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고 지내는 선배 K씨가 어느 날 내게 와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있지! 내가 변태가 되어 가나 봐." 그의 표정은 불안과 걱정으로 싸여 있는 듯했다. 그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제의 심각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 그의 기질로 볼 때 변태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느 정도는 내성적이며, 그러나 또한 어느 정도는 쾌활하다. 그에게 단점이 있다면 예민하다는 점이다. 가끔은 사람들과 다투는 일도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파괴적 본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성생활이 변태적인 것이라고 예상할 일은 아니다.
"아내와 잠자리를 할 때 감흥이 오지 않을 때가 있어. 예를 들어 피곤할 때라든지, 다른 어떤 걱정이 생겨 거기에 몰두할 때면, 흥분도 안 되고, 그녀가 이리저리 내 몸을 자극 해도 별 감흥이 없을 때가 있어. 그럴 때는 좀 난처하지. 그녀의 애정과 호의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 . . 그래서 난 억지로라도 여러 가지 외설적인 생각들을 떠올려서 그녀에게 반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진 않아.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내의 흰머리를 보면 흥분이 돼! 아내의 흰머리를 처음 보았을 때는 별 감흥이 나질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흰머리가 하나 둘씩 많아지고 이제는 노력해서 찾지 않아도 꽤 잘 보이니까 흥분이 되는 거야. 여자의 흰머리를 보고 성적 흥분을 느끼는 건 나밖에는 없을 거야."
그의 설명을 들으니 자신이 변태가 되어 간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얼른 보아도 흰머리와 성적 쾌감은 이해할 수 없는 연결이었다. 물신주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의 과거사를 들어봐도 흰머리와 섹스가 연결될 지점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무의식의 작용일까. 아니면 그는 일종의 물신 숭배자인가. 성도착이 이렇게 뒤늦은 인생에도 찾아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솟아오른다.
그는 결혼한 지 12년쯤 된 중년이다. 그리고 그의 결혼생활이 사실 관능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외설적인 대화들을 즐기지만, 그들이 모두 관능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는 없다. 그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외설을 즐겼으며, 심하지 않게 섹스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외모나 성격 등 여러 부분에서 관능적인 삶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혼생활이 무료했던 것은 아니다. 아내의 허물을 공공연히 떠벌리지도 않았으며, 일상에서 오는 심한 권태를 느껴본 기억도 없었다. 그가 아내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이라고는, 가끔 어린아이 같다는 정도였다. 심지어는 그 어린아이 같은 면이 귀여울 때도 있다고 부연한 적이 있었다. 결혼한 지 꽤 되었으니 성생활에 권태를 느낄 법도하다.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 일상적이지 않은 행동이나 생각들로 침실을 채우기도 한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생각이다. 그러나 변태가 되어가고 있는 문제는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지니고 있는 미모나 육체적 미감 그리고 그녀의 애정과 호의의 안락함 등이 주는 성적 흥분보다는, 엉뚱하게도 흰머리에서 오는 쾌감을 더 원하고 있는 것이다.
