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0/08 옥희의 영화 (10)
  2. 2009/05/10 잠재 이미지: 지각의 중화 혹은 이행
  3. 2006/07/17 브록백 마운틴 (6)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작품은 두 번 이상 보아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우리의 물리적 생리적 윤리적 한계 때문에, 첫 눈에는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 전체를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이상을 보아야 보다 많은 이미지를 읽을 수가 있고, 또 그러면서 우리는 그 작품들의 새로운 의미들에 눈을 뜨게 된다. 실제로 두 번 이상 보면 그 작품이 새로워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홍상수의 작품들은 두 번 세 번 네 번 이상을 보아도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 같지가 않다. 처음 보았을 때와 두 번 이상을 보았을 때 의미에서나 심경에서나 큰 변화가 없는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의도가 다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놓쳤던 장면조차 다시 보이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그의 작품이 어려워서? 즉 감추어진 것이 많아 아직 뭔가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나 쉽고 뻔해서 첫 눈에 이미 다 드러난 것일까?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둘 모두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조로운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작품 안에 두고 두고 읽어야 할 어떤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제시하는 남녀들의 무의식적 의식적 욕망과 충동들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형태도 다르고 질도 전혀 다르다. 가령,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여행중에 보여주었던 충동들은 <생활의 발견>에서의 영수의 그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또 여인들의 사랑과 분노 그리고 배신 역시 각각의 인물들이 모두 본성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안에는 자연적 질서의 반복이라는 거대한 자연주의적 주제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가령, 셰익스피어의 소란을 닮은 <해변의 여인>에서의 한 밤의 소란이 해변 밖으로 한꺼번에 쓸려나가 고요해진 아침에 고현정 분이 난간 계단에 앉아 사색에 잠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는 놀라운 장면, 또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되돌아가는 장면 등), 그 차이들은 어느새 거대한 파도 속에서 중화되고 단일화 된다. 격동의 시간들은 인간이 아무리 의미의 겹을 쌓으려 해도 결국은 단조롭고 진부한 행동의 아상블라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제 각각 날고 기어봐야 멀리서 보면 모두가 언덕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선(禪)의 요소가 지배적이고 또 선을 추구했던 오즈 야스지로(Ozu Yasujiro)의 세계처럼, 홍상수의 화면에는 주름이 없다. 심지어는 주름과 의미를 만들지 않고 지우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여러 번을 보아도 새로운 의미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주름이 너무나 거대해서, 마치 지구의 자전 소음을 우리가 들을 수 없듯이 혹은 태산의 느리지만 강렬한 변화를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듯이, 주름을 식역 저편에서만 어렴풋이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자락에 끼어 있는 화가가 어떻게 산의 거대한 피마준(披麻皴)을 구사하겠는가?

그런데 최근에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에 영화 감독을 직업으로 삼은 인물을 등장시켜, 자유간접화법 형식으로, 마치 자신의 예술관을 변명하고 옹호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다. 일부 비평가들을 의식해서인지, 자신의 자발적 불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세계에 스스로 회의감을 품었거나, 아니면 회의적 비전을 의식했거나, 최소한 그것을 사색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많은 감독(김상경, 김승우, 이선균 등이 맡았던)들이 영화의 의미(목적, 기능 등)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어떤 일관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이 일관성은 최근에 개봉한 <옥희의 영화>의 이선균 분이 시사회에서 술김에 잠깐 진담으로 내뱉은, 아주 모호하고도 혼란스러운 그 "깔때기 이론"에서 다소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논조는 물론 예술적 편협, 왜곡, 기만 등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가 일관되게 구사하는 특유한 화면의 질이나 편집의 양태 또한 이러한 논조를 정당화 한다. 그러나 점점 그의 작품들이 전개되어가는 가운데,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위에서 말한 홍상수의 두 세계(개인적 욕망과 충동의 세계와 반복의 세계)의 역학과는 판이하게도, 이 감독들(홍상수 자신일 수도 있는)은 모든 예술적 시도와 창조조차 편협이나 왜곡으로 혼동하거나 그 둘을 동일시하여, 결국은 아이러니하게도 편협과 왜곡을 피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자기도 모르게 영화를 지리멸렬한 몸짓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만들어 놓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투명해지고 단순해지려는 시도가 어쩐지 무의미와 공허를 창조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한편 반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들의 생각은 영화를 세계와 혹은 사물 자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는 영화를 진리나 실체와 혼동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영화에 대한 무의식적 과대평가로 인해, 영화와 현실의 혼동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영화가 현실과 동일한 그 무엇, 혹은 동일한 밀도의 그 무엇이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 비좁은 프레임과 필름 공간 속에 현실을 담아야 할까?

