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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19 회화적 공간
  2. 2006/08/27 표현주의에 관한 짧은 메모

회화적 공간이란 이상화된 공간(idealized space)을 의미한다. 서양에서 르네상스 이후 생겨난 원근법적 공간구성은 이상화 공간의 좋은 예이다. 원근법은 일종의 기하학적 이상으로 세계를 배치하고자 하는 신의 열망과도 같다. 원근법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연속적인 질서에 따라 서로 연관이 되어 있고, 이 질서는 무한하게 펼쳐진 공간 안에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배열된다. 사물들은 가깝고 먼 거리에 따라, 크고 작은 비례와 균형에 따라, 중심과 주변의 위계에 따라, 그 선천적 적절성을 띠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 합리적 질서에서 탄생한 무한한 세계를 작은 캔버스에 재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신의 관점을 경험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반면에 고대인들은 사물을 재현할 때에 자신의 심리 상태를 반영했다.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바에 따라, 혹은 중요함의 정도에 따라 사물의 크기와 균형을 달리 인식하고 재현했던 것이다).

이상화된 공간에서의 그 신의 눈은 캔버스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틀림없이 모든 사물들이 무한대로 수렴하는 지점이어야 할 것이다. 등대에서 퍼져 나오는 부채꼴의 빛처럼 세계 전체를 밝혀주고 세계 전체를 감싸고 포함하고 배태할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소멸해가는 지점, 예컨대 모든 변과 호가 한 곳으로 수렴하는 삼각형 혹은 원뿔의 꼭지점과도 같은 그런 중심 말이다. 신을 위해 그리고 신에게 보여지기 위해 세상이 존재했듯이, 회화적 열망에 의해 배치된 사물들 역시 중심에 위치한 관찰자를 위해 존재한다. 원근법에 있어 소실점의 기능은 모든 시선의 신의 관점에의 일치에 있다. 거기에는 고정성에 대한 열망, 영원성에 대한 열망, 중심에 대한 열망이 짙게 배어있다.  

물론 원근법에 있어 이 관찰자 개념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관찰자란 특정한 위치를 점한 존재인데, 꼭지점이라고 하는 이상적 중심이란 사실 특정한 위치의 부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2+3=5"와 같이 진술자가 부재하는 진술이다. 무한히 수렴하는 중심으로서의 꼭지점이나 원점이 그렇듯이, 신은 부재하는 존재이며, 부재할 때에만 비로소 그 무한의 신비가 현시한다. 이것이 신의 눈을 경험적으로 재현한다는 시도 자체가 가지는 모순이다.

이런 맥락에서 존 버거(John Berger)는 원근법에는 "시각적 상호성"(visual reciprocity)이 없다고 보았다.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대상을 주시하고 포함하고 지배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와는 반대로 객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선은 하나의 관계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찰자는 원리상 그 자신 역시 보여지는 대상이어야 한다. 사물이 보이는 각도, 크기, 균형 등에 따라, 시선의 주체는 건물 위에 있는지, 아래에 있는지, 혹은 공중을 활공하는지, 심지어는 고대인들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심리상태와 도덕을 반영했듯이, 주체는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노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일정한 시선에는 반드시 타자가 상정되어 있다. 바라보는 자의 주체성이란 자의든 타의든 타자와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러나 신의 관점에는 타자가 없다. 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특정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채 바라보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이상화된 중심에서 주시하는 존재는 변덕스러운 현실의 시간과 공간 내에 위치할 수 없다. 이상적 중심이란 변하거나 이동하지 않는 영점(degree zero)에 다름 아니다. 신의 눈이 그렇듯이, 그것은 오히려 위치 그 자체, 말하자면 위치가 어디인지 질문할 필요도 근거도 없는 초월적 외부의 공간 그 자체다.

모든 그림이 원근법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회화에 재현된 세계는 많든 적든 원근법과 유사한 열망이 내재되어 있다. 회화적 시선에는 과거의 시간이 지배한다. 다르게 말해 한 편의 그림은 세계의 기억이며 요약이다. 화가는 단숨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캔버스를 앞에 놓고 많게는 몇 년 적게는 몇 시간 동안 사물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캔버스에 요약해 낸다. 그러는 가운데 화가는 사물과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반복적으로 되뇐다. 마치 관람객이 그림을 감상하듯이, 혹은 시인이 떠오르는 섬광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하는 가운데 수 차례에 걸쳐 후렴구를 반복하듯이, 화가 역시 사물에 다가서고 멀어지면서 선과 면을 중첩시키고 집적하고 쌓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화적 시간이란 실제의 시간이 아니라 종합된 시간, 즉 세계를 바라보고 지각하는 동안 수용했을 무수한 요소들이 한꺼번에 수렴하여 동시에 펼쳐지는 총체적 시간이다. 흥미롭게도 아른 하임(Rudolph Arnheim)은 시와 그림에 있어서의 시간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이를 초기 언어 형태와 유사한 어떤 것으로 보았다. 예컨대, 시와 그림은 어머니와의 자족적이고 충만한 이자 관계에 취해있는 아기가 자신의 행복감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내뱉은 한 마디의 옹알이와도 같은 것이다.

Gogh의 의자

위 그림은 고호(Vincent van Gogh)가 아를의 방에서 사용했던 의자의 그림이다. 이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질문하는 내용은 고호 자신의 전기적 사안보다는 고호의 인생 전체, 고뇌 전체, 예술 전체로 향한다. 애초부터 그림에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를 감싸고 있는 대기 전체의 음성 혹은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huun

회화에서 표현주의를 뜨거운 상태로 만들기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질적 변형이나 용질(溶質)의 추출을 위해서는 용광로와 같은 뜨거운 환경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창백한 초록색조차도 야수적 파토스의 환경이 되거나(H. Martis), 여인의 몽상적인 눈 속에 급진적인 거부와 물신주의적 환영이 깃들어 있거나(G. Klimt), 불안과 절망이 신체 밖으로 경련을 일으키며 빠져나와 대기 전체에 파동을 일으키거나(E. Munch), 혹은 히스테리적인 선 위에 일고 있는 도발(E. Schiele)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표현주의가 주로 (신체의)구멍과 관계하는 것은, 단단한 것을 비집고 솟구쳐야할 출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그란 눈이나 벌어진 입(뭉크) 혹은 환타지에 취해 버린 눈(크림트)이나 치켜 뜬 시선(쉴레), 그리고 빧빧이 발기되었거나 빨갛게 벌어진 성기(쉴레) 등. 이는 예술적 표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하나의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하려면 우선 뜨거워져야 할 것이다. 정치나 역사의 테마들과 관계하는 예술의 이론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이 문제에 닿아있음을 보게된다: 어떻게 하면 뜨겁게 달굴 것인가? 무엇이 가장 뜨거워질 수 있을 것인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역사에서 형식주의가 비판을 받았던 것은, 그들의 이론이 자칫 세계를 냉각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가령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tein)은 베르토프(Dziga Vertov)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보여주었던 카메라-눈 이론에 대해, 그것은 발전이 완성된 사회에서나 가능한 방식이며 형식주의적 유희라고 비판하였는데, 바로 저와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물질과 동일한 혹은 물질 속에 존재하는 차가운 눈이 아니라, 주먹이나 분노 혹은 외침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단단한 것들을 거대한 우주적 소용돌이 속으로 녹이는 일이었다.


<문예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