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나는 최근에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mp3 파일 하나를 다운 받아 듣고, 그 매체의 장르 분류에 관하여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파일은 어떤 게임업체 콜 센터 상담원과 꼬마 아이의 대화 내용을 수록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이미 오래 전에 검색엔진을 떠돌며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던, 말하자면 아이의 순진무구한 장난끼에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 예쁜 한 처녀의 수난개그 장르였다. 이와 유사한 장르의 우스개 꺼리는 아주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선생님-수난 장르이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담원이나 선생님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에 즐거운 이유는, 그 모습을 보며  "경직된 규칙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수난 당사자의 뻣뻣함의 정도가 크면 클 수록 그 쾌감은 더 커진다.

(파일듣기)

이런 류의 개그나 시추에이션은 최근에는 미래사회의 버전으로 각색되어 많이 나와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이 미래사회가 인간을 규칙과 체계의 노예로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인간의 위대함과 용기 같은 것이 골자로 되어있다. 저 mp3 파일의 주인공인 그 꼬마 역시 규칙에도 없는, 말도 안 되는, 터무니 없는, 그러나 용광로처럼 뜨거운 질문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헤드폰을 머리에 장착하고 114톤 혹은 "솔"톤(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경쾌함이라고 잘 알려진)의 방탄벽으로 중무장한, 기계처럼 뻣뻣하기로 유명한 콜 센터 상담원을 순식간에 녹여버려, 중앙처리시스템 대마왕의 저주에 찬 고주파 외피(일명, 인비져블(invisible) 신 물질 구속복이라 불리는)로부터 그녀를 구해낸 것이었다.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그녀는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 찾았다. 물론 그 신 물질의 중층결정(overdetermined) 분자구조를 해체하는데 있어 꼬마의 순진-공세-무기로는 어림도 없었던 관계로, 그 저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아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다시 재생된 외피가 그녀를 거두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웃음의 온기를 맛본 그녀는 틀림없이 힘을 얻어, 그 차가운 물질에 맞설 수 있는 정신 에네르기 호르몬을 스스로 산출하여, 해방을 위해 그 냉기 안에서 부단히 투쟁하지 않을까? 더 이상 힘없고 나약하고 냉소적이었던 이전의 그녀가 아닐 것이다. 꼬마의 위대한 용기가 헛되지 않도록 바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작자미상의 그 mp3파일의 정확한 장르를 분류하였다. 이름 하야,  "SF-전쟁-미녀-구출-개그".

그런데, 친구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전혀 딴판의 장르를 주장했다. SF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개그라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Vintage 버전을 새롭게 각색한 "심리-범죄-스릴러"장르라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꽤 정교하고 섬세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는 그 파일이 단순한 스릴러 장르 오디오물이 아니라, X-파일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그는 강한 어조로 그 상담원의 목소리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표정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사람의 심리상태를 가장 물질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바로 목소리인데, 그 상담원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두 사람의 순진무구하고 유쾌한 대화 뒤에는, 음산한 배경음악처럼, 음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꼬마의 뜨거운 공격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고통스럽게 참고 있는 신음소리하며, 그녀를 구해 내고는 탄성을 지르던 꼬마의 간절한 기쁨조차 묵살해 버리는 무정함하며, 남자 요원을 따돌리며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말투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이용하여 음해하려는 시도, 가령, "결제"라든가 "카드"와 같은 코드네임을 자꾸만 언급하면서, 미리 파 놓은 함정인 은행계좌 쪽으로 꼬마를 유인하려 한다든지, 심지어는 그의 어머니를 언급하면서 가족까지 연루시키려는 무자비함하며, 꼬마에게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듯, 혹은 목표는 꼬마가 아니라는 듯, 혹은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서둘러서 전화를 끊으려는 조바심 하며, "바람의 나라 전쟁"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분위기하며, 꼬마에게 감정이 생길까봐 두려운 나머지 정을 떼려는 그 가혹함 하며, . . .