자신도 모르게 어떤 세계가 우연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의식하고,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그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을 우리는 거장이라고 부른다. 아직은, 아니 아직도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거대한 세계가 자신도 모르게 해댄 어떤 우연한 몸짓이 아니라 의식적 고뇌에서 나오는 것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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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홍상수 영상의 중요한 요소인 과잉실재는, 세계를 요약하여 그 힘을 최대화하는 표현(주의)적 경제성과 대립하고 있다. 그 형식적인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의 사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그 고유한 의미에서의 몽따쥬의 사용도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카메라가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전경화하기 위해 그들을 따라다니는 일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지만, 인물들은 프레임의 다른 모든 요소들 속에 묻혀있을 뿐이다), 혹은 빛과 색채를 회화적으로 사용하여 그들의 과도한 대립이나 강조를 뚜렷이 하는 일이 없다든지, 그리고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적 배치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 혹은 숨긴다든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문학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들과 이들의 관계 그리고 욕망이나 배신 혹은 권력과 같은 소재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 전체를 자세히 훑어보면, 그러한 소재들이 담론으로 다루어지거나, 서사적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 소재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당화할 수 없는 동작들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근원적 기원이나 최종적 결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작들과 언어는 중심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요약되지도 않으며, 그 힘을 최대화할 수도 없다. 홍상수 영화에 있어 유일하게 스며있는 문학적 요소―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는 산만한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이름 모를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모든 문제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주의적 사실들로부터 파생된다. 또한 이것이 바로 제임스(William James)를 위시하여 몇 몇 화용론자(pragmatists)들이 생각했던 실재이다. 이들이 생각했던 실재란 바로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세계, 미리 결정된 중심을 가지지 않는 세계, 인간적 지각 이전에 존재하는 (지각이)소거된 상태의 세계이다.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상태들 간의 이행, 나아가 지각의 이행 그 자체가 아닐까? 이를 명시적으로 예증할 수 있는 좋은 이미지가 하나 있다.