변태에 대해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병리학적 연구들과 구체적 증상의 사례들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성도착이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까닭은, 그것이 사회적 소통관계를 부정하고 파괴한다는데 있다. 수많은 변태적 성욕과 그 행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눈살을 찌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음증이나 노출증 혹은 매저키즘이나 새디즘과 같은 성도착의 유형들은 모두가 소통관계의 파괴와 부정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들은 다수가 내면화한 사회적 질서나 표현방식을(심지어는 섹스와 관련된 것조차도) 따분하게 여기거나 부정적으로 이해하면서, 그로부터 단절하기 위해 자신만의 특별한 이미지를 발명해 낸다. 예술가들이 주로 이러한 행위에 몰두하는데,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은유능력(A를 B로 연결하는 능력)도 일종의 변태적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의 조건을 은유능력이라고 했는데, 그의 주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천재는 변태성을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사회적 질서로부터 변태성의 주체가 일탈하는 과정은 물신주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물신 숭배자는 환상(Fantasy)이라는 허구를 내면화하면서, 현실 원칙들을 거부하거나 그 효력을 정지시켜 버린다. 다시 말해 특별한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불쾌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곧바로 그 이미지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물신주의자들의 주된 메뉴는 스타킹이나 구두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행복했던 시절의 어머니와 동일한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혹은 자신이 사랑했던 어머니로 달려가 버리는 것이다. 새디즘은 가학을 받는 자와의 소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새디스트는 피해자에게 많은 말들과 반복적 논증을 진행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흉내나 가장에 불과하다. 폭력적 지배자에게 설득이나 소통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새디스트가 매질을 하는 대상으로부터 단절하려는 것은, 그 대상이 구질구질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아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 망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람의 노예 같은 면모를 혐오하고, 매질을 통해 그것을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다. 새디즘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을 우리나라 어머니들로부터 볼 수 있다. 만일 아이가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들어왔을 때, 그 어머니는 아이를 위로하거나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아이를 매질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왜 맞고 다녀!?" 내가 존경하는 바따이유(G. Bataille)라는 프랑스의 이론가는, 새디즘에는 피해자의 어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저 어머니의 어조와 유사한 언어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착의 형태에 대해 소통의 파괴나 부정 혹은 단절과 위반이라는 위험한 술어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들을 신비적으로 보거나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함 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도착자들은 어떤 경우든지 다른 많은 사람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며 정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아픔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안락 속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도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은 이러한 경험과 감각들을 다른 사람들과 유사하지 않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고 체험한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고통과 쾌감의 경험들은 그 자체의 물질적 요인(즉 신경물질이나 뇌하수체와 같은)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방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매저키즘이 고통을 통해 쾌감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을 쾌감 자체로 지각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쾌감으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을 보통 사람들과는 상이하게 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착은 생물학이나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그것도 예술적인 정신의 문제이다. 이들이 감각적 자극을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운용하거나, 더욱 풍부한 삶의 경험을 스스로 요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적 소통을 위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쾌감을 타인에게 빼앗기거나 포기해야 하는 반면에(중세인들은 이 쾌감을 신에게 돌렸기 때문에, 니체는 이를 더 질병적이라고 말했다), 변태적 주체는 자신이 개발하거나 창출하고 있는 쾌감을 철저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소통의 거부는 쾌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쾌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사회적 일탈이 되는 것은, 사회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빼앗고자 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서 삶을 운용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신체를 바라보고 다루는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흰머리와 성도착의 관계에 대해서는 섣불리 용어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문제는 흰머리와 도착의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흰머리와 쾌감간의 관계에 있다. 그는 왜 흰머리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나의 소견으로는 그가 위반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위반은 피상적으로 내면화된 금기나 강요들에 대한 일탈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사회는 연령이나 계급과 같은 여타 조건들에 의해 사랑의 형태를 규제해 왔다. 그래서 이를 어기는 형태의 사랑을 보게 된다면, 심한 경우에는 범죄의 모습을 띠고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계급을 초월하는 사랑은 언제나 문학적 스캔들의 테마가 되어 왔으며, 제도를 위반하는 불륜과 같은 사랑의 형태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관찰자들로 하여금 매우 격렬한 관능성을 제공해 주기도 했다. 그는 흰머리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아내를 연상(年上)으로 망상하고 있는 것이다. 흰머리라는 부분적 대상을 통해 그의 아내는 단번에 연상의 여인으로 탈바꿈한다. 보다 존경스러운 상대를 원한다든지 등과 같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심리적 상태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말 할 수 없다. 또한 그가 변태인가 아닌가를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흰머리를 보면서 위반을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아내의 신체의 부분을 이용해서 자신을 통제해 왔던 제한된 사랑의 형태에 저항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내면화된 제도와 이데올로기는 파괴되고 부인된다.
