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질서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약간 단순하긴 하지만, 경험적으로 알기 쉽게 나무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나무는 우리가 흔히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보는 방식으로 확인 가능한 외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간적인 외형을 취하고 있는 것이죠. 나뭇가지도 있고, 뿌리도 있고, 줄기, 몸통, . . . 이렇게 어떤 윤곽선을 가지고 있는 형태, 위치, 규모와 같은 공간적 위상을 가늠하면서 우리는 보통 나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나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식별 가능한 형태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의 형태 아래에는 보다 근본적인 물질을 이루고 있는 섬유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바라보면, 나무의 질료인 섬유질 역시 어떤 점에서는 또 하나의 공간적 외형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수분이라고 하는 또 다른 질료가 있습니다. 이러한 위상을 계속 확장시켜보면, 수분은 또 무엇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무엇 무엇은 또 무엇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 . .분자, 원자, 양자, 쿼크, . . . 한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물학적 실재 외에도, 나무는 계절에 따라 그 색과 부피와 길이, . . 모든 것들이 변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므로 공간적으로 멈추어 있지도 않고, 풍화를 겪기 때문에 화학적으로 정지해 있지도 않고, 세월이 지나면서 외형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질료들까지도 변질되어 전혀 새로운 질을 취하기도 하는 것이죠. 광합성도 합니다. 한없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 변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나무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범우주적인 흐름과 함께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형을 이루고 있는 형상과, 그 형상의 실질적인 질료를 각각 현실태(actuality)와 잠재태(virtuality)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있고, 포함되어 있는 관계가 교차하고, 서로를 교환하면서, 다중적 총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말하거나 생각할 때에는 우리의 눈이나 촉각과 같은 (인간적)감각이 포착한 대상 혹은 특정한 윤곽선을 갖는 형태를 떠올리지만, 실재로서의 "나무"는 그것을 넘어서 있으며, 우리의 감각과 의식을 초과하고 있는 것이죠. 즉 나무는 과잉된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섬유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수분은 더더욱 아니죠. 그 중 어느 하나를 결정하여 나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무의 실재는 바로 그 모든 것의 총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실재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변화와 변질과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나무를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사물의 질서가 두 개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1) 하나는 우리가 이름으로 부르는 것,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 흐름이나 운동이 어떤 순간에 완결된 상태(culminating point, pose), 윤곽선이 뚜렷한 상태, 공간화 되어 특정한 위치를 취하고 있는 상태, 감각으로 식별 가능한 상태, 의식에 의해 구체화 된 상태, 현실화된 상태(the actual), . . . 가령, 사물들은 우리가 식별가능한 색이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붉은 사과, 푸른 하늘, 잿빛 바다, . . 등. 이들은 모두가 사물의 특정 상태(a state of being)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이 상태는 그 사물의 전면에서 대표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이 특정 상태들 간의 이동과 이행을 운동, 흐름, 실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단편적인 사진들의 연속이 한편의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2) 사물의 또 다른 질서도 있어요. 그것은 바로 그 사물의 공간적 외형이나 형상의 이면에 실재하고 있는 흐름, 리듬, 운동, 변질과 같은 것이죠. 바로 위에서 설명했던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령, 공간적인 운동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사자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리 저리 위치 이동을 합니다. 관찰 가능한 현실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위치 이동의 심층에는 또 다른 형태의 운동이 있습니다. 