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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17 브록백 마운틴 (6)
  2. 2006/07/16 소비사회와 총체성의 음모 (3)

이안(Lee Ang) 감독의 영화 <브록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의 관객들이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동성연애가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이란 가끔 피로를 풀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이 잠깐 기지개를 펴면서 느끼는 세속적 포만감일 뿐이다. 대자연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도시인의 무성의한 냉소주의를 반영한다. 그것은 안락한 차 안에서 달콤한 음악을 들으며 시골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에서인지 창문을 내리고 멈춰 서서, 초가을의 황금물결을 바라다보며 뿌듯해하는 류의 자연관에 불과하다.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서의 자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환타지로 유출된 자연. 우리가 이 영화에서 그러한 것만을 보며 만족한다면, 그저 그런 상투적인 속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앵글로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직접 들어가서 봐야만, 즉 잠을 자고, 밥을 짓고, 시간을 때우는, 거기서 실제로 살고 있는 자로서, 자연과 직접 대면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자연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풍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장소와 현장으로서의 자연을 투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사실, 미 대륙의 자연환경이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유럽이나 아시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종류의 자연사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연 속에 직접 뛰어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관건은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일이다. 마치 풋내기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거울을 보며 폼을 잡다가, 출발선으로 뛰어든 후에 맞닥뜨린 현실이랄까?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 거리다가 주저앉기 십상인. 이것이 바로 저편에서 흐믓해 하던 여행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의 미국인 청년들 잭(Jack Twist)과 에니스(Ennis Delma)의 대자연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거대한 대륙의 평원에 뛰어들어 살아가면서, 여행자처럼 그냥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그 암흑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미국의 성스러운(?) 개척사의 그늘에서 눈에 띄지 않던 현장인들이 느꼈던 대자연과의 미국적 대면, 즉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와 그들 특유의 낙천주의와 공존했던 미국적 프론티어라인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대자연이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빠져 나오고 싶은, 역겹고 무자비한 것이다. 양떼들을 먹어 치우는 코요테, 무서운 곰,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카우보이의 총질, 거친 벌판이나 산속에서의 야영, 그 고독과 밤의 광란, 야밤의 추위나 갑작스러운 폭풍, . . . 이러한 드라마와도 같은 모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혹함이란 무엇보다도 드라마의 부재, 드라마가 불가능한 바로 그 일상적 진부함에 있다. 황량한 대륙의 바람. 정지한 듯 보이는 거대한 뭉게구름. 방문을 닫아버린 디킨슨(Emily Dickenson)이 창가의 일상에서 느꼈을 뜨겁지만 싸늘한 한낮의 햇볕. 꿈쩍도 하지 않고 언제나 저기에 버티고 있는 저 거대한 브록백. 우람한 전나무들의 반복. 그 안에서의 목동들과 양떼들의 반복. 태엽시계의 바늘이나 대수방정식과도 같은 대자연의 일상. 간간히 반복되는 기타의 늘어지는 선율. . . .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이 짓이군! 아침 먹으러 내려왔다, 다시 양 보러 올라가고, 저녁 먹으러 내려왔다, 또 양 보러 올라가고, 밤잠 설치며 코요테나 감시하고. . . 먹고, 지키고, 자고, 먹고, 지키고, 자고 . . . Shit!" 오즈 야스지로(Ozu Yasjiro, 小津安二郞)나 홍상수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계적이고도 진부한 일상들이 비좁은 도시에서가 아니라, 막대한 대자연 한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 전체를 무지막지한 법칙의 흐름 속으로 흡수해 버리는, 중력과도 같은 지긋지긋하고도 끔찍한 힘! 그 힘에 붙들려 잭과 에니스는 온전한 의미에서 정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하루 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간다. 도무지 그들이 산에서 언제 내려올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브록백에서의 미국 카우보이의 실상이었고, 두 젊은 낭만주의적 이탈기계로 하여금, 그들 안에 내재해 있는 힘과 동요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자연이란 견딜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다. 갑자기 눈이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고, 온 몸을 얼어붙게 하는, 가혹한 자연의 섭리들. 모비딕(Moby dick)의  그 써늘한 회백의 색채처럼, 인간적 감동과는 무관한, 미동조차 하지 않는, 무심하고, 비개인적인 자연. 이것이 바로 멜빌(Herman Melville)을 한참이나 지나 20세기가 되어서야 깨닫고 괴로워 했던 미국인들의 자연주의이다.

