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thes'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7/07/28 존재의 시간, 푼크툼 (11)
  2. 2007/05/30 징후와 고통 그리고 진실
  3. 2006/10/05 푼크툼(Punctum) (4)
  4. 2006/08/12 사진과 운동 (1)

예전에 나는 바르뜨(Roland Barthes)가 쓴 사진에 관한 몇 가지 단상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사진과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을 별로 알아내지 못했으므로 곧 그 책을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그러나 한참 지난 후에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겨났다: 사진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는 왜 사진의 이러저러한 지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아는 것이 없어서?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랬다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책을 통해 사진을 하나의 방법으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지에 의해 사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방법으로 보는 것. 이는 결국 사진 뿐 아니라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로부터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 전체를 다시 훑어보면서 사실은 특정한 주제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바르뜨 역시 이 주제를 가장 흥미롭게 혹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주제는 의외로 단순한 구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것은 사진이 발생시키는(혹은 우리가 발견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감정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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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찾아 나서는 자는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 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가는 어떤 징후의 폭력"에 맞닥뜨린 사람이라고 Deleuze(혹은 Proust)는 말했다. 지적이고 분별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명확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또한 자연으로부터 윤곽선이 뚜렷한 형태들을 자신의 지식으로 취한다. 그들은 쓰여진 책을 통해 진실을 찾아나서길 좋아하는 모범생이다. 하지만 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러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지성이 만들어 낸 진리 말고도, 우리는 다른 풍요로운 방식으로, 즉 사물의 징후로부터 출발하여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지적이거나 위대한 사람보다는, 평범하거나 결점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징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의 존재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그것은 예술가들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의 노동과 임무를 가지고 세계에 뛰어들어 노력하는 학자들보다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 직업도 없이, 그렇다고 예술을 할 만큼 능력도 없는 실망스러운 인간”들이 더욱 더 징후에 있어 풍요로운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가령,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란 바로 허송세월을 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쓸모없이 보내버린 시간, 즉 훌륭한 사람을 만나 진지한 대화를 하거나 지적인 모임에 나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교계에 드나들며 사람들과 노닥거리고,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고, 감각적 경험에 사로잡혀 봄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과 풍경과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배울 수가 있다. 우리는 완전한 이상적 대상에서 보다는, 불완전한 인간들과 비틀린 물질적 감각에 쉽게 매료된다. 또 결함 없는 위대한 한 인물 보다는 평범한 여인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유의 지적인 활동이 강렬하게 활동하여, 대상들로부터 본질을 발견하고,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은, 그 비틀린 경험과 비균형적 경험 속에서 규정하기 어려운 징후들의 난입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재와 그 징후가 우리에게 직접 던져주는 것으로, 우리가 직접 풀어내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친구들이 모여 합의한 해답과는 판이하게 다른 해답을 도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 여인에게서 어떤 진실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녀와 매끈한 소통을 하거나, 합의된 대화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진실이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녀가 발산하는 낯선 징후들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잃어가며, 시간을 낭비해가며 알몸으로 달려드는 직관능력 덕분일 것이다. 선생님이 제시한 문제들 속에서는 그 무엇도 배울 수가 없다. 그렇게 의무와 노동에 사로잡힌 배움을 통해 얻은 진실은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반성적 노동이 만들어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인위적일 뿐이다. 그 진실은 그것을 배우는 나 자신과는 무관한 진실이며, 따라서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되었을 법한 임의적 진실에 불과하다.