바로 사자의 근육운동에서 비롯되는 몸의 변화, 허기 상태, 나아가 공간의 멀고 가까운 상태에 따라 그 동물 전체의 경험적 상태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잠재적이냐 하면, 아직 어떤 특정 상태로 현실화되어 드러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섬유질에 대한 수분이 그렇듯이, 수분에 대한 분자가 그렇듯이, 엄연히 현실적인 상태의 뒤에 숨어서 실재하고 있는 것이고, 많든 적든 그 사자의 현실적 운동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고, 그 영향을 받기도 하는 겁니다. 잠재적인 것 역시 하나의 실재인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 두 질서의 총체를 우리는 "실재"(Reality)라고 부릅니다. 실재는 옛날 관념론자들이 말했던 식으로 모순이 없는 완전무결한 초월적 상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의 총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사자뿐만 아니라, 그 사자를 둘러싼 모든 경험적 우주적 총체. 이것이 바로 실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리적, 생물학적, 역학적 실재 외에 또 다른 실재가 있어요. 나무는 우람해 보이기도 하고, 날씬해 보이기도 하고, 또 유구한 모습으로 믿음직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어떨 때 보면 슬퍼 보이기도 하죠. 우울해보이기도 하고, 발랄해 보이기도 하고, . . . 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그것을 바라보거나 경험하는 의식 주체의 주관적 상태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주관적 상태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것들도 역시 나무의 어떤 속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주체의 의식에 난데없이 그 속성들이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무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느낌이고, 이 느낌의 속성은 나무의 물질적 상태와 질료들이 모여서 하나의 총체를 이루면서 효과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나무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거나, 어머니를 떠올리거나, 세월 자체를 떠올리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주관적 상태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떠어떠한 주관적 상태가 그 나무의 물질적 속성들이 내고 있는 잠재적 효과들과 공명(resonance)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공명 속에서 개별적인 존재자들은 하나의 단일한 흐름들 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대로 나무의 흔들림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 흔들림 속에서 생겨나는 어떤 감정 상태나 상상을 만들어내려면, 그 나무가 바람에 의해 흔들릴 때 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바로 그 기다림이 우리의 주관적 상태가 결코 우리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예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감정 상태들은 나무의 물질적 조건들 속에 묶여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이 사라진다면, 그것들 역시 현실적으로 드러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물질 자체는 아닙니다. 물질들 속에 깃들어 있는 어떤 잠재적인 것이죠. 이것은 드러날 수도 있고, 드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나무의 속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허상이 아닙니다. 잠재적인 것입니다. 내 손에 지금 볼펜 한 자루가 쥐어져 있어요. 다른 볼펜들과 모양이나 구성물이나 색, . . .등등, 물리적인 상태들은 다른 볼펜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볼펜입니다. 그런데, 이 볼펜을 쥐면 다른 볼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어요. 눈을 감고 다른 볼펜을 쥔다면, 그 느낌이 사라져 버리겠죠. 오래된 물건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만져만 보는 것으로도 금방 식별 가능한 경우를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물건만이 가지는 특별한 어떤 질료인 것이죠. 예술 작품으로서의 도자기가 그 좋은 예입니다. 도자기 애호가들이 도자기를 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가격이나 역사가 아니라, 바로 그 도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느낌입니다. 가격이나 역사는 그 느낌이라고 하는 실체의 결과나 조건일 뿐이죠. 실체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고(어머니, 아버지, 간호사, 의사, 딸, 이웃 . . . 등), 생물학적 혹은 육체적 존재이기도 하고(여자, 인간, 동물, . . . DNA, 세포, 피부를 소유한), 물리적 존재(공간을 점유하면서 신체를 확장하는), 기하학적 존재(특정 공간 상태 속에서 좌표를 갖는)이기도 합니다. 철학적 존재(가치관, 윤리, 비젼, 미적 감각, 호감, 추상관념, 이데올로기를 소유한)이기도 하죠. 심지어는 꿈을 꾸는 존재, 거짓말하는 존재, . . . 