협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뒤에 누군가가 검은 그림자에 숨어 보이지 않은 채, 복면을 하고 칼이나 총을 들이대며 통화를 감시하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저 웃음 속에서 살짝 엿볼 수 있는 착한 마음의 소녀가, 어떻게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며 냉정하게 전화를 받고 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저것은 소녀의 의지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저 파일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익명의 제보자(도청꾼, 일명 청파라치)에 의해 유출된 외계물(alien) 침입 협박 사건, 아니면, 최소한 살인 사건의 일부 내용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틀림없이 저기엔 음모가 있어! 시커먼 복면을 한 그림자가 있다구!" 그러니 범인 즉 그림자의 실체를 잡기 위해 뒷 조사와 신고를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저 파일은, 그냥 장르를 분류하고 즐기다가 다음 날이 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했다!), 영화나 오디오와 같은 문화물(혹은 문화상품)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며, 위험에 처한 한 생명의 목숨이 달린 SF-인간비극-다큐멘타리라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의 생명존중주의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경찰에 신고를 하자는 그의 제안에 대해, 나는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표명했다. 그림자 복면을 하여 보이지 않는 저 외계물은 틀림없이 경찰서나 관공서에 이미 침투했을 것이고, 구속복보다도 더 어두운 법복 속에 숨어, 이미 그들을 숙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 게릴라가 되어, 참을성을 가지고, 매복을 하여, 기회를 엿보며, 우리가 직접 그림자의 실체를 관찰하고 조사해보는 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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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부활(1930년대 이후로 쇠퇴하던)은 68년의 ‘시련들’(예로, 프랑스 68운동의 실패 등)과 이후 계속해서 유입되어 온 대륙의 사상들(『뉴레프트 리뷰』지가 하나의 중요한 경로가 됨)에 의해서 가속화되었다. 영미에서 작용하는 특별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주요한 이론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와 형식 Marxism and Form』(1971), 『언어의 감옥 The Prison-House of Language』(1972)은 마르크스-헤겔주의 철학가라고 할 만한 변증법적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테리 이글턴의 『비평과 이데올로기 Criticism and Ideology』(1976)는 알튀세와 마슈레이의 반헤겔적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것으로 영국의 비평 전통에 대한 인상적인 비평과 영국 소설 발전에 대한 급진적인 재평가를 하고 있다. 보다 최근에 제임슨은 그의 『정치적 무의식 The Political Unconscious』(1981)에서, 이글턴은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 Walter Benjamin or Towards a Revolutionary Criticism』(1981)에서, 두 사람 모두 후기 구조주의의 도전에 창의력 있게 대응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초기 입장을 수정하는데 있어 놀랄 만한 기지와 의욕을 보여준다.