진실이란 정다운 대화 속에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폭력 속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고통을 겪음으로써만, 통증이나 갈증이나 제지된 욕구를 통해서만, 그 추동적 힘에 직면해서만 비로소 의미와 진실을 찾으려 한다. 진리를 사랑한답시고 고통도 없이 달려드는 얼뜨기 속물 학자로부터는 그 무엇도 배울 것이 없다. 그 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말의 징후를 간파하고 질투에 빠진 남자가 참된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속물 학자로서는 결코 자신에게 가해오는 인상들에 아프지도 않고, 그것을 해석해야할 어떠한 필연적 운명적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질투에 빠진 남자는 인상과 징후들의 폭력에 맞서 그 누구보다도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질투의 고통만이 애인의 거짓말과 사랑의 진실을 찾는다. 진실이란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지배계급은 그 사회의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놀라운 경험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작동하듯이, 고통은 지성으로 하여금 진리와 의미를 찾도록 강요한다. 필연적 진실이 태어나려면, 우선 실재가 뿜어내는 징후의 폭력에 직면해야만 한다. 지성은 실재의 징후들로부터 어떤 강요를 받아야만 하고,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채, 모든 도구와 무기와 갑옷을 벗은 맨 몸으로 실재를 대면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지성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낌으로써만, 그 징후들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내고 진실의 근처로 다가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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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뜨(Roland Barthes)는 사진에 관한 한 에세이(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Eng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81)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가를 “푼크툼(punctum)"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나는 이 생소한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이 단어에 속하는 몇 가지 술어들을 찾아내었다. 사전적 정의로부터(점(點), 순간, 날카로운 것, 자극하거나 찌르는 것, . . .), 그것이 환기하는 의미까지(욕망의 부분대상, 물신주의적 환유, 프루스트적 의미에서 비자발적 추억을 불러들이는 징후, 사물들이 종합되는 순간 그어진 사선, 특정한 감정을 촉발하는 파문, . . .). 나는 이렇게 많은 술어와 의미들을 열거하고 난 후에 이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아마도 주체가 예술작품이나 인물과 같은 특정한 대상을 만나게 될 때 우연히 그를 자극하는 이미지. 또한 그것은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우연적이긴 하지만, 그가 발견한 이미지. 이제 나는 경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주 뇌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하나씩 되새겨보면서, 그것들이 푼크툼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곧 사라져 버리기가 십상이었고, 더구나 억지로 떠올린 이미지들로 가득 차 버려서 나를 기쁘게 하지도 못했다. 또 이미지들은 다른 의미들을 불러오지도 않고, 텅 빈 그림들만 내게 현시 될 뿐이었다. 결국 나는 푼크툼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했고, 몇몇의 그럴 듯한 술어들만 암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를 만날 때면 가끔 드나드는 식당이 있다. 그곳은 서구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 실내를 한껏 장식했고, 벽과 천장에는 커다란 서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테이블들 사이에 놓인 칸막이 난간에는 빈양주병들이 놓여있었다. 웨이터와 웨이트레스가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앉아있는 손님들로부터 새어나오는 수다스런 소리. 어둠침침한 조명들 사이사이를 휘감고 오르내리는 담배연기. 출처를 알 수 없는 멜로디. 주방과 테이블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 이 냄새는 서로 엉키고 섞여서 각각을 구별할 수 없이 그냥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되어 버렸다.

웨이터와 웨이트레스들은 검은색 조끼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목과 가슴부분, 그리고 팔은 흰색 와이셔츠가 드러나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실내의 조명과 잘 어울렸다. 대비가 강한 두 색은 산뜻해 보였지만, 아마도 눈을 자극하기 위해 고안된 지배인의 시각적 조작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걸친 옷에만 조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가 비슷한 톤으로 손님들과 사무적 대화를 나누었다. 제각각 다른 얼굴 모양새였음에도, 신분과 역할을 의미하는 동일한 미소가 한결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정중하게 손님들을 대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미소와 말투는 나를 불쾌하게, 아니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의 불쾌감은 따지고 보면 신경증적 불안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 뿐 아니라 나 역시 이러한 대면이 반복되면서 무감각해 질 것이다. 아무런 기대도 호기심도 없는 무감각.

특히 나를 불쾌하게 했던 것은 그 식당의 지배인쯤으로 보이는 사람의 태도였다. 손님이 오면 테이블로 안내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손님을 보면서 미리 마련된 미소를 내보인다. 언제나처럼 메뉴를 건넨 후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가,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옷매무새와 표정을 점검하고 나서 주문을 받으러 온다. 레스토랑이니 카페니 하는 곳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공통하지 않은 목적들을 가지고 각자만의 방을 가지기 위해 이곳에 모인다. 누가 이곳을 사교모임의 장소라 했을까? 현대 사회는 이곳을 특이한 시장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환상이 거래되고 있다. 이곳이 사교모임의 장소라는 말은 틀린 말이지만 또한 동시에 옳은 말이다. 어쨌든 그 지배인은 언제든지 이곳이 시장임을 상기시킨다. 그에 대한 나의 불쾌감은 아마도 거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몇 살 정도인지를 가늠해 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는 틀림없지만, 20대인지, 30대인지, 혹은 40대인지 조차 구분이 되질 않았다. 아마도 그가 취하는 제스처나 의복 등이 나이를 말해주는 어떠한 기호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었을 것이다. 동일하게 프로그램화된 그의 말투 역시 그를 어떤 사람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통일감을 자아내기 위해 고안된 유니폼 제도는 개인이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 완성을 이루었다.