관능성은 파괴하고 거부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태어난다. 우리의 신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 흐름은 어떠한 제도나 이데올로기로 봉해 버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비집고 나온다. 신체가 억제될 때 욕망은 위반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예를 들어, 꿈이나 잠꼬대나 술주정과 같이 일상적인 것도 포함하여). 이때 사랑은 괴이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소리를 내지 않으며 신체 내에 묵직하게 스며있는 욕망은, 현실 속에서 특정한 대상들과 조우하게 될 때(술이나 마약도 이에 해당된다),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와 기괴한 형태로 현실화한다. 이 괴이함이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면화된 소통을 파괴하게 될 때, 우리는 이를 행위 윤리적인 문제들과 혼동하면서, 변태라는 용어로 비하하여 부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은 대충 비슷하면 아무데나 용어를 붙여 쓰는 일들을 밥 먹듯이 한다. 그리고 이 잘못된 명명법이 일반화된 관념이 되면 곧 바로 집단이나 사회의 고압적 폭력으로 둔갑한다. 유럽과 미국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차이에 대한 무지는 언제나 차별을 낳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혼한 지 12년 아니 그 보다 더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을 욕망이, 이제 비로소 흰머리라는 숨 쉬지 않는 대상에 의해 깨어난다. 흰머리와 성적 쾌감간의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능적 쾌감이란 유두와 성기와 입술과 항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각인 된 사회적 제도와 우리를 내면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부터도 출현한다.
p.s.
저항과 쾌감에 관한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러분도 그 이름을 자주 들어보았을 질 들뢰즈(Gilles Deleuze)라는 철학자는 매저키즘이 유머러스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 유머러스하다는 말일까? 우선,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때리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매질 자체의 의미를 무효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제발, 때려 주세요!"
"#$%^&*"
그러나 이 보다도 더 재밌는 사실이 있다. 매저키스트는 매질이라는 것을 나쁜 짓을 하고 나면 으례 따라 나오는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그리고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처벌 나쁜 짓 . . . . 그는 생각한다. 처벌을 먼저 받고 나쁜 짓을 하면 되지 않을까? 들뢰즈는 매저키스트가 매질을 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매질이 끝나면 맛보게 될 바로 그 나쁜 짓을 기다리기 때문에 쾌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매저키스트의 쾌감을 예비적 쾌감,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정의한다. 한 사악한 어린아이의 예를 통해 말해볼까? 선생님이 아이에게,
"너! 불량식품 사먹으면 때려줄거야!" 하고 경고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찾아와서 엉덩이를 까며 이렇게 말한다.
"그럼, 먼저 때려주세요!"
" $%^&*()&* "
이 아이가 급진적인 이유는, 더 이상 억압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아이의 요구는 오히려 매질을 나쁜 짓과 쾌감을 허가해주는 절차로 만들고 있다. 아이는 그 억압을 완전히 거부해버리고, 자신의 쾌감으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흰머리를 보며 즐거워하는 K 선배처럼! 억압은 결코 승리할 수가 없다. 특히 즐기는 자에게는.
<문예 노트>
pleasure.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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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란 말이 가만히 보니 Non-seual하단 말이나 Anti-Sexual하단 말과 많이 상통할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쾌감을 성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것(가학이든 피학이든)에서 느끼니 말이죠. 어쩌면 프로이드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안티프로이트적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지만,이 글을 접하면서 오히려 집단무의식적으로 심리학을 접근하려했던 융의 관점을 더 확인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2005/12/08 09:50
네. . . 실제로 매저키스트는 sexless man이라고 합니다. .매저키스트가 실제로 있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지만 말이죠. 이론상으로요. . .2005/12/09 00:44
상당히 Sexual man이신듯 하군요.
그게 아니고 메저키스트가 sexless man이면 아닌 사람은 (A)Sexual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 이분 속에 뭔가 다른 게 있을 지도 모르지만,,,
변태적인 것과 관능 하는 게 좀 이성적 본질을 떠난 미학적인 언급같군요.