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어떤 하나의 실재가 그녀 자신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 그녀의 실재인 것이죠. 우리는 그 잠재적인 실재를 어떤 필요에 따라, 특정한 기준과 체계를 가지고 그 실재를 분류하고(생물학적 분류, 기하학적 분류, 철학적 분류, . . .), 그렇게 분류된 현실태에 이름을 붙인다. 하나의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 사람은 사회적 혹은 과학적 질서에만 속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실재, 즉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고유한 슬픔, 온화함, 무게(물리적인 것이 아닌), 다정함, 성마름, 열정, 질투, 날카로움, . . . 또 그 모든 것의 총체로서의 그 사람! . . . 슬픔이나 온화함이라고 해서, 일반화된 슬픔이나 온화함이 아니라,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슬픔과 온화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고 있는, . . . 동물적 기호(sign) 같은. 동물들은 아마도 이 기호들로 소통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것은 물질과 육체 속에 담겨있고, 물질과 함께 존재하고 있고, 물질들 사이에서, 물질들의 배열과 관계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보이긴 하지만, 절대로 물질이나 육체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사회도 아닙니다. 과학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사람의 물질이나 육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고유의 존재를 부여해주는 서명(signature)이라 할까요? 그것은 육체를 넘어서 있고, 육체가 사라져도 남아있는 그 무엇이며, 어쩌다가 어떤 우연적인 만남이나 일치에 의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그 존재의 본질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것(the real)이라고 부릅니다. 이 진정한 것은 윤곽선이나 외형처럼, 다른 존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람 자신 안에 깃들어 있고, 그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 볼펜에서 내가 느꼈던 진정한 것뿐만 아니라, 영철만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것이 있으며, 영희만의 진정한 것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만의 고유한 진정함이 있습니다(자본주의가 욕을 먹는 이유가 바로 이 진정함을 공간적이고 양(量)적인 가치들로 난도질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 육체와 사회와 물리적 세계를 넘어서는 잠재적 영혼이라고나 할까요? 이것은 허상이 아니라, 존재가 가지고 있는 (시간속의)최종적인 본질입니다. 기억의 총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기억은 허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어떤 사물을 그것이게끔 해준다. 기억이 아니라면, 내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주변의 사물들이 그냥 순간의 점들로 흩어져버릴 것이고, 우리의 의식은 영원한 변화와 흐름의 급류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매순간 멀미를 느끼며 살아야 할 것이다. 기억은 사물들을 지속하게 한다. 그래서 그 사물을 시간 속에서 그 자신이게끔 만들어 준다. 허상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만의 특이한 기억이 있긴 하지만, 기억은 인간의 전유물은 아니다. 또 기억은 인간적 의식의 결과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는 의식을 벗어난 몸과 사물들 속에 깃든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인 것이죠. 기억은 심리를 넘어서 있고,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어쨌든 그 진정한 것은 순간적인 것도 아니고, 공간적인 것도 아니고, 육체적인 것도 아니고, 오로지 시간을 통해서만, 시간에 의해서만 완성됩니다(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과학적 시간, 즉 단위로 쪼개어 양적인 것들의 연속을 가정한 수학적 시간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지속하고 있는 우리의 경험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아니면 결코 드러나지 않는 최종적인 본질 같은 것이라 할까요? 본질은 언제나 맨 나중에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랫동안 지내온 사람에게서만 가지게 되는 진정함이 있습니다. 나의 오래된 친구의 눈 속에만 깃들어 있는 나의 어린 시절 같은. 이력서나, 건강 진단서나, 외모나, 한 두 마디의 어설픈 사회적 표현과 같은 순간적인 것들 속에서는 담아낼 수 없는. . . . 그렇기 때문에, 가령, 진정한 인간관계는 도덕과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이 추구하고 있고,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그 진정한 것이니까요. 한폭의 그림은 형상이나 표상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남긴 것도 아니고, 과학적 정보를 남긴 것도 아니고, 한 사회의 역사를 남긴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진정한 것! 