『비평과 이데올로기』에서 이글턴은 비평계에서 F.R. 리비스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귀신을 쫓아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가장 다재 다능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윌리엄스는 그의 경력 후기에 가서야만 마르크스주의에 자신이 연루되었음을 인정했다. 그의 초기 작품 중 주로 『문화와 사회 Culture and Society 1780-1950』(1958) 와 『장구 혁명 The long Revolution』(1961)은 웨일즈 지방의 철도역원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특별한 관점을 통해서 과거의 문학과 사회비평을 여과시키면서, 과거의 산업사회와의 채무 관계에서 인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잠재성을 고찰하고 있다. 그 당시 윌리엄스는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의 형식은 추상적이며, ‘산 체험’의 서로 얽혀진 구조를 포함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이글턴은 윌리암스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론 속으로 ‘뛰어들어’가지 못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경험주의’(즉각적인 경험에 대한 호소)를 비판하는 알튀세의 논쟁을 끌어들인다. 윌리엄스의 중심 개념들인 ‘삶의 총체성’과 ‘감정의 구조’는 둘 다 주관적인 경험과 그와 같은 경험의 객관적인 사회적 제 조건을 이론적으로 구분 짓기를 꺼려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알튀세와 마찬가지로 이글턴은 비평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선사(先史)’와 결별하고 하나의 ‘과학’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문학과 이데올로기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관점에서 볼 때 텍스트는 역사적 리얼리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 된 것’의 효과를 낳기 위해 이데올로기에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리얼리티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유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텍스트는 등장인물들과 상황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사용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라 함은 의식적인 정치적 교리를 뜻함이 아니라, 산 체험에 대한 개인의 정신적 상(像)을 형성하는 모든 표현 체계들(미학적, 종교적, 사법적 등등)을 뜻한다. 텍스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의미와 지각은 리얼리티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재 작용한 것이다. 즉 텍스트는 두 단계를 거친 후 리얼리티에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이글턴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일반적인 텍스트 이전의 형식에서 텍스트 자체의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이데올로기의 복잡한 단층을 검토함으로써 이 이론을 더욱 심화시켜 간다. 그는 문학이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두게 할 수 있다는 알튀세의 관점을 거부한다. 문학이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언술에 대한 복잡한 재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적 결과는 다른 이데올로기적 언술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특수한 생산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비평은 문학형식의 법칙들이나 또는 이데올로기의 이론들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언술의 생산법칙’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이글턴은 이데올로기와 문학 형식간의 상호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 조지 엘리어트 George Eliot에서 D.H. Lawrence에 이르는 일련의 소설들을 개관한다. 그는 19세기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는 불모의 공리주의와 일련의 유기체적 사회관(주로 낭만적 휴머니즘 전통에서 유래한)을 혼합한다고 주장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자본주의가 점점 더 ‘조직체 화’되어 감에 따라, 낭만적 전통에 따른 공감적인 사회적, 미학적 유기체로의 지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글턴은 개개의 작가들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검토하고 그들의 사고 속에서 발전하는 모순과 그들의 작품 속에서 시도된 모순의 해결을 분석한다. 한 예로 그는 로렌스가 소설이 삶의 유동성을 비 독단적으로 반영하며, 사회 또한 현대 영국의 낯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하는 이상적인 하나의 유기체적 질서라는 믿음에 있어서 낭만적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진보적 휴머니즘이 파괴된 후 로렌스는 ‘여성’과 ‘남성’ 원칙이라는 이원론적 양식을 발전시킨다. 