에스테틱과 우리의 미학이란 말이 가지는 어감이 조금다른 것 같기도 하지만,
서양사람들의 사고속에 있는 뚜렸한 이데아적인 각인은 변태(?)든 아니든 여전하단 생각이 드는군요.가만히 보면 심리학과 형이상학이 구분되는 게 정말 심리학적인 것인지 아니면 형이상학적인 것인지 알송달송하기도 하지만, 이런게 변태적 현상이라면 변태란 말이 가지는 의미가 도덕적인 한계를 탈피할 수도 있겠죠?
일상의 무딘 언어 습간에 의해서 오염된 그러한 오류들을 탈피할(어떻게 읽으실지 모르겠군요!) 2005/12/09 16:08
. . . 난해한 글이로군요^^ . . 어쨌든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구절 중에, "일상의 무딘 언어 습관에 의해서 오염된, . . . 오류들을 탈피할" . . . 네, . .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점이라고 봅니다. 보다 더 섬세해지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이 시나 소설이나 그림이나, . . 예술을 즐겨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무딘 감성은 결국에는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고, 이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내 몰것입니다. 현재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2005/12/10 14:24
상당히 과격 파격 그런 면이 있으시군요.
구원 죽음까지 아야기하시다니,
어찌되었건 우리가 직면한 다원적인 현실이 어떠한 언어를 모호하고 무디게 만드는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느군요.노자나 장자는 교묘한 것 보단 질박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가 산 세월과 지금의 차이때문인지,노자의 질박함이나 무딤이 오히려 반구원의 의미가 되는 세상이 됬으니,,, 2005/12/11 12:51
과격, 파격 . . . 그렇게보니 또 그러네요^^. 그런데 정말로 과격하고 파격적인 것은 제가 아니라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과격하고 파격적인 것을 싫어하면서도, 정작 그 현실 앞에선 외면하고 있어요. 방문을 걸어잠그고 말이죠. 눈을 감는다고 내가 안 보이는게 아닌데 말이죠.
뒤틀린 변태성이 바로 그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상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한명도요. 무엇인가 뒤틀려있고, 무엇인가를 뒤틀고 싶어하고, . . 사실 정상이라는 말 자체도 모호한 말이잖아요. 홍상수 영화 보셨는지 모르겠는데요, . . 그의 영화는 일상적인 내용만 있고 별 사건이 없는 것 같지만,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과격하고, 열정적이고, 충동적 사건들로 가득차 있어요. 인물들의 꿈틀거리는 변태성이 느껴집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자세히 한번 보세요. 삶 자체가 얼마나 과격하고 파격적인지를. 감성이 무뎌질수록 그 과격과 파격은 더 커질뿐만 아니라 더 비이성적이 될 것 같아 보입니다. 안 그런가요?
구원이라는 말은 아주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의미로 곡해해서 이해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구원이나 죽음과 같은 말들이 어떤 한계의 상황에서나 쓸 수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저 말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깨어나서 잠이 들때까지 .. 몇번이나 죽음을 떠올리며 사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다지 멀리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걸요? 또, 제가 올린 글 중에 "미국과 우리에 대한 생각"을 보시면 알겠지만, 미국인들의 무감각, 무관심, 냉소, 미국에 대한 환타지, 가족, . . . 등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몇명 되지도 않는 소수의 정치권력이 한 나라, 한 대륙 전체를 죽음의 소용돌이로 몰수 있겠습니까? 제가 사용하는 구원이니 죽음이라는 말은 그냥 말에 불과하지만, 저건 엄연히 현실입니다. 그야말로 실제(the real)입니다. 9.11당시에 미국인들이 섬광처럼 느꼈을 그런 실제말입니다. 2005/12/11 18:28
상당히 재밋는 내용인데 글이 어렵군요. 들뢰즈의 언급에서는 소리내서 웃지않을 수 없었는데 한마디로 명쾌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글을 어렵게 쓰셔야 하는 직업을 가지신 분이신가봐요^^ 2005/12/20 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