이렇게 모호한 이 식당은 내게 불쾌감을 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했기 때문에, 내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불쾌감은 금세 사라질 수 있었으며, 나는 더 이상 이 실내의 분위기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떼기 시작했다. 이곳은 더 이상 나의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변화 없이 단단한 것들, 동일한 반복이 계속되는 것들은 언제나 지루함과 태만을 낳는다. 내가 이 고급 식당에서 보고 있는 시각적 조작이나 사무적 몸짓 그리고 모호함 등을 그럭저럭 긴 시간 동안 견딜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 모호함이 더 이상 나의 시선을 붙들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 역시 그들로부터 무감각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템이나 권력이 그렇게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그것은 저 먼 곳에서 신비한 광채를 띤 채 공포나 불안에 호소하기보다는, 아무런 미동도 들키지 않을 만큼 아주 가까이에서 지루함과 태만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사교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유한부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왜 그렇게 하품이 나오는지.

어쨌든 나는 이 식당에서 특별히 긴장하거나 호기심을 가지지 않은 채,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여느 때처럼 담소를 나눌 수가 있었다. 내 시선은 마주 앉은 친구의 모습과 실내 사람들의 움직임, 그리고 이리저리 바쁘게 걸어 다니는 종업원들을 번갈아 가며 훑어 내리고 있었다. 웨이터들은 경직된 표정으로 지배인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시선에 오랫동안 남아있지 않기 위해 괜히 이곳저곳을 움직인다. 그 지배인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휘하에 있는 종업원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어른스러운 몸짓과 어투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그는 자신의 앞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넌지시 친근한 어투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이 관계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지배인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더 나은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만 종업원들이 자신의 직분에 더 충실할 것을 요구했던 것  뿐이며, 그 직분에는 지배인에 대한 성심(존경은 아닐지라도)과 경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단순한 계약관계에 놓여있었지만, 그 계약의 심층에는 훨씬 더 한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농담은 음흉한 것이었고, 이를 눈치라도 챈 듯 종업원들은 모두 그 농담에 거리를 두곤 했다.

종업원들 중에는 근사한 모습을 한 웨이트레스가 있었다. 중간쯤 되어 보이는 키이지만, 날씬한 다리와 잘록 들어간 허리. 특히나 유니폼이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한껏 드러내어 주고 있었다. 유니폼이란 항상 저런 미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니폼이 우리를 참담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손님들을 접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종업원이기보다는, 젊은 귀부인이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해 만찬이라도 베풀고 있는 듯 우아해 보였다. 하얀 유니폼의 소매보다도 더 맑아 보이는 손등. 접시를 내리고 올리는 팔이 드러내는 포물선의 자취. 경박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살짝 안쪽으로 당겨 접은 턱. 아래로 떨군 눈매에 길게 드러난 검고 고운 속눈썹. 그녀는 이 모든 동작과 표정들을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했으며, 타인들의 시선과 갈채를 스스로 품은 채, 자신의 연출에 도취되어 나르시스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시선이 언제나 아래로 향해있는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눈동자는 늘 자기 자신으로 향해 있었다.

한참이나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지배인은 그 웨이트레스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아마도 그녀가 연출하거나 그녀 자신도 모르게 발산한 수많은 질적 이미지들에 매료되어 취해버렸을 것이다. 우선 그의 시선에 그녀가 들어올 때면 표정이 달라진다. 그녀가 다가와 그에게 사무적인 질문이나 의견을 말할라치면, 그는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다른 질문들을 도리어 던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그녀와 관계있는 모든 것들에 긴장하고 민감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때의 그 태도와 몸짓은 더 이상 지배인의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때로는 그녀의 동정심에 호소하기 위해, 또 때로는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지위를 이용해, 그는 끊임없이 그녀 주위에서 배회하며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어지러운 선분들을 허공에 그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지위와 권력이 보증했던, 그래서 단단하고 강하게만 보였던 그의 위엄은 너무나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렸으며, 자신의 달콤한 타락을 깨닫지 못한 채, 공포와 태만 위에 군림한 힘이 아니라 기쁨을 주관하는 더 위대한 힘에 굴복해야만 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뒤바뀌어 있었다.