그와 같은 진부한 삶은 대자연의 침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2의 자연은 그것과 너무나 흡사해서, 아니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과묵하게 한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는 <Bubble>에서 가구점의 카탈로그 만큼이나 지루하고 진부한 미국인의 일상을, 몇 가지의 놀라운 카탈로그 쇼트들의 모음으로 보여주었다(그 영화에서의 살인은 첫 장면에서 해가 뜬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는 순간부터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파헤쳐지는 공동묘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채 뭔가 생각에 사로잡힌 Martha, 강렬하지만 단조로운 기타의 스트로크. . .). 물건들뿐만 아니라 우정, 데이트, 사랑, 자애, 신의(信義), 종교, . . . 그 모든 것들은 집안과 인생에 비치해 두어야 할 빠트려서는 안 될 어떤 품목들이고, 그들은 그 품목들의 소유를 통해 공동체에 참여한다. 한마디로 말해 인생은 실제로 카탈로그의 산물이고, 카탈로그의 집결체이며, 카탈로그는 상품 사회 미국의 삶 그 자체이다. 그것은 19세기의 휘트먼(Walt Whitman)이 시에서 구가했던 카탈로그 집합체와는 그 본질에 있어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전형적인 미국식 인지방식의 하나인 카탈로그는 <브록백 마운틴>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

컨트리 음악 / 청바지 / 카우보이 모자 / 집단 댄스 파티 / 술집에 걸린 커다란 성조기(일찍이 미국의 실내에서 성조기 만큼 자연풍경의 역할을 한 사물도 없을 것이다) /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의 만남과 카-섹스(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남자들끼리의 관계가 암묵적으로 과도하게 금기시 되고 있어서인지, 남녀 관계만큼 따분한 것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 보기에도 낯설어 보이는 노동 / 결혼 /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침실(미국 영화 대부분이 그렇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집세걱정을 하며, 입 냄새가 진동할 것 같은 숨을 헐떡거리며 서로를 만지는 에니스와 그 부인의 애로장면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을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 인형 같은 아이들(그 최악의 의미에서. 한편, 소더버그는 <Bubble>에서 진짜로 인형 공장을 등장시켜, 마치 그 인형들이 마지막 크레딧에서 처럼 일그러진 모습에서 점차 어른들의 꿈의 투사로 변형되어 가는 것처럼 다룬다) / 주말마다 등장하는 교회(미국에서의 교회란 사교를 넘어 하나의 일터이다. 한편, <Bubble>에서는 교회에 앉아 무엇인가에 도취된 몽환적 상태에 빠져 있는 미국인 Martha의 소름 끼치는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 그리고 이 모든 끔찍한 미국의 악몽을 종합하는, 말하자면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말씀)를 들을 때와 동일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신 즉 자연 즉 텔레비전!

이들의 삶은 파큘라(Alan Pakula) 감독의 <암살자(Parallax View)>에서 기자가 요원 테스트를 받을 때, 반사회적인지 아닌지, 정신질환적인지 아닌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바로 그 카탈로그 사진들 속에 있는 삶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식의 세속적 도덕주의의 건전함 속에 깃든 어떤 우울한 색채였고, 첫 눈에 주목할만한 트레일러 지배인의 그 청교도적이고도, 고압적이고도, 고지식한 눈매에서 읽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백인 남자들은 대체로 과묵하다.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우직해 보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덕적이고 둔해 보인다. 그들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알게 된다. 그들은 감성보다는 의무에 더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들과 쾌활한 대화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과 좀 길게 대화를 하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회적 의무에 충실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모종의 자격 같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미국적 일상의 진부함 뿐만이 아니라 일상 자체의 진부함이 있다. 이 영화는 수 많은 카이보이들이 등장했던 서부영화에서는 거의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목동의 실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양떼를 몰고, 맹수들을 쫓는 일을 넘어서서, 야영을 하고, 텐트를 치고, 말뚝을 박고, 불을 지피고, 설거지를 하고, 돌무더기를 쌓고, 나무를 자르고, 끼니를 때우고, . . . 뿐만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생활의 행위들, . . . 이는 인물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큰 흐름에 참여하는 큰 행동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아주 작은 행동들을 요구한다(이러한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삶의 요령[tip]들은, 거대한 물리학 이론이나 생물학 논문을 쓰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고, 미국적 지식의 화용론적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그 행동들은 최종 결말이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취해진 액션이 아니라, 감지하기 어려운 어떤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인해 별 뜻 없이 생겨났다가, 어느새 그것을 취한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표정이나 제스처의 변화를 뜻한다. 우리가 삶의 실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그 감지할 수 없는 표정이나 제스처들의 묶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삶은 큰 행위로서의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의식되지도 않고,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상 죽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탄생한다. 어느 누구도 부른 적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난데없이 튀어나와 버리는 그 자유-모티브들! 이것이 삶의 역설이다.