이 같은 대조는 그의 작품의 다양한 단계에서 발전하고 개혁되면서 마침내 비인격적인 ‘남성적’ 힘과 ‘여성적’ 부드러움을 함께 소유하고 있는 『차탈레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멜로스의 인물묘사에서 해결된다. 소설들 속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같은 모순되는 요소의 결합은 현대 사회 내에 ‘깊숙이 자리잡은 이데올로기의 위기’와 관련지을 수 있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사고의 영향은 1970년대 후반기에 이글턴의 저서에 급진적 변화를 낳았다. 그의 관심은 알튀세의 ‘과학적’ 태도로부터 브레히트와 벤야민의 혁명적 사고로 전환했다. 이 같은 변화는 이글턴을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845)에 나타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론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객관적 진실이 인간 사고에 의한 것인지 여부에 대한 의문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다. . . .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단지 해석만 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글턴은 데리다 Jacques Derrida, 폴드만 Paul de Man을 위시한 사람들이 발전시킨 ‘해체 deconstruction' 이론들은 모든 확실성과, 고정되고 절대적인 모든 형태의 지식들을 훼손시키는데 이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그는 해체 이론이 ’객관성‘과 물질적 ’이해관계‘(특히 계급적 이해관계)를 쁘띠 부르조아 식으로 거부한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이 같은 모순되는 견해는 이글턴이 이제는 알튀세의 논점이 아닌 레닌의 논점, 즉 올바른 이론은 “진정으로 민중적이고 또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제적 행동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만이 오로지 궁극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다”는 관점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주시하게 되면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과업은 이제 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에 의해서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비평가는 ’문학‘에 대한 기존 관념들을 분해해야만 하며, 독자의 주관성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그것들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밝혀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로서 비평가는 “그것에 의해서 비 사회주의적 작품들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를 낳게끔 하는 수사학적 구조를 노출”시켜야만 하고, 또 “가능한 경우 그와 같은 작품들을 ’본의 아니게‘해석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주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쓴 이글턴의 주요 저서는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1981)이다. 벤야민의 기묘한 유물론적 신비주의는 혁명적 비평을 위해 ‘본의 아니게’ 읽혀진다. 벤야민의 역사관은 수정주의적이고 억압적인 기억에 의해서 항상 위협 당하고 불명료해진 과거로부터 역사적 의미를 과격하게 파악하는 것에 연루된다. 정치적으로 적절한 시간이 오면, 과거로부터의 목소리는 포착되어질 수 있고 그것의 ‘진정한’ 목적을 위해 적절히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벤야민이 찬사를 보낸 브레히트의 연글들은 역사의 냉혹한 서술을 깨뜨리고, 과거를 재 기록하는 길을 열어 놓음으로써 흔히 역사를 ‘본 의도와는 달리’ 다시 읽게 하는 것이다. 한 예로 셰익스피어의 『Coriolanus』와 Gay의 『Beggar's Opera』는 그 작품들에 잠재된 사회주의적 의미를 노출시키기 위해서 ‘다시 씌어졌던’ 것이다(브레히트는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이기적인 주인공과의 단순한 감정 이입의 상태를 넘어서서 코리얼레이너스의 비극뿐만 아니라 ‘특히 평민들’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글턴은 브레히트의 급진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의미 접근 방식에 찬사를 보낸다. “한 작품이 6월에는 리얼리즘 적일 수 있고, 12월에는 반 리얼리즘 적일 수 있다.”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발전이 어떻게 해서 항상 노동 계급의 투쟁 상태를 반영하는가를 보여주는 페리 앤더슨 Perry Anderson의 『서구 마르크스주의 고찰 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1976)을 자주 언급한다. 이글턴은 한 예로 프랑크푸프트 학파의 현대 문화에 대한 고도의 ‘부정적’인 비판은 첫째는 유럽에서의 파시스트 지배에 대한 반응이고, 그 다음으로는 미국에서 널리 유포된 자본주의 지배에 대한 반응이지만, 이것은 또한 이 학파의 이론과 실제가 노동계급의 운동과 유리된 결과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글턴의 혁명적 비평을 분명히 현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Lacan의 프로이트식 이론과 Derrida의 강력한 해체 철학을 전략적으로 전개시키는 데 있다.