그는 지금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특별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그 미소는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냉정히 가다듬으며, 최소한 당신과 나 사이에 별 일이 없기를 바라는, 그러한 두려움을 품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 푼크툼을 발견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미소는 어쩌면 나에게만 들켜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진하고 앳된 미소. 최초로 그 특별한 미소를 내가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푼크툼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쑥스러움을 가리기 위해 그녀에게 살짝 곁눈질을 하며 흰 치아를 드러냈지만, 그 표정은 나에게 그의 모든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혼자 있을 때, 친구들과 어울릴 때, 어렸을 적에 등등, . . . 자라온 일생만큼이나 긴 시간동안 그와 함께 있었을 그 표정을 다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러고 나니 그의 속살들이 마치 물속에서 색종이가 퍼지듯이 하나 둘씩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나이는 20대 후반쯤. 확실히 그는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저 웨이트레스를 사랑하고 있다. 특히 그의 손목에 찬 시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분한 복장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자유가 허용된 몇 안 되는 신체의 자투리 구역에, 그는 환심을 살만한 온갖 전리품을 달아놓고 싶었을 것이다. 젊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스포츠용 방수시계. 점잖은 양복 유니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에 걸린 핸드폰. 그녀에게 젊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그의 촌스러운 취향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동안 그와 함께 지낸다면 이러한 푼크툼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푼크툼은 순식간에 뚜렷이 돌출하기도 하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주체의 기억과 감각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떠나가 버린 사람을 사랑했음을 깨닫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 지배인은 내게 들켰던 것들 보다 더 강도 높은 푼크툼을 그녀에게서 보았으며, 그의 사랑은 아마도 이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더 이상 (어디든 널려있는 혹은 누구여도 상관없는)지배인으로서가 아니라 유일한 그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듯이, 푼크툼은 섬세한 눈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섬세한 눈을 가지게 한다. 그가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남다르듯이. 사랑이란 일종의 특이화(specialization)인데, 사랑과 관계하는 모든 용어들은 바로 저 의미를 향해 있다(그러나 부르주아 사회는 이 사랑을 경쟁과 독점적 소유의 문제로 해석해 버림으로써, 우리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푼크툼의 발견은 기쁨이나 사랑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를 통해 야비함이나 포악함 혹은 역겨움 등을 볼 수도 있다. 또한 사랑의 대상을 전혀 엉뚱한 존재로 치환해 버리기도 한다. 바르뜨는 앤디 워홀(Andy Warhole)이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는 사진(Duan Michael 1958)을 보면서 워홀의 손가락에 혐오감과 역겨움을 느꼈다(Barthes. Camera Lucida, 45). 손톱을 짧게 깎아 손끝의 살이 마치 손톱을 감싼 것처럼 둥글고 연하게 보이는 손. 그는 이 손가락과 관련된 앤디 워홀의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손가락을 닮은 다른 사람에 대한 혐오스러운 기억이 떠올려진 것일까? 현실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 보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더 많이 보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하고 슬픔을 주기도 한다. 어떠한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지배하여, 그 대상의 조야한 본질을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서 역겨움이라는 새디즘적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내 본성과 잘 어울리지 않는 다른 본성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나 메스꺼움이라고 할까?