홍상수의 두 번째 영화인 <오! 수정>은 개인적으로나 사무적으로나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세 사람―영화 감독인 영수, 작가인 수정, 그리고 영수의 돈 많은 후배 재훈―의 사랑 이야기를 몇 편의 에피소드로 꾸며놓았다. 그런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동일한 사실에 대해 세 사람 각자의 관점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이 각 에피소드에 따라 두 번 혹은 세 번 이상 반복되어 제시되지만, 카메라의 위치나 사건의 내용은 매번 약간씩 다르게 편집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화법은 개인들의 서로 다른 기억과 그 재구성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는 형식은 개인들간의 상호 주관적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 작품에는 매우 독특한 장면 하나가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와 전화통화 중에 기사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화가 난 기사는 지금 당장 사무실에 갈 테니 그 자리에 있으라고 경고한 뒤에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나서 운전기사와 영수가 사무실에서 맞대면하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이 두 장면은 하나의 사건(두 사람의 대면)을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첫 번째로 제시된 장면은 영수의 점잖은 사과로 별일 없이 화해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장면이 영수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 사실로 제시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장면에서 제시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의 폭언과 폭력에 의해 따귀까지 맞으며 모욕을 당한다. 이 장면은 첫 번째 제시되었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객관성이란 상대적인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어떤 쇼트가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가지려면, 그것이 다른 장면을 교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번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의 점잖은 사과와 화해가 영수의 주관적이고도 자의적인 기억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 두 번째 쇼트는 최초의 화해 사실을 교정하면서, 그 쇼트를 (영수의) 주관적 관점으로 변형시키고, 그 자신이 스스로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취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장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면이 잠시 지속되다가 카메라는 서서히 왼쪽으로 패닝하여 그 수치스러운 장면을 숨어서 바라보는 수정을 담는다. 따라서 첫 번째 제시된 장면을 교정하여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두 번째 장면은, 사실은 수정의 주관성에 의해 교정된 또 하나의 주관적 이미지였음이 드러난다. 이 두 번째 쇼트에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흔히 영화적 지각의 두 형태(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를 말한다. 주관적 지각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G. Deleuze)는 이를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우선 눈이 부상당한 사람이 자신의 파이프를 보고 있는 경우에, 이를 흐린 초점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감각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카메라의 지각은 부상당한 그 사람의 주관적 감각과 동일한 것이 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춤이나 축제의 풍경이 그 안에 참석하고 있는 어떤 인물에 의해 보여지는 경우이다. 이를 행동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움직이고 있는 인물이 어떤 대상을 볼 때에는, 그 자신의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풍경이 보이므로(흔들거리거나 빙빙 돌거나), 행동 중에 있는 경우라도 주관적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정적 주관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예로, 어떤 여자가 칭찬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이다. 사실은 땅 위에서 단지 시이소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카메라는 그 여자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성으로 그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들뢰즈의 지각-이미지에 대한 이 예들은 그의 책 Cinema I (Minneapolice, 1986)에서 p.71쪽을 참고). 이 이미지들이 주관적 특질을 띠고 있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 장면이 나오기 이전에 혹은 그 이후에 등장하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비교를 통해 교정되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인물은 나중에 가서야 시이소에서 내려오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관객은 그때의 장면이 여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이미 관객은 눈이 부상당한 한 남자와 그의 파이프를 본 바가 있기 때문에, 흐릿하게 처리된 그 파이프의 이미지가 그 남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에 있어 주관적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의 비교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객관적 지각이라고 불리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지각은 흔히 특정한 화면 외부에 있는 누군가의 관점을 통해 보여진 사물이나 풍경을 지칭한다. 확실히 영화에서는 주어진 화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인물이나 사물의 관점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 지각 역시 상대적으로 혹은 비교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화면 외부에 있다고 간주된 관점은 언제든지 화면 내부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영수와 운전기사의 대면을 담은 첫 번째 쇼트를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객관성은 영수가 기사에게 모욕을 당하는 두 번째 쇼트에 의해 교정되어, 이전에 보았던 점잖은 화해가 사실은 (영수의) 주관적 기억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두 번째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수치스런 장면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간주하지만, 곧 이어 수정이 목격하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그 객관적 이미지는 수정의 주관성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영화에 있어 객관적 지각이란 다른 지각을 수정하고 대체하거나 밀어내면서 나오는 것 같다.

따라서 영화적 지각을 주관성과 객관성으로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명목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지각에 있어 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이론상의 추론일 뿐임을 분명히 한 적이 있다. 실제의 지각이란 그 두 이미지가 혼동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특히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성은 상대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특정한 대상을 선택하여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적 이미지의 투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또한 주관적 이미지란 이미 특정한 대상이 객관적으로 보여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양방향 화면(shot-reverse shot)에 있어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상호보완적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양방향 화면에서의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서로 교차하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관점에 의해 포착되고, 또 그 반대의 관점에 의해 다른 하나가 포착된다. 예컨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을 보여주고, 이번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전자를 객관적 이미지로, 후자를 주관적 이미지로 결정할 수가 없다. 이미 전자는 모종의 주관성에 의해 포착된 지각일 수 있으며, 반대로 후자 역시 전자의 주관적 지각이 아닌 그 자체 드러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 비 초점화(zero focalization) 형식을 보면 서술자는 인물의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왕래하는데, 이것은 객관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이기보다는, '서술자=신'의 등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의 최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 소설가들의 양식을 관류하고 있는 '저자의 사라짐'이나 '몰 개성' 혹은 '비 매개'와 같은 개념들 속에는 저자의 신(神)적인 망상의 결과라는 역설이 숨어있다. 저자는 (전통 소설에서처럼)스스로 등장하거나 지시되면서 세계의 일부가 되기를 그치고,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세계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된 신이 아니라 매순간 '느껴지는 신'이 된다(Francis Streegmuller, ed. and tr. The Selected Letters of Gustave Flaubert (N.Y., 1957) p.127.). 조이스(James Joyce)는 『율리시스(Ulysses)』에서 서술자의 위상을 범신론적 신으로까지 고양시키고 있는데, 예를 들어, 우선 한 인물이 속해있는 방안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는 점점 그 인물의 외양으로 묘사가 집중되면서 그 인물 쪽으로 다가간다. 이제 화자와 인물은 너무 가까워져서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급기야는 그 인물이 보는 방식에 따라 방안과 창문 밖에 펼쳐진 바다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 인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이것은 마텔로 탑에서 친구들과 살고 있는 스티븐(Stephen Dedalus)을 묘사하는 장면을 참고. 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p. 3-9). 조이스는 이를 더 밀고 나간다. 우리에게는 '촬스 삼촌의 원리'로 잘 알려진 자유간접화법이 그 예이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그 인물의 고유의 어조를 사용하거나, 그 인물의 내적인 상태를 통해 그의 외관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내부와 외부를 순차적으로 왕래하거나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체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이다: "He[Bloom] foresaw his pale body reclined in it at full, naked, in a womb of warmth, oiled by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 83) 이 예는 목욕탕에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블룸(Leopold Bloom) 자신의 감각적 주관성("a womb of warmth",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을 통해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술자는 인물의 주관성이나 스타일로부터 '감염(contagion)'되어, 내부에 있는 것도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에서는 양방향 화면의 "극단적인 수축"이 일어나기도 한다. L'Herbier의 El Dorado에 좋은 예가 있는데, 미친 여자의 모습을 (객관적 관점으로)제시하고 난 다음에, 그 여자의 관점에서 그녀가 보고 있는 대상을 흐린 초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화면을 결합하여,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미친 여자가 이미 한 화면 안에 흐린 초점으로 제시되는 것이다(이 예는 Deleuze의 Cinema I (Minneapolis, 1986)에서 p. 72를 참고). 이것은 그 여인의 주관적 상태를 통해 포착한 그녀 자신의 객관적 이미지이다. 여기서 객관적 지각과 주관적 지각은 서로 엉키고 수축되어 동시에 펼쳐진다.

