까?" 이 것은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한 마디 였습니다. 좀(아니 많이) 딱딱한 글이지만^^;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2006/02/02 21:59
음 . . . 잘못 이해하신 것 같지는 않구요, . . 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계신것 같네요. . . 특히, 마지막 구절에 밑줄을 그으신 것을 보니 말이죠. . . 과정으로서의 삶과 목적 실현으로서의 삶 . . .주인의 삶과 노예의 삶 . . 향유와 소유 . . 흔히 저 두 방식의 삶을 여행에 비유하곤 하는데요. . 잘 아실테니 각설하구요.^^
궁금하군요. . 저 마지막 구절 "개인의 삶 . . . 달라질까?"이 사과꽃님의 어떤 점을 되돌아보게 했는지. . . 2006/02/03 05:27
혹시 사과꽃님과 경북과 관련이 있으신지도 모를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요사이 퇴계의 기고봉과의 서신 문답을 공부하고 있느데, 이야기 하시는 것이 퇴계적인 것과 상당히 비슷하단 생각이 드니까 말이죠.각설하고,
개인과 엔트로피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개인의 상황이나 실제를 엔트로피로 한다는 것은 개인의 개인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죠. 꼭 퇴계의 이야기와 관련을 짓지 않더라도, 실재의 궁극적 현현으로 볼 수 있는 개인에 대한 편향적인 이해는 개인의 왜곡뿐만이 아니라 엔트로피조차도 개별화하여서 원래의 열역학이 가지는 통계적 불확정성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지 모르겠군요. 어찌 튈 지 몰라서 혼란스럽긴 하지만, 엔트로피가 보면 그게 반 엔트로피일 수도 있으니까요/
참! 오랬만이시네요.... 2006/02/03 15:57
내삶이 하나의 일관된 체계여야한다는 전제아래 행동과 사고를 정렬하는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위로받는 느낌입니다. 유연함과 협상능력이란 말을 기억하겠습니다 2006/03/28 0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