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슨(Fredric Jameson)은 필리핀 영화감독 키드랏 타히믹(Kidlat Tahimik)의 영화, 『향기로운 악몽』(The Perfumed Nightmare)을 언급하면서, 그의 영화가 well-made(예술적 태도로서)가 아닌 점을 칭찬한다.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생각처럼 물론 예술가의 스타일은 그의 세계관 혹은 통찰의 관점 전체를 반영하지만, '태도'에 대한 언급은 예술의 윤리적 지침을 제시하는 것과는 일견 다른, 새로운 형식적 아니 비형식적 전략 같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타히믹의 작품에서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거나 발산하고 있는 '솔직 담백함'이 좋은 예가 된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버나드 쇼(Bernard Shaw)가 입센(Henrik Ibsen)의 토론극에 찬사를 보내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고, 결국 그 자신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입센의 극 속에서 함축하고 있는 어떤 태도와 관련이 있는 맥락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가정적인 여성으로서의 Nora가 죽 그래왔듯이, 예술은 더 이상 화장을 해서도, 그러니까 결코 그 자신 안에 상관적 타자(결국 고객이나 소비자가 될 수 밖에 없을)를 꿈꾸어서도, 또 유럽 모더니즘의 가식적인 포커페이스가 한 때 그랬듯이, 더 이상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해서도, 그러니까 자신 안의 메타주체 아니면 더 나아가 대타자를 움켜쥐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곡이 문제가 아니라 허기와 공허가 문제이다. 우리는 너무 지겨워졌고 너무 지쳐있고, 그래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제는 진정한 뭔가가 필요하다.
쇼는 틀림없이 입센 극의 위대함을 마지막 부분의 "토론"에서 찾았을 것이다. 문제는 토론이라는 형식의 민주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토론은 본질적으로 힘의 연장 혹은 지연으로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테이블에 앉기까지의 어떤 근본적인 변화 혹은 토론의 주관적 조건으로서의 주체의 정신상태 즉 태도이다. Nora가 남편과 토론을 벌인 것은, 그로부터 해답을 얻기 위해서도, 자신의 문제를 남편과 상의하기 위해서도, 남편의 배려를 요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거기서 토론은 선언 같은 것, 더 정확히 말해 비로소 그녀를 안전한 가정으로부터 구해내는 단절과 거부의 형식이었다. 모든 냉소로부터의 단절(왜냐하면 냉소는 남편의 월급봉투를 고대하는 주부 인생의 전-의식적 자기혐오이므로), 모든 불성실과 태만으로부터의 단절(왜냐하면 태만과 불성실은 방관하고 있는 인형들의 존재방식이므로), 모든 소유관념 즉 사물성으로부터의 단절(왜냐하면 사물성은 인생을 허기지고 공허하게 하는 모든 말장난의 근원이므로), 그렇게 모든 노예근성으로부터 단절하여 자기자신을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점차 개조하는 이정표! 이것이 니체를 닮은 활력 만땅의 쇼가 입센의 예술의 현대성으로부터 발견한 (진지한)토론의 의미이다. 타히믹이 유럽과 미국 나아가 본질적으로 자본에 대해 "조용히 거부하면서" 보여주었던, 비판을 넘어서는 소박파(Art Naïf) 특유의 솔직 담백한 도큐멘타리스러운 영상이, 모든 예술의 상품 타자성으로부터 박차고 나와, 거리에서 구걸을 할지언정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예술과 그 제작 형식을 제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어설픈 브리꼴라쥬 형식의 낯설음은 모든 '진지한' 단절과 비판의 불가피한 아니 의기양양한 선택이다. (2009.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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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좀 돌봐주세요 ...
네...스팸게시물을 지웠습니다.^^
오랜만이로군요. . .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 .
여름이 됐네요.
장마도 오고...좀 눅눅하고 무덥지만
그런대로 잘지냅니다.^^
시원한 여름 보내시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