삶에는 멋진 드라마도 없고, 격렬한 총질도 없으며,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어떤 의미 있는 상징이나 그 가치들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브록백 산맥에 둘러싸여 뜻 없이 먹고 자는 저주와도 같은 삶이다. 그 저주란 가령 끌로드 시몽(Claude Simon)이 심지어 광폭한 전쟁이 지나고 난 흔적 속에서도 발견하였던, 그러한 진부함의 저주이다: "도로를 따라 길게 장식된 화장지의 꽃 줄 광경처럼, 그것은 마치 창자가 다 드러난 여행 가방에서 도무지 헤아릴 길 없이 많은 옷가지가, 대부분이 흑백으로 풀어 헤쳐진 것 같다"(Claude Simon, La route des Flandres (Paris: Minuit, 1960), p. 29.) 시몽의 비유가 주는 슬픔이란 전쟁과 그 가혹한 죽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견딜 수 없는 어떤 사소하고도 가벼운 상태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뿐만 아니라 감옥에도,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Bubble>에서 Martha는 감옥에 투옥된 후에도, 아침에 일어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양치질을 하며 새로운 일상을 맞는다. 혹은, Emily Dickinson의 한 화자는 무덤 속에서 영원히 잠이 들기 직전의 몽롱한 비애의 순간에 갑자기 날아든 파리 한 마리의 성가신 날개 짓과 웅-웅 거리는 소리를 감지한다). 온갖 쓸모 없는 수많은 객체들, 쓰레기통 옆에 떨어진 자그마한 휴지조각 같은, 이미 죽어버린 삶의 무의미를 반복적으로 상기시켜주는, 매일 아침 쉼 없이 쏟아지는 먼지들과 싸우듯이, 그 무수한 부수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매 순간 참아내야 한다는 것!

비극적인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또 다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 정도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냉소주의자가 된다. 거기에는 일상의 진부함의 결과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그 이상이 있다.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이지만, 한편 우리는 간혹 혹은 자주 그 반복적인 일상을 견딜 수 없는 무엇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냉소주의란 무기력한 낭만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 전체에 감돌고 있는 잭과 에니스의 생활에의 냉소적 정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산에서 집으로, 집에서 산으로, 혹은 멕시코로, . . . 인간은 가눌 수 없는 요동을 잠재우기 위해, 양떼나 소떼처럼 이리저리 자기 자신을 유목한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여행이란 광포하고도 웅장한 대자연의 낭만주의적 경험이 아니다. 그러한 낭만주의는 자연 속이 아니라, 인간의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내재적 저주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오로지 이탈하고 싶어하며, 파문을 일으키고, 반복적인 리듬을 못 견디어, 그 방정식에 동요를 일게 한다. 그 청년들의 사랑 역시 그 저주 탓일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동성연애자도 아니었으며, 새벽의 한기가 그들을 사랑하게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는 진부한 일상들 속에서, 그러한 내재적 성질들이 도저히 참고 견디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가령 야스지로의 영화 <가을햇살(秋日和)>에서 보듯이, 일상에 매인 힘없는 노인들의 작지만 갑작스러운 농담이나, <늦봄(晩春)>에서의 순종적인 딸이 언뜻언뜻 보여주는 복받치는 울음과 같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의 광풍들이 견딜 수 없을 때, 저기서 저렇게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대자연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동경 이야기(東京物語)>에서 방에 앉아 창 밖의 정물(靜物)을 보며 마음을 달래는 노인들처럼, 자신 안에서 일고 있는 격동을 그 불변의 거대한 흐름을 닮아가며 조용히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이것이 바로 노엘 버치[Noël Burch]가 명명했던 야스지로 특유의 베개 샷[Pillow Shot]의 미학적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오기이다. 이것이 바로 여행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밤을 새야 할지도 모르니, 여기서 짐 자무쉬(Jim Jarmusch)라든가 홍상수의 작품 얘기는  빼자.