그것을 남긴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물건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저 진정한 것(the real thing)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대상의 최종적 본질, 즉 실재에 직접 위치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가장 경험적인 얘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험하는 시간만이 또한 유일하게 단일한 시간이 되겠죠. 할수만 있다면, 공동체라는 이름을 거기에 붙여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가령, 예술의 언어인 은유의 예를 들어보죠. "나무는 세월이다"라는 은유를 보면, 나무라고 하는 물질적 실체와 세월이라고 하는 개념적 추상이 서로 공명하고 있습니다. 나무의 어떤 본질과 세월의 어떤 본질이 드러난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 같은 것이죠. 어떤 본질? 가령, 유구함이라든가, 막대함이라든가, 숭고함이라든가, . . . 예술의 언어는 과학이나 법의 언어처럼 사물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순간적 상태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잠재적인 것, 즉 그 사물 고유의 진정함(the real)을 표현하는 겁니다. 공간과 수(number)의 언어인 과학의 언어가 그 사람의 다정함을 말해주겠습니까? 재판장에서 범람하는 법의 언어가 과연 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당신의 아들의 상냥함을 판단해 주겠습니까? 법의 언어는 결과의 언어일 뿐인데 말입니다. . . . 김우창 선생님은 "시가 가장 객관적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런 뜻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에 관한 어떠한 서류도 내게는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옷이어서, 오히려 나에 관한 시 한편이 내 몸에 가장 잘 맞는 옷이라는 것이죠. 과학이 진정한 사회를 만들지 않습니다. 법은 더더욱 아닙니다(그렇다고해서, 과학과 법을 송두리채 폄하 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관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죠). 오로지 예술만이 진정한 사회를 만듭니다. 왜냐하면, . . . 오래된 시간을 통해 드러난 그 유구함이나 숭고함은 나무의 속성이기도 하고, 세월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세 흐름이 공명하는 가운데, 실재의 단일한 시간을 획득한 것이죠. 우리가 죽을때 까지 찾아나서야 할, . . . 진정한 공동체의 형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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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7/16 진정한 것에 대하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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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한 폭의 그림도 오직 나만의 고유한 기억으로서 남겠군요. 훈님의 글도 제게 그러합니다. 저의 고유한 느낌과 이해의 총체로서의 기억, 저만의 기억으로 영원히(살아있는 한) 남을테죠.
(갓난아이에게 그 집안의 성격이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억>이 잠재/유전되었다라고도 할 수 있을 거 같네요)
딱딱한 형태를 갖추었다고 얼핏 보여지는 나무탁자도 원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원자 속의 양자, 쿼크들이 알갱이로 파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테니 항상 역동적인 모습이겠지요. 그렇다면 기억은, 항상 변화하는 현상의 단면만을 잡아둔 <액츄얼리티와 버츄얼리티의 합성사진>같은 것이기 때문에 존재의 어느 <한 면>만을 확고히 해주는 건 아닐까...요? 변화하는 본질 자체가 아니라 본질의 일부,,말이죠
이번엔 조용히 읽고만 가려고 했는데,, 글 안에 제 이름이 있는 걸 보곤 뜨끔~ 놀랐습니다 ㅎㅎ
2006/03/24 09:26
개인의, 사물의 고유속성을 비교하고 계량하는 것.
우위를 가르고 하나의 가치기준으로 환치하는 것.
결국 하나만 남고 비교된 나머지는 사라지는 것.
자본주의와 그 천박함에 익숙해진 우리들을 생각했습니다.
청마가 그런 말을 했죠.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도 우주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고.
훈님 때문에 공부 많이 합니다.
언제고 꼭 만나서 밥 사겠습니다.^^ 2006/03/24 10:34
기억과 사고,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함께 조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 공부가 잘 못되면, 진정한 삶과 세계를 다 놓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의 글방에 지루하지만 진정한 것에 대한 소견을 정리하여 올려보았습니다. 귀한 소통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2006/03/24 15:20