물론, 홍상수의 저 장면에는 자유간접 화용법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양방향 화면을 역순으로 진행하면서(즉, 관찰자를 보여주고 다음에 관찰대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찰대상을 보여주고 관찰자가 나온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외부에 머물러 있다. 만일 수정이 목격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다음으로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그 장면 어디에도 수정의 주관적 관점을 예시하는 요소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흐린 초점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수정에게서만 포착할 수 있는 고유한 어조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수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그런데도 어느새 우리는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까지 포함하여 그 장면 전체를 수정의 주관적 포착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장면에서 왼쪽(수정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패닝 과정에서 어떤 알 수 없는 마술이 작용한 것일까? 여기서 패닝의 중요성은 사건의 모든 광경을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주기 위해 프레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으로 국한되거나, 또한 그것이 단순히 풍경의 흐름을 통해 하나의 지각을 다른 하나의 지각으로 교정했거나 대체했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패닝의 더 근본적인 중요성은 카메라가 서서히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특정한 지각의 체계가 구분될 수 없는 흐름으로 변질되고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말했던 실제의 지각 속에 깃 든 비결정성이다. 규정할 수 없는 실제의 지각 속에서 물질은 정신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되고, 마찬가지로 정신은 물질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빛의 굴곡이 점점 내 곁으로 나가오더니, 어느새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나의 의식이 되어버리는 사건과도 같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 있고 또 그 사건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객관적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다시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카메라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채 서로 엉켜 붙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교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변질되고 흐르면서 상관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각의 중화된 이미지일 뿐 아니라, 지각의 흐름이며 상태들간의 이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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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Lee Ang) 감독의 영화 <브록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의 관객들이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동성연애가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이란 가끔 피로를 풀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이 잠깐 기지개를 펴면서 느끼는 세속적 포만감일 뿐이다. 대자연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도시인의 무성의한 냉소주의를 반영한다. 그것은 안락한 차 안에서 달콤한 음악을 들으며 시골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에서인지 창문을 내리고 멈춰 서서, 초가을의 황금물결을 바라다보며 뿌듯해하는 류의 자연관에 불과하다.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서의 자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환타지로 유출된 자연. 우리가 이 영화에서 그러한 것만을 보며 만족한다면, 그저 그런 상투적인 속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앵글로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직접 들어가서 봐야만, 즉 잠을 자고, 밥을 짓고, 시간을 때우는, 거기서 실제로 살고 있는 자로서, 자연과 직접 대면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자연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풍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장소와 현장으로서의 자연을 투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사실, 미 대륙의 자연환경이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유럽이나 아시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종류의 자연사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연 속에 직접 뛰어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관건은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일이다. 마치 풋내기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거울을 보며 폼을 잡다가, 출발선으로 뛰어든 후에 맞닥뜨린 현실이랄까?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 거리다가 주저앉기 십상인. 이것이 바로 저편에서 흐믓해 하던 여행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의 미국인 청년들 잭(Jack Twist)과 에니스(Ennis Delma)의 대자연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거대한 대륙의 평원에 뛰어들어 살아가면서, 여행자처럼 그냥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그 암흑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미국의 성스러운(?) 개척사의 그늘에서 눈에 띄지 않던 현장인들이 느꼈던 대자연과의 미국적 대면, 즉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와 그들 특유의 낙천주의와 공존했던 미국적 프론티어라인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대자연이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빠져 나오고 싶은, 역겹고 무자비한 것이다. 양떼들을 먹어 치우는 코요테, 무서운 곰,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카우보이의 총질, 거친 벌판이나 산속에서의 야영, 그 고독과 밤의 광란, 야밤의 추위나 갑작스러운 폭풍, . . . 이러한 드라마와도 같은 모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혹함이란 무엇보다도 드라마의 부재, 드라마가 불가능한 바로 그 일상적 진부함에 있다. 황량한 대륙의 바람. 정지한 듯 보이는 거대한 뭉게구름. 방문을 닫아버린 디킨슨(Emily Dickenson)이 창가의 일상에서 느꼈을 뜨겁지만 싸늘한 한낮의 햇볕. 꿈쩍도 하지 않고 언제나 저기에 버티고 있는 저 거대한 브록백. 우람한 전나무들의 반복. 그 안에서의 목동들과 양떼들의 반복. 태엽시계의 바늘이나 대수방정식과도 같은 대자연의 일상. 간간히 반복되는 기타의 늘어지는 선율. . . .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이 짓이군! 아침 먹으러 내려왔다, 다시 양 보러 올라가고, 저녁 먹으러 내려왔다, 또 양 보러 올라가고, 밤잠 설치며 코요테나 감시하고. . . 먹고, 지키고, 자고, 먹고, 지키고, 자고 . . . Shit!" 오즈 야스지로(Ozu Yasjiro, 小津安二郞)나 홍상수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계적이고도 진부한 일상들이 비좁은 도시에서가 아니라, 막대한 대자연 한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 전체를 무지막지한 법칙의 흐름 속으로 흡수해 버리는, 중력과도 같은 지긋지긋하고도 끔찍한 힘! 그 힘에 붙들려 잭과 에니스는 온전한 의미에서 정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하루 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간다. 도무지 그들이 산에서 언제 내려올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브록백에서의 미국 카우보이의 실상이었고, 두 젊은 낭만주의적 이탈기계로 하여금, 그들 안에 내재해 있는 힘과 동요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자연이란 견딜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다. 갑자기 눈이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고, 온 몸을 얼어붙게 하는, 가혹한 자연의 섭리들. 모비딕(Moby dick)의  그 써늘한 회백의 색채처럼, 인간적 감동과는 무관한, 미동조차 하지 않는, 무심하고, 비개인적인 자연. 이것이 바로 멜빌(Herman Melville)을 한참이나 지나 20세기가 되어서야 깨닫고 괴로워 했던 미국인들의 자연주의이다.