노동 운동이 부분적으로는 타락됐고 또 전적으로 정치세력에서 배제된 미국의 경우 주요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의 출현은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다. 반면 우리가 프랑크푸프트 학파와 미국 사회에 대한 이글턴의 지적을 유념하고 있다면 프레드릭 제임슨의 저서가 그 학파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사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Marxism and Form』(1971)에서 제임슨은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의 변증법적 측면을 탐구하고 있다. 아도르노, 벤야민, 마르쿠제, 블로흐, 루카치, 그리고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훌륭한 연구 결과로 그는 ‘변증법적 비평’의 윤곽을 제시한다.

제임슨은 독점 자본주의의 후기 산업 사회 상황에서 가치 있는 유일한 종류의 마르크스주의는 “헤겔 철학의 주요한 주제들 즉 부분의 전체에 대한 관계,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사이의 대립, 총체성의 개념, 표상과 본질간의 변증법, 주체와 객체간의 상호 작용”을 탐구하는 마르크스주의라고 믿는다. 변증법적 사고에 있어서는 고정되고 변치 않는 ‘객체’들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객체’란 보다 더 큰 전체와 풀 수 없게 연결돼 있으며, 그것은 또 그 자체가 역사적 상황의 한 부분인 사고하는 정신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비평은 분석을 위해 개개의 문학 작품을 고립시키지 않는다. 개체란 항상 보다 더 큰 구조(전통이나 운동)의 한 부분이거나 역사적 상황의 한 부분인 것이다. 변증법적 비평가는 문학에 적용하기 위해 이미 정해놓은 범주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가 선택한 범주(문체, 인물, 이미지 등)를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역사적 상황의 한 단면으로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만 한다. 제임슨은 Wayne Booth의 『소설 수사학 Rhetoric of Fiction』(1961)이 적절한 변증법적 자아 의식을 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Booth는 함축된 상대성과 고정되거나 절대적인 어떠한 관점이나 판단 기준도 거부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현대적인 개념인 ‘시점’이라는 개념을 소설에 도입한다. 그러나 ‘함축된 작가(내포된 작가)’가 나타내는 특정한 시점을 옹호함으로써, 그는 질서 잡힌 계급 체제 속에서 중간 계급의 보다 큰 안정을 누렸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는 움직임인, 19세기 소설의 확실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비평은 항상 그 자신의 개념의 역사적 기원을 인식해야 하고 리얼리티의 압력에 무감각해지거나, 그것을 화석화시키는 개념들을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시간 안에서 우리의 주관적 존재성 그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지닌 관념의 굳은 껍질을 부수고 ‘리얼리티 그 자체에 대한 보다 명료한 이해’ 속으로 뛰어들도록 노력 할 수는 있다.

변증법적 비평은 장르나 텍스트의 본체의 내적 형식을 노출시키고, 작품의 표면으로부터 문학 형식이 구체적인 것들과 깊이 연관돼 있는 수준까지 깊숙이 내면으로 들어가서 작용하는 것이다. 헤밍웨이를 예로 들면서 제임슨은 소설 내부의 ‘경험의 지배적 범주’는 글을 쓰는 과정 그 자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헤밍웨이는 두 가지 일, 즉 움직임을 자연(사물)속에 기록하고, 사람들 사이의 긴장된 분노를 시사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유의 간결한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하드보일드 스타일). 이같이 습득된 글쓰는 기술은 자연 세계(특히 격렬한 스포츠)와의 관계에서 표현되는 다른 종류의 인간적 기술과 개념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사나이다움의 숭배는 기계적 기술에 대한 미국의 이상을 반영하지만, 인간의 기술을 여가의 영역 속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산업 사회의 소회 상황을 거부하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간결한 문장들은 미국 사회의 복잡한 구조에 접근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의 소설들은 개개인들이 그 안에서 ‘사물의 깨끗함’으로 개입하지 않고 또 그렇기 때문에 헤밍웨이 문장 속에 포함되어질 수 있는 외국 문화의 얄팍한 리얼리티에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제임슨은 어떻게 문학 형식이 구체적 리얼리티와 깊이 연관돼 있는가를 보여준다.

제임슨의 『The political Unconscous』(1981)은 초기 이론의 변증법적 개념을 지니고 있으나 여러 가지 상충되는 사상의 전통들을(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프로이트, 알튀세, 아도르노) 인상적이고 또한 여전히 인식할 수 있을 만큼의 마르크스주의식 통합으로 동화시키고 있다. 제임슨은 인간 사회의 파편적이고 소외된 조건은 삶과 인식이 ‘집합적’인 원시 공산주의의 원상태를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일종의 블레이크적인 타락을 경험했을 때, 인간의 감각 바로 그 자체가 분리된 전문화의 영역을 이룬 것이다. 화가는 시각을 하나의 전문화된 감각으로 다룬다. 화가의 그림들은 소외의 한 증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원래의 충만한 세계를 상실한 데 대한 하나의 위안이기도 하다. 이는 그들은 색채 없는 세계에 색채를 주기 때문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근저에 깔린 모순을 억압하는 사회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을 사회가 마련하도록 허용하는 ‘봉쇄 containment'의 전략이다. 이 같은 억압의 전략을 강요하는 것은 역사 그 자체(경제적 필요성의 잔혹한 리얼리티)이다. 문학 텍스트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들이 제공하는 해결책들은 단지 역사의 억압의 증상일 뿐이다. 제임슨은 자신의 목적을 위한 분석 도구로서 A.J. Greimas의 구조주의적 이론 즉 ’기호론적 장방형‘을 재치 있게 이용한다. 텍스트의 봉쇄전략을 그 자신을 형식적 패턴으로 제시한다. 그레마스의 구조주의 체계는 텍스트의 전략에 적용된 경우 분석가로 하여금 말하여지지 않은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가능한 모든 인간 관계들(성정, 법적 등등)의 완벽한 명세서를 마련해 준다. 이 ’말하여지지 않은 것‘이 억압받은 역사이다.

