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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22 인문학과 선언행위 (6)

인문학이란 존재의 사용불가능성과 비효율성을 선언하는 분과이다. 그리고는 그 쓸모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여기에 이렇게 엄연히 실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인문학은 바로 시간과 지속의 과학인데, 왜냐하면 시간과 지속은 사용불가능한 존재가 실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다루고 있는 시간이란 물리학적 의미에서의 공간적 시간(공간에 덧붙여진 또 다른 형태의 공간 즉 4차원)도 아니고,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최대로 단축시켜야 할 부정적 시간도 아니다('시간은 금'이라는 자본주의의 고전적 명제는 시간의 긍정이 아니라 시간의 부정이다). 인문학이 존재에게 부여하는 그 시간은, 무엇인가가 빠르고 순간적이고 한꺼번에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 모든 사물들이 그 자신의 완성을 향하여, 본질의 열림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속도를 낼 수 없도록 방해하는 그 무엇이다. 그 시간은 세계를 지연시키고, 우리를 망설이게하여, 시(詩)를 읽는 독자처럼, 우리로 하여금 오래토록 머무르도록 강요한다(또 이 머무름 속에서만 우리의 삶은 완전해 질 것이다). 이 강요의 한복판에 던져진 우리는 그 지연된 시간 속에서 "적절한 것"을 고뇌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스스로 짊어지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자신의 본질을 펼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이란 삶 속에 시간이라고 하는 아주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추가한 학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존재의 비효율적 가치를 긍정하는 유일한 영역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효율성과 사용가능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적 관점은 존재로부터 시간을 빼앗는 위치에 서 있다. 존재로부터 시간을 빼앗아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공간적인 것만 남겨놓는, 그래서 모든 존재를 불활성의 세계로 둔갑시켜서, 수동적 기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체계. 최대효율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순간성과 자동성, 나아가 최대 수동성이다. 그 첨단이 바로 로봇이라는 사실은 우리 다 같이 알고 있는 바가 아닌가? 만일에 인문학에 어떤 위기가 왔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지속 불가능한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혐의를 두고 그 환경에 적응을 종용하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환경을 바꾸든지는 우리가 할 탓이겠지만.

그 수 많은 한국의 인문학자들의 선언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근본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 신자유주의라는 다소 중화되어 모호한 이름으로, 그냥 단어들만 부르짖으며 말장난을 하느라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항상 놓쳐버리고 마는 주제: 자본주의! 그들이 비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같은 말이지만 대중과 괴리되었기 때문도 아니다(어떤 대중?).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오히려 그들의 반성은 잘못된 문제의식을 보여줄 뿐이다). 바로 인문학적이지 않았다는 것! 여전히 인문학적이지 않다는 것!

왜 그들은 항상 잘 나가다가도 맨 나중에가면, '적응'이라든지, '변화'라든지, '대중화'라든지, '응용'이라든지 하는, 우리를 맥빠지게 하는 추상적 용어들 속에 고착되어 틀어박히고 마는 것일까? 그들이 바로 그 체계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의 실상은 최대효율성의 체계 속에서 교육받고, 교육하고, 그 선배들과 그 스승들이 마련해 준 어떤 어떤 공허한 특권들 속에 안주하여, 실질적 자본의 토대위에 가까스로 앙상하게 버티고 서 있는 상징적-심리적 자본에 도취되어, 거기서 주어지는 가능한 모든 취미와 우울과 혐오 혹은 위선적 자애와 너그러움과 권태등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며,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자신도 모르게),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서들과 소재들을 발견하면서, 그 건전해보이지만 실은 밀폐된 환락을 만끽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결코 자신들의 그 강건해 보였던 지반, 그 안락한 환경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효율적 체계의 타도!라고 하는 명제의 실천은 냉소적인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무시무시한 것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7, 80년대의 공장 등지에서 블루칼라들이 겪었던 무지막지한 공포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선언이나 주장이 진지하고 진정한 것이라면, 아니 그들이 조금만이라도 총명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자신들이 서 있는 지반의 물적 토대를 송두리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짐작으로 속물정신에서 태어난 그들은 결코 그 지반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멋모르고 내뱉고 만 그들의 선언행위는 웃음조차 유발시키지 못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인문학의 해방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는 결코 완성될 수가 없을 것이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