그와 같은 진부한 삶은 대자연의 침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2의 자연은 그것과 너무나 흡사해서, 아니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과묵하게 한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는 <Bubble>에서 가구점의 카탈로그 만큼이나 지루하고 진부한 미국인의 일상을, 몇 가지의 놀라운 카탈로그 쇼트들의 모음으로 보여주었다(그 영화에서의 살인은 첫 장면에서 해가 뜬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는 순간부터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파헤쳐지는 공동묘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채 뭔가 생각에 사로잡힌 Martha, 강렬하지만 단조로운 기타의 스트로크. . .). 물건들뿐만 아니라 우정, 데이트, 사랑, 자애, 신의(信義), 종교, . . . 그 모든 것들은 집안과 인생에 비치해 두어야 할 빠트려서는 안 될 어떤 품목들이고, 그들은 그 품목들의 소유를 통해 공동체에 참여한다. 한마디로 말해 인생은 실제로 카탈로그의 산물이고, 카탈로그의 집결체이며, 카탈로그는 상품 사회 미국의 삶 그 자체이다. 그것은 19세기의 휘트먼(Walt Whitman)이 시에서 구가했던 카탈로그 집합체와는 그 본질에 있어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전형적인 미국식 인지방식의 하나인 카탈로그는 <브록백 마운틴>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