제임슨은 또한 서술과 해석에 관해서 강력한 논쟁을 전재시킨다. 그는 서술이란 단순한 문학형식이나 장르가 아니라 본질적인 ‘인식론적 범주’라고 믿는다. 즉 리얼리티는 오로지 이야기의 형식을 통해서만 인간의 정신에 그 자체를 제시하는 것이다. 과학적 이론조차도 이야기의 한 형식이다. 더 나아가서 모든 서술은 해석을 요구한다. 여기서 제임슨은 ‘강력한’ 해석에 반대하는 일반적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논쟁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Deleuze와 Guattari는 『Anti-Oedipus』에서 텍스트에 강한 ‘의미’를 강요하기를 회피하는 ‘내재적’ 해석만을 허용할 뿐 모든 ‘초월적인’해석을 비판한다. 초월적 해석은 텍스트를 관장하려고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텍스트의 진정한 복합성을 약화시킨다. 제임슨은 재치 있게 신비평(스스로 내재적 접근방식이라 주장하는)의 예를 들어서 신비평이 실제로는 초월적이며, 이것의 중심 약호는 ‘휴머니즘’임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해석들은 필연적으로 초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결론 짓는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수단으로 이데올로기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은 프로이트로부터 ‘억압’의 중심개념을 도입해서 그것을 개인적 차원에서 집단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혁명’을 억압하는 것이다. 압제자들은 이 같은 정치적 무의식을 필요로 할뿐만 아니라, 피압제자들도 만약 ‘혁명’이 억압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이 견딜 수 없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설을 분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재 하는 하나의 명분(‘비혁명’)을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임슨은 세 개의 지평(즉 내재적 분석의 차원과 그레마스를 예로 든 사회-언술 분석 차원, 그리고 역사적 읽기의 시대적 차원을 포함하는) 비평적 방법을 제안한다. 세 번째 독서의 지평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유형에 대한 제임슨의 복잡한 재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광범위하게 그는 사회적 총체성을 그 안에서 다양한 차원들이 ‘상대적 자율성’ 안에서 발전하고 다른 시간의 척도에서 (한 예로 봉건적이면서 자본주의적인 시간의 척도의 공존) 작용하는 ‘탈 중심화 구조’로 보는 알튀세의 관점을 수용한다. 이같이 적대적이고 음조가 맞지 않는 생산 양식의 복잡한 구조는 텍스트의 이질성에 반영되는 이질적인 역사인 것이다. 제임슨은 여기서 리얼리티 그 자체를 또 다른 텍스트로 취급함으로써 텍스트와 리얼리티간의 차이를 없애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 해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텍스트의 이질성은 그것이 텍스트 밖에 있는 사회적 및 문화적 이질성에 연관될 때에야 만이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해서 제임슨은 마르크스주의분석을 위한 공간을 보존하는 것이다.

** 참고;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그 이론의 궁극적 기반은 인간 사회의 물질적 및 역사적 존재성에 있다. 이 이론은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변화와 모순에 대한 것이며, 문학형식은 이러한 물질적이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계들을 반영한다. 그러다 보니 문학작품 자체의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문학 작품을 통해 사회적 관계들과 역사적 변화를 모색해 보자는데 연구의 초점이 모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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