어찌 되었든 이런 경우에도 푼크툼은 존재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집단적 환영이 만들어낸 우리의 망상이나 믿음을 변질시킨다. 그래서 나의 망상에서 비롯된 사랑하는 사람의 순수한 이미지조차 변질되어 생생한 실제의 장소에 위치하게 된다. 존재는 두 번 변질되어 불순한 이미지로 뒤바뀌는 것이다. 푼크툼은 존재를 이중으로 변질시키면서, 심지어 사랑조차도 타락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짙게 화장한 시체의 코에 살짝 내려앉은 검은 반점(Roland Barthes.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p. 25). 부패의 징후. 사랑으로 채색되었던 나의 신념과 최면은 이 점 하나로 인해 송두리째 전복되기 시작한다. 사랑의 대상은 평범한 존재가 되어 실제의 세계에 놓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푼크툼은 사랑을 지나 연민으로 가는 통로인 것 같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사진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분류방식, 미적 효과, 역사적 고찰 등)이 있지만, 우선 그것의 본질은 활동하지 않는 시간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사진이 미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라든가, 혹은 현재적 지각에 특별한 촉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도 사진은 과거와 관계를 맺고 있다. 사진을 이해하는데 있어 현상학적 관점이 개입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일단 사진 속에 담고자 하는 사물이 포착되고 나면, 그 포착된 대상물은 더 이상 살아있길 멈춘다. 사진 속의 객체들은 모두가 정지된 시간에 감싸인 채 얼어붙어 있다. 마치 저 풍경이 시간의 한 구역 혹은 이미지라도 된다는 듯이! 영화는 어떤가! 만일에 우리가 영화를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간주한다면, 영화의 실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가지게 될 것이다.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주려는 노력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을 테니까! 베르그송(H. Bergson)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것은 생명과 운동에 관하여 잘못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진과 영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살아있지 않은 사물에 실을 매달아 그것이 마치 움직이는 듯 보이게 하는 인형극과 같은 기술이,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정의된 영화보다는 훨씬 더 감동적일 것이다. 인형극은 차라리 죽음에 관한 유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영화나 인형극은 죽어있는 시간과 관계가 있음에도, 모두가 운동이나 시간과 직접적으로 호응한다. 그런데 사진은 경우가 좀 다르다. 사진은 존재로부터 그 본성인 시간의 지속을 따로 떼어내고 모든 영혼들을 빼앗아 박제해 놓은 것처럼 무미건조해 보인다. 동작이나 움직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며, 애초에 그러한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사진은 관념과 유사한 외연을 갖는다. 관념은 우선 사물을 운동성으로부터 분리하고 추상한다. 이는 운동이나 생명 그 자체를 다루는 경우에도 그렇다.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흐르는 실재를 경험 내부로 포섭하듯이, 관념은 운동과 시간을 공간적 범주로 고정시킨다. 마찬가지로 사진은 활동이 멈춘 사물의 순간적인 포즈(pose)를 포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상학적 에포케(epoche)라고나 할까? 풍경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모든 시간이 괄호 안에 묶여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 포착된 포즈는 사물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어떤 경우든지 포즈란 “대상물의 자세(태도)나 카메라를 다루는 사람의 테크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읽어 내려는 의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Editions du Seuil, 1981), p.78. 참고로, 이 책은 Richard Howard가 영어로 번역하여 Hill & Wang(New York)에서 1998년에 Camera Lucid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사진은 실제의 대상물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상학적이다. 사진에서의 포즈란 의식의 활동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 말하자면 현상학적 노에마(noe`me)이다. 반면에 영화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순간적인 자태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자태들로 끊임없이 대체되고 치환되면서, 지시되고 있는 사물의 포즈가 변질되어 노에마는 끊임없이 흐르게 된다. 영화에서의 컷(Cut)은 새로운 것들로 인해 그 고유한 자태를 박탈당하거나 거부된다. 영화가 운동 그 자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는 운동이나 시간 속에 순간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순간성에 관한 이 망상은 두 가지 이미지로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는 완전하고 결정된 순간으로서의 포즈 혹은 자태가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신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불완전하고 미결정된 순간으로서의 컷이 있다. 바로 감각적으로 포착된 것으로서의 물질적 순간이다. 또한 이 두 이미지는 운동을 설명하는(혹은 그것을 재구성하는) 두 가지의 관점을 나타내준다―운동에 관한 이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Cinema I 첫 장에 자세히 연구되어 있으므로, 나는 그 내용을 요약하는 식으로 활용하겠다. 전자의 경우에는 고전 철학의 관점인데, 여기서 운동은 culminating point, privileged instant, telos, acme` 등의 용어로 정의할 수 있는 정신적 사건들, 즉 지적인 요소들의 변증법적 질서 혹은 이상적인 종합으로 이해된다. 즉 운동이란 영원한 것으로서의 형상이나 이데아들 간의 이행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운동, 해소할 길 없는 모순 혹은 비존재로서의 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후자의 경우에는 현대 과학의 관점을 보여준다. 현대 과학은 운동을 이상적인 것들의 이행이나 종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도 불특정한 파편들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가령, 현대의 천문학은 하나의 궤도와 그것을 횡단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관계로 운동을 분석하였다(Kepler의 경우). 또 현대 물리학은 떨어지는 물체가 뒤덮어버리는 공간을 시간으로 연결하였다(Galileo의 경우). 현대 기하학은 직선 위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순간의 점의 위치, 즉 평곡선의 방정식으로 운동을 분석하거나(Descartes의 경우), 공간적 단면이나 구역(section)을 무한하게 근접시킴으로써 곡선 즉 운동을 분석하고 재구성하였다(Newton과 Leibniz의 경우). 어떤 경우든지 현대 과학은 자태들의 변증법적 질서가 아닌 불특정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으로 운동을 정의한 것이다. “현대 과학은 무엇보다도 . . . 시간을 독립변수(independent variable)로 취하려는 열망이라고 정의 되어야 한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Eng trans. Arthur Mitchell, 1954). p. 355.) 마찬가지로 사진과 영화의 존재론적 차이는 바로 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와 관계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완결된 풍경의 이미지로서의 포즈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물질적 파편으로서의 컷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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