네..사과꽃님 . . 칭찬 안해주면 삐질것 같은 사과님을 매개로 해서 지두선님과 제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죠..^^ ...기억의 이론가 베르그송에 따르면, 기억은 특정한 현상이나 사건을 정지된 사진처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으로서의 과거 전체를 보존시키고 있다고 말하거든요..우리 생각에는 과거의 어떤 특정 부분이 떠올려지는 것 같지만, 실은 의식으로 떠올려진 기억 외에도, 무의식적인 기억이 있다는 것이죠..그래서 변화하는 현상의 단면만을 잡아두었다고 해버리면, 기억이나 의식의 흐름을 공간적으로 정지시켜 놓고 생각하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우리가 어떤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거나 기억할때, 한 장의 사진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흐름의 파노라마를 단번에 떠올린다고나 할까요? 시간의 지속과 흐름이 단번에 나타나면서, 우리는 마치 정지된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질적인 흐름 자체를 느끼고 있죠.. 그래서..그 배열 중 단 하나라도 변한다면, 그 과거 전체가 다르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기억은 사진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입니다...그리고,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 혹은 최종적 계시 같은 것 . . 존재의 일면이 아니라, 본질 맞습니다.. 2006/03/25 13:38
훈님~ 전 보통 의자를 비스듬히 하구 다리를 올리구 대충 그렇게 글읽는데
훈님글은 의자에서 허리를 세우고 뇌도 세우고ㅎ 좌우간 세울거 다 세워
똑바로 읽어야 합니다^^길기도 해서 금새 읽어야할땐 아예 엄두를 안냅니다
하지만,읽기 시작하면 내리 읽게 됩니다^^
그리고 충만되어지며 공부가 재밌기도 합니다 ~~
위에글 아직 안읽었어요 키키 감상문?쓸거 같지 않네요 ㅎㅎㅎ
2006/03/25 21:18
네..소풍님 . . 고맙습니다 . . 제가 바라는거네요?! . . 대충 훑어본다거나, 속독으로 내리 읽어도 금새 파악이 되는, 그러다 보니 그냥 잊혀지고 마는 맥빠진 글이 아니라, 온몸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글이요... 다리를 올리구 대충 읽는 글도 있고, 허리를 빧빧히 세우고 읽는 글도 있지요..^^ ...하지만, 전 많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좋아하는 것보다는, 꼼꼼히 여러번 읽히는 것이 더 좋더군요 ^^ . .
어려우면 어려운데로 읽으시라고 조언하는 바입니다...누구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죠...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것만 품에 안고, 자신의 길을 따라 멀리 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거죠^^...사람들은 뭐든지 소유하려고 합니다..그래서, 어떤 글을 읽으면서도, 그 글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자 하죠.. 그러다보니, 읽기 까다로운 글에 대해서는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합니다.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글을 쓴 사람에게 화가나고, . . 무엇보다도, 잡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짜증이 나는 것이죠.... 어려우면 어려운데로 재미를 찾으시려는 소풍님을 보니 . . 기분이 좋아지네요. . 삶을 긍정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 제 글이 소풍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면, 그것으로 바랄게 없겠습니다.^^ 2006/03/26 13:07
두뇌는 모든 경험을 왜 기록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매일 매일 일상의 경험에서 매사 기억을 통하여 삶을 보아야만 하는가?
시간의 사기꾼을 사랑한 죄가, 이렇게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하는 똑 같은 주제를 두고 다시 한 번 지두선 방에서 함께 나누고자 올려 놓았답니다. 귀한 방문 있길 바라며, 그동안 이 문제로 긴 담론을 이어간 님의 깊은 관심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존재의 접근에서 모든 철학자들이 근본적인 한계와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ㅇ니식의 문제와 시간의 함정에 봉착했지요. 대표적으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란 관계의 화두를 놓고 고민했지요. 이 문제를 명확히 통찰해 낸 것은 철학이 아닙니다. 금세기 대자유인이자 현자인 지두선사에 와서, 인식의 한계와 존재의 발견을 내 놓았지요. 2006/03/27 13:30
심포지엄엔가도 비슷한 말이 있다고 그러더군요. 미적 아름다움을 통해서 존재의 진리에 도달한다던가,,,,비록 사람마다 존재의 의미가 다를지라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들이 예술적이든 철학적이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율법이나 형식적인 것만의 의미만을 이야기하는 현실을 벗어나 믿음을 존재의 근거로 이야기 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예술적 사회의 건설과도 맥락을 같이 할 것 같네요. 그래요 삶은 사랑이고 또 사랑이 곧 진리이고 실재일 수 있는 예술이야 말로 참된 실재일 수 있을 것 같네요. 2006/03/28 19:40
네..song님 . .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에로스)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어지게 하고, . . 시인이 되게 하고. . . 그래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모든 신들은 에로스의 제자라고 . . 아가톤의 말이었던것 같은데요 . .^^ .. 그가 말했던 아름다움이 . . 조화, 균형, . . 같은 고전적인 가치들었기 때문에..요즘의 미학과는 좀 안 맞는 면이 있긴 하지만 . .하지만 어쨌든 좋은 말입니다. 사랑...^^ . . 심포지엄을 상기시켜 주셨군요^^ . . 감사합니다.. 2006/03/29 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