따라서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자연 혹은 반복이 있다. 근원적이고도 1차적인 자연. 경험적으로는 파악될 수 없으며, 느껴지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자연. 그 자신 스스로 그것이 되고 싶어 했던 사드(Marquis de Sade)의 표현에 따르면,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효력을 미치는 절대적 악". 아마도 근대 물리학이 정식화하고자 했던 거대한 방정식. 무자비하고도 무차별적인 범우주적인 반복.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 자연을 닮아가는 또 다른 2차적 자연이 있다. 한편으로는 혐오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근원적 자연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그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겨 놓고 사는 가운데, 도식적인 몸짓들로 이루어진 가벼움과 사소함.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제나 제자리로 되돌아옴으로써 허탈함을 자아내는 반복. 그리고 이 두 자연에 둘러싸인 두 인간의 위험하고도 격렬한 여행을 동반한 위태로운 낭만주의가 있다. 결국 그들은 어떤 어떤 산자락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무슨 마을이나 무슨 집에 들어 앉아 있는 동안에도. 그러나 그들은 산이나 계곡으로 떠났다가 되돌아 온다. 그 왕복운동의 반복은 그들의 고립을 심화시키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미국적 삶의 실상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영화는 세 번 이상을 볼 것을 권유한다. 그럼으로써, 단계적으로나마 보다 많은 실상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전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혹은 격렬한 낭만주의. 그래서 노동이나 만남이나 섹스나 관계들의 실상, 즉 행위의 실상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의 삶 속에서 그들이 견딜 수 없어 하는 어떤 감정. 그래서 그 격동을 잠재우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여러 종류의 여행(동성애는 그 중 하나이다).

(2) 차가운 계곡의 대기라든가. 끝없이 나 있는 산맥의 줄기라든가. 전나무에 달린 자그마한 잎새라든가. 또 그 모든 것들을 비추는 싸늘한 햇볕. 혹은 주인공들의 행동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다른 존재들. 가령, 산으로 가기 전 트레일러에서 두 청년이 기다리는 동안, 저편에서 잠깐 지나가고 있는 이름 모를 두 미국 소녀라든가. 에니스가 산에서 내려와 왠지 모를 구역질을 하고 있는 동안, 저 뒤에서 자그마하게 일고 있는 바람 먼지라든가. 물컵에 침을 뱉는 고압적인 인상의 잭의 아버지와 기죽은 착한 어머니, 그리고 그들이 사는 말없고 우울한 가정들. 그들의 공포를 말해주는 황량한 벌판과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바람 부는 집. 먼지. 에니스를 좋아하게 된 어떤 여인의 능숙한 그러나 판에 박힌 춤 솜씨,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니스의 큰딸 알마(Alma)의 모습에서 보이는 순진해 보이지만 어떤 욕망 혹은 동경. 그 밖의 모든 잠재적인 것들.

(3) 마지막으로, 그 모든 사람이나 사물과 감정들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회상과도 같은 하나의 분위기 혹은 느껴지는 단일한 시간. 가령, 잭이 어린 시절을 보냈을 써늘한 방. 상처 많은 책상과 초라한 가구들. 때묻은 물건들. 잭을 둘러싼 미국 전체의 주름진 세월. 보니체르(Pascal Bonitzer)가 말했던 얼룩(tâche)처럼, 혹은 바르뜨의 푼크툼(punctum)처럼, 혹은 겹쳐진 셔츠에 묻은 피얼룩에 깃든 에니스 델마와 잭 트위스트의 고유한 시간. 이 외에도 무수한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그들의 고유한 시간을 보고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까?

