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교수를 둘러싼 논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매우 분명하다: 과학의 본질을 과학 그 자체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 과학 뿐만이 아닐 것이다. 모든 노동과 활동은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해 지속되어야 한다. 과학을 사용해서 이윤을 창출해 내겠다는 철학은 과학의 지속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임금과 경쟁의 질서로 노동을 지속시켜 이윤을 내보겠다는 철학이 노동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듯이 말이다. 상인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과학 그 자체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연구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과학자는 아무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과학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은 순진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그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사회 경제적 조건에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학자들에게는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 속에서 형성된 어떤 윤리가 있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를 완성하는 가운데 그 윤리를 실천한다. 그들의 윤리란 사회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버려진 공터에서 친구들끼리 모여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형성되는 그들만의 윤리 같은 것이다. 그 윤리는 스케이팅을 완성시킨다고 하는 암묵적인 동의에서 형성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친구들 간에 주고 받는 규율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규약 없는 규약, 절대적 규준으로서의 내공의 질서는 그렇게 생겨난다. 그들의 목적이란 단 한가지 뿐이다. 대가(大家)가 되어 스케이팅을 완성하는 것!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대가는 아니더라도,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결코 싫증을 내는 법이 없다. 스케이트 보드계의 수준이란 그런 과정 속에서 진화한다.
실제로 그들 중에는 대가가 되는 친구들이 생겨난다. 스케이트가 사람인지 사람이 스케이트인지 모를 정도로 일체가 되어, 거의 신귀에 가까울 정도의 공중 활공으로 공간과 육체의 모든 제약들을 훌쩍 뛰어 넘어서는 것이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돈도 안 되는 쓸모 없는 장난질 같지만, 그는 그 행위를 예술의 수준으로까지 끌어 올린다. 스케이팅을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존엄한 것으로 만든 그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어떤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지속되는 것은 그 자체 존엄하기 때문이고, 또 그 자신을 비롯하여 스케이트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스케이팅의 고유한 가치를 최상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혹은 사회화가 덜된 그 오만 불손함 때문에, 간혹 불쾌해지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고 찬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현실을 최상의 것으로 끌어 올리거나, 최소한 그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해줌으로써, 우리를 보다 자유에 가깝게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상인이 그를 이용해 돈을 벌어보려고 접근했다고 치자. 어떻게 되겠는가? 그 아이들의 윤리는 이윤을 창출한다고 하는 상인의 윤리로 훼손될 것이고, 대가가 되어 스케이팅을 완성해 보겠다는 열정은 공굴리기의 쇼맨쉽으로 전락할 것이다. 더 이상 자유로워지기 위해 스케이트를 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스케이트는 쳐다보기도 싫을 것이다. 한마디로 상인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상인들의 윤리는 그로 하여금 편법이라든가 마약을 종용하기까지 한다. 그 세계에서 부도덕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에, 양심적 고뇌조차 있을 수가 없다. 대가가 되지도 못하고 상인의 눈에 띄지도 못한 나머지 친구들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압력에 직면하여 더 이상 그 공터에 모여드는 일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스케이팅은 사라질 것이다. 이 아이들 뿐 아니라 수 많은 잠재적 대가들, 예술가들, 학자들 모두가 그런 식으로 늙어간다.
예술, 인문학, 공학, 자연과학 할 것 없이, 현재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연구자들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연구를 포기하든지! 대박을 터트리든지! 그 나머지는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의 무능력 탓이 아니다. 이 이상하고도 변태적인 사회적 관점, 즉 상인의 문화가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포기하지도 못하고 대박도 터트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알 수 없는 죄의식과 자괴감에 사로잡혀 하루 하루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간혹 목격하게 되는 이들의 자살을 똑바로 주시해야 한다. 그 이유를 빈곤이라는 이름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만의 내공의 질서 속에서 과학 그 자체를 온전하게 완성시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들을 시장판으로 내몰아서 재주부리는 곰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 재주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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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이십니다. 더불어 요즈음 대학은 온통 너나할 것 없이 연구비타는 데만 관심이 있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연구비를 많이 타는 교수가 훌륭하게 치부되는 곳, 그곳에 이미 학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문은 오직 하나있는 객관적 실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은 연구비와는 반대의 것이어야 하는데도 발입니다. 2005/12/17 13:03
대박 신드롬 때문에 우리 사회의 곳곳이 썩고 있죠.^&* 대박에 대한 열망이 아닌 다른 목표가 인정 받는 사회가 빨리 와야 되는데...^^언젠간 오겠죠.ㅎㅎㅎ 2005/12/17 21:18
문제의식과 안타까움에는 공감합니다.
다만.. 저로선, 자본주의 시스템의 작용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러니 24시간 그 시스템의 작동원리에 노출된 지금/여기의 사람들에게 [순수한 목적]을 요구한다거나, 혹은 [순수한 목적] 그 자체의 희열을 느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글쎄요. 꿈꿀 수 있는 이상일 수는 있겠지만, 실현가능한 목적으로서의 추구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교수팀의 말단 연구원에게 [월화수목금금금]을 일하고 40만원을 주는 이 잔인한 시스템...
그렇다면.. 현실적인 혜택의 문제, 대가의 문제가.. 충분히 고민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차핏 그런 피해자들, 피착취자들에게 [순수한 목적]이란 착취자의 알리바이로 작용할 위험이 있어보입니다.
이상입니다. 2005/12/18 17:51
네, . . 소견 감사합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순수한 목적]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구요. . . "피해자들, 피착취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착취"하는 사람들, [순수한 목적]을 알리바이로 작용시키는 착취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 . . 그리고 저 글은 일종의 비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젼이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해서 나아갈 바를 가늠해보는 것인데요, 따라서 비젼은 할 바에 대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 이미 그 인식 안에는 "지금/여기"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동어반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실이 "이러 이러하다"는 문제와 "이렇게 해야겠다"는 문제는 다른 문제입니다. 해답은 욕망의 문제, 즉 욕망이 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5/12/19 02:23
아, 제가 다소 취지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충실한 코멘트 고맙습니다.
다만 "이렇게 해야겠다"의 현실적인 방법론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사소한 차이가 있는 듯도 합니다. 물론 조율가능하고, 협력가능한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차이가 서로에게 발전적인, 말 그대로의 생산적인 비판으로 작용하기를 바랍니다.
다시한번 충실한 답변 고맙습니다. 2005/12/19 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