컨트리 음악 / 청바지 / 카우보이 모자 / 집단 댄스 파티 / 술집에 걸린 커다란 성조기(일찍이 미국의 실내에서 성조기 만큼 자연풍경의 역할을 한 사물도 없을 것이다) /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의 만남과 카-섹스(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남자들끼리의 관계가 암묵적으로 과도하게 금기시 되고 있어서인지, 남녀 관계만큼 따분한 것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 보기에도 낯설어 보이는 노동 / 결혼 /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침실(미국 영화 대부분이 그렇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집세걱정을 하며, 입 냄새가 진동할 것 같은 숨을 헐떡거리며 서로를 만지는 에니스와 그 부인의 애로장면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을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 인형 같은 아이들(그 최악의 의미에서. 한편, 소더버그는 <Bubble>에서 진짜로 인형 공장을 등장시켜, 마치 그 인형들이 마지막 크레딧에서 처럼 일그러진 모습에서 점차 어른들의 꿈의 투사로 변형되어 가는 것처럼 다룬다) / 주말마다 등장하는 교회(미국에서의 교회란 사교를 넘어 하나의 일터이다. 한편, <Bubble>에서는 교회에 앉아 무엇인가에 도취된 몽환적 상태에 빠져 있는 미국인 Martha의 소름 끼치는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 그리고 이 모든 끔찍한 미국의 악몽을 종합하는, 말하자면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말씀)를 들을 때와 동일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신 즉 자연 즉 텔레비전!

이들의 삶은 파큘라(Alan Pakula) 감독의 <암살자(Parallax View)>에서 기자가 요원 테스트를 받을 때, 반사회적인지 아닌지, 정신질환적인지 아닌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바로 그 카탈로그 사진들 속에 있는 삶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식의 세속적 도덕주의의 건전함 속에 깃든 어떤 우울한 색채였고, 첫 눈에 주목할만한 트레일러 지배인의 그 청교도적이고도, 고압적이고도, 고지식한 눈매에서 읽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백인 남자들은 대체로 과묵하다.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우직해 보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덕적이고 둔해 보인다. 그들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알게 된다. 그들은 감성보다는 의무에 더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들과 쾌활한 대화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과 좀 길게 대화를 하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회적 의무에 충실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모종의 자격 같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미국적 일상의 진부함 뿐만이 아니라 일상 자체의 진부함이 있다. 이 영화는 수 많은 카이보이들이 등장했던 서부영화에서는 거의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목동의 실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양떼를 몰고, 맹수들을 쫓는 일을 넘어서서, 야영을 하고, 텐트를 치고, 말뚝을 박고, 불을 지피고, 설거지를 하고, 돌무더기를 쌓고, 나무를 자르고, 끼니를 때우고, . . . 뿐만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생활의 행위들, . . . 이는 인물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큰 흐름에 참여하는 큰 행동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아주 작은 행동들을 요구한다(이러한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삶의 요령[tip]들은, 거대한 물리학 이론이나 생물학 논문을 쓰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고, 미국적 지식의 화용론적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그 행동들은 최종 결말이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취해진 액션이 아니라, 감지하기 어려운 어떤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인해 별 뜻 없이 생겨났다가, 어느새 그것을 취한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표정이나 제스처의 변화를 뜻한다. 우리가 삶의 실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그 감지할 수 없는 표정이나 제스처들의 묶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삶은 큰 행위로서의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의식되지도 않고,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상 죽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탄생한다. 어느 누구도 부른 적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난데없이 튀어나와 버리는 그 자유-모티브들! 이것이 삶의 역설이다.