미국인들은 우리를 '동양인'이라고 부른다(유럽인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서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한국인을 그 동양인이라는 용어 속에 뒤섞어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모습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보라(심지어는 중국어를 쓰는 한국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모든 동양을 뒤섞어 놓았던, 롭 마샬(Rob Marshall)의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이 좋은 예일 것이다. 간단한 예로, 그 영화에 등장한 게이샤의 모습과 미조구찌 겐지(溝口健二)의 작품에 나오는 게이샤의 모습만 비교해보아도, 그 맥 빠지는 오해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영어밖에 쓸줄 모르는 미국인들의 그러한 이해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Martha의 끔찍한 파란 눈처럼, 텔레비전 스크린에 혼을 빼앗긴 반수면 상태의 두뇌환경 속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분명히 잘못된 이해이다. 그러한 진부한 시선은 우선 당사자들을 매우 불쾌하게 하는, 아주 무례한 이해 방식일 뿐만 아니라, 잭과 에니스의 일상처럼, 그 자신 스스로 따분한 삶에 젖어들기 때문이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으로는 결코 공존이란 가능할 수가 없다. 공존이란 개인성을 벗어나 자신의 이해와 흥미로부터 단절하고, 괴롭지만 사물의 실상을 보려는 노력 속에서만 가능해진다. 한참을 기다리며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실상들. <브록백 마운틴>으로부터,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낭만적인 자연풍경이나 정치적 주제로서의 동성연애를 확인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 . . . 그렇지만, 점점 반수면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과연 실상의 충격을 줄 수 있을까?




<문예노트>
Posted by huun

프레드릭 제이미슨(Frederic Jameson)이라는 미국의 한 문화 평론가는 글을 별로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는 건 많은 사람인데,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스타일에다가, 잡다한 지식들을 뒤섞어가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용어라든가 개념들을 남발하는 부류이다. 싸르트르의 제자였다는데, . . . 그는 철학, 미학, 문학, 영화, 심지어는 건축, . . . 안 건드리는 분야가 없다. 영화에 대한 관심도 그냥 관심이 아니라,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암시장에서나 구할 수 있는 어디 저 제3세계 작품들을 가져다 놓고 분석이랍시고, 궁시렁 궁시렁 댄다.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털털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노력은 많이 하지만, 끼는 부족한 사람이랄까? 하지만, 가만히 읽다 보면, 간혹 광인이 해대는 횡설수설 속에서, 섬광처럼 출현했다가 금새 사라져 버리고 마는, 어떤 빛과도 같은 통찰을 접하게 된다.


소비 자본주의의 문화생산은 상품(과 그 교환)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문화를 제공할 테니, 돈을 달라!"), 우리들은 그 문화적 내용 보다는, 무의식적이고도 집단적인 형식의 소비와 구매를 실천함으로써(구매란 결코 개인의 취향의 전개과정이 아니다), 그 상품의 형식을 실현하고 있다. 좌측이든 우측이든, 상류이든 하류이든, 그와 같은 교환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 우리는 사회에 범재하고 있는 신과도 같은 어떤 것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개인들의 집단적 소비실천은 마치 슈퍼에서의 구매행위가 사회 참여의 한 형태인 양 알레고리화되어, 무의식적인 환상을 통해, 추상적 총체성(totality)의 관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가령, "구매자는 소비주체이고, 소비공동체의 일원이며, 경제의 주체이다!"라는 식의). 그리고 미디어는 이 총체성을 사실적으로 입증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어떤 편안한 귀속감과 아울러 그에 동반되는 알길없는 어떤 허기를 느끼게 한다(그래서인지, 가령, 텔레비젼과 스낵의 밀착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이러한 논의는 넓게는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미디어 이론("미디어는 국가이고 세계이다"), 좁게는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민족 공동체(상상으로 만들어진 경험의 총체) 논의에까지 연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제이미슨은 이와 같은 총체성의 관념을 획책하는 모든 담론과 실천과 이데올로기를 '음모(conspiracy)'라는 용어로 처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음모에 관한 영화(첩보 영화, 정치 스릴러, 범죄 스릴러 등)들을 바로 이 자본주의적 소비와 마케팅, 그리고 그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총체적 공간, 충만하면서도 텅 빈 공간 속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정서의 초상을 어떤 한 구절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참고로, 제이미슨의 그 구절은 Alan J. Pakula의 편집증 3부작(Paranoid Trilogy)중에서, <암살자(The Parallax View)>에 등장하는 한 인물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된다. 주인공(기자)은 음모를 밝히기 위해 패럴랙스 회사에서 모집하는 요원선출 시험에 지원하고, 나중에 이 회사에서 직원 한 사람이 주인공을 만나 합격을 통지하기 위해 파견된다. 그는 주인공에게 매우 상냥하고, 차분하며, 인간적인 유대감과 동정심 같은 것을 보여줌으로써(매우 놀라운 장면이었다), 함께 일할 동료의 우정과 신뢰를 다지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동료애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확대되고, 결국 주인공은 암살계획에 교묘하게 이용되어 죽음에 이른다. 제이미슨은 이 직원을 "음모의 대리인"이라고 지칭하면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계와 기업의 대리인으로서, 무의식적 임무를 부여받은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직역해서 옮기면, 아방가르드의 꼴라쥬나 정신분열자의 책상을 보는 것 같은 관계로,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의 습관적인 지각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우리가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첨가하고 의역하여 옮겨 보겠다.

" . . . [이 영화는] 음모를 수행하는 주체들을 특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즉 그 거친 사람들, 원흉들, 음모의 가담자들 중에서 한 사람은 조용하고 차분하며, 서두르거나 재촉하는 일 없이 사람을 상냥하게 대하면서, 마치 그것이 기업의 태도인 냥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 . . 이들은 [기업의 피해자들에 비해] 잘 차려입고, 잘 먹고, 말 그대로 개인적인 기질을 결여하고 있다[즉, 개인성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은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에 불과함을 분명히 한다]. . . 이들은 비교적 우리 사회에서 특권을 함축하고 있는 자들이다. . . . 그러나 그들 역시 착취당하는 인물들이다. . . . 임무에 사로잡힌 자들, . . . 그러나 이들은 희생자들이 사로잡혀 있는 공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임무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이 음모의 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근심(Sorge)은 웃는 얼굴로 신뢰를 보여주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임무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기업 차원의 문제이며, 네트워크 또는 제도의 존속이나, 추상적인 혼란이나 태만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 . . [그 추상적 혼란과 태만 속에서] . . . 이들은 모두가 . . . 집단적 조직 그 자체의 텅 빈 공간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현존을, 강하면서도 상냥한 배려, 그 무게중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즉 어떤 목적의식에 골몰해 있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무관심한 친절에다가 쏟아 붓는다. 그러나 이 같이 전혀 다른 종류의 배려는, 비개인화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그 고유의 불안, 말하자면 개인의 행위에 대해 어떠한 개인적인 결과도 파생하지 않는, 무의식적이고 기업 차원의 불안을 수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흘리는 땀은 이중의 책무에 복무하고 있다. 하나는 그 집단적 책임이라는 뱃지로서. 그리고 클로즈-업의 친밀감 속에서 느껴지는 모든 불쾌함의 실체로서[즉,땀이란 성실과 노력의 도덕적 기호이므로, 동료애나 친밀감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축축한 습기로서, 불쾌감을 자아낸다]. . . . [그래서 땀은] . . . 간혹 가다가 다른 감각 수준 위에 투사된 하나의 지표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친밀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발견을 뜻한다. 즉 우리가 무의식중에 하나의 집단적 네트워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의 발견. 그리고 멜로드라마가 없이도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상처받는지를 입증해주는 그 생소한 육체적 온기를 우리가 깨닫기 전에, 심지어는 고독한 순간에도 조차, 우리들은 이미 너무나 가까워져 있다는 사실의 발견[여기서 제이미슨이 말하는 가까움이란, 서로 시선을 주고 받으면서, 의식 속에 스스로 각인한 타자성(otherness)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형태의 가까움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에서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들을 넘어 현대 페미니즘에서도, 시선(視線)은 특권적인 존재론적 공간이었으며, 그 공간 속에서 우리의 권력은 상실되고, 조작 가능한 객체들로서 극화되고 배치되었다. . . . [그것은 권력 공간, 즉 텅 빈 대타자(the absent Other)나 팬옵티콘 감시탑(Panopticon watch tower)을 투영하고 있다] . . . 음모는 승리한다. . . . 그러나 그것은 피해자들이 결여하고 있는 특별한 형식의 '권력'을 음모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음모는 집단적인데 반해, 피해자들은 각각의 소외된 상태 속에서 전혀 집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Fredrick Jameson, the geopolitical aesthetic: cinema and space in the world system, Indiana: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 pp. 65-66.) [ ]표시는 역자의 주석임.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