삶에는 멋진 드라마도 없고, 격렬한 총질도 없으며,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어떤 의미 있는 상징이나 그 가치들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브록백 산맥에 둘러싸여 뜻 없이 먹고 자는 저주와도 같은 삶이다. 그 저주란 가령 끌로드 시몽(Claude Simon)이 심지어 광폭한 전쟁이 지나고 난 흔적 속에서도 발견하였던, 그러한 진부함의 저주이다: "도로를 따라 길게 장식된 화장지의 꽃 줄 광경처럼, 그것은 마치 창자가 다 드러난 여행 가방에서 도무지 헤아릴 길 없이 많은 옷가지가, 대부분이 흑백으로 풀어 헤쳐진 것 같다"(Claude Simon, La route des Flandres (Paris: Minuit, 1960), p. 29.) 시몽의 비유가 주는 슬픔이란 전쟁과 그 가혹한 죽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견딜 수 없는 어떤 사소하고도 가벼운 상태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뿐만 아니라 감옥에도,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Bubble>에서 Martha는 감옥에 투옥된 후에도, 아침에 일어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양치질을 하며 새로운 일상을 맞는다. 혹은, Emily Dickinson의 한 화자는 무덤 속에서 영원히 잠이 들기 직전의 몽롱한 비애의 순간에 갑자기 날아든 파리 한 마리의 성가신 날개 짓과 웅-웅 거리는 소리를 감지한다). 온갖 쓸모 없는 수많은 객체들, 쓰레기통 옆에 떨어진 자그마한 휴지조각 같은, 이미 죽어버린 삶의 무의미를 반복적으로 상기시켜주는, 매일 아침 쉼 없이 쏟아지는 먼지들과 싸우듯이, 그 무수한 부수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매 순간 참아내야 한다는 것!

비극적인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또 다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 정도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냉소주의자가 된다. 거기에는 일상의 진부함의 결과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그 이상이 있다.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이지만, 한편 우리는 간혹 혹은 자주 그 반복적인 일상을 견딜 수 없는 무엇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냉소주의란 무기력한 낭만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 전체에 감돌고 있는 잭과 에니스의 생활에의 냉소적 정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산에서 집으로, 집에서 산으로, 혹은 멕시코로, . . . 인간은 가눌 수 없는 요동을 잠재우기 위해, 양떼나 소떼처럼 이리저리 자기 자신을 유목한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여행이란 광포하고도 웅장한 대자연의 낭만주의적 경험이 아니다. 그러한 낭만주의는 자연 속이 아니라, 인간의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내재적 저주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오로지 이탈하고 싶어하며, 파문을 일으키고, 반복적인 리듬을 못 견디어, 그 방정식에 동요를 일게 한다. 그 청년들의 사랑 역시 그 저주 탓일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동성연애자도 아니었으며, 새벽의 한기가 그들을 사랑하게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는 진부한 일상들 속에서, 그러한 내재적 성질들이 도저히 참고 견디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가령 야스지로의 영화 <가을햇살(秋日和)>에서 보듯이, 일상에 매인 힘없는 노인들의 작지만 갑작스러운 농담이나, <늦봄(晩春)>에서의 순종적인 딸이 언뜻언뜻 보여주는 복받치는 울음과 같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의 광풍들이 견딜 수 없을 때, 저기서 저렇게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대자연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동경 이야기(東京物語)>에서 방에 앉아 창 밖의 정물(靜物)을 보며 마음을 달래는 노인들처럼, 자신 안에서 일고 있는 격동을 그 불변의 거대한 흐름을 닮아가며 조용히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이것이 바로 노엘 버치[Noël Burch]가 명명했던 야스지로 특유의 베개 샷[Pillow Shot]의 미학적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오기이다. 이것이 바로 여행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밤을 새야 할지도 모르니, 여기서 짐 자무쉬(Jim Jarmusch)라든가 홍상수의 작품 얘기는  빼자.

따라서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자연 혹은 반복이 있다. 근원적이고도 1차적인 자연. 경험적으로는 파악될 수 없으며, 느껴지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자연. 그 자신 스스로 그것이 되고 싶어 했던 사드(Marquis de Sade)의 표현에 따르면,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효력을 미치는 절대적 악". 아마도 근대 물리학이 정식화하고자 했던 거대한 방정식. 무자비하고도 무차별적인 범우주적인 반복.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 자연을 닮아가는 또 다른 2차적 자연이 있다. 한편으로는 혐오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근원적 자연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그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겨 놓고 사는 가운데, 도식적인 몸짓들로 이루어진 가벼움과 사소함.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제나 제자리로 되돌아옴으로써 허탈함을 자아내는 반복. 그리고 이 두 자연에 둘러싸인 두 인간의 위험하고도 격렬한 여행을 동반한 위태로운 낭만주의가 있다. 결국 그들은 어떤 어떤 산자락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무슨 마을이나 무슨 집에 들어 앉아 있는 동안에도. 그러나 그들은 산이나 계곡으로 떠났다가 되돌아 온다. 그 왕복운동의 반복은 그들의 고립을 심화시키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미국적 삶의 실상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영화는 세 번 이상을 볼 것을 권유한다. 그럼으로써, 단계적으로나마 보다 많은 실상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전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혹은 격렬한 낭만주의. 그래서 노동이나 만남이나 섹스나 관계들의 실상, 즉 행위의 실상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의 삶 속에서 그들이 견딜 수 없어 하는 어떤 감정. 그래서 그 격동을 잠재우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여러 종류의 여행(동성애는 그 중 하나이다).

(2) 차가운 계곡의 대기라든가. 끝없이 나 있는 산맥의 줄기라든가. 전나무에 달린 자그마한 잎새라든가. 또 그 모든 것들을 비추는 싸늘한 햇볕. 혹은 주인공들의 행동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다른 존재들. 가령, 산으로 가기 전 트레일러에서 두 청년이 기다리는 동안, 저편에서 잠깐 지나가고 있는 이름 모를 두 미국 소녀라든가. 에니스가 산에서 내려와 왠지 모를 구역질을 하고 있는 동안, 저 뒤에서 자그마하게 일고 있는 바람 먼지라든가. 물컵에 침을 뱉는 고압적인 인상의 잭의 아버지와 기죽은 착한 어머니, 그리고 그들이 사는 말없고 우울한 가정들. 그들의 공포를 말해주는 황량한 벌판과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바람 부는 집. 먼지. 에니스를 좋아하게 된 어떤 여인의 능숙한 그러나 판에 박힌 춤 솜씨,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니스의 큰딸 알마(Alma)의 모습에서 보이는 순진해 보이지만 어떤 욕망 혹은 동경. 그 밖의 모든 잠재적인 것들.

(3) 마지막으로, 그 모든 사람이나 사물과 감정들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회상과도 같은 하나의 분위기 혹은 느껴지는 단일한 시간. 가령, 잭이 어린 시절을 보냈을 써늘한 방. 상처 많은 책상과 초라한 가구들. 때묻은 물건들. 잭을 둘러싼 미국 전체의 주름진 세월. 보니체르(Pascal Bonitzer)가 말했던 얼룩(tâche)처럼, 혹은 바르뜨의 푼크툼(punctum)처럼, 혹은 겹쳐진 셔츠에 묻은 피얼룩에 깃든 에니스 델마와 잭 트위스트의 고유한 시간. 이 외에도 무수한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그들의 고유한 시간을 보고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까?

미국인들은 우리를 '동양인'이라고 부른다(유럽인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서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한국인을 그 동양인이라는 용어 속에 뒤섞어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모습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보라(심지어는 중국어를 쓰는 한국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모든 동양을 뒤섞어 놓았던, 롭 마샬(Rob Marshall)의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이 좋은 예일 것이다. 간단한 예로, 그 영화에 등장한 게이샤의 모습과 미조구찌 겐지(溝口健二)의 작품에 나오는 게이샤의 모습만 비교해보아도, 그 맥 빠지는 오해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영어밖에 쓸줄 모르는 미국인들의 그러한 이해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Martha의 끔찍한 파란 눈처럼, 텔레비전 스크린에 혼을 빼앗긴 반수면 상태의 두뇌환경 속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분명히 잘못된 이해이다. 그러한 진부한 시선은 우선 당사자들을 매우 불쾌하게 하는, 아주 무례한 이해 방식일 뿐만 아니라, 잭과 에니스의 일상처럼, 그 자신 스스로 따분한 삶에 젖어들기 때문이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으로는 결코 공존이란 가능할 수가 없다. 공존이란 개인성을 벗어나 자신의 이해와 흥미로부터 단절하고, 괴롭지만 사물의 실상을 보려는 노력 속에서만 가능해진다. 한참을 기다리며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실상들. <브록백 마운틴>으로부터,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낭만적인 자연풍경이나 정치적 주제로서의 동성연애를 확인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 . . . 그렇지만, 점점 반수면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과연 실상의 충격을 줄 